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udk
대영시진/ 명주모연
샤2
2016. 6. 5. 14:18
서울.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도망칠 때조차 그랬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을 이해했던 것일까.
**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매번은 아니지만 가끔. 늘 운이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면역이 생기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면 더더욱. 이 판국에 제일 침착한 사람은 의외로 모연이어서 명주는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장례는 없었다. 기사도, 당연하지만 한 줄도 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그 남자의 선의는 고작 이딴 거였구나. 비밀유지 서약서에 사인을 한 모연의 말에 명주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날 밤, 그리고 몇 밤 더 모연은 한밤 중 문득 일어나 길게 울었다. 명주는 그제야 알았다.
유시진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
작전이 틀어졌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갔고 그가 나타났고 탈출하다 총성이 울렸고 저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타겟은 사살하지 못했습니다. 이준영 대위의 보고를 되짚어 보던 윤대령은 입술을 물었다. 모든 건 정황 뿐 확실한 건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없긴 마찬가지다. 찾아달라는 요청조차 불가능하다. 아저씨 같은 군인이 될 거에요. 윤대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
한 달이 지났다.
-오늘도 야근이에요?
-......
또 두 사람이다. 삐딱한 강모연과 한 발 뒤 윤명주. 대영은 묵묵히 고개를 돌리고 타자를 이어 쳤다.
-술 안 마십니다.
-누가 서상사님 마시랬나? 우리 마시는 거 구경하라는 거죠.
-수청도 안 듭니다.
-사또 아닌데요.
-내일 아침까지 이거 보고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보고를 왜 만날 서상사님만 하냐구요.
-......
그나마 이어지던 대화도 끊긴다. 모연은 좀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얼마는 정신이 없었고 다음 얼마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주 보면 확인하게 될 빈 자리가 너무 컸다. 하지만 그래도 왔어야 했다고 모연은 뒤늦게 후회했다. 대영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명주가 인식표를 건넬 때조차 무표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최중사한테 듣기로는 말수가 줄었을 뿐 내내 아무 일도 없다는 태도였다고 한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고 심지어 모연은 의사였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여기 서서 자신이 듣기에도 한심한 소릴 하는 것뿐이니... 명의는 개뿔. 모연은 한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가자.
모연이 이렇게 말하면 명주는 대영을 조금 더 쳐다보다 순순히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서상사.
실로 오래간만의 부름에 모연은 명주를 새삼스레 바라봤다. 마른 얼굴이 대영과 같았다. 대영만큼 그녀도 태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주에게는 대영에게 하듯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쉽사리 건들지 않겠다는 존중만은 아니었다. 명주는 시진을 놀려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시진과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악연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 빈자리는 아마도 상상 이상. 그걸 메우는 건 모연의 몫이 아니다. 다만 옆에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있어줄 거니까 명주가 자신처럼 어느 밤 깨어나 아이처럼 몸부림 쳐 운다면 몇 번이고 안아줄 수 있었다. 최소한 명주는 모든 걸 잃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모연은 잠시 다시 대영을 돌아본다. 그는 유시진을 잃었다. 강모연에게 윤명주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듯, 어쩜 전부를 잃은 것이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모연은 명주의 손을 꾹 잡았다 놓고 걸음을 옮긴다.
철컹.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명주는 잠시 모연이 잡았던 손을 매만졌다.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건 모연 덕분이었다. 어쩌면 모연이 더 힘들 텐데 이런 자신을 채근조차 하지 않고 곁에 있어준다. 그런 모연을 잃게 된다면. 아마 딱 저런 모습일 테다. 명주는 대영 앞에 섰다.
-서상사.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은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모니터 속의 글씨가 흐트러지는 것도 아니다. 더러는 이런 대영이 독하디 독하다고 수군거렸지만, 멍청한 것들. 괜찮을 리가. 명주는 품 속에 넣어온 것을 책상에 꺼내놓았다.
-..선배는 나를 향단이쯤 아나 봅니다.
흰 편지봉투. 윤명주에게. 시진의 필체였다.
-이딴 거 안 하겠다고 했는데.. 또 개가 짖었지 말입니다.
자판치는 소리가 멈춘다. 그제야 돌아보는 시선이 딱 명주가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었다. 무덤이라도 있으면 발로 차 줄 텐데.
-기다리고 있는 거 압니다. 그만 두라고 할 생각도 없고. 선배도 알았을 겁니다. 서상사 이럴 거. 근데 왜 이걸 썼을 거 같습니까.
대영은 봉투를 내려다 본다.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선 글쎄. '윤명주에게' 뒤에 하트라도 붙이고 싶었을 테지. 그래서 자신처럼 마른 이 여자가 화라도 내게. 시진의 배려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명주는 조용히 대영을 지켜봤다. 대영은 두려운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어쩌면 그 전부일 수도 있었다. 난생 처음 편지봉투를 보는 것처럼 굳은 얼굴에 조금씩 실금이 번져간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좀 울라든가, 화라도 내라든가... 하지만 명주는 그 모든 말을 그저 삼켰다. 그보다 먼저 울지 않는 것 정도. 자신의 몫은 그 정도였다.
시계바늘이 한참을 돌아가고 대영은 천천히 편지로 손을 뻗었다. 종이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침착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이미 오래 전에, 시진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실패했다.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총을 빼들고 중국으로 달려갈 것 같았다. 아니.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제 턱밑에 총구를 들이밀지도 몰랐다. 유시진이 없는 세상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됐다.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돌아올 거라고,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 있다고... 대영은 터지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물며 봉투 입구를 뜯었다.
[서상사.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거 너무 진부하지 않습니까? 애인이 생기면 꼭 다르게 써야지 했는데, 그 애인이 서상사라니.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확실합니다. 게다가 이번 생에도 나라를 구하고 있으니, 다음에 태어나도 서상사는 내 애인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린 또 만날 겁니다. 서상사가 날 못 알아봐도 꼬실 거고 딴 여자랑 알콩달콩 지내고 있어도 꼬실 거고 딴 놈이랑 사귀고 있어도 꼬실 겁니다. 서상사는 서상사답게 처음에는 좀 거부하다 결국 내게 빠져들어서 애 셋..은 못 낳으니까 그냥 잘 살겠죠.
서상사. 대신 우리 다음에는 나라, 그만 구합시다. 후회하는 건 아닌데 이런 편지 당신이 읽을 생각하니까 좀 싫으네. 울지도 못할 당신이 그려져서 더더욱. 다음에는 당신 옆에만 있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서상사.
서대영.
..미안합니다. 당신을 여기 혼자 남겨둬서.
추신. 염치 없지만 부탁 하나만 합시다. 살아 주십시오. 어디서 들었는데 중간에 허튼짓하면 사람으로 환생 못한대요. 난 당신이 닭이나 소여도 좋겠지만 뭐랄까..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배고파서 당신을 잡아 먹을지도 모르고.]
대영은 피식 웃었다. 손가락이 제 것이 아닌 양 떨리고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가슴을 한 번, 두 번.. 계속 내리치다 결국 허리를 숙였다. 편지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진다. 번져가는 글씨가 희미하게 비쳤다. 이 편지를 쓰며 네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실실 웃었을 지도 모르고 작전을 앞둔 군인답게 단호했을 지도 모르고... 대체 나는 너의 무엇을 이해했다는 것일까. 이렇게 편지 한 통 남기고 가야 하는 너를 배웅조차 하지 못한 내가 너의 무엇을.
대영은 자판을 내려치며 신음하듯 울었다. 애써 쓴 보고서가 엉망으로 날아가고 있었지만, 명주는 말리지 않았고, 그 등에 손을 얹어 위로하지도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흐르는 눈물을 추스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써버려서. 이제야 진짜 유시진을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낯선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 울다니. 역시 내 마성은 최강이군. 그렇게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ing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 도망칠 때조차 그랬다.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을 이해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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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매번은 아니지만 가끔. 늘 운이 좋을 순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가 면역이 생기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면 더더욱. 이 판국에 제일 침착한 사람은 의외로 모연이어서 명주는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장례는 없었다. 기사도, 당연하지만 한 줄도 나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그 남자의 선의는 고작 이딴 거였구나. 비밀유지 서약서에 사인을 한 모연의 말에 명주는 조용히 수긍했다. 그날 밤, 그리고 몇 밤 더 모연은 한밤 중 문득 일어나 길게 울었다. 명주는 그제야 알았다.
유시진은 정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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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이 틀어졌고 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갔고 그가 나타났고 탈출하다 총성이 울렸고 저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타겟은 사살하지 못했습니다. 이준영 대위의 보고를 되짚어 보던 윤대령은 입술을 물었다. 모든 건 정황 뿐 확실한 건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도 없긴 마찬가지다. 찾아달라는 요청조차 불가능하다. 아저씨 같은 군인이 될 거에요. 윤대령은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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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지났다.
-오늘도 야근이에요?
-......
또 두 사람이다. 삐딱한 강모연과 한 발 뒤 윤명주. 대영은 묵묵히 고개를 돌리고 타자를 이어 쳤다.
-술 안 마십니다.
-누가 서상사님 마시랬나? 우리 마시는 거 구경하라는 거죠.
-수청도 안 듭니다.
-사또 아닌데요.
-내일 아침까지 이거 보고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 보고를 왜 만날 서상사님만 하냐구요.
-......
그나마 이어지던 대화도 끊긴다. 모연은 좀 한심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얼마는 정신이 없었고 다음 얼마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주 보면 확인하게 될 빈 자리가 너무 컸다. 하지만 그래도 왔어야 했다고 모연은 뒤늦게 후회했다. 대영은 지나치게 멀쩡했다. 명주가 인식표를 건넬 때조차 무표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최중사한테 듣기로는 말수가 줄었을 뿐 내내 아무 일도 없다는 태도였다고 한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의사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고 심지어 모연은 의사였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여기 서서 자신이 듣기에도 한심한 소릴 하는 것뿐이니... 명의는 개뿔. 모연은 한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가자.
모연이 이렇게 말하면 명주는 대영을 조금 더 쳐다보다 순순히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서상사.
실로 오래간만의 부름에 모연은 명주를 새삼스레 바라봤다. 마른 얼굴이 대영과 같았다. 대영만큼 그녀도 태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주에게는 대영에게 하듯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을 쉽사리 건들지 않겠다는 존중만은 아니었다. 명주는 시진을 놀려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고 시진과 무슨 사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악연이라고 답하곤 했다. 그 빈자리는 아마도 상상 이상. 그걸 메우는 건 모연의 몫이 아니다. 다만 옆에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있어줄 거니까 명주가 자신처럼 어느 밤 깨어나 아이처럼 몸부림 쳐 운다면 몇 번이고 안아줄 수 있었다. 최소한 명주는 모든 걸 잃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모연은 잠시 다시 대영을 돌아본다. 그는 유시진을 잃었다. 강모연에게 윤명주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니듯, 어쩜 전부를 잃은 것이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모연은 명주의 손을 꾹 잡았다 놓고 걸음을 옮긴다.
철컹.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명주는 잠시 모연이 잡았던 손을 매만졌다. 이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건 모연 덕분이었다. 어쩌면 모연이 더 힘들 텐데 이런 자신을 채근조차 하지 않고 곁에 있어준다. 그런 모연을 잃게 된다면. 아마 딱 저런 모습일 테다. 명주는 대영 앞에 섰다.
-서상사.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은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모니터 속의 글씨가 흐트러지는 것도 아니다. 더러는 이런 대영이 독하디 독하다고 수군거렸지만, 멍청한 것들. 괜찮을 리가. 명주는 품 속에 넣어온 것을 책상에 꺼내놓았다.
-..선배는 나를 향단이쯤 아나 봅니다.
흰 편지봉투. 윤명주에게. 시진의 필체였다.
-이딴 거 안 하겠다고 했는데.. 또 개가 짖었지 말입니다.
자판치는 소리가 멈춘다. 그제야 돌아보는 시선이 딱 명주가 아버지에게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심정이었다. 무덤이라도 있으면 발로 차 줄 텐데.
-기다리고 있는 거 압니다. 그만 두라고 할 생각도 없고. 선배도 알았을 겁니다. 서상사 이럴 거. 근데 왜 이걸 썼을 거 같습니까.
대영은 봉투를 내려다 본다. 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선 글쎄. '윤명주에게' 뒤에 하트라도 붙이고 싶었을 테지. 그래서 자신처럼 마른 이 여자가 화라도 내게. 시진의 배려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명주는 조용히 대영을 지켜봤다. 대영은 두려운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어쩌면 그 전부일 수도 있었다. 난생 처음 편지봉투를 보는 것처럼 굳은 얼굴에 조금씩 실금이 번져간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좀 울라든가, 화라도 내라든가... 하지만 명주는 그 모든 말을 그저 삼켰다. 그보다 먼저 울지 않는 것 정도. 자신의 몫은 그 정도였다.
시계바늘이 한참을 돌아가고 대영은 천천히 편지로 손을 뻗었다. 종이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했다. 침착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이미 오래 전에, 시진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실패했다. 뭐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총을 빼들고 중국으로 달려갈 것 같았다. 아니.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제 턱밑에 총구를 들이밀지도 몰랐다. 유시진이 없는 세상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됐다.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돌아올 거라고, 어딘가에 분명히 살아 있다고... 대영은 터지려는 신음을 가까스로 물며 봉투 입구를 뜯었다.
[서상사.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으로 시작하는 거 너무 진부하지 않습니까? 애인이 생기면 꼭 다르게 써야지 했는데, 그 애인이 서상사라니.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확실합니다. 게다가 이번 생에도 나라를 구하고 있으니, 다음에 태어나도 서상사는 내 애인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린 또 만날 겁니다. 서상사가 날 못 알아봐도 꼬실 거고 딴 여자랑 알콩달콩 지내고 있어도 꼬실 거고 딴 놈이랑 사귀고 있어도 꼬실 겁니다. 서상사는 서상사답게 처음에는 좀 거부하다 결국 내게 빠져들어서 애 셋..은 못 낳으니까 그냥 잘 살겠죠.
서상사. 대신 우리 다음에는 나라, 그만 구합시다. 후회하는 건 아닌데 이런 편지 당신이 읽을 생각하니까 좀 싫으네. 울지도 못할 당신이 그려져서 더더욱. 다음에는 당신 옆에만 있겠습니다. 약속할게요.
서상사.
서대영.
..미안합니다. 당신을 여기 혼자 남겨둬서.
추신. 염치 없지만 부탁 하나만 합시다. 살아 주십시오. 어디서 들었는데 중간에 허튼짓하면 사람으로 환생 못한대요. 난 당신이 닭이나 소여도 좋겠지만 뭐랄까..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배고파서 당신을 잡아 먹을지도 모르고.]
대영은 피식 웃었다. 손가락이 제 것이 아닌 양 떨리고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가슴을 한 번, 두 번.. 계속 내리치다 결국 허리를 숙였다. 편지 위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진다. 번져가는 글씨가 희미하게 비쳤다. 이 편지를 쓰며 네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실실 웃었을 지도 모르고 작전을 앞둔 군인답게 단호했을 지도 모르고... 대체 나는 너의 무엇을 이해했다는 것일까. 이렇게 편지 한 통 남기고 가야 하는 너를 배웅조차 하지 못한 내가 너의 무엇을.
대영은 자판을 내려치며 신음하듯 울었다. 애써 쓴 보고서가 엉망으로 날아가고 있었지만, 명주는 말리지 않았고, 그 등에 손을 얹어 위로하지도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흐르는 눈물을 추스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써버려서. 이제야 진짜 유시진을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낯선 울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 울다니. 역시 내 마성은 최강이군. 그렇게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