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청자성중구. 사계(死季) 6
6.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흔적을 남긴다. 작가는 글로, 가수는 노래로, 부모는 아이로. 깡패의 삶은 몸에 새겨진다. 청의 오른 손등부터 팔목까지의 세로줄은 옆 학교 상고놈들과 여수 골목을 뛰 다녔던 고등학생의 시간이고, 배꼽 아래 사선 진 흉터는 북대문 신입 방패막이로 고군분투한 청년의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왼쪽 발목, 오른쪽 쇄골 아래, 다시 왼쪽 낮은 등허리, 또 오른쪽 귀밑... 좌우로 사이좋은 상처를 세자면 삼일 밤도 모자라다. 그러니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꿰맨 자국이야 쳐 줄 급도 안 되건만 청은 그것을 가장 즐겨 말했다. 상처의 연유는 17대 1로 시작하는 진부한 무용담이었다가 눈물 없이도 들을 수 있는 삼류 로맨스였다가 했는데, 중구와 자성이 때마다 눈을 흘기면서도 멋대로 하게 내버려둔 건 청의 이마에 달린 그 작은 것이 나름의 이유로 사무치는 까닭이었다.
그 날은 올해 최고를 매일 경신하던 더위가 정점을 찍은 날이자 청이 증발한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자성은 집 앞 돌계단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턱 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이런 날, 가깝게는 통영, 멀게는 부산까지 각지에 퍼져 청을 찾고 있을 동생들이 눈앞을 스쳤다.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데 멍청하게 뛰 다니진 않을지... 자성은 소용도, 염치도 없는 걱정을 애써 털어내고 초록 대문을 돌아본다. 중구는 여전히 기척이 없었다. 자성이 오기 전까지는 실종신고를 하겠다며 난리였다고, 말리느라 죽을 똥 쌌다며 정말 사흘 밤낮 설사한 몰골로 속삭인 재헌의 말이 무색하게 어제부터 방문 한 번을 안 연다. 형님하고 불러도 묵묵부답, 슬쩍 문이라도 열어볼라 치면 무언가 집어던지는 소리만 나고, 심통난 애새끼라고 낄낄거릴 사람도 없고. 자성과 중구만 남은 집은 너무 조용했다. 엊그제까지 왁자지껄했던 게 다 꿈인 양, 살아 숨 쉬는 건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은 양. 자성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는다. 이 고요가 낯설지 않았다.
고3겨울. 아버지가 죽었다. 드디어 죽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방파제에서 떨어져 즉사. 끔찍하고 무섭던 남자의 말로치고는 참으로 시시했다. 찾아올 이가 없어 빈소를 차리지 않고 곧바로 화장해 산에 뿌렸다. 산보다는 바다가 가까웠지만 거긴 엄마가 있었다. 옷에 묻은 가루 하나까지 털어내고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웃긴 게, 문을 열 수가 없는 거다. 열쇠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되는데. 초라한 문에 이마를 댔다.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적막에 온 몸이 얼어붙어 눈물보단 웃음이 났다. 그딴 개자식도 사람이라고 그 온기라도 필요한 이자성이, 이자성의 삶이 너무나 우스웠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다 여수를 떠났다. 우스워지지 않으려고. 얼어붙지 않으려고. 그런데 또 다시 이 자리라니. 여수. 돌계단... 제가 묘비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봉분을 올리고 잔디를 심고 그 앞에 비를 세우지 않나. 누구누구 잠들다 하는. 하지만 중요한 건 묘비보다 시체고 시체보다 산 사람이다. 묘비 같은 건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쓸모없는. ...자성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날더러 뭘 어쩌라는 거냐구. 쏟아지는 햇볕 탓인지, 채 가시지 않은 감기기운인지 뜨거운 머리를 가로저으며 저도 모를 말을 열 번쯤 토해냈을 때였다. 엉덩이 옆으로 뭔가가 뚝 떨어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타겄다.
정청이었다. 벌건 낯짝은 땀으로 범벅을 하고 바지며 셔츠며 방금 무덤에서 나왔대도 믿을 꼬락서니로. 그런데도 정청이 맞았다. 더위에 지친 어느 집 개가 컹, 힘없이 한 번 짖도록 자성도, 청도 말이 없었다. 애타던 기다림이라기엔 조용한 상봉이었다.
-거 값이 좀 올랐드라.
뻔뻔한 턱 끝을 따라가 보니 새우깡이 있었다. 빨간 새우가 유연하게 허릴 굽히고 날 튀겼으니 먹어주세요... 우라질. 이런 개 우라질. 자성은 봉지를 청의 얼굴로 날렸다. 피하지도 않는 낯짝에 주먹을 먹여줄 참이었다. 어지럽지만 않았으면 두 세대는 거뜬했을 거다. 반쯤 일어나다 도로 주저앉는 자성을 보고도 청은 답지 않게 조용했다. 아니, 어쩌면 평소대로였다. 아픈 이자성을 청은 잘 견디지 못했다.
머리를 부여잡고 새우깡과 청을 번갈아 저주하던 자성의 등 뒤에서 불쑥 삼색 쓰레빠가 튀어 오른 것은 십여 분쯤 뒤로, 자성은 잠깐 신의 존재를 믿을 뻔했다. 검게 그을린 양은냄비며 두루마리 휴지, 효자손 등이 줄줄이 청에게 달라붙었다. 피하느라 춤을 추는 청을 보며 철퇴치고는 수수하구나 생각하자마자 도마나 소형 절굿공이로 모양이 달라진 것도 신묘한 일이었다. 기적은 장독뚜껑으로 마무리 됐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자성이 본 게 거기까지였다. 깨진 항아리 조각이 청의 눈덩이로 튄 것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돌팔이네 천장이 위에, 옆에는 막 담배를 문 중구가 있었다.
-깼냐.
-...어떻게 된 거에요.
-......씨발...
그토록 침통한 씨발에 자성은 아까 꿈을 꾼 건가 했으나 병실 문틈으로 붕대가 보이자마자.
-안 꺼져 이 개새끼야?!!!!
중구가 현실임을 알려줬다. 나중에 들은 건데 청은 이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복날 개 패듯’의 참뜻을 알았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청은 돌아왔다. 눈썹 위를 다섯 바늘이나 꿰매고도 실실거리며. 흉이 남을 거라는 돌팔이에게 자성과 중구는 잘됐다고 입을 모았지만 사실 둘 다 오랫동안 청의 상흔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자성의 이유는 새우깡이었고, 중구의 이유는 이자성이었다.
패긴 지가 패놓고 왜 남 탓이냐 하면, 그날 밤. 돌팔이네 자성을 눕혀 놓고 청과 고량주 다섯 병을 비운 그날 밤 말이다.
-이자성이 놓고 가자.
청은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