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자성. 新世界 Episode. Epilogue
新世界 Episode .
Epilogue
1.
"대한건설 건은,"
"한 번만."
"..회삽니다, 회장님."
"한 번마안."
"...쫌."
"그려. 쫌 해주,"
"아, 쫌!!"
결국 발딱 일어서는 이자성에 정청이 또 토 쏠리는 낯짝을 한다. 반백인 사내놈이 같은 사내새끼한테 키스 한 번 졸랐다가 차였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강아지 눈. 내가 진짜 골드문을 때려 치든가 해야지... 중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물다가,
"어! 중구시키 담배 핀다!!"
스마트 폰을 들이미는 정청에 얼른 담배를 놓는다. 금연 보름째다. 딸이 무섭긴 무섭다 씨빡. ...은 그렇다 치고.
"정 회장. 우리 진아랑 연락하지 말랬지."
"먼저 만나게 한 거슨 부회장 너거던요?"
또 시작. 자성은 슬슬 골치가 아파온다.
"..회장님. 부 회장님. 업무 중 입니,"
"건 정 회장이 비밀번호고 집 키고 싸그리 까먹고 꽐라 돼서 어쩔 수 없이"
"호텔도 있고 길바닥도 있는디 우째 집으로 데려갔을까나아?"
"두 분. 계속 하실,"
"개소리 집어치고 진아 번호 당장 지워 너!"
"나가 혔냐? 진아가 혔제. 느 담배 피믄 인증 샤큰가 뭐신가 허라고 기집아가 으찌나 성화,"
"이 짱깨새끼가 진짜 뒤질려고!!! 어따 대고 감히 계집애야?!!"
"그람 고거시 기집아지 사내눔이냐?"
당장 골프채 들 기세인 중구와 키스 못한 설움을 엄한데 풀고 있는 청 사이에서 자성은,
"둘 다 그만 못해요, 진짜?!!!"
오늘도 사자후를 내지른다.
언제나처럼의 골드문이었다.
2.
물론 그 '언제나처럼'이 쉽게 도래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3.
2년 반 남짓.
첫 일 년은 참다못한 재헌이 간간히 찾아갔고 그 성질에 오래 참은 중구도 거세게 닦달했지만 역시 고집으론 이자성이 오야였다. 무슨 시집살이를 하시나 귀머거리 삼 개월, 장님 삼 개월, 벙어리 삼 개월 버터더니 꽃 피는 봄이 오고는 기어이 한 번 더 쓰러졌다. 그 일로 청과 중구가 개싸움을 벌이고 나란히 입원하는 소동이 있고 나선 재헌도, 중구도 자성에게 발길을 끊었다.
다음 일 년 반은 지독히도 길었다. 그때는 일 년이 될 지, 이 년이 될 지, 십 년이 될 지 기약이 없어서 더 그랬다. 옆에서 지켜보기로 정청은 겉가죽만 정청이었다. 언제까지든 기다리겠다 나름 각오는 했겠지만 각오가 고통까지 줄여주는 건 아니었다. 담배와 술은 중구가 다 말릴 정도로 늘어 갔고 웃음과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더 빌어먹을 건 은희라는 아가씨에게 전해들은 이자성도 정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였다. 독하고 미련한 새끼들. 시간이 무한정일 것 같아? 그러고 버티다 둘 다 후회나 오질라게 해라! 가 중구의 레퍼토리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겨울이나 다름없는 세 계절이 지나고 마침내 진짜 겨울이 찾아왔을 때, 중구는 차라리 줄초상을 치르는 게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골드문 입구 앞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뒤진 모 기업 회장 장례식에 정청 대신 다녀온 길이었다. 일 하나는 바득바득 해내더니 그럴 기력마저 떨어졌는지 청은 회사에 틀어박힌 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씨발. 그럴 걸 뭐 하러 버텨. 나지막이 욕을 뱉으며 세 개비 째를 물 때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풀나풀로 시작해 비 마냥 펑펑. 누구처럼 지랄도 맞았다. 가야지가야지 하면서 한참 하늘만 올려다 보고 있는데 꾀죄죄한 봉고차 한 대가 정문 앞에 섰다. 급정차 하는 꼬락서니에 헛웃음이 났다. 기업 이미지 좀 좋아졌다고 개나 소나 씨발. 안 그래도 좆같은데 너 오늘 잘 걸렸다 벼르며 차 쪽으로 다가가던 중구는 하지만 덜컥 굳고 말았다. 차에서 뛰어내려온 놈이 이자성이었다. 도통 뭘 안 처먹는다더니 그새 더 골은 낯짝으로 중구를 보고는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반사적으로 붙잡은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대체 왜.."
죽어도 안 오겠다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머리꼬리 다 잘라 먹고 넋이 나간 이자성에 중구가 그제서야 뒤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은희에게 입을 떼려던 차였다. 뭔가가 자성을 확 채가더니 와락 끌어안는다. 정청이었다. 거세게 오르내리는 등짝이 회장실에서 여기까지 뛰어 내려온 듯 했다. 하지만 중구는 엘리베이터는 폼으로 있냐 빈정거릴 생각조차 못한 채 정신없이 청을 매만지는 자성을 건너본다.
"형 크게 다쳤다고.. 중구 형 옷도.."
뭐라는 거야. 미간을 찌푸리던 중구는 먼 거리에서도 눈에 띌 만큼 흠칫하는 은희를 보고 대충 상황을 알아차린다. 저 순하게 생긴 아가씨가 깜찍하게 뻥을 치신 모양이다. 답답하다고, 왜들 저러냐고 통화할 때마다 투덜대더니 기어이 일을 쳤네. 거 사람 참 오래 알고 볼 일이라더니 나이스. 중구는 안절부절 못하는 은희에게 비싯 웃는다.
하지만 이자성이야 어디 그럴 기분이겠나. 머리가 슬슬 제대로 돌아가는지 언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셀 것처럼 굴었냐는 양 대차게도 돌아섰다. 정청은 이번에도 병신처럼 보내고 말 게 분명해 중구는 이자성 다리를 분질러 놓아서라도 잡아 앉히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2차 개싸움이 발발할 테고 안팎으로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테지만 두 짱깨새끼 병신 꼴에 속 터지느니 그게 나았다.
뭐. 기특하게도 청이 재빠르게 뛰어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청은 자성의 어깨를 부여잡고 등에 머리를 댔다.
"잠깐만. ...잠깐만..."
"......"
"십 분만.. 아니, 오 분만.."
또라이 새끼. 회장씩이나 된 게 와이셔츠 바람에 맨발로, 뭐 얼마나 장한 놈이라고 신발도 못 신고 뛰어 나와 십 분, 오 분을 조르는지. 솔직히 중구도 좀 왈칵했는데 자성이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등이 젖어들도록 정청이 질질 울고 있었으니 더더욱. 자성은 결국 뒤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눈물범벅이었다.
후에 이어진 장면들은 목격자1 이중구에 따르면 생각만 해도 존나 토 쏠리는 삼류 멜로였고, 목격자2 은희에 따르면 떠올릴 때마다 가슴 설레는 로맨스의 절정이었다고 한다. 목격자의 엇갈린 증언이야 어떻든 그때 정청과 이자성은 이랬다.
얼굴도 제대로 못 드는 청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눈동자가 빨갛게 언 발에 닿았다. 조금 웃는가 싶던 이자성은 한 쪽 무릎을 굽히고 두 손으로 발을 감쌌다.
"...신발 신고 다니라니까. 아무튼 말은 정말 안 듣소..."
그제야 자성을 마주 보며 청은 씨벌롬,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삼류 멜로든 로맨스의 절정이든 뭐든 간에.
이자성은 그렇게 돌아왔다.
4.
북대문에 일대 소란이 일고 -말만한 사내놈들의 차마 볼 수 없는 눈물과 하소연이 주를 이뤘는데 제일은 역시 재헌이었다.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았을 거다.- 이사들의 떨떠름한 축하가 이어지고 이사직이냐 부회장이냐로 한동안 시끄럽다가 중구가 부회장에 오르는 등 두세 달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싫다싫다 버티다가 결국 복귀한 자성이 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업무파악 하느라 밥 먹듯 밤을 새서, 보다 못한 중구가 골프채를 들고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청과 진짜 개싸움 2차를 찍을 뻔한 걸 빼면 나름, 아니. 정말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말이다.
5.
짱깨새끼들 신경 쓰느라 간간히 소홀했던 자기 진짜새끼한테 올인 하신 중구가 오늘은 진아한테 어떤 선물을 사다줄까 고심하던 어느 밤. 자성이 부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회사 내에선 칼같이 부회장님, 부회장님 하던 놈이 중구 형 많이 바쁘오? 하는 것부터 수상쩍었다. 중구는 문 앞에서 미적거리는 자성을 얼른 끌어다 앉혔다. 돌아왔고 잘 지내고 있지만 어쨌든 한 번 거하게 떠난 전적이 있고 절대 돌아오지 않으려 했고, 게다가 몇 번 죽으려고까지 했던 놈이다. 중구는 기억의 잔상이라는 게 정말 좆같다고 생각하며 인내심 있게 자성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만에 꺼내놓은 말이라는 게,
"청이 형 병원 가는 거 말이오. 혹시 어디.. 안 좋단 얘기 들은 거 있소?"
맥 빠질 만큼 별 거 아니다. 중구는 심드렁하게 소파에 기댔다.
"그딴 거 물어 보려고 뜸 들였냐?"
"병원 따라 가는 것도 싫어하고, 몰래 알아 보자니 ..거짓말은 못 하겠고. 지은 죄가 워낙 크잖소."
"..그 애긴 하지 말라니까. 근데 왜. 정청 어디 안 좋아?"
"잠을... 잘 못 자오."
"나 참 별 게 다 걱정이네. 이제 좀 살 만 하냐?"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했는데 한 번 자면 업어 가도 모르던 사람이 계속 그러니까. 혹시.. 수술 후유증 아닌가 싶어서..."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 폼이 맘 상할까 걱정인 모양이다. 중구는 낮게 혀를 찼다. 아무튼 걱정도 팔자다. 그걸로 여직 속 시끄러우면 부회장 자리에 떡하니 앉았을까.
"쓸데없는데 팔 정신 있으면 정청 간수나 잘 해."
"예?"
"너보고 그만 좀 쪼개라고 하라고. 집에 있을 때나 그러든가 말든가. 아주 회사에 소문 다 나시겠어요."
"..형도 참."
이제야 좀 웃는다. 고작 잠 좀 못자는 거에 오만상 구기다가 청 얘기 하나로 또 풀어지고. 이럴 걸 그렇게 오래는 왜 버텼대.
"늙으면 원래 밤잠 없어지는 거야. 아, 정 걱정되면 회사에서 날밤까지 말고 일찍 기어 들어가 화끈하게 안겨 주든가."
순간 빳빳해지는 자성을 보며 중구는 낮게 웃는다.
"새끼 내숭은. 알 거 다 아는데 뭘 가리고 지랄이야. 같은 집에 살면서 각방 쓸 린 없고. 정청이 고자가 아닌 이상 잘 거 아니야. 니들."
"......"
원래도 음담패설과는 거리가 먼 놈이지만 입 딱 다물고 눈알만 굴리는 게 그냥 낯부끄러워 그러는 건 아닌 것 같다. 중구는 그제야 떨떠름 목소릴 낮췄다.
"뭐야. 니들... 아직 안 잤냐?"
"......"
"진짜? 정청이가 널 옆에 두고 정말로 손도 안 댄다고?"
"....뭐 듣게 되면 말 좀 해줘요. 부탁 좀 합니다."
우사인 볼트 저리가랄 속도로 빠져 나가는 자성 뒤에서 중구는 간만에 고뇌에 빠졌다.
정청 이 새끼 이거... ...비뇨기과라도 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6.
청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자성이라고 안 한 건 아니다. 한때는 정청 잣 라이브 쇼 청취록까지 쓰질 않았는가. 열 여자 마다 않던 사람이다. 한 번이긴 했지만 자성도 안긴 적이 있고. 처음 얼마는 조금 긴장했다. 청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확인된 바. 그건 전처럼 팔다리 얽혀 자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 집, 한 방, 한 침대를 쓰면서도 청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기미는커녕 잠마저 못 잤다. 눈을 감고 자는 척하면 한참 있다 일어나 침대 맡에 앉아 있다가 해가 뜰 무렵에서야 슬그머니 자리에 누웠다.
중구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자성은 사실 그럴 때마다 암담해졌다. 이렇게 돌아온 게 정말 잘한 일일까 수 백, 수 천 되물어졌다. 함께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마주 봐야할 과거가 있다. 청도, 자성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그때. 혹시 청이 후회하고 있는 건 아닐까. 후회하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번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성은 그것이 두려웠다. 괜히 병원얘기를 들먹이며 어떻게든 이유를 먼저 찾아내고 싶을 만큼. 중구에게 말한 후로도 몇날 며칠 끙끙 앓던 자성은 결국 청에게 제대로 물어보기로 했다. 혼자 도망쳐버리는 짓은 이제 할 수도 없으니까.
"....뭐?"
"내가 온 거 불편한 거 아니냐고 물었소."
웬일로 집에서 한 잔 하자기에 좋다고 왔더니 혼자 소주 두 병을 홀랑 비우고는 뜬금없는 소리다. 조용한 눈동자가 취한 것 같진 않고. 니미.. 쭝구 시키 말이 이거였고마. 청은 한숨을 삼키며 담배를 문다. 신나게 퇴근하는 길에 중구를 만났다. 평소에도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게 위아래로 아니꼽다는 눈길도 오랜만이라 바쁜 걸음 멈추고 뭔 일이냐 먼저 물어줬더니 '이자성하고 너 정신만 사랑한다, 몸뚱이는 아니다 뭐 그런 좆같은 사이냐?' 개소리였다. '아직도 존나게 여유가 넘치시는 건지 겉보기랑 다르게 영 부실하신 건지. 영감도 뒤질 때까지 계집애 끼고 잘만 논 판에 이거야 원 쪽팔려서.' 끝까지 족보도 없는 신종 시비기에 저게 또 진아한테 뭘 까였나 가볍게 넘기고 왔는데. 이거였다.
"...잠 못 자는 거 아오."
"....고거슨"
"나이 들어 새벽잠 없어졌다고는 말아요. 아닌 거 형도 나도 아니까."
"......"
"혹시... 내가 아직 저쪽과 연결돼있나 걱정 돼서 그러는 거면,"
"야. 이자성이."
굳어진 목소리에 자성이 슬쩍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십 년이었소. 형은 아니라고 해도 어쩌면 형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어.."
"느 진짜 계속 그딴 식으로 말 헐,"
"그래서 잠도 못 자고 나한테 손도 안대는 거 아니요."
직선적인 물음에 청은 잠시 입이 굳는다. 어쩌다가 그런 게 아니라 분명히 의식적으로 몸도, 과거도 손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걸 자성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청은 자성이 피하는 줄 알았다. 회사 일에 매달려 집에도 잘 안 들어오기에 아직은 얘기할 준비가 안 됐나보다 혹은 얘기하고 싶지 않나 보다 했다. 청은 꼬불꼬불 자라난 머리를 헤집는다. 옛날에도 혼자 짐작으로 배려하다 된통 혼쭐 나놓고. 정신을 덜 차렸고마. 뭐든 말하는 게 중하다고 진아가 그랬는디.
진아와 가까워지고 물은 적이 있었다. ‘중구를 어째 그리 잘 따르냐. 섭하지도 않으냐?‘ 진아는 별 웃기는 질문 다 듣겠다는 듯 검은 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당연히 섭섭하지, 했다.
'섭섭하고 화도 나고 그랬지. 할머니가 아빠가 너 안전하라고 할머니한테 둔거다 했어도 이렇게 크도록 연락 한 번 안 하는 아빠 안 미워할 딸이 어디 있어. 그래서 아빠 만나고 물어봤어. 나 왜 혼자 뒀냐고. 왜 안 찾았냐고. 아빠 미워했다고, 진짜 나쁘다고. 근데 보고 싶었다고. 찾아와줘서 좋기도 하다고. 아빠는 어떠냐고. 그랬더니, 이건 절대 비밀인데 삼촌, 아빠가 말도 못 하고 울더라? 덩치는 산만해서 다 큰 어른이 애처럼 그러더라구. 그래도 있지. 안 봐주고 계속 말 시켜서 다 들었어. 밤새 듣고 말하고, 또 밤새 듣고 말하고. 우리 아직도 그래. 뭐든 다 말하고 듣고. 그래야 아빠가 나 사랑한다는 거, 그래도 된다는 거 아빠 스스로 알 거 아니야. 난 다 괜찮지는 않아도 크게 안 괜찮지도 않은데 아빠가 괜히 혼자 미안해하느라 쭈뼛거리면 재미없잖아. 이제야 겨우 만났고, 난 우리 아빠 되게 좋은데."
청은 바로 앉아 더듬더듬 말문을 연다.
"...솔직히 처음엔 좀 불안혔다. 느가 말하는 그런 것 때문이 아이고... ...느가 먼저, 그것도 빨리 돌아와 주고 회사도 나와 주고 같은 집에 있어주고 웃고 말허고 옆에서 잠드는 거시 종종 꿈 같어서. 혹시 이거시 다 꿈이면 으쩌나. 깨나면 이자성이는 여전히 희망의 집에 있고, 아니. 아직 찾덜도 못허고 계속 나 혼자면 으쩌나... 쉽게 잠이 안 오더라고. ...겨우 찾고 보니 진짜 무섭드라. 이자성이 없는 하루하루가 으떤 건지 뼛속까지 아파봐서... 그라고 나는 느가 피하는 줄 알았어야. 하도 회사에만 있어서 아적 나 보기 힘드나..혔제. 안고 싶기는 씨빡... 말도 못하게 그란디. 다시는 나 혼자 그러는 거 느한테 하고 싶지 않었다. ...나도 나가 이라고 약한 놈인지 인자 알았는디 ...못나서 싫으냐."
어색하게 웃는 청을 차마 다 못 보고 자성은 고개를 숙인다. 정청 진짜 못났다. 진짜 너무 못나고 바보 같은 남자다. 저는 아직도 제가 짐일까, 그래서 내쳐질까 그것만 두려워했는데 청은 이렇게나 여전하다. 형님은 무신. 형이라고 불러야 했던 처음부터 꼭 돌아오라며 애써 돌아서줬던 그때까지처럼 지금도.
"..나가 진작에 말을 혔어야 혔는디... 얘기허자. 입이 닳도록 애기허고 또 얘기허자. 나도 다 물어보고 다 말할 것인께 느도.. 자성아. 느도 그런 생각 말고, 아니. 그런 생각도 다 말혀라. 혼자 그라지 말고. ...그라니께,"
"형은,"
불쑥 튀어 오른 목소리가 붉게 흔들린다. 검은 눈동자도 어느 새 축축해져 있다.
"정말 바보 같소. 배알도 없어. 사람이 속도 없이..."
"나가 생각혀도 좀 그렇긴 혀. 성철이가 봤으믄 지랄병 났다고 아주 발광을,"
"미안하오."
"......"
"내가 정말... 정말 잘못했어요. 형.."
잘못했소, 미안해요, 잘못했어.. 끝없는 사과를 멈추는 대신 청은 자성을 끌어안았다. 이 사과가 저에게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몫까지, 함께 빌어야 할 사람에게까지 하고 있는 것이리라. 마음껏 혀라. 하고 싶은 만큼 실컷 혀. 중얼거리자 오랜만에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음을 토하는 자성을 꽉, 더 깊이 안으며 청은 울음 섞인 웃음을 지었다.
우습지만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제야 진짜 이자성이 돌아온 것 같았다.
7.
다음 날. 회사에는 정청만 유난히 맑게 갠 얼굴로 출근했다. 중구는 자성의 빈 자리를 힐끗이며 코웃음을 쳤다.
"비뇨기과 진료는 취소해도 되겠구만."
8.
이중구의 딸 사랑은 그룹 내에서도 유명했다.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이중구는 이중구, 저게 언제 또 돌변해서 골프채를 휘두를지 모른다 긴장하던 이사들도 진아를 대하는 중구를 보고 나선 중구에게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다. (물론 곧 후회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중구는 진아 한정 다정다감한 남자였다.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목소리도 무슨 꽃바람이 부나 싶을 정도. 청은 그런 중구를 삼중구라고 놀려대며 재밌어 했는데 그럴 때마다 곤란한 건 역시 자성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남...... ........뭐?"
오랜만에 진아, 청, 자성까지 넷이서 레스토랑에 온 중구는 진아 고기를 잘라주다 말고 퍼렇게 질린다. 죽은 석동출이 살아 와도 저렇진 않을 텐데. 자성은 한숨을 삼키며 얼른 청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청은 딱 건수 잡았단 표정이다. 신나서 입을 떼려는 찰나 옆구리를 꾹 찌르자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게 어째 갈수록 애가 돼. 자성은 고개를 내저으며 넋 빠져 있는 중구 손에서 칼부터 빼낸다.
"진아야. 아빠 놀라신 거 같으니까 일단 밥 먹고 다시 얘기"
"남자친구 생긴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빠도 은희 언니랑 사귀잖아."
"...갑자기 말을 하니까,"
"말이 밥도 아니고 갑자기 하지 그럼 뜸 들였다 해?"
"아따 기집애 말 한 번 잘 허네."
"...형은 쫌."
"나가 뭘 으쨌다고 자꾸 찌르고 그라,"
"뭐 하는 노!.......... ...얜데."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중구에게 진아가 방긋 웃으며 몸을 기울인다.
"학교는 사정이 있어서 못 다니고 검정고시 준비해. 학원에서 만났는데 되게 멋있어. 막 친다? 손으로도 이렇게 이렇게. 발도 콱콱."
손을 여기저기 휘두르며 발도 뭔가 밟는 시늉인 진아를 보고 중구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청마저 멈칫 굳는다. 방식이 다르다 뿐이지 북대문이 처음에는 진아가 청의 딸인가 했을 정도로 진아를 예뻐하는 청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 목소리가 금세 탁해진다.
“주먹.. 쓰는 겨?”
“가끔? 흥이 오르면 그러기도 해.”
".....집은."
"근처야. 부를까?"
자성은 슬그머니 청의 칼도 치운다.
"아니, 부모님 말이야, 진아야."
"아아. 엄마는 아기 때 돌아가셨고 아빠는 별로 말하기 싫대. 고아원에서 컸는데 인기 되게 많아. 애들이 얼마나 따르는데. 지도 아직 어른 아니면서 애들 앞에서는 되게 어른인 척 한다? 완전 귀여워. 사진 보여줄,"
"안 돼!"
자성은 저도 모르게 진아의 핸드폰을 막는다. 눈이 동그래져 왜 그래, 삼촌? 하는 진아에게 지금 여기서 그 사진을 보여줬다간 인천 앞바다에 다시 드럼통이 뜰 지도 모른다고는 할 수 없어서 자성은 어설프게 웃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 은희씨 올 시간 다 됐는데 마중. 그래, 마중 가자, 같이."
"...삼촌 웬 식은땀을 그렇게 흘려? 체했어? 약 사올까?"
"아니, 아니야. 일단 나가자."
"아픈 거 같은데.. 환약이 좋대. 고아원에 잘 체하는 동생 하나 있어서 진화,"
"그래! 체했나 보다! 야, 약국부터 가자."
자성은 걱정 어린 진아를 떠밀다시피 데리고 나가며 힐끗 뒤를 돌아본다. 아직 패닉에 빠져 있으니 망정이지... 진짜 골치 제대로 아파질 것 같았다.
9.
인천창고 재가동 내지는 골프채 풀스윙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했지만 손을 이렇게, 발도 콱콱이 알고 보니 주먹질이 아니라 드럼이어서 다행히 그건 피해갔다. 하지만 여전히 낙관할 상황은 아니다.
"오늘밤만 여기서 잘게. 오늘은 진짜 아빠 보기 싫어."
진아가 중구랑 싸우고 집을 나왔다. 며칠 애써 침착하던 중구가 대폭발을 해버렸다고, 안 된다고 그 놈은 절대 안 된다고 윽박을 질렀다고 한다. 애가 타긴 진짜 탔나 보다. 평소에는 애 버릇 나빠진다고 청이 다 걱정할 정도로 싸고돌던 사람이 오죽했으면. 자성은 퉁퉁 부은 진아에게 따뜻한 커피를 내주며 한숨을 문다.
"그래도 이렇게 오면 어떡해. 아빠 걱정하시잖아."
"...오는 길에 삼촌네 있겠다고 문자했어."
와중에 챙기기는 다 챙겼네. 자성은 피식 웃으며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청은 자성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니가 아빠면 다냐, 우리 진아한테 소리를 지르긴 왜 지르냐 방방 뛰고도 남았겠지만 이번만은 청도 완벽히 중구 편이었다. 드럼인지 드럼통인지 진아의 남자친구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북이든 뭐든 어쨌든 뭘 때린다는 건데 손맛 잘못 들어 그걸로 사람 팰지 어떻게 알아, 가 주된 주장이었지만 자성이 듣기에도 설득력은 개뿔도 없는 소리였다.
"...아가. 느 그눔아를 꼭 만나야 쓰겄냐."
"..삼촌하고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그라지 말고 아빠 말 들으라. 다 느 위해서 그러는 거여."
"내가 좋다는 사람 못 만나게 하는 게 날 위한 거야?"
"아빠 심사를 그라고 모르겄냐. 나도 이라고 싫은디 느 아빠는,"
"왜 싫은데. 뭐가 싫은데!!"
"진아야."
"가난해서? 엄마 아빠 없어서? 고등학교 중퇴해서?! 그게 사람 싫어할 이유가 돼?!! 나도 그랬어. 나도 어렸을 때 가난하고 엄마 아빠 없었어. 그럼 그때 나 싫어하고 놀린 애들도 다 맞는 거야? 잘한 거야? 당연한 거야?!!"
눈가가 발개져 외치는 진아에 자성도, 청도 할 말을 잃는다.
"난 삼촌이랑 아빠는 걔 좋아해 줄 줄 알았어. 아니. 적어도 그런 이유로 싫어할 줄은 몰랐어. 회사에 있는 삼촌들, 반 이상이 부모님 안 계시고 중학교도 못 나왔지만 못났다 멍청하다 안 하고 다 동생 삼아 줬으니까. 근데 진환이한테만 왜 그래? 진환이가 얼마나 착한데.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꿋꿋하게 노력하며 사는데...“
“......”
“그리고 나도... 나도 아빠 반대 안 했잖아. 아빠가 은희 언니 만나는 거 안 된다고 안했잖아. 나는 뭐 쉬웠는지 알아? 아픈 언니가 엄마 될 지도 모르는데. 난 태어나면서 엄마 잃었는데 엄마 또 잃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나도, 아빠도 또 힘들어질지 모르는데... 그게 겁나고 무서웠는데도 아빠가 좋아하니까, 행복해하니까 암말 안하고 축하해줬는데! ...한 번 보지도 않고. 진환이가 어떤 앤지 제대로 만나 보지도 않고 아빠는..."
자성은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진아를 다독이며 청을 돌아본다. 어디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청의 심정도 아마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관문 앞에 굳어 있는 중구도 물론.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살아내며 온갖 멸시와 수모, 냉대, 받을 만큼 받고 겪을 만큼 겪었다. 부모가 없다고, 돈이 없다고, 입은 옷이 초라하다고 별 같잖은 이유로 수도 없이 내쳐져 봤다. 그때, 그 춥고 외롭고 모질었던 때 진아처럼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그런 걸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게 나쁜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미치도록 바랐지만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이라 지레 포기하고 말았던 그런 사람이. 자성은 부드럽게 진아를 감싸 안는다.
"...진아야. 미안해. 삼촌도 말은 안 했지만 니가 좀 더 좋은, 아니 평범한 사람 만났으면 하는 마음 아빠랑 똑같았어. 그건 니 남자친구가 싫어서가 아니라... 삼촌이 그렇게 살아서. 삼촌 같은 사람 만나는 걸까봐 그랬던 거야. 아빠도, 청이 삼촌도 마찬가지고. 우리 같은 사람은 아니었으면,"
"아니야!!"
눈물범벅이 돼서도 대차게 고개를 든 진아가 오히려 자성을 끌어안는다.
"삼촌들이 어때서. 우리 아빠가 어때서. 그런 생각 하지 마. 진짜 싫어. 예전에 잘못한 거 지금 열심히 갚고 있잖아. 아빠도, 삼촌들도 유야무야 그러지 않았잖아. 근데 왜 그런 말을 해. 난 진환이 우리 아빠 같아서 좋아하는 건데. 착하고 성실하고 좀 서툴어도 열심이라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라니. 삼촌 같은 사람이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언젠가 청도 그랬다. '앞으로 나 같은 놈 때문에, 그란 말 하지 말어라. 나도 나 같은 놈 때문에, 그거 안 할라니까.' 자성은 눈가를 훔치는 중구와 코끝을 문지르는 청을 돌아보다 허공으로 고개를 든다. 어렸을 땐 뭐가 그렇게 다 화가 났는지 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한테도 화를 내며 버텼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할머니의 유언을 핑계 삼아 아득바득 버텼다. 청을 만나고 간신히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 한 조각 숨마저 고통이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꼭 살아야 하나 허망해지곤 했다. 청과의 일을 겪고 나서는 더더욱 그저 버틸 뿐인 삶이었다. 사실 따뜻하기를, 웃을 수 있기를, 그 작은 것을 바랐는데. 언제는 너무 작은 것이어서, 또 언제는 너무 큰 것이어서 차마 마음껏 바라지도 못했는데.
...살아서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0.
해가 바뀌고 청과 자성은 인천 바다를 찾았다.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애기를 나누며 다시 웃고 편해졌으면서도 여기를 다시 오기는 처음이었다.
"아따 춥고마."
"나이 든 거 티내는 것도 아니고."
불퉁대는 척 잡아오는 손이 따뜻하다. 청은 지그시 웃으며 바다를 바라봤다. 여기 참 많은 목숨을 던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쩌면 습관처럼 사람을 죽였다.
"석무가 이제서 왔다고 뭐라는 거 아닌지 모르겠소."
"뒤통수 한 대 맞으믄 와 줘셔서 감사합니다~ 할 것인디."
피식 웃음을 터트린 자성이 미안하다는 듯 바다로 소주를 따른다.
"니가 이해해라. 이 형이 워낙 좀 그렇잖아."
"그려 이 씨벌롬아. 니가 이해혀. 나가 워낙 좀 그릏다."
청이 남은 소주를 들이부으며 하는 말에 나란히 웃고 둘은 다시 바다를 향했다. 죽은 자의 목숨을 산 사람의 생으로 갚겠다는 건 그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언젠가 반드시 올 그 날까지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때로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몸서리가 쳐져도,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또 다시 짓눌린다 해도, 열심히 힘껏 웃으며 끝까지 살아내는 수밖에는.
"자성아."
"왜요."
"까칠허기는. 쫌 스윗~허게 진환이 눔처럼 응~? 하고 답하믄 주둥이가 썩냐?"
"진환이 뒤에 놈 붙였다고 안 이르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진아한테 또 팔뚝 긁히고 시무룩해지려고."
"나가 언제! 고거슨 중구거든?"
"그럼 일러?"
".....씨벌롬. 아무튼 뭔 말을 못하게 혀."
"무섭긴 하구나? 하긴. 내가 이르는 데 좀 일가견이 있긴 하지."
"얼씨구?"
자성은 쿡쿡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난다.
"그만 갑시다. 중구 형이 저녁 먹자고 했잖아."
"은희 동상이랑 둘이 자실 것이지 와 우리는 끼고 지랄이여."
"할 말 있다 잖소."
"진아 동상이라도 가졌나?"
"결혼식이 내일 모렌데 무슨.“
“진아 동상이믄.. 진아 쫌 닮았겄지?”
“왜. 부럽소?"
"부러우믄. 낳아 줄라고?"
"정 원이시면 밖에서 하나 낳아오고."
"이 씨벌롬이!"
발끈하는 청을 놀리듯 자성이 몇 걸음 앞서 나간다. 저녁놀을 받으며 환하게 돌아보는 자성의 팔목에서 캐릭터 시계가 반짝거렸다. 청은 자성을 가만 바라보다 빙그레 목청을 울린다.
"어이. 이자성이."
"응~?"
"...부라더."
"아, 왜요. 원하는 대로 스윗인가 뭔가도 해줬구만."
"오래 살어라."
"......"
"아. 오래 살라니께 뭘 그라고 꼬나봐야?"
자성은 청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구부정한 등을 끌어안자 청의 뒤로 퍼런 바다가 마치 그날의 여수 같다. 하지만.
"..형도요."
“......”
“...오래 삽시다. 우리... 같이 오래 살아 봅시다.”
그때는 차마 할 수 없던 말을 오늘은 힘 있게 해줄 수 있다. 존나게 설렌다야. 허리를 감싸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 청에게 오늘에서야.
시퍼런 바다가 울렁이는 부둣가에서 청과 자성은 오래도록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지울 수 없는 죄들을 짊어지고도 살아갈,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