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udk

동수여운. 부활

샤2 2017. 6. 13. 02:49
*최종회 갈대밭 이후
*홍대주 역모 전. 천주, 여옥, 검선 등 다수 인물 생존. 진주는 가옥 딸 아님.
*본방 사건이 옮겨오기도. 설정 달라지기도.
*덕심총량의 법칙이란..


1.
"안 돼.. 안 돼.. 안 돼!!! 운아!!! 죽지마 운아!!"

검선의 제자로 이제는 조선제일검이라 불리는 녀석이 어린아이처럼 울부짖고 있다. 익위사의 등에 업힌 초립은 이를 악물었다. 찢기고 찔린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다. 저하를 노리고 달려드는 여운을 마주했을 때부터. 아니. 여운이 흑사초롱의 인주가 됐을 때부터. ..아니. 세자저하를 잃었을 때부터. 백 번을 망설이고 천 번을 주저했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동무를, 지기를 끝끝내 잃지 않으려는 양초립의 이기심이었다. 그래서 여운이, 운이가 암살을 도모하도록, 거기까지 가도록 내버려뒀다. 멈추게 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갈 지 모를 일이었다. 또 잃을 순 없었다. 저하를, 이 나라의 미래를 다시 잃는 일은 겪을 수가 없었다. 흑사초롱에 닿아 있는 청 상인에게 서찰을 전했다. 운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알았고, 역시 갈대밭에 나온 건 운의 수하들이었다. 죽을 작정이었다. 해서 흑사초롱을, 여운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걸 동수가 보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한 작정에 제 목숨 정도는 가벼운 것이었다. 그러니 이래서는 안 됐다. 이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운이 나타나 수하를 물리고 급히 달려온 동수의 칼에 스스로 몸을 던질 일이 아니었다. 혼자, 그 긴 세월을 그토록 혼자였던 녀석인데.. 너를 혼자 보내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운의 눈동자가 스쳤다. 희미하게 웃고 있던 그 미련한 눈동자가. 

2.
그토록 바랐던 산의 즉위일. 초립은 근정전의 처마를 비껴 하늘을 바라본다. 유난히 맑은 날이다. 석 달 전 그날처럼.
<원망할 자격이 없어, 난.>
차라리 칼을 들이밀길 바랐다.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하며 욕을 퍼부어주길 바랐다. 허나 보름만에 깨어난 친우는 각오대로 마르고 지친 시선을 허공에 던질 뿐이었다.

"도승지에 제수된다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상념을 깬다. 뜨악한 노론들 사이 홀로 미소짓고 있는 병판 홍대주다.

"축하하네. 이제 자네 세상이로구만."

초립은 부드럽게 입고리를 올렸다.

"만백성의 세상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큽니다. 영감께서 부디 잘 살펴 주십시요"
"허허, 이 사람. 겸양이 지나치이. 누가 뭐래도 자네가 일등공신 아닌가."
"적통이 왕위를 이으셨으니 모두가 공신이지요."

홍대주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진다. 초립은 웃는 낯으로 가볍게 예를 갖추고 걸음을 옮겼다.

"헌데 백동수 그 자가 보이질 않는군."

우뚝 멈춰 선 등에 비스듬이 실소를 던진 홍대주가 자못 궁금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전하의 호위를 맡을 줄 알았는데 하명이 없으셨던가."
"...일개 무사에게 관심이 깊으십니다."
"일개 무사라니. 지기지우에게 평이 너무 박한 것이 아닌가. 검선의 제자이며 세손 시절 전하의 목숨을 구한 자일세. 자네와 그 자가 아니었다면 정말 망극한 일을 당했을 터. 그 공이 어찌 작다 하겠나. 아니 그런가."

초립은 헛웃음을 삼켰다. 시해미수사건의 배후로 역모까지 꾀했던 자가 저리도 당당하다. 저런 자가 이 나라 병권을 틀어 쥔 병판이고, 저런 자들이 이 나라 권력을 틀어쥔 노론이다.
같아져야 한다. 아니. 더해져야 한다. 저들보다 더 간교해지고 저들보다 더 잔혹해지고 저들보다 더 뻔뻔해져야지만 끝내 저들을 꺾고 세자저하께서 그토록 바라시던 새 세상을 그의 아드님이신 전하께서 이루실 수 있다. 그때까지는 자책도, 후회도 다 사치일 뿐이다. 초립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저하를 위해서라면 전부를 잃어도 좋다고 했지. 넌 너의 말을 지키게 될 거다. ..홍국영.>
...동수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다 이루면. 새 세상이 오고 나면.. 반드시 운이에게 목숨으로 사죄할 테니.
초립은 감은 눈을 열고 돌아서 태연히 미소를 그렸다. 다시 홍국영이었다.

3.
동수는 검선과 함께 청암사에 머물렀다. 종종 흑사모나 지선, 진주가 찾아왔으나 말을 섞지도,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온종일 허공만 쳐다보다 기절하듯 잠들거나 한밤 중 일어나 맨발로 경내를 서성이곤 했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는 동수의 뒤에서 검선은 지그시 한숨을 삼켰다.

4.
산벌레 소리가 요란한 어느 날. 산사를 찾은 이들이 흑사채의 풍문을 전했다.
그 흉악한 놈들의 머리가 잘려나갔다더라.
동수는 그 날 산속을 헤매다 팔뚝이 길게 찢어졌다. 검선은 달궈진 바늘로 묵묵히 상처를 꿰매고 붕대를 감았다. 붕대 위로 눈물이 소리없이 떨어졌다.

5.
"이제 됐으니 감시를 거두거라."

홍대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조선제일검이 실성했다는 소문이 파다해진 그 해 가을이었다.

6.
천둥이 크게 울렸다.

"이 검을 버릴 것이냐!"

절벽 끝에 선 검선의 손에 동수의 아버지, 백사굉의 검이 들려 있다. 그 앞에 꿇어 앉은 동수는 텅 빈 눈으로 검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한참 후. 검선은 까마득한 강으로 검을 던졌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검을 보고 있노라니 명치께가 묵직해졌다. 친우의 검을 버린 고통만은 아니었다. 평안을 가져다 줄, 오래된 병이었다.
..허나 저 아이는 어쩐단 말인가. 친구도, 말도, 마음도, 검까지도 잃어버린 저 아이는..
검선은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그 뒤에서 동수는 고개를 숙인 채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고 있었다.

7.
해를 넘기고 검선의 병세는 운신이 힘들 만큼 깊어졌다. 흑사모 등은 아연실색 달려와 곁을 지키려 했으나 검선은 모두를 물리고 동수만을 남겼다.
동수는 검선이 피를 토한 날부터 밤낮으로 약초를 캐러 다녔다. 여전히 말이 없었고 검도 잡지 않았으나 전처럼 흐린 눈은 아니었다.

8.
노을이 유난히 붉은 날. 검선은 약을 다리는 동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를 용서치 못하겠느냐."

마른 등이 우뚝 굳는다.

"...평생을 가는 후회도.. 그래.. 있느니라.."

한평생 옳은 길을 걸었으나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품은 여인을 잡지 못했고 다른 길에 선 친우를 돌려 세우지 못했다. 검의 길이 그들보다 중했는지, 이제 와서는 더더욱 모르겠다.. 검선은 하늘로 눈을 들었다.

"..동수야. 검은 버려도 마음만은 버리지 말거라."

붉은 해가 서산 너머로 검게 가라앉았다.

9.
눈을 뜨니 한밤 중이었다. 검선은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다 기침을 토했다. 기침은 피를 보고서야 잦아들었다. 젖은 입가를 훔치려는데 별안간 턱 밑으로 물잔이 드밀어졌다. 기다리던 손이었다.

"꼴이 이게 뭔가."

검선은 한숨처럼 웃었다. 언제 보아도 태산같은 사내, 흑사채의 하늘 천주였다.

"못 보고 가는가 하였다."

천주는 소리나게 물잔을 내려놓았다.

"내 검에 죽기로 하지 않았나."
"자네가 늦은 게지."
"..못난 놈."

말과는 달리, 벽에 기대 앉히는 손길이 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검선은 옅게 미소하며 천주를 건너봤다.

"풍문이 험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다."
"......"
"다친 곳은 없고."
"니놈 걱정이나 하거라!"

버럭 역정을 내는 얼굴이 꼭 그때 같다. 함께 수련하고 대련하던 어린 시절...
검선은 아련한 시선을 거두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운이 그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
"......"
"그 날 흑사채에서 시신을 거둬갔다 들었다. ...죽은 것이.. 맞느냐."

흑사채는 산 자를 죽은 자로 꾸미는 데 능하다. 그 말은 사람을 살리는 재주도 있다는 뜻이다. 죽지만 않았다면.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제껏 검선은 이 실낱같은 희망을 홀로 품고 있었다. 두 번 절망하는 것은 하나로 족했다.

"묻고 싶은 것이 고작 그것이냐."

긴 침묵 끝. 검선은 두 눈을 꽉 감아 내린다.

"...살아 있구나..."

탄식같은 중얼거림에도 부정은 없다. 천주는 거짓을 말하는 사내가 아니다. ...운아. ...동수야... 검선은 한참 감정을 추스리고 눈을 떴다.

"고맙....."

일순, 숨이 멈춘다.

"안색이.. 어찌 이러십니까.."

천주가 있던 자리에 하루하루, 매순간 그리던 얼굴이 초췌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10.
동수는 자주 헛것을 봤다. 주로 어린 시절의 운이었다. 그때 운은, 정말 얄미운 놈이었다. 또래보다 월등히 뛰어난 실력에 아무리 건들여도 피식 웃고 말고, 쓸데없이 도와주긴 또 어찌나 도와주는지.. 커서도 그랬다. 제가 이리저리 사고를 치고 다니면 무심한 척 외면하다가도 끝에는 반드시 나타나 '에효, 이 한심한 놈아.' 하는 눈으로 손을 내밀었다. 매번 그랬다. 독사에 물렸을 때, 괜한 시비가 붙었을 때, 지선아씨에게 넋을 빼고 있을 때..
...처마 밑에 그림을 그렸다. 날이 아주 좋았다. 햇살이 부드럽고 새소리가 향기로운 그런 날이었다. 신이 나 물감을 잔뜩 묻히고 내려다보자 운이가 눈가를 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렸다...
동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악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 자만했을까. 돌아올 거라고, 끝내는 오고야 말 거라고 멋대로 믿은 주제에 어떻게 그리 무심할 수 있었을까. 왜 이리 늦게, 이리도 뒤늦게야 이 마음이 무엇인지... 가빠지는 호흡을 겨우 다스리고 눈을 떴다.
그런데. 암자 뒷문으로 걸어 나오는 저, 사내.
또 환각인가 하였다. 보다 보다 별 게 다 보이는가 하였다. 해서 눈앞까지 오도록 그를 보고만 있었다. 비웃듯 비틀린 입이 장난처럼 동그래졌다. 후- 길게 뱉은 숨이 코끝에 닿았다. ...닿았다. 산 자의 숨. 살아, 있는, 사람의.

"어디 있습니까."

뭘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망치로 무릎을 친 것처럼 그저 뱉어진 말이었다. 그 말에 돌계단을 오르던 사내의 등이 멈췄다.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뛴다...
가슴을 쥐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사내는, 죽었다던 흑사채의 천주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눈물이, 거짓말처럼 쏟아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환각이 아니었다. 예감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운이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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