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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비사자

샤2 2017. 1. 8. 23:55

오른쪽은 야채 듬뿍, 왼쪽은 소고기 듬뿍. 세팅 완벽하고 냄새 죽이고. 구박 받으며 큰 것도 도움이 된다니까. 두 개의 흰 그릇을 흐뭇하게 보던 은탁이 점점 울상으로 변한다.
...아무튼 이놈의 성질머리. 화를 내려면 앞뒤 상황이나 보고 듣고 내든가. 어떻게 있는 대로 냅다, 아주 기가 살았지 살았어...
은탁의 이러한 자기비판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사자에 의하면 그날의 눈물은 밝힐 수 없는 어떤 작용에 의한 것으로 도깨비에겐 아무 책임이 없었다고 하니... ...어떡하지, 나...

-죽이네.
-악!!!

반사적으로 던진 나무주걱을 가볍게 잡아낸 분은 며칠 그림자도 안 비치던 도깨비다. 은탁은 까만 터틀넥을 향해 공손히 손을 모았다.

-오, 오셨어요.
-그렇게 던져서 어디 맞겠니.
-..인기척이 없어서 놀래가지구..
-내가 사람이냐. 인기척 있게.
-그렇죠. 사람이라기엔 늘 너무 빛나시죠. 특히 오늘은 더,
-뭐 이쁘냐며.
-... 그날은 제가 좀 실수가 많았죠..
-경솔하기 이를 데 없었지.
-....그래서 만들어 보았답니다. 영양만점, 맛도 좋은,
-죽이로군. 내 인생에 다신 없을 거라던 그 죽.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그렇게까지 말 들리던데. 목소리가 아주 쩌렁쩌렁 잘 들리던데.
-...죄송합니다. 저승 아저씨 우는 거 보고 놀래가지구..
-너 걔 좋아해?

은탁은 두어 번 눈을 꿈뻑거린 후에야 되물을 수 있었다.

-개요? 멍멍 개?
-듣기평가는 제대로 봤냐.
-아 진짜. 수능결과 기다리는 고3한테.
-너 나한테 되게 송구하던 중이었던 거 같은데.
-암요.

다시 공손하게 고갤 숙이던 은탁은 공손함을 잠시 꺼두고 목을 세웠다.

-그럼 정말 저승 아저씨 말한 거에요?
-맥락상 그게 맞지.
-그러니까, 내가 저승 아저씨 좋아하냐고 물어본 거라구요?
-수능 답 그냥 불러줄 걸 그랬다.

은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저희가 연인보다 먼, 계약보다는 가까운 그런 사이라고 해도, 그래도 내가 명색이 도깨비 신분데 어떻게 딴 남자 좋아하냔 질문을 아침메뉴 묻듯 단조롭게 할 수 있나, 라는 서운함은 1도 아니다.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 듣기만 해도 슬프고 찬란한 로맨스가 연상될 이들 사이에 로맨스 같은 건, 사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왜 때문에 말문이 막혔느냐. 꼭 그거 같았다. 상황도, 의도도 그거 아니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거처럼 들렸다. 애들한테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그거. 은탁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거.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신기하네요. 평생 못 들어볼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도 들어. 언어영역.
-그거 아니구요.
-내년 거야. 재수 확률 높아 보이는데 미리,
-아 정말. 말이 씨되게.
-인간의 송구함은 어찌 이리 짧은지.
-송구한데 자꾸 수능 얘기하니까 그렇죠!
-너의 송구함이 수능만 못한 게지.
-궁서체 접으시죠. 화 풀린 거 다 아는데.
-누구 맘대로 풀어.
-진짜 화나면 말 안 걸잖아요. 눈도 안 마주치고 투명인간 취급하고.

도깨비는 그제서야 피식 웃었다.

-수능은 몰라도 아사할 일은 없겠네. 눈치가 빨라서.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그날은 정말 다시 죄송합니다. 경솔하고 무례했어요.
-저승 아저씨 보고 놀라서 말이지.
-놀라죠, 그럼. 안 그래도 흰 얼굴이 더 하얘져서 세상 잃은 것마냥 뚝뚝. 아저씬 안 놀랐어요?
-뭐..

도깨비는 사자의 방쪽을 힐끔 보고 다시 은탁을 향했다.

-그래서 어떤데.
-왜 그래요. 그런 질문은 진짜 사귀는 사이에서나 하는 거라구요.

웃자고 한 말에 돌아오는 건 빤한 시선 뿐. 은탁은 어색하게 입고리를 올렸다.

-맞잖아요. 아저씨랑 나랑 연인 아닌 거..

그래도 여전히 빤한 눈에 은탁은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설마.. 이 아저씨가 나를.. 억겁같은 3초가 흐르고 도깨비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취소야.
-네?

뭘. 뭐가 취손데. 도깨비 신부는 맞지만 연인은 절대 아니라고 했던 그거?! 은탁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눈 앞의 남자가 아무리 멋지다 한들 은탁에겐 아빠 엄마나 다름없다. 한 번 잃어 평생 없을 줄 알았던.

-...아저씨. 미안하지만 난 꿈이 있어요. 버려지고 찢겨 남루,
-그 노래 아는데, 나.
-...제가 아무리 한 달 남짓이면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고 해도 아저씬 더, 아니 쭉 망설이셔야
-그 노래도 알고.
-...물러나세요. 저 조금씩 사나워,
-으르렁댈 것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취소라면서요.
-그래. 아사할 일은 없겠다는 거, 눈치 빠르다는 거 그거 취소라고.

은탁은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아무리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집이라도 쥐구멍 하나는 있을 거다. 암. 있고 말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쥐구멍은 있다는데 지금 막 하늘이 무너졌잖아? ...하나만요. 한 번만요. 제 나이 이제 겨우 스물 문턱인데 수치사는 너무하잖아요. 하지만 이 간절한 기도의 답은 지나치게 진지한 목소리다.

-부끄러워 할 거 없다. 나같은 존재와 살며, 게다가 신부라는데 연정을 품을 수도 있지. 다만 너무 길게 하진 마라.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신부라는 이름과 이것뿐이니. 자. 언어영역 1번.
-..그만해주실래요. 충분히 쪽팔리거든요. 이상한 건 물어가지구..
-그자 좋아하냐는 거? 생의 뒷문을 열어주려던 자에게 뭐 그리 정이 깊냐는 비아냥을 짧게 줄여본 건데. 길게 할 걸 그랬어?
-...깔끔하게 이혼하죠.

도깨비는 피식 웃으며 은탁의 이마를 튕겼다.

-어린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개 중 헛소리가 일품이구요.
-돋보이긴 했지.
-저승 아저씨한테 이 기억 지워달라고 하면 들어주실까요. 감당하고 살 자신이 없는데.
-감당 못할 기억이 있어도 생은 이어져. 보다시피.
-...이 와중에 그렇게 나오면 제가 뭐가 돼요..
-글쎄. 재수생?
-아 진짜!
 
세상 쪽팔리지만 않으면 더 화낼 건데. 은탁은 뜨거워진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암튼 방금 그건 잊어주세요.
-신이 허락하면.
-잊은 척이라두요.
-척에 소질이 없어서.
-무슨 수호신이 이렇게 치사해!
-신은 원래 그래.
-..죽 두 그릇 드릴게요.
-됐고. 질문에나 답해봐. 그래서 어때, 저승 그자는.
-...아. 그거 물은 거구나. 첨부터 그렇게 물어 보지.
-그렇게 물었거든.
-몰라요. 말 안해요.

삐죽 입술을 내밀고 팩 고개를 돌린 은탁의 뺨이 붉게 물들어있다. 귀엽기는. 도깨비는 속으로 웃으며 귀찮은 척 손을 내저었다.

-소질은 없지만 노력해볼게. 척.
-그날은 계속 우셨구요. 다다음날인가 잠깐 마주쳤을 땐 안색이 별로. 어둡더라구요.
-...왜 그랬는지 들은 건 없고?
-안 그래도 물어봤는데 뭐가 작용이 됐다구. 근데 말할 순 없다구. 암튼 아저씨 잘못은 아니라구요.
-..아니래? ...근데 왜 피하지..
-피해요? 저승 아저씨가?
-며칠 동안 한 번을 안 마주쳤어. 첨에 너처럼 쪽팔려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노력하겠다면서요. 10초도 안 지났거든요.
-아무데나 있던 자가 아무데도 없어. 아침도 저녁도 거르고 드라마도 건너 뛰고. 방에도 없고 찻집에도 없고 닭집에도 없고. ..혹시나 했는데 넌 마주쳤다니 이젠 확신이 드네.
-저승 아저씨 찾아 다녔어요?
-찾아 다녔다기보다, ..

도깨비는 말을 멈추고 빙그레 웃는 은탁을 떨떠름하게 훑어봤다.

-뭐. 왜.
-이거저거 하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세상 차갑게 굴다가 결국 치료해주고. 걱정되면 그냥 걱정하지 뭘 아닌 척 해요? 수줍어서 그래요?
-...수 뭐?
-자. 손.

얼결에 내민 손에 쟁반이 놓여진다. 은탁은 해맑게 웃으며 두 개의 그릇을 올려놨다.

-가보세요. 아까 물 마시고 들어갔어요.
-...뭘 또 오해하나본데
-전 알바갔다 덕화오빠랑 영화보고 늦게 들어올게요. 얘기 잘 나누세요. 수줍어 마시구.
-아까부터 자꾸 누구한테 수줍다는
-미안하다, 괜찮냐, 왜 그랬냐, 걱정했다. 뭐든 하세요. 해야 알죠. 걱정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거. 기대도 된다는 거.
-나도 말 좀 하자!
-네. 하세요. 마주 앉아 다정하게 죽 드시면서.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잡을 새도 없이 후다닥 은탁이 나가고. 도깨비는 죽을 내려다봤다.
나 죽 싫어한다고...

**

괜찮아? 왜 그런 거야, 걱정되게.
 ...아니야. 다시.
괜찮냐, 미안하게 왜 그런 건데. 걱정했잖아.
...이것도 별로. 그럼...

-내 방 앞에서 뭐해.
-걱정되게 왜 괜찮냐!

사자는 문에 붙은 도깨비를 가만 건너본다. 그 시선 속에서 도깨비는 잠시 은탁을 떠올렸다. 아까 내가 무척 잘못했군.

-..크흠. 방, 방에 있다던데.
-......
-..생각이 깊어 말이 헛나온 것이니 잊어줬으면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

왜 진작 쥐구멍을 안 만들었을까 후회하는 사이 사자는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도깨비는 주춤주춤 그 뒤를 따랐다.

-왜.
-어?
-왜 들어오냐고.

확실히 안 좋아 보인다. 얼굴빛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도깨비는 일단 쟁반을 들어 보였다.

-은탁이가. 너 주라고. 영양이 만점이라고.
-...고기 안 먹는데.
-그건 내 거. 같이 먹으라고.

더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깨비의 기분도 어두워진다. 환하게 켜진 불이 무색할 만큼. 도깨비는 쟁반을 내려놓고 사자 앞에 섰다.

-뭔데.
-...뭐가.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말할 기분이 아니면..

이 자를 찾아다닌 게 아니었다. 갑자기 드라마가 재미있었고 갑자기 차가 마시고 싶었고 갑자기 닭이 먹고 싶었다. 그뿐이라, 제 생각에도 어이없는 이유를 대가며 내내 사방을 헤맸다. 알 수 없이 답답하고 초조했다. 오열하던 얼굴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말해. 왜 그러는데. 왜 울고 왜 우울하고 왜 피하는데.

무표정한 눈동자가 흔들린 건 찰나였지만 도깨비는 놓치지 않는다.

-피한 적 없어. 우울한 건 일 때문이고. 그날 일은... ...나중에 하자. 일 나가야 돼.

도깨비는 검은 코트를 입는 사자를 말없이 지켜보다 불쑥 모자를 채갔다.

-뭐하는 거야.

손을 잡으려다 멈칫 팔을 잡아끌자 힘이 없는 건지 어이가 없는 건지 순순히 끌려온다. 도깨비는 사자를 침대에 앉히고 멀찍한 쟁반을 지척으로 끌어와 허공에 고정시켰다.

-먹어.
-.....
-알겠으니까, 안 물을 테니까 먹고 나가라고.

두 눈이 이번에는 도깨비가 아니라도 알아챌 만큼 크게 요동친다. 평소라면 미쳤냐, 아프냐, 둘 다냐 꽤나 시끄러웠을 텐데. 그러면 나는 이번만큼은 할 말이 없을 테고. 미친 것도 같고 아픈 것도 같다. 초조함도 답답함도 저자의 마른 등보다 앞서지 못하니 둘 다일 수도 있고. 도깨비는 씁쓸히 웃으며 숟가락을 건넸다.

-자.

숟가락을 내려다보는 낯색이 칼이라도 보는 듯하다. 도깨비는 한숨을 삼켰다. 아까 은탁에게 거짓말한 게 있다. 그는 척에 능했다. 도깨비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배고프다. 팔도 떨어지겠고.
-.....
-나도 되게 즐거워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은탁이가 걱정이 많아. 오해도 깊고. 설명하려면 기니 대충 같이 먹자.
-.....
-...고집은 암튼. 자자. 여기. 됐냐? 장난 한 번 쳤다고 사내대장부가 여태 꽁해서는. 먹어. 당근조각 하나까지 싹 다. 안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생사에 열심히 관여해볼라니까.

장난스럽게 눈을 부라린 도깨비가 먼저 숟가락을 든다. 맛있네, 음식 잘 한다더니 거짓말은 아니네, 끈기도 적당하고 고기양념도 잘 배였네, 요리전문가라도 된 듯 찬사를 쏟아내며 죽그릇을 비우는 도깨비에게서 사자는 눈을 떼지 못했다.

네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그자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은가. 네가 왜 사자가 됐는지, 그자가 어쩌다 불사의 생을 살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은가. ...자. 손을 이리 다오. 내 너에게 그 모든 걸 보게 할 테니.

빈주먹을 움켜쥔 사자의 눈에 설핏 허한 미소가 어린다.

죽을.. 싫어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여전히 어리석구나. 김신...


-아마 ing
-왜 때문에 일요일 다음은 금요일이 아닌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