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자성. 지새는달
-신에 ep 中 희망의 집. 자성 찾아간 정청.
-for 솨님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진 희망의 집 사람들에게 불침번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성의 방 창 아래 의자를 두고 꾸벅꾸벅 졸던 고씨 아저씨는 수도 없이 굴러 떨어져 상처투성이가 됐고, 미애 언니는 며칠 밤을 새우다 고열이 끓어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자성의 고집은 대단했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해서도 문 걸어 잠그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뭐가 그리 싫은지 발소리만 나도 하던 일을 멈추고 차게 돌아서는 통에 은희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자성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처음에는 겉모습만 보고 험한 부륜가 했지만 때마다 속없이 웃으며 '나때매 고생이 많으요. 그라도 아픈 분들이 이라고 잠을 안 자믄 쓰나. 나가 알아서 헐 테니께 고만 하소.' 하며 희망의 집 사람들을 걱정하고 드는 청은 첫인상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무섭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답답하고 신기하고 이상했다. 고씨 아저씨가 곁을 내줄 만큼 대단한 넉살이 그랬고, 어디 회장이란 사람이 불그레한 낯이 땀범벅이 되도록 밭일에 열심인 것도 그랬고, 연고도 없는 희망의 집에 눈 튀어나올 만한 액수의 돈을 척하니 내놓는 것도 그랬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게 저 싫다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게 그랬다. 친형제도 아니고 대체 무슨 사일까. 무슨 사연이 있기에 한 사람은 저토록 지극정성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퍼렇게 말라가면서도 버틸까. 그러나 평소 입담 좋은 청은 그 질문 만에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나가 있을 것인께 동상은 들어가소. 아. 동상이라고 불러도 되겄지?"
청이 실실거리며 어깰 붙여온 날이었다. 마음이 부산해 밤새 뒤척이다가 먼지 없는 방바닥만 몇 번 쓸었다. 그러고도 아침이 오질 않아 결국 신발을 꿰차는데 산책하러 가는 거야, 듣는 이 없는 중얼거림에 뺨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름이 지척이지만 산골은 아직 서늘했다. 은희는 카디건을 두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희미하게 담배냄새가 섞여들었다. 얼마 전 검진결과에 유난히 낙담하던 부남인 듯했다. 은희는 한숨을 삼키며 그저 가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애써 잡고 있는 희망이 쓸데없는 오기로 전락했을 때조차 규칙 운운할 순 없었다. 그 절망을 누구라고 모르겠는가. 살짝 들떴던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담배냄새가 자성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깊어졌다. 담배 피는 건 못 봤는데. 벽 뒤에 숨어 고개만 살짝 빼고 보니, 범인은 부남도 자성도 아닌 청이었다. 자성의 방문 앞에 쭈그려 앉은 청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반쯤 타 들어간 담배가 위태롭게 걸려 있었다. 안 되는 거 알면서 저 사람이? 은희는 부러 뚜한 척 청을 째려봤다. 죽을병 걸린 사람 아니면 봐줄 생각 없다. 아이러니하든 말든 저 사람은 희망과 절망을 목숨 걸고 오가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난 지금 어쩔 수 없이 말 거는 거다. 은희는 변명하듯 목을 가다듬었다.
"안 춥냐."
막 나서려던 차에 흠칫한 은희는 곧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에게 건 말이 아니다. 청은 굳게 잠긴 방문을 돌아보며 피식 웃고 있었다. 수도 없이 봤던, 이상하게 뒤척이게 한 그 미소가 아니었다.
"허기사. 느는 더위는 오지게 타도 추위는 별로 안 타제."
"......"
"밥은 묵었냐."
"......"
"세 끼 꼬박꼬박 챙기는 놈이 고생이 많다."
다정하고도 쓸쓸한 목소리였다. 허공으로 들린 눈동자가 어둡게 일렁거린다. 지금 여기가 아닌, 그리운 어딘가를 더듬는 눈빛이었다.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가 아득해서, 은희는 담배를 꾸중할 핑계도 잊고 청을 바라봤다. 누구에게나 싹싹하고 가리는 거 없이 아무거나 잘 먹고 힘든 일도 군말 없이 해내는 다정하고 강한 등이 딴사람처럼 구부정했다. 낯설고, 익숙한 등이었다. 노력을 비웃듯 악화된 결과에 힘없이 주저앉은 부남 아저씨, 열여덟에 입양 보낸 아이 사진을 닳도록 매만지는 미애 언니, 찾아올 가족 하나 없는 고씨 아저씨, 그리고 은희 자신.
희망의 집에 오기 전에 만났던 남자는 은희가 발병하고 얼마 안 있어 이별을 통보했다. 어려서 폐암으로 어머니를 잃은 사람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은희를 지켜보는 게 너무 무섭고 힘들다며, 견딜 수가 없다고, 미안하다고 은희의 단칸방에서 꼬박 하루를 울고 갔다. 누구의 잘못도 없이, 서로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헤어지고 은희는 하루를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해가 뜨고 지고, 다시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하늘로 하얀 달이 떠있었다. 곧 사라질 거면서 미련하게 버티고 있는 달이 꼭 저 같았다. 사방이 환해지고 마침내 달이 사라졌을 때 은희는 분풀이하듯 커튼을 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니. 통곡이었다. 억울했다. 남들 다 있는 부모도 없이 혼자 아등바등 그래도 열심히 살아 왔는데 왜 하필 이런 일이 나한테 생긴 건지 너무 무섭고 억울하고 화가 났다.
문득 아래로 향한 청의 얼굴이 순간 울 것처럼 구겨졌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청의 발치에 검남색 운동화가 흐트러져 있었다. 슈퍼 할머니가 자성에게 사다 준 삼천 원짜리 운동화였다. 한참을 쳐다만 보던 청은 다 해진 신을 바로 놓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세상에 다시없이 귀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은희는 어쩐지 남자와 이별하던 날처럼 울어버릴 것 같았다.
서서히 동이 터 오자 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다시 은희가 아는 유쾌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이후 은희는 건들거리는 등을 예전처럼 볼 수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봐 버린 또 하나 때문인지도 몰랐다.
청이 벽을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문가에 서 있는 자성은 한숨도 못 잔 얼굴이었다. 청의 노력을 줄기차게 외면하던 그 얄미운 얼굴과는 달랐다. 청이 앉았던 곳을 내려 보다 힘없이 주저앉았다. 똑바로 놓인 운동화를 더듬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프지도 않고 살날도 많으면서, 게다가 저렇게 뒤에서 차마 울지도 못하고 주저앉을 거면서 왜 청을 외면하는지, 청은 왜 밤새 문 앞을 지키고 앉아 목숨을 걸고 희망을 잡는 양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면 더는 궁금해 하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면 저 두 남자들 몫까지 억울해질까봐. 은희는 고개를 돌렸다.
서산 너머 희끄무레한 달이 바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