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자성중구. 사계(死季) 5
5.
가장 많이 들은 말로 이름을 바꾸라는 법이 생긴다면 어떤 이들은 김 대리나 정 팀장, 야, 너, 엄마, 아빠 기타 등등 너무 많이 겹쳐 뒤에 1, 2, 3을 붙여야 하는 이름이 될 것이다. 후자에 속하는 청에게는, 그럴 경우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개새끼 혹은 시발새끼. 둘 중에 뭐가 나을까 곰곰이 턱을 매만지니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냐며 상상인데도 중구가 길길이 날뛴다. 그럴 만도 한 게 두 종류의 새끼가 중구 나름의 애정이라는 건 청 네 대문도 안다. 이를 테면 중구는 깡패로 벌어먹는 청의 신세를 수시로 대신 한탄하곤 했다. 이 새끼가 그래도 나보다 공부 잘했다, 학교는 안 빼먹었다, 이 새끼가 그래도, 그래도... 술만 취했다면 자성을 붙들고 그래도 타령이었다. 하지만 숨겨왔던 중구의 수줍은 마음 모두를 차치하고 말하자면, 그건 전적으로 중구만의 생각일 뿐 청이 알기로 자신은 원래 그런 구석, 그러니까 사람 머리통을 쇠파이프로 내리 치고 실실 웃는다든지, 잘 갈린 사시미를 쑤셔 넣고도 걸쭉한 선짓국을 즐긴다든지 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
열 살 땐가. 청색 멜빵바지에 팔 대 이 가르마를 타고(지금은 놀림 받기 딱 좋지만 그때는 그게 유행이었다.) 미제 과자나 장난감 자동차 따위를 뽐내던 놈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청은, 믿기진 않겠지만 또래들 사이에서 숫기 없는 짱깨쯤으로 취급 받았다. 그 탓인지 지금처럼 펄펄 끓던 여름날, 반지르르한 파란색 덤프트럭을 치켜든 놈이 ‘느이 아빠더러 나한테 배추 팔라고 시켜봐. 그럼 이거 너 주지.‘하며 까부는 게 아닌가. 청 주제에 엉엉 울며 집으로 도망가 아버지 배추트럭이나 콩콩 차댈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반전 있는 남자로 청은 트럭 대신 놈의 들창코를 콩, 아니 뻥! 차줬고, 지역유지 자제분의 코에서도 배추팔이 아들과 같은 색깔의 피가 나온다는 걸 알았다. 반짝반짝한 장난감도 내던지고 눈물 콧물 핏물 질질 짜며 일어나지도 못한 채 엉덩이로 슬금슬금 달아나는 놈을 보며 청은 아버지가 어쩌다 사주는 팥빙수를 떠올렸다. 달콤한 얼음을 한 가득 퍼먹으면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짜르르해졌는데 꼭 그때 같았던 것이다.
그 일로 아버지는 배가 불룩한 유지에게 여름이 다 가도록 허리를 굽혀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집 부모들처럼 회초리를 들거나 말로 패거나 끌고 가 억지로 사과를 시키는 일은 없었다. 다만 몇날 며칠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잠들 때까지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던 손도 없었다. 해서 청은 다신 주먹질을 하지 않았다. 짜릿함 따위 좀 못 느끼면 어떤가. 피와 살을 나눠주진 않았지만 그는 청의 유일한 아버지였다. 손가락 아홉 개로 밤낮없이 배추를 팔아 소시지 반찬이나 쫄쫄이를 챙겨 주던... 그의 아들이고 싶었다. 그의 아들이라는 이름 말고 다른 이름은 필요하지 않았다.
주름 진 바지 속 담뱃갑을 움켜쥐다 청은 입술을 비튼다. 이 와중에 아버지라니. 아무튼 이자성이 문제였다. 좆같은 얼굴이나 성마른 등허리나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눈동자... 처음에는 그래서 눈이 갔다. 외탁이라고 우기기에도 버거운 저와 달리 어쩜 저렇게 비슷할까 싶어서. 지금 보니 더 그렇다. 제멋대로인 게 특히 판박이다. 그 양반한테 농담인 양 말이나 꺼내볼 수 있음 좋을걸. 아버지 자식 하나 더 있더라고. 당신처럼 희멀건 한데 볼품없이 마른 놈이 성깔 하난 죽인다고, 사시미를 어찌나 예술로 휘두는지 저 놈 들어오곤 할 일이 없어졌다고, 독한 것도 매한가지라 앓을 때도 죽는 소리 한 번이 없더라고. 그래서 자꾸 생각이 난다고. 그날 밤. 머리까지 치솟은 파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당신과 새어머니가.
그날 이후 청은 아비의 채무를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였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도 모자라 북대문 한 명 한 명을 다 피붙이로 여기는 중구와 달리 청은 중구 외의 목숨에 대체로 무감할 수 있었다. 길게 잡아 이십 년. 기한을 둔 날이 머지않았었다. 끝나면 아버지고 중구고 뭐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 제멋대로, 생긴 대로 팥빙수나 실컷 먹다 죽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자성이 끼어든 것이다. 훌쩍 더 아버지를 닮아. 그러면서 어딘가는 이자성인 채로. 안 그래도 골칫거리였다. 그런 놈이 이럴 필요까지 있나.
-....정청. 어떻게 하셨습니까.
-너 제정신이냐. 지금이 어느 땐데 여길 들락거려.
-골드문 입성 바라던 일 아닙니까?
-정청이 니 일거리 아니었냐?
-......
허옇다 못해 퍼렇게 질린 낯색도 가관인데 입가는 또 왜 저 지랄인지.
녹슨 철문 사이로 피딱지 앉은 입술을 건너보다 청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자성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
-가라. 지시도 없이 서울 온 거 위에서 알면 징계감이야.
흐트러진 머리에 다 헤진 점퍼를 입고 낚시 의자에 파묻혀 비스듬히 담배를 문 강형철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여기서 퀴즈. 그 이유는? 첫째 훌륭한 경찰이라서, 둘째 언더커버 후배를 아끼는 훌륭한 경찰이라서, 셋째 프락치를 둘이나 둔 훌륭한 경찰이라서.
정답은 삼 번으로, 프락치를 둘이나 둔 훌륭한 경찰 강형철은 자성이 입술을 깨무는 잠깐 사이 청의 휴대폰을 낚시 의자 밑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청은 웃음을 삼키며 철문에 머릴 기댔다. 매미소리가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