*수사공 집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 산은 종종 생각한다.
그 때. 린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그 때. 묘하게 들떠 보이던 원과 여전히 눈 맞추길 어려워하던 린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숨겼던 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화사했던 그 후의 하루 반. 세자라는 짐을 떨쳐 버린 듯 평범하고 평온했던 원이 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 건넨 질문 한 가지.
[이대로 도망가자 할까. 도망가서 세자도 왕족도 아닌 한천과 수인으로 살자 하면.. 린에게 다 버려달라 그리 말하는 건데, 그 말.. 해도 될까.]
끝내 답하지 못한 그 질문에 그러라고, 그래 버리라고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
원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아니. 사실일 리 없었다. 온몸으로 오열하는 수사공과 전. 엎드린 가복들의 울음소리.. ..그 사이 창백히 누워있는 아이가 단이일 리 없었다. 다 꿈일 것이다. 하루 반 전, 장의와 진관이 두타산에 당도한 것도. 보낸 적 없는 서찰도. 타는 듯한 불안을 껴안고 쉬지 않고 달려와 보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 모두.
저도 모르게 휘청이는 원을 부축하는 손이 희게 질려 있다. 걱정된다며 부득불 따라온 산의 눈이 온통 붉었다. 그 뒤로는 진관이 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고, 그 어깨를 쥔 장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물고 있으며... 원은 멍하니 눈을 돌리다 숨을 멈춘다.
...린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휘청이는 등이 처연히 가라앉았다.
**
폐가에 다다른 송인이 허름한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예상대로 무석은 이미 꿇어앉은 채다. 송인은 화기가 몰린 눈으로 들고 온 검을 뽑아 들었다.
-분명 하지 말라 하였다!!
칼끝이 목에 닿고도 변명 한 마디가 없다.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이미 각오가 박힌 낯이다. 송인은 더운 숨을 뱉었다. 거짓서찰로 세자의 호위를 떼어내고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만 단을 잡고 있을 것. 자신의 명은 끝내 거기까지였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린다.
-어째서 내 명을 어긴 게냐. 누구 맘대로 이런 일을!!
-제가 했습니다.
등 뒤로 침착한 목소리가 울린다. 송인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부용이였다.
-무색 무취하여 흔적이 없는 약을 썼습니다.
-하지 말라 하였을 텐데.
-검흔은 후에 입힌 것입니다. 잠들 듯 고통없이 가셨습니다.
-옥부용!!!
잘 벼린 검이 부용을 향한다. 부용은 붉게 타오르는 눈을 응시하며 흐리게 미소했다.
-예. 맞습니다. 제가 한 일이니 저를 베셔야 합니다.
긴 침묵 끝에 높이 검이 들린다. 부용은 눈을 감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죽여야 뒷탈이 적은 것을 송인이 끝내 결심하지 못했을 때. 무석에게 약이 든 물통을 건넸을 때. 열병인 줄 안 무석이 약을 구하러 자릴 비운 새 죽은 단이의 몸에 떨리는 손으로 칼을 꽂아넣으며 곧 아가씨의 뒤를 따를 터이니 저승에서 죄를 빌겠다고...
-너부터 베어주랴.
음산한 음성에 눈을 뜬다. 한 번도 송인의 명을 거스른 적 없던 무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 부용을 베시면 후일을
-비키거라!
-..죽이는 게 맞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비켜라.
검집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다. 무석은 처음으로 단단히 송인을 마주봤다.
-단이 아가씨를 살리려 하신 게 대업을 위해섭니까. 지금 대업을 망쳐 부용을 베려 하시는 겁니까. ...그러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주군의 손에 부용의 피까지 묻힐 수는 없습니다.
송인의 눈이 전에 없이 떨린다. 대업. 고려에 순혈의 세자를 세우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언젠가부터 인간다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대업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기껍다 여겼다.
헌데. 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 먼 발치로 그를 보았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핏기없이 서 있는 얼굴에 심장이 흙바닥을 굴렀다. 몸이 떨리고 절로 입술이 물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 오래 되어 무엇인지 희미하기까지 한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철커덩. 검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얼굴을 가리며 입술을 무는 송인에 무석은 착잡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주군의 모습을 차마 다 볼 수가 없었다. 허나 부용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치맛단을 쥔 손이 새하얘지도록 송인만 바라보았다. 그가 공녀로 팔려가는 처녀들 뒤에서 빈주먹만 움켜쥐고 있을 때도,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을 교묘히 선동하여 뜻하는 바를 이룰 때도, 측근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 버릴 때도, 또한. 마음에 품은 지도 몰랐던 이를 잃을까 초라하게 어깨를 굳히고 있는 지금도. 그 무어라도 부용에겐 송인이었다.
**
-죽어?
-그렇다 합니다.
원성은 말을 잇지 못한다. 다과회 참석을 명하기 직전 사라졌기에 수사공이 어찌 알고 수를 썼나 괘씸해 했는데... 그 아이가 죽었단 말인가.
-알아볼까요.
조심스러운 후라타이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잇던 원성이 미간을 접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주상께서 수사를 명하실 것이니 그때 움직이거라.
충직하게 고갤 숙이는 후라타이의 곁에서 원성은 조용히 찻잔을 든다. 그 누이와 연을 맺어 세자의 마음을 멀게 하려 했거늘. ..린을 꼭닮은 아이었으니 제 집안에 휘둘리지 않고 빈의 자리도 제법 감당해내었을 것이고. ...누이를 지키고자 독로화도 불사치 않았건만 아깝게 되었구나. ..세자는 또 얼마나 마음이 상할고.. 찻잔 안으로 단이 제 누이나 다름없다던 원의 얼굴이 비친다. 오늘따라 다향이 참으로 씁쓸하였다.
**
왕가의 비보에 다과회는 취소되었다. 충렬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궐에서 사람을 보내주겠다 했으나 수사공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길 원했다. 문무백관은 앞다투어 조의를 표하며 범인을 잡아내야 한다 목소리를 높였다. 충렬은 범인을 색출하라 직접 명하였다. 단, 장례가 끝난 뒤로 미루라 했다.
장례는 수사공의 지위에 맞지 않게 조촐히 치뤄졌다. 그럼에도 개경의 모든 이들은 하루 아침에 딸자식을 잃은 수사공을 안타까워하며 비명에 간 단의 이야기에 눈물을 지었다.
단의 몸이 한 줌 재로 변한 날. 언땅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
-먹으라니까!!
직접 수저를 들어 입 앞까지 들이밀어도 미동도 없다. 전은 세게 그릇을 내려놓고 린의 어깨를 쥐었다. 그새 볼품없어진 어깨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형제는 형제였다. 단이 죽어버린 지금에 와선 더더욱. 전은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린을 억지로 돌려앉힌다.
-이 방에서 죽을 셈이냐?!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단의 방에 앉은 지 벌써 닷새째다. 수사공도 몸져 누웠는데 린까지 이러고 있으니 전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제게도 세상 귀한 누이였다. 세자와 척을 지고는 맘껏 다정하지도 못한, 아깝고 귀한 아이였다. 헌데, 저도 이리 억장이 무너지는데 매사 저보다 어른스러웠던 린이 이러고 있으니..
-나도 누이를 잃었고 아버님은 자식을 잃으셨다!! 우리라도 딛고 일어나 단이를 그리 만든 놈을 잡아내야지!! 우리 단이.. 그 불쌍한 아이를..
기어이 눈가를 붉히는 전을 린이 빛바랜 눈으로 응시하는데.
-...내가 하면 안 될까.
전은 사납게 문가를 노려본다. 수척해진 낯까지 역겹게 비치는 원이었다.
-어찌..어찌 여길...
물증은 없으나 전은 단을 죽인 게 원성전이라 확신했다. 그 여자였다. 단을 공녀로 보내려 했던 그 여자. 다과회에 부르려 했다는 것은..하! 그 말을 누가 믿으랴. 어느 멍청한 놈이 믿으랴. 다들 원성전의 기세에 눌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이것은 복수다. 제 명을 어긴 분풀이를 기어이 한 것이다. 전은 시뻘개진 눈으로 원을 노려본다. 시퍼런 분노를 쏟아내도 동요없는 원에, 전은 더 보고 있다간 주먹이라도 날릴 듯하여 인사도 없이 원의 어깨를 밀치고 나갔다. 장의와 진관을 물리고 왔기에 제재를 가하는 이도 없었다.
원은 천천히 린 앞에 섰다. 그 오랜 세월 앉으라는 말 없이는 앉지도 않던 이가 일어나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원은 조용히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린아.
단의 침상만 바라본다. 원은 꽉 눈을 감았다 뜨며 린의 손을 찾아 쥐었다. 온기가 없는 손이다. 원은 붉어진 눈가로 다시 목을 울렸다.
-린아..
-......
부름에 답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린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다. 원은 린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여윈 손에 이마를 대며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충렬의 지시로 움직이는 조사단 외에 원 또한 금과정을 총동원하여 단의 살해범을 찾고 있으나.. 소문을 알고 있다. 내 어머니가 그리 했다는 소문. ..올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나, 반드시 아닐 것이나 그럼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빈 방에서 단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고 린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 와중에도, 이리 온 몸이 부서질 듯 단이 그리운 와중에도 린을 잃을까 그것이 제일 두려운 제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 소문이 아니라 한들 단의 죽음에 제가 일조한 거나 다름없는데. 두타산에 가지 않았다면 그 거짓서찰이 단을 위험에 빠뜨릴 일도 없었을 텐데..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이기까지 하면 나는 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이냐..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에 원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힐 쯤이었다.
벌떡 일어난 린이 문을 박찬다. 원은 황급히 린을 따랐다. 뜰 아래 맨발로 선 린이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단아..
원은 우뚝 굳었다. 뜰에는 겨울내가 가신 바람 뿐이다. 하지만 린의 눈에는 보였다. 두타산으로 가기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다녀오세요.>
..단이었다. 단이가 서 있었다. 커서는 한 번 제대로 손 잡아준 적도 없는 누이. 그날도, 전에게 소리치고 제 맘이 상해 눈물짓던 그날조차도..
<또 다쳐오시면.. 정말 화낼 겁니다?>
린은 설핏 웃는다. 언젠가부터 이 작은 녀석이 한 번씩 자란 티를 냈다. 손윗누이처럼 약을 챙기고 먹을 걸 챙기고 옷을 챙기고.. 집에 없는 날이 많아 그랬을 것이다. 혼자 여기 앉아, 어릴 때처럼 가지 말라 울지도 못하고, 따라 가겠다 떼쓰지도 못하고.. 일곱인가. 옷자락을 정말 끈질기게도 잡고 늘어졌었다. 시전에 또 가고 싶다고, 같이 놀자고..
<나도 갈래요! 오라버니 나도!!>
홀린 사람처럼 한 발 내딛던 린이 자리에 얼어붙는다. 단이 없다. 방금 전까지 이 옷자락을 쥐고,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단아? ...단아.. 어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 린을 원이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린아. 제발..
하나뿐인 음성이 목덜미에 닿는다.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 린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도 그대로 앉아 린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여기서, 린의 앞에서 울 순 없다.
-저하..
그제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 찢겨있다. 원은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래.. 나다.
-..단이가 없습니다..
-......
-..곧 산수유가 지천으로 필 것인데.. 그 녀석이 좋아하는 꽃이 사방에 가득할 것인데.. 단이가.. 단이가 오질 않습니다.. 단이가..
원은 마른 목소리로 연신 단이만 중얼거리는 린을 돌려 안는다. 린에게 어떤 누이였는지 너무 잘 알아 괜찮아질 거라고도 할 수 없다. 그만하라고도 할 수 없다. 무슨 말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두 팔로, 힘주어 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어쩌죠.. 어떡하죠.. 어떡합니까, 우리 단이..
조금씩 토해지는 울음에 더, 더 품으로 끌어안는다. 이제야 떨리기 시작한 몸이 마음놓고 울 수 있도록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자 윽윽, 안으로 먹히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원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울어. 소리 내. ..그래도 돼.
가늘게 오열이 쏟아진다. 원은 무너져내리는 린을 쓸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지 오라비 뺏어가지 말라며 노려보던 당돌한 꼬마는 참 잘도 울고 잘도 웃었다. 이 집이 궐보다 편했던 것은 어쩌면 네 덕이겠지. 나를 세자가 아닌 오라비로, 한 사람으로 편히 대해 준 네가 있어...
....단아.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아무한테나 사과하시면 안 되잖아요>
<단이 니가 왜 아무나야. 내 누인데>
내.. 누이.
원은 눈물이 린에게 닿지 않게 고개를 들며 피나게 입술을 베어물었다. 이제야 처음 단이를 보내는 린이 맘 편히 슬퍼할 수 있게, 그거라도 할 수 있게. 맞은편. 중문 뒤에서 주먹을 움켜쥔 송인이 어두운 눈으로 돌아서는 것도 모른 채 날이 저물도록 린을 안고만 있었다.
-ing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 산은 종종 생각한다.
그 때. 린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던 그 때. 묘하게 들떠 보이던 원과 여전히 눈 맞추길 어려워하던 린 사이에서 복잡한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숨겼던 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눈부시게 화사했던 그 후의 하루 반. 세자라는 짐을 떨쳐 버린 듯 평범하고 평온했던 원이 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 건넨 질문 한 가지.
[이대로 도망가자 할까. 도망가서 세자도 왕족도 아닌 한천과 수인으로 살자 하면.. 린에게 다 버려달라 그리 말하는 건데, 그 말.. 해도 될까.]
끝내 답하지 못한 그 질문에 그러라고, 그래 버리라고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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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아니. 사실일 리 없었다. 온몸으로 오열하는 수사공과 전. 엎드린 가복들의 울음소리.. ..그 사이 창백히 누워있는 아이가 단이일 리 없었다. 다 꿈일 것이다. 하루 반 전, 장의와 진관이 두타산에 당도한 것도. 보낸 적 없는 서찰도. 타는 듯한 불안을 껴안고 쉬지 않고 달려와 보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 모두.
저도 모르게 휘청이는 원을 부축하는 손이 희게 질려 있다. 걱정된다며 부득불 따라온 산의 눈이 온통 붉었다. 그 뒤로는 진관이 울지도 못한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고, 그 어깨를 쥔 장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물고 있으며... 원은 멍하니 눈을 돌리다 숨을 멈춘다.
...린아...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휘청이는 등이 처연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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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에 다다른 송인이 허름한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예상대로 무석은 이미 꿇어앉은 채다. 송인은 화기가 몰린 눈으로 들고 온 검을 뽑아 들었다.
-분명 하지 말라 하였다!!
칼끝이 목에 닿고도 변명 한 마디가 없다. 오히려 눈을 감아버리는 게 이미 각오가 박힌 낯이다. 송인은 더운 숨을 뱉었다. 거짓서찰로 세자의 호위를 떼어내고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만 단을 잡고 있을 것. 자신의 명은 끝내 거기까지였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린다.
-어째서 내 명을 어긴 게냐. 누구 맘대로 이런 일을!!
-제가 했습니다.
등 뒤로 침착한 목소리가 울린다. 송인은 작게 침음을 흘렸다. 부용이였다.
-무색 무취하여 흔적이 없는 약을 썼습니다.
-하지 말라 하였을 텐데.
-검흔은 후에 입힌 것입니다. 잠들 듯 고통없이 가셨습니다.
-옥부용!!!
잘 벼린 검이 부용을 향한다. 부용은 붉게 타오르는 눈을 응시하며 흐리게 미소했다.
-예. 맞습니다. 제가 한 일이니 저를 베셔야 합니다.
긴 침묵 끝에 높이 검이 들린다. 부용은 눈을 감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죽여야 뒷탈이 적은 것을 송인이 끝내 결심하지 못했을 때. 무석에게 약이 든 물통을 건넸을 때. 열병인 줄 안 무석이 약을 구하러 자릴 비운 새 죽은 단이의 몸에 떨리는 손으로 칼을 꽂아넣으며 곧 아가씨의 뒤를 따를 터이니 저승에서 죄를 빌겠다고...
-너부터 베어주랴.
음산한 음성에 눈을 뜬다. 한 번도 송인의 명을 거스른 적 없던 무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 부용을 베시면 후일을
-비키거라!
-..죽이는 게 맞았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비켜라.
검집을 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다. 무석은 처음으로 단단히 송인을 마주봤다.
-단이 아가씨를 살리려 하신 게 대업을 위해섭니까. 지금 대업을 망쳐 부용을 베려 하시는 겁니까. ...그러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주군의 손에 부용의 피까지 묻힐 수는 없습니다.
송인의 눈이 전에 없이 떨린다. 대업. 고려에 순혈의 세자를 세우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였다. 언젠가부터 인간다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대업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기껍다 여겼다.
헌데. 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달려 먼 발치로 그를 보았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핏기없이 서 있는 얼굴에 심장이 흙바닥을 굴렀다. 몸이 떨리고 절로 입술이 물렸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 오래 되어 무엇인지 희미하기까지 한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철커덩. 검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얼굴을 가리며 입술을 무는 송인에 무석은 착잡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주군의 모습을 차마 다 볼 수가 없었다. 허나 부용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치맛단을 쥔 손이 새하얘지도록 송인만 바라보았다. 그가 공녀로 팔려가는 처녀들 뒤에서 빈주먹만 움켜쥐고 있을 때도,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을 교묘히 선동하여 뜻하는 바를 이룰 때도, 측근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 버릴 때도, 또한. 마음에 품은 지도 몰랐던 이를 잃을까 초라하게 어깨를 굳히고 있는 지금도. 그 무어라도 부용에겐 송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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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그렇다 합니다.
원성은 말을 잇지 못한다. 다과회 참석을 명하기 직전 사라졌기에 수사공이 어찌 알고 수를 썼나 괘씸해 했는데... 그 아이가 죽었단 말인가.
-알아볼까요.
조심스러운 후라타이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잇던 원성이 미간을 접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주상께서 수사를 명하실 것이니 그때 움직이거라.
충직하게 고갤 숙이는 후라타이의 곁에서 원성은 조용히 찻잔을 든다. 그 누이와 연을 맺어 세자의 마음을 멀게 하려 했거늘. ..린을 꼭닮은 아이었으니 제 집안에 휘둘리지 않고 빈의 자리도 제법 감당해내었을 것이고. ...누이를 지키고자 독로화도 불사치 않았건만 아깝게 되었구나. ..세자는 또 얼마나 마음이 상할고.. 찻잔 안으로 단이 제 누이나 다름없다던 원의 얼굴이 비친다. 오늘따라 다향이 참으로 씁쓸하였다.
**
왕가의 비보에 다과회는 취소되었다. 충렬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궐에서 사람을 보내주겠다 했으나 수사공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길 원했다. 문무백관은 앞다투어 조의를 표하며 범인을 잡아내야 한다 목소리를 높였다. 충렬은 범인을 색출하라 직접 명하였다. 단, 장례가 끝난 뒤로 미루라 했다.
장례는 수사공의 지위에 맞지 않게 조촐히 치뤄졌다. 그럼에도 개경의 모든 이들은 하루 아침에 딸자식을 잃은 수사공을 안타까워하며 비명에 간 단의 이야기에 눈물을 지었다.
단의 몸이 한 줌 재로 변한 날. 언땅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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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라니까!!
직접 수저를 들어 입 앞까지 들이밀어도 미동도 없다. 전은 세게 그릇을 내려놓고 린의 어깨를 쥐었다. 그새 볼품없어진 어깨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형제는 형제였다. 단이 죽어버린 지금에 와선 더더욱. 전은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린을 억지로 돌려앉힌다.
-이 방에서 죽을 셈이냐?!
먹지도 자지도 않고 단의 방에 앉은 지 벌써 닷새째다. 수사공도 몸져 누웠는데 린까지 이러고 있으니 전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제게도 세상 귀한 누이였다. 세자와 척을 지고는 맘껏 다정하지도 못한, 아깝고 귀한 아이였다. 헌데, 저도 이리 억장이 무너지는데 매사 저보다 어른스러웠던 린이 이러고 있으니..
-나도 누이를 잃었고 아버님은 자식을 잃으셨다!! 우리라도 딛고 일어나 단이를 그리 만든 놈을 잡아내야지!! 우리 단이.. 그 불쌍한 아이를..
기어이 눈가를 붉히는 전을 린이 빛바랜 눈으로 응시하는데.
-...내가 하면 안 될까.
전은 사납게 문가를 노려본다. 수척해진 낯까지 역겹게 비치는 원이었다.
-어찌..어찌 여길...
물증은 없으나 전은 단을 죽인 게 원성전이라 확신했다. 그 여자였다. 단을 공녀로 보내려 했던 그 여자. 다과회에 부르려 했다는 것은..하! 그 말을 누가 믿으랴. 어느 멍청한 놈이 믿으랴. 다들 원성전의 기세에 눌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이것은 복수다. 제 명을 어긴 분풀이를 기어이 한 것이다. 전은 시뻘개진 눈으로 원을 노려본다. 시퍼런 분노를 쏟아내도 동요없는 원에, 전은 더 보고 있다간 주먹이라도 날릴 듯하여 인사도 없이 원의 어깨를 밀치고 나갔다. 장의와 진관을 물리고 왔기에 제재를 가하는 이도 없었다.
원은 천천히 린 앞에 섰다. 그 오랜 세월 앉으라는 말 없이는 앉지도 않던 이가 일어나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는다. 원은 조용히 한 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린아.
단의 침상만 바라본다. 원은 꽉 눈을 감았다 뜨며 린의 손을 찾아 쥐었다. 온기가 없는 손이다. 원은 붉어진 눈가로 다시 목을 울렸다.
-린아..
-......
부름에 답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린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다. 원은 린을 차마 다 보지 못하고 여윈 손에 이마를 대며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충렬의 지시로 움직이는 조사단 외에 원 또한 금과정을 총동원하여 단의 살해범을 찾고 있으나.. 소문을 알고 있다. 내 어머니가 그리 했다는 소문. ..올 수가 없었다. 아닐 것이나, 반드시 아닐 것이나 그럼에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빈 방에서 단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고 린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 와중에도, 이리 온 몸이 부서질 듯 단이 그리운 와중에도 린을 잃을까 그것이 제일 두려운 제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 소문이 아니라 한들 단의 죽음에 제가 일조한 거나 다름없는데. 두타산에 가지 않았다면 그 거짓서찰이 단을 위험에 빠뜨릴 일도 없었을 텐데.. 만에 하나 그 소문이 사실이기까지 하면 나는 대체 네게.. 무슨 짓을 한 거란 말이냐..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에 원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힐 쯤이었다.
벌떡 일어난 린이 문을 박찬다. 원은 황급히 린을 따랐다. 뜰 아래 맨발로 선 린이 허공으로 손을 뻗는다.
-단아..
원은 우뚝 굳었다. 뜰에는 겨울내가 가신 바람 뿐이다. 하지만 린의 눈에는 보였다. 두타산으로 가기 전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다녀오세요.>
..단이었다. 단이가 서 있었다. 커서는 한 번 제대로 손 잡아준 적도 없는 누이. 그날도, 전에게 소리치고 제 맘이 상해 눈물짓던 그날조차도..
<또 다쳐오시면.. 정말 화낼 겁니다?>
린은 설핏 웃는다. 언젠가부터 이 작은 녀석이 한 번씩 자란 티를 냈다. 손윗누이처럼 약을 챙기고 먹을 걸 챙기고 옷을 챙기고.. 집에 없는 날이 많아 그랬을 것이다. 혼자 여기 앉아, 어릴 때처럼 가지 말라 울지도 못하고, 따라 가겠다 떼쓰지도 못하고.. 일곱인가. 옷자락을 정말 끈질기게도 잡고 늘어졌었다. 시전에 또 가고 싶다고, 같이 놀자고..
<나도 갈래요! 오라버니 나도!!>
홀린 사람처럼 한 발 내딛던 린이 자리에 얼어붙는다. 단이 없다. 방금 전까지 이 옷자락을 쥐고,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단아? ...단아.. 어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는 린을 원이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린아. 제발..
하나뿐인 음성이 목덜미에 닿는다.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의 숨결이.. 린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도 그대로 앉아 린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여기서, 린의 앞에서 울 순 없다.
-저하..
그제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 찢겨있다. 원은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그래.. 나다.
-..단이가 없습니다..
-......
-..곧 산수유가 지천으로 필 것인데.. 그 녀석이 좋아하는 꽃이 사방에 가득할 것인데.. 단이가.. 단이가 오질 않습니다.. 단이가..
원은 마른 목소리로 연신 단이만 중얼거리는 린을 돌려 안는다. 린에게 어떤 누이였는지 너무 잘 알아 괜찮아질 거라고도 할 수 없다. 그만하라고도 할 수 없다. 무슨 말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두 팔로, 힘주어 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어쩌죠.. 어떡하죠.. 어떡합니까, 우리 단이..
조금씩 토해지는 울음에 더, 더 품으로 끌어안는다. 이제야 떨리기 시작한 몸이 마음놓고 울 수 있도록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자 윽윽, 안으로 먹히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원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울어. 소리 내. ..그래도 돼.
가늘게 오열이 쏟아진다. 원은 무너져내리는 린을 쓸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지 오라비 뺏어가지 말라며 노려보던 당돌한 꼬마는 참 잘도 울고 잘도 웃었다. 이 집이 궐보다 편했던 것은 어쩌면 네 덕이겠지. 나를 세자가 아닌 오라비로, 한 사람으로 편히 대해 준 네가 있어...
....단아.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아무한테나 사과하시면 안 되잖아요>
<단이 니가 왜 아무나야. 내 누인데>
내.. 누이.
원은 눈물이 린에게 닿지 않게 고개를 들며 피나게 입술을 베어물었다. 이제야 처음 단이를 보내는 린이 맘 편히 슬퍼할 수 있게, 그거라도 할 수 있게. 맞은편. 중문 뒤에서 주먹을 움켜쥔 송인이 어두운 눈으로 돌아서는 것도 모른 채 날이 저물도록 린을 안고만 있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