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이 성격 다름주의.
*금과정
-가시기 불편하시면 단이 아가씨께 기별을 넣을까요?
-......
-공자님.
-.....아. 미안하네. 뭐라고 했지?
반찬을 집다 한 번, 국을 뜨다 한 번, 그리고 지금. 되묻기가 벌써 세 번째다. 평상시 없던 일이라 진관은 걱정이 더했다.
-..의원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괜찮아.
-낯색이 아직 좋지 않으십니다.
-단이가 걱정할까봐 그러나?
- 다..단이 아가씨께서 걱정을 하시겠지만 그게 그런 게 아니,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고..
눈에 띄게 허둥대는 진관을 보며 린은 목웃음을 삼킨다. 뒤늦게 웃는 낯을 확인한 진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보면 꼭 저하 같으십니다.
-내가 그리 심했나.
-말 돌리시는 거 말입니다.
미소로 답을 대신한 린이 다시 조용해진다. ...저하 걱정을 하고 계실 테지. 원성전에 불려가면 꼭 끝이 안 좋았다. 원이 아주 가라앉거나 린이 아주 곤란해지거나... 린을 원수보듯 하는 왕비를 아예 이해못할 것은 아니다. 왕전이 그리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니 그 동생인들 곱게 비칠까. ..허나 이젠 아실 때도 되지 않았나. 이 고려땅에 이 분보다 더한 충심을 바칠 자는 없다는 거. 진관은 나물그릇을 슬그머니 린 쪽으로 민다. 빙긋이 답례하는 미소가 선하기 그지 없었다.
**
겹겹이 싸인 시종들은 모두 물러나고 없다. 후라타이마저 밖에 두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원은 쓰게 웃으며 문고리를 밀었다.
화려한 내궁 한가운데 정좌해있는 원성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에 마음 한 켠 퍼지는 안도를 숨기며 원은 무표정하게 예를 취했다.
-찾으셨습니까.
직선으로 꽂히는 시선이 낯설게 차갑다. 원은 말없이 원성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꼿꼿한 차림과 달리 좀은 수척해진 낯이다. 진한 향내 사이로 희미한 술냄새가 떠돌았다. 명치 끝이 묵직해진다.
-잘못된 것입니다.
한참만의 첫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원은 지그시 한숨을 물었다.
-설득할 생각 없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설득당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원성은 사이를 두고 말을 잇는다.
-해서요. 어쩌시려구요. 그놈에게 첩지라도 내리실 겁니까?
원은 헛웃음을 뱉는다.
-상상도 못해 본 일인데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원성의 눈빛이 사납게 튀어오른다. 원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만하십시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마음입니다.
모든 걸 가질 아이가, 왕이 되실 분이 저리 초라하게 서 있다. 원성은 울컥 아픈 속내를 누르며 낯빛을 추스렸다.
-내가 그놈을 치우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그놈을 죽이면요.
다시 드러난 눈이 어둡게 침잠한다.
-죽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원성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팔걸이에 올려진 손이 가느다랗게 경련한다. 원은 입 안을 씹었다. 차라리 저 손으로 뺨이라도 내려치시지. 그럼 얼마든지 맞아드릴 텐데. 백 대라도, 천 대라도 달게 맞을 텐데.. 짓씹은 속살이 끝내 터져 비릿한 혈향이 퍼질 때였다. 침착을 되찾은 음성이 얼음처럼 꽂힌다.
-세자빈을 맞으세요.
세자의 혼인은 왕가의 존속과 직결된 바 언젠간 해야할 일이었다. 또한 이리 나오실 것을 아예 예상못한 것도 아니다. 허나 원은 저도 모르게 낯빛이 굳었다.
-어차피 정비는 상국의 여인 아닙니까.
-어미가 좋은 아이를 고르겠습니다.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그래야겠습니다.
원은 원성을 올려다본다. 이 고려땅에서 원성이 마음 먹어 못할 것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글쎄. 아들의 협박이 얼마나 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린을 없애고 시치미를 떼거나, 당신도 죽을 결심으로 린과 그 집안을 잿가루로 만들거나. ...어느 쪽도 두려운 건 단 하나다. 내가 린보다 먼저 죽지 못하는 것.
-어미의 인내를 시험치 마세요.
용포자락이 손 안에서 거칠게 구겨졌다.
**
코흘리개 아이 하나가 쭈뼛거리며 금과정 객잔에 들어선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물을 손질하던 안산댁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뭐냐.
-....저...
머뭇거리는 아이를 기다리지 않고 휑하니 나간 안산댁이 곧 만두그릇을 들고 돌아온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는 침을 꼴깍이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먹어.
-...돈.. 없어요..
-누가 돈 내래. 먹으랬지.
아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거침없이 들어온 원이 만두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민다. 아이는 원을 멍하니 올려다 봤다. 이리 잘난 얼굴은 처음이었다.
-안 먹을 거니?
-.....
-그럼 내가 먹지, 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원의 입으로 사라지기 직전, 아이는 저도 모르게 원의 옷자락을 쥐었다가 제가 놀라 화들짝 손을 뗀다. 원은 씨익 웃으며 아이에게 만두를 쥐어줬다. 주춤주춤 한 입 베어 물다 허겁지겁 쑤셔넣는 아이의 모습에 원의 입매가 씁쓸히 떨어진다. 한 발 떨어져있던 장의가 조용히 속삭였다.
-첩자는 아니겠죠.
-못된 놈들이네. 먹이지도 않고 일을 시키고.
장의는 빙긋이 미소하며 다시 물러선다. 원은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체하겠다.
-! 케, 켁!!
지레 놀란 아이가 콜록거리자 안산댁이 얼른 물을 따라 먹인다. 안산댁은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말은 시켜가지고.
-..아니, 나는-
-먹을 땐 안 건드는 법이죠.
장의까지 거들고 나선다. 원은 둘을 째려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이 와중에 웃으니 또 웃어진다. 겨우 진정된 아이는 셋을 둘러보다 서통을 꺼내 원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떤 분이 전해달라구..
장의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댄다.
-어떤 분.
-그, 그게... 그냥 전해주면... 아니, 그러니까 머리를 이렇게 묶고..
-왜 겁을 주고 그래. 못됐네.
살짝 억울해하는 장의는 본 체 만 체 원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통을 열었다. 서신과 가리개다.
<두 분 다 고마웠습니다. 강녕하세요.>
-....달랑?
원은 푹 한숨을 쉬며 아이를 본다.
-더 전하라는 건 없었니?
-...네..
-..못된 놈.
아이가 울상으로 변하자 원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너 말고
안산댁은 울먹이는 아이를 토닥이며 투덜거린다.
-너무하시네.
-그러게요.
-확.
장의가 움찔 물러나는 척을 한다. 원성전을 나서고부터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원은 절레 고개를 젓고 아이를 향했다.
-원래 알던 사람이야?
-...가끔... 먹을 거 사줬어요...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구나.
-네..
-착하네.
빙긋이 미소하는 원을 힐끔거리던 아이가 허리춤에서 엽전 하나를 꺼내 놓고는 잽싸게 도망간다. 안산댁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돈 없다던 게 걸렸나 봅니다.
-......
-만두나 더 먹고 가지.
무심히 중얼거린 안산댁이 다시 탁자에 앉아 나물을 다듬는다. 원은 바닥에 놓인 엽전이 깨지기라도 할 듯 내려다봤다. 장의가 조심히 옆으로 다가선다.
-신기하십니까.
-금도 보고 돈도 보고 세상 귀하다는 건 거의 다 봤는데 이 엽전이 이렇게 신기하네.
가진 자들은 이렇게 악하고 독한데. 벗이라 믿는 자를 탐하고 어미를 목숨으로 위협하고 혼인을 도구로 삼고.. 원은 몸을 일으킨다.
-니가 주워라. 난 못 만지겠다.
너무 무거워서. 원은 엽전을 줍는 장의를 보다 안산댁에게 물었다.
-린은.
-진관과 나가셨습니다.
-단이한테 갔군.
원의 눈이 쓸쓸히 가라앉는다.
-..술이나 마실까 했더니.
마시며 웃으며 아무렇지 않으려 했는데. ..나쁜놈.
-이 가리개는 또 뭐하러 돌려줘. 누구 쓰라고.
무명에 엽전을 싸던 장의가 무심코 말한다.
-다시 주시면 되지요.
장의가 아차 할 새도 없이 원이 목을 울렸다.
-짐 싸야겠다. 린이 것도.
**
-오라버니!!
넘어질 듯 튀어나와 품에 안기는 통에 몸이 다 휘청인다. 린은 옅게 미소하며 단이의 등을 쓸었다.
-아팠다더니 아니었나 보네.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농을!
팩 들리던 눈동자가 터질 듯 커진다.
-얼굴이!!
단이는 다급하게 린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이래요. 예? 어디서 이런 거에요. 이를 어째..
린은 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내린다.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요. 이리 시퍼런데!
-그냥 좀 넘어졌어.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내가 아주!
뒤편에 서있던 진관이 저도 모르게 쿨럭거린다. 린은 피식 웃으며 단의 이마를 작게 찧었다.
-다른 이들 앞에선 말조심 좀 하라니까.
-뭐 어때요. 진관인데.
뭐 대단한 말이라고 볼을 붉히는 진관을 보고 작게 고갤 내저은 린이 찬찬히 단을 살핀다. 많이 수척해졌다. 놀라면 열부터 나는 녀석이니 몇 날을 앓았을 테지.. 공녀로 가게 될까 하루하루 얼마나 두려웠을까.
-..잘 있었니.
-...그럼요. 제가 누군데.
두 눈이 그렁해선 씩 웃는다. 힘들었을 건데 우는 소리도 없이.. 철없는 막내인 양 굴어도 이리 속 깊은 아이라 린은 더 마음이 저렸다.
-...못생겨졌다.
-...오라버니가 더 못생겨졌거든요. 얼굴이 이게 뭐에요. ...속상하게..
끝내 눈물을 비치는 단이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허리를 꼭 끌어안는 손에 안도감와 미안함이 동시에 얽혀든다. 그렇게 단이를 안고 한참을 있는데.
-예가 어디라고 와?
가시돋힌 목소리가 등을 때린다. 요사이 취월루에서 살다시피 한다기에, 게다가 단이의 처소라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린은 단이를 떼어내고 돌아선다. 손에 작은 꾸러미를 쥔 전이 한 대 칠 듯 성큼성큼 다가서다 우뚝 멈췄다. 앞을 가로막은 진관 때문이었다.
-오, 오라. 저하가 보내셨군? 왜. 병 주고 약 줬으니 엎드려 절이라도 하라시더냐?
-오라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왈칵 나서려는 단이를 말리고 앞으로 나서는데 전에게서 옅은 술냄새가 풍긴다. 그러고 보니 약간 상기된 낯이었다. 린은 깊게 한숨을 삼킨다.
-..형님과 잠시 얘길 나눠야겠네.
-곤란합니
-형님? 니놈이 무슨 염치로 형님 소릴 해!
-...매우 곤란합니다.
전은 세모난 눈으로 진관을 훑어보며 코웃음을 친다.
-무사 따위가 왕족 앞에서 아주 시건방을 떠는구나.
-진관에게 그러지 마셔요!!
단이까지 린의 옆에 서서 핏대를 올리니 전의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너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것이야! 이놈이 모시는 저하의 어머님이 너를 공녀로 팔아넘기려 했어! 니 옆에 오라비라는 놈은 그를 말리기는커녕 아버지와 나를 협박까지하며 동조하였고!
-저하께서 공녀행을 막아주셨어요. 린 오라버니도 이리 상하시도록 뛰다녔을 거구요!
-하! 이놈이?
-오라버닌 왜 린 오라버니만 보면 못 잡아 먹어 안달이세요?!
린은 다급히 단의 등을 감싼다.
-단아. 그만하고 들어가.
-단이 너도 속고 있는 게야! 널 위하는 척, 아끼는 척, 저놈이 하는 척에 눈이 가려져서는!
-형님.
-집어치우랬지!?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어딜 감히!!
-오..오라버니!!!
도를 넘은 막말에 충격을 받은 단이 눈물을 매단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하자 린은 얼른 단을 부축하며 전을 진정시키려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갈 테니 그만하십시요.
뭐라 더 몰아붙이려던 전이 험악한 진관의 시선에 밀려 휘 손만 내젓는다.
-썩 꺼져. 다신 얼씬도 하지
-쫓아내라 했을 텐데.
전의 어깨가 흠칫 튄다. 저벅저벅 걸어와 코앞에 선 이는 역시 원이었다. 이런 젠장... 전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인다. 내리꽂히는 시선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못 올 데라도 왔다는 투군.
전은 솟구치는 적개심을 겨우 누른다.
-오해하셨나봅니다. 소신은 그저
-진관. 단이 데리고 들어가. 저러다 또 쓰러지겠다.
-...괜찮습니다.
-누가 린이 누이 아니랄까봐 고집은. 들어가 있어. 내가 안 괜찮아.
-....
-진관.
-예. 저하.
진관이 단이를 부축해 들어가자 원의 눈이 단번에 험기를 더한다.
-린아. 내가 전하라는 말 전했어?
린이 난처하게 고갤 떨군다. 원은 전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고개 숙이지 마.
린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들린다.
-다치는 것도, 욕 듣는 것도 안 돼. 나 말고는 어디에서도, 누구한테도 허락 안 해. 내 사람을 건들고 모욕하는 짓. 더는 안 참을 생각이니 알아서 처신해.
원은 점점 빨개지는 전의 귓볼을 보며 숨을 고른다.
-나중에 네 덕에 살아난 적이 몇 번인지 일러줘라. 밤을 새도 모자랄 테니.
-...들어가시지요.
말리는 눈에 원은 얼마 있다 몸을 돌린다. 원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전은 씨근덕거리며 린을 노려보다 들고 있던 보따리를 패대기치고 중문을 박찼다. 린은 바닥에 구르는 것을 씁쓸히 내려다본다. 보따리에서 토해진, 색색의 유밀과였다.
-i..n....??
*금과정
-가시기 불편하시면 단이 아가씨께 기별을 넣을까요?
-......
-공자님.
-.....아. 미안하네. 뭐라고 했지?
반찬을 집다 한 번, 국을 뜨다 한 번, 그리고 지금. 되묻기가 벌써 세 번째다. 평상시 없던 일이라 진관은 걱정이 더했다.
-..의원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괜찮아.
-낯색이 아직 좋지 않으십니다.
-단이가 걱정할까봐 그러나?
- 다..단이 아가씨께서 걱정을 하시겠지만 그게 그런 게 아니,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고..
눈에 띄게 허둥대는 진관을 보며 린은 목웃음을 삼킨다. 뒤늦게 웃는 낯을 확인한 진관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보면 꼭 저하 같으십니다.
-내가 그리 심했나.
-말 돌리시는 거 말입니다.
미소로 답을 대신한 린이 다시 조용해진다. ...저하 걱정을 하고 계실 테지. 원성전에 불려가면 꼭 끝이 안 좋았다. 원이 아주 가라앉거나 린이 아주 곤란해지거나... 린을 원수보듯 하는 왕비를 아예 이해못할 것은 아니다. 왕전이 그리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니 그 동생인들 곱게 비칠까. ..허나 이젠 아실 때도 되지 않았나. 이 고려땅에 이 분보다 더한 충심을 바칠 자는 없다는 거. 진관은 나물그릇을 슬그머니 린 쪽으로 민다. 빙긋이 답례하는 미소가 선하기 그지 없었다.
**
겹겹이 싸인 시종들은 모두 물러나고 없다. 후라타이마저 밖에 두시고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원은 쓰게 웃으며 문고리를 밀었다.
화려한 내궁 한가운데 정좌해있는 원성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이 없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에 마음 한 켠 퍼지는 안도를 숨기며 원은 무표정하게 예를 취했다.
-찾으셨습니까.
직선으로 꽂히는 시선이 낯설게 차갑다. 원은 말없이 원성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꼿꼿한 차림과 달리 좀은 수척해진 낯이다. 진한 향내 사이로 희미한 술냄새가 떠돌았다. 명치 끝이 묵직해진다.
-잘못된 것입니다.
한참만의 첫마디가 폐부를 찌른다. 원은 지그시 한숨을 물었다.
-설득할 생각 없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설득당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원성은 사이를 두고 말을 잇는다.
-해서요. 어쩌시려구요. 그놈에게 첩지라도 내리실 겁니까?
원은 헛웃음을 뱉는다.
-상상도 못해 본 일인데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원성의 눈빛이 사납게 튀어오른다. 원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그만하십시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마음입니다.
모든 걸 가질 아이가, 왕이 되실 분이 저리 초라하게 서 있다. 원성은 울컥 아픈 속내를 누르며 낯빛을 추스렸다.
-내가 그놈을 치우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그놈을 죽이면요.
다시 드러난 눈이 어둡게 침잠한다.
-죽겠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원성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팔걸이에 올려진 손이 가느다랗게 경련한다. 원은 입 안을 씹었다. 차라리 저 손으로 뺨이라도 내려치시지. 그럼 얼마든지 맞아드릴 텐데. 백 대라도, 천 대라도 달게 맞을 텐데.. 짓씹은 속살이 끝내 터져 비릿한 혈향이 퍼질 때였다. 침착을 되찾은 음성이 얼음처럼 꽂힌다.
-세자빈을 맞으세요.
세자의 혼인은 왕가의 존속과 직결된 바 언젠간 해야할 일이었다. 또한 이리 나오실 것을 아예 예상못한 것도 아니다. 허나 원은 저도 모르게 낯빛이 굳었다.
-어차피 정비는 상국의 여인 아닙니까.
-어미가 좋은 아이를 고르겠습니다.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그래야겠습니다.
원은 원성을 올려다본다. 이 고려땅에서 원성이 마음 먹어 못할 것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더 거절하면 글쎄. 아들의 협박이 얼마나 갈까. 쥐도 새도 모르게 린을 없애고 시치미를 떼거나, 당신도 죽을 결심으로 린과 그 집안을 잿가루로 만들거나. ...어느 쪽도 두려운 건 단 하나다. 내가 린보다 먼저 죽지 못하는 것.
-어미의 인내를 시험치 마세요.
용포자락이 손 안에서 거칠게 구겨졌다.
**
코흘리개 아이 하나가 쭈뼛거리며 금과정 객잔에 들어선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물을 손질하던 안산댁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뭐냐.
-....저...
머뭇거리는 아이를 기다리지 않고 휑하니 나간 안산댁이 곧 만두그릇을 들고 돌아온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는 침을 꼴깍이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먹어.
-...돈.. 없어요..
-누가 돈 내래. 먹으랬지.
아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거침없이 들어온 원이 만두 하나를 집어 아이에게 내민다. 아이는 원을 멍하니 올려다 봤다. 이리 잘난 얼굴은 처음이었다.
-안 먹을 거니?
-.....
-그럼 내가 먹지, 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원의 입으로 사라지기 직전, 아이는 저도 모르게 원의 옷자락을 쥐었다가 제가 놀라 화들짝 손을 뗀다. 원은 씨익 웃으며 아이에게 만두를 쥐어줬다. 주춤주춤 한 입 베어 물다 허겁지겁 쑤셔넣는 아이의 모습에 원의 입매가 씁쓸히 떨어진다. 한 발 떨어져있던 장의가 조용히 속삭였다.
-첩자는 아니겠죠.
-못된 놈들이네. 먹이지도 않고 일을 시키고.
장의는 빙긋이 미소하며 다시 물러선다. 원은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체하겠다.
-! 케, 켁!!
지레 놀란 아이가 콜록거리자 안산댁이 얼른 물을 따라 먹인다. 안산댁은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말은 시켜가지고.
-..아니, 나는-
-먹을 땐 안 건드는 법이죠.
장의까지 거들고 나선다. 원은 둘을 째려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이 와중에 웃으니 또 웃어진다. 겨우 진정된 아이는 셋을 둘러보다 서통을 꺼내 원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어떤 분이 전해달라구..
장의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댄다.
-어떤 분.
-그, 그게... 그냥 전해주면... 아니, 그러니까 머리를 이렇게 묶고..
-왜 겁을 주고 그래. 못됐네.
살짝 억울해하는 장의는 본 체 만 체 원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통을 열었다. 서신과 가리개다.
<두 분 다 고마웠습니다. 강녕하세요.>
-....달랑?
원은 푹 한숨을 쉬며 아이를 본다.
-더 전하라는 건 없었니?
-...네..
-..못된 놈.
아이가 울상으로 변하자 원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너 말고
안산댁은 울먹이는 아이를 토닥이며 투덜거린다.
-너무하시네.
-그러게요.
-확.
장의가 움찔 물러나는 척을 한다. 원성전을 나서고부터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주려는 것이다. 원은 절레 고개를 젓고 아이를 향했다.
-원래 알던 사람이야?
-...가끔... 먹을 거 사줬어요...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구나.
-네..
-착하네.
빙긋이 미소하는 원을 힐끔거리던 아이가 허리춤에서 엽전 하나를 꺼내 놓고는 잽싸게 도망간다. 안산댁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돈 없다던 게 걸렸나 봅니다.
-......
-만두나 더 먹고 가지.
무심히 중얼거린 안산댁이 다시 탁자에 앉아 나물을 다듬는다. 원은 바닥에 놓인 엽전이 깨지기라도 할 듯 내려다봤다. 장의가 조심히 옆으로 다가선다.
-신기하십니까.
-금도 보고 돈도 보고 세상 귀하다는 건 거의 다 봤는데 이 엽전이 이렇게 신기하네.
가진 자들은 이렇게 악하고 독한데. 벗이라 믿는 자를 탐하고 어미를 목숨으로 위협하고 혼인을 도구로 삼고.. 원은 몸을 일으킨다.
-니가 주워라. 난 못 만지겠다.
너무 무거워서. 원은 엽전을 줍는 장의를 보다 안산댁에게 물었다.
-린은.
-진관과 나가셨습니다.
-단이한테 갔군.
원의 눈이 쓸쓸히 가라앉는다.
-..술이나 마실까 했더니.
마시며 웃으며 아무렇지 않으려 했는데. ..나쁜놈.
-이 가리개는 또 뭐하러 돌려줘. 누구 쓰라고.
무명에 엽전을 싸던 장의가 무심코 말한다.
-다시 주시면 되지요.
장의가 아차 할 새도 없이 원이 목을 울렸다.
-짐 싸야겠다. 린이 것도.
**
-오라버니!!
넘어질 듯 튀어나와 품에 안기는 통에 몸이 다 휘청인다. 린은 옅게 미소하며 단이의 등을 쓸었다.
-아팠다더니 아니었나 보네.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농을!
팩 들리던 눈동자가 터질 듯 커진다.
-얼굴이!!
단이는 다급하게 린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이래요. 예? 어디서 이런 거에요. 이를 어째..
린은 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내린다.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요. 이리 시퍼런데!
-그냥 좀 넘어졌어.
-어떤 놈인지 잡히기만 하면 내가 아주!
뒤편에 서있던 진관이 저도 모르게 쿨럭거린다. 린은 피식 웃으며 단의 이마를 작게 찧었다.
-다른 이들 앞에선 말조심 좀 하라니까.
-뭐 어때요. 진관인데.
뭐 대단한 말이라고 볼을 붉히는 진관을 보고 작게 고갤 내저은 린이 찬찬히 단을 살핀다. 많이 수척해졌다. 놀라면 열부터 나는 녀석이니 몇 날을 앓았을 테지.. 공녀로 가게 될까 하루하루 얼마나 두려웠을까.
-..잘 있었니.
-...그럼요. 제가 누군데.
두 눈이 그렁해선 씩 웃는다. 힘들었을 건데 우는 소리도 없이.. 철없는 막내인 양 굴어도 이리 속 깊은 아이라 린은 더 마음이 저렸다.
-...못생겨졌다.
-...오라버니가 더 못생겨졌거든요. 얼굴이 이게 뭐에요. ...속상하게..
끝내 눈물을 비치는 단이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허리를 꼭 끌어안는 손에 안도감와 미안함이 동시에 얽혀든다. 그렇게 단이를 안고 한참을 있는데.
-예가 어디라고 와?
가시돋힌 목소리가 등을 때린다. 요사이 취월루에서 살다시피 한다기에, 게다가 단이의 처소라 마주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린은 단이를 떼어내고 돌아선다. 손에 작은 꾸러미를 쥔 전이 한 대 칠 듯 성큼성큼 다가서다 우뚝 멈췄다. 앞을 가로막은 진관 때문이었다.
-오, 오라. 저하가 보내셨군? 왜. 병 주고 약 줬으니 엎드려 절이라도 하라시더냐?
-오라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왈칵 나서려는 단이를 말리고 앞으로 나서는데 전에게서 옅은 술냄새가 풍긴다. 그러고 보니 약간 상기된 낯이었다. 린은 깊게 한숨을 삼킨다.
-..형님과 잠시 얘길 나눠야겠네.
-곤란합니
-형님? 니놈이 무슨 염치로 형님 소릴 해!
-...매우 곤란합니다.
전은 세모난 눈으로 진관을 훑어보며 코웃음을 친다.
-무사 따위가 왕족 앞에서 아주 시건방을 떠는구나.
-진관에게 그러지 마셔요!!
단이까지 린의 옆에 서서 핏대를 올리니 전의 목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너는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것이야! 이놈이 모시는 저하의 어머님이 너를 공녀로 팔아넘기려 했어! 니 옆에 오라비라는 놈은 그를 말리기는커녕 아버지와 나를 협박까지하며 동조하였고!
-저하께서 공녀행을 막아주셨어요. 린 오라버니도 이리 상하시도록 뛰다녔을 거구요!
-하! 이놈이?
-오라버닌 왜 린 오라버니만 보면 못 잡아 먹어 안달이세요?!
린은 다급히 단의 등을 감싼다.
-단아. 그만하고 들어가.
-단이 너도 속고 있는 게야! 널 위하는 척, 아끼는 척, 저놈이 하는 척에 눈이 가려져서는!
-형님.
-집어치우랬지!?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어딜 감히!!
-오..오라버니!!!
도를 넘은 막말에 충격을 받은 단이 눈물을 매단 채 부들부들 떨기까지하자 린은 얼른 단을 부축하며 전을 진정시키려했다.
-알겠습니다. 이만 갈 테니 그만하십시요.
뭐라 더 몰아붙이려던 전이 험악한 진관의 시선에 밀려 휘 손만 내젓는다.
-썩 꺼져. 다신 얼씬도 하지
-쫓아내라 했을 텐데.
전의 어깨가 흠칫 튄다. 저벅저벅 걸어와 코앞에 선 이는 역시 원이었다. 이런 젠장... 전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인다. 내리꽂히는 시선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여기까진 어쩐 일로..
-못 올 데라도 왔다는 투군.
전은 솟구치는 적개심을 겨우 누른다.
-오해하셨나봅니다. 소신은 그저
-진관. 단이 데리고 들어가. 저러다 또 쓰러지겠다.
-...괜찮습니다.
-누가 린이 누이 아니랄까봐 고집은. 들어가 있어. 내가 안 괜찮아.
-....
-진관.
-예. 저하.
진관이 단이를 부축해 들어가자 원의 눈이 단번에 험기를 더한다.
-린아. 내가 전하라는 말 전했어?
린이 난처하게 고갤 떨군다. 원은 전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고개 숙이지 마.
린의 얼굴이 반사적으로 들린다.
-다치는 것도, 욕 듣는 것도 안 돼. 나 말고는 어디에서도, 누구한테도 허락 안 해. 내 사람을 건들고 모욕하는 짓. 더는 안 참을 생각이니 알아서 처신해.
원은 점점 빨개지는 전의 귓볼을 보며 숨을 고른다.
-나중에 네 덕에 살아난 적이 몇 번인지 일러줘라. 밤을 새도 모자랄 테니.
-...들어가시지요.
말리는 눈에 원은 얼마 있다 몸을 돌린다. 원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전은 씨근덕거리며 린을 노려보다 들고 있던 보따리를 패대기치고 중문을 박찼다. 린은 바닥에 구르는 것을 씁쓸히 내려다본다. 보따리에서 토해진, 색색의 유밀과였다.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