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udk

왕욱왕소

샤2 2016. 10. 3. 02:04
*욱의 사가
**수=하진
***메인주연들의 성향을 다 바꿔버리겠다!!



매일 글자를 알려 주겠다 했지만 오늘 같은 날까지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다. 단정한 필체를 따라 적는 척하며 하진은 힐끔 옆을 돌아봤다. 일면 담담해 보이지만.. 책장이 아까부터 그대로다.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이럴 걸 왜 그러셨어요.
-....응?

한 박자 늦은 반응은 역시 넋을 빼고 있던 거다. 하진은 에휴, 부러 더 길게 한숨을 뱉었다.

-미안하다. 내 잠시 딴생각을..
-한참 그러고 있었거든요.
-...그랬니.

멋쩍게 웃고 마는 욱은, 보면 볼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참 괜찮은 사람이다. 황잔데도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누구랑은 다르지. 습관적으로 삐죽이던 하진은 곧 고개를 젓고 만다. 알고 보니 그 누군가도 참 고달픈 인생이었다.

-오해는 푸셨어요?
-....어찌 알았어.
-은이 황자님이요. 실감나게 액,

...아차차.

-행동까지 더해서 알려주시던데요.
-..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4황자님 상처 받았을 걸요.
-...그랬을 테지.

씁쓸히 가라앉은 눈매가 다시 그 날이다. 대숲에서 돌아온 밤. 욱은 밝은 등 앞에서 한참을 어두웠다. 처음엔 제 손으로 거둔 목숨이 무거워서 그러나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윤님을 불러오게 하신 건 황자님이셨잖아요.
-알아채주어 고맙다. 네 덕에 큰 사단은 면했어.
-아니 정말 그 셋째 황자노...아니, 님은 사사건건 왜 그 모야...아니, 왜 그렇게 모가 났대요. 사람이 아주 못돼 쳐...

이렇듯 세 살 버릇 고려가는 법이니 평소에 착한 말 고운 말을 써야 한다. 하지만 현대식 솔직함이 맘에 들었던지 욱은 조금 풀어진 얼굴이었다.

-소에게 마음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뭐... 말씀대로 서툰 사람 같긴 합니다.
-넉넉히 봐주어 고맙구나.

옅게 번지는 미소가 딱 그거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거.
대숲에서 돌아온 밤. 놀라고 억울한 마음에, 요약하면 4황자 주거쓰면 엉엉했는데 본디 그런 아이가 아니다 욱이 어찌나 역성을 들던지. 그날 이후 형제는 형제구나 조금 삐친 채로 둘을 지켜보게 됐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욱의 시선 끝에 항상 소가 있었다. 형제를 향한 연민이라기엔 지나치게 깊은 눈이었다. 그렇게 어라.. 어라..? 하던 어느 날 돌탑 앞에서.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일 돌무더기를 무너뜨리며 소는 울부짖고 있었다. 피범벅을 하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괴롭고 외로운 아이야.' 욱의 말이 맞았다. 보는 이마저 아프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또, 그 말은 틀린 것이기도 했다. 소의 뒤로 어느 새 욱이 다가서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그토록 처참한 걸음이었다. 기어이 무너지는 등을 끌어안으며, 발버둥 치다 끝내 늘어지는 몸을 놓지 않으며 눈을 질끈 감고 피나게 입술을 물고... 그날 알았다. 욱의 마음에 누가 있는지를.
마지막에 눈이 마주쳐 들켰다는 걸 서로 알아 버렸지만 그래도 오늘까지 욱이나 하진이나 없던 일인 척 지내왔다. 하진은 여전히 제 코가 석 자인데다 어쨌건 이 '해수'는 욱의 처 동생이고, 게다가 해씨 부인은 너무 좋은 여자였다. 차라리 김팀장처럼 못된 년이었으면 옳다구나 신나게 역성이라도 들어줄 텐데. 하진은 전하지 못하는 마음을 알았고 희망 없는 사랑도 알았다. 돌아봐 줄 리 없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간이 얼마나 느린 지도 겪었다. 그래서 더더욱 편이 돼 주고 싶었다. 해씨부인보다 욱과 보낸 시간이 많아 정도 이쪽이 더했다. 하지만 여기는 고려고 고하진은 해수고 하진은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그동안의 침묵은 배려라기보다 회피였던 거다. 하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해수인 이상 아마 계속 비겁하겠지만, 스스로 생채기를 내는데 익숙한 욱에게 꼭 이 한 마디는 해주고 싶었다.

-..이유는 몰라도 4황자님 위해 그러신 건 알아요.
-......

순간 굳어진 욱을 바로 보며 하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방을 위한 일이래도 상처는 상첩니다. ..게다가 황자님이 더 아프시잖아요.
-....수야.
-누구한테도 말 안 해요. 황자님께도요. 마음을 전해라 이런 철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다만.. 그러실 필요는 없다구요. 그렇게 험하게 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르니까, 들키지 않을 테니까 황자님 마음 너무 구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아픈데 더 상하면 안 되잖아요.

욱은 말이 없다. 하진은 짧게 숨을 뱉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고맙다.
-....

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하진은 허리를 세웠다. 욱이 붉은 눈으로 웃고 있다. 아이 같은 미소였다.

-...정말 고맙다 수야. 

거듭 인사하는 욱을 보며 하진은 저 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하진은 이런 식의 말을 들었을 때 다음날 붕어눈으로 출근해야 했다. 그러니까, 여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말이다. 그 사람은 경멸도 훈계도 없이 오직 걱정만을 했다. 어째서, 왜, 같이 쓸데없는, 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문조차 없이 한참 손을 잡고 혼자 얼마나 아팠냐고.. 자기는 더 힘들게 살았으면서. 우리 김여사. 잘 있으려나.. 이어지는 생각에 하진이 울컥 고개를 숙일 때였다.

-여직 이러고 계심 어쩝니까. 아가씨! 수 아가씨! 황자님!!

발칵 열린 문으로 눈물범벅인 채령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진은 숨을 멈췄다. 문가에 서 있는 연화의 눈이 새파랗게 번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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