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자성중구. 사계(死季) 4
4.
눅눅한 공기는 싸움을 부추긴다. 그냥저냥 넘어갈 일도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 머리채를 잡아뜯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봄바람에도 고성이 터지는 골목이야 오죽할까. 여름만 되면 열대야 때문이 아니라 싸우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 습기가 늘어지는데도 아무도 서로에게 욕하지 않고 그 누구도 무언가를 깨부수지 않는, 놀랍게도 평화로운 밤인 것이다! ...라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단체로 약이라도 했다는 편이 더 맞을 테고. 진짜 이유는 초록대문 너머에 있다.
-씨발 이 개새끼가!! 죽고 싶냐? 안 비켜?!
-형님, 제발 조금만 진정하시고..
-비키라고 이 씨발놈아!!!
깡패소굴인 걸 원래라고 모른 건 아니지만 오늘은 아주 본격적이다. 용이며 사자며 호랑이며, 아무튼 사납고 위대한 동물들은 싸그리 다 새겨 넣은 팔뚝들이 열시쯤부터 슬금슬금 모여들더니, 자정이 넘어 가자 더러운 꼴을 볼 만치 본 치들도 숨을 죽일 상소리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곧 와장창, 윽, 퍽! 이런데 뭐하러 공포영화를 돈 주고 보나. 순식간에 여름에서 겨울로 갈아탄 동네 사람들은 널빤지 안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바라건대 제발 저 집 마당에 고일 피 웅덩이가 우리 집에 튀지 않게 하소서.
그 기도를 자성이 들었으면 이뤄질 거니 걱정 말고 자빠져 주무셔라 친절히 답해줬을 거다. 신은 본 적 없어 모르겠지만 이중구는 알 만큼 알았다. 그는 적이 아니면 물지 않는 주의다. 민간인에게는 깡패가 아니라 그냥 성격 더러운 사람이라는 거다. 평소라면 같은 편에게도 마찬가지로, 마당 한 구석에서 옆구리며 등짝을 두드려 맞고 있는 재헌도 동의 할 거다. 뒤통수나 후려치고 정강이나 걷어차면 모를까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이 얼마나 평소와 다르다는 건가. 핏발 선 눈으로 길길이 날뛰고 있는 이중구나 딴 사람도 아닌 이중구 손에 나 죽었소 맞고 있는 박재헌이나 재헌의 머리통이 터지기 전에 여차하면 내가 교대한다 결연한 동생들이나 이 모든 상황을 멀건이 보고 있는 이자성이나 무엇보다, 정청이 없다는 거나.
-..석무 연락 왔는데 부산에도 안 계시답니다.
-......
-...저라도 서울 다녀올까요.
인호의 초조한 속삭임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자성의 시선은 중구에게 머물러 있다. 마지막 복부 한 방에 사지를 늘어뜨린 재헌을 노려보다 고개를 든 중구는 누구라도 나서면 물어 죽이겠단 눈이다. 미열이 지독하게 달라붙었다.
처음에는 청의 부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4시간이 모자라게 싸우는 사람들이 하루 반나절을 붙어 보내고도 다정히 돌아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구는 씨발 개새끼와 청을 동격 삼으며 으르렁댔다. 내용인즉슨 협상 내내 쥐좆만큼도 도움 안 된 인간이 순대국밥을 먹다 말고 훌쩍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또 좆질이나 하고 있겠지, 이 개새끼 오기만 하면 씨발 아주 네 발로 기게 만들 테다 바득대던 중구는 해가 지고도 얼마를 참다 청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째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가 흘러나왔을 때 중구는 지체 없이 동생들을 소집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다 큰 어른이 전화 좀 안 받는다고 무슨 오버냐 할 테지만, 청은 배터리가 나가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 충전을 요구할 만큼 핸드폰만큼은 꺼두지 않았다. 자성이 언젠가 이유를 묻자 쭝구가 울까봐 라고 히죽거렸는데 유치한 농담만은 아니었나 보다. 주변을 샅샅이 뒤지다 못해 석무를 부산까지 내려 보낸 중구가 골드문에 가겠다고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뭘 봐.
-......
-왜. 너도... 이자성 너도 날 막을 거냐?
상식적으로 골드문에겐 청을 제낄 이유가 없었다. 삼합회와의 거래를 탐내는 이들이 성사도 전에 청을 왜 팽하겠는가. 또 만에 하나 사단이 났다 한들 골드문은 중구가 혈혈단신, 혹은 북대문 모두가 쳐들어가도 단번에 박살낼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이것이 재헌이 몸을 날려 중구를 막아서고, 중구에게 휩쓸려 서울 가자 으쌰 으쌰 하던 조직원들이 이성을 챙겨 형님을 막자, 꿈도 못 꿀 결심을 하게 된 이유다. 옳았다. 틀린 것이 없었다. 누가 봐도 맞았다. 그러니 자성도 바싹 다가서는 중구에게 말해야 했다. 안타깝다는 듯,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도 애써 참고 있다는 듯. 그만해요. 청이 형 저승사자도 쥐어박을 사람이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기다리면..... 기다리면.
기다린다고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이 골목에서 깨달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때는 누구의 죄도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은. 지금은 누구의 죄인가.
더위마저 움츠린 침묵이 지나고 자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 갑니다.
-......뭐라고 했냐.
-못 간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성의 얼굴이 돌아간다. 마당으로 소리 없는 경악이 번졌다. 굳기는 중구도 마찬가지다. 자성의 터진 입가가 눈을 찔렀다. 정작 맞은 사람만 침착하게 피를 훔친다.
-정신 좀 돌아와요?
-.......
-그 성질에 없는 일도 만들 사람이요, 형은. 그러니까,
자성은 저도 모르게 말을 이었다.
-있어요. 내가 갈 테니까.
겨우 몸을 추스르던 재헌이 형님! 비명처럼 외치는 걸 시작으로 안 됩니다, 무슨, 형님까지 왜 이러십니까, 하는 소란의 가운데서 중구와 자성만이 말이 없었다. 난생 처음 외국어을 들은 듯 서 있는 중구를 보며 자성은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이유 모를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