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udk

왕원왕린

샤2 2018. 8. 30. 14:52

린은 멍하니 앞을 봄. 여기 오고 두 세 번쯤 이런 일이 있었음. 단정한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거나 참을 만큼 참았다며 화를 내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잡아 끌거나.. 하지만 모두 눈 한 번 깜빡이면 사라졌음. 땅 끝까지 떨어진 심장소리만 한심하게 현실이었음.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러겠지 팔만 늘어뜨리는 사이. 생생한 환영은 발소리까지 내며 가까워졌음. 어딘지 질려보이는 눈망울이. 그리고, 숨이. 뜨겁고 가파른 숨이 코 끝에 닿을 때쯤에야 린은 휘청 기울어지는 몸을 다급히 부축했음.

-....저하..?

그러니까, 눈 앞에 있는 건 진짜 원이었음. 린은 정말 당황해서 예를 갖출 생각도 못함. 머릿속으로 대체 왜, 여기 이렇게 달려올 일이, 아버님께, 저하의 신변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이 좌르륵 나열됐음.
원은 쓰게 웃었음. 잠시 전까지 린은 햇살 속에서 미소를 띠고 더없이 평안했음. 곁에 있을 땐 없던 얼굴이었음. 그래서 몇 날 며칠 머저리같이 달려오고도 나서지 못했음. 이럴까봐. 린의 그 낯선 평온이 이렇게 사라져 버릴까봐. 그럼 답이 너무 뻔한 거 아님. 린의 평온을 깨는 게 정말 자신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아는 게 뭐 그리 기쁜 일이겠음. 하나도 기쁘지 않아야 정상임. 미안하고 민망하여 줄행랑이라도 쳐야 맞는 건데.. 차근차근 굳어지는 낯이라도 앞에 두고 있으니 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음. 제정신이 아닌 게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말을 달리는 내내, 수 백, 수 천 번 되뇌인 말을 반복하며 원은 스륵 눈을 감음.

-저하!!!

다급한 음성이 몽롱히 멀어졌음.

**

규모에 비해 드나드는 이는 적은 편이지만 왕족이나 고관귀족 등 높은 분들이 찾는 절이라 갑자기 찾아와 쓰러진 객을 저하라 밝히진 않았음. 절에서는 외따로 떨어진 방을 별 말없이 내어주었음. 맥을 짚은 스님은 어디 크게 상한 데는 없고 기력이 쇠해 잠든 것 뿐이라 린을 안심시켰음. 하지만 크게 안심이 될 리가. 일단 여기 있는 것부터 심란한 일임. 진관, 장의도 없이 혼자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음. 짚이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송인이나 제 형, 대신들, 혈육이신 전하, 원성전... 단이. 단이를 자신만큼, 어느 땐 자신보다 더 아꼈던 원임. 단이가 그리 가고 자신은 이리 도망치고. 슬퍼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또 혼자 참고 견디다 이렇게 쓰러지신 건가... 린은 해가 지도록 원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음.
그런데 원의 미간이 옅게 구겨지며 가는 신음이 새어나옴. 조심히 흔들어도 깨질 못함. 급한 마음에 어깰 잡는데, 그제야 손목을 잡아채며 번쩍 눈을 뜸. 린은 안도하며 안색을 살핌. 이마에 진땀이 배어있음.

-..아무래도 의원을 데려와야겠습니다.
-..의원은 무슨.
-기력이 많이 쇠하셨답니다.

원은 내심 면구스러움. 그 꿈을 또 꿨거든. 염치도 없이. 손목은 왜 또 움켜 잡고. 슬그머니 놓으며 벽에 기대 앉음.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십니다.
-..너도. 아깐 괜찮아 보였는데.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무슨 일인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야 볼 수 있는 거냐?
-..또 제 형님입니까.
-...진짜 이유 없음 안되나 보네.
-쓰러질 만큼 달려오셨습니다.
-그냥. ..그냥 왔다.
-.....
-그걸론 안 되나.
-...행선지는 알리셨구요.
-실종 아닌 건 알 걸.
-..걱정이 많을 겁니다.
-니가 제일 많아 보이는데.
-얼마 계신다고 연통이라도
-얼마 안 계셔. 날 밝으면 붙잡아도 갈 거다.
-...그러실 거 이 먼 길 뭐하러 오십니까.
-그러니까. 가까운 데 좀 있지. 이리 멀리 올 건 뭐냐?

뻔뻔한 대꾸에 웃고 맘. 원도 마주 웃고.

-..지내기는 괜찮고.
-편안합니다.
-..그래 보인다.
-..저하께선 마르신 듯합니다. 악몽도 꾸시던데.. 자주 그러십니까.
-..꿈은 죄가 없지.
-..무슨 꿈이신데요.
-남의 꿈에 뭔 관심이 그리 많아.
-...제 죈가 해서요.
-쓸데없는 소리.

린의 미소가 쓸쓸히 번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예.

그 예가 납득한 예가 아님. 원은 한숨을 쉼.

-..니가 나오긴 나오는데. ...그냥 운다. 보기 싫게 소리도 안 내고 눈물만..

움찔한 건 순간이었음. 옆으로 흐르는 시선도 잠깐. 하지만 그 잠깐을 놓칠 원이 아님. 침묵이 깊게 흐르고 낮은 빗소리가 문지방을 넘을 때쯤. 원은 무겁게 입을 엶.

-아는 얘기구나.
-....열 중이셨습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리 다급히 갔어...

그보다 더한 이유가 있지만 그 밤이 상관도 없었던 건 아님. 착각조차 두려웠음.

-..왜 말하지 않았냐 묻진 않으마. 알 만한 이유니까.
-......
-실수라 여겼겠지. 일국의 세자가 열에 취해 민망한 실수를 하였다고. 허니 충심으로, 우정으로 한 번은 넘어가주자고. 

침착한 겉과 달리 원의 속은 휘몰아치고 있었음. 그 꿈이 사실이라니 더 미안하고 염치 없어야 맞는 건데 그런 일을 겪고도 이러고 있는 린에게 화가 남. 화가 나면서도 한 구석 비열하게 희망함. 단지 충심이 아닐 지도. 단지 우정이 아닐 지도. 그 생각에 다시 화가 치솟음. 엉망진창임. 여기 달려온 것부터가 그리 제정신은 아니었는데 겨우 눌러둔 감정까지 한계점에 달하자 원은,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말을 시작함.

-산이에게 혼인하자 했다.

덜컥 멈춘 얼굴이 느리게 침착함을 되찾음.

-...감축 드립
-그리고 네게 왔어. 지쳐 쓰러지도록 말을 달려서. 반송장으로 떠난 벗에게 자랑하려고.
-.....
-그 밤도. 열에 좀 들떴다고 내가 널 못 알아볼까. 알았다. 너인 줄 알고 하였어. 네 충심이야 걱정할 게 없지 않으냐.

그새 거세진 빗소리가 방을 울림. 린은 굳어져 원을 마주 봄.

-제가 저하의 심기를 거스렀습니까.
-그렇다면.
-그렇대도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요. 왜 스스로를 깎아내리십니까.
-내가 그런 자가 아니면 화를 냈겠지. 열에 취했든 술에 취했든 다 죽어 널부러졌어도 넌 그랬어야 해.
-지금 그 얘길 하시려고 저할 그리 말씀하신 겁니까?
-어떤 말. 혼인을 약조하고도 네게 달려온 거? 아니면. 너인 줄 알고 그리 한 거. 어떤 사실.
-저하!
-내가 벗의 아픔을 개의치 않거나 충심을 이용하여 무례를 범하는 자는 아니라며. 허면. 지금 네 앞에 앉은 자는 무엇이냐. 오면 안 되는 길을 미친 놈처럼 달려서, 오는 내내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그러고도 네 앞에 앉은 마음은 무엇이야. 하나뿐인 벗? 가장 아끼는 신하.. ..벗이나 신하 때문에 정혼자를 뒤에 두진 않는다. 벗이나 신하의 눈물에 그런 식으로 흔들리지도 않고. 그럼. ...그럼 네가 내게 무엇이겠니.
-......
-..전에 두타산에서. 마음에 품은 이가 누구냐고 물었던 거. 이게 내 답이다.
-........
-세자로 한 말이 아니니 싫어해도 되고 거절해도 된다. 믿고 싶지 않으면 내가 무정하고 무례한 놈이 되마. 어느 쪽이라도 내 답은 변하지 않을 테니.
 
원은 말문이 막힌 린을 길게 바라봄. 처음 보는 얼굴임.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내 얼굴인 것도 같고. ..아니지. 린이 이리 한심하고 염치없을 리가. 원은 그만 일어남.

-더 멀리 갈 작정은 날 풀리면 해라. ..밤이 아직 차다.

원이 나가고 얼마간 더 멍하니 앉아있던 린이 문을 박참. 말을 달려 금세 멀어질까 비 사이를 갈랐는데 말은 그대로. 말도 없이 이 빗속을 걸어간 것임. 급히 내달린 끝, 산사 초입에 원이 보임. 요란한 비를 그대로 다 맞고 서있음. 덜컥 발이 멈춤.
고백도 못 알아들을 만큼 바보는 아님. 린도 원을 연모하고. 근데 그래서. 등 뒤에는 단의 유골이 있음. 그리 만든 게 누군지도 앎. 그걸 앞에 있는 원은 몰라야 함. 모르고 앞으로 나가야 함. 그러니 돌아서야지. 돌아서 멀리 가야지. 다시는 만나지 않게, 꿈에서라도 마주치지 않게... ...그러니 지금은. 다시는 보지 않을 테니 이번 한 번만.. 린은 질끈 눈을 감음. 온 힘을 다해 버티지 않으면 원에게 달려갈 것 같음. 그러고 싶음. 마음에 품은 이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데 달려가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음. 바라지조차 못했는데. 안 될 일이다 지레 포기하고 원이 다른 이에게 마음을 준 이후만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 마음만 전전긍긍하는 사이 저 분은 아팠겠구나. 스스로를 비하해야 비칠 수 있는 마음을 끌어안고 오래도 외로우셨겠구나. 곁에 있으면서 더 외롭게 만들었으니 내 죄가 맞구나..
      
-....왜 이러고 섰어. 흠뻑 젖어서.

눈을 뜨니 원이 있음.

-...말을.. 두고 가셨습니다.
-......
-....타고 가십시요. 길이 멉니..

따뜻한 손이 볼에 와 닿음.

-내가 나쁜 놈이 맞긴 맞구나. 지가 우는 줄도 모르는 놈, 이 빗속에 말타령이나 하게 하고..
-.....
-..타고 갈 테니 그만 울어. ..가 줄 테니까.

머뭇 손을 뗀 원의 눈에 괴로움이 스침.
 
-안 오겠다고, 안 보겠다고는 안 한다. 허니 알아서 가.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마.
-.....
-..먼저 들어가라. 그칠 비가 아니다.
-왜. ...왜 이리 힘든 길로 오셨습니까.
-...걷다 보니. 너 힘들 줄 알면서도 이리 됐다.
-..개국 이래 가장 총명한 왕세자시라는 거 취소해야겠습니다.

평소라면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농이라도 할 텐데. 우중에 눈물 범벅으로 그리 말하니 대꾸할 말이 없음. 더는 대꾸할 정신이 아니기도 하고. 미친 듯이 달려와 진짜 미친 짓을 했음. 그러고도 놔줄 마음 같은 건 들지가 않음. 린의 너머에 있는 절, 그 절 어딘가에 있을 단이 성이라도 낼 것 같음. 나를 이리 만든 범인을 잡고 숨기고 끝내 밝히지 않을 거면서 우리 오라버니께 뭐하시는 거냐고. 원은 눈을 돌림. 이 와중에 단이 생각까지 얹으면 오열을 토할 지도 모름. 그러다 어머니의 죄까지 토해내면, 아주 끝내주겠지. 다시는 이렇게 뻔뻔한 척도 못할 것임. ..아니. 더 하려나. 그래도 안 놓는다 괴롭히려나. 그러면 이놈은 멀리, 점점 더 멀리 가다 더 갈 곳이 없어지면.. 까지 갔는데.
린이 손을 잡음. 앉으라기 전엔 앉지도 않는 놈이, 달리기도 한 발 늦게, 활을 쏴도 한 두발 밀리게, 뭘 해도 세자로만 대하던 린이.. 원은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보기만 함.

-....저도 나쁜 놈인가 봅니다. 우는 줄도 모르는 분을 이 빗속에 세워 두고..

희게 질리고 입술이 퍼래져서도 태연한 척 말을 건네고, 기민하기론 따를 자가 없는 분이 힘든 길 왜 왔냐니까 너 힘든 거나 걱정하고, 높은 자존심에 보이지 않던 눈물을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하고.. 아니. 다 핑계일지도 모름. 오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말이라. 린 또한 너무 오래 품고 산 마음이라.

-싫어해도, 거절해도 된다 하셨으니 답을 하겠습니다. ...대신 꿈인 겁니다. 이번에도.

린이 무릎을 꿇음. 뭐라 할 새도 없이 잡은 손을 제 두 손에 올려놓고 손바닥에 입술을 댐. 원은 숨을 멈춤. 거센 빗소리도 들리지 않음.

-..제 답입니다.
-.....
-믿기 싫으시면 우중을 틈타 무례를 범하는 자라 하십시요. 그런 자가 되겠습니다.

고개를 든 얼굴이 우는 듯 미소하고 있음.

-...멀리 가겠습니다. 날이 풀리면, 따뜻한 밤에, 이리 오시지 못할 만큼 아주 멀리 가서... 이 꿈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이 꿈이면 저는 괜찮습니다. 허니.. 아프지 마세요. ...혼자 그러지 마세요, 저하..

원은 허리를 숙여 린을 끌어당김. 저번과는 달리 잠시 떨리다 가만히 열리는 입술을 조심히 파고 들었음. 두 볼을 감싸며 깊이, 더 깊이..
비 사이로 낮게, 풍경이 울었음.

**

언제 퍼부었냐는 양 맑아진 아침. 린은 원을 찾고 있음. 깨고 보니 없어서 가신 건가 두리번거리는데 불당에서 원이 나오고 있음. 단의 위패가 있는 곳임.

-저ㅎ...

아차. 입을 다무는 린에게 원이 낮게 혀를 참.

-..오랜만이라 깜빡. 조심하겠.. 할게.
-그거 때문 아닌데.
-그럼...

훅 다가온 손에 린이 반사적으로 물러남.

-뭘 이렇게까지 피해?
-...보는 눈이..
-이전에도 니 이마쯤 수시로 짚었다. 새삼 내외는.

별 일 다 보겠다는 듯 이마를 짚는 원에 린은 허둥지둥 볼이 다 달아오름. 원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태연히 손을 뗌.

-열 다 안 내렸네. 그러게 푹 자라고 조심조심 나왔더니 그새 깨선.
-열?

하고 자기 이마 짚어보는 린. 원은 팔짱을 끼며 고갤 저음.

-너무 약해졌어. 이래서 멀리는 어찌 가?
-..그만 놀리지.
-비 좀 맞았다고 밤새 끙끙
-밤새 끙끙은 저하 아니셨습니까?

깜짝 놀라 돌아보자 주지가 뒷짐을 지고 있음. 하지만 린과 달리 원은 놀란 기색 없이 불퉁하기만 함.

-지나가던 길이면 지나가시죠?
-해 뜨기도 전에 약 내놔라 문 두들기셔서 전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그 시간에 누워 계신 게 더 큰일 아닙니까.
-마음을 다하면 거꾸로 서도 불공입니다. 헌데 눈두덩인 왜 벌거십니까. 우셨습니까?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도 린이 원을 돌아봄. 어젯밤의 여판지 홀로 불당에 앉아 그런 건지.. 얼굴을 살피던 린이 조금 가라앉는 기색이자 원이 발끈 주지를 노려봄. 뭐. 그렇다고 굴하진 않았지만.

-어허.. 불전에서 나는 소리가 뭔소린가 했더니 저하셨습니다.
-..안 바쁘세요?
-꾹꾹 눌러 우는 버릇은 이제 그만 고치시지요. 듣는 사람 답답하다니까요.

불당이구나.. 하던 린이 바짝 약오른 원과 주지 사이를 뒤늦게 막아섬.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허허. 아닙니다.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헌데 두 분 아시는 사이셨습니까?
-불행히도.
-업보지요.
-아 나 진짜.
-저만 알고 있으니 공자께선 염려치 마십시요. 언행이 이러셔서 티도 안 납니다. 그럼 전 이만.

쌩하니 가버린 주지를 씩씩 노려보던 원이 계속 새는 웃음소리에 고갤 돌림.

-그만 웃지?
-저하가 못 이기는 분도 계시네요. 있는 동안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원은 말을 말자며 오솔길로 향함. 린도 미소하며 뒤를 따름. 그러자 원이 맘에 안 드는 티를 팍팍 내며 멈춰 섬. 린이 이유를 물으려 곁에 서자 그제야 발을 옮기는 원. 린은 작게 웃으며 나란히 걸음.

-..단이 같이 보시죠.
-..둘이 나눌 얘기라.
-많이.. 우셨습니까.
-그냥 절을 옮기자.
-풉.
-...어휴. 저 노인네.
-오래 아셨나봐요.
-너 만나기도 전이니까.
-그때도 숨죽여 울 일이 많으
-아 쫌!

놀린 거 아닌데 경기를 해서 더는 못 묻고. 새소리. 바람소리. 풀소리. 온갖 소리가 평온하게 어우러진 길을 걸음. 잠시 편안한 침묵이 흐르고.

-...근데 안 묻네.
-묻지 말라신 거 아닙니까?
-말고. 혼인.
-아..
-...산이 신분. 원성전에서 아셨다.
-...원성전의 명이시군요.
-..하겠다 했어. 당해드리는 건 마지막이라고도 했고. 그만하려고. 바보노릇.

마지막. 린이 멈춰 섬.

-무슨 생각.. 하고 계신 겁니까.

원도 걸음을 멈추고 린을 마주 봄.

-지켜야겠다는 생각. 산이도, 이 손도

린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을 들어보임. 린이 입맞췄던 손임.

-이 손도. 이 손은 평생 안 닦을까봐.
-...
-웃으라고 한 말인데 안 웃네.
-어쩌시려고요.
-힘을 가지려고. 조금 일찍.
-어떻게요.
-어떻게든.
-저하.
-이 말을 하는 것은 혹 소식이 전해져도 놀라지 말라는 거다. 오지도 말고. 니가 거기 있으면 내가 뭘 제대로 하겠니. 니 생각이나 하겠지.
-..꼭 하셔야겠습니까.
-어. 꼭 해야겠다, 니 생각.
-위험한 길입니다.
-니 생각이 위험하긴 하지.
-농담하실 일이 아닙니다.
-농담 아닌데.
-.....
-너와 가면 더 쉬울 거다. 너만한 책사도 없으니까. 헌데 넌 책사만 할 놈이 아니지 않느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지 안위따윈 상관없이 뛰어들겠지. 그게 추국장이든 사냥터든 상국이든. 그럼 난 니가 다칠까 상할까 아무 것도 못하고 천치 같을 테고. 어떠냐. 되게 위험하겠지?
-..제가 저하의 약점입니까.
-내가 약해 그런다. 내가 약해서 같이 위험해지지 못하고 혼자 걱정만 해야하는 자리, 네게 떠넘기는 거야.
-....
-좀 봐다오. 니가 날 봐주지 않으면 누가 날 봐줘.

원은 잡은 손을 이리 흔들, 저리 흔들대며 어? 어? 거림. 원래대로라면 이런 게 통할 리 없음. 그런 길에 혼자 두느니 고집부리고 욕 먹는 게 나음. 하지만 원의 마음까지 안 지금은. 거짓표정에 재주없는 자신이 정말 약점이 될 지도 모름. 원성전 일도 그렇고... 린은 가만히 원을 바라봄.

-왜. 무슨 생각하는데.
-..다치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요. 이 손을 지키려면 무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요.
-딴 것도 보이는데?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더 멀리 가는 게 나을까 몰래 따라 가는 게 나을까. 어제 이 손은 괜히 잡았나.
-.....
-니가 그런 생각할 때 난 이리 생각했다. 이 손은 뭐 이리 따뜻하나. 놓긴 글렀구나. 놔달라고 하면 못 들은 척 해야지. 꿈이다 할 때 그러자 한 적 없으니 계속 잡고 있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잡아야지.
-....
-아. 하나 빼먹었다. 지금 입을 맞추면, 성을 내려나.

허락을 구하듯 바라보던 끝.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음. 햇살 사이로 바람이 불고.

**

바람소리.
둘이 있던 길에 린 혼자 서있음.
말에 탄 원은 절 밖에 서있다 말을 달림.
단호한 얼굴로 고삐를 꽉 쥐고.

**

처소로 돌아오는 길. 한 스님이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함. 린은 혹시 원인가 하여 뛰어갔으나.

-여길 어찌..

송인이 서있음. 대꾸도, 인사도 없이 뚫어지게 쳐다만 봄. 린은 번뜩 다가섬.

-저하의 뒤를 밟은 건가.
-...
-감히..

하다가, 이 자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면 하는 생각이 스침.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가 검을 쥐고 나서려는데 문이 닫힘. 린은 검을 뽑아 송인을 겨눔.

-비켜.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송인은 헛웃음을 뱉고 옆으로 비껴섬. 그리고 린이 나가려는 찰나.

-숲길에선 조심하셔야지요. 누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린은 그대로 굳어섬.

-안 가십니까.

싸늘한 목소리에 쿵, 심장이 내려앉았음.




*이게 무슨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