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신세계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新世界 Episode

 

 

 

 

 

 

151.

"어떻긴. 연예인이냐? ...아, 똑같다니까."

 

속을 알 수 없는 황갈색 눈동자,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이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양복과 커프스 없는 소매, 번지르르한 갈색 가죽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맨발까지. 어제 처음 실물로 대면한 정청은 십 년 보고서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 대단했다. 내부인이 아니고선 빼낼 수 없는 서류를 읽으면서도, 석동출 죽인 거 너 아니냐는 은근한 도발에도, 이 정보 이중구 쪽에서 나온 거다 알아듣게 흘려도 '맘대로 생각하소.' 담담히 웃을 뿐 끝내 평정을 잃진 않았다. 뭐. 애초에 그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포스터는 잘 나왔고?]

 

형철은 어지럽게 널린 사진들 중 하나를 집어 든다. 공항 보안실 복도. 나란히 서 있는 강형철과 정청. 회장이 급사하고 그룹이 어수선한 이 때 극비리에 상해로 출국하며 경찰과 나란히라. 누가 봐도 수상할 이 사진이 어제 면접의 진짜 목표였다. 답지 않게 자중하고 있는 이중구에게 줄 선물이다. 이중구가 이런 패를 쥐고도 얌전히 물러날 머저리는 아니다. 제가 코너에 몰린다면 더더욱.

 

[영장 떨어졌다. 이중구 내일 잡아 들여.]

 

수화기 너머 영달은 들떠 있기까지 하다. 이제야 보이는 것이다. 이 지리하고 긴 싸움의 끝이. 형철은 눈을 감는다. 정청이 떠올랐다. '빨대 겁나게 꽂아 두셨고마. 배부르겄소.' 살기어린 미소였다. 그런 새끼가 어떻게 이자성은 그렇게 감싸고 도는지. 2주만 견디라는 말에 질끈 눈을 감아버리던 그 이자성을. ...형철은 담배를 물었다. 창밖으로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152.

양 변호사의 귓속말에 청은 미간을 구긴다. 이중구가 체포됐다. 그날 봤던 서류면 구속도 충분하겄지. ...씨벌. 이 잡것들이 누굴 홍어 거시기로 아나. 청은 한 입에 고량주를 털어넣고 담배를 꺼낸다.

 

"알아보라는 건."

"내일 비행기에서 보실 수 있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틀이면 FBI도 턴다더니 뻥은 아닌가보다. 달갑지 않게. 청은 손짓으로 양변호사를 물리고 길게 연기를 뿜었다. 석동출의 급사부터 강형철의 등장까지. 이번 출국날짜와 시간을 아는 건 북대문 식구들뿐이다. 게다가 그 자료. 어린놈이 빼낼 급이 아니다. 그러면... 빈 술잔에 재헌과 석무와 인호의 얼굴이 번갈아 담긴다. 청은 입술을 짓씹으며 술잔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퍼런 힘줄이 터져나갈 듯 불거졌다.

   

 

153.

사람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좋은 깡패가 되고 싶다는 신입들의 포부만치 꿈같은 헛소리다. 깡패가 아무리 좋아봤자 깡패이듯이, 사람은 속이고 배신하며 변하고 떠난다. 나빠서가 아니다. 그저 사람이라서다. 머리 검은 짐승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한 것. 이것이, 웬 좆같이 생긴 새끼가 한밤중에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기 전까지 청이 알고 믿는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새끼가 이자성이 되고 부라더가 되고 종종 부라더라고도 부를 수도 없을 만큼의 무엇이 된 지금. 청은 제가 그 진실에서 너무 많이 멀어졌음을 인정하고 만다.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데도, 은은한 향내를 풍기던 우아한 바둑선생이, 만날 쳐 맞는, 콩나물국을 좋아한다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석무가, 그리고. 부라더가, 이자성이 경찰제복을 입고 저를 비웃고 있는데도 화조차 나질 않는다. 청은 찢을 듯 서류를 쥐며 고개를 주억거였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쉽게 화교라는 말을 못 했고, 갖다 팔아라 팔아, 농을 칠 때마다 발작적으로 신경질을 냈고, 엄한 칼에 누워 지옥 아가리란 퉁박에 편안해했고, 서울입성에 오래도록 낙담한 빛을 띠었고, 인천창고에서 처음 프락치를 처리하던 날, 그 어둡고 피비린내 나던 밤. 옷깃을 움켜쥐던 허연 손마디가 그래서, 그래서... 청은 등을 둥글게 말며 종이에 이마를 댔다.

부라더. 이자성. ...자성아. 성아... 이 모지리 새끼야...

열이 들끓었다.

   

 

154.

중구는 감방문을 열고서야 숨을 가다듬었다. 거친 호흡이 수그러들 때쯤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미친놈. 방금 다녀 간 정청 말고 이중구 자신 말이다. 골드문 날파리를 잡아다 물어도 이중구를 팔아넘긴 건 정청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날파리보다야 이중구가 정청을 더 잘 알았다. 실실 웃으며 배때기를 쑤시면 모를까 지 말마따나 이런 식으로 추잡할 놈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참아지지가 않았다. 면회실 통유리 너머 짐짓 걱정스러운 척 꾸민 얼굴 위로 석동출이 겹쳐졌다. 마지막 면회 때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수 십년 만에 생뚱맞은 소리나 늘어놓던 노친네. ...그딴 게 유언이었다. 계집애랑 떡치고 오다가 비명횡사라니, 쪽팔려서 어디 말도 못할 죽음을 떠안고 그렇게 어이없이 가버렸다. 걱정은 씨발. 해주면 뭐해. 뭐 하러 해. 어차피 다 가버릴 거. 다 지멋대로 하고 가버릴 새끼들이. 그 여자와 장국철과 석동출과 정청이 한 데 엉켜 정신없이 폭발했다. 진짜 무슨 사춘기 애새끼라도 된 것 마냥. ...니미. 그러니까 왜 여기까지 기어 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 성질 뻔히 알면서. 머리를 헝클며 벽에 기대던 중구는 그러다 순간 문득 굳는다.

아까는 몰랐는데... 그래. 이상하다. 정청이 저랑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이중구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 시국에 굳이 왕림하셔서 욕을 사발로 쳐들은 이유가 뭘까. 재수 없게 히죽거리며, 그러나 색이 짙어진 눈동자를 한 시도 떼지 않고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니가 아니면. 니 꼬봉 이자성 그 개새낀가?' 시퍼런 비수에 찰나지만 한숨처럼 웃었다. 안심하듯이. ...하지만 무엇을? 중구는 낮게 욕을 내뱉는다.

씨발. 이거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155.

산발적인 총소리에 창고로 다급히 뛰어 들어온 북대문은 입을 열지 못한다. 드럼통에 담긴, 저들끼리 존나 꼴린다고 시시덕거리기도 했던 미모의 바둑선생은 그렇다 쳐도, 그 옆에 목이 반쯤 잘린 채 널브러져 있는 오석무. ...세상에. 소리 없는 경악이 번진다. 인천창고에서의 죽음이 뭘 뜻하는지 모를 초짜는 여기 아무도 없다. 재헌은 구석으로 내달렸다. 우욱! 울음 섞인 토악질을 시작으로 누구는 주저앉고, 누구는 울음을 쏟고, 또 다른 누군가는 씨발, 이 개새, 짜바리 새끼가아!! 비명을 내지르는 사이. 허옇게 질린 손에서 총이 곤두박질쳤다.

자성은 비틀거리며 창고를 빠져 나왔다. 석무가 경찰이었다. 신우를 죽였다. 석무가 경찰이었다. 신우를 죽였다. 석무도 죽었다. 나만 살았다. 나만... 멍하니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려다본다. 아무 것도 안 묻었는데 벌겋게 비쳤다. 아주 시뻘겋게... 순간 휘청이는 몸이 억세게 움켜잡힌다. 피 냄새가 난다. 석무의 피다. 청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태연해야 되는데 아까처럼 벌벌 떨리며 식은땀이 흐른다.

 

"...이자성이. 정신 똑바로 못 챙기냐."

 

부러뜨릴 듯한 손아귀가 떨어져 나가고야 자성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구부정한 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156.

"...하 나 씨발. 잘 자는 사람 불러내서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그러나 강형철은 꿈쩍도 없다. 오히려 비싯 웃는데, 칼이라도 쑤셔 박힌 것처럼 소름이 끼친다.

 

"대가리가 그 지경이니까 이러고 있지. 모레가 이사회란다. 거기다 이 사진이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냐?"

 

번뜩이는 눈이 꼭 정청이다. 정청. 강형철. 둘 다 좆같지만 확실히, 눈앞의 이 개새끼가 좀 더 좆같다. 중구는 비스듬이 입고리를 올렸다.

 

"그래서. 이딴 사진 들이밀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내가 이 짱깨새끼 당장 멱을 따버려야지. 이럴 것 같았냐? 아니. 지금 그러라고 이러는 거지? 칼춤 한 번 거하게 추라고 돗자리까지 깔아주시고, 조또 친절하게, 응? ..근데 말이야 강 팀장. 아니, 강 과장님. 그쪽이 날 얼마나 같잖게 보는진 아주 자알 알겠는데 안 됐지만 내가 기대만큼 돌대가리가 아니에요, 이 씨발!"

 

중구는 보란 듯이 사진을 내던진다.

 

"야 이 짜바리 새끼야. 내가 개호구로 보이냐!? 어디서 이빨을 까고 지랄이야?!!"

"...정청이가 회장자리 앉아도 상관없다, 눈 뜨고 코 베이겠다. 결국 그거냐, 이중구?"

 

쾅!!! 테이블을 내리친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당장에 목이라도 조를 기세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형철은 가까스로 자신을 추스르는 이중구를 무감이 건너본다.

 

"잘 들어. 니가 날 어떻게 엮었건 난 반드시 나가. 회장? 그깟 거 정청이한테 넘어가도 내가 다시 가져오면 그만이야. 멱을 따도 내가 따고 밟아 죽여도 내가 죽인다고. 그러니까 이딴 개수작 떨 시간 있으면 가서 잠이나 쳐 자, 이 개새끼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이중구에 잠시 멍해 있던 형철은 한참이 지나서야 소리 없이 웃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허게 고만 냅둡시다.’ 랬나. 보기보다 죽이 잘 맞는 새끼들이네. ...자아. 그러면 이제 다음 순서가 뭐더라... 형철은 뻑뻑한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담배를 문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못했다. '담배 좀 끊으세요, 제발.' 차분한 부탁이 손을 붙든다. 무슨 기집애가 이렇게 힘이 센 지. 아팠다. 빌어먹게 숨도 못 쉬게 아팠다.

   

 

157.

"....뭐?"

"며칠 전에 데이터베이스 털렸다고. 너랑, 너랑 관련된 자료 모두. 신우도, 석무도, 어쩌면 이자성이,"

"누구...한테 뭘 보내?"

 

영달은 퍼렇게 질린 형철에 낮게 혀를 찬다. 이렇게 넋 빼놓고 있을 줄 알았다. 석무와 신우가 썰려 나간 새벽, 이중구 만난 건 어떻게 됐냐고 물어도 뜬금없이 또 그놈의 사표타령이나 해댈 때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이전부터 언젠가 한 번은 삐끗할 거라 우려했다. 그래서 그랬다. 이중구가 받아 들였대도 어차피 이중구 수하가 출 칼춤이었으니까.

 

"귓구멍 막혔냐. 그러니까 무슨 어울리지도 않는 금연은 한다고 지랄,"

"고영달!!!!"

 

이중구 번호로 유상훈이 핸드폰에 정청이 포스터 넣었다고. 오늘 치라고 했어. 지금쯤이면 마무리 됐을 거다. 이자성이는 니 번호로 낚시터 가 있으라고 했,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반복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철은 문을 박찼다.

 

“이 새끼가 진짜. 야, 강 과장. 강형철이!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달려와 붙드는 고영달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니다. 이게 원래 수순이었다. 이중구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다음, 또 그 다음도. 계획은 이중삼중으로 철저했다. 형철이 제 손으로 직접 짠 계획이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이 미친놈아! 어디 가게. 누구한테 가게!! 가서 뭐하려고!!”

 

형철은 우뚝 멈춘다.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가려한 곳이 어디였는지, 언제부터 길을 잃었는지 이제 와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58.

자성은 몇 시간을 기다리다 낚시터를 나온다. 머리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놓여 있다. 날 좋네...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가슴이 패 인다. 신우가, 석무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둘을 시퍼런 바다에 담그고도, 그러고도 날이 좋단다. ...미친새끼.

그날 이후 정청에게서는 며칠 쉬라는 연락뿐이었다. 알고 있었냐는, 혹시라도 그 둘이 짜바린 거 너는 알고 있지 않았냐는, 너도 짜바리 아니냐는 그 한 마디는 끝내 없었다. 무사히 넘어간 걸까. 모르겠다. 그 날 저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기억도 안 날 만치 정신없었던 저를 정청은 봤을 텐데. 왜 아무런 조치가 없을까. 흐트러진 호흡 하나 놓칠 사람이 아닌데. 망설일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아끼던 석무를 망설임 없이 베어내면서도 웃은 사람인데. ...그런데 나는 왜 도망가지 않을까. 이렇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두려우면서. 비겁하면서. 비열하면서. 혼자 살아남은 목숨을 조금쯤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개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쥐좆같은...

자성은 가슴을 내리친다. 하지만 역시 그걸로는 부족했던지.

핸드폰이 발작적으로 울린다. 재헌이었다.

  

 

159.

"죄송..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재헌도, 인호도, 북대문파 대부분이 엉망이다. 멀쩡한 건 자성뿐이다. 그런데도 미안하다는 건 애들이고 저는 이렇게 어디 하나 다친 데 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참 재밌지. 그렇지 않소, 형님. 자성은 고개를 돌린다. 알 수 없는 줄을 주렁주렁 매단 청은 대답이 없다. 눈을 감고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 호흡을 의지한 채 아무런 말이... ...말도 안 돼. 자성은 휘청 베드를 잡는다. 혀, 형님! 득달같이 부축하는 재헌을 뿌리치며 청에게 다가섰다.

 

"형님. 일어나 봐요."

"......"

"..형. 일어나라구. 왜 이러고.. 왜 이러는데. 왜.."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흔드는 대로 흔들리는 청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다시 울음이 터진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크, 큰형님!!!"

 

청이 눈을 떴다. 의사 부르랴 간호사 부르랴 정신없는 북대문 사이에서 자성은 청과 눈을 맞췄다. 실핏줄이 터진 황갈색 눈동자가 힘겹게 꿈뻑인다. 검지를 가볍게 쥐는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굳으며, 자성은 알았다.

아는구나. 형님이, 정청이 다 알아 버렸구나...

  

 

160.

일주일이 지났다.

강형철을 만났고 장수기를 알았고 이중구에게 면회요청이 왔으나 가지 않았다. 기절하듯 잠깐씩 눈을 감았다. 꿈이 있었다. 서울과 여수를 제외하면 그 흔한 부산 한 번을 못 가봤으니 강형철이 말한 해외 어디어디는 가봤을 리도, 알 턱도 없는데, 시드니였고 베를린이었고 하와이였고 뉴욕이었고 파리였다. 아니. 지명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여기는 아니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벽이 희고 지붕이 파란 집 어디에서나 밥 냄새와 웃음소리가 번져 나왔다. 좋구나, 생각하며 자성은 조금 울었다. 걱정할 것도, 불안할 것도, 무서울 것도, 자책할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그 누구도.

‘우리 부라더는 이 좆같은 형님만 믿으면 돼야?’

허공을 응시하던 자성은 혼자 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건너본다. 그 말을 처음 들은 날도 이렇게 비가 왔다. 하와이안을 입은 맨발의 청이 면구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그 모습은 이렇게 생생한데. 왜 낮에 마주한 청은 이토록 희미할까. 며칠 만에 다시 눈을 뜬 청은 산소 호흡기를 제멋대로 떼내 버리고 얼굴이 좆같다며 운을 띠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뭐 때문인지, 아마 살고 싶어서일 거라, 그게 내 빌어먹을 본성이라 자위하며 눈도 맞추지 못했다. 청은 웃는 듯 했다.

 

‘형 말을 안 들으니께 그라고 고생이제. ...인자 고만 선택해라. 말 들어, 이 빙시나.. ..내 방 서랍에 니 선물 있다. 난중에 꺼내봐. 딴 거 맹키로 쑤셔 두지 말고이, 이번에 지대로 써라. ...독하게 굴어. 그래야 니가 살어. ...알제.’

 

그제야 청을 봤다. 눈을 감고 있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편안한... ...끝이구나. 진짜 가버리려는 거구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자기 혼자서 이렇게.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마지막 숨이 꺼지기 직전 호흡기를 갖다 댔다. 흰 가운이 우르르 몰려들고 맨 가슴이 튀어 오르는 장면 장면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힘겹게 다시 숨이 트이고, 전전긍긍하던 동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이, 자성은 홀로 천천히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전무이사 사무실에 앉아 금고를 열고, 이자성이 경찰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읽고, 주경의 서류를 읽고, 시계를 보고 있다. 롤레스. 품질보증서부터 짝퉁인데다 중간에 곰인지 너구리인지 모를 웃긴 캐릭터까지 새겨져 있다. 오른손목에 시계를 찬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들린다. 정청이 이어준 시간이다. 그토록 바랐던, 지독하고 비열하게 얻어 낸 끝도 없을... 테이블로 무너지며 자성은 소리 내 웃었다. 이것이었다.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수갑 같은 시간을 살아내는 것. 부여한 이가 청이기에 버리지도 못할 이 무거운 시간을 짊어지는 것. 이것이 청을 속이면서까지 삶을 탐한 저의 죄였다. 전무이사 정청. ..똑똑하기는.

얼른 오쇼. 죗값 독하게, 제대로 치르고 있을 테니까 얼른 와서, 와서. 제발 다시 와서...

명패를 쓸어내린다. 눈물이 염치없이 쏟아져 내렸다.

 

 

2013년 1월

이것이 정청을 속이면서까지 삶을 탐한 저의 죄였다.

 

 

161.

"더 설명할 건 없고. 다른 궁금하신 거라도?"

 

의사는 지나치게 무심한 투다. 의식불명, 식물인간, 뇌손상 혹은 사망.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기엔 좀 높네요, 확률이. 바뀐 담당의라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이랬다. 딱딱하고 무료하고 귀찮아 뵈는 얼굴. VIP실에 누운 남자가 누구건, 조폭이건 국회의원이건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희망적인 건 없습니까?"

 

묵묵한 자성을 제치고 성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하지만 재헌의 매서운 눈에도 의사는 아랑곳이 없다.

 

"글쎄요. 살아 있는 거 빼고는 딱히."

"이보쇼!"

 

달려들 듯 나서는 재헌을 자성은 손 하나로 세운다. 오른손목에서 너구린지 곰인지가 째깍째깍 히죽거리고 있다. 이 씨빠새끼, 하는 것 같다. 재헌은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물린다.

의사는 재헌에서 자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희한한 보호자다. 보통은 저 뒤에 깍두기처럼 붉으락푸르락 하는데 이 남자는 영 반응이 없다. 참으로 희한하고 걱정스럽게도. 의사는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사고건 병이건, 이런 상황에서는 한 순간이나마 폭발할 데가 필요하다. 울고 소리쳐서 소중한 누군가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벗어날 잠시. 그게 덧없는 위로나 희망보다 낫다는 게 수 십 명의 환자를 보내 본 의사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의사인 저보다 더 침착하기만 하다.

 

"가능성이 없단 말씀은 아니군요."

"잘해봤자 20%입니다. 정상적으로 깨어날 확률은 더 낮고요. 기적에 가깝다고 보시면,"

"됐습니다. 그 정도면."

"..그렇게 긍정적일 퍼센테이지는 아닌,"

"충분합니다. 그 양반.. 보기보다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환자보다 더 환자 같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는다. 앙상한 손목에 매달린 시계만치 이상한,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162.

2월 4일. 회장 선출을 위한 골드문 임시 이사회에 참석한 이사들의 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이중구는 손발이 잘렸고 정청은 병원에 있다. 장수기가 회장이 되는 건 기정사실. 평화와 공존의 새 시대가 코앞인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바로 북대문의 2인자, 서열 6위 이자성이었다. 그들은 자성을 얕잡아 봤다. 정청도 나자빠진 마당에 다 죽은 먹이나 물어뜯을 줄 아는 새끼가 혼자 어쩔 것이냐. 게다가 장수기가 부회장을 걸었다는데 머리가 제대로 박힌 놈이면 얌전히 표나 던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자성은 한 때 정청보다 앞서 칼을 휘두르던 여수 이자성이었고, 제정신일 리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었다. 무릎 꿇은 장수기를 내려다보며, 이중구가 출소했다는 인호의 전화를 받으며, 회의장 문을 열어젖히고 망부석이 된 이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세 개의 빈 의자 중 하나를 오래 바라보다 입을 떼기까지. 자성은 또렷이 하나만을 되뇌였다.

 

"정 이사님을 회장으로 추천합니다. 업무는 잠시 제가 대행하겠습니다. 이견은 없으시겠죠."

 

돌아올 때까지만.

정청이 돌아올 때까지만.

반드시 돌아올 그날까지만.

 

 

163.

[이자성이 임시회장 됐단다. 정청이를 회장으로 추대했대. 장수기는 안 나타났고. 하, 보나마나 뒤졌겠지. 이자성 그 개새끼, 돌아 선거야. 우리 제대로 나가리 됐다고.]

 

형철은 핸드폰을 고쳐 들며 낡은 의자에 푹 기댔다. 상황은 최악인데 웃음이 나온다.

 

[..지금 웃냐? 충격 받아 헤까닥 했어?]

 

충격일 건 없다. 몰랐으면 모를까 형철은 알았다. 역한 물 냄새가 그득한 이 자리에서 핏기 하나 없는 이자성에게 '장수기 바지로 세우고 니가 골드문 먹는 거야. 아무 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넌 경찰이야.' 스스로도 진절머리 나는 소리를 늘어놨을 때 이미.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자성은 마지막 말에만 미소를 보였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왜 자꾸 쳐 웃냐는 영달의 짜증에도 형철은 끝없이 웃어댄다. 기어이 끊어냈구나. 드디어 그렇게 했어. 영달 말대로 나가리도 이런 나가리가 없는데, 십 수 년 공들인 프로젝트가 무너졌는데. 화가 난다거나 억장이 무너진다거나 그러지가 않다. 그냥 우습다. 기다렸던 사람처럼, 이 끝을 고대했던 것 마냥. 이렇게 되고 나니 정말 다 우스울 뿐이었다.

 

 

164.

중구는 흠칫 눈을 뜬다. 사방이 어둡다. 죽은 건가. 죽은 기억은 없는데. 교도소를 나와 곧장 사무실로 왔다. 소파에 앉아 술을 병째 들이켰다. 교도소에서부터 따라붙던 기척이 기둥 뒤에서 훅훅거렸다. 비스듬히 입고리를 올렸다. 이자성이 그 새끼, 영 멍청하지는 않구만.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이, 담배 하나만 주라 해도 조용하기에 새끼들 졸라게 빡빡하게 구네 중얼거리며 술을 좀 더 마셨다. 그리고... ...역시 다음은 기억이 없다. 배때지가 뚫리거나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했어야 당연한데, 지금이 너무 생생하다. 폭음 뒤의 갈증. 미세한 두통. 거센 빗소리. 그리고 뚫린 벽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검은 등. 저 새끼가 뒤진 거야, 내가 산거야.. 씨발, 죽어 봤어야 알지. 중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켜 자성에게 다가간다. 

낯짝을 보니, 이자성이 이거 아무래도 뒤진 것 같다. 장수기 개새끼 선방하셨네. 그럼 정청이도 여기 있겠구만. 멍하니 생각을 잇는 중구의 얼굴로 담배연기가 훅 끼쳐온다. 눅눅하고 비릿하고 매캐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상훈의 개지랄과 정청의 병원행을 듣고 이사회 날 딱 맞춰 감옥을 나오며 이미 각오했던 죽음이지만, 본능은 본능인지라 살아 있다는 자각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걸음이 물린다. 

 

"....너..."

 

석고상마냥 검은 하늘만 올려다 보던 자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역시 살아 있다. 이자성도, 나도. 중구는 그제야 헛웃음을 흘린다. 정청이 담근 게 아무리 골수에 사무쳤다고 해도 이 이중구를 멀쩡히 살려두고 주변에는 기척도 없다라. ...이 새끼 이거, 돌았구만.

 

"이자성. 아니. 이제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

"직접 행차까지 해주시고 성은이 졸라게 망극하긴 한데. 회장 자리 앉더니 나 같은 건 씨발 졸로 보이냐?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디?"

 

한참을 보기만 하던 자성이 천천히 양복 안쪽으로 손을 넣는다. 칼. 총. 도심 한 가운데니 전자일 확률이 높지만 검게 꺼진 눈동자로 봐서 거기까지 고려할 정신머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손끝이 제멋대로 떨린다. ...씨발. 입술을 비틀던 중구는, 하지만 다음 순간 그대로 굳고 만다. 자성이 꺼낸 것은 칼도, 총도 아닌 작은 종이였다.

 

"이사님 애들은 적어도 두 달은 있어야 한답니다. 내일 제형이가 모시러 갈 겁니다. 여기, 번홉니다."

“......”

"여기는 폐쇄합니다. 짐은 옮겨 뒀으니까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

“뭐냐?”

“...불편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참는 게 좋으실,”

"뭐 하는 거냐고, 이 새끼야!!!"

 

내리친 손에서 종이가 나풀거린다. 새까맣게 추락하는 종이를 무감이 바라보는 저 좆같은 눈동자. 중구는 자성의 멱살을 채 올린다. 

 

"너 지금 나 동정하냐? 적선해?! 죽여, 이 새끼야. 지랄 하지 말고 그냥 죽이라고!!"

"출근 하십시오."

"근데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지켜야 할 거 있지 않습니까, 이 이사님도. 밑에 애들이나 ...진아나."

".......너... 뭐라고.."

"이사님 딸 말입니다. 이진아. 예쁘던데."

 

힘줄이 불거지도록 멱살을 틀어쥐며 중구는 끓어오르는 살의를 겨우 참아 낸다.

 

"...이자성. 죽고 싶냐?"

 

자성은 잠시 고개를 돌린다. 빗줄기가 얼굴로 튀어 오른다. 한 발 밑은 낭떠러지다. 이대로 이중구가 조금만 힘을 써 준다면... 자성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거절하면 이사님 딸도, 애들도 죽습니다. 내가 두 시간 안에 연락하지 않아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하십시오. 출근."

 

이깟 협박이 뭐 대수라고, 이깟 이자성이 뭐라고. 저절로 멱살이 놓인다. 소름이 돋았다.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다. 아니. 두려움이고 분노다. 경악이다. 진아까지 들먹이는 이자성의 변모에, 그 변모에서 풍기는 지독한 죽음의 냄새에 잠시나마 압도당한다. 돌아선 등이 문을 열기 직전에야 중구는 겨우 입을 뗐다.

 

"왜."

 

이중구 직속 휘하가 정청을 쳤다. 진실이 뭐건 간에 배후는 이중구였다. 그런데 이자성이, 정청의 하나뿐인 브라더께서 이런 수고까지 감내해가며 이중구를 살린다...? 이자성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선택이 아니다. 그 둘 사이라면 저를 죽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체 왜. 왜 저런 죽어 버린 눈을 하고.

 

"....왜 살리냐. 묻고 싶은 게 그거 같은데..."

 

스치듯 피어오르다 사그라지는 미소가, 그새 더 말랐는지 품이 한참 남는 검은 양복이,

 

"...글쎄. 왜 그랬을까..."

 

이제야 상복 같았다.

   

 

165.

"미안해요, 미안해요, 오빠.. 정말 미안해요..."

 

발치에 엎드려 통곡하는 가녀린 어깨를 자성은 한 번 짚어주지도 않았다.

배신감 때문은 아니다.

그저 부러웠다. 몹시도, 부러웠다.

   

 

166.

이주 사이 금배지를 어떻게 움직였는지 정치권에서까지 압박이 들어왔다. 여론도 좋지 않았다. 갱생한 기업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경찰의 낙인이라는 기획뉴스 덕분이었다. 골드문에 심었던 씨앗은 새끼 정보원까지 싸그리 갈렸다. 출국기록조차 없이 한주경도 사라졌다. 그 다음에서야 자성에게 연락이 왔다. 폐낚시터 11시. 형철은 늘 제가 앉던 의자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는 이자성이, 아직 붙어 있는 제 목숨보다 더 낯설다고 생각했다. 이렇다 할 인사말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였다. 함정수사 폭로, 희생된 젊은이들, 악독한 경찰에게 분노할 여론. 그리고 고영달의 아내와 두 딸.

 

"골드문 더는 건들지 마십시오."

 

꼿꼿한 눈은 이미 흔들림이 없다. 형철은 자성이 앉곤 했던 낡아빠진 소파 스프링을 욕하며 막대사탕을 물었다.

 

"근데 왜 일을 복잡하게 하냐?"

 

이주 동안 형철이 기다린 건 죽음이었다. 장수기가 죽어 나간 그 날 바로여도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이자성에게는 그럴 이유도, 명분도, 능력도 충분했다. 그런데 이주만에 나타나 굳이 협박까지 하며 살리는 이유가 뭘까. 형철은 이제 그것만이 궁금하다.

자성은 대답 없이 막대사탕을 쳐다봤다. '좋아하는 사람이 골초거든요.' 그 날 신우의 표정이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또 그러면 어쩔려구? 그리고 너도 인마, 골드문이 과거 알면"

"내 자료 그쪽이 그쪽 손으로 폐기했습니다. 고맙게도."

"...짜식. 그쪽이 뭐냐? 듣는 그쪽 기분,"

"모르겠죠. 혼자 살아남는 게 어떤 건지."

"......."

"난 그쪽은 안 죽일 겁니다. 절대."

 

형철은 그제야 자성을 본다. 예전에는 비할 수도 없이 좋은 양복에, 비싼 구두에, 시계는 두 개씩이나 차고 있는 대단한 회장님이 왜 그 날, 그 오래 전 조그만 경찰차에서보다 더 초라해 보이는지.

 

"건강하십시오, 부디."

 

저주나 다름없는 인사를 끝으로 구두소리가 멀어진다. 형철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이자성이."

"........."

"...괜찮냐."

 

한 번도 온전히 진심이지 못했던, 하지만 똑같은 무게로 한 번도 거짓이지 못했던 물음은 끝내 답을 얻지 못한다. 홀로 남은 형철은 낚싯대를 꺾어 던졌다. 비린 물에 둥둥 뜬 낚싯대는 약한 나무때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형철은 짧게 웃으며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딸기맛 사탕은 역시 너무 달았다.

   

 

167.

이자성 회장대행 체제가 자리 잡고 골드문은 별 탈 없이 굴러 갔다. 이중구가 복귀하고 두 달 뒤, 유상훈을 비롯한 재범파 대부분이 풀려났을 때 이중구가 이자성을 따 내리라는 추측이 난무하기도 했지만, 엄한 유상훈만 얻어 터져 입원했을 뿐 이중구는 잠잠했다. 이중구 복귀부터 재범파까지 당연히 달가울 리 없는 북대문도 조용했다. 이자성은 그들에게 정청만큼의 존재였다.

4월이 지나서야 추위가 사그라들었다. 꽃이 짧게 피고 지고, 곧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다. 7월인데 벌써 땀이 줄줄 흘렀다. '씨빠. 이 지랄 맞은 여름을 확 조져버리던가, 쌍.' 더위에 약한 자성 옆에서 제가 좋아하는 여름을 열심히 씹어대던 한 사람을 떠올리며 자성은 조금 웃었다. 

반 년. 정청은 아직 잠들어 있고, 저는 회장 정청 명패를 앞에 두고 살아있다.

'오래 살어라. ...오래 살어야.'

째깍째깍. 정청이 준 시간이 귀를 찢는 것 같았다.

   

 

168.

인호와 상규를 물리고 병실 앞에 서서 자성은 문에 이마를 대고 숨을 멈춘다. 오지 않으려 했다. 다 정상인데 일어나질 않는대서. 꼴 보기 싫어 그러는 걸까봐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정말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렇게 몇 번이나 찾아와 버리는 저 때문에, 나 때문에. 자성은 성급히 담배를 찾아 문다.

 

"금연이라니까요. 아실만한 분이 매번 이러시네."

 

무뚝뚝한 담당의가 담배를 뺏어 들고 한껏 찌푸리더니 낮게 혀를 차며 따라오란다. 어딘지는 뻔하다. 복도 끝에 연결된 하늘정원이다. 돌려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정청이 준 라이터다. 거 니 꺼라고 빙시나... 그러고 보니 고맙단 말 한 마디를 못했다.

 

"오늘도 안 들어 가시대요?"

"...네."

"그럴걸 뭐 하러 옵니까? 회장이라면서 되게 안 바쁜,"

"아닙니다, 회장."

 

드물게 날선 반응에 의사는 담배를 물며 씨익 웃는다.

 

"아. 죄송. 환자분이랬죠, 회장은."

"...어떻습니까."

"여름이라 간호사가 머리 잘라드린 정도? 뭐 똑같죠."

 

희한한 보호자만큼 희한한 환자였다. 일어나고도 남을 상탠데 눈을 안 뜬다. 진짜 신경이 쓰인다. 환자도, 보호자도. 의사는 재를 털며 다리를 꼰다.

 

"근데 높으신 양반들은 원래 시계를 두 개씩 차나? 그 볼 때마다 신기해서요."

 

애들이나 좋아할 캐릭터가 박힌 시계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의사는 길게 한숨을 뱉는다. 차라리 울지. 

 

"...종교 없어요? 기독교나 불교나."

"......"

"기도라도 해보면 어떨까 해서."

 

자성은 피식 웃는다. 쌀쌀맞고 거만해 보이지만 다정한 구석이 있다, 이 의사도. 누군가처럼.

 

"...소용없습니다, 그런 건. 그리고 설사 소용이 있다 해도.."

 

신이 내 바람을 들어줄 리는 없어요. 배신하고 기만하고 죽이고, 끝내 죽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인간의 소원 따위는.

자성은 말을 맺지 못하고 파랗게 검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아득했다. 아득하고 두려웠다. 또 다시 하루가 가는 것이, 이 목숨이 또 하루 이어진 것이, 그래서 언젠가 또 살고 싶어 질까봐. 기어이 그러고 말까봐... 자성은 또 담배를 문다. 의사 앞에서 줄담배라니 너무하시네. 툴툴거리면서 저도 담배 한 개비를 뽑아드는 의사가 정말 꼭 그 누구 같았다.

   

 

169.

퇴근하는 길에 문득 불 켜진 회장실이 눈에 밟혔다. 그날 이후 공식적인 업무 외에는 말도 섞지 않았는데 저절로 발길이 돌려졌다. 비 때문인가. 아무튼 습관이 무섭긴 무섭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중구는 회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재헌이 뭐 마려운 똥개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안에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셨다는 재헌을 내던지듯 밀치고 문을 열었다.

정 떨어지게 깔끔하던 회장실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 같다. 제자리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명패도, 화분도, 서류철도, 그 서류들을 결제할 때마다 꼿꼿하게 의자에 앉아 눈도 안 맞추던 빌어먹을 이자성도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다. 중구는 뭘 따질 겨를도 없이 자성을 잡아 챘다. 보기에도 형편없이 마른 몸이 힘없이 딸려온다. 퍼렇게 질려 가슴을 움켜잡고 있다. 숨을 뱉질 못한다. 중구는 시퍼레진 재헌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데려오던 끌고 오던 얼른 튀어나가 의사 데려와, 새끼야!!!"

 

재헌이 득달같이 뛰어나가고 중구는 성마르게 등을 내리쳤다.

 

“뱉어. 숨, 뱉으라고 이 개새끼야!!!”

 

몇 번을 내리친 끝에야 겨우 숨이 토해졌다. 십 년 감수 했네, 씨발.. 뇌까리는 중구에게 퍼런 입술이 소리 없이 열렸다.

왜.

한 마디였지만 알 수 있었다. 왜 살렸소. 원망이 그득했다. 어느 정도 핏기가 돌아오자마자 담배를 무는 꼴이 그 증거다. 미친 또라이새끼. 중구는 거칠게 담배를 뺐는다.

 

"뒤지고 싶으면 나가서 뒤져, 이 새끼야! 어디 회장실에서 지랄이야, 지랄이!!"

 

화낼 일은 아니었다. 이자성이 뭘 하건, 죽건 말건, 아니. 죽는다면 오히려 호재일 텐데. 화가 났다. 이 새끼는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죽여야 될 놈은 살려두고 정작 저는 시체 같은 낯짝을 하고 있다. 왜 살렸냐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이 개새끼야. 이제라도 한 대 확 후려칠까 하는 중구에게 자성의 입고리가 가느다랗게 올라간다.

 

"..이래서 형이 좋소. 형은 절대...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

 

오랜만에 듣는 형 소리와 영문 모를 헛소리의 의미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문이 발칵 열린다. 숨이 턱까지 들어찬 재헌이 더듬더듬 다가왔다. 눈가가 벌겋다. 중구는 저도 모르게 자성을 돌아봤다. 뭐에 홀린 것 마냥 비척대며 일어나는 자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170.

기적이라고도, 행운이라고도, 혹은 지독한 인연이라고도.

정청이 깨어났다.

 

 

 

2013년 7월 23일

정청이 깨어났다.

 

 

171.

억울할 것도, 한스러울 것도 없었다. 타인의 목숨을 양분삼은 삶에 자신의 명만이 아까운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했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단 하나만이 아쉬웠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일 지도 몰랐다.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좆같은 낯을 보면.

 

 

172.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자성의 바둑선생이, 빌어먹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무정한 여수 노친네가, 곰 같은 조경구가, 좆같은 오성철이, 이국한이, 사이사이 기억도 안 나는 수많은 이름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웃는 낯도 있었고 우는 낯도 있었고 조롱하기도 하였으며 동정하기도 하였다가 마침내 오열을 토한. 좆같이 쳐 울기는. 투덜거리자 '좆같긴 형 낯짝이 더 좆같소!' 발간 목소리가 쩡 하고 울렸다. 죽어서도 기억한다는 게 구지긴 하지만, 기억한다. 그날 참 많이도 울었다.

어느 새 길은 빙판이다. 죽자고 뛰어간다. 아는 길이고, 아는 등이다. 그 여자다. 뒤진 것보다 이기 더 뒤질 노릇이고마. 낮게 탄식하며 고갤 숙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으나 사실 그 날 어린 몸뚱이는 깊게 절망하였다. 버리고 떠나는 어미에 대한 원망보다 신도 못 신고 도망갈 만큼 어미에게 무거운 존재였다는 게, 그게 절망이었다. 신발 신고 가소, 신발 신고 가소.. 한 번이라도 돌아봐줄까, 돌아봐 다시 돌아와 줄까 끝내 이뤄지지 않은 소망 또한 감당하기 힘든 나락이었다. 얼어 죽길 작정하고 해가 뜰 때까지 서 있었다. 하지만 목숨은 질겼다. 그래서 살았다. 죽을 때까지 살아 주기로 했다. 

그 후로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이국한을 만났고, 형은 어째 그런지 모르겄소, 취할 때마다 툴툴거리는 오성철을 만났고, 아무 것도 상관없다는 듯 조경구가 머물렀으며 오지 마라 욕을 사발로 퍼부으면서도 다친 자리에 소독 솜을 대주는 노친네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괜찮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은 없었다.

 

 

173.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얼어터진 발에 긴 손가락이 닿더니 이내 더운 숨이 끼친다. 검은 정수리. 언젠가 이런 꿈을 꾼 것 같은데. 멍하니 내려다보는 사이 신이 신겨졌다. 가죽구두가 검게 번들거린다. 겁내 비쌀 것인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다. 허위허위 휘청이는 걸음 끝이 퍼런 맨발이다. 여자가 아니다. 그 여자의 걸음이 아니다. 한 발 한 발 꼿꼿한, 고집스럽게 위태로운... 니미. 뒤졌으면 편해야 되는 거 아닌가. 독하게 살라니께, 씨벌.. 입술만 물고 있는데 뒤통수가 번쩍한다. 

 

...아.

 

-대가리도 구진 시키가 뭘 그라고 따져 부냐.

-나가 이런 거슬 형이라고.. 쯧쯧.

 

이국한과 오성철이다.

 

-뭐다고 서 계있다요. 땅 꺼져불겄네.

-난 그렇게 썰어놓고, 씹..

 

경구와 오석무다.

 

그리고.

 

-가라. 청아.

 

쇠꼬챙이처럼 마른 여자.  

 

-인자 됐으니께.. 고만 가야.

 

아프게도 웃는다.

그 미소가 꼭, 꼭 누구 같아서.

 

"크, 큰 형님!!!"

 

밝은 빛이 쏟아졌다.  

 

 

174.

청은 의사들이 놀랄 만큼 빠르게 회복해갔다. 길게는 일 년쯤 걸린다는 재활이 반의반으로 3개월. 코앞이었다. 정청이 돌아온다. 정청. 그 이름만으로도 북대문은 숨통이 트였다. 바위에 눈코입 그려놓은 듯 생기 없던 면면들이 활기를 되찾았다. 지난 반 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웃지도 못했던 이자성 역시 재헌이 다 낯설 만큼 자주 웃음을 지었다. 여수에서조차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그랬기에, 그렇게 기묘하리만치 생기 넘치는 이자성이었기에 그가 3개월 동안 청을 찾지 않았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사들 중 가장 늦게 병실을 찾은 이중구도 마찬가지였다.

 

 

175.

"빌려 드릴 골프채가 없어서 어쩌나?"

"나 아적 공놀이 못하는디? 원체 취미도 읍고."

"귓구멍이 막혔수?"

"성질 피우는 거 보니께 식전이고마. 뭐 묵을라냐?"

 

말똥말똥 요구르트를 빨아 대는 게 죽을 뻔하고도 변한 게 없는 정청이다. 아무튼 빌어먹을 짱깨새끼. 중구는 비스듬히 헛웃음을 흘린다.

 

"그 집구석은 동정이 가훈인가?“

“옴마. 거 뗀 지가 은젠디,

“되지도 않는 개그 그만 치시고. 간단히 합시다. 그쪽 대가리 깬 건 나 하나로 끝,"

"니는 좌우명이 은제 뒤집어쓰기로 바꼈냐?"

"......."

"느 아니잖여."

 

중구는 저도 모르게 팔짱을 푼다.

 

"니가 철이 없긴 혀도 대가리가 구진 놈은 아니니께. 강 과장인지 뭐시긴지 그 좆같은 아자씨는 그라고 본 거 같지만서도."

"...알아 주셔서 존나게 감사하긴 한데, 뭐. 달라질 거 있나. 난 살아 있고 그쪽도 살아났고 이제 박 터지게 싸울 일만 남았,"

"그를 거면 시키야, 드오자마자 나 멱부터 따부렸어야제. 고라고 서서 나불나불 뭐한냐?"

"....."

"지랄 고만허고 앉어. 모가지 땡긴다."

 

...니미. 중구는 한숨을 뱉으며 의자를 끌어 앉는다.

 

“회장은 배짱 털고 부회장은 협박질이고, 아주 죽들이 잘 맞으시네.”

“......”

"나중에 딴 소리나 마쇼. 그쪽이 그쪽 손으로 기회 날린 거,"

"회장. 느 주까?"

 

...이게 대가리가 덜 아물었나. 벙한 중구에게 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깰 으쓱인다.

 

"원래 나보다는 니가 가지고 싶어 했으니께. 나야 무어 먹고 살기만 허면 되는 놈,"

"실성했어?"

"뭔 말을 그라고 험하게,"

"아니면. 황천길 한 번 밟아봤더니 좆도 우습나? 다시 보내드려!?"

"...아따. 니는 참말로 그 호르몬인가 뭔가 검사 좀 해봐야 쓰겄다. 준대도 지랄,"

"니미 씨발, 이 짱깨새끼들이 번갈아 가며 진짜!! 골드문이 무슨 장난감이냐!? 니들 꼴리는 데로 가졌다가 버렸다가, 어딜 준다 만다 개소리!"

"이러니께. 이라고 아끼는 놈 것이 되어야 맞는 거 아니냐 이 말이다, 나 말은."

 

중구는 할 말을 잃는다. 창가에 서서 절대안정 팻말을 돌려놓고 바지춤을 뒤적여 담배를 무는 꼴이 처음이나 지금이나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다. 저거나 이자성이나 왜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지. 나는 왜 저런 것들한테 휘둘려 이러고 있는지. 지그시 입술을 무는 중구를 뒤로 한 채 청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검게 퍼런 하늘로 둥그런 달이 참 밝기도 하다.

 

"...그려도 되지 않겄냐. 우덜 같은 놈들도 살면서 하나쯤은... 한 번쯤은..."

 

눅눅한 목소리가 어째 비죽일 때보다 더 좆같아. 중구는 욕을 씹으며 일어난다. 상처 자욱이 옅게 남아 있는 손가락에서 담배를 빼내 밖으로 내던지자 멀거니 돌아보는 눈이 어쩜 이렇게 이자성인지. ...내가 골드문을 나가든가 씨발. 

 

"엄살 피지 말고 다 나았음 얼른 오기나 하쇼. 그 놈의 중국어 아주 돌아버리겠으니까."

 

스스로도 이게 무슨 미친 소린가 싶지만 그냥. 이유 같은 건 모르겠다. 언젠가 죽이면 그만이다. 지금은 그저 아닐 뿐이다. 중구는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선다. 그리고 그 미간은 문을 열기 직전 더욱 구겨졌는데,

 

"...자성이 바쁘냐.“

걸 왜 나한테 묻나? 뻔질나게 드나드는 본인한테 직접,”

“한 번 오라고 혀라."

“...뭐?”

“바빠도 꼭 들리라고 혀.”

 

이번에는 괜히가 아니었다.

 

 

176.

내가 무슨 심부름센턴 줄 아냐는, 쌍지랄 한 번만 더 떠시면 결대로 회를 쳐드리겠다는 둥 길길이 뛰는 중구의 생욕을 듣고도 자성은 일주일 만에 청의 병실을 찾았다. 침대에 앉은 청은 한참 말이 없었다. 청의 가슴께에 시선을 둔 자성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움직인 건 의외로 자성이었다. 자성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청의 눈에도 익은 봉투였다. 안에 들어있을 것은 필시, 금오지구대 순경 이자성.

 

"느 뭐허냐."

 

이번엔 똑바로 마주 본다. 인천창고에서처럼 떨지도, 마지막처럼 울먹이지도 않는다. 그저 보기만 한다. 텅 빈 눈으로. 그런 주제에 손목에 시계는 차고 있다. 청은 헛헛하게 웃고 만다. 빙신 새끼...

 

"어야. 불 쪼까 줘 봐라."

 

원래라면 깨나자마자 그것도 병원에서 무슨 담배냐고 1부터 10까지 짱알댔을 인사가 군말 없이 라이터를 건넨다. 그것도 눈에 익은 것으로, 처음으로 자성에게 쥐어줬던 라이터다.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생일이네 뭐네 생쇼를 벌여가며 겨우 건넸었다. 이제 그런 날로는 돌아갈 수 없다. 청은 잠시 자성을 건너본다.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이중구에서 인천창고에 이르기까지 발밑이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이자성은 정청을 속였다. 어떻게 포장해도 그게 사실이었다. 십 년이나, 그 긴 세월을 일부러, 어쩌면 억지로 옆에 있었다. 죽여야 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그런데, 그런데도 끝내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석무의 목을 직접 가르고 들 만큼 전에 없던 화에 휩싸여서도 자성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허옇게 질린 낯이, 닿자마자 파르르 떨어대는 눈동자가, 그 좆같은 눈동자가... ...우스운 일이었다.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은 라이터를 켠다. 이게 청의 선택이었다.

 

"?!!! 뭐... 하는..."

 

서류는 금세 검은 재로 떨어진다. 무릎이 꺾여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이제야 벌벌 떨린다. 청은 낮게 웃었다.

 

"...그려.. 알겄다. 느는 참말로... 나를 첨부터 끝까지 한 번도 안 믿었고마..."

 

살려 주리라고는, 내가 너와 어떻게든 살아가고 싶으리라고는. ..하긴. 저조차 이럴 줄은 몰랐으니. 이토록 무모하고 어이없게 널. 내가 널... 

청은 가만히 자성을 바라본다여전히 지독히 추워 보이는 이자성을.  

 

 

177.

반드시 살아야 했지만 죽을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충분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다시 살고 싶어 할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중구를 남겼다. 오로지 이자성 하나만을 위한 결정이었다. 다행히 정청은 천만 분의 하나로 살아났다. 그가 준 시간을 그의 손으로 거두는 일만이 남았다. 그런데.

 

"...미친 새끼..."

 

청의 태도는 확실한 용서였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믿기지 않는 구원이었다. 그의 곁에서 이대로 살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석무를 죽이고 신우를 죽이고 경구를 죽이고 성철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모두 죽이고, 자신만은 그렇게 평화롭게 웃으며 숨 쉬고 먹고 마시며... 자성은 입술을 비튼다. 이럴 거면 진작이었어야 했다. 아주 오래 전에, 피를 묻히기 전에 청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아니. 이미 돌려진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자성은 그러지 않았다. 힘껏 그러지 않았다. 따뜻하게 떠도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눈을 외면하고 기만했다. 살려고. 제대로 살려고. 할머니의 소원이라 핑계 대며 끝까지 경찰, 그 좆도 아닌 것을 붙잡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면.

대체... 대체 석무는 왜 죽은 것인가. 신우는 왜 죽어야 했는가. 조경구는, 오성철은, 저가 아니었으면 자신의 명대로, 자신의 삶을 살았을 그 수많은 사람들은... 청의 곁에서 다시 살게 되면 감당해야 한다. 지나간, 돌이킬 수 없는 그 죄들을...

...끔찍하다. 강형철을 만난 날보다, 죽은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구겨 넣으며 살아남았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그게 무서워서 도망치려 했던,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이기적인 이자성이, 못나고 못난 버러지보다 못한 이자성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구역질이 솟았다.   

 

 

178.

중구는 입술을 짓씹는. 항상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감색 마이는 저만치 나뒹굴고 셔츠도 어깨쯤이 찢어졌다. 

회장실 문을 열 때만 해도 조금 불쾌한 정도였다. 정청의 그 어이없는 문자라니. '비 오는데 자성이랑 술 많이 마시지 마라. 나 낼 퇴원이다.' 아니 지가 나랑 언제부터 문자 주고받았다고. 그리고 퇴원하면 뭐. 골로 보내달라고? 이 또라이 새끼 좀 어떻게 해보라고 자성을 찾은 참이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괴롭게 가슴을 움켜쥐던 이자성이 스쳐갔다. 씨발, 뭐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성은 의자 옆 맨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잭나이프를 제 목덜미에 대고 있었다. 야, 이, 미친! 반사적으로 손목을 움켜잡았다. 취한 놈이 힘은 세다더니 몇 번을 뒹구르고 뒤척이고 급기야 서너 대 갈기고 나서야 널브러졌다. 그리고 불쑥 말이 시작됐다. 하지 말아야 할 얘기였다.   

 

마지막 기회요. 이 이사가 날 죽일 수 있는.”

 

죽일 만한 건수긴 했다. 정청이라도 어쩔 것인가. 이 대단한 이자성께서 프락치였다는데. 쥐새끼였다는데. 골드문을 야금야금 파먹었다는데. 석회장을, 그 노망난 노인네를 어쩌면 이자성이. 저도 모르게 잭나이프를 쥐었다. 올라타 목덜미에 칼을 댔다. 멱따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닌데. 이자성이 울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뜬금없는 고해성사도, 울고 있는 이자성도. 떨리는 손 위로 자성의 손이 겹쳐졌다. 힘이 쥐어졌다. 피가 흘러 내렸다. 깊이, 점점 더 깊이... 

'형은 절대...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뿌리치자 죽을 뻔한 쪽이 오히려 아쉬운 낯짝을 했다. 중구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소름끼치게 조용한 눈. 시퍼런 입술이 더듬더듬 움직인다. 해요. 형. 해. 하라구. ...아. 중구는 낮게 탄식한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교도소를 찾아왔던 정청. 담배를 물고 하늘을 올려다 보던 구부정한 등. 제 딸까지 들먹이던 이자성, 정청의 퇴원 하루 전에 벌이는 이 개지랄. 정청과 이자성이라는 진절머리 나는... 순식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청이도 알지. 알고도 살려준 거지, 너."

"......" 

"하 나 이 새끼... 날 아주 쥐좆으로 보는구만. ...이거 또 누가 아냐."

"......"

"그럼 잘 닥치고 있어, 이 개새끼야."

 

마이를 채들고 발을 돌리자 숨소리조차 잠잠하던 자성이 가느다랗게 물었다.

 

"왜..."

 

사방이 뚫린 사무실에서 제가 던졌던 물음이다. 글쎄, 왜 그랬을까 하던 이자성은 검은 낯이었다. 징글맞은 것들...

 

"...대체 왜..."

 

간절하기까지 하다. 중구는 담배를 물며 잠시 생각한다. 이유야 다. 내일 정청이 퇴원하고, 정청은 회장이고, 그룹 내 대부분이 정청 라인이다. 프락치라는 증거는 정청이 이미 다 없애 버렸을 테고, 유일한 증인인 강형철은 도움을 청할 대상이 아니다. 재범파 대부분이 복귀했지만 예전의 세는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진아의 안위도 걸린다.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제 어미를 쏙 빼닮았을 어린 낯. 그 밖에도 얼마든지 다. 증거를 모아 정청까지 싹 치워버릴 패로 쓸 거라든지, 정청에게 목숨빚이 있다든지, 이 자리에서 이토록 죽고 싶어 하는 이자성을 순순히 보내 줄 만큼 관대하진 않다든지, 죽는 것보다 괴로운 삶을 안다든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모든 게 틀리고 아니라 해도, 궤변에 불과하다고 해도, 설명할 수 없는 미친 짓이라 해도.  

 

"내가 널 조지면 누가 좋은데. 눈 감고 뒈질 뻔한 짱깨새끼? 무덤에 있는 노인네? 아님 강형철 그 개새낀가?"

"......"

"좋은 말로 할 때 끝내. 얌전히 부회장이나 하면서 살라고. 지랄 떨지 말고.   

 

석동출이 살았으면 했다. 장국철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의 죽음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삶을 처음부터 원한 것이 아니다. 

회장실을 나오며 중구는 처음으로 정청에게 동의했다. 

살면서 하나쯤은, 한 번쯤은 그래도 되는 거 였다. 

 

 

179.

"어? 부회장 보호자분 맞..."

 

늦은 퇴근길이었다. 비가 쏟아지는데 누가 우산도 없이 벤치에 앉아 있기에 정신과를 콜 해야 되나 경찰을 불러야 되나 쳐다봤더니 낯설지가 않았다. 정말 회장, 아니 임시회장이었다. 얼굴이 퍼렇고 벌겋고 아주 난리가 났다. 

 

"...임시회장씩이나 되는 분이, 삥 뜯겼어요?"

 

듣고 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봐요. 보호자 분. 불러도 대꾸가 없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우산을 기울인다.

 

"환자분 내일 퇴원하시면 교대하시려고? 그 회사는 임원 휴가를 특이하게 쓰시네."

"......"

"비는 왜 맞습니까? 어릴 때나 멋있는 거지 나이 들어 이러면 골병,"

"괜찮습니까."

"든다니까요, 골병."

"......"

"아, 환자분은 너무 괜찮으셔서 골치가 아프구요. 병실에서 어찌나 담배를 펴 대시는지."

 

작게 웃음이 터진다. 분명 웃고 있는데도 웃는 것 같지가 않다. 의사는 낮게 혀를 찬다.

 

"들어가서 치료나 받으시."

"......" 

"나도 이런 참견 안 하고 싶은데 의사의 양심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럼 부탁 하나 합시다."

"뭐요. 때린 사람 대신 좀 패 달라 이런 건 곤란,"

"이것 좀 전해주십시오."

 

의사는 자성이 내민 것을 얼떨결에 받아든다. 오른팔목의 그 시계다.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시계.

 

"직접 주시죠, 왜?"

"...부탁합니다."

"싸우기라도 하셨나?"

"뭐... 그런가.."

"다 큰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요."

 

수많은 창문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웃는가 싶다. 어쩐지 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던 의사는 몇 걸음 멀어지고 나서야 자성을 잡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전해 드릴 테니까 일단 치료나,"

"괜찮습니다."

"아무튼 요새는 다 의사라니까. 안 괜찮아요. 상처에 균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시나 본데,"

"웃기죠."

"아 이 양반 참. 그게 웃긴 게 아니라니,"

"살려고 아등바등 댈 때나 지금이나 다들 도움을 안 줘요. 참 재밌어..."

 

몇 번, 잠깐 마주친 걸로 어떻게 다 알겠냐만은. 말꼬리를 흐리는 자성이 곧 사라져 버릴 것 같다. 흔적도 없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의사는 더 자성을 잡지 못한다.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목을 메운다 해도 잡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애꿎은 시계만 쥔다. 째깍째깍. 시간이 가고 있었다.

 

 

180.

시계를 받아든 청은 재헌이 말릴 새도 없이 병실 문을 박찼다.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반색하는 수하를 윽박질러 골드문에 도착했다. 놀라 인사치례도 못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회장실 문을 열어젖히자 카펫 위에 핏자국이 비쳤다. 뒤늦게 들어온 재헌이 허옇게 질려 도로 뛰어 나갔다. 핸드폰을 들었다. 집. 받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는 번호였다. 청은 핸드폰을 내던졌다. 책상에 놓인 명패 회장 정청이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금고가 눈에 들어온 건 한참 뒤였다. 제 방에 있던 것이었다. 천천히 다가갔다. 골드문 사업현황이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 회계장부. 업무일지. 해외 영업일지, 경찰 및 검찰의 동향... 그리고 상자다. 안은 자질구레했다. 양말, 목도리, 넥타이, 구두, 라이터, 커프스, 넥타이 핀... 청이 준 것들이다. 이자성에게 정청이 십 년간 쥐어줬던 것들이 어디 하나 닳은 데 없이 놓여져 있다. 청은 금고 문에 이마를 대며 눈을 감았다. 북대문을 차지했던 날. '이제 북대문은 형 거요.' 오래된 미소가 떠올랐다. 시계를 움켜쥐었다. 시계는 버티고 버티다 빠삭 부서졌다. 파편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초라한 등이, 아무리 불러도 가고 말았던 약해빠진 걸음이 다시 어른거리는 듯 했다.  

  

 

2013년 10월 20일

시계는 버티고 버티다 빠삭 부서졌다.

파편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181.

이자성이 사라졌다.

 

“이... 이 개새끼가!!!!”

 

이중구는 기백만 원이 넘는 장식장을 기어이 깨부쉈다. 그렇게까지 날뛰는 이유를 그 누구도 알 길은 없었다. 설령 알았다 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기도 무슨 시 무슨 구 하는 주소 밑에, 보고 살아요. 괜히 버티지 말고 하는 짧은 메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중구와 북대문이 온갖 연줄을 동원해 이자성을 찾는 동안 정청은 회장자리에 앉았다.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걸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182.

"혼자 술 마시는 것도 지겹다야. 아, 그래도 경치 하나는 죽여. 너 풀냄새 맡아 본 지 오래 돼지 않았,"

[어쩌라고.]

"놀러 와라 이거지, 인마. 연 지가 언젠데 의리도 없이 한 번 팔아주지도 않,"

[민간인이 자꾸 전화는 하고 지랄. 쳐 넣기 전에 끊어!]

 

형철은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무튼 꽁영달 여태 꽁해가지고.

경찰을 그만 뒀다. 그렇게 아득바득 매달린 게 허무할 정도로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가면 정말 끝이라고, 다신 얼굴 안 볼 거라고 바락 대던 영달이 좀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더는 이유가 없었고, 있더라도 그만 하고 싶었다.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며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는 걸 깨달았다. 꽤 두둑한 퇴직금의 반을 자성의 계좌로 넣었다. 이깟 돈푼쯤 이제 우스울 놈이지만, 그래야 했다. 남은 돈으로 경기도 근방 낚시터에 자그마한 술집을 차렸다. 정말 여기다 차리실 거냐고, 망해도 책임 안 진다고 안달복달 하던 업자의 걱정대로 진짜 더럽게 장사가 안 됐다.

꼴이 오늘도 공칠 모양이라 형철은 낚싯대와 소주 한 병을 챙겨 들고 가게를 나섰다. 인터넷도 티비도 라디오도 신문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낚싯대를 드리우게 됐다. 진짜 물에 진짜 물고기가 살았다. 처음 잡은 날, 쪽팔리게도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형철은 짧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바람이 분다. 물 위로 떨어진 낙엽이 작게 파문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다. 시간 참 자알 가네. 막대사탕을 씹으며 하늘을 쳐다봤다. 붉은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시간은 이렇게도 가는 거였다.

 

 

183.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하늘이 파랗게 검어질 쯤이었다. 최씬가 돌아 본 형철은 몇 번 눈을 끔뻑였다. 산 놈인 유령인지 가늠이 안 됐다. 선글라스도 없고 파마머리도 아니라 더더욱.

 

"애새끼도 아이고 뭔 놈의 사탕이요? 금연하셔? 와. 오래 살라고?"

 

어제도 온 것 마냥 익숙하게 엉덩이를 붙인다. 담배냄새가 훅 끼쳤다. 살아 있는 정청이다.

 

"뭘 이라고 구석진 데 있대요? 찾느라 좆뱅이 쳤소."

 

형철은 헛웃음을 흘린다. 담배 끊은 지가 한참 됐는데도 이럴 때면 생각이 난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매캐한 연기와 끊으세요 제발 하던 담담한 목소리가.

 

"과장까지 한 양반이 꼴 한 번 구지요. 나때매 쫓가 나셨소?"

"죽일 거면 빨리 해라. 해 떨어져 춥다."

 

청은 묵묵히 두 어 개비의 담배를 더 태워낸다. 전보다 더 마른 얼굴이었다.

 

“이자성이 으딨소.”

 

이자성. 어딨소라. ...이 미련한 자식.. 형철은 쓴물을 삼키면서도 짐짓 태연히 막대사탕을 꺼낸다.

 

“걸 왜 나한테 묻냐?”

“연락이 닿나 혀서요. 그 짝 특기 아니던가요?”

“도망갔냐?”

“...안 되는가 보지요?”

찾아서 어쩌게. 죽이게?”

“.......”

“그럴 거면 인마 진작 했어야지. 놓친 고기가 어디 쉽게 돌아오는 줄,”

 

퍽! 돌덩이 같은 주먹이다. 한 대 맞았는데도 턱이 다 얼얼하다. 형철은 터진 입가를 닦으며 청을 올려다봤다. 황갈색 눈동자가 붉게 번들거린다.

 

“그 짝한테만 세월이 짧게 간 것은 아닐 것인디. 참 쉽소이.”

“...어려우면 뭐가 달라지냐. 너만 해도 봐라. 이자성이를 나한테 와서 찾고,”

“죽였소?”

 

성큼 다가와 멱살을 틀어쥐는 손이 파르르 요동친다. 

 

“이자성이를, 그 모지란 시키를 이란데다 쳐 밀어불고, 실컷 부려먹고, 죽였냐고 이 개새끼야.

 

거친 욕설과 달리 눈은 숫제 애원조다. 아니라고 하라고, 아니어야 한다고. 오래 전 비슷한 눈을 본 적이 있다. 여수에서 연락이 끊긴 정청을 두고 이자성이 꼭 이런 눈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형철에겐 끝까지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너야말로 왜냐. 골드문 정청이 경찰이었던 이자성을 찾아서 뭐 할 건데."

 

한참 뚫어지게 노려보던 청은 대답 없이 멱살을 푼다. 

 

"...안 죽였고마." 

 

안도하는 것도, 그 반대인 것도 같다. 언제 덤벼들었냐는 듯 잠잠해져 담배를 꺼내 무는 등이 구부정하다. 형철은 옷을 털며 일어났다.

 

"...언제 없어졌는데."

"그건 인자 신경 쓸 거 읎고. 낚시나 재미지게 하소. 이건 치료비요이?"

 

수표 두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진다천만 원짜리 수표다. 

 

"이 새끼 이거 대가리가 이래서 회장은 제대로 하냐. 말했잖아. 난 깡패새끼들 돈은 안 받,"

"우리 부라더가 으디서 쨍알 대는 걸 배웠나 했드만 그짝이셨소이."

"...건 원래 그랬다. 첨부터 꼭 한 마디가 많은 놈이었으니까.."

 

헛헛하게 웃는 강형철을 묘하게 건너보던 청은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발을 돌린다.

 

"어이, 정청이. 너 왜 그냥 가냐. 할 일 까먹었냐?"

 

잠시 굳었다가 돌아보는 얼굴에 비스듬한 미소가 위태롭게 걸려 있다.

 

"....그려. 그것도 아자씨 소행이었고마. 아새끼한티 쓸데없는 것은 갈쳐 놔가지고 니미.. 자살특공대도 아이고 아주 뒤지지 못해 지랄들을 허요. 살려 주믄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믄 될 거슬 뭐시 그라고 복잡해싸쏘? 목숨에 이유가 그리 중허요?"

"......"

"좋소. 그라믄 나가 그 이유를 던져 드려야제."

"......"

"나는 민간인은 안 건드려요이? 됐소?"

 

돈은 정 싫으믄 괴기밥으로다가 주시고, 자알 계셔. 괴기랑 퐁당퐁당. 퉤 가래침을 뱉고 건들건들 사라진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찌가 아래위로 요동치고 있었다. 급하게 낚싯대를 당기자 팽! 줄이 끊어진다. 뒤로 발라당 자빠져, 형철은 크게 웃어젖혔다. 뒤통수는 욱신거리고 맞은 데는 얼얼하고 고기는 놓치고. 그래도 웃긴 건 웃기다. 사는 건, 사는 거였다. 형철은 핸드폰을 꺼낸다.

 

"어, 나다. 아니, 그게 아니고. 부탁 하나만 하자."

 

밤하늘이 청명하게 빛났다.  

  

 

184.

북대문 대부분이 돌아가며, 재범파까지 합류해 골드문 반 이상이 이자성 수색에 나섰지만 겨울이 가고, 새해가 오고, 봄바람이 사그라지기까지 자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었을 거라고, 쥐도 새도 모르게 드럼통에 담겨 수장된 거 아니겠냐고, 못 찾는다고, 찾을 수 없다고 속편한 수군거림은 공석인 부회장 자리를 노리는 듯 했다. 하지만 배짱 좋게 나설 치들은 없었다. 어느 날 지방의 한 이사가 '역시 그 자리는 정 회장님 겁니다. 이자성도 잘 했지만 어디 회장님에 비하겠습니까.' 인사치례 한 마디 했다가 그날로 쫓겨난 걸 이사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그라고 구져서야 어디 일이나 제대로 하겄소. 어디 물 좋은데 가서 요양이나 하소.' 실실 웃고 있었지만, 경고였다. 자리에 있건 없건, 뒤졌건 살았건 이자성을 함부로 언급하지 말라는. ..참 대단도 해, 둘이. 삐죽이던 사람들도 그것만은 동의했다. 정말 지독히도 대단했다.

      

  

185.

어쩌다 보니 청과 중구는 비 오는 날마다 술을 마시게 됐다. 누구 때문이었지만 정작 그 누구를 언급한 적은 없었는데, 양주를 반쯤 비우다 불쑥 중구가 말을 꺼냈다. 

 

"...그만 찾는 게 어때."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투에 청은 술잔을 든 채 피식 웃었다.

 

"8개월이야. 쑤실 만한 데는 죄다 쑤셨고 바닷가란 바닷가도 몽땅 뒤졌어. ..이만하면 이제,"

"느.. 아수쿠림 묵어봤냐?"

"...뭔 헛소릴 하려고,"

"콩나물국이 을매나 맛난지는 알고?"

"......"

"...모르믄 시키야, 가만있으라."

 

청은 킬킬거리며 잔을 비운다. 한 잔, 두 잔, 세 잔, 연거푸 들이켜는 넉 잔째 중구가 거칠게 술잔을 잡아챘다.

 

"소주나 마실 줄 아는 양반이 뭔 양주를. 그만 쳐 드셔." 

 

흐릿한 눈동자가 히죽 웃는다.

 

"...그러니께 우리 부라더 같고마."

 

...니미. 아무튼 이 새낀 병이다. 죽어도 못 고치지. 중구는 술잔을 부러 쾅 내려놓는다.

 

"그 낯짝을 어따 갖다 대?"

"워메. 야. 우리 부라더가 느보다 최소 천 배는 잘났거덩?"

"하 나 씨발.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소싯적에는 기집애들이 줄줄이 사탕이었어요."

"어이고, 그러셔요? 눈까리가 삐었나보지요?"

 

유치한 말싸움은 중구의 벨소리로 겨우 멈춘다. 중구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얼른 받아드는 꼴이 영락없는,

 

"어. 어? 아니. 술은 무슨. (고만 좀 쳐 웃) 아, 아니야. 욕 이제 안 한다니까. 왜 아직 안 자. 깼어? 상훈이 아저씨는. 없다고. (이 개새끼가.) 알았어. 전화해서 사가라고 할게. 괜찮아. 그 아저씨 원래 밤잠 없어."

 

딸 바보다. 청은 숨죽여 웃는다. 천하의 이중구가 입이 귀에 걸려 성질도 립싱크로 내가며 앞에 누가 있든 말든 저러는 게 볼 때마다 웃겨 죽겠다.

웃겨서 정말, 죽어 버릴 것 같다.

  

 

186. 

골드문은 석 회장 시절보다 배는 성장했는데, 그 방향이 아주 묘했다. 가장 더러웠던 사채와 다단계는 정식 대부업으로 통합됐고, 삼합회와의 거래는 마약에서 건설로 바뀌었다. 연예인 성 접대니 뭐니 한창 시끄러울 때도 골드문 산하 엔터테인먼트는 예외였다. 인천 앞바다에 드럼통이 떨어지는 일도 없어졌다. 대신 사회공헌이 늘어났다. 주로 노숙자 숙소 지원사업이었다. 급기야 조폭 갱생사례로 방송까지 타게 됐을 때, 카메라 앞에서 쭈뼛대는 수하들을 내려다보며 중구는 '..씨발, 이러다 아주 표창이라도 받겠네.' 작게 투덜거렸다. 어쨌든 기업형 조직이었던 골드문은 진짜 어엿한 기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당당하고 번듯하게. 누구에게 호소라도 하듯이.    

  

 

187.

여름이 갔다.

자성은 여전히 어디에도 없었다.  

  

 

188. 

정청은 멀쩡히 잘 있다가도 꼭 한 번씩 미쳐 돌았는데 오늘은 날을 제대로 잡은 듯 했다. 다리가 휘청이도록 쳐 마시더니 갑자기 여수에 가자고 성화다. 재헌은 톡하고 건드리면 바로 울 것 같은 얼굴로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중구는 저러다 저 새끼까지 울면 나만 손해다 싶어 얼른 여수로 향했다. 오는 내내 실실거리던 청은 차가 서기도 전에 문을 박찬다.

 

"아 나 진짜 저 미친!!"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이고 뭐고 신발까지 벗어젖히고 방파제로 달리는 통에 중구도 홀딱 젖어 버렸다. 신을 신으래도 귓등이고 우산이나 쓰재도 투명인간 취급이고, 망부석 마냥 퍼런 바다만 쳐다본다. 차라리 하던 대로 속없이 웃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매냥 달고 다니던 실실거림 마저 없다. 

 

"...그 때 말이다. 나가 뒤져 부렸으믄 이런 일도 읍었겄지."

 

오랜만에 속 좀 제대로 뒤집으시려나보네, 씨발. 중구는 눈시울을 붉히는 재헌을 멀리 물리고 담배를 문다. 눅눅해서 그런가. 담배연기가 오늘따라 더 매캐했다.

 

"그랬으면 죽었수, 그 새끼."

 

힘없이 웃는 청을 보며 중구는 잠시 망설인다. 말해줘야 할까.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고, 조금도 견디지 않고, 이중구를, 강형철을, 장수기를 죽이고 어쩌면 골드문까지 다 뭉개 버리고 그랬을 새끼라고. 내 눈으로 본 것만 두 번이라고. 그 독한 새끼가 지 목에 칼을 들이 밀었다고, 죽여 달라고 했다고, 그 새끼한테도 니가 그렇게 크다고. 니들 그렇게 서로한테 징글징글 맞다고. 

하지만 중구는 오늘도 모든 말을 꿀꺽 삼켜내고 만다. 혹시라도 견디지 못할까 걱정해서가 아니다. 단지, 제가 할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새끼가 직접 해야 한다. 이자성이 니가 와서... 와서, 이 개새끼야.. 중구는 먼 바다를 바라본다.

비가 참 많이도 쏟아지는 10월 15일.

자성의 마흔 두 번째 생일이었다.      

 

  

189.

"내가 진짜 죄를 짓긴 오지게 지었나 보, 씨발! 제대로 못 걸어?!"

 

결국 재헌이 펑펑 우는 바람에 정청의 뒤치다꺼리는 중구의 차지가 됐다. 비틀비틀 하는 걸 몇 번이나 길바닥에 던져 버릴까 했지만. ...씨발, 이자성. 오기만 해봐라, 아주. 이를 박박 갈며 겨우 문을 열었다. 청을 소파에 내던지고 나서야 집안 꼴이 눈에 들어왔다. 그 흔한 화초는커녕 티비도, 장식장도 아무 것도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소파 옆에 잡동사니만 가득했다. 양말, 목도리, 넥타이핀, 구두, 커프스, 그리고... 시계. 그것만은 중구도 아는 물건이었다. 이자성이 차고 있던, 너구린지 곰인지가 우스꽝스럽게 히죽이고 있는, 깨어진, 멈춰 진. 멈춰 버린.

 

"...또라이 새끼...."

 

중구는 입술을 물며 정청을 노려본다. 둥글게 웅크린 몸이 정말이지 좆같았다.   

  

 

190.

몇 십 년만의 폭설이라더니 굵은 눈발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청은 담배를 물다 문득 탁자 위의 달력을 쳐다봤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다. 청은 다시 창밖을 건너본다.

'...느 이름이 뭐라고 혔재.'

'..이자성이요.'

성철이 개새끼가 무정하게 돌아선 날이었나지 잘못도 아닌데 답지 않게 힐끔거리는 놈에게 이름을 묻고, 듣고, 기억했다. 그래도 그뿐이었다. 이렇게 될 줄은, 그 이름 석 자가 이렇게까지 저를 뒤흔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고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해도, 청은 또 묻고 듣고 기억할 것이다. 아파도, 힘들어도. 정말 숨이 끊어질 것 같아도 이자성과는. 이자성 이 개새끼하고는... 청은 이마를 짚는다.

살아는 있는 걸까. 애써 외면했던 불안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빌어먹을 꿈 때문이다. 차가운 길 위에 얼어붙어 있거나 엄한 칼에 배때지가 뚫리거나 성질대로 성질부리다 어떤 씨부랄 놈한테 목이나 썰리거나. 종종 그 씨부럴 놈은 청이기도 했다. 인천창고에서 석무를 썰고 자성에게 다가가 느, 짜바리지. 느가 나를 속아 묵었지. 십 년 동안, 십 년이나 이 개애새끼야!! 악을 쓰고 뺨을 때리고 몸뚱이를 걷어차며 패악을 부리고 ...차라리 그래야 했을까. 억지로라도 이자성을 몰아붙여, 억지로라도 미안하단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그러면 이자성이 덜 무거웠을까. 떠나지 않았을까. 어딘지도 모를 곳을 저 혼자 헤매진 않아도 됐던 것일까... 자성아. 이자성 이 빙시나... 느, 대체 어디서 뭣하냐... 청이 나지막이 신음을 뱉을 때였다. 재헌이 들어온다. 평소라면 돌아앉은 청을 굳이 부르지 않을 텐데 목소리가 다급하다.

 

"형님 이거.. 이것 좀 보십시오."

 

꼬박 꼬박 챙겨 부르던 회장님 소리도 잊고 재헌이 내민 것은 평범한 편지봉투였다. 다만 발신자가, 없다. 청은 벌떡 일어나 봉투를 낚아챘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야 겨우 봉투를 열었다.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597-814. 희망의 집. 이천만원어치다.]

  

 

2014년 12월 24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 597-814

 

 

191.

"할머니 파 값이요."

"응? 뭘 팔라고?"

"아뇨! 돈 받으시라구요! 이거요, 파!"

 

한껏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끄덕거리며 500원 짜리 하나와 뜨뜻한 캔 커피를 건넨다. 오늘도 과한 거스름돈이다. 매번 이러시면 저 안 온다니까요, 짐짓 쀼루퉁한 얼굴을 해도 가는 귀 먹은 노파는 자글자글한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쥘 뿐이다. 원래도 정 많은 양반이지만 이즘 들어 더 성화인 이유를 은희도 짐작은 한다.

 

"아저씨는요? 병원 갔어요?"

"으응. 병원."

 

딴 말은 두세 번 반복해야 겨우면서 그 사람 얘기는 단번이다. 은희는 8평 남짓한 구멍가게 한켠에 엉덩이를 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일 년쯤 됐나. 몇 걸음만 걸어도 휘지다는 노파가 고개 위 희망의 집까지 올라온 적이 있었다. 가게 밖에 쓰러져 있는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 첫인상은, 은희 뿐 아니라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등허리가 빠싹 말라붙은 남자는 죽은 걸로, 지금 당장은 아니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고야 말 걸로 보였다. 당연히 탐탁지 않았다. 은희와, 은희가 사는 희망의 집 사람들은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 하는데, 아픈데 하나 없이 죽으려 드는 남자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배가 불러서는. 차게 삐죽이는 은희에게 원장님과 나이 지긋한 아저씨 몇이 조용히 웃었다. 세상에 괴로운 게 병마 하나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지만 가끔은 죽을병보다 더한 게 있다고. 그렇게 지독한 게 삶이라고.

 

"9시에 갔는데 여직 안 와..."

"길이 얼어서 그럴 거예요. 버스가 느릿느릿 하니까,"

"또.. 그놈들이 또..."

 

노파가 말하는 그놈들은 몇 달 전부터 동네에서 기승을 부리는 불량배들이다. 경찰에 신고해봤자 알았다는 말 뿐 한 번 찾아오지도 않는 촌구석인데 말이다. 남자는 노파 대신, 은희 대신, 희망의 집 사람들 대신 몇 번이나 얻어터졌다. 주먹 한 번 내뻗지 않는 주제에 피하지도 않고 엉망이 된 남자를 쓸어안으며 노파가 얼마나 울었는지. 은희는 노파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괜찮아요. 할머니. 아저씨 괜찮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도 노파는 계속 밖을 향한 채다. 그 짧은 새 무슨 정이 이리도 쌓였을까.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무심한 남자에게. 하지만 그러는 은희도 내심 걱정이 들어 문 밖을 돌아볼 때였다. 승용차 한 대가 가게 앞에 선다. 반들반들한 검은 에쿠스였다.

   

 

192.

버스가 중간에 서 버렸다. 엔진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슬쩍 눈치를 보는 게 술 약속이 급한 모양이었다. 자성은 별 말 없이 내려 길을 걸었다. 차도, 사람도 없이 눈 밟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렇게 이십 분쯤 걸었나.

 

"어이~ 메리 크리스마스~~"

 

익숙한 낯짝들이 비스듬히 손을 흔든다. 가재미눈. 주먹코. 빨간 머리. 용건이야 뻔했다. 바지춤을 뒤져 지갑을 빼간다. 그래봤자 만 원 짜리 한 장뿐이다. 씨발. 넌 이걸 돈이라고 들고 다니냐? 가재미가 작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쳐들자 주먹코가 말리는 시늉을 한다. 야야, 참아라. 크리스마스잖아. 뭐가 웃긴지 빨간 머리도 킬킬거린다. 고작해야 스물 몇. 언제 봐도 어리고 어리석은 얼굴들이다. 남을 괴롭혀도 허한 속은 달래지지 않을 텐데. 이 하잘것없는 죄들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크게 후회할 텐데. 그때가 되면 도망쳐도, 빌어도 소용이 없을 텐데.

 

"쫄기는. 야! 오늘은 봐준다. 꺼져."

 

하지만 누가 어떻게 살든, 그 끝이 무엇이든 저가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제 삶도 이런 것을. 퉤 침을 뱉고 담배를 물고 욕을 씹는 셋을 가만히 보던 자성은 다시 길을 걷는다. 등 뒤로 들으라는 듯 커다란 비웃음이 오히려 고마웠다.

한편 세 양아치는 자성이 사라지고 나서도 떠들기 바쁘다.

 

"좀만한 새끼. 졸라 쫄아. 병신새끼가. 킬킬."

"근데 씨발놈이 볼 때마다 눈깔 존나게 구리지 않냐? 언제 확 뽑아 버리, 아악!!"

 

험하게 씨부리던 가재미가 우습게 나동그라진다. 제대로 처박힌 뒤통수 언저리에 갈색 구두가 번뜩거렸다. 180cm인 빨간 머리보다 한 뼘은 더 큰 남자다.

 

"뭐, 뭐야, 이 새!!"

"내가 뭐라면. 니들이 아세요?"

 

용감히 나섰던 빨간 머리마저 주춤 뒷걸음을 친다.

 

"하 나 이 새끼들 보게. 뭐하냐? 친구 두고 토끼시게?"

 

가재미 어깨를 지그시 밟으며 입술을 비트는데 발끈하지도 못하겠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미소다.

 

"이런 좆만한 새끼들한테 씨발..."

 

일순 웃음이 걷히자 더욱 야차가 따로 없다. 게다가.

 

"어이, 박재헌이! 오랜만에 골프 좀 쳐야겠다!"

 

야차가 하나가 아니었다. 

   

 

193.

아, 맞다. 꽈배기. 다 와서야 떠올랐다. 저번에 사온 꽈배기 세 개를 앉은 자리에서 해치우기에 이번에도 사와야지 했는데. ...참 못난 사람이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속도 없이 정을 퍼주는... 자성은 꽉 막히는 속을 억누르며 걸음을 뗀다. 오래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해서 얼굴이나 비추고 갈 참이었다. 그런데.

 

"아따, 이게 어째 광박이요!! 잘 보쇼이. 할매한티 광하나, 두이. 나한티도 하나! 그니까 이놈은 광박이 아니! 흐미. 진짜 미쳐 불겄네. 아, 아가씨도 웃지만 말고 말을 쫌 허소!!"

 

손끝이 굳는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알긋어. 아, 알긋다고! 이거 쫌 놓으라고요! 도망가는 거 아니라니께! 동전이 차에 있다고 안 허요!! 씨부럴, 순하게 생겨갖고 아주 벗겨 먹을라 하..."

 

숨이 멈춘다. 진짜 일리가 없는데 진짜 같다. 짧게 쳐진 머리, 불그레한 얼굴, 여전히 제멋대로인 양복, 잠시 홉떠지다 잠잠해지는 황갈색 눈동자까지.. 웃는다. 가만히 웃는다.

 

"할망구 오지게 독하고마. 꼭 누구 같다 혔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물린다. 한 발 멀어진 거리에 씁쓸히 떨어지는 저 미소는. 

 

"...씨벌롬. 존내게 간만인디 반갑지도 않은 가보다."

 

정청이었다. 정말 정청이었다.

   

 

194.

연고가 없는 줄 알았어요. 이름도, 살던 곳도 한 마디가 없길래.

한동안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해서 우리 모두 걱정이 많았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다, 깊이 죽고 싶어 해 봤으니까.

할머니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이 나도 몇 번은 났을 거예요.

글쎄요. 딱히 무슨 말씀은. 그냥 매일 손을 잡고 또 잡기만 하셨어요.

그러다 할머니가 하루 안 오신 날이 있었는데 말도 없이 어딜 가더라고요.

혹시 떠나는 건가 싶어 따라가 봤더니 할머니 가게였어요.

들어가지도 않고 몇 걸음 떨어져 안을 살피기만 하는 걸 보고 그때 알았죠.

이 사람도 우리 희망의 집 식구들처럼 견디고 있구나.

여기 식구들은 시한부 선고를 받아도, 겨우 회복됐다 다시 재발해도 또 희망을 가져요.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까.

그래서 많이 염려했어요.

죽을 의지조차 갖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우면서도 할머니를 살피는 저 분에게 돌아가고 싶은 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돌아갈 곳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그런데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그쪽을 보니까 정말 마음이 놓여요.

   

 

195.

"아지매 말 겁나 잘하드마. 여 원장이라고?"

 

평상에 나란히 앉은 자성은 여전히 말이 없다. 원장이 말을 못하는 분인가 할 만 하다. 청은 쓰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그냥 놓았다. 있는 동안은 금연이라는 당부가 떠올라서다.

 

"다르긴 다르다. 공기가 좋으네."

 

산골의 밤은 깊고 푸르다. 서울에서는 화려한 빌딩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무리가 초롱하게 빛난다. 청은 옆을 돌아본다. 밤처럼 푸른 낯이 고집스럽게 땅만 보고 있다. 늘어진 회색 칼라티에 청바지를 입고 있어 그런지 그때 같다. 물비린내 나는 여수. 신나게 칼만 휘두르던 때. ...하지만 안다. 어쩌면 저에게만 그리운 시간이라는 것을. 그때도 자성은 이렇게 깡마른 몸뚱이를 간신히 버텨내며 괴로웠을지 모른다는 것을.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

 

"안 갈라냐"

"......"

 

찾아서 어째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자성이 없다는 것 하나가 충분히 괴로웠다. 봐야 했다. 보고 싶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살아 있어만 준다면. 그것만이 간절했다. 그런데... 청은 입술을 비튼다.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자성을 보자마자 또 다른 욕심이 기다렸다는 듯 솟구친다. 함께 있고 싶다. 같이 살고 싶다. 괴롭든 말든, 죄책감에 몸부림 치든 말든 억지로라도 끌고 가 손발을 묶고 사지를 잘라서라도 곁에 두고 싶다. 청은 결국 담배를 문다. 연기가 흐리게 피어오른다.

 

"여가 좋으냐."

"......" 

"주먹질 할 필요도 읍고 머리쌈도 안 혀도 되고.. ...씨벌. 그라고 보니께 묻는 기 빙신이네."

"......"

"그라도..."

 

깊이 떨어지는 목소리에 자성은 주먹을 움켜쥔다.

 

"있으믄 안 되겄냐."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억지로, 손발을 묶고, 사지를 잘라서가 가능할 리 없는 청에게 남은 건 초라한 애원뿐이다.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테니 돌아와 달라고, 참아달라고, 견뎌 달라고. 청은 지그시 입술을 물며 다시 자성을 본다.

 

"안 되겄냐."

"......"

"못 하겄냐.“

“......”

“...참말로 싫으냐."

 

말이 더할수록 희게 질리는 낯짝이 차라리 안 보이면 좋을 텐데. 눈이 멀고 귀가 멀어 떨리는 숨소리가, 발개지는 눈꼬리가, 그럼에도 버티는 저 모지리 새끼가... ...청은 천천히 일어난다. 구부정한 걸음이 한 발, 한 발 멀어지다 멈춘다.

 

"...자성아.“

 

자성은 헛숨을 삼킨다. 아닌데. 저렇게 불릴 이름 같은 게 아닌데. 그런데, 그런데도 저 사람은 왜.

 

“목소리... 한 번만 듣자."

 

입술을 짓씹는다. 끝내 뜯어져 굵은 핏방울이 바지춤에 떨어지기까지 무엇을 위해서, 왜 버티는 지도 모른 채.

 

“...새끼. 고집허고는.”

“......”

“...춥다. 단단히 입고 댕겨.”

 

또 다시, 다정하고 잔인한 당부였다.

   

 

196.

“왜 혼자야. 이자성은.”

“...박재헌이 이 우라질 시키. 느는 뭐단다고 여까지 왔냐.”

“아, 이자성은!”

 

대답 없이 반쯤 들어찬 소주잔을 들이켜는 낯짝이 해저 구만리다. 중구는 으득 이를 씹었다. 물론 이자성이 순순히 따라나설 리는 없으리라 짐작했다. 그 염병을 떨고 도망쳐 쥐 죽은 듯 숨어 살던 놈이 이제 와서 아이고 감사합니다 득달 같으면 그게 어디 이자성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이 초라한 가게 앞 평상에 몇 시간을 버티고 있었던 건 이자성에게 말 그대로 미쳐 있는 정청을 봤기 때문이다. 정청은 이자성 없이 제대로 살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구가 알기로, 그건 이자성도 마찬가지였다.

 

“...하 나 이 병신 새끼들이 진짜.”

“재헌이는. 도망칬냐? 지가 생각혀도 맞을 짓이긴 혔나 보,”

“이럴 거면 왜 왔냐? 낯짝만 보고 말 거면 이 개새끼야 찾질 말았어야지!”

“...귀 따거, 시키야. 와 소리는 지르고 지랄,”

“왜 도망갔는지, 왜 이런 촌구석에 박혀 있는지 알았잖아. 알면서도 찾았잖아, 너!!”

 

빌어먹을 입이 이제야 닥친다. 황갈색 눈동자가 짙게 일렁인다. 꼭 그날의 이자성 같다. 시퍼런 밤에, 제 목에 드리운 칼을 거뒀을 때의 그 멍청한...

 

"뭘 놀라. 왜. 어떻게 알았나 궁금하냐? 어떻게 알았을 거 같은데. 그 개새끼가 짜바리라는 거 누가 말했을 것 같은데. 이자성 그 개새끼가 어디까지 몰렸을 것 같냐고!"

"......."

“...비겁한 새끼. 이래서 니가 재수 없다는 거야. 뭐든 지 멋대로 구는 새끼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배려랍시고 지랄을 떨어대는데, 배려? 좆 까지마. 넌 그냥 무서운 거야. 이해하고 용서한 척은 할 수 있어도 그 상처 인정하고 끌어안을 자신은 없는 거라구. 그거 하나 감당 못할 새끼가 되도 않는 성인군자 흉내나 내고. 조또 여유로우시지? 언제든 찾으면 볼 수 있을 것 같지? 기회란 놈이, 그 빌어먹을 게! 너 같은 새끼한테는, 이자성 같은 개새끼한테는 끝없이 주어질 거 같지?!”

 

멍청히 올려다보는 청을 노려보며 중구는 숨을 가다듬는다.

 

“...개새끼. 그래. 데려오든 말든 니 좆대로 하셔. 근데 이건 기억해라."

"......"

"니가 칼을 맞고 뒈지든 그 개새끼가 또 죽겠다고 설치든 너랑 이자성. 이게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거.”

   

 

197.

희망의 집에 새 식구가 들었다. 아니. 새 식구라기보다 군식구. 시한부도 아니고 오갈 데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일주일에 서너 번, 어느 때는 일주일 내내, 정 안 되면 하루 반나절이라도 얼굴을 들이밀고 간다. 선량한 인상도 아니고 거친 사투리에 갈수록 옷차림도 가관이라 -고급 양복이 울긋불긋한 하와이안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처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산더미 같은 빨래도 너끈히 해내고 밭도 혼자 소 마냥 갈아대고 넉살은 또 얼마나 좋은지. 겁나 맛나 뵈는디 나도 한 그릇 주소, 하며 아무도 청하지 않은 식사자리에 엉덩일 들이밀고 아침 체조시간에는 커다란 몸을 열성적으로 실룩여 웃음보를 터트려 놓기도 하고 재발 판정에 예민해진 사람들이 괜히 미운 소리를 해도 눈살 찌푸리는 일 한 번 없이 넉넉했다. 해가 바뀌고 봄기운이 찾아들 쯤 이 희한한 남자는 하루 이틀 드문하기만 해도 궁금하고 허전한, 새식구도, 군식구도 아닌 식구로 자리 잡았다. 형, 동생, 누님 소리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은희도 싹싹하고 유쾌한 남자 정청이 싫지는 않았다. 어느 때는 생각도 나지 않은 아버지 같기도, 있지도 않은 큰오빠 같기도 했다. 문제는 청이 등장하기만 하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갈 때까지 틀어 박혀 있는 자성이었다. 모두들 걱정이 많았다. 둘 사이에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모양이야.. 만사 불평인 고씨 아저씨가 사이 나쁜 자식들 걱정하듯 한숨을 주억거릴 정도였다. 갑자기 사라져버리진 않겠죠? 미애 언니가 내놓은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다. 멀쩡해져 나간다면야 쌍수 들고 환영이지만, 이렇게 가면 자성은 분명 죽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 게다가 살아도 되는데 죽는 건 더 이상 싫었다.

다행히 자성은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점점 말라갔다. 시푸른 얼굴이 저들보다 더 죽을병인 듯했다.

 

"...바보 같아."

 

은희의 투덜거림에 청은 빙긋이 웃었다.

 

"원래 좀 그런 놈이여."

 

먼 데를 바라보는 얼굴에서 눈을 떼며 은희는 생각했다.

정말 바보 같다고.

   

 

198.

슬슬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 아예 골드문을 그 촌구석으로 옮기라는 중구의 짜증에 청은 얼마간 서울에 머물렀다. 중구가 회장일까지 하느라 진아를 못 봐 요새 아주 자기가 죽을 맛이라는 상훈의 말이 과장은 아니었는지 쌓인 일이 제법이었다. 이럴 거면 회장 자리 나한테 넘겨라, 넘기고 넌 가서 코 뚫고 밭이나 메, 시종일관 비아냥거리는 중구와 열두시 넘어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063 지역번호였다.

  

   

199.

"...영양 뭐?"

 

눈을 부릅뜨는 중구 앞에서 은희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잘 생기긴 했는데 길에서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도망갈 상이다.

 

"아픈 사람들 모여 있는 데라며. 몸에 좋은 거 죄다 주워 먹을 텐데 영양실조가 말이 돼?"

"그, 그게.. 요새 통 식사를 안 하셨,"

"그럼 씨발 아가리를 쳐 벌려서라도 쑤셔 넣어야지!! 거기다 쏟아 붓는 돈이 얼만데 애새끼 하나 못 챙겨?!!"

"죄, 죄송합,"

"죄송이고 나발이고 원장 어딨어! 원장 불!!"

"왜 엄한데다 지랄이냐. 은희 동상 미안혀. 야가 좀 또라이라."

"이 짱깨새끼가 누구 보고 또라이!"

"동상. 원장님은 으디 계시나?"

"...의..의사 선생님하고 말씀 중이세요."

"그람 거그 잠깐 가 있으. 한 삼십 분이면 되니께."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는 은희에 청이 피식 웃으며 중구를 돌아본다.

 

"이삐지?"

"...하. 돌았냐?"

"뭘. 딱 니 취향이고마."

"...농담할 정신도 있고 존나 여유로우시네."

 

중구는 이제야 진정하며 담배를 문다.

 

"어쩔 거야."

"뺏으야지."

 

뭔 개소리, 하려는데 입이 허전해지더니 담배가 똑 부러진다. 닌 인마 기본상식을 쫌 갖추고 이? 병원에서 무신 담배여, 담배가. 낄낄거리는 낯짝을 한 대 후려칠까 하다 관둔다. 허하거나 불안해지면 유독 수다스러워지는 버릇을 알아버린 탓이다. 내가 왜 이 짱깨새끼 버릇까지 알아야 되냐고 이 개새끼야... 중구는 병실 문에 걸린 이자성 석 자를 노려보며 한숨을 삼킨다.

 

"헛소리 작작하고 들어가 보쇼. 예민한 새끼 벌써 깨 있을 테니까."

   

 

200.

몇 번째더라. 청은 깡마른 몸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이렇게 누워 있는 이자성은, 이중구 대신 칼 맞았을 때, 서울 입성 때, 그리고 여수에서 두 번. 처음에는 뭐 이딴 놈이 다 있나 했고 두 번째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했다. 화가 났다. 깡패 팔자야 줘 터지는 게 일인데도 무모하게 몸을 날린 이 모지리 새끼가 그렇게 노엽고 아깝고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토록이나 끌렸다. 어쩌면 처음부터였다. 처음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 그래서 가까이 두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고 뭐고 목숨이 아깝고 뭐고 시려 보이고 추워 보이고 다 집어치고 이렇게 무거워 질 게 두려워서. ...하나쯤 무거버도 괜찮다고? 별 일이 아니라고... 청은 힘없이 웃어버린다. 돌팔이 노친네. 별 일 아니기는 니미..

 

"어이. 부라더. 나 말 잘 들으라.“

“......”

“느 존나게 잘못혔다."

 

이제야 눈을 맞춘다. 여전히 검고 깊은, 아픈 눈이다.

 

"나를 십 년이나 속여 불고, 느를 나맹키로 따르는 우리 아들, 못 보게 헌다고 여직 뿌해 있는 재헌이 그 씨벌럼, 인호, ...경구 다 뒤통수 쳐불고 허벌나게 잘못혔지. ...근디 그거 아냐?“

“......”

“나도 잘못혔다."

"!!!"

"따땃하게 해주겄다고 지랄해싸면서 느가 속이는 것도, 흔들리는 것도, 이렇게 무너지는 것도, 부라더 부라더 하는 기 느한테 독인 줄도 몰랐다. 그렇게 암 것도 모르믄서.. 느를 가지고 싶었제."

 

시트를 움켜쥐는 손마디를 세어보다 허리를 굽힌다. 코앞에서 와르르 떨리는 숨소리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웃으면 좋았다.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지키고 아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단순한 우애가 아님을 알고서 나서는, 떨리고 설렜다. 어린애처럼 허둥대면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초조해하면서 그렇게 혼자 행복했다. 그 밤도, 지나고 후회했을망정 그 순간만큼은 다시 없이 충만했다. 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옆에 있으라고, 함께 있자고, 가지 말라고... 제 자신을 위해서였다. 이자성이 원하니까, 이자성이 그러자니까, 그 무엇보다 소중하니까.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 깊이는, 잃고 싶지 않았다. 자성이 어미처럼 떠나면, 자성에게도 무거운 짐짝으로 남겨지면. 어미가 떠났을 땐 어려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버텨낼 순 없었다.

그러니 그때 했어야 했다. 맘을 깨달았을 때,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프락치라는 걸 알았을 때, 그때 참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되도 않게 여유부리는 게 아니라, 엄한 피를 뿌리고 죄를 쌓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성을 부르고 말하고 잡아야 했다. 이 모지리 새끼가 말라비틀어지기 전에, 숨소리도 못 내고 질리기 전에, 저만 죄를 지었다, 모두 저의 죄다 자책하며 남은 목숨을 벌처럼 이어가기 전에... 자성의 입술로 가볍게 내려앉는다. 바싹 마른 입술. 어깨를 밀어내는 가느다란 손. 청은 순순히 떨어져준다. 요동치는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하다.

 

"....석무가.... ....죽었소."

 

겨우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다.

 

"신우도, 선생님도... 성철이 형님도, 경구.. 경구도 다 죽어 버렸소.“

“자성아.”

“살려고, 내가 살려고 그 사람들을.... 형을.. 형님을..."

 

덜덜 떠는 자성을 끌어안는다. 안다.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잊을 수도 없다. 어느 날은 울컥 화가 나고 원망이 솟고, 변명 하나 보태지 못하고 죽은 석무나 바둑선생이 무거워 서로를 그만 외면하고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거기, 그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 두는 것이 자성을 위한 길이라는 것도. 다시 돌아와 괴로움을 곱씹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라는 것 또한. ...하지만 아직도 청은 눈보라 한복판에 있다. 빙판길. 겨울. 사라지지 않을 그 모질고 추운 겨울...   

 

"...느 잘못 아니라고, 나도 잘못 읍다고는 못 헌다. 느도, 나도 잘못 혔은께. ...그려도.. 그려도 말이다. 그려도 같이 가믄 안 되겄냐."

"....나는... 난,"

"당장, 지금 당장 오라고는 안 헌다. 인자 거기 가서 괴롭히는 일도 없을 것이여. 그러니께 살다가.. 살다가 생각이 나믄 말이다. 나가 느를 은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떠오르믄, 잊혀지지 않고 그래 불믄... 기다릴 것인께. 나가 어떻게든 안 죽고 버티고 있을 것인께... 같이 괴로워 허자. 이 모진 목숨 죄 값 치르면서, 보낸 눔들 몫이라고 뻔뻔스럽게 버텨 보자. 우리는 살아 있으니께. 그 씨불럼들 다 뒤지고도 살아 있으니께..“

 

와라.

꼭.. 와야 헌다.

 

어깨가 젖어든다. 낯선 눈물이다. 자성은 눈을 감았다. 흔들리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젖은 입술이 한 번 더 내려앉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고 잠시 소란스럽던 문밖이 잠잠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성은 눈을 떴다. 머리맡에 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 웃긴 짝퉁 시계. 두 개였다. 멍청하게, 속도 모르고, 속도 없이, 알아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 뻔뻔하게, 있는 힘을 다해 뻔뻔하게 째깍째깍.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들은 절대 달라지지 못할 터였다. 숨 쉴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죄책감, 돌이킬 수 없는 목숨들, 용서조차 구할 수 없는 죄들. 바꾸지 못할 과거. 그래도 시간이 간다. 흐르고 있다. 여기 이렇게, 독촉하듯이 독려하듯이 질책하듯이...

자성은 시계를 움켜쥐었다. 긴 울음이 쏟아졌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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