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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자성. 新世界 Episode. Part 1

샤2 2015. 8. 16. 02:40

 

 

2004년 6월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그때 경찰 따위 때려 쳤어야 했다.

 

 

新世界 Episode

 

 

 

 

 

 

1.

"가서 개새키 한 마리 담그고 와봐라."
 
면접은 경찰만 보는 게 아니다. 게다가 틀에 박힌 경찰면접보다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질문도, 행색도. 철제 의자에 앉은 사내는, 이런 데만 아니라면 대단한 구경거리다. 잔디머리야 깡패명찰이라 쳐도, 실내도 아닌데 맨발인 건 뭐며... ...대체 저런 걸 파는 인간은 양심이 있는 거냐. 촌스럽기 그지없는 꽃분홍 하와이안 셔츠 말이다. 야자수에 매달린 원숭이가 제 주인과 판박이다. 
 
"못하겄음 가라. 해꼬진 안 하니께."
 
보름 전 강형철도 그랬다. 못할 거 같으면 지금 가라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자성은 갈 곳이 없다.

 
2.
까만 눈동자만 없으면 대걸레라도 믿겠다. 사람한테백번은 차인 꼴로 꼬리를 살랑거리는 멍청한 개.

자성은 주머니 칼을 쥐며 쭈그려 앉았다. 손을 내미니 좋다고 핥아댄다. 

...진짜 멍청하기는.
 


3.
"이번엔 사람 하나 담거야 쓰겄는디."

 

...젠장. 주제에 면접이 2차나 된
다.

 
4.
청은 사무실 구석에 대충 깔아 논 장판에 누워 신나게 낄낄거리고 있었다. 미친 건 아니고 코미디 시청 중. 오늘따라 조낸 웃겨서 배때지가 찢어질 것 같다. 다행이 철제문이 벌컥 열려 그런 참사는 없었지만. 청은 머리를 긁적이며 삼선슬리퍼를 꿰찼다. 시커먼 밤에 똑똑도 없이 들이닥칠 급이면... ..조규칠은 아니겄지. 한 다리 위인 조규칠은 청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고갤 든다. 그리고 ...허리춤의 회칼을 반쯤 뽑았지 아마?

기다란 게 피칠갑을 하고 있어 어떤 씨벌롬이 작업 왔나 했더니, 그 놈이었다. 사람 담그란 말에 퍼레지던 풋내기. 희멀건한 낯짝이 칼은커녕 주먹질도 못할 상이었다. 한 일주일 잠잠해서 잊고 있었는데. 왔다. 또.  


"이번엔 귀신이라도 잡아와야 하오?"

날선 투에 벙 고갤 젓자,

"그럼 받아주쇼."

한다. 누굴 조졌냐, 어디에 묻었냐 묻는 건 당연한 수순으로, 청은

"...느 좀 씻거야 겄다."

개소리를 해댔다. 새카만 눈동자가 어지간히 추워 뵌다. ...이 여름에 씨빠. 청은 담배를 문다.

"이름이 뭐여."
"......"
"이름 읍냐?"
".....이자성이오."

이자성.
이름 한 번 참...
 

 

5.
"낯짝이 어째 파이팅이 넘쳐분다?님들이 겁나 반겨줬냐?"

 
어째 이 웃긴 하와이안이 안 보인다 했지. 제발 좀 한꺼번에 해라, 이 깡패새끼들아!

창고 앞에 쭈그려 있던 자성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티며 일어났다. 가까이 오는 청에 아래턱이 절로 물린다. 환영식만 일주일 치렀더니 파블로프의 개가 되더란 말이다. 하지만 개라도, 자성은 경찰견이었다. 오기가 세고 불행이 머리까지 좋은.

지금 관두면 제 앞날이야 뻔다. 최악의 경우 잘리거나 잘해봤자 평생 지구대나 전전하겠지. 그 꼴 나자고 남들 2, 3년 할 공부를 공사판 전전하며 근 6년이나 매달렸던 게 아니다. 똑바로, 잘 살고 싶었다. 훌륭한 사람 되라는 할머니의 꿈처럼. ...그래. 까짓것, 더 맞지 뭐. 자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피도 안 터지고 볼도 멀쩡하고..슬그머니 눈을 뜨니 불그레한 낯이 히죽히죽, 원숭이와 웃고 있다.

 
"느 뭐더냐?"

"......" 

"
으이~ 내도 격하게 반가워 하라고? 소원이믄 그래줘 볼까?"

씨발 이 미친 원숭이 새끼가. 물어버릴 기세로 노려보는 자성에 청은 지그시 웃음을 삼킨다. 도를 넘게 시퍼런 이유를 알 만했다. 이 바닥에 들어오겠다고 피칠갑까지 해댈 땐 언제고. 아무튼 재밌는 놈이다.

"가자아."
"...어디 갑니까?"
"으째 말투가 정중허다? 형님들이 시키드나."
"...네."
"그려. 고 양반들 성미가 허니께 말 잘 들으라. 근디 나한테는 그럴 거 읍어."
"....(뭔 개수작이야, 이거)..." 
"뭐허고 서 있어. 가자니께."
  

 

6.

모르겠다.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처음에는 국밥집에서 패려나 했다. 그런데 끌어 앉히더니 국밥 두 그릇에 소주를 시키고, 먹었다. 되게 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에 코를 박고 어흐~ 노인네 같은 감탄까지 곁들이며 아주 열심이다. 긴장한 게 그만 한심해진 자성은 석달 열흘 굶은 거지꼴을 만만히 구경하다, 문득 이 새끼 이름이 뭐더라 했다. 분명히 봤다. 깡패새끼치곤 맑아서 뭘 붙여 외우자 했는데... 맑다. 맑다라... 아. 맑을 청. 그래, 맞다. 정청이었다.

1970년생. 여수화교출신. 17세부터 조직생활. 2000년 초대 오야 이국한 사망 당시 타 조직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서열 7위에서 4위로 급상승. 주목할 급은 아니지만 조직 내 신망이 높음. 나름 동향이니 낫지 않겠냐, 까지.    


"안 묵냐?"
"...저녁 먹었습니다."
"사내새끼가. 그러니께 그라고 삐짝한 거 아니여."
"괜찮습,"
"아따 고시키 말 드릅게 안 쳐듣는다."
 
먹을 때까지 쳐다 볼 기세라 자성은 하는 수 없이 숟가락을 든다. 돼지고기가 둥둥 떠 있는 벌건 국물을 한 입 떠 넣었다. 보기보다 깔끔하니 시원하다.

"으뜨냐."
"...뭐 그럭저럭..."
"입맛 못 쓰겄네. 술은 쫌 허냐?"
 
없는 꼬리라도 만들어 살랑거려야 할 판에 이런 상황.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긴 한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혼자 지내버릇한 자성에겐 대화부터가 미션임파서블이었다. 말 길게 해서 좋은 꼴 본 적도 없고. 자성은 묵묵히 청의 잔을 채웠다. 단숨에 비운 청이 불쑥 잔을 내민다.  
 
"팔 떨어지겄다."

자성은 주춤하다 잔을 받았다. 주거니 받거니 마셔보긴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이다. 말간 소주를 한 입에 비웠다.

 

"마실 줄은 아는구마."
"...근데 여긴 왜 온 겁니까?"
"집에 밥 묵으러 오지 떡치러 왔을까바? 여 아즈메! 나랑 떡 한 번 칠란,"
"저 육실헐 놈이 개소리 하고 자빠졌네!! 취할라믄 곱게 취해야!!"

"봤제? 따묵을라다가 따묵혀야. 크크."

 

무섭게 쏟아지는 악다구니가 비위도 안 상하는지 어깨까지 들썩이며 낄낄대는 남자가, 자성은 진짜 깡팬가 싶어진다. 무릇 깡패란, 무식하고 비열하고 쪼잔하고 아무튼 악이란 악은 모두 싸잡아놔야 정상인데, 이 까까머리는 그냥 동네 백수건달 같았다. 별로 해롭지도, 무섭지도 않은.   

".....원래 이러오, 형님은?"
"뭔 형님은. 밥이나 마저 묵어라."
 
청의 손사래에 번쩍. 자성은 오리무중의 꼬리를 잡았다. 

처음 지구대에 들어갔을 때 정청 같은 선배가 있었다. 화교출신에 하는 말마다 무뚝뚝한 자성을 밥먹자, 커피 마셔라 유일하게 챙겨줬던 사람. 자성은 탁, 술잔을 내려놓는다.


"내가 얼마 못 버틸 거라 이러는 거요?"

있는 동안만이라도 좀 잘해주자. 경찰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 걔 화교잖아.

밤순찰 돌고 그 선배 주려고 사갔던 박카스, 그날 원없이 마셨다. 정청은 최소한 뒤에서 지껄이진 않으니 다행인 건가. 기분 좆같기는 마찬가지지만. ....씨발. 자성은 힘줄 튀어나오게 숟가락을 쥐고 퍽퍽퍽퍽, 단숨에 뚝배기를 비운다. 

 

"잘 먹었습니다. 형.님."

 

꼿꼿히 나가는 등을 벙쪄서 보던 청은 쓰게 웃고 만다. 새끼가 제법 깡도 있고 오기도 있다만...  

조직생활 이 십여년. 아닌 놈은 어떻게든 죽었다. 칼질 못해 죽고 잘해 죽고, 쓸데없이 정 많아 죽 정 없어 죽고, 대가리 잘 굴려 죽고 못 굴려 죽고. 이국한은, 형님은 그런 식으로 묫자리 잘못 찾은 놈들이 무겁다고 했다. 지들 팔잔데 뭘 그러냐 불퉁거려도 웃기만 하던 형님. 청은 그 웃음을 유지로 삼았다. 해서 이제껏 밥이나 한 끼 먹이고 내쫒은 거다. 그래도 남을 놈들은 남아 모두 죽었지만.

..나름의 인생 아니여. 무겁기는 씨빠... 

청은 길게 연기를 뱉었다. 유독 힘주어 말하던 형님 두 글자가 연기 사이를 떠다니다 이내 사라졌다.      

 


7.
<밥 먹었냐?>
일주일에 한 번. 강형철과의 통화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자성은 그래서 더 몰랐는지도 모른다. 

이 비밀잠입이 어떤 일인지.

어떤 일이 될지.

 
  

8.
여수의 여름은 여전하다. 아직 7월인데 열기가 아주 화끈하시다. 벌써 이러면 담달은 죽었네... 쨍한 해를 노려보던 자성은 활기 넘치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깡패들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킬킬대며 창고로 오고 있다. 중심은 역시 하와이안. 근데 저 사람은 왜 볼 때마다 맨발이며, 저 셔츠는 빨아 입긴 하나. 궁금하지만 내키는대로 묻는 대신 조신하게 비켜 고개나 숙이는 자성이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아무도 인사를 안 받는다.

투명인간 된 지 한 달쯤 됐다. 국밥집 이후로 눈도 안 맞추는 청에 까까머리들이 편승한 거다.(대머리나 되라, 개새끼들) 일주일은 살 것 같았다. 딱 일주일. 자성은 그동안 총 네 번의 보고를 '정청은 예상보다 조직 내 입지가 더 단단합니다. 현 오야와 수하들의 신임이 두텁습니다. 특히 수하들이 굉장히 따릅니다. 미스테립니다. 만날 뒤통수나 후려치고 욕이나 하고 억지 쓰고 음담패설 달고 다니는 노.. 정청이 뭐가 좋다고. 변태들인 것 같습니다.' 로 버텼다. (미스테리부턴 속으로 말했다.) 이제 진짜 강형철에게 말할 거라곤 정청 하와이안 컬렉션, 창고의 안부, 깡패들의 야동 취향, 이딴 거 뿐이다.

...이러다가 퇴직금 받는 거 아니야? 연금도 얼마 안 되는데. 자성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트린다. 

맑을 청? 엿먹어라 시발.   

 

 
9.

청은 귀를 후비며 슬쩍 목을 뺐다. 창고 앞에 아직도 얼쩡거리는 그림자. 씨벌롬. 고집은 대박이시다.

사실 이쯤 되면 통상 그만 오너라 했다. 지 팔자 지가 꼬는 거니까. 그런데 그 눈. 열이 뻗쳐서도 한겨울인 그 눈깔이 지랄이라. 청은 겨울은 질색이었다.  

      

 

10.
실마리는 늘 의외의 곳에 있다. 

그러니까 청의 외면과 자성의 고집과 형철의 관용이 겨울까지 이어진, 11월이었다.

 

 

2004년 11월

실마리는 늘 의외의 곳에 있다.

 


11.
"갸는 요새 으째 안 빈다?"


즐거운 점심시간.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짜장면을 흡입하던 까까머리 둘이 동시에 갸우뚱거린다. 이럴 때 나서는 건 청과 가장 오래 된 오성철의 몫이다. 

 

"누구요?"
"있자너. 빼짝혀서 희멀건한 거."
"긍께 갸가 누구... ...아아. 갸요~ 그르게, 우째 안 비네? 한 보름 되았나?"

 
입가에 춘장을 덕지덕지 묻힌 차지철도 그제야 끄덕거리며 아는체를 한다.

 

"그 정도 되았지요? 청소만 댕겨쌌드만 질려부렀나바요." 

   
면발을 뒤적이던 청이 젓가락질을 멈췄다.

 

"청소?"

"형님 모르셨나보네이. 한참 되았는디. 규칠이 형이 보내 부렀어요."

  

이 바닥에서의 청소란 싸움터 뒷정리, 시체 처리, 도망간 놈 잡아오기 등등, 말단 중에서도 상말단만 맡는 일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청의 소관이었는데 조규칠이 신입관리를 뺏어간 후로는 신경 끄고 있었다. 짜장면 위로 흰 낯짝이 어른거린다. 청은 담배를 집었다.  

 

"근디 갸는 뭔일로 찾는데? 해가 서쪽에서 뜰라나?"

 

은근히 떠봐도 말없이 담배만 태우는 청이 성철은 오늘따라 낯설다. 아니다 못 박은 놈을 먼저 입에 올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요 근래 좀 이상했다. 문득 누굴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시시덕대다 바람 빠진 풍선마냥 멍해지고. ..기집이라도 생겼나. 그래봤자 왕다방 김양이나 나가요 최양이나.. 성철이 머릿속으로 괜한 여자들 얼굴만 굴릴 때였다.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린다. 한참을 늦고도 여유작작 들어오는 덩치 조경구. 성철은 장난스레 주먹떡을 날렸다.  


"깡구 이 씨벌롬. 싸게 싸게 안 댕기냐! 짜장면 다 불어 터졌자네!"

"죄송허요. 규칠이 형님이 갑자기 찾으셔 가꼬."


쇼파로 딴딴한 엉덩이를 들이밀며 하는 말에 성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청과 의형제나 다름없는 저나 경구, 심지어는 가끔 점심이나 같이 하는 지철과도 눈을 안 맞추는 쫌생이가 뭔 일인가 싶다.  

 

"그 냥반이 뭐땀시."

"아그들 앞에서 그라고 부르지 말라니께."

  

담배를 비벼 끄며 성철 대신 지철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청의 작태에 짜장면 튀어나올 뻔한 지철은 켈록거리며 가슴을 두들길지언정 눈 한 번 치켜뜨지 않는다. 워낙 자주 있는 봉변이었다. 성철은 지철의 등을 쓸어주며 청을 꼬나본다.

 

"아따 열녀 나부렀네. 열녀 나부렀어. 동상 하나 세워야 쓰겄소?"

"그러지 말어. 형은 형 아니냐."

"그라고 당하고도 그 냥반이 여직 형이요?"

 

솥뚜껑 같은 손이 다시 번쩍 들린다. 성철은 얼른 말을 바꿨다.

 

"아, 규칠이 형! 형님!!"

   

피식 웃으며 손을 내리는 청에 성철은 입 안으로 욕을 짓씹는다. 진짜 속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아는 억울함만 수 십인데, 힘이 없어 베짱이 없어, 만날 당하는 걸로도 모자라 형님 소리 안 붙였다고 저 지랄... ...니미. 저 속을 누가 알어.  

 

"그려서. 우리 조~낸 위대하신 규칠이 '형님'께서 뭔 용무라다가 니를 찾으셨는디."

"이자성이네 댕겨 오라고 혀서요."

 

새 담배를 꺼내다 말고 멈칫하는 청의 옆에서 까까머리들은 다시 고개를 모로 틀었다.  


"이 뭐? 그게 누구여. 지철이 니는 아냐?" 
"글씨 첨 듣는 이름인디. 그게 누구래요, 경구형?"
"왜 있잖어. 재규 따라서 청소 댕기는. 갱생이 꼈다고 청이 형님이 놔둬 뿐-"

"거기는 와."

 

청의 목소리가 어쩐지 서늘하다. 지철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같이 시시덕거려도 정청은 정청, 저 눈깔 돌아가면 무슨 사단이 어떻게 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철이 조용해진 건 다른 이유에서다. 성철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청이 한 번 외면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 일 년을 있건 이 년을 있건 이름 한 번 부르지 않았다는 것도. 선풍기 탈탈거리는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경구는 빛의 속도로 짜장면 비닐을 벗겨내며 말을 이었다. 

 

"뒤졌는지 보고 오라던디요?"

묵묵한 청과, 청 대신 나서야 할 성철까지 묵묵무답. 경구는 그제야 짜장면에서 눈을 뗐다. 

 

"다들 몰랐는갑네. 갸 규칠이 형님한티 허벌 터졌어요. 보름 전인가. 청소하다 한 놈 놓쳐 부러서 집 찾아가 조져라, 왜 규칠이 형님 종종 그러자너요. 근디 갸가 그냥 왔더래. 헌다는 말이 여섯 살쯤 되는 가시내랑 깡마른 여편네만 있는디 사내라믄 기집은 패는 법이 아니질 않느냐 따박따박 하더라지? 납짝 엎드려도 복날 개시키 될 판에 규칠이 형님이 어디 가만 있었겄어요. 난중에는 재규가 다 말렸다 안 허요. 송장 치울 뻔혔지."

  

조규칠을 부모 원수 보듯 하는 성철도 그렇게 대놓고 개긴 적은 없었다. 청이 워낙 '좆같아도 형은 형이다.' 주의기도 하고 조규칠 성질머리가 정말 개기도 해서. 근데 그 희멀건한 어디에 그런 깡따구가 숨어 있었는지. 성철은 청을 돌아본다. 청은 담배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려서. 뒤졌냐."


짜장면을 한 가득 밀어 넣은 경구가 덩치만큼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우물거린다. 


"밥 해묵고 있던디."


찬도 튼실하드만 먹고 가란 말도 안 허더라고요.

청의 담배에서 기다란 재가 툭 떨어졌다.  
 

 

12.

어째 오늘따라 코미디도 좆 같고마. 사무실 장판에 널브러져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청은 결국 리모컨을 내던졌다. 깡패짓 하면서 그쯤 얻어터지는 게 뭐 큰일이라고 좆같은 낯짝이 모기마냥 앵앵댄다. 씨벌롬. 청은 슬리퍼를 꿰찼다.

 

 

13. 

자성의 집은 시장골목에서 조금 떨어진 오르막 끝에 있었다. 이 동네가 다 그렇지만 집이라기도 민망한 꼬라지다. 툭 차면 똑 떨어질 문짝을 밀고 들어가니 입구부터 곰팡내가 진동을 한다. 청은 돌바닥에 가지런히 놓인 구두를 내려다봤다. 검은 갑피에 동그란 버클이 달렸는데, 저게 신이면 파리도 새겠다. 꾸깃꾸깃한 게 얼마나 후진 가죽을 썼는지 알 만하다. 저거 파는 게 포목점 오 씨렸다...하던 청은 쓰게 웃고 만다. 아무튼 우라질 겨울. 고개를 휘젓고 슬쩍 방문을 열었다. 

얼룩덜룩한 벽지. 구형 티비. 녹슨 연두색 옷걸이. 구석에 놓인 앉은뱅이 상에는 먹다 만 밥그릇과 반찬 그릇이 그대로. 손바닥 만한 창. 그리고 그 아래 벽에 바싹 붙어 있는 칙칙한 회색 칼라티셔츠. 집 꼴부터 옷 꼴까지 아주 초지일관이 완전하시다. 청은 세로누워 미동도 없는 등을 이유없이 노려보다가 담배를 물었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죽을 때가 되았나..하며 볼을 긁적거리던 청은 순간 불 붙은 담배를 놓치고 말았다. 

자성의 허리춤에 허연 털뭉치가 빼꼼 솟아 있다. 씨벌 저건 뭐여. 벙쪄 보던 청은 일단 떨어진 담배부터 수습하고자 방바닥을 짚다가 눈살을 구겼다. 냉기가 진득하다. 이게 방이여 길바닥이여. ...씨벌 가지가지. 청은 욕지거리를 씹으며 고갤 들었다. 이 쪽을 빤히 노려보는 털뭉치는 다시 봐도 개새끼가 맞다.

 

"식겁혔네, 씨벌.. 뭔 놈의 개새끼를 방에서 키우고 지랄이여.."

 

짖지도 않는 주제에 여차하면 물겠다는 듯 매서운 눈동자가 꼭 제 주인이다. 고놈 참.

 

"어야. 니 주인 괘안냐."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가로 달려와 낑낑거리는 털뭉치를 똥마렵냐? 하는 식으로 내려다보자, 자성과 청을 번갈아보며 깡깡거리기 시작한다. 개가 이럴 땐 이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청은 급하게 들어서 자성의 어깨를 짚었다. 보일러를 지 몸에 틀었나 열이 펄펄 끓는다. 얼른 돌려보니 보름이나 됐다는데 피멍도 그대로고 입술도 허옇게 일어나 있고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도 축축하고... 씨벌롬. 청은 자성을 들쳐 업었다. 길기는 긴 놈이 무게는 형편없다. 청은 신발을 꿰찰 틈도 없이 내달렸다. 

씨벌롬. 개호로노므시키. 육실헐 잡놈 같으니라고.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욕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깡깡거리는 소리가 골목 가득 울렸다.
 


14.
꿈을 꾼다.
누군가와 여수 바닷가를 걷고 있다. 

여름이다. 하얀 햇살에 파도가 부서진다.

자성은 웃었다. 살면서 저렇게 웃어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환하게.

옆의 누군가도 웃는다. 웃긴 파마머리에 시커먼 썬글라스를 끼고 환하게.
슬프다.  
...슬프다.

 


15.
"...를.. !!"
"...당께!!"
"느가 아님.. ..야?!"
"씨벌!!!!"

 

웅웅거리던 귀가 씨벌과 함께 번쩍 트인다. 눈을 떠 보니 천장이, 원래 저렇게 깨끗했나. 거뭇거뭇했던 거 같은데.. 자성은 멍하니 옆을 돌아봤다. 두 남자는 한창 말싸움 중이다. 한 명은 의사가운 입은 백발이고, 

 

"나가 적당히 허라고 혔지! 아를 얼매나 조졌으면 저 모양이여! 계속 이 지랄 할꺼믄 딴 데 가야!" 

 

다른 한 명은 

 

"환장하겄네. 증말 나 아니라니께!!"

 

11월에도 하와이안을 고집하는 지조 있는 패션주자 정청. 안 빨아 입는 게 확실하다. 옷장에 하와이안만 가득할 바에야 그게 낫다. ...근데 여긴 어디지. 자성은 그제야 주변을 살핀다. 링거병. 스머프색 이불. 절대금연 팻말. 병원이 맞긴 맞나보다.

 

"근디 쟈는 왜 안 인나는 거여. 노친네 설렁설렁 본 거 아니여?"

"쬐깐한 게 말 끝마다 노친네 노친!!... ....깼고마. 얼른 데불고 꺼져부러!! 다신 오지마러! 아주 발모가지를 뽀사 불라니께!"

 

백발의사는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리며 문을 박찼다. 청은 언제 바락 거렸냐는 듯 빙글거리며 자성에게 다가선다.

 

"노친네 소리에 빽 하는 거 보니께 늙긴 늙은 거여. 그쟈?"

".....어떻게 된 거에요."

"나가 헐 소릴 지가 허네."

 

동그란 의자를 빼 앉으며 담배를 무는 청은 입은 웃고 있는데, 입 만이다. 가라앉은 황갈색 눈동자에 자성은 순간 뒷목이 뻣뻣해졌다. 비몽사몽 중 무슨 말이라도 지껄였다면. 6개월 간 지켜본 바로 정청은 제 정체를 알고도 충분히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침묵은 한참을 이어진다. 자성은 빈주먹을 말아쥐었다. 소위 청소라는 걸 다니면서 한 때 인간이었던 고깃덩어리를 수도 없이 봤다. 당분간은 니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까먹는 편이 편할 거라는 강형철의 충고와 그에 따른 각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사람에게 칼을 쑤셔 넣은 날. 자성은 열여덟 여름 이후 처음으로 끼니를 걸렀다.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자신도 언제고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 

자성은 청의 기색을 면밀히 살폈다.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명색이 서열 4위고, 같이 다닌 재규에게 들은 얘기도 있다. 청이 형님이 저라고 샐샐거려도 칼만 들면 사람이 달라부러야. 괜히 여수 들개가 아니랑께. 청과 대립격인 조규칠 쪽 재규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과장이 섞였대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거다. 자성도 어렸을 땐 질리도록 주먹질도 해봤고 경찰학교 24주 교육기간 동안 부러 무도 동아리에 들어 태권도며, 유도, 합기도 등 온갖 무술을 쉬지 않고 단련해왔지만, 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휘두르는 주먹과 잘 차려진 무도실에서 폼 잡고 배우는 주먹의 무게가 얼마나 다른지. 이기는 건 고사하고 살아 나가기만 하면 다행이다. 여기서 개죽음 당할 순 없어. 자성은 숨을 골랐다. 청은 세 개비째 담배를 물고서야 입을 뗀다.

 

"어야."

"...네."

"느..."

 

배를 찌를까. 옆구리일까. 머리채를 휘어잡고 배후가 누구냐, 누가 가서 분탕질을 내더라냐 윽박을 치면...

 

"방에서 개시키 끼고 있으믄 냄새가 솔찬할 것인디. 괘안냐?" 

"........네?"

     

너무 긴장해서 잘못 들었나 했다.

 

"키우는 개시키 말이여. 괘안냐고." 

 

이토록 진지한 개 타령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인간 정체가 뭘까. 벙 쳐다보자 예의 그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친다.

 

"아 농이여. 농. 느 조크가 모자라고마이."

 

...농. 그러시겠지. 어련하시려고. 긴장은 니미.. 자성은 침대로 푹 가라앉는다.

 

"참 재밌소 그래."

"으이. 이래서 줘 터졌고마."

"편하게 하라면서. 무르는 거요?"

"...싸가지 조낸 없다, 증말."

"싸가지 없는 놈을 여기는 왜 데려온 거요. 어차피 나갈 놈 형님 소리도 안 듣겠다면서. 신경 끈 거 아니었소?"

 

청은 길게 연기를 뿜는다. 따라붙는 눈동자는 여전히 싸가지 없고, 검고, 똑바르다. 청소라면 험한 꼴을 볼만큼 봤을 건데. ...니미. 청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 개시키는 이름이 뭐냐."

 

자성은 뚱하게 눈을 치떴다.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할 입장이지만, 말했듯이 자성은 오기가 셌다.

 

"개새끼."

"....이름이 뭐냐니께 욕지거리,"

"이름이 그거라구요. 개.새.끼."

 

새벽 5시. 손바닥만 한 의원을 가득 메운 웃음소리에 백발의사만 다시 혈압이 올랐다.

 

 

16. 

그날 이후로도 변한 건 없다. 청은 자성을 외면했고 자성 역시 심드렁한 얼굴로 청소를 다녔다. 하지만 자성이 지나갈 때마다 혼자 웃음을 눌러 참는 청을 보며 성철은 점점 기분이 더러워졌다.    

 

 

17.

판잣집으로 소포가 온다. 발신인도 없는 누런 종이를 풀어보면 밴드, 빨간약, 오라메디, 반창고, 붕대, 가위, 소화제, 타이레놀 기타 등등... 자성은 붉어진 귓불을 만지며 중얼거린다. 약국 차려도 되겠네.

 

 

18.

애들 기강이, 수금이, 하는 말을 듣던 끝에 결국 청이 한 마디를 뱉는다. 

 

"성철아. 느 요새 생리허냐?"

 

밥 먹듯 하던 농담에 성철이 얼굴을 굳히며 사무실 문을 부셔져라 열고 나간다. 경구는 조용히 청을 돌아봤다. 청은 속없이 낄낄댄다. 진짜 하나 보다이.

 

 

19.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2월 24일. 밖에 눈이 쏟아지건 말건 청은 오늘도 사무실 장판에 누워 이리저리 티비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어째 볼 게 없네. 소매 길이만 바뀐 하와이안 셔츠를 긁적이며 투덜거리는데 전화가 울린다. 경구였다.

 

"쇠주 사러 간 놈이 싸게 안 오고 전화질이냐아." 

"..형님."

"워메 소름 돋는 거. 니 뭐 잘못 묵었냐? 뭔 님은 붙이고 지랄이여."

"...창고 좀 와바야 쓰겄는디요."

 

저러다 애 잡겄소. 

무겁게 이어지는 말에 청이 벌떡 일어난다.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20.
"이 씨벌놈이 눈까리 안 깔어?!"
 
복부를 제대로 차인 자성이 흙바닥을 뒹군다. 숨이 턱 막혔다. 간신히 바닥을 짚자 구둣발이 사정없이 손등을 짓이긴다.

 

"똑바로 말혀라. 이번에는 기냥 안 끝나니께. 느 칠성이네 넷째허고 뭔 사이여."

"말씀.. 드렸듯이 고등.. 윽, 학교 동창입니다."

"이 개시끼가!!!!"  
 

얼굴로 날아드는 구두를 괜히 피했다. 발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진다. 자성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입술을 물었다. 일이 꼬이려니까 별 게 다 말썽이다. 

어제 퇴근길에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이게 누구여!! 이자성이 아니여? 워메 이게 을마 만이래. 느 은제 내려왔냐.'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고3 여름, 주먹질과 함께 인연 끊고 이때까지 살아 있는지도 몰랐다. 뭐, 세월이 세월인지라 반갑긴 했다. 하지만 역시 세월이 세월인지라 할 얘기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얘기도 없었다. 언제 술 한 번 먹자- 으레 하는 인사말만 나누고 헤어졌다. 고작 20분이었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 없다, 그 동창이 칠성파 중간보스였다. 더 좆같은 건 그걸 오성철이 봤다는 거다. 원순 줄 알았더니 그래도 의리는 살아있는 건지 오성철은 조규칠에게 바로 달려왔고, 그래서 자성은 현재 이렇게 또 터지고 있다. 

오성철이 왜 정청이 아닌 조규칠에게 달려왔나 의아하긴 하지만 일단 생각은 나중이었다. 구둣발이 아주 죽일 참으로 달려든다. 씨발. 이거 산재 되나. 자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소나기처럼 퍼붓던 매가 갑자기 그친다. 이 좀생이가 이렇게 빨리 끝낼 리가 없는데. 자성은 간신히 눈을 떴다. 눈두덩이가 터졌는지 시야가 불긋하다. 몇 번 깜빡이고 다시 앞을 봤다. 벌겋게 부은 못생긴 맨발. 자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한 겨울에 무식하기는.   

 

"야가 아니라자너요."      

"그럼. 성철이가 거짓부렁이라도 한다는 거여?" 

"......"

"니 딱갈이가 나한티 달려올 정도믄 답 나온 거 아니냐 이 말이여, 내 말은."

 

청은 조규칠 뒤에 있는 성철을 본다. 표정 없는 눈동자가 무정도 하다. ...새끼. 청은 쓰게 웃으며 다시 규칠과 마주했다.

 

"동창이라 안 합니까."

"허. 그걸 믿어야. 정청이 느 많이 죽어부렀다."

"...이쯤 하셨으면 야도 알아 들었을 것인께-"

"근디 느. 이 개새끼한티 은자부터 이라고 관심이 많었냐?" 

 

청은 자성을 내려다본다. 뭐 좋은 구경났다고 찢긴 눈두덩이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데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 정말 모를 놈이다. 이 꼴을 당하면서도 버티는 이유가 뭔지, 그러면서 개기기는 왜 매번 개기는 지, 왜 이렇게 자꾸 목에 걸리는지. 청은 길게 한숨을 뱉는다.

 

"인나라."

 

힘겹게 일어난 자성을 얼마 들여다보던 청이 불쑥 뺨을 내리친다. 조규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맞는지 알겄냐."

"모르겠"

 

짜악!! 안 그래도 터진 입술이 쩍 갈라진다. 창고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어야."

"....."

"대답 해라."

".....네."

"전후 사정이 으찌 됐건 형님이 잘못했다 허믄 죄송합니다 하는 게 순서여. 느 그거 했냐."

"........"

"해라."

"잘못한 거 없습-"

"있든 읍든 하라고. 느. 여기 들어오겄다고 안 혔냐."

 

조규칠마저 놀라는 와중 성철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조규칠에게 오면서, 내가 미쳤구나 그러면서,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이 하고 말 거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십년을 지켜온, 한 번 의심해본 적조차 없는 자신의 자리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풋내기에게 뺏길 바에야.

자성은 일렁이는 황갈색 눈동자를 지금 처음 보는 것 같다. 웃음이 사라져서 그런가.. ...그런데 이상하지. 맞은 건 전데 왜 저 사람이 더 아파 보일까. 자성은 조규칠에게 허리를 숙였다.

 

"오해 살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자성이 이러고 나오니 조규칠도 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돌아보는 청의 눈이 서늘했다.

 

"다 내가 부실해서 그런 거니께 한 번만 넘어갑시다. 다신 이란 일 안 만들테니께."

 

암만 사이가 틀어졌대도 같이 한 세월이 이십 년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청이 저 헤실 거리는 낯짝으로 무슨 짓을 할지 규칠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씨벌. 규칠은 비스듬히 입고리를 올린다.

 

"니가 이라고 굽혀부니께 나가 한 번은 넘어가는디. 헛소리 지껄인 저놈아는 으째야 쓰겄냐? 

 

청은 성철을 멀거니 본다. 다리 달린 짐승은 아무 때나 오갈 수 있는 거니께 맘쓰고 그라믄 못 쓴다. 이국한의 말이 맞다. 발 달린 짐승은 다 그런 거다. 청은 휘 손을 내저으며 자성의 팔을 끌어당겼다.

 

"형님. 저 씨불놈... 잘 부탁허요."

 

 

21.

밤이 되도 눈은 계속이고, 방파제에 앉은 청은 줄담배만 계속이다. 자성은 사방 쑤시는 몸을 조용히 주물렀다.

 

"담부턴 아무나 만나고 댕기지 말어라. 괜히 시끄러우니께."

"...네."

"병원 안 가봐도 되겄냐."

"..괜찮습니다."

"그라지 말고 가봐라. 노친네 아직 있을 테니께."

"...내일 가보겠습니다."

"...워메 소름 돋는 거. 오늘은 뭔일로다가 이라고 고분고분허냐? 쳐 맞응께 말을 잘 들어야 쓰겄다 싶냐?"

 

자성은 대답없이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청도 '새끼 써늘허기는' 한 마디 불퉁이고 시선을 같이 한다. 검푸른 바다로 하얀 눈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느 이름이 뭐라고 혔지."

"이자성입니다."

"그려. 그렸지. 이자성이.."

 

꽉 찬 담배갑을 두 개나 비운 청이 빈 갑을 바다로 던지고 일어난다.  

 

"밥이나 묵자. 조낸 허기지네. 어야, 경구 씨벌놈아!! 밥 묵자!! 지철이 개새끼 한티도 전화 넣어야!!"

 

멀찍이 떨어져 있던 경구가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는 새, 자성은 청을 빤히 올려다 봤다.

 

"씨벌롬 엉덩이 조낸 무겁다. 싸게 안 인나냐."

"......"

"와. 무신 할 말이라도 있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 같은 얼굴이다. 자성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가 쑤셨다.

 

"대체 신발은 왜 안 신는 거요?"

"워메 씨벌! 발이 허벌 차다 혔더니 니미."

"....머리가 구진가 보네."

"개호로노므시키가 형한티!"

"형님 아니라면서요."

 

청은 씨익 입고리를 올리며 자성의 뒤통수를 내려치더니 낄낄 웃었다.

 

형님은 무신.

형이라고 불러라.

청이 형. 그라믄 된다. 

 

 

2004년 12월 24일
형님은 무신.
형이라고 불러라.
청이 형. 그라믄 된다.

 

 

22.
비좁은 중국집 원형 테이블에 앉아 세 시간을 버티던 자성은 결국 슬그머니 일어났다. 몸뚱이가 욱신거리기도 하고, 쉴 새 없이 떠드는 청의 입에 질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맞은편에서 빤히 보는 조경구가 영 불편하다. 어디 가냐며 금세 들러붙는 황갈색 눈동자에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 맡아야 하오?' 자성이 자성답게 불퉁대고 나가자, 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경구는 빤한 눈을 청에게 돌린다. 청은 새끼손가락만 한 술잔에 고량주를 듬뿍 따랐다. 
 
"할 말 있으믄 혀라."
"...나가 뭔 할 말이 있겄어요."
"...그르냐."

단번에 들이켜는 청을 따라 경구도 술잔을 든다. 말없이 두어 잔을 비우고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청은 그제야 경구를 쳐다본다. 

"갈라고."
"성철이 형한테 댕겨 올라고요."
"...그려. 가라."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던 경구가 청을 돌아봤다. 그새 담배를 문 얼굴이 참 스산도 하다.

"형."
"..와."
"갔다 올 거여요. 형도 형이고 성철이 형도 형이고 나는 그런께."
"......."
"온다고요."
"..귀 안 먹었어야."

경구는 담담한 등을 한참 보다 여닫이문을 밀었다. 벽에 기대 있던 자성이 등을 편다. 경구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성을 쳐다봤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한다. '씨벌, 눈 한 번 존나게 오네..' 여상스러운 중얼거림이 그 어느 욕설 못지 않았다.

 

 

23.
눈 내리는 바닷가의 밤은 상상 이상이다. 추운데 땀 흘려 봤나? 안 해봤음 말을 마라. 

 
"느 뭐다냐아? 나 안 취했다니께에...?"

 

이 만취자의 고정 레퍼토리는 현재 자성의 등에서 열 번째 흘러나오고 있다. 자성은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물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더라. 나라라도 팔아 먹었나? 사무실까지 갔다가 도로 오는 길이다. 문이 잠겼는데 청은 열쇠가 뭔지 모르겠다더라. '열쇠요, 열쇠!!! 문 따는 거!!!' 바락 소릴 지르자 이히힛, 웃던 정청. 그때 기절하게 패 버릴걸. 그랬으면 최소한,


"근디 느 이름이 뭐라고오오?"

 

이딴 개소리는 안 들었을 것을. 자성은 청을 고쳐 업으며 힘겹게 발을 뗀다.

"....이자성이라니까. 그만 좀 물,"
"으이. 이자성이이. 자성 자성 자성이이~ 어야! 근디 나아 안 취했는디이?"


...지금 업고 있는 건 원숭이다, 말하는 원숭이다... 꾹 참고 주문을 외우는데 뒤통수가 번쩍한다.

 

"이 씨바라탱이가! 형 말씀하시는디 씹고 지랄이여!!"
"아 진짜 쫌!!"
"느 형한테 그라믄 못 써어. 싸가지 읍는 시키가 확! 십 리도 못 가 발병 나믄, 어? 그 노래 아냐 모르냐. 십리이도오 못 가아서어 바알 벼엉 난다아~~ 나아르을 버어리이고오~ " 

 

하다 하다 별 생쇼를. 성질 같으면 애저녁에 던져버렸을 자성이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다. ..이럴 걸 내 편은 뭐하러 들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성은 비오듯 흐르는 땀을 털어내며 한숨을 물었다.

  
"...가만 좀 계쇼. 안 그래도 죽겠으니까."
"....어랏? 근디 느 뭐다냐아? 나 안 취했는디이?"

 

자성은 순간 고민한다. 

확, 바다로 던져 버릴까.
 

 

24.

꿈을 꾼다. 

꼬챙이처럼 마른 여자가 존나게 뛴다. 맨발로, 맨 길을, 얼음길을. 뒤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신발 신고 가소! 신발 신고 가소오! 아무리 외쳐도 여자는 금세 점으로 사라진다. 추울 것인디. 조낸 초라하게. 신발을 들고, 맨발인 제 발을 내려다보는데 누군가 어깨를 짚는다. 돌아보니 여자만큼 마르고 하얀 남자가 멀거니 서 있었다. 처진 눈꼬리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같다. 누구슈 물으려니 한 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발을 잡았다. 와 그러는디 입도 떼기 전에 몸을 숙인다. 입김이 닿았다. 따뜻하게 젖어 있는 숨. 새까만 정수리를 노려보며 울음을 삼켰다. 정말 좆같았다.

 

 

25.

까슬한 혀가 볼이 축축하도록 핥아댄다. 청은 미간을 구기며 고갤 틀었다.

 

"미숙아아. 오라비 눈 뜨기도 전에 뭔 지랄이여어.. 으제 홍콩 솔찬히 다녀 왔을 것인디이.." 

 

그래도 고년 참. 이번엔 귓바퀴를 물고 빨고 난리가 났다. 청은 대충 머리라고 생각되는 곳을 끌어당기는데, 뭔가 이상하다.

 

"..느 은제 머리 볶았냐? 할라믄 지대로나 허지, 머리털이 이게 뭐여, 꼭 개시키...."

 

......개털? 

청은 그제야 눈을 뜬다. 미숙이는 어디 가고 흰 털뭉치가 헥헥헥헥. 그 개다. 개새끼라는 개새끼. 그런데 정신을 좀 더 차리고 보니, 개새끼는 일도 아니다. 알몸, 아니. 팬티는 입고 있다. 이게 뭐여..? 청은 맹렬히 머리속을 뒤졌다. 어제 중국집에서 술 마시고, 경구가 가고, 술 마시고, 이자성이 노려보고, 마시고, 마시고, 마시고.... ....떡을 엄한 데서 친 건 아니겄지. 나름 심각한 와중 문이 열린다. 청은 저도 모르게 개를 집어 들었다. 앉은뱅이 상을 든 자성의 눈이 딱 그거다. '저 미친놈'

 

"...거 개는 왜.."

 

술 덜 깼소? 하는 낯이 어쩐지 더 꼬챙이라, 쳤나? 청은 슬며시 개를 내려놓고 자성을 살핀다. 일단 안색이 파리하다. ...뭐 어제 그만큼 얻어 터졌으니 멀쩡하면 사람도 아니지. 상을 내려놓고 앉으며 허리를 짚는다. ...허리. 허리라. 허리도 맞았겠지. 근데 그런 놈을 데불고 진짜 쳤나? 떡이야 남녀 평등하게 치지만 그래도 저 놈이랑?

 

"밥상머리 앞에 두고 뭐해요. 복 나가게."

".....어? 어어, 그랴.."

 

청은 뭉그적뭉그적 상으로 다가앉았다. 대가리가 샛노란 콩나물국, 단내가 풍기는 쌀밥, 먹음직하게 붉은 오이소박이에 저건 짱아친가. 소담허니 잘도 차렸네. 청은 상을 둘러보다 다시 머리를 긁는다.

 

"뭘 이라고 많이 차렸냐. 대충 허지."

"난 원래 이렇게 먹소."

 

먹는 게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겄네. 청은 뒷말을 삼키며 본론으로 돌진했다.

 

"근디... 나가 왜 여깄냐?"

"...밥, 먹읍시다. 조용히."

 

치뜨는 눈 밑이 거뭇하다. ..그래도 그렇지, 씨벌놈. 뭘 그라고 째려 봐. 지가 기집이여? 하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나오는 목소리는 생크림인 줄. 

  

"뭐.. 처음이냐?"

"기억이 나긴 나요?"

 

전혀. 상상도 안 된다. 저놈이랑 붕가붕가 슉슉...? 청은 고개를 저으며 애꿎은 콩나물국만 휘저었다. 

 

"...나가 정신이 없어놔서." 

"그렇지. 멀쩡한 정신으로 어디 그러기가 쉽겠어."

"...어따 시키 조낸 써늘허네. 술 먹다 보믄 그랄 수도 있는 거 아니"

"주사 한 번 대~단하드만. 길거리에서 옷을 훌렁훌렁,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진짜 민망해서, 어휴..."

 

기...길거리? 아무리 청이라도 충격적인 장소다. 내가 저, 저 희멀건한 걸 데리고 야외 떡을 쪘단 말인가!! 나름 경악에 빠져 있는 청을 두고 자성은 퍽퍽퍽퍽, 분풀이 하듯 밥을 말았다. 그러며 꺼낸 얘기인즉슨, 길에 엎어진 취객을 보더니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으라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옷을 벗어줬단다. 그래도 팬티까진 안 벗더란다. 그랬으면 엉덩이를 걷어찼을 거라나? 청은 밥알을 짓이기는 자성을 보며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우와. 간땡이 한 번 존나게 크다이. 감히 형 엉뎅이를 걷어찰라 했어야?"

"곱게 데려온 걸 다행으로,"

"그려, 그려. 존~내게 감사허다. 근디 은제 일어나서 밥까지 혔냐? 빠릿빠릿하고마이. 어디 한 번 묵어볼... 와, 야!! 웜메! 이시키 이거, 느가 끓인 거 맞어야? 어디 각시라도 숨겨 논 거 아니여? 뭔 사내새끼 손맛이 이라고 좋냐! 깡패를 뭐하러 허냐. 해장국집 차려부러! 엔간한 가시내보다 낫고마!"

 

콩나물국을 그릇째 벌컥벌컥 들이켜는 청에, 자성은 다시 생각했다.

역시. 바다에 던져버렸어야 했다고.

  

 

26.   

".......이게 대체 뭔....."

 

청의 미적수준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물론 본인 기준에서), 이건 그 유명한 크리스마스의 악몽이었다. 회색, 흰색, 검은색, 회색, 흰색, 검은색... 눈 씻고 찾아봐도 분홍색, 하다못해 파란색, 노란색도 없다. 게다가 다 민짜. 주인만큼이나 맹맹하다. 청은 더 볼 것도 없는 옷걸이를 서너 번이나 뒤지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신발을 꿰차고 있는 자성에게 급히 몸을 돌렸다.

 

"숨겨 논 거 있제?"      
"정 싫으면 벗고 오시든가."

 

쌔하게 한 마디 던지더니 훌쩍 일어나는 게 진짜 가버릴 폼이다. 청은 뛰듯이 문가로 다가갔다.

 

"그라지 말고 어여 내놔야!"

 

큰일이라도 났다는 투다. 하와이안은 뭐 대단한 패션이라고. 아무튼 쌤통이다. 어제 얼마나 고생을 했게. 자성은 검은 잠바 지퍼를 올리며 청을 훑어봤다.

 

"왜. 건 좀 그렇소? 어제는 잘만 벗으시드만."

"이 시키가 증말! 퍼뜩 안 내와야! 느 혼난다! 농담 아니여!"

"예예."

 

여수 들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니. 청은 작전을 바꿨다.

 

"..그려. 느가 고생한 건 안다. 아는디 오늘이 그 뭐냐, 아주 훌륭한 분이 태어나신 날이여. 느도 알제? 그 배 이르케 나온 노친네. 아무튼 이런 날 이라고 정 없어 불면 못 쓰는 거다. 이? 그러니."

 

횡설수설은 어젯밤에 충분히 들어줬다. 자성은 씨익 입고리를 올렸다.

 

"먼저 갑니다. 형."

 

얼른 방을 나서 대문 앞에 섰다. 사자후라도 내지를 줄 알았는데 어째 조용하네. 자성은 피식거리며 담배를 문다. 정말 웃긴 사람이다. 무슨 하와이안에 목숨을 걸어. 게다가 그 간절함이라니. 큭큭거리며 라이터를 꺼내던 자성은 이렇게 요란한 크리스마스가 처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이고. 그런데.

...왜 웃은 거지. 나.

자성은 담배를 문 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27.

멀뚱히 서 있긴 청도 마찬가지로, 청은 캉캉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개새끼가 발등을 간지럽힌다. 제 주인과 닮은 까만 눈알.

 

"...어야. 느 주인 원래 저라고 웃냐?"

 

캉캉!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청은 머리를 긁적이며 쭈그려 앉았다. 

새끼. 웃으니께 사람 같네. 

 

 

28.

북대문파는 종일 쑥덕댄다. 얘깃거리가 많았다. 정청 공식 오른팔인 오성철이, 딴 사람도 아니고 조규칠로 갈아탄 건 쇼킹 그 자체. 묵묵하고 희멀건하지만 제법 강단 있게 조규칠에게 따박거리던 이자성인지 자석인지가 드디어 청에게 통과된 건 어쩐지 반가운 일. 하지만 가장 핫한 이슈는 따로 있다. 정청이 크리스마스에 검은 티에 회색 정장 바지를 입고 온 것이다!!! 

 

 

29.

경구는 담배를 피고 있는 성철 옆으로 선다. 경구도, 성철도 얼굴이 푸르딩딩했다. 

 

"거 들었는가 모르겄네. 청이 형이 검은 걸 입고 와부렀어요. 시상이 망하려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만 보는 성철에도 경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진숙이년은 잠잠허요? 고년 요날만 되믄 꽃 사달라고 지랄병,"

"고만혀라. 느가 안 보태도 허벌 좆같응께. ...가야."

 

경구는 성철을 물끄러미 보다 고개를 돌린다. 덤덤하던 목소리가 푹 꺼졌다.

 

"....진짜 갈라고."

 

성철은 헛웃음을 흘린다.

 

"씨바라. 다 끝난 거여."

 

경구는 길게 연기를 뱉었다. 한참 만에 다시 입이 열린다.

 

"...규칠이 형님이랑 청이 형 사이가 아무리 쥐좆이어도 어차피 다 같은 식구자너요. 안 보고 살 것도 아닌디,"

"보믄 다 식구냐. 느도 아직 멀~었다."

 

경구는 반쯤 태운 담배를 바닥에 짓이긴다. 오늘따라 영 담배가 비렸다.

 

"...규칠이 형님 밑에 참말 있을 수 있겄소."

"....느 일이나 신경써라. 나는 나가 알아서 할라니께."

 

경구는 제 발에 찢겨 내장을 토해낸 담배를 내려다 본다. 다시 필 수는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역시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와 그렸는디."

"......."

"청이 형한테 말할 수도 있었자너. 아니. 그래야 하는 거잖여. 근디 왜... ...별 일 아닌 줄 알믄서. 이자성이가 칠성이네하고 상관 읍는 거 몰랐다곤 못 하겄지. 그짝하고 그래 부렀으믄 뭐단다고 우리한테 왔겄어. 칠성이네가 프락치맹키로 그런 집구석도 아닌디. 말이 안 되잖여."

 

성철은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던지고 새 담배를 문다. 그 담배가 반쯤 줄었을 때, 성철은 먼 곳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알아서. 알아서 그렸다."

"......"

"별 일이 아닌께. 대가리 존내 구린 느도 이라고 알아 불 만큼 암것도 아닌께. 규칠이 형 말고는 갈 데가 읍드라. ..씨벌. 조낸 웃기지야."

"....."

"느도 봤지. 청이 형이 고거 이름 알고 있는 거."

"......"

"....그려. 것도 별 일 아니라믄 아닌디 이 바닥 한 십 년 구르다 보니 씨벌 감만 좋아져분다." 

"..청이 형을 그라고 몰러?"

 

성철은 푸후, 바람 빠진 소릴 낸다. 

 

"알아서 그렸다고 안 혔나."

 

성철은, 미간을 구기며 고갤 가로젓는 경구에 쓰게 웃는다. 차라리 너 같으면 나도 편할 것인디. 성철은 등을 바로 폈다.

 

"이자 이라고 오지 말어."

"......."

"그라고.."

 

성철은 경구의 목을 잡아당겨 목소릴 낮췄다. 경구는 더욱 낯을 구긴다. 볼을 툭툭 치고 창고로 들어가는 성철의 뒷모습에 길게 한숨을 뱉었다. 오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청이 형 느무 믿지 말어라.

그 양반, 아무도 필요 읍는 사람인께.

 

 

30.

찜찜한 맘을 따져볼 겨를도 없는 하루였다. 언제 투명인간 취급 했냐는 듯 몰려드는 잔디머리들에게 뭐라고 답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청은 그 와중에 이 상렬한 시키가 날 요로코롬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이지, 근데 콩나물국은 예술이라며 다 같이 가서 먹자고 사람 식겁하게 하지, 어느 새 나타난 경구는 또 빤한 눈으로 불편하게 하지. 절정은 크리스마스 회식으로, 그 코딱지만 한 중국집에 이번엔 이십 명 가까이 우르르 몰려가 부어라 마셔라 한 거였다. 얻어 터지고 택시 노릇한 게 고작 하루 전이다. 진짜 한계였다. 자성은 슬그머니 엉덩이를 뗐다. 이 난리 통에 누가 알랴 싶었다. 그런데 아는 놈이 있더란 말이다. 오른손목을 턱하니 잡는 청에게 자성은 '나 어제 얻어 맞고 형님 업느라 진 빠진 놈이요' 어퍼컷을 날렸다. 간신히 빠져 나와 집에 오니 새벽 세 시. 정말 손 끝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널부러져 있는데 뒤늦게 보고 생각이 났다. 정말, 진짜 그냥 자고 싶었지만 공무원 아닌가. 공중전화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너무 늦었지만 보고를 안 한 거랑 했는데 그쪽에서 안 받은 건 엄연히 다르다. 그래도, 자겠지 뭐. 자성은 심드렁 번호를 눌렀다.

 

[어.]

"....어?"

[뭐야.]

"..아, 아닙니다. 안 주무셨어요?"

[자면서 받겠냐.]

 

자다 깬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다. 잠을 아예 안자나. 자성은 속으로 혀를 내두른다.

 

[진척 있어?]

"연결 됐습니다."

[수고했다.]

 

반 년 가까이 놀고 먹었는데요, 뭐. 맞긴 많이 맞았지만. 자성은 괜히 전화기 줄만 만지작거린다.

 

[보안 라인 다시 세우고 있으니까 당분간 전화 하지 말고 보고서 직접 써서 우체통에 넣어. 주소, 발신인, 수신인 쓰지 말고 S만 쓰면 된다.]

"네."

[정청 포함한 윗대가리 뿐 아니라 접촉하는 놈들 싸그리 다, 무슨 얘길 하는지, 뭘 먹고 뭘 입고 어떤 기집애랑 자빠져 자는 지까지 보고 듣는 모든 걸 쓰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이자성.]

 

늘 넉넉하고 무던하던 목소리가 쩍 갈라진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판단은 내가 한다. 알겠냐.]

"...예."

[이제부터가 진짜다. 정신 바짝 차려. 정청한테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저자세로 나가지도 말고. 하던 대로 하되,]

 

자성은 마른침을 삼킨다.

 

[지금부터는 똑똑히 기억해라. 니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끊는다 소리도 없이 전화가 끊긴다. 자성은 멍하니 전화기를 쥐었다. 

매번 하던 밥 인사가 사라졌다.


 

2004년 12월 25일
똑똑히 기억해라. 
니가 누군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31.
오성철은 보이다 안 보이다 했다. 
조경구는 자주 술에 취했다.
청은 크리스마스 이후 다시 하와이안을 꿰찼다. 백 미터 밖에서도 띌 빨간 꽃무늬였다. 

 


32.
자성은 새벽 두 시쯤 보고서를 쓴다. 조경구, 차지철, 조규칠, 오성철... 어느새 익숙해진 이름들을 써내려가다 보면 꼭 같은 지점에서 브레이크가 걸린다. 정청. 안 그래도 말 많은 인간이 걔 중 반은 욕, 반은 음담패설. 이건 보고서를 쓰는 건지 에로소설을 쓰는 건지 제 처지가 새삼 한심해진다.

12월 31일. 2004년의 마지막 날에는 속칭 꽃집이라 불리는 집장촌을 어거지로 다녀 왔다. 청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떡치는 와중에도 그놈의 주둥이는 쉬질 않았다. 얇은 벽 너머로 쏟아지는 신음과 수다가 어찌나 난잡하던지, 옆에 발가벗다시피 한 여자를 안을 마음이 코털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자성은 담배 한 갑을 비우고서야 펜을 든다. 

솔직히 반쯤은 엿 먹으라는 심정이었다.
     

 

33.
".....이야."


고영달은 보고서를 반쯤 읽다 말고 고개를 든다.  
 

"정청 이거. 깡패새끼만 아니면 친해지고 싶다야."
"제수씨가 들으면 참 좋아라 하겠다."
"형수님, 인마. 뭐, 이자성이 제법 하네." 


강형철은 소파에 기대 금붕어마냥 뻐끔거린다. 희뿌연 담배연기가 동그랗게 피어올랐다.


"새해인산가보지 뭐."
"금문짝 새끼들도 이러면 좀 좋아. 그 개새끼들은 암튼 뭘 해도 졸라 과해요." 
 

강형철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2005년 1월. 골드문은 출범 1년만에 강원도를 접수했다. 

고영달 말마따나 과하게 뻑적지근한 새해인사였다.
 

 

34.
자성은 청소에서 제외됐다. 마주칠 때마다 썰어버릴 듯 노려보는 조규칠이 거슬리긴 하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보고서 쓸 시간이 늘어났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밤을 새야 했다. 초대 오야 이국한의 기일까지 겹쳐 삼일 밤을 샌 날. 자성은 우체통 옆에 쭈그려 앉아 빈 담뱃갑을 구기며 생각했다. 정청의 입을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게 하려면 어거지로라도 말을 늘려야겠다고.
 

 

35.
세상에 쉬운 일이 없는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깡패 이거, 정말 피곤하다. 말수도 별로 없는 자성이 청보다, 아니, 청 반만큼이라도 말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보고서로 또 밤을 새고, 밥 먹고 치우고 열한시가 넘어서야 잠깐 눈 좀 붙이려는데 한 번도 울린 적 없었던 전화기가 울렸다. 청이었다. 얼른 사무실로 튀어오라기에 긴급 연락망이 진짜 있긴 있구나 싶어 달려온 내가 병신이지. 자성은 퀭한 눈으로 만두를 내려다본다. 낄낄거리며 이를 쑤시는 청의 머리를 딱 한 대만 팼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여 먹어야. 경구 이 시키가 큰 맘 먹고 남겨 준 건디. 그쟈?"


어제 또 술판이었는지 자성 못지않게 퀭한 경구가 또 빤히 본다. 두 달쯤 되니 이제 불편하지도 않다. 자성은 묵묵히 젓가락을 집었다. 
 

"지철이는 안 온다냐?"
"안 불렀는디. 갸는 짱개 아니자너요."
"그렸나?. ..이? 가만 있어봐라. 야도 짱깨 아니자너. 어야. 느는 떡국 먹어야 쓰는 거 아니냐?"


자성은 만두를 가르며 덤덤히 입을 연다.

 

"나도 화교요."


청과 경구는 휘둥그레 서로를 마주 봤다.
 

"야가 시방 뭐라냐?"
"그라게요."


청은 자성을 뚫어져라 본다. 경구도 마찬가지다.  

 

"느가 참말로 짱개라고?"
"뭐 좋은 거라고 거짓말을 해요."

"워메 씨벌 진짠가 보네. 으째 이제까정 말을 안 했다냐?"

 

처음 얼마는 눈도 안 맞추는 사람한테 '저기 나도 화교거든요?' 할 수가 없었고, 다음 얼마는 말할 틈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는 되도록 끝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화교 출신인 게 난생 처음 도움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하는 게 영 껄끄러웠다. 겪었던 냉대가 뼛속 깊이 박힌 탓이었다. 자성은 청을 마주 본다. 화교출신에게 끔찍하다는 강형철의 귀띔과 달리 반갑다기보다 그저 신기하다는 눈빛이다. 하지만 멸시와 놀람은 없다. ...같은 출신이라는 게 이런 건가. 자성은 고갤 숙이며 만두를 뒤적거렸다. 

 

"입 한 번 오지게 무거워 분다. 저만 짱깨인 것도 아닌디. 허 참. 그람 나이는 몇이여. 슬마 경구 느보다 많은 거 아니여?"

 

경구는 그럴 리가, 하는 눈이다가,  

 

"서른셋이요."

 

-하는 말에 입이 쩍 벌어진다. 물론 청의 입도. 그럴 만도 한 게 자성은 이 얼굴로 조경구보다 무려 네 살이나 많았다. 충격과 경악의 점심이 지나고 자성과 나란히 사무실을 나오던 경구가 어깨를 툭 친다. 경구는 한껏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스킨 뭐 쓰는디. 

 

 

36.

이자성의 출신과 나이는 일파만파 번진다. 자성은 며칠을 동물원 원숭이 꼴이 됐다.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37.

화교출신에게 끔찍한 건 청이라기보다 조경구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경구는 확실히 달라졌다. 스킨 안 쓴다는 자성에게 혼자만 젊어 부리면 좋단가 불퉁대고, 나도 콩나물국 끓여달라고 불퉁대고, 성화에 못 이겨 한 번 끓여주니 또 해달라고 불퉁댔다. 겉보기와 달리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산만한 덩치가 후룩후룩 콩나물국을 비우고 더 달라는 듯 빈 그릇을 쓱 내미는데, 입가에 노란 콩나물 대가리가 대롱대롱했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 쪽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 개꼬리를 잡았다 놓았다 놀고 있던 청은 멍하게 입을 벌리다 불붙은 담배를 떨어뜨려 저녁 내내 자성에게 새살을 들었다. '어따. 가시네맹키로 꺼슬허고마. 느 그거 안 달린 거 아녀?' 한 마디 했다가 숟가락에 머릴 얻어맞고 쫓겨날 뻔한 건 말할 것도 없다. 청은 개를 인질로 잡고 빽빽댔다. '저 상렬한 시키가! 그라도 나가 형인디!!' 물론 자성도 만만치 않았다. '뻑하면 개는 들고! 내려놔요! 애 놀라!' 경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커다란 솥을 싹싹 비웠다. 껑! 개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38.

동백꽃 필 무렵이 되자 청과 경구는 술을 안 마셔도 자성 집에 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보고서 쓸 시간은 쥐뿔도 없었다. 자성은 새벽녘 강형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형철은 휴대폰을 보낼 거라고, 그동안 잘하고 있으라고만 했다. 밥 인사는 역시 없었다.

...세 살 먹은 애새끼도 아니고. 자성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청과 경구는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제 집인 양 대자로 누워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었다. 흰 털뭉치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자성은 문가에 서서 말만한 두 남자와 개를 멀거니 내려봤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39.

한 번 알고 나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조경구와 달리 정청은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알 수 없는 건 자성 자신이었다. 히죽거리는 불그레한 낯이, 우습기 짝이 없는 하와이안이, 꾸질해 뵈면 신발을 던져주는 기가 막힌 버릇이 조금씩 불편해졌다. 특히 신발.

청은 삼 일 걸러 한 번씩 아무에게나 신을 벗어준다. '깡패 말고 자선사업을 하지, 왜.' 자성이 비아냥거리면 쓱 웃으며 뒤통수를 후려친다. '씨벌놈. 말 이삐게 하라니께.' 낄낄거리며 저 혼자 걸어가는 청은 또 맨발이다. 씨발, 신경질적으로 뇌까리는 자성 옆에서 경구는 쯧쯧 고갤 젓는다.

멀찍이 까칠하게 마른 오성철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40.

자성이 잠입한 지 일 년째 되는 6월. 중국과 거래를 튼 북대문파는 거래성사 기념으로 오동도에 놀러갔다. 술판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거나하게 취한 청이 벌떡 일어나 동백 아가씨를 제법 구성지게 뽑아냈다. 가수 나부렀고마! 박자를 맞춰가며 좋아라 박수를 치는 잔디머리 사이에서, 자성은 봤다. 왜 갑자기 그런 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보였다. 청은 거죽만 헤실대고 있었다. 황갈색 눈동자는 텅 비어 있다. 조직원들이 이 자리에서 다 죽어버린다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은, 지독히 혼자인 눈. 자성도 알고 있는 눈이었다. 요새도 종종 거울 속에서 마주치곤 하는, 바로 제 눈이다. 자성은 소주가 담긴 종이컵을 와그작 그러쥐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담배를 빼물며 동백나무로 걸어갔는데, 먼저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오성철. 돌아보는 얼굴이 거무죽죽하다. 취한 것도 아닌 것도 같다. 고개를 숙이자 말없이 묵묵하던 눈이 무감하게 웃는다.

 

"..그 냥반이 달라 불만 허네. 눈까리 한 번 존내게 좋구마."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청의 두 번째 동백아가씨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훗날 돌이켜 보건데 짱짱한 햇볕 아래 오소소 돋은 소름은 어떤 예감이었다. 방울을 딸랑이며 칼을 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죽음을 향한 직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북대문파에 흉흉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5년 6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41.

오동도에서 돌아온 이후, 청은 잘못 본 건가 싶을 정도로 그대로였다. 입에 담기도 뭐한 농지거리를 늘어놓고, 술을 마시고, 떡을 치고, 자성의 단칸방에서 개를 데리고 놀았다. 자성도 어느 새 그날의 정청을 조금씩 잊어갔다. 떠올릴 틈이 없었다. 새벽녘 강형철에게 보고를 하고 잠깐 눈 붙였다 일어나 날이 밝도록 퍼져 있는 청과 경구를 깨워 밥을 먹고 온종일 정신없이 구는 청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 새 날이 저물었다. 하루가 짧았다.

하지만 가끔, 어스레한 새벽. 강형철과 통화를 마치고 집 앞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물면 후텁지근한 바람을 타고 동백아가씨가 들렸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자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눈을 감았다. 목이 메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42.

“참말로 노래방을 안 가봤다고? 한 번도?”

 

여느 때처럼 술로 하루를 마감하고 돌아오는 길에 뜬금없이 노래방 타령을 하는 청에게 그런 델 뭐 하러 가냐고 한 마디 했다가, 자성은 현재 눈 셋 달린 외계인 취급을 받는 중이다. 청도 경구도 자성이 서른셋이요 했을 때의 그 눈빛이다. 자성은 '뭐 꼭 가야 되나..'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사실 노래방 뿐 아니라 나이트, 극장, 심지어는 술집도 몇 번 안 가봤다. 어렸을 때는 술은 공터에서, 노래나 영화에는 흥미가 없었고, 커서는 여유가 없었다.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죽자고 뒹굴어도 월세값 내기도 빠듯했다. 몇 푼 남은 돈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누군가 버린 책으로 공부를 하고, 길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주워 담배를 피웠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자성은 속으로 쓰게 웃으며 담배를 문다. 그런데 불붙이기도 전에 두꺼운 손이 라이터를 막는다. 경구가 진지해지면 재수가 없는데. 자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라믄 이참에 가봐야 쓰겄고마”.

“..아니, 난 별로,”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솥뚜껑 같은 손이 팔을 잡아챈다. 이번엔 청이다.

 

“그라제. 가야제.”

“..그닥 가고 싶지 않,”

“경구야 뭐허냐. 경숙이 년한테 방 하나 비두라고 싸게 전화 넣어야.”

“됐다니,”

“경숙아, 나 경군디. 우덜 가는 방 있제? 거 싹 치워놔라. 그람. 청이 형도 가시제.”

 

뭐라거나 말거나 청과 경구는 자성의 팔을 하나씩 잡고 앞서간다. 어디 연행 되는 꼴로 질질 끌려가며 자성은 목소리를 높였다.

 

“글쎄 싫다니까!!!”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43.

장마가 시작되자 자성은 한층 더 정신이 없어졌다. 일 때문은 아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일 때문이다. 그냥 경찰이면 휴가라도 가지, 잠입경찰 이자성은 휴가는커녕 잠 잘 시간도 줄어들었다. 말하나마나 청과 경구 때문이다. 둘은 허구한 날 자성을 끌고 돌아다녔다. 룸살롱, 포장마차, 소주방 등등 술집도 종류별로 다 가봤고 영화도 장르별로 휩쓸었다. 청의 요구 대로 필름을 돌리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동네 영화관에서 자성은 자신이 의외로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청이 죽고 못 사는 떡 영화도 그럭저럭 봐줄 만 했다. 자성은 어느 새 웃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청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피식 혹은 푸핫 웃음을 터트리는 자성 옆에서 헤벌쭉 같이 이를 드러낼 뿐이었다.

  

 

44.

“...다 읽었으면 이리,”

“아 쫌 가만 있어봐. 준석이가 동수한테 하와이 가라잖아.”

 

강형철은 뻘쭘하게 손을 거두며 소파에 기댄다. 고영달은 아주 보고서를 뚫고 들어갈 기세다. 그러고 보니 영달도 한 때는 영화 마니아였다. 액션영화를 만들 거라고 설쳤던 때도 있었는데. 감독이 됐으면 지금보단 편했을까. 적어도 그 좋아하는 극장은 자주 갔겠지. ...그러고 보니 난 뭘 좋아했더라. 뭐가 있긴 있었던 거 같은데. 형철은 담배를 물며 고개를 젖힌다. 천장으로 길게 연기를 뱉었다.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로 이상구 팀장이 보이는 것 같다. ‘뻘짓하지 말고 가만있어, 새끼야.’ 형철은 눈을 감는다. 이상구 팀장이 죽은 지 삼 년. 아직 갈 길이 멀었다.

  

 

45.

장마가 끝나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북대문에는 새로운 유흥거리가 생겼다. 해질 쯤 창고에 둘러앉아 문가를 기웃거리면 오매불망 기다리던 빨간 하와이안이 저만치 비친다. 잔디머리들은 빛의 속도로 자리에 앉았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창고 안으로 흘러든다.

 

“그러니까 신발 좀 벗어주지 말라구요. 이러다 낮잡혀 일수도 못 걷어. 굶어 죽을 거요?”

“아이고. 고거시 걱정이셨어요? 우덜이 그라고 좆물이믄 짱개새끼들이 거래를 텄겄어야? 그라고 만에 하나 글케 되믄 형이 장기를 팔아서라도 밥은 안 굶일 텡”

“아 그 소리 쫌!”

“그란데 이 시키가 와 자꾸 빽빽대고 지랄이여! 귀 먹어야!!”

“잘됐네. 어차피 사람 말 귓등으로도 안 들을 거 이참에 아예 시원하게 떼버리쇼!”

“이 씨불럼이 말하는 싸가지 보소! 잘 하믄 아주 근수대로 갖다가 팔겄다?!”

“.....진짜 내가 말을 말아야지...”

“자! 자! 띠 바! 여 있으니까 띠보라고오!”

 

청이 자성의 코앞까지 귀를 들이대자 잔디머리들은 더욱 눈을 빛낸다. 이자성은 청이 저렇게 나온다고 ‘아니, 고거시 아니고요..’ 할 인물이 아니다.

 

“와 가만있냐? 회칼 빌리 주, 악! 이 상렬한 시키가! 놔! 안 놔아아악!! 아파야!!”

“장기도 팔겠다며 이게 아프긴 뭐가 아파!!”

“아아, 야! 경구야 느 뭐다고 서 있냐!! 좀 말려야!!”

 

대차기는 오지게 대찬 자성이 청의 귀를 잡고 늘어지자 중간쯤 멀뚱히 서 있던 경구가 쩍 하품을 늘어놓으며 자성의 팔을 잡는다. 자성이 씩씩대며 손을 놓자 청은 귀를 매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워메 씨벌. 뭔 놈의 힘이 장사여. 떨어진 거 아니여, 이거? 경구야. 내 귀 무사허냐?”

“잘 붙어 있는디요.”

 

자성은 청을 노려보다 손사래를 친다.

 

“됐어요, 됐어 그래. 신발 신지 마요. 평생 맨발로 다니시라고. 장기도 다 갖다 팔고 어디 한 번 잘 살아보쇼.”

 

팩 돌아선 자성이 저만치 멀어지자 청은 그제야 킬킬대며 경구의 어깨에 기댄다.

 

“어야. 밥 묵을 때 됐는 갑다.”

 

잔디머리들은 아쉬운 한숨을 토한다. 아침드라마를 기다리는 아줌마들이 따로 없다.

   

 

46.

오성철은 거의 혼자 지냈다. 애초에 조규칠 밑으로 가지도 않았고, 끝까지 곁을 지키던 차지철마저 시퍼렇게 멍을 들여 놨으니 타의보다는 자의였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일도 잦아졌다. 처음에는 너나 할 거 없이 오성철을 실어 나르던 조직원들도 늦더위가 끝나갈 쯤에는 너나할 거 없이 늑장을 부렸다. 오성철은 버려진 휴지조각마냥 길바닥을 차지하고 누웠다. 씨벌. 일그러진 입매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같았다.

   

 

47.

경구는 종종 널브러진 성철을 사무실로 업어 왔다. 그때마다 청은 묵묵히 사무실을 나섰다. 자성은 구부정한 등을 말없이 따랐다. 청이 삼선 쓰레빠를 끌고 향하는 곳은 주로 자성의 단칸방이었다. 자성은 장판에 누운 청이 개꼬리를 잡아당기며 비죽이 웃고 나서야 방에 들어섰다. ‘거 개 좀 가만히 두라니까.’ 여상스레 불퉁거리면 청도 으레 ‘씨벌’로 시작해 ‘이 개시키여, 나여.’로 끝나는 유치한 심통을 부리곤 했다. 말도 안 되는 말씨름은 경구가 검은 봉지를 달랑거리며 문을 열어야 끝이 났다. 셋은 곰팡이 핀 벽에 나란히 앉아 경구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메로나. 조스바. 비비빅. 돼지바. 사람은 셋인데 아이스크림은 꼭 네 개였다. 조스바와 비비빅은 청의 차지였다. 세살박이마냥 아이스크림 막대를 쪽쪽 빠는 청을 보며 자성은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청은 기다렸다는 듯 빈 막대를 휘둘러 기어이 자성의 이마를 때렸다. ‘아 쫌 더럽게!’ 발딱 눈꼬리를 올리는 자성 옆에서 경구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자성의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은 날들이었다.

   

 

48.

일수도 못 걷어 굶어 죽을까 했던 자성을 비웃듯 중국과의 거래는 차곡차곡 진행됐다. 9월 둘째 주. 첫 번째 거래일이 정해진다. 11월 21일 새벽 1시 작금항. 담당은 조규칠이다. 오성철이 북대문 구역에서 자취를 감춘 건 그로부터 삼일 뒤였다.

  

 

49.

강형철은 주인 없는 보안과 팀장실에 앉아 담배를 문다.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막 불을 붙이려는데 문이 벌컥 열린다. 

 

“뭐가 어떻게 됐다고?”

“제사는 잘 지냈냐. 음식 좀 싸오지.”

“이 판국에 흰소리가 나오냐. 어떻게 된 거냐고.”

 

강형철은 별 대꾸 없이 보고서를 건넨다. 고영달은 선 채로 보고서를 읽었다. 강형철이 담배를 태울 동안 고영달의 얼굴은 점점 구겨진다. A4 종이를 다 넘기고 고영달은 짧게 숨을 토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 진짜 이 새끼들.. 일사파면 북대문 작은 아버지잖아. 이국한하고 의형젠가 뭔가 그거 아니었어?”

“진짜 형제도 돈 몇 푼으로 칼부림인데 오년이면 주제에 많이 참았지.”

 

씨발. 고영달은 넥타이를 헐겁게 풀어내며 던지듯 보고서를 내려놓는다. 보고서의 요지는 이렇다. 이국한 생존 당시 북대문파와 거의 한식구나 마찬가지였던 일사파 강구식이 북대문을 노리고 있다. 점점 세가 커지는 북대문이 중국과 거래까지 트자 군침이 제대로 돈 모양이다. 하지만 정보도 없이 움직일 수 없는 건 깡패나 경찰이나 마찬가지. 강구식은 정보통을 풀가동해 북대문 내 미끼를 물 만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저들끼리 하도 딴딴한 북대문이라 방심한 게 실수였다. 얼마 전 북대문 쪽 한 명이 유입됐다. 오성철이었다. 고영달은 한숨을 쉬며 담배를 문다.

 

“아래나 위나 암튼 좆도 나쁜 대가리들 굴리느라 생고생들을 해요, 아주.”

 

형철은 말없이 보고서를 들척인다. 일사파 계획은 제법 쓸 만했다. 중국에서 배가 들어오는 날을 노려 본진과 항만을 30분 간격으로 친다. 본진을 먼저 치는 건 거래 가며 줄줄이 달고 가진 않는다는 이 바닥 상도덕을 잘 알고 있어서다. 지원 병력을 차단하고 항만 쪽은 중국 애들이 떠난 뒤 급습한다. 수적으로 달리는 항만 북대문은 금세 목이 따일 테고, 조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성철이 있는 한 본진 역시 장담할 수 없다. 경찰이 뜬다 해도 북대문이 불리하다. 일사파는 북대문과 달리 지역 경찰과 사이가 좋다. 강형철은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다.

 

“...시간 어느 정도 돼지.”

 

앞뒤를 잘라먹어도 고영달은 금세 알아듣는다.

 

“금문짝이야 지금까지 모은 증거로 비리 폭행 엮고 국철이가 안에서 썰 좀 풀어도 삼사 년. 잘 알잖아.”

 

강형철은 묵묵히 끄덕인다. 제일파 장수기는 일이년 안에 서울 본진을 깡그리 잃을 테다. 충청도 2진도 버텨 봤자 이년. 그 이상은 손 써줄 수도 없다. 지금이야 석동출이 호흡기 달랑달랑한 장수기에게 별 관심 없다지만, 안정권에 들어서면 지나치게 오래 살아 있는 장수기를 거슬려 할 거다. 돈 처먹은 금배지들을 업고 쑤셔댈 게 뻔한데. 그러면 경찰개입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북대문이고 뭐고 데뷔시킬 틈도 없다. 최대 사 년. 그 안에 북대문을 서울로 올려야 한다. 고영달은 담배를 뻑뻑대며 미간을 구긴다.

 

“바빠 죽겠구만 이 새끼들은 왜 중국하고 지랄은 해서 사단을 내. 얌전히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몸값 올려줄까.”

“피가 땡기나 보지.”

“피는 지랄. 마약이지?”

“그렇지, 뭐.”

“나 이거 참.... ...어쩌냐. 간판도 띄우기 전에 은퇴시켜야 되냐?”

“일단 커버해보고.”

“또 저 혼자 미리 알고 있었구만. 시놉 뭔데.”

“마약반에 아는 애들 있지.”

“...있으면.“

“슬쩍 흘려줘. 인사고과로 쩔쩔매잖아, 걔네. 좋다고 달려들 거다.”

“커버하자더니 뭔 소리야.”

 

골드문 프로젝트는 경찰 내에서도 일급비다. 북대문이 잡혀 들어가도 협조는 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북대문이 골드문이나 일사파처럼 경찰하고 딸랑딸랑한 집구석도 아니고.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초대 오야 기일을 여태 챙기는 놈들이니 말해 뭣해. 애초에 그래서 더 북대문이었던 건데. 고영달은 표정 없는 강형철을 답답하게 건너본다. 강형철은 느리게 말을 잇는다.

 

“마약반이야 북대문이든 일사파든 상관없잖아.”

“..현장에서 북대문을 치운다? 어떻게. 일사파 뒷배 봐주는 경찰 놈들은 또 어쩌고.”

“마약반이 미쳤다고 지역 경찰하고 정보를 나누겠냐. 뒷수습 할 때나 부르겠지. 일사파는 조사다 뭐다 줄줄이 들어갈 거야. 그 사이 북대문은 나머지 일사파 제대로 손봐줄 테고. 잘 됐어. 어차피 지금 몸집으론 골드문한테 너무 후달리잖아. 일사파 정도는 먹여줘야지.”

“..북대문 빼는 방법은.”

“작금항 가는 길에 대미산 있으니까 타이어에 펑크 좀 내야지.”

“...진성이 쓰게?”

 

강형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보고서에 적힌 이름이다. 이진성. 일사파 중간 보스. 혹은, 경위 이진성. 1995년 잠입 당시 일사파에 투입된 언더커버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이 이름을 글자로 보게 될 줄은, 아마 잠입시킨 이상구 팀장도 몰랐을 거다.

 

“걔가 그럴 정신이 있겠냐. 본진이든 항만이든 머리로 들어갈 텐데. 총이나 제대로 갖다 두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 새끼. 사격실력 형편없어.”

“그럼 이자성이라는 건데..”

“타이어 쏠 정도는 되는 것 같더라.”

“그래도 초짜잖아.”

“쫄릴 놈은 아니야. 여차하면 백업도 있고.”

“거기 누가 또 있어서. 지역별로 한 명씩이었잖아.”

“나도 총 제법 쏜다.”

“...직접 가게?”

“오랜만에 바다구경도 하고."

"......" 

"부럽냐?”

“...좆도 부럽다 그래. ....근데 이자성이 만에 하나 걸려서 이빨이라도 까면. 이거 완전 나가리잖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마약반이나 신경 써. 이상한 낌새 못 채게.”

 

고영달은 강형철을 마주본다. 흐릿한 눈동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 여차하면 이자성을 직접 처리할 작정인 거다. 젠장할.. 고영달은 머리를 헝클이며 소파에 기댄다.

 

“...본진은.”

“용역까지 넣어주리. 깨지면 주연 교체 해야지. 일사파에 뭉그러질 놈들이면 데뷔해봤자 골드문 딱갈이 밖에 안 돼."

“쓸 만한 새끼들을 언제 또 찾아.”

“여수에 깐깐한 놈들 하나 더 있잖아.”

“칠성이네? 경찰하고 붙어먹을 놈들은 아니지만.. 걔네가 되겠냐.”

“아가리에 북대문, 일사파 쑤셔 넣어주면 씹어는 먹겠지.”

“소화를 시키겠냐고. 북대문만큼 위장 튼튼한 놈들 아니잖아.”

“..뭐하면 장수기하고 더블로 가던가..”

“....캐스팅부터 어째 불안 불안하네.”

“별 수 있냐. 늑장 부리다간 골드문 대부 찍어.”

“...참 살다 살다 깡패새끼들 응원을 다 하고. 아무튼 이놈의 문짝새끼들은 하나같이 졸라게 피곤해요, 씨발...”

 

고영달은 어느 새 반이나 비워진 담뱃갑을 뒤적거린다.

 

“...진성이도 시나리오 아냐.”

“...대충.”

“본진으로 떨어질 지도 모르는데... .....뭐래.”

 

강형철은 돗대를 문다. 항만보다 본진이 개싸움이겠지만 빼줄 수도, 하다못해 북대문 새끼들 다 조져버려라는 빈 소리도 못 한다. 북대문이 이겨야 하는 판이다. 그런데도 이진성은 오히려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새삼 걱정은. 늙었어요? 총이나 딴딴한 놈으로 보내요. 대미산 근처에 확실히 묻어둘 테니까. 북대문 언더, 길치는 아니죠?’ 강형철은 씁쓸히 입술을 비튼다. 침묵 끝에 고영달은 담배를 다 태우고 핸드폰을 꺼냈다.

 

“제사 끝났어? 어어, 별 일 아니야. 아 말한다고 당신이 알아. 시끄럽고 차 보낼 테니까 음식이나 좀 싸 놔. 그래. 식혜 넉넉히 싸고.”

 

강형철은 고영달의 담배 한 개비를 물며 눈을 감는다. 오랫동안 못 본 이진성과 희멀건한 이자성이 흐릿하게 겹쳐 올랐다.

  

 

50.

자성은 영화관에 있다. 하역이 일주일 뒨데 이래도 되냐고 물었더니 청이 말하길 각 잡고 있다고 뭐가 달라 지냔다. 그래서 오늘의 영화는 딸기앵두를 문 꽃사슴. 딸기면 딸기고 앵두면 앵두지. 아무튼 제목만큼이나 두서없는, 그저 떡만을 위한 떡 영화다. 스토리 있는 게 좋은데. 자성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아따 시키. 산통 깨지 말고 졸리믄 자야.”

 

소곤거리는 청의 타박에 자성은 어이가 없다.

 

“누가 있다고 목소리는 깔,”

“쉬잇! 극장 아니여, 극장. 예으가 있어야제.”

 

더 어이가 없다. 손에 들린 담배는 어쩌고 예의 타령이야. 한 마디 하려는데 경구가 눈을 째린다. 좋아하는 영환가 보다. 자성은 잠자코 일어난다. 황갈색 눈동자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으디 가냐?”

“화장실이요.”

“시키. 내외 허냐? 여서 빼도 되는디?”

 

아 나 진짜. 자성은 청을 노려보다가 담배를 톡 치고 빠르게 몸을 뺀다. 뒤에서 ‘아, 뜨뜨뜨! 저 씨벌 새끼가 증!’ 까지만 들리는 걸 보니 경구가 기어이 짜증을 냈나 보다. 자성은 숨죽여 웃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여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얇게 울린다. ‘전화 되냐.’ 강형철의 문자다. 웃음이 사그라진다. 자성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단축번호를 누른다.

 

“네.”

[같이 있냐.]

“잠깐 나와 있습니다.”

[짧게 하자. 거기 춥지?]

 

짧게 하자더니 헛소리다. 하지만 이유 없이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니다. 자성은 떨떠름히 답한다.

 

“..견딜 만”

[견디지 말고 감기 좀 걸려. 지금은 좀 이르고 한 21일쯤.]

 

...하역일. 뒷목이 뻣뻣이 굳는다.

 

[대충 둘러대고 빠져. 어차피 다 있지도 않을 거 아니야. 넌 짬밥도 안 되고. 나와서 11시 30분까지 장소 보내 주는 데로 가라. 위아래 검은색 입고. 모자는 있냐?]

“....무슨 일입니까?”

[별 거 아니야. 타이어만 갈기면 돼.]

“......”

[차량 번호, 차주 문자로 넣을 테니까 확인하고 바로 지우고.]

“.....네.”

[...추석은 잘 보냈냐?]

“.....예? 갑자기 무슨...”

[짜식, 쌀쌀맞기는. 잘 보냈습니다, 팀장님은요 해야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자성의 귀로 너털웃음이 들려온다.

 

[농담이야 인마. 긴장 풀라고. 너 사격 제법 하잖아.]

“........”

[...들어가라. 미련하게 진짜 아프지는 말고.]

 

자성은 끊긴 핸드폰을 멍하니 쥔다. 잠시 후 액정이 번뜩였다.

 

차량번호 27너8514.

차량주. 조규칠.

 

 

2005년 11월 14일

미련하게 진짜 아프지는 말고.

 

 

51.

노친네한티 약 좀 지다 주까?

“..됐어요. 자면 돼.”

 

청은 누워있는 자성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며칠 전부터 션찮더니 오늘은 저녁까지 게워냈다. 낯짝이 백지장이. 니미.. 청은 담배를 문다.

 

“...혼자 괜찮겄냐. 경구 야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여?

 

경구도 그러고 싶은 눈치다. 자성은 미간을 구긴다.

 

“체한 걸로 오버들은. 가요. 10시까지 오랬다며.”

“여서 창고까정 을매나 걸린다고,”

“나가요 좀. 귀찮아.”

“...씨벌. 쨍쨍대는 거 보니께 뒤지진 않겄고마. ..있으라. 싸게 올라니까.”

 

청과 경구는 그러고도 한참을 미적거리다 방을 나간다. 자성은 핸드폰을 열었다.

11월 20일. 9시 20분.

  

 

52.

11시 50분.

도실 삼거리에 검은 승용차 두 대가 나타난다. 자성은 야간경으로 앞차 번호판을 확인한다. 27너8514. 조규칠이다. 떨리는 손으로 총을 잡았다. 가드레일 밑에 숨겨져 있던 저격용 소총이다. 걸쇠에 걸린 손가락이 아르르하다. 자성은 눈을 감았다. 실패하면. 조규칠에게 잡히지 않아도 경찰로서의 삶은 끝이다. 또 그 지옥 같은 가난으로 떨어지게 된다. 할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훌륭한 사람과 영영 멀어진 채, 굶고 다니지 말라는 유언도 어쩌면 들어주지 못한다. ...반드시 해내야 돼. 자성은 눈을 뜬다. 떨림이 가신 총구로 뒤차 타이어를 겨냥했다. 탕! 탕! 뒤차가 급하게 핸들을 꺾는다. 하지만 추돌을 피하기엔 역부족이다. 들이박힌 27너가 가드레일을 박는다. 자성은 27너 타이어 하나를 더 명중시키고 재빨리 몸을 피했다.

나무에 등을 기대자 다시 손이 떨려온다. 손뿐만이 아니다. 다리도, 팔도, 온 몸이 덜덜거린다. 눈앞이 팽그르르해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고 얼마가 지났을까.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자성은 슬며시 고개를 뺐다. 응급차. ...경찰차. 지겹게 타고 다녔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뛸까. 자성은 눈을 감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삼십 쯤 세었을 때였다.

 

“....미련한 자식.”

 

생생한 강형철의 목소리가 정수리에 꽂혔다.  

  

 

53.

“.......뭐라....구요?”

 

근처 모텔에서 강형철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자성은 미니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다 그대로 굳는다. 강형철은 덤덤히 담배를 물었다.

 

“한 시간쯤 있다 가라. 차는 주차장에 있으니까 근처 아무데나 세워두고. 버리진 마. 아직 십 년은 더 탈 수,”

 

자성은 차키를 들고 문을 박찬다. 강형철은 한숨을 삼키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 끝났다. 끼어들 틈도 없더라. ...바꾸긴 뭘 바꿔. 항만은. ...물건도? ...마약반 애들 신났겠네. ..글쎄. 이제 슬슬 마무리 됐겠지. ... ...모르겠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전화 너머로 깊은 한숨이 들려온다. 강형철은 창밖으로 고갤 돌렸다. 본진에 투입된 이진성은 아직 이었다.

  

 

54.

‘북대문에 일사파가 들어갔다. 항만도 마찬가지고. 알고나 있으라고. 괜히 당황하지 말고.’

 

자성은 이를 악문다. 산만한 등과 빨간 하와이안과 네 개의 아이스크림. 조경구. 정청. 조경구. 정청, 정청...... ‘형님은 무신. 형이라고 불러야. 청이 형. 그라믄 된다.’ 운전대를 움켜쥔 손에 퍼런 힘줄이 솟았다.

  

 

55.

창고에서 풍기는 피 비린내 때문일까. 한 발이 이토록 무겁다. 자성은 마른침을 삼킨다. 일사파. 북대문. 어느 쪽일까. 아니. 그보다 경구는. 정청은. ...청은. 자성은 흥건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대며 창가로 다가섰다. 피묻은 폐드럼통이 보인다. 그 앞에 익숙한 면면들도. 그런데 정청은. 어디에. 초조하게 굴러가던 자성의 눈동자가 한 곳에서 멈춘다. 찢기긴 했지만 피투성이 사내 몇을 내려다보고 있는 등은 빨간 하와이안이다. 자성은 그제야 벽에 기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런데. 자성은 문득 허리를 곧추 세운다. 꿇어앉은 사내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이 스친 것 같다. ...설마. 자성은 창으로 고갤 돌린다. 곤죽이 된 사내들 맨 앞이, ...아.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나온다. 오성철.

 

“성철아. 할 말 읍냐.”

 

벌건 회칼을 움켜쥔 청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니. 한 번은 있다. 오동도. 동백아가씨. 등허리로 소름이 돋는다. 오성철은 비틀 일어났다. 터진 입술이 비스듬히 비틀린다.

 

“조또... ....뭔 말은 찾고.. 쿨럭, 지랄이여.. 싸게 허지 않고..”

 

구부정한 등이 쭉 펴진다. 자성은 숨을 멈췄다. 그 날, 검은 바다 앞에서 그렇게나 말이 없었다. 오성철을 사무실에 두고 나오는 등이 꺾인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안 돼. 자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사이, 빨간 하와이안이 성철의 어깨를 쥔다. 끌어안듯, 회칼이 사라진 순간 성철의 몸이 짧게 경련했다. 얼마 입술이 움직이고 거짓말처럼 웃음이 스치고 무릎이 꺾인다. 자성은 청의 발치에 널브러진 성철을 홀린 듯 쳐다봤다. 까뒤집힌 눈이, 다 헤진 옷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가 저에게 덧씌워지는 것 같다. 자성은 더듬더듬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겠다는 생각조차 없는, 그저 본능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어깨를 짚는다. 자성은 소스라쳐 칼을 빼들었다.

 

"저, 접니다, 형님. 저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재헌이다. 자성은 팔을 늘어뜨린다.

 

“..아프시다더니 어떻게 오셨어요. 안색 정말 안 좋으신데...“

 

자성은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다. 재헌은 조심스레 자성을 살폈다.

 

“...들으...셨어요?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했는데.. ....경구 형님이....”

 

자성은 칼을 떨어뜨린다. 미친 듯이 발을 굴러도 길은 너무 멀었다.

  

 

56.

청은 의원 문을 연다. 복도에 쭈그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백발의사가 힘없이 일어나 고개를 젓는다. 청은 느리게 껌뻑이다 하나뿐인 병실문을 열었다.

 

“씨..발! 눈... 뜨라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낯설게 들린다. 청은 엎어진 등을 멀거니 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 하얀 천이 누워있다. 잡아 내리자 무뚝뚝한 얼굴이 저 혼자 편하기도 하다. 갈라고. ...느도 갈라냐. 이 씨불럼아... 하지만 경구는 대답이 없다. '온다고요.' 언젠가처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청은 천천히 천을 덮고 자성을 돌아봤다. 우는가 했지만 실핏줄 터진 눈은 벌걸 뿐 물기는 없다. 청은 입고리를 올린다. ..느도 사는 게 좆 같겄다. 속으로 건넨 말을 들었는지 무섭게도 노려본다. 청은 자성을 뒤로 하고 병실을 나선다. 백발의사가 어깨를 두드린다.

 

“...상처가 느무 깊드라. ...미안허다.”

 

청은 담배를 문다.

 

“...뭐라 대요. 마지막에.”

“.....콩나물국 존내게 맛났다고. 자성이 형 고맙소이.. ...그렸다.”

 

청은 피식 웃는다. 희끄무레한 연기 사이로 성철이 보이는 것 같다. 배때지가 뚫리고도 쳐 웃던 씨벌새끼..

 

‘...와 그렸냐.’

‘.....워따 씨벌... 나가... 뒤지긴 뒤지는 갑네... 이란 말을 다... 듣고잉.. ....믄저 간 큰형님한티 조또 터지겠고마... ...근디 형. 그놈으 동백 아가씨 좀 그만 불러 쌌소... 존내 구진....께...’

 

...개호로노므 새끼들. 뒤지믄서 헷소리는. 청은 반도 안태운 담배를 내던진다. 병원을 나서는 등이 다시 구부정했다.

  

 

57.

강형철은 바다로 돛대를 던진다. 반병 남은 소주도 같이다. 시퍼런 바다가 넓게 출렁이는 밤. 이진성에게선 끝내 연락이 없었다.

  

 

58.

일사파와 오성철이 담긴 드럼통은 여수 먼 바다로 떨어졌다. 마약으로 1/3이, 북대문에 또 1/3이 털린 일사파 강구식은 살아남은 조직원 몇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칠성파로 기어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지만 확인되진 않았다. 병원에 누워있는 조규칠은 타이어에 총질 한 것도 일사파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조규칠이 그러지 않아도 하루아침에 열 몇을 잃은 북대문은 이를 갈며 칠성파를 주시했다. 칠성파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서울로 돌아온 강형철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골드문에 피바람이 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골프장 입찰실패였지만 실상은 반란. 그냥 넘어갈 석동출이 아니었다. 연일 칼부림이 났다. 덕분에 강형철과 고영달은 계속 밤을 샜다. 이진성의 이름은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청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던 조경구와 이자성이 안 보이는 것 외엔 그대로였다. 자성은 창고나 사무실에 유령처럼 서 있다 방에 틀어박히기를 반복했다. 보고가 허술한데도 강형철에게선 별 말이 없었다. 뭐라 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청은 자성의 단칸방을 찾지 않았다. 자성도 청을 찾지 않았다. 마주쳐도 인사조차 없었다. 간혹 자성이 키우는 개가 저 혼자 집을 나섰다가 청을 발견하고 캉캉거렸다. 청은 개 옆에 쭈그려 앉아 오래 담배를 피웠다.

11월이 가고 12월이 가고 1월이 갔다.

  

 

59.

자성은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 무릎이 축축하다. 까만 눈동자가 걱정스레 올려다보고 있다. 자성은 개를 쓰다듬고 한참 들고만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제가 차린 밥상에 헛웃음이 샌다. 또 밥그릇이 세 개다. 국도, 숟가락도, 젓가락도. 자성은 저만치 상을 치우고 구석에 눕는다. 뭘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냥, 다 모르겠다. 자성은 파고드는 개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60.

방이 캄캄하다. 어느 새 잠이 들었나 보다. 머리맡에 둔 담뱃갑을 더듬거리던 자성은 흠칫 손을 굳혔다. 등 뒤에 뭐가 있다. ...칼. 칼을 어디 뒀더라. 오랜만에 신경이 곤두선다.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깼냐.”

 

자성은 길게 숨을 뱉는다. 청이다. 술 냄새가 진득했다.

 

“....뭡니까.”

 

일어나 앉는 자성을 묵묵히 건너보던 청이 히죽 웃었다.

 

“아수크림 묵자.”

 

검은 봉지를 부시럭거리며 아이스크림을 꺼낸다. 네 개다. 메로나, 조스바, 비비빅, 돼지바. 다 녹았다. 자성은 담배를 물었다.

 

“숟가락 으디, 이. 저 있네.”

 

앉은뱅이 상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청이 숟가락 두 개를 가져온다. 조스바 봉지를 뜯는다. 퍼런 물이 줄줄 샌다. 얼음덩이를 퍼 올리는 청에 자성은 이마가 뜨끈해졌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배신한 건 오성철이고, 배신할 건 저고, 조경구를 죽인 건 청이 아닌데. 그런데도 화가 난다. 하와이안을 꿰찬 몸뚱이가, 히죽거리는 낯이, 술 냄새가, 그럼에도 저처럼 텅 빈 눈이 못 견디게 싫다.

 

“안 묵냐? 뜯어 주까?”

 

자성은 메로나를 잡으려는 손을 매섭게 쳐낸다.

 

“아따 새끼. 묵을 만 해야."

 

솥뚜껑 같은 손이 다시 뻗친다. 마디 마디 상처가 자글거린다. 자성은 청의 가슴을 밀친다. 청은 아랑곳없이 히죽댄다.

 

"괜찮다니께."

"......." 

“그라믄. 떡치러 가까?”

 

그때부턴 얼굴이며 몸뚱이를 정신없이 때렸다. 자성은 뒤로 넘어간 청을 올라탄다. 입술을 터트리고, 눈두덩을 찢고, 더러는 장판에 꽂힌다. 일방적인 폭력은 캉캉대는 소리가 찢길 듯 울리고서야 끝이 났다. 자성은 숨을 몰아쉰다. 청은 쿨럭거리며 장판에 침을 뱉는다. 벌건 피가 섞여있다. 자성은 옆으로 주저앉는다. 피 묻은 손이 덜덜 떨린다. 청은 끙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다 피식 웃는다.

 

“누가 보믄 나가 팬 줄 알겄네.”

 

자성은 멍하니 손등을 문지른다. 피가 다 지워졌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손이 벌겋게 부어오른다. 청은 자성의 손목을 잡는다. 차다. 청은 손목을 꽉 움켜쥔다.

 

“...고만 혀라.”

“...놔.”

“고만 허라,”

“놔!!!!”

 

청은 발버둥치는 자성을 끌어안는다. 질겁을 하며 바둥대는 자성의 몸이 그새 형편없이 말라 있다. ..씨벌놈. 밥은 저라고 챙겨 묵으면서.. 청은 자성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고만 허라고, 씨벌롬아!”

 

몸부림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청은 팔을 푼다. 자성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청도 눈을 내린다. 자성은 제 무릎께를 보고 있다. 아이스크림 범벅이다. 누런 장판에 조스바와 메로나와 비비빅과 돼지바가 한데 엉켜있다. 청은 손으로 아이스크림을 쓸어 담는다.

 

“으메 아까분 것... 존내게 시려부네, 쌍...”

 

손이 점점 느려진다. 담배를 무는 등이 구부정하다. ‘콩나물국 존내게 맛나드만. ...고맙소이. 자성이 형. ....청이 형. 잘... 부탁허요.’ 자성은 그제야 눈물이 터진다.

 

“...좆같게 처 울기는..”

 

낮은 목소리도 허하게 흔들리긴 마찬가지라, 자성은 저도 모르게 바락 소릴 높인다.

 

“좆같기는 형 낯짝이 더 좆같소!”

 

청은 한참 만에 자성을 돌아본다. 부어터진 얼굴이 속 좋게 히죽거린다.

 

“인자야 형 소리가 나오는 고마.”

"......"

"그려. 나가 형이다, 이 씨바라탱아. ...나가... 형이라고..."

 

자성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엎어진다. 마른 등에서 통곡 같은 울음이 쏟아진다. 청은 등을 돌린다. 아이스크림에서 성철과 경구 목소리가 들린다. 조스바는 내껀디! 아따 죄읍는 돼지바는 와 뭉겐 거여. 청은 눈을 감는다. 씨벌새끼들. ....좋으냐. 억억거리는 자성의 울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2006년 2월

그려. 나가 형이다, 이 씨바라탱아.

...나가 형이라고.

 

 

61.

청은 다시 자성의 단칸방을 제 집 삼았다. 웃긴 하와이안도, 쓸데없이 개를 괴롭히는 악취미도 그대로였다. 상에는 종종 밥공기 세 개가 올라왔다. 두 그릇을 비운 청은 배 터져 뒤지겄다며 장판에 드러누웠다. 자성은 그제야 숟가락을 들었다. 자성이 밥을 먹는 동안 청은 담배를 피웠다. 자성은 별 말이 없었다. 어느 날 옷걸이에 하와이안 하나가 비쳤을 때도 그저 잠깐 미간을 찌푸리고 말 뿐이었다. 꽃내음이 진해질 무렵. 시커먼 발로 방에 들어서려는 청에게 왈칵 짜증이 쏟아졌다. ‘거 참 더럽게!’ 청은 멀뚱히 서 있다 히죽 웃었다. '하여간에 까슬한 시키.' 자성의 옷걸이는 곧 빨간 꽃과 분홍 원숭이 차지가 됐다. 밥그릇은 두 개였다.

  

 

62.

골드문은 5월이 지나서야 조용해졌다. 강형철과 고영달은 몇 십의 잔챙이와 몇 명의 이사진을 집어넣었다. 죄다 석동출이 씹다 버린 껌이었다. ‘졸라 맛없네.’ 고영달의 평이었다.

  

 

63.

북대문과 칠성파는 한층 더 험악해졌다. 공중분해 된 일사파 구역이 문제였다. 결과를 떠나 일단 피해자 격인 북대문은 당연 물러날 리가 없었고, 여수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칠성파 역시 점잖게 양보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이좋게 나눠 가지자니 북대문도 칠성파도 서로 쌓인 게 많았다. 북대문은 일사파 강구식을 숨겨준 -소문이었지만- 칠성파를 원수 자식 보듯 했고, 칠성파는 칠성파대로 요사이 저만 볶아 먹으려 드는 경찰과 북대문 사이가 영 께름칙했다. 북대문의 경찰알레르기는 여수 사는 개도 아는 일이었지만 돈이라면 애비 애미도 못 알아보는 게 또 이 바닥 생리였으니 칠성파의 의심도 일면 일리는 있었다. 물론 북대문이 들으면 회칼 물고 꺼꾸러질 소리였다.

양 조직 오야가 짐짓 허허거리며 신경전을 펼치는 동안 아래로는 이미 몇 차례 주먹다짐이 오갔다. 주먹이 칼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6월 들어 두 조직은 각각 일사파 구역을 아예 꿰차고 앉았다. 하루걸러 한 번씩 민원이 접수됐지만 지역 경찰도 딱히 손 쓸 도리가 없었다. 횟집에 회 먹으러 갔다고 잡아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지역주민과 경찰과 외근 나간 조폭 모두의 피곤이 쌓여가던 6월 중순. 북대문 조직원 몇이 곤죽이 돼 돌아왔다. 무너진 코뼈를 두 번 죽인 조규칠은 각목을 집어던지며 병원비 받아오라고 씩씩거렸다. 지목된 사람은 청이었다. 소리 없는 동요가 일었다. 자성도 어이가 없었다. 어느 조직이 서열 4위 손에 지로용지를 들린단 말인가. 하지만 청은 여상스레 ‘그라지요.’ 했다. 비스듬히 웃는 조규칠 옆에서 북대문 오야 최태만은 끝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일사파 습격 이후 팬클럽마냥 청을 따르는 조직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탓이었다. 그러면 지가 몸 바쳐 싸우든가. 자성은 입술을 잘근대며 청을 따라 나섰다. ‘느 으디 가냐?’ 동그란 눈에 병신, 하려다 말았다.

  

 

64.

“아지메. 불 쪼까, 이. 여 있... 웜마. 색깔이 꼬라지가 다 와 이라는 거여. 이라니께 파리만 날려 쌌제. 빨간놈은 읍소?”

 

긴장하면 오줌이 마렵다느니, 수가 너무 많다느니 하며 오뉴월 추위는 혼자 다 타는 척이더니, 먼저 치고 든 자성이 뻘쭘할 정도로 횟집에 들어찬 칠성파를 거의 혼자 아작 낸 북대문 서열4위께선, 현재 구멍가게에서 미적 감각을 뽐내는 중이다. 아무튼 그놈의 빨간색은. 자성은 아무 거나 사요, 하려다 입을 다문다. 한 마디가 열 마디 될 게 뻔하다.

자성은 가게를 나온다. 날이 덥다. 땀이 줄줄 흐른다. 자성은 자켓을 벗어 팔에 걸친다. 자켓에 핏방울이 묻어 있다. 그제야 피비린내가 난다. 칼에 베인 뺨도, 팔도 후끈거린다. ..뭐하냐, 나. 자성은 문득 허망해진다.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다. 정말 정신없이, 진짜 깡패라도 되는 양. 언더커버 이자성으로서가 아니었다. 화가 났다. 청을 내몬 조규칠과 최태만에게. 아무 말 없이 내몰린 청에게. 그리고. 자성은 담배를 물며 고개를 돌린다. 눈동자가 우뚝 굳는다. 왼쪽. 아이스크림 냉장고다. 자성은 냉장고 앞에 선다. 빨간 봉지가 보인다. 돼지바. ...돼지바. 잊고 있었다. 잊어야 했다. 살려면. 잘 살려면.. 자성은 저도 모르게 돼지바를 꺼낸다.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무니 달다. 지나치게 달다. ....병신. 자성은 팔을 늘어뜨린다.

청은 가게 문턱에서 한숨을 문다. 옆에 서는 줄도 모르고 멍한 낯짝이 니미 좆이다. 뒤통수를 후려쳐도 어째 싫은 소리 한 마디가 없다. 청은 미간을 구기며 가게 안으로 소리를 높인다.

 

“아지메! 여 아수쿠림 값 받으소!”

  

 

65.

며칠 뒤 북대문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경찰이다. 경찰도 엔간하면 북대문은 건들고 싶지 않았지만 횟집 근처를 지나던 시민이 신고를 한 데다 칠성파 애들이 생각보다 너덜너덜해서 조사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세상에. 정청을 내줄 줄이야. 경찰과 북대문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상이 된다. 경찰은 차라리 호랑이를 데려 가라지 싶고, 북대문 조직원들은 조규칠과 최태만, 2인자 정용까지 해도 해도 너무한다 속으로 이를 간다. 이번에도 그저 ‘다녀오겄습니다.’ 하는 청에게 조규칠이 느긋하게 비죽댄다. ‘이자성이도 가야제?’ 청은 자성을 돌아본다. 안 그래도 허연 낯짝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조사 아닌 조사를 받는 중에도 영 돌아올 줄 모른다. 파출소를 나와 보란 듯이 퉷, 침을 뱉으며 '씨벌놈들.' 뇌까리자 숫제 시퍼레지기까지 한다. 청은 자성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비싯 웃는다.

 

“세상천지 무서븐 거 읍는 줄 알았드마. 추위는 겁나 탄다잉.”

“......”

“얼굴 풀라고, 이 씨빠빠야. 아~따 드러분데 발 들였드니 허벌 구지다잉. 떡이나 존내 치러 가자.”

 

자성은 말없이 땅만 본다. 청이 이 좆같은 뒤통수를 후려칠까 말까 하는 사이 ‘형님!!’ 저만치서 북대문 무리가 우르르 몰려온다. 재헌과 아이들이 두부를 내민다. 룸도 잡아 놨단다. 청은 낄낄거리며 두부를 우적거린다. ‘그라믄 뻑쩍~하게 놀아볼까잉?’ 자성은 왁자지껄 앞서 가는 무리를 멀거니 쳐다본다. ‘뭐다냐! 싸게 안 오고!’ 청이 성화를 부린다. ‘형님, 얼른 오시랑께요!’ 다른 조직원들도 난리다. 자성은 천천히 발을 뗀다. 그런데.

‘이순경! 이거 으째 하는 거라고 혔재?’ 뒤통수가 서늘하다. 등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자성은 고개를 숙인다. 어느 새 낯설어진 이순경이, 온도차가 확연한 청의 씨벌놈들이, 아이스크림이, 자성이 형 하던 목소리가, 강형철의 미련한 자식이 어지럽게 엉켜든다. 속이 울렁거린다.

 

“...느 괜찮냐.”

 

어느 새 다가온 청에게 자성은 애써 입고리를 올린다.

 

“갑시다. 술 마시러.”

  

 

66.

강형철은 액정에 뜬 번호에 잠시 의아해진다. 새벽 3시 30분은 그렇다 쳐도 보고하는 날이 아니다. 요새는 보고도 건성인 놈이 무슨 일이야. 형철은 핸드폰을 연다.

 

“그래.”

[.......]

 

말이 없다. ...설마. 형철은 빳빳이 허리를 세운다. 침묵이 이어지길 한참. 형철이 다른 핸드폰을 꺼내 영달의 번호를 막 누르려던 참이었다.

 

[....왜 안 주무세요?]

 

이자성이다. 죽을 것 같지도 않다. 혀가 좀 심하게 꼬였을 뿐이다. 형철은 길게 숨을 뱉는다.

 

“...술 마셨냐.”

[......]

"젊은 게 좋긴 좋,"

[..형숙씨.]

 

완전히 맛이 간 건 아닌 모양이다. 형철은 담배를 문다.

 

[형숙씨 라이터는 무슨 색이에요?]

 

...맛이 갔나. 형철이 얼이 빠지는 새,

 

[...빨간색은... 아니죠?]

 

숫제 애원조다. 형철의 얼굴이 서서히 바랜다. ‘빨간색 하와이안을 즐겨 입음.’ 자성의 보고서가 스친다. 형철은 깊게 담배를 빤다.

 

“....힘드냐.”

 

숨소리가 폭풍 한 가운데 놓인 돛단배 같다. ...기어이 너도구나. 형철은 한숨을 문다. 이상구 팀장에게 들었다. ‘2년쯤 되면 말이야. 하나같이 헛소리들을 해. 국철이 새끼는 골프타령이었고, 진성이는, 참나, 애를 갖고 싶다나? ...씨발. 할 말이 없더라.’ 헛헛한 웃음이 귓가를 멤돈다.

 

“...밥은 먹었고.”

 

푹 실소가 건너온다. 제가 생각해도 웃기긴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짜다. ...하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그만두고 싶냐고도, 그만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상구 말대로 할 말이 없다. 형철은 연기를 뱉는다. 혀 꼬인 질문이 계속된다. ‘노래는 잘 하세요? 발 사이즈는 어떻게 돼요? 영화는 좋아해요?’ 하나같이 쓸데없는, 쓸쓸한, 절박한 물음이다. 하나하나 답하는 사이 담배 한 갑이 동이 난다. 해가 뜨고, 사무실 문을 연 영달이 ‘너구리 잡냐?’ 휘휘 거릴 때까지도 형철은 자성의 마지막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저도... 팀, 아니 형숙씨처럼 되면 ....그러면 다 괜찮겠죠? 그러면...’ 형철은 영달에게 손을 내민다.

 

“담배 좀 줘라.”

 

목이 무겁게 잠겼다.

  

 

67.

7월. 일이 터진다. 청이 전봇대 밑에 대자로 뻗어 있는 술떡한테 산 지 이틀도 안 된 구두를 던져줬는데 골라도 어쩜. 그 술떡이 하필 칠성파 어깨였던 거다. 이 기막힌 소식을 접한 조규칠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 날뛰었다. 발모가지를 잘라 와도 시원찮을 판에 신발을, 뺏은 것도 아니고 뺏긴 것도 아니고 벗어줬다니 윗대가리로서 어찌 아니 빡치겠냐만은, 그를 감안한다 해도 확실히 지나친 매타작이었다. 근 한 시간을 두들긴 끝에 기어이 청의 머리가 터졌다. 자성은 더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렸다. 팔이 부러지고 발목이 나갔다. ‘형!!! 그만 허라니께!!’ 불그레한 얼굴로 흐릿한 음성이 겹쳤다. ‘청이 형 잘 부탁허요.’ 그리고 암전이었다.

   

 

68.

청은 침대에 누워 있는 자성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안 그래도 좆같은 게 퍼렇고 벌겋고, 씨벌 아주 볼만 허고마.. 낮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실소가 터진다.

 

“그래, 느 몰골은 좀 낫고이?”

 

백발의사 말대로 청 역시 머리며 몸이며 온통 붕대 천지다. 청은 한 마디 대거리가 없다. 구부정한 등이 축 쳐져 있다. 한참 만에 입이 열린다.

 

“아재.”

“와.”

“....야 뒤지겄지?”

“눈까리는 구색 맞출라고 달고 댕기냐. 가슴팍 오르락내리락 하잖여.”

 

의사의 퉁박에도 황갈색 눈동자는 자성을 향해 있다. 음울한 빛이다. 

 

“이 씨불럼....뒤질 것이여. 그자.”

 

의사는 청을 보다 담배를 문다.

 

“야도 뒤지고 느도 뒤지고 나도 뒤지고. 살아 있으믄 다 뒤지는 법이제.”

 

담담한 답이다. 청은 씨벌.. 한숨처럼 웃으며 마른세수를 한다.

 

“...야가 무겁냐잉.”

 

손에 얼굴을 묻은 청은 묵묵하다. 의사는 아득히 먼 곳을 본다.

 

“...이자 고만 버텨 싸라.”

“.......”

“...느 어메 때매 그르냐.”

 

핏 실소가 터진다. 청은 큭큭거리며 의사를 돌아본다.

 

“아따 노친네. 별 걸 다 기억하고 난리여.”

 

의사는 가만히 청을 건너본다. 어린 낯이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다 큰 낯이 언제부터 이렇게 허망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래 전이다. 의사는 길게 연기를 뱉는다.

 

“.....청아.”

“......”

“느가 아무리 그려도 뒤질 놈은 뒤지고 무거불 건 무겁고. 세상살이 다 그런 것이여. 그라니께... 하나쯤 무거버도 괜찮아야. ..별 일 아니여.”

 

청은 자성을 본다. 조규칠과 저 사이로 끼어들던 등이 시리게 비친다. 아니. 성철 같기도, 경구 같기도, 큰형님 이국한 같기도 ...아니. 죽자고 달려가던 엄마 같기도 하다. 씨벌... 청은 헛헛하게 웃는다. ‘이자서야 느가 으른이 될라나 보다이...’ 의사의 중얼거림이 연기처럼 번진다.

새벽빛이 희미해지도록 자성을 바라보던 청은 몸을 일으킨다. 구부정한 등이 곧게 펴져 있었다.

   

 

69.

자성은 눈을 뜬다. 천장이 보인다. 익숙한 천장이네.. 하는데 더 익숙한 욕설이 쏟아진다. ‘야 이 호로노므시끼야. 니가 뭐단다고 나서냐, 나서길. 또 이라믄 그땐 아주 나가 죽여 벌랑께.’ 허연 붕대를 둘둘 말고 실핏줄 터진 눈으로 쏘아보는 청이 무섭기보다는 웃기고, 웃기기보다는 암담하다. 어쩌나. 앞뒤 없이 어쩌나 그래진다.

   

 

70.

가을장마가 한창이다. 온 몸이 눅진하다. 자성은 시큰거리는 발목을 주무르며 다 떨어진 달력을 본다. 뒷방 노인네마냥 방구석에 쳐 박힌 지도 벌써 보름. 하지만 지겹지는 않다. 오히려 다행이다. 지친 참이었다. 생선비린내도, 바다비린내도, 피비린내도.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 반 강제로 요양하는 동안 칠성파는 마무리됐다고 들었다. 청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이번엔 진짜 승진할 거라고 재헌과 애들이 저들이 더 신나 짹짹거리고 갔다. 너덧을 단번에 쓰러트리고 뒤에서 달려드는 차를 돌려차기로 부수고 어쩌고 아주 신화를 쓰더라만. 정작 영웅담의 주인공은 한 마디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정말 조용하다. ‘느가 자빠자 있는 동안 나가 아주 조쟈버렸제.’ 먼저 떠들고도 남을 사람인데. 설마 아직도 신경 쓰나. 이 발목.

자성은 제 발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문득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문득은 아니다. 종종 그랬다. 때려 칠까. 그만둘까. 서울로 갈까. 대구로 갈까. 인천으로 갈까. 갈 수 있을까. 요새는 더할 뿐이다. 사람피도 신물 나고 거들먹대는 깡패새끼들도 역겹고 형님, 형님 따르는 어린 낯짝들도 싫고 무엇보다. 저 쿵쾅거리는 발소리. 저것이 점점 무거워진다.

 

“아따 비 지랄 맞게도 온다. 다 젖어 부렀네. 뭣하고 있었냐?"

"꼴이 그게 뭐요? 우산은 어쩌...“

“춥다야. 드가자.”

 

자성은 요란스레 퍼득이는 꽃무늬 셔츠를 막아선다. ‘아 느 형 얼어 뒤지겄다고요오~’ 하지만 부러 희번덕대 봤자다. 빤히 보니 얼마 못 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고리를 올린다.

 

"씨벌놈 쪼리기는. 잘 하면 치겄다?“

“...그 병 나은 거 아니었소?”

“...긍께 요거시 으떻게 된거냐믄. 조짝 가상이를 도는디 가시나 하나가 띡 서 있는 거여. 여섯은 되았을라나. 아이고야~ 폭삭 젖어가꼬 땟물이 질질 흐르는디 그지꼴이 따로 읎드라고. 아 나는 그라도 느 생각해서 그냥 올라 혔재. 그란디 고거시"

 

손짓 발짓 섞어가며 생쇼를 하신다. 생긴 건 말하지 않아도 조폭이면서 아무튼 여수바닥 웃긴 짓은 혼자 다 하지. 자성은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문다. 찌푸린 하늘에선 장대비가 계속이고 앞에선 빤한 재연이 한창이고 담배는 오늘따라 더럽게 맛도 없다. 씨발. 자성은 낮게 뇌까리며 시선을 내린다. 구정물이 잔뜩 튄 잿빛 바짓단 아래서 커다란 맨발이 나 좀 보라는 듯 꼼지락거린다. 안 그래도 못 생긴 게 더럽기까지 하다. 하긴. 생선 핏물에 채소찌꺼기, 찌린내 나는 오물이며 병조각까지 예사로 널린 시장바닥을 또 저러고 왔으니 깨끗하면 별 일이다. 어째 잠잠하다 했다. 꾸질해 뵈면 신발 던져주는 고질병. 조규칠에게 얻어터진 후론 조용하더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끼어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몸이 먼저 나갔다. 피에 젖은 불그레한 낯이 정말 좆같아서. 강형철에게 이렇게 보고를 했으면 퇴원하자마자 보낸 사골 도로 내놓으라겠지. ..아니. 그런 말도 안 할 거다, 그 양반은. 자성은 쓴웃음을 짓는다.

 

“....아. 어야!"

 

청이 어느 새 코앞이다. 갈색 눈동자가 너울거린다.

 

"왜. 으디 안 좋냐."

“.......”

"야가 귓구녕에 공구리 칬나. 왜 그냐니."

"발이나 씻고 와요."

 

저만치 밀어내자 ‘싸가지 없는 시키.’ 불퉁대면서도 기색을 살핀다. 그날 이후 변한 것 중 하나다. 조금만 멈칫거려도 눈을 안 떼고, 신발 병을 고치려 들고, 뒤통수 후려치던 손버릇이 사라지고. 무엇 하나 반갑지 않다.

 

"꼭 씻거야 돼야? 빗물에 거진 다 씨껐는디.“

“.......”

“어따 눈깔 튀 나오겄네. 알긋다 알긋어. 씨벌. 암튼 사내새끼가 조낸 깔끔 떨어. 그러다 거시기 떨어져야. 형님~ 안 하고 오빠야~ 할라 그르냐?”

“쉰소리 말고 퍼뜩 가요.”

“니미 퉁박은. ..근디 느 어째 오늘은 새살이가 짧으시다? 체신머리 으짜고 안 허냐?"

“그렇게 씻기 싫음 그러고 다니지를 말든가.”

“상렬한 시키 말뽄새허고는.”

 

청은 담배를 물며 문지방에 걸터앉는다. 구부정한 등에 비 얼룩이 그득하다. 재헌이 자식은 신화 쓸 정성으로 우산이나 제대로 씌워주지. 위에 뭐 얹는 거 질색팔색 하는 청을 뻔히 알면서도 괜한 탓을 하게 된다. 정말 괜한 탓이다.

 

“...나가 걱정이 돼 안 그르냐. 날이 이라믄 개리담서. ..그 뽀사진 데 말이여. 노친네가 그라드만.”

 

라이터가 딸깍인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눅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딴 사람 같다. 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오다가다 만난 아무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창, 평생 만날 일 없는 지구 반대편 인간 아무나. 그 누구라도 이 사람만 아니었으면. 자성은 저도 모를 속말에 지그시 입술을 문다.

 

“어야. 니는 나가 영 가찹지를 않재.”

“...뜬금없이 건 또 뭔 소리요.”

“..아니라곤 안 헌다.”

“.....형도 그렇잖소. 이 바닥이 누굴 쉬이 믿을 곳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자성은 고개를 숙인다. 장판바닥이 자글자글하다.

 

“...나가 껍데기만 샐샐대는 걸로 뵀냐.”

“.......”

“...써글놈. 눈까리 죽이네. 조낸 써늘허다.”

“...감기 들겠소. 씻고 옷 갈아 입”

“그란 건 또 맴이 쓰이냐.”

“....그럼 그러고 있던-”

“그라고 보니 니는 한 번을 안 묻드라. 신 벗어준다고 지랄해싸면서도 왜 그냔 소린 없었재. 궁금도 안 허냐. 나가 와 이라는지.”

 

듣고 싶지 않은데 입이 안 열린다. 입만이 아니다. 손도, 눈도, 마음도 마음대로 안 된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우리 어매가 말이여. 겁나 이삤거든. 쬐깐한 나가 보기에도 퍽이나 잘났재. 근디 씨벌 얼굴값 헌다 안 허냐. 언놈이랑 배가 붙었는지 눈이 맞았는지 보따리를 싸드라고. 새벽이었는디 도둑새끼맹키로 조심조심 나가는 소리가 으째 크든지. 귀청 하나는 타고났응께. 어디 가요 엄니- 혔재. 아따 지 새끼를 무슨 구신마냥 보드만 신발도 없이 뛰가대. ...겨울이었는디 조또 추버꺼든? 눈이 녹들 안 혀서 나도 몇 번이나 자빠진 길을 쌔빠지게 달리는디 뒤통수에 대고 나가 그렸다. 엄니 신발 신고 가소. 신발 신고 가소... 씨벌놈 속도 없재. 저 버리고 가는 어매 뭐시 이삐다고. ...근디 싫드라. 조낸 초라하잖여. 뭔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라고 초라한 건 참말 좆 같응께.”

 

자성은 갑자기 추워진다. 팔도, 다리도, 발도 으슬으슬하다. 본 적 없는 골목에 서 있는 것 같다. 구부정한 등만 한 어린것이 보인다. 고사리 손에 빨간 뾰족구두, 퍼런 쓰레빠, 다 떨어진 운동화.. 그게 뭐든 엄마가 신을 만한 것을 열심히 흔들며 신고가소, 신고가소 외치는데 저는 정작 맨발이다. 벌겋게 얼어 터진 조그만 발. 다 자라서도 아무에게나 신발을 던져주는 못난 발.

자성에게도 있었다. 그런 어리석고 못난 발이.

할머니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아니. 모든 게 다 그랬다. 시장바닥에서 평생을 보내면서도 힘들단 말 한 마디를 할 줄 몰랐다. 꽐라라고 철부지들이 놀려댈 때도 몇 개 없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이- 그저 웃었다. 싫었다. 찌든내 나는 골목도, 곰팡이 낀 집도, 다른 엄마와 달리 늙고 못생긴 할머니도. 머리가 굵어지고 나선 시장 귀퉁이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부러 모른 척 지나쳤다. 할머니는 그냥 웃었다. 절절 끓는 여름이었다. 할머니는 전봇대에 허연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면금지] 벌건 글씨였다. 같이 다니던 애들과 보란 듯이 담배를 물었다. 아 금연 금지라매. 종이를 찢으며 낄낄거렸다. 할머니는 웃었다. 어스름한 새벽녘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구질구질한 분홍담요를 덮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도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개다리소반에 식어빠진 김치찌개와 수북한 밥이 놓여 있었다. 누런 종이도 함께였다. [굼고 다니지 마.] 목구멍이 미어터지게 밥을 쑤셔 넣다 문을 박찼다. 전봇대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너저분한 종이조각을 쓸어 모았다. 그제야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병조각을 밟았는지 피가 줄줄 새고 있었다. 울음이 터졌다. 너무 아팠다.

 

“나는 말이다. 니도 그렸다. 좆같은 기 피 칠갑을 허고 받아주쇼 하는디 엄동설한 신도 없는 거 맹키로 추버 보이드라. 여직도 그러고. ..긍께 나가 니를 보면 맴이 허벌 구지다 이거여 씨벌놈아.”

 

자성은 더듬더듬 담뱃갑을 쥐고 더듬더듬 담배를 문다. 손가락이 병신같이 떨린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겨우 불을 붙이고 겨우 목구멍으로 연기를 넘기고, 겨우 말을 꺼낸다.

 

“...왜. 내가 맨발바람으로 도망이라도 갈까봐.”

“으이, 그려. 가봐야. 나 뜀박질 12촌께.”

“...뻥은 암튼.”

“워메. 짐 뛰보까?”

 

발끈하는 척 돌아보는 낯이 언제나 같다. ..언제나. 춥고 덥다.

 

“...그래서. 어머니가 원망스럽소?”

“원망은 무신. 지 팔자 지가 사는 거재. 우는 년도 속이 있어 우는 거고.”

“...아버지는 뭐하셨는데.”

“그기 뭐신디. 묵는 거냐?”

“그럼 보육원에서 컸소?”

“어따. 궁금한 거 허벌 많다. 이때까정 으째 참고 살았으까이?”

 

시원한 미소에 입이 굳는다. 이제 와서 이런걸 뭐 하러 묻나. 강형철에게 보고라도 하려고. 정청이 이자성과 비슷하게 구질스러운 유년을 보냈다고. 어머니는 행불이 아니라 도망간 거라고. 아버지는 찾아볼 필요가 없겠다고. 어린 청이 빙판길을 맨발로 달렸다고. 지금도 이유 없이 신을 벗어준다고. 그러니 어떡하냐고. 어쩌면 좋냐고.

 

“실은 니를 보내야지, 보내야지 그렸다. 암만 봐도 여서 구를 낯짝은 아닌께. ...근디 허.. 안되대. 발목이 뽀사졌는디도 안 되겄더라. 그라니 으짜냐. 같이 가야제.”

“.......”

“싫으냐.”

“...내가 가란다면 가고 있으라면 있을 놈이오.”

“그러니께 나가 시방 매달리자너요. 옆에 있으라고 이 씨빠빠야.”

“...매달리긴. 철봉이요?”

“같이 가자. 그라다 보면 니도 언젠간 따땃~해지지 않겄냐. ..아니. 나가 꼭 그러코롬 해줄라니께. 우리 부라더는 이 좆같은 형님만 믿으면 돼야?”

 

청이 진짜 형이라도 된 것처럼 말갛게 웃는다. 그 위로 자성이 형, 순둥이 같던 유언이 겹쳐 오른다. ..아니. 눈까리 존내게 좋구마 하던 오성철이다. 아니. 술 취한 밤 같잖은 질문에 답지 않게 꼬박꼬박 답한 강형철이다. ....아니. 그도 아니다. 할머니다. 손자머리 한 번 맘껏 쓰다듬어 보지 못한 못나고 늙은 손이다. 자성은 고개를 튼다.

 

“부라더. 왜 대답이 읍냐. 알겄어요 형~ 혀야지.”

“.......”

“이? 아, 퍼뜩 허라니”

“....브라더는 무슨. 병이나 고쳐요. 또 사단내지 말고.”

“고거슨 나가 알아서 할 거시고. 니는 이자부터 부라더여. 죽이제?”

“..철자는 아쇼?”

“웜머. 야가 이 형을 띄엄띄엄 봐야. 비읍이니께 비! 리을.. 오야. 알. 글체. 그라고 .....음..”

  

자성은 말없이 연기를 뱉는다. 청은 ‘그려 나 무식허다. 혼자 다구지셔서 존내 좋으시겄어요.’ 툴툴거리며 발딱 일어난다. ‘씻고 오께.’ 시원찮은 문이 덜그럭 열리고 닫힌다. 자성은 그제야 바닥에 주저앉는다. 개가 걱정스레 손등을 핥는다. 축축하다. 손등도, 마음도.  ...어쩌나. 진짜 어쩌나.

반년 후 북대문에 피바람이 분다. 처음 고깃덩이가 된 건 조규칠이다. 갈기갈기 찢겨 드럼통에 담겼다. 여수 먼 바다로 열 몇 개의 드럼통이 떨어진다.

2007년 4월. 청은 북대문파의 오야가 됐다. 

 

 

 

Part1.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