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은탁은 스무살이 됐고 덕화는 매장직원이 됐으나 도망갔다 영화 한 편을 찍고 잡혀와(한 발짝만 더 오면! 삼촌 도깨비라고!...잘못했어요오오오!!!) 얌전히 매장직원이 됐고. 그리고.
도깨비는 기다랗고 흰 소파에 앉아 맞은편을 노려본다. 언제봐도 정떨어지게 깔끔한 침대였다. 제 주인을 닮은 게지. 무정한 놈.. 도깨비는 심술을 가득 담아 침대로 옮겨 앉았다. 주름 하나 없던 이불이 험하게 구겨지는 꼴을 보니, ...마른 하늘에 번개가 친다.
-아, 삼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덕화가 기겁하여 외치자 도깨비는 성숙한 도깨비답게 정중히 사과, 는 개뿔. 고개를 팩 돌리고 모로 누워버린다. 누가 봐도 나 삐졌소. 덕화는 속으로 혀를 차며 침대맡에 섰다.
-말로 합시다, 말로. 좋은 말 다 놔두고 왜 만날 벼락 아니면 천둥인데. 이러다 나 심장마비 걸리면 삼촌이 책임지실 거야?
-좋은 말 놔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다.
덕화는 들고 온 쟁반을 재빠르고 공손하게 내보였다.
-차 드세요, 삼촌.
-차버리기 전에 나가라.
-..뭐, 뭘 그렇게까지 격하게. 우리 사이에.
-우리라는 사이일 때가 있었지.
-삼초온...
-애교는 니 진짜 삼촌한테 가서 부리거라.
-나 진짜 삼촌 있어?
이 와중에 눈치라는 대목에서 답이 없는 덕화다. 도깨비는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정도로 신의를 지키니 나보단 그쪽이 삼촌일 터. 내 너를 깊이 아꼈건만...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도 같구나. ...그래.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번에는 덕화도 '그건 여자의 마음이구, 삼촌.'이라며 눈치 없진 않았다. 강아지 눈이 이리저리 흔들릴 뿐. ...뭐. 역시 눈치있다 볼 순 없겠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되었다. 네 마음 있는 곳으로 가거라.
가엽게도 덕화는 완전히 기겁하고 말았다.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말은, 카드 내놔 말고 처음이었다.
-가긴 어딜 가! 내 마음은 여기, 대대로 삼촌 옆에 딱 있는데! 삼촌 조카가 내 이름 중에 젤 멋진데!
-..되었다지 않느냐.
이건 진짜다. 진짜였어. 덕화는 다급히 쟁반을 내려놓고 마른등에 바싹 붙었다.
-내가 안 됐어. 절대 안 됐어. 이러지 마 삼촌. 어? 내가 다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요. 나는 그냥, 너무 너무 간절해보여서, 삼촌이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정말 모르고..
울기 직전인 덕화에게 도깨비는 허한 목소리를 낸다.
-....허면. 말해줄 수 있겠느냐.
-말해주고 말고. 삼촌이 원하면 말도 해주고 소도 해주고 닭도 해주고..
세상 모든 동물을 다 읊을 기세다. 도깨비는 속으로 작게 웃다가 이내 한숨을 삼켰다. 생각이, 내 조카라서가 아니라 정말 착한 아이야, 에서 이 착한 아이의 입을 넌 대체 왜 막은 건데, 로 끝났기 때문이다. 요샌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엇으로 시작하든 끝이 다 그자였다. 그 날. 마주 앉았지만 다정하진 않게 좋아하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비워냈던 그 날 이후로. 도깨비는 벌떡 일어나 덕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자. 지금 어딨어.
**
-올수록 괜찮네. 탁 트인 게.
-옥탑방의 유일한 장점이죠. 하하하하.
-유일한 장점은 아니죠. 아랫집 여자가 이렇게 이쁜데.
-그렇네요. 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 끝이 사그라든다. 김차사는 이쁜 아랫집 여자에게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쁜 아랫집 여자는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며 남은 소주를 따른다.
-혹시 시집살이 중이에요?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벙어리 삼 년. 딱 그건데.
-걱정해주셔서 감사하지만 그 정도로 힘들진 않습니다.
-걱정 아니구요. 그쪽한테 한 말도 아니구요.
아. 김차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옆을 돌아봤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 아니 사자는 오늘도 역시 허공만 보고 있다. 바싹 마른 얼굴만큼 바싹 마른 눈으로. 그땐 울기라도 하셨는데. 김차사는 그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삼킨다.
한 달 전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김차사는 여러가지로 놀라야 했다. 첫째, 집까지 찾아온 적이 없는 선배가 평상에 앉아 있었으며, 둘째, 그 선배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으며, 셋째, 그 울고 있던 선배가 신세지기를 청하였으며 (김차사가 알기로 그는 단돈100원도 빌리지 않는 사자였다!), 넷째, 마침 수도요금 1/n문제로 옥탑방에 올라온, 심하게 예쁜 아랫집 여자가 선배와 아는 사이였으며, 다섯째, 그날부터 선배가 단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으며.... 대라면 밤새, 천 가지라도 댈 수 있겠다. 거기에는 막 옥탑에 발을 디딘 저 소녀도 포함.
-어? 계셨네요? 오늘은 출근 안 하세요?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말 놓으시라니까 또 그러신다.
이제 겨우 세 번째지만 소문 속의 도깨비 신부는 소문보다 친절하고 다정하다. 암튼 이승이든 저승이든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돼지.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쵸. 너무 가끔 와서. 자주 오고 싶은데 보는 눈이 있어 가지구. 그 눈이 워낙 밝거든요.
도깨비님 말이군. 김차사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갸웃한다. 그렇다면 이 신부님은 도깨비님 몰래 여길 온다는 건데.. 왜? 신부가 신랑, 그것도 도깨비에게, 딴 사람도 아니고 도깨비랑 한 집에 살았던 저승사자를 만나러 오면서 숨겨야 할 이유가 뭐지... 하던 김차사의 머릿속에 번뜩, 선배의 강력추천으로 보게 된 아침드라마가 떠오른다. 메인 남녀가 서브 남자와 삼각을 이루고 이랬다 저랬다 어쩌구 저쩌구 결국은... 김차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불쌍한 선배님. 인간 소녀에게 연심을 품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쫓겨나기까지.. 분노한 도깨비님이 전세금도 돌려주지 않아 이 허름한 옥탑에.. 돈도 잃고 사랑도 잃었으니 나라도 넋이 나갈 터... 아아..
김차사가 그렇게 저 혼자 처연해지는 사이, 은탁은 들고 온 봉지를 내려놓으며 예쁜 여자에게 속삭였다.
-사장님. 제가 뭐 말실수 했을까요?
-글쎄. 밝은 걸 싫어하나.
무심히 답한 써니가 봉지에서 무절임을 꺼낸다. 소주에는 역시 닭무.
-우리집 무 여전히 맛있는데. 오랜만에 먹어 볼래요?
입앞까지 내밀어도 미동도 없다. 써니는 짧게 한숨을 쉬며 무를 아작거렸다. 은탁은 조심스럽게 사자 옆에 앉았다. 한참은 더 초췌해진 얼굴에 마음이 저리다.
-...아저씨.
-......
-허읍.
써니는 입을 더 틀어막는 김차사를 이상하게 훑어보고 은탁에게 손을 내저었다.
-내버려둬. 아직 말할 마음이 없나봐.
-사장님한테도 아무 말 안 하세요?
-어. 이렇게 매일 오는데 인사 한 번이 없다, 이 남잔.
-...고맙습니다.
-뭐가?
-인사 한 번 안 해도 매일 와주셔서요. 사장님 이런 캐릭터 아니시잖아요.
-그렇지. 아니지. 근데 이 남자한텐 이상하게 나같지가 않아지네. 내가 본 남자 중에 제일 잘생겼는데 친구나 하고 있고. 그게 싫지도 않고.
-정말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아까부터 왜 니가 감사해. 이 남자 좋아하니?
-아, 아니지 말입니다!!
질문은 은탁에게 했는데 답은 엄한 데서 나온다. 써니는 다리를 꼬며 김차사를 올려다봤다.
-그럼. 이 남자 좋아하는 게 그쪽이에요?
-...에? 예?! 아니요!
-아니면. 혹시 우리 알바생?
-아,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도,
-도!
벌떡 일어난 은탁은 눈을 굴리다 시계를 들여다봤다.
-도....올아 갈 때가 된 거 같아요. 어후, 시간이 벌써. 아저씨도 출근할 때 되지 않으셨어요? 아까 시간이 조금 남았다고. 조금 다 지난 거 같은데.
난데없는 속사포에 정신이 번쩍 든 김차사는 인간 앞에서 도깨비 신부님의 정체를 발설할 뻔한 실수를 깨닫고 얼른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 그렇네요. 시간이 어느 새 이렇게. 아름다운 두 분과 있다 보니 시간이 막 흘러 갑니다. 하하하하!!
-어후, 사장님이 아름다우시죠. 저까지 뭘. 호호호호!
-....뭐야, 이거..
과하긴 했지.. 은탁은 주춤 주춤 써니에게 다가섰다.
-사장님, 그게 아니고요,
-뭐냐고 이게!!!
써니의 눈에 들어찬 경악이 지나치다. 은탁은 그게 정말 아니구요, 하는 대신 얼른 뒤로 돌아섰다. 사자가, 없었다.
-바,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잖아!! 너도 봤잖아, 알바생!! 근데, 갑자기 어딜, 어떻게, 이게 대체 무슨..
-화... 화장실 가신 거 아닐까요.
-이렇게 휙? 한순간에 휙?
-전 본 거 같...은데..
-그래?
써니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자 은탁은 급하게 김차사의 팔을 잡아 끌며 소리를 낮췄다.
-얼른 말 걸어보세요. 얼른요.
-.......
-급해요, 얼... ....
재촉하던 은탁이 입을 다문다. 김차사 뒤로 익숙한 코트가 비쳤다.
-그자는.
고저 없는 한 마디에 어딘지 멍해져 있던 김차사가 뒤늦게 흠칫 물러난다. 은탁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도깨비 앞에 섰다.
-벌은 나중에요. 지금 저승 아저씨가 갑자기 사라졌,
-어디 있나.
도깨비의 시선이 은탁 너머로 매섭게 꽂힌다. 은탁은 허옇게 질린 김차사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 아저씨도 모르,
-안다. 말하라.
-안다..구요?
김차사는 은탁의 눈을 피하며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규정상..
-알면 제발 말해주세요. 그 아저씨 지금 어떤 상탠지 아시잖아요.
은탁의 애원에 도깨비의 음성에 노기가 더해진다.
-손에 든 명부를 모두 잃어 볼 텐가.
김차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곧 규정을 어길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 때문도, 소녀 때문도 아니었다. 분명 들었다. 사자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귀를 찢을 듯 맑은 종소리. 감사부였다. 그들을 만나고 온 사자들은 차사직보다 더 큰 것을 잃는다 들었다.. 김차사는 모자를 움켜쥐었다.
-선배님은 지금....
**
-모두 인정하는가.
-인정합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결코 달진 않을 것이다.
감사부 이우는 묘하게 입이 썼다. 여러 사자에게 벌을 내려왔으나 이같은 자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저를 변호하느라 바쁘고 가끔은 도주를 시도하였으며 악에 바쳐 감히 공격해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허나 마지막은 모두 같았다. ...즐겁지 않은 일이다. 이 같은 자라면 더더욱. 이우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승사자는 전생에 큰 죄를 지은 자들로 기백년의 지옥을 거쳐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자들이다. 허니 다시 너의 죄와 대면,
-잠깐.
나란히 앉은 이주가 불현듯 말을 끊고 사자를 주시하길 얼마. 낯빛이 일변한다.
-그렇구나. 너는 이미....
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른 벌을... 청합니다.
영문을 모르고 이주를 돌아보던 이우의 눈이 크게 부릅떠진다. 벌컥 열린 문으로 삿된 기운이 쏟아졌다.
-도깨비가 여길 어찌!
노한 음성에도 도깨비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자만을 보았다. 그새 반쪽이 된 뺨이며 아래로 처진 눈매며 흠칫 굳는 어깨같은 것들. ...이번에는 확실히 피한 게 맞구나. 도깨비는 짧게 숨을 끊어 뱉고 사자에게 걸어갔다. 지척에 서도 눈길 한 번 없는 놈 뭐 이쁘다고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것 같다. 속도 없이.. 도깨비는 사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순순히 끌려오는 몸이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뭐하는 거냐. 당장 놓아라!!
도깨비는 이우의 호통은 아랑곳없이 이주를 쏘아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후배 교육엔 뜻이 없나 보군.
이우는 놀란 빛이 역력해졌다. 감사부에서도 꽤 높은 축에 속하는 이주에게 이런 무례라니. 허나 이주는 덤덤히 도깨비를 마주볼 뿐이다.
-400년 전과 같은 우를 범할 테냐.
-내가 어떻게 '우'를 범하는지 다시 볼 텐가.
-사자의 일이다. 관여할 바가
-그놈은. 확인했나.
-......
도깨비는 입고리를 비틀었다.
-가서 네 일을 해라. 그리고 이자가 규정을 어긴 것은 모두 나에게서 기인한 것이니, 전해라. 내릴 벌이 있거든 부르시라고. 불러만 주신다면 기쁘게 달려가 달게 받을 것이니.
이우의 낯색이 붉게 달아 오른다. 이주는 고성을 내지르려는 이우를 한 팔로 제지하며 도깨비를 마주 봤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도깨비는 잠시 사자를 돌아본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 왜 이자인지 모르겠다. 왜 이토록 애가 타는지, 왜 그토록 찾아 헤맸는지 여전히 자신은 알지 못한다. 이자의 팔을 잡은 지금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도깨비는 고개를 바로 했다.
-후회가 되면 되는 대로 감당할 밖에.
이주는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인다. 도깨비가 사자를 데리고 나가고. 이우는 다급하게 물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망자의 잔을 모두 잃을 셈인가.
-!!!... 허, 허면 그 400년 전의 일이라는 것이..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존재니 후에 마주치더라도 경거망동하지 말라.
-...허나 저 차사는 어쩝니까. 그가 받을 벌은,
-그는 이미 벌을 받았다.
-예?
-그리고..
이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가 받을 벌 또한 결코 달지 않겠구나..
수많은 찻잔의 반짝임 속에 흰 날개가 높이 펄럭였다.
-글쎄 ing
-종방이라니.. 벌써 어쩔 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