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udk
왕욱왕소
샤2
2016. 11. 15. 04:14
*송악 길목
-오늘도 계셨습니다.
-...왔니.
-누니.. 형수님은 어쩌고 또 여기세요.
답없이 길만 보고 선 옆모습도 오늘로 엿새째다. 백아는 뚱하게 욱을 비껴갔다. 요사이 욱에겐 늘 이런 식이었다. 원래도 껄끄럽던 심사가 은의 탄일 이후 더해진 것이다. 사과도 받았고 오해도 풀었건만... 뒤늦게 철딱서니가 없어지나. 은이 형님과 그만 어울려야겠다.. 나무 아래 자리 잡은 백아는 괜한 탓을 접고 화첩을 꺼내 들었다.
-..이리 오십시오. 그리 보고 있는다고 길이 짧아집니까.
엿새 동안 두툼한 화첩을 반이나 거덜내고 나서야 -욱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시를 뺐는데 상대는 계속 망부석 행세다. 백아는 한숨을 삼키며 욱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부른 줄도 모른 낯이다. 말하길 관두고 잡아 끌어 옆에 앉히니 그제야 돌아보는 눈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 은의 탄일처럼. 뉘에게나 다정하지만 사실 절대 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 그날은 마치 딴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례 때도.. 욱은 소만 관련되면 어떤 식으로든 평정을 잃는다..
-...소구나.
퍼뜩 정신이 든 백아가 뒤늦게 욱을 돌아본다. 욱의 시선이 화첩에 닿아 있었다. 소를 그린 그림이다. 백아는 생각을 추스르며 다시 세필을 놀렸다.
-매일 할 일이 없어서요. 길에 앉아 거문고를 뜯을 수도 없고.
욱은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 속 소가 환하게도 웃고 있었다.
-..이리 웃기도 했구나.
-그저 그린 겁니다. 그러셨으면 해서요. 웃을 일이 없는 분 아닙니까.
뉘라고 황궁살이가 편할까만은 소의 처지는 유별나게 기구한 데가 있었다. 친모와 동복에게 외면받고 얼굴엔 그런 흉까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 세월이다.
-언젠가 진짜 이리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화내는 얼굴이라도 뵙고 싶지만요.
-.....
-...돌아올 날에서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저 늦어지는 거겠지..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낮은 중얼거림이 스스로를 다잡는 듯하다. 백아는 그것이 또 이유없이 불편해 먼길로 고갤 돌리다 풀숲 너머에 눈이 멈췄다.
-아이씨 이게 길이야 뭐야.. 길을 내려면 풀을 좀 정리... 어? 백아님도 계셨네요?
낑낑거리며 바구니를 들고 오던 하진이 백아에게 손을 흔들다 크게 휘청인다. 백아는 낮게 혀를 차며 일어나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이게 다 뭐냐.
-석반.. 아우, 팔이야. 석반이요. 언니가 챙기라고 하셔서요.
뒤에 선 욱의 얼굴이 한층 더 무거워진다. 하진은 얼른 자리를 펴며 목소릴 높였다.
-백아님 먹을 복 하난 끝내줍니다. 오늘 석반 닭백숙이거든요.
-넌 뭐가 그리 신났어. 소풍 나왔냐.
타박에 굴하긴커녕 두 남자의 팔을 확 잡아 당기는 하진에 얼결에 앉은 백아와 욱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하진은 바구니 속 음식들을 꺼내놓으며 씩씩하게 조잘거렸다.
-기다리는 것도 뭘 먹어가며 해야지, 내내 배곯으며, 4황자님 오시면 두 분 동시에 쓰러지시려구요? 안 그래도 먼길 다녀오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민폐에요? 자. 숟가락 들고 얼른 퍽퍽 드세요.
나이 많은 누이처럼,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쓰읍 어린애 혼내듯 하는 하진에 백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무서워서 원. 암튼 다치고 나서 희한해졌다니까.
-이 닭다리 하나 뜯으시지요.
백아는 급격히, 그리고 과하게 조신한 척하는 하진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닭다리를 받아들었다. 하진은 빙긋 웃곤 욱을 곁눈질한다.
욱은 다시 길을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심정을 차마 다 안다고는 못하겠으나... 내내 길에 있다 동틀 무렵 들어와 잠 한 숨 편히 자지 못하고 다시 나와 며칠째다. 농처럼 말했지만 진짜 쓰러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맘 상하는 것도 모자라 몸까지 상해 어쩌려고. 하진은 숟가락을 욱의 손에 단단히 쥐어줬다. 흐린 미소가 우는 만 못하였다.
**
밤이 깊어 백아가 하진을 데려다주려 잠시 떠나고 -하진이 백아를 꼭 집어 청하였다.- 길에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다. 욱은 천천히 걸으며 달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 소와 달을 본 적이 있었다. 지몽의 꾀로 신주에 부러 늦게 도착해 억지로 하루밤을 보낸 날. 소는 밤새 별의 이름을 물었다. 방금 들어놓고도 모르는 양 묻고 또 묻고.. 그땐 다 알지 못했다. 그 밤이 끝나지 않길 바란, 지몽과 자신이 떠나고 그 별의 이름에 기대 하루하루를 버텼을 그 작고 어린 아이를.. 어쩜 그도 이랬을까. 밤이 깊어지는 게 두렵고 아침이 밝아오는 게 두려워 누울 수도 잠들 수도 없었을까.. 묵직한 통증이 폐부로 박혀든다. 욱은 질끈 눈을 감고 책망하듯 가슴께를 내리 눌렀다. 피가 마르는 것조차 뻔뻔하다 여겨졌다.
그렇게 서 있길 얼마. 욱의 어깨가 번뜩 굳었다.
-여기서.. 뭐하는데..
심장이 거칠게 뛰었지만 바로 눈을 뜨진 못했다. 지난 엿새 동안 수도 없이 환청을 듣고 수도 없이 낙망한 탓이었다. 욱은 마음을 다잡으며 되도록 천천히 눈을 떴다.
-!!!!
그토록 기다렸던 이가 눈앞에 있었다. 허나..
-귀신이라도 본.. ..
-소야!!!!
욱은 급하게 발을 굴렀다. 땅에 닿기 직전 겨우 받아든 몸은 가까이서 보니 더 엉망이었다. 흙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찢긴 옷가지는 피범벅이고, 땀은 비오듯 하는데 입술은 바싹 말라 퍼렇게 식어 있었다. 욱은 턱이 덜덜 떨려 이를 악물기도 힘들었다. 헌데... 소가 손을 뻗어 볼을 쓸어내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크고 나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소...야?
-.. ..멍청이.... 내가 온다고 했..
손이 뚝 떨어진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욱은 순간 늘어진 몸을 들쳐업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웃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저를 경멸하고 외면하고, 무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면, 볼 수만 있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
목덜미로 닿는 미약한 숨이 심장을 잡아 뜯는 듯했다.
-ing
-오늘도 계셨습니다.
-...왔니.
-누니.. 형수님은 어쩌고 또 여기세요.
답없이 길만 보고 선 옆모습도 오늘로 엿새째다. 백아는 뚱하게 욱을 비껴갔다. 요사이 욱에겐 늘 이런 식이었다. 원래도 껄끄럽던 심사가 은의 탄일 이후 더해진 것이다. 사과도 받았고 오해도 풀었건만... 뒤늦게 철딱서니가 없어지나. 은이 형님과 그만 어울려야겠다.. 나무 아래 자리 잡은 백아는 괜한 탓을 접고 화첩을 꺼내 들었다.
-..이리 오십시오. 그리 보고 있는다고 길이 짧아집니까.
엿새 동안 두툼한 화첩을 반이나 거덜내고 나서야 -욱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가시를 뺐는데 상대는 계속 망부석 행세다. 백아는 한숨을 삼키며 욱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부른 줄도 모른 낯이다. 말하길 관두고 잡아 끌어 옆에 앉히니 그제야 돌아보는 눈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 은의 탄일처럼. 뉘에게나 다정하지만 사실 절대 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 그날은 마치 딴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례 때도.. 욱은 소만 관련되면 어떤 식으로든 평정을 잃는다..
-...소구나.
퍼뜩 정신이 든 백아가 뒤늦게 욱을 돌아본다. 욱의 시선이 화첩에 닿아 있었다. 소를 그린 그림이다. 백아는 생각을 추스르며 다시 세필을 놀렸다.
-매일 할 일이 없어서요. 길에 앉아 거문고를 뜯을 수도 없고.
욱은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본다. 그림 속 소가 환하게도 웃고 있었다.
-..이리 웃기도 했구나.
-그저 그린 겁니다. 그러셨으면 해서요. 웃을 일이 없는 분 아닙니까.
뉘라고 황궁살이가 편할까만은 소의 처지는 유별나게 기구한 데가 있었다. 친모와 동복에게 외면받고 얼굴엔 그런 흉까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 세월이다.
-언젠가 진짜 이리 웃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화내는 얼굴이라도 뵙고 싶지만요.
-.....
-...돌아올 날에서 나흘이 지났습니다.
-...그저 늦어지는 거겠지..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낮은 중얼거림이 스스로를 다잡는 듯하다. 백아는 그것이 또 이유없이 불편해 먼길로 고갤 돌리다 풀숲 너머에 눈이 멈췄다.
-아이씨 이게 길이야 뭐야.. 길을 내려면 풀을 좀 정리... 어? 백아님도 계셨네요?
낑낑거리며 바구니를 들고 오던 하진이 백아에게 손을 흔들다 크게 휘청인다. 백아는 낮게 혀를 차며 일어나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이게 다 뭐냐.
-석반.. 아우, 팔이야. 석반이요. 언니가 챙기라고 하셔서요.
뒤에 선 욱의 얼굴이 한층 더 무거워진다. 하진은 얼른 자리를 펴며 목소릴 높였다.
-백아님 먹을 복 하난 끝내줍니다. 오늘 석반 닭백숙이거든요.
-넌 뭐가 그리 신났어. 소풍 나왔냐.
타박에 굴하긴커녕 두 남자의 팔을 확 잡아 당기는 하진에 얼결에 앉은 백아와 욱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하진은 바구니 속 음식들을 꺼내놓으며 씩씩하게 조잘거렸다.
-기다리는 것도 뭘 먹어가며 해야지, 내내 배곯으며, 4황자님 오시면 두 분 동시에 쓰러지시려구요? 안 그래도 먼길 다녀오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민폐에요? 자. 숟가락 들고 얼른 퍽퍽 드세요.
나이 많은 누이처럼,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쓰읍 어린애 혼내듯 하는 하진에 백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무서워서 원. 암튼 다치고 나서 희한해졌다니까.
-이 닭다리 하나 뜯으시지요.
백아는 급격히, 그리고 과하게 조신한 척하는 하진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닭다리를 받아들었다. 하진은 빙긋 웃곤 욱을 곁눈질한다.
욱은 다시 길을 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심정을 차마 다 안다고는 못하겠으나... 내내 길에 있다 동틀 무렵 들어와 잠 한 숨 편히 자지 못하고 다시 나와 며칠째다. 농처럼 말했지만 진짜 쓰러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맘 상하는 것도 모자라 몸까지 상해 어쩌려고. 하진은 숟가락을 욱의 손에 단단히 쥐어줬다. 흐린 미소가 우는 만 못하였다.
**
밤이 깊어 백아가 하진을 데려다주려 잠시 떠나고 -하진이 백아를 꼭 집어 청하였다.- 길에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다. 욱은 천천히 걸으며 달을 올려다봤다.
어릴 적 소와 달을 본 적이 있었다. 지몽의 꾀로 신주에 부러 늦게 도착해 억지로 하루밤을 보낸 날. 소는 밤새 별의 이름을 물었다. 방금 들어놓고도 모르는 양 묻고 또 묻고.. 그땐 다 알지 못했다. 그 밤이 끝나지 않길 바란, 지몽과 자신이 떠나고 그 별의 이름에 기대 하루하루를 버텼을 그 작고 어린 아이를.. 어쩜 그도 이랬을까. 밤이 깊어지는 게 두렵고 아침이 밝아오는 게 두려워 누울 수도 잠들 수도 없었을까.. 묵직한 통증이 폐부로 박혀든다. 욱은 질끈 눈을 감고 책망하듯 가슴께를 내리 눌렀다. 피가 마르는 것조차 뻔뻔하다 여겨졌다.
그렇게 서 있길 얼마. 욱의 어깨가 번뜩 굳었다.
-여기서.. 뭐하는데..
심장이 거칠게 뛰었지만 바로 눈을 뜨진 못했다. 지난 엿새 동안 수도 없이 환청을 듣고 수도 없이 낙망한 탓이었다. 욱은 마음을 다잡으며 되도록 천천히 눈을 떴다.
-!!!!
그토록 기다렸던 이가 눈앞에 있었다. 허나..
-귀신이라도 본.. ..
-소야!!!!
욱은 급하게 발을 굴렀다. 땅에 닿기 직전 겨우 받아든 몸은 가까이서 보니 더 엉망이었다. 흙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찢긴 옷가지는 피범벅이고, 땀은 비오듯 하는데 입술은 바싹 말라 퍼렇게 식어 있었다. 욱은 턱이 덜덜 떨려 이를 악물기도 힘들었다. 헌데... 소가 손을 뻗어 볼을 쓸어내리며 희미하게 웃는다. 크고 나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소...야?
-.. ..멍청이.... 내가 온다고 했..
손이 뚝 떨어진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욱은 순간 늘어진 몸을 들쳐업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웃어주지 않아도 좋았다. 저를 경멸하고 외면하고, 무어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면, 볼 수만 있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
목덜미로 닿는 미약한 숨이 심장을 잡아 뜯는 듯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