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청은 북대문파의 오야가 됐다.

 

 

新世界 Episode

 

 

 

 

 

 

71.

청은 사전에 그 누구와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다. 당일 '할 놈은 따라 오고 못 할 놈은 지금 가라잉.' 했을 뿐이다. 그래도 조직원들의 당황은 짧았다. 대다수가 청을 따랐다. 선두에 선 꼿꼿한 등을 보며 자성은 입술을 물었다. 강형철에게 보고할 틈이 없어 차라리 다행이라고.

  

 

72.

조직원들은 이자성을 다시 보게 됐다. 희멀건한 외양 탓에 조금은 깔봤던 이자성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청을 가로막고 최태만의 목을 딴 것도 다름 아닌 이자성이었다. 제 손으로 떨군 머리맡에 한참을 서 있던 자성은 청을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이제 북대문은 형 거요.'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그 미소를 청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73.

강형철과 고영달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북대문의 오야따위 누구든 상관도 없었을 뿐더러 청이 오야라면 이자성이 움직이기 더 수월할 터였다. '이야. 정청 이 새끼 진짜 물건이네.' 하지만 낄낄거리는 고영달과 달리 강형철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정청. 대수롭지 않던 이름이 어쩐지 꺼끌거렸다. 그게 정청 탓인지, '..언제까집니까. 이 임무.' 먹먹하던 목소리 탓인지 알 수 없었다.

   

 

74.

'서울만 가면 돼. 그러면 끝난다.'

그러면 죽어도 안 끝나겠네. 자성은 입술을 비튼다. 청은 더 이상 세를 늘리려 하지 않았다. 가끔 접촉해오는 전남 조직도 무르기만 했다. 오야가 됐어도 여전히 정청이었다. 조금쯤은 거들먹거려도 좋을 텐데 하와이안도, 수하들과 얽혀 히히덕대는 것도, 자성의 단칸방을 차지하고 개를 괴롭히는 것까지도 그대로였다. 제법 커진 개한테 손가락을 물리고 '이 개시키가!!' 눈을 부라리는 청의 뒤에서 자성은 눈을 감았다. 죽어도 끝나지 않을 시간. 이 손바닥만 한 방에서. 저 정청과 함께. ...막막했다. 막막하지 않아서 더, 막막하기만 했다.

 

 

75.

"어디 가냐니까요."

"아따 그 시키. 고향 간다고 몇 번을"

"여기가 고향이잖아!"

 

청과 개과 둥그러니 자성을 돌아본다. 자성은 저가 더 놀란 얼굴이다. 청은 그제야 하와이안을 내려놓았다.

 

"부라더. 느 무슨 일 있냐?"

"......"

"왜 그냐니까."

"......."

 

재차 물어도 고새 낯빛을 수습하고 성그렁 보기만 한다. ..또 자물쇠 채워 부렀구마, 니미. 청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담배를 문다.

 

"...나가 우리 부라더를 속여 먹을라는 것이 아니라 우찌 될 지 가봐야 알아서 그른다. 큰소리 떵떵 쳐놓고 안 되불면 나가 쪽팔려서 얼굴이나 들고 댕기겄냐."

"......."

"힘 좀 풀어야. 눈깔 삐 나오겄다. 안 그려도 좆같은 얼굴 눈깔까지 읍어 불면, 옴마야~ 으디 무서버서 쳐다나 보겄,"

"서울.. .....이요?"

"서울?? 갑자기 뭔 서울이여?"

“.......”

“워메 속 터져 뒤져 불겄네. 나가 개시키도 아니고 물으면 대꾸를 좀”

"정 가야겠음 재헌이랑 몇 명 데려가요."

"아그들은 뭐다러?"

"그럼 나랑,"

"야야. 나야 우리 부라더가 있으니께 댕기는 것이제. 느까정 없으면 여기 싹 털려 부러. 요새 분위기 존내 구진 거 모르"

"그리 잘 아시는 분이 행선지도 숨기고 혈혈단신 가시겠다. 형님이 아직도 중간머린 줄 아시오?"

"...씨부럴 새끼. 아무튼 썽만 나믄 그놈의 형님 소,"

"나 아니면 애들. 이도 저도 싫으면 북대문 간판 떼고 맘대로 다니시든가."

 

그러고선 팽 돌아서 찬바람이 쌩하는데, 나가 무슨 바람 난 여편네도 아이고 겁나 뻑뻑허네, 씨벌.. 청은 작게 투덜대며 개 옆에 쭈그려 앉는다. 어째 날이 갈수록 점점 지기만 하는 것 같지만, 별 수 있나. 이럴 때의 자성은 진짜 이길 도리가 없다. ..뭐. 이길 마음부터가 없긴 하지만. 청은 핸드폰을 꺼낸다.

 

"재헌이냐. 이. 니 애들 몇 명 추려갖고 세 시까정 사무실로 와라. 이. 빤스 좀 챙기고잉."

 

빤스가 뭐야, 빤스가. 자성의 구시렁거림에 청은 소리 없이 웃는다.

이자성에게라면 언제든지 져도 좋을 것 같았다.

 

 

76.

8월. 정청은 강형철과 고영달은 기어이 놀라게 한다. 북대문이 중국과 다시, 그것도 삼합회와 거래를 텄다. 이번에는 고영달도 속 편히 웃지 못한다.

 

“...들개나 되려나 했더니 호랑이 새끼였네, 이거.”

“......”

“뭐... 이 정도면 따로 몸값 올릴 것도 없겠다. 금문짝 새끼들 요새 자금 쪼달리잖아.”

 

...잘 됐네. 떨떠름하게 덧붙이는 고영달을 보며 강형철은 묵묵히 담배를 문다. 더럽게 썼다.

   

 

77.

"미역국 끓여 달라니께."

 

중국 거래로 보름 만에 마주 앉아 생뚱맞게 반찬투정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 해달라는 게 많아졌다. 마중 나와라, 전화해라, 문자해라 하나같이 시시한, 부탁이랄 것도 없는 거긴 하다. 자성은 괜히 부루퉁 시금치국을 푼다.

 

"이제 오야 티 좀 내려나 보네."

"느가 그러라메."

"언제부터 말 들었다고."

"옴마야. 누가 들음 진짠 줄 알겄다. 나가 느 말 안 들은 것이 뭐시가 있냐."

 

자성은 곧바로 하와이안을 가리킨다. 청은 어깨를 으쓱인다.

 

"이거슨 으짤 수 읍는 것이고잉."

"손이 없어, 옷이 없어. 어쩔 수 없긴."

"그람 나가 명색이 오얀디 느처럼 바둑알 꼴 나야 시원컸냐?"

"밥이나 먹어요. 배고파 뒤지겠담서."

 

씨벌롬 말뽄새 허고는. 청은 입술을 쭉 내밀며 숟가락을 들다, 만다.

 

"미역구욱..."

 

자못 침통하기까지 하다. 자성은 고개를 내젓는다. 이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애 같아졌지.

 

"아 그냥 좀 드셔. 난데없이 미역국 타령은. 애 가졌소?"

"와. 하나 나 줄라고?"

 

..말을 말자. 자성은 그냥 숟가락을 든다. 청은 철퍼덕 누워 길게 한숨을 뱉는다. 본격적으로 꼬장 부릴 폼이다.

 

"에효~ 드러분 놈의 시상. 좆 빠지게 일하믄 뭐한다냐. 생일국 하나 못 얻어 묵고, 니미."

 

그래, 굶어라 굶어. 내가 무슨 상관이냐 모른 척 하려던 자성은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진다.

 

"생일?"

"뭘 그라고 놀라냐? 나 신경 쓰덜 말고 어여 묵어?“

".....진짜.. 요?"

"민증 까보까?“

"......"

 

‘누군 없는 생일 혼자만 있소? 먹기 싫음 말아요.‘ 랄 줄 안 건 아니지만 자성은 생각보다 더 당황한 눈치다. 축 쳐진 눈꼬리가 보기 좋게 흔들린다. 아무튼 보믄 볼수록 재미지다니께. 청은 머리를 괴고 자성을 올려다 본다. 불그레한 낯이 서운한 것치고는 너무 실실대고 있다.

 

"미안허지?"

"......“

“안 미안허냐?”

“......있어 봐요."

"으디 갈라고?"

"미역국. 인스턴트라도 괜찮겠소?"

"싫은디?"

 

어정쩡 일어난 자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곤란할 때의 버릇이다. 청은 여유롭게 담배를 물며 일어나 자성을 끌어 앉힌다. 자성은 여직 곤란한 얼굴이다.

 

"...그럼 케이크라"

"우엑. 그 느글거리는 거슬 나 목에다가 쳐 넣겄다고? 돼았고 라이터나 꺼내봐야."

 

자성은 별 말 없이 퍼런 라이터를 꺼낸다. 그런데 담뱃불이 붙기도 전에 청이 훅 꺼트린다. 진짜 심술 났나.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발랄한데. 자성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건너본다.

 

"뭐요?"

"초 끈 거여. 이자 박수 쳐라."

 

...풉. 어여 치라며 눈을 부릅뜨는 청에 자성은 그만 웃음이 터진다. 아무튼 웃기는 건 선수라니까. 옛다 짝짝짝 박수를 쳐주자 좋다고 웃는 게 영락없는 일곱 살이다. 욕심이라곤 구멍가게 과자가 전부인 일곱 살.

 

"아따 씨벌. 노래를 빠뜨러부렀네."

"대충 하고 일어나요. 애들 모아 한 잔 합시다."

"그건 그거고 잠깐 있어봐야."

"미리 말하는데 노래는 안 부를 거요."

 

기대도 안 헌다, 씨불럼아. 킬킬거리며 주머니를 뒤적거린 청의 손에 검은색 바탕에 금색 테를 두른 지포 라이터가 딸려 나온다. 언뜻 봐도 급이 다르다.

 

"으뜨냐?"

"중국서 받았소?"

"맘에 드냐?"

"형 건데 내 맘에 들어 뭐해."

"와. 별루여?"

"뭐... 괜찮네."

 

되게 비싸 보이는데. ...내 통장에 얼마가 있더라. 자성이 잔고를 더듬거릴 때였다. 지포 라이터가 턱 쥐어 쥔다. 빤히 보자 같이 빤하다. 이걸로 붙여 달라는 건가? ..암튼. 자성은 푸스스 웃으며 라이터를 연다.

 

"자랑 한 번 뻑쩍지근하네. 자요."

“.......”

“아, 알았어요, 알았어. 다음 생일에는”

"으이고~ 우리 부라더 으째야 쓰까이. 눈치가 홍어 좆만큼도 읍어부러."

"? 또 무슨 시비를"

"쯧쯧. 안 되겄다. 느는 걍 내 옆에서 쭉 지내야 겄어요. 딴 데 가믄 굶어죽기 십상잉께."

"....?? 뭐라는"

"거 니 꺼라고, 빙시나."

 

자성은 벙하기만 하다. 청은 500원짜리 분홍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다 픽 웃는다.

 

"시키. 난중에 집이라도 한 채 사주믄 아주 기절하겄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다른 사람이 준 걸 이러고 주면"

"아이고 착하셔라~ 나가 산 거니께 걱정 붙들어 매고 쓰셔요이?"

".....왜....."

"무슨 조서작성 허세요? 왜는 자꾸 니미.“

“.......”

 

자성이 너무 벙하니 청도 슬쩍 머쓱해진다. 청은 괜히 옆에 있는 개 꼬리를 잡아당긴다.

 

“나 생일잉께 나 소원대로 하는 거여. 조또 안 어울리는 고놈의 퍼런 라이터 좆 같응께 구렁거리지 말고 넣어둬라. 비싸지도 않응께."

 

상해에서 라이터를 보는 순간 자성이 떠올랐다. 저가 없는 동안 혼자 여수에서 쌔가 빠지면서도 힘들단 말 한 마디 없는 모지리. 싸구려 라이터로 싸구려 담배나 뻑뻑대고 있을 멍청한 새끼. 낯간지럽게 생일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뭐 하나 받아먹을 것 같지도 않은, 여전히 안 어울리고 앞으로도 쭉 어울리지 않을 희멀건한 낯짝. 어울리는 물건 하나쯤은 달아주고 싶었다. 보상 혹은....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부라더. 느는 갓난쟁이 때도 조또 얌전했을 것 같어. 왜 그런 아들 있잖냐. 배고파도 빽빽대덜 않고 줄 때까정 쫄쫄 굶는. ...느랑 나랑 3년이 넘어가는디 느가 뭘 해달라는 꼴을 못 봤응께. 대가리 꿰찰 때도 한 자리 달라긴 커녕 나가 서열 몇이나 된다요 묻지도 안 혔제.“

"......."

"느... 기억나냐. 나가 그렸지. 따땃하게 해주겄다고.“

 

기억한다. 눅진한 비 냄새. 같이 가자던 든든한 목소리. 어쩌나 어쩌나 아득하던 감정. 자성은 라이터를 움켜쥔다.

 

“나는 말이다. 계속 이럴 거여. 날이 을매나 많냐. 나 생일도 있고 느 생일도 있고 추석도 있고 설날도 있고 광복절도 있고 제헌절도 있고 또.. 아무튼 허벌 많응께 그때마다 쨍쨍대덜 말어이? 느가 쨍쨍대면 나가 아주 귓구녕이 아파부러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언제부터 따뜻했더라. 이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더라. 언제부터 숨기지 않고, 있는 대로 아낌없이... ....안 돼. 안 된다구. 자성은 고개를 숙인다. 진땀이 배어나온다.

 

"나는 이자부터 가져야 되는 건 되도록 가질 거다. 가장잉께 식구덜 굶기진 말어야제. 그란디 그라고도 남는 것이 있으믄 그건 다 니 꺼여. 내 건 다 니 것이나 마찬가진께 ...내 말 알긋냐. 이 씨벌롬아.“

 

'아따 근디 말하다 보니 나 조낸 멋지다! 그쟈?' 이를 드러내고 헤실거릴 얼굴이 보지 않아도 보인다. 욕심 없는 일곱 살 같은 불그레한... 자성은 벌떡 일어난다. 어디 가냐는 청에게 ‘미역 사러.’ 겨우 한 마디 하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왔다. 걷다가 뛰다가 숨이 턱에 찰쯤에야 멈춰 선다. 시퍼런 바다. 물을 머금은 바람. 허름하고 낡은 거리. 정청. ...정청... 자성은 라이터를 쥔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친다.

숨이 막혔다. 정말 숨이 막혔다.

 

 

78.

자성은 청이 준 지포 라이터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청도 별 말이 없었다. 대신 상해에 다녀올 때마다 뭘 하나씩 들고 왔다. 장갑일 때도, 목도리 일 때도, 양말일 때도 있었다. 서랍 속에 넣어둔 청의 선물이 하나 하나 늘어갈 때마다 자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넌 경찰이야.’ 강형철의 한 마디를 오래도록 곱씹었다. 그마저도 소용이 없을 땐 칼을 휘둘렀다. 다행이도 전남 지역 조직들은 세가 커진 북대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79.

시월이 지나 청은 잠시 상해 행을 멈췄다. 저에게 알리지 않고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던 자성의 어깨에 긴 칼 자국이 생겼기 때문이다. 청은 상흔을 훑으며 담배 한 갑을 비웠다.

 

"....씨벌새끼들..."

 

황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80.

여 부둣간디.

전화 한 통에 헐레벌떡 달려 왔다. 방파제에 쭈그려 앉은 등을 보자마자 욕지기가 치밀었다. 말없이 사라져 삼 일이나 연락두절이었다. 갑자기 커진 세에 여수뿐 아니라 다른 지역 조직과도 험악하던 때다. 여수바닥을 이 잡듯 뒤지다 못해 강형철까지 찾아갔었다. 어느 조직이에요. 아니면 팀장님이에요? 팀장님이 시켰냐구요!!! 강형철에게 정신없이 악다구니를 쳤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드럼통에 담긴 청이 어른거렸다. 배가 갈려 전봇대 밑에 널부러져 있기도 했다. 모두 맨발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삼일밤낮을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그러니 멀쩡하게 담배나 피고 있는 청에 속이 안 뒤집어지겠는가. 형님이고 뭐고 어디 하나 분질러놓겠다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얼레? 지랄 안 허네?" 

 

후려치긴 커녕 그대로 굳어버렸다. 손에 뭘 쥐었는지 잘그락 잘그락. 또 저 빌어먹을 맨발. 검은 양복. 팔에 두 줄짜리 삼베 완장. 

 

"별 일 없었제? 그럴 거여~ 우리 부라더가 누군디. 안 그냐?"

"...무슨 일이에요."

"뭐시. 아. 요거?"

 

완장을 떼 내 장난스럽게 흔드는 청은 그새 말라 있었다. 투박한 손가락 끝으로 담뱃재가 바스라진다.

 

"뒤졌다."

"....."

"내 어메 말이여." 

 

 바다로 날아간 완장을 자성은 망연자실 들여다 본다.

 

"며칠 전에 으째 알고 전화를 했드라. 상판 한 번 비달라기에 존내 구린 면상 뭐단다고 그르나 가봤드니 벌써 뒤졌드라고. 우덜 방보다 쬐깐한 데 누버있는디 씨부럴 그 이삐던 낯짝도 배러브렀어. 발도 상처가 자그르 허고. 그라서 노잣돈 대신 안 챙겨줬냐."

 

허공에서 까닥이는 맨발이 바다만치 퍼렇다. 병 좀 고쳐볼라 했드니 영 도와주덜 안 헌다, 씨빡. 실실대며 먼 바다를 바라보는 청의 등이 오늘따라 굽어보였다. 자성은 가만히 청의 옆에 앉는다.    

  

"...손에 건 뭐요."

"으이. 유산. 쥐고 있걸래 받아왔다. 이걸로 전활 혔나벼. 씨부럴 지금이 어느 시댄디 공중전화질이여. 그쟈?"

 

손바닥에 놓인 동전은 10원, 50원, 100원, 10원, 어림 세어도 천 원이 채 안 돼 보였다. 그걸 동앗줄처럼 쥐고 천 번을 망설였을 여자. 자성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신을 벗는다. 

 

"신어요. 춥소."

 

답이 없는 청을 더 채근하지 않고 담배를 무는데 거친 손이 불쑥 채 간다. 길게 그늘진 낯이 꼭 딴사람 같았다.  

 

"거 돗대요."

"......" 

"...담배 사와요?"

"니는 이자부터 금연이여."

 

...금연. 아주 오래 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형 말 들어 빙시나. 깡패새끼가 폐암으로 뒤지면 을매나 웃기겄냐."

"..사돈남말은."

"느랑 나랑 사돈되믄 쪼까 복잡해지는디. 서열이 꼬여버려야."

"...있어요. 신발 신고."

 

자성은 목울음을 삼키며 일어난다. 맨발이 금세 차가워졌다. 저의 그날처럼. 청의 그날처럼. 하지만 되돌릴 수도, 없던 일로 칠 수도 없다. 청의 엄마도, 제 할머니도, 처음부터 청을 배신한 것도, 이제와 이토록 피가 마르는 것도.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멀었다. 

 

"...자성아."

 

돌아가는데, 덤덤한 목소리가 등을 때린다. 저절로 발이 멈췄다. 정신 차려, 이자성. 강형철의 당부를 되뇌이며 자성은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래 살어라."

"......" 

" ...오래 살어야."

 

형도요. 형님도요.

그렇게 말해줄 수가 없어서 동이 뜰 때까지 애꿎은 입술만 악물었던 그 날.

수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를 쯤 자성은 담배를 끊었다.

 

 

2007년 11월

자성아.

오래 살어라.

...오래 살어야.

  

 

81.

정청의 짧은 부재가 가져온 변화는 결코 작다할 수 없었다.

이자성은 담배를 끊었고, 강형철은 기어이 이자성에 대한 의심을 수면 위로 떠올렸으며, 또 한 명의 젊은 목숨이 진창에 발을 들였다.   

 

 

82.

여수를 접수하고 전남의 몇몇 조직까지 휩쓴 북대문은 제법 유명해졌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까까머리들이 밀려들었다. 더러는 소문과는 영 다른 북대문에 지레 실망해 돌아갔고, 더러는 자성의 캐물음, 왜 왔냐, 어떻게 왔냐, 언제부터 이 바닥에 있었냐 등등에 질려 떨어져 나갔다. 고작 다섯이 남았다. 청은 철제 의자에 구부정 앉아 꾸불꾸불 자라난 머리를 꼬아댔다.

 

"밥은 묵었냐?"

 

빳빳이 긴장하고 있던 다섯 까까머리와 함께 자성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번에 여섯이나 벙찌게 만들어 놓고 청은 유유히 담배를 물었다.

 

"재헌아. 야들 데불고 가서 밥 묵고 대충 이것저것 알려줘라."

 

다섯 까까머리가 꾸물럭 꾸물럭 재헌을 따라 나가고도 자성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뭐야. 개 그거 안 해요?"

 

황갈색 눈동자가 두어 번 껌뻑이더니 비죽이 웃는다.

 

"으이~ 그거? 건 너한테만 하는 거여."

"아니, 왜?"

"그거야 느는 ...그 뭐시냐. 이. 좆같이 생겼응께."

 

자성은 그만 청의 뒤통수를 후려칠 뻔했다.

  

 

83.

제대로 뿔딱지 난 자성 덕에 다섯 까까머리는 다시 청 앞에 섰다. 청의 질문은 주로, 굉장히 쓸데없었다. 네 명의 까까머리는 혹시 여수에 다른 북대문이 있는 게 아닌가 슬슬 의심이 피어올랐지만 이제 와서 안 할라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반쯤은 한심한 기분으로 더듬거리는데 뭐 잘 묵냐는 청에게 맨 끝의 까까머리가 또랑또랑 답했다

 

"콩나물 국 좋아합니다."

 

흐물흐물 웃고 있던 청도, 내가 내 입을 꿰매 버릴라 하는 심정으로 서 있던 자성도 움직임을 멈췄다. 네 개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번져 나가는 까까머리를 두고 청과 자성은 푸스스 마주 웃었다.

 

“콩나물 국... 거 존나게 맛나제이.”

 

어딘지 아련한 목소리였다.

  

 

84.

"봐라. 쟈랑 똑같잖여."

 

하와이안 원숭이를 가리키는 청에 자성의 눈길이 신입을 향한다. 쓰다 달다 말도 못하고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이 뭐, 닮긴 닮았다.

 

"어쭈. 이 씨벌놈이 눈까리에 힘주는 거 보소? 꼬우면 한 대 치든가아~!"

"아, 아닙니다!"

 

화들짝 물러서는 데도 끝까지 낯짝을 들이미는 꼴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나 보다. 자성은 일단, 말리는 시늉은 한다.

 

"애 좀 그만 괴롭혀요."

"스물여덟 처먹은 기 애믄 나는 뭐 자라나는 청소년이것다? 어따 씨벌 세금은 괜히 내부렀고마. 흐미~ 아까분 거."

"말이나 못하면."

"그라믄 우리 북대문이 겁~나게 뻑뻑해 불겄제이. 나라도 이러니께 여가 이리 훈훈하제. 느처럼 쨍쨍대기만 하믄 어디 피곤해서 살겄냐? 어야. 그냐, 안 그냐."

 

동시에 신입을 빤히 보는 청과 자성의 행태에 다른 조직원들은 ‘형님들이 저 자식을 겁나게 이뻐하는고마.’ 흐뭇하게 끄덕이지만. 

 

“야가 주둥이에 공구리를 칫나, 와 대답이 읍냐?”

“공구리라면 얘가 아오. 시멘트, 시멘트.”

 

사정을 알 리 없는 신입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속으로 연신 씨발을 외칠 뿐이다.

청과 자성이 마음에 들어 하는 스물여덟의 신입, 오석무였다.

  

 

85.

"축하한다, 고과장. 이제 존댓말 써야겠네?"

 

내미는 술잔을 쩡 마주친 고영달이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까지나 말어, 새끼야."

 

강형철은 피식 웃으며 잔을 비운다. 고영달도 소주를 털어 넣는다. 승진한 사람치고는 씁쓸한 얼굴이다. 강형철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는다.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 지 알만하다.

 

“...내가 이제 상구 형보다 높네, 씨발..”

 

강형철은 담뱃갑을 기울인다. 두 줄기의 연기가 여섯 번을 피어오르고 고영달은 길게 숨을 뱉었다. 잔을 채워 쭉 들이켜곤 형철의 잔을 채운다. 다시 평소의 고영달이다.

 

본격적으로 사발 풀어야지.”

“그래야지. 한진아파트는.”

“다른 데서도 핏대 세우고 있으니까 살짝만 엮으면 자금 금세 빠질 거야. 새 정권 들어서고 금뱃지들도 조심하는 분위기고, 여기저기 숨통도 막아 놨겠다, 제대로만 대사 치면 큰 문제야 없겠지. 근데. 그 새끼 자신은 있대냐?”

“거야 뭐. 주특기잖아.”

“..살 만 하대?”

“사막 한 가운데 던져놔도 잘 살 놈 아니냐.”

...야아. 그거 처음 봤을 때 진짜 골 때렸는데. 생각 나냐?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형님?‘ 니가 안 된다니까”

“오빠.”

“큭큭. 장국철 그 또라이 새끼... ...오늘따라 졸라게 보고 싶네...”

 

강형철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형님. 난 아무래도 언더커버가 체질인가 봐요. 졸라 딱 맞아.’ 너스레를 떨던 얼굴이 말간 소주 위로 흐릿하게 비쳤다.

  

 

86.

공기가 더워질 무렵. 쳇바퀴 굴러가듯 변함 없는 북대문의 일상에 검은 에쿠스 세 대가 들이닥친다. 여수에서 보기 힘든 고급 승용차에 번지르르한 정장무더기. 북대문 조직원들은 괜히 주눅이 든다. 특히 재킷 안에 베스트까지 갖춰 입은 훤칠한 사내가 창고를 훑어 보 '하, 나, 씨발...' 비소를 머금었을 때는 더더욱. '형님들은 어디 계시지.' 저들끼리 우물쭈물 눈짓만 주고 받는데 다행히 저만치 청과 자성이 보인다. 

중구 쓰레기통에서 막 건져낸 꼬라지들이 주인 만난 개새끼마냥 낑낑거리는 쪽을 돌아본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차다. 다란 백지장은 그나마 -그나마다- 낫다만 불그레한 낯짝은 답이 없다기백만 원을 주고 입어 달라면 주둥이에 호치케스를 박아 버릴 것 같은 하와이안이라니. ..이 노친네가 진짜 노망이 나셨나. 석동출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되짚는 이중구에게 청이 느물 입 고리를 올린다.

 

"여 주차장 아닌디요?"

 

이중구는 말 섞기도 싫다는 듯 뒤에 서 있는 심복 장국철에게 손짓을 한다. 각 잡고 있던 장국철이 자성에게 명함을 내민다.   

 

"골드문 상무이사님이십,"

"어따 이름 겁나 길어부네. 어디까지가 성 인거여요? 골드문 상, 까진가? 일본 분이여?"

 

명함을 홱 채간 청의 너스레에 북대문에게서 큭, 풉,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고급정장들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장국철도 험악해진다. 

 

"이봐. 말 조심,"

"워메 살벌한 거. 몰라서 묻는디 뭔 눈깔을 그라고 뜬대요. 홍어 좆맹키로 쬐그매 갖고 솔찬히 땡길 것인디. 안 아프요?"

"이런 씨발 새!"

 

처얼썩! 파도치는 것마냥 장국철의 얼굴이 돌아간다. 큰 덩치가 휘청일 정도의 타격에 웃던 입들이 쏙 들어간다. 이중구의 눈썹이 꿈틀대고 청도 잠시 벙하다. 청이 아닌 자성의 짓이다.

 

"남의 집 앞마당에서 욕지거리 하면 맞는다고 그 집에선 안 가르치나 본데, 애들 교육 단단히 하셔야겠소."

 

자성은 썰어버릴 듯 돌아보는 장국철을 비껴 이중구와 눈을 맞춘다. 한참 노려보던 이중구는 피식 웃더니 장국철을, 이번에는 제가 후려친다.

 

"내가 이런 새끼한테 이딴 소리나 들어야겠냐, 이 개새끼야?"

 

바로 서기도 전에 배를 걷어차이고 나동그라지는 장국철은 본 체 만체, 이중구는 자성 앞으로 불쑥 다가선다. 입만 웃고 있다.

 

"촌구석에서 깃발 좀 날린다고 위세가 대단하신데 입조심은 하셔야지. 되도 않는 시건방 떨다가 허접한 깃발 날리면 밤잠이나 제대로 주무시겠어? 이 속이 졸라게 쓰리실 텐데 말이야. 내가 초면에 영 걱정스럽네."

 

자성의 가슴팍을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밀려던 이중구의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이중구는 제 손목을 꽉 붙든 웃긴 낯짝에 눈살을 찌푸린다.

 

"뭐냐?"

"아 나도 걱정이 돼서 이라는 거여요. 보아 허니 오른손잽이 같은디 이 손모가지 날라가믄 평생 왼짝으로다 밥 잡수느라 을매나 고생하시겄소이."

 

공기가 쩡 얼어붙는다. 정장들과 북대문이 제 오야를 주시하는 와중 이중구는 그제야 정청을 똑바로 본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지 이십 년. 허센지 아닌지는 눈 감고도 구별한다. 허접한 새끼. 눈빛 하나는 형형하네. 이중구는 청의 손을 뿌리치고 자성을 향해 핏 웃는다        

 

"우리 북대문 오야께서 개새끼 키우는 재주 하나는 탁월하시네. 근데 조심하셔야겠어. 물어 뜯기지 않을려면." 

 

청과 자성은 물론 북대문도 일순간 조용해진다. 이중구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건 청이 뭐 마려운 얼굴로 수선을 떨 때였다.

 

"부라더. 느 을른 사과드려야. 눈까리도 안 비는 사람헌티 그라고 차게 굴믄 으쩌냐. 아무튼 시끼가 오지게 까슬해부러. 아따 괜찮다요? 이라고 볕 쏘고 댕겨도 되는 것이어라? 꺼먼 안경이라도 쓰시지 쯧쯧.. 어야! 재헌아! 느 뭣하고 서 있냐! 드가서 우산이라도 가져와야!" 

 

풍선 터지듯 와르르 웃음이 쏟아진다. 이중구는 그늘을 만들어 준답시고 이마에 드리운 솥뚜껑 같은 손을 내치지도 못한 채 벙 자성을 쳐다봤다. 

 

"이쪽..풉, 이쪽이 북대문 오야시오."

 

씰룩거리는 입가를 보며 이중구는 생각했다. 좆 됐다, 씨발.

  

 

87.

요란한 하루 끝에 청과 자성은 나란히 방파제에 앉았다. 청은 담배를 물다 한 번, 라이터를 켜다 또 한 번 낄낄거린다.

 

"씨벌새끼 존나게 웃기고마이. 완전 애새끼여. 안 그냐?"

 

자성은 묵묵히 바다만 본다. 노을이 지고 있다. 삐이-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린다. 

 

"부라더. 느는 으뜨냐."

"...뭐가요."

"서울 말이여."

"......"

"요새들 여기고 저기고 합쳐서 몸땡이 불린다니께. 부산 있는 아들도 겁내 커졌드마. 그거 생각하믄 우덜도 그래야 되나 싶기는 헌디.. 골드문이라.."

 

청답지 않게 말끝이 흐리다. 자성은 듣는지 마는지 조용하다청의 말이 이어진다.

 

"오늘 그 새끼 보믄 올라 가도 자리 잡기 쉽지 않을 것이고. ...감이 영 좋덜 안 혀. 그라고 큰 디서 먼저 온 것도 그릏. 안 그냐."

"...만날 혼자 정하면서 뭘 새삼 물어. 알아서 하쇼."

"하여간에 까슬한 시끼."

 

청은 힐끗 자성을 돌아본다. 딱히 답을 구하려던 건 아니다. 어차피 결정은 제 몫이다. 다만. 하나가 무거워지니 다른 것도 무게가 느껴진다. 언제 떠나도 상관없을 때와는 다르다. 생각이 많아진다. 청은 담배를 비벼 끄며 일어난다

 

"드가자. 비오겄다."

 

뭔 생각에 빠졌는지 꿈쩍도 없다. 청은 채근하지 않고 담배만 하나 더 문다. 바다로 번지는 노을이 피처럼 붉다. 

 

"....형."

"와."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갑시다."

 

붉은 해가 얹어졌는데도 더 허예 보이는 좆같은 낯짝이었다.

  

 

88.

9월 중순. 3개월에 걸친 골드문의 구애에도 정청은 움직임이 없다. 오히려 귀찮아 뒤지겄다며 상해로 날아갔다. 이쯤 되니 속이 타는 건 골드문보다 이쪽이다. 고영달은 냉수를 벌컥댄다.

 

"뭔 사내새끼가 이렇게 야망이 없냐. 이러다 이거 나가리 되는 거 아니야?"

 

강형철은 턱을 괴고 테이블에 놓인 서류만 들여다 본다. 한진 아파트는 천호 쪽으로 넘어가 골드문의 상승세는 주춤하다. 그러나 한가칠 때가 아닌 건 누구보다 강형철이 잘 안다. 석동출. 더 가면 북대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거다. 저들을 내친 조직을 곱게 살려둘 치들 절대 아니다. 그딴 것도 자존심이라고 오죽 드세 셔야지. 그렇게 북대문이 먹히면 골드문은 자금줄이 다시 뚫리고, 서울과 전남 사이에 낀 장수기 2진은 밟힐 테고, 새 정권 반년도 넘었겠다 배때지 얇아진 금뱃지들과 골드문의 회합은 불 보듯 뻔하고, 석동출 개새끼는 승승장구하고... 씨발. 회장입네 고상 떠는 낯짝을 떠올리며 강형철은 담배를 문다.

 

"...영달아. 너 정청이를 어떻게 생각하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정도가 있지만, 고영달이 아는 강형철은 이런 때 헛소리하는 인간이 아니다. 

 

"깡패새끼만 아니면 아우 삼고 싶지."

"그리고."  

"그리고? 떡 잘 치고 욕 잘 하고 지 수하들 칼 같이 챙기고 잘 처 먹고 잘 자고 옷 꼬라지 웃기고,"

"인간적."

 

장광설을 가르고 들어온 강형철은 여전히 테이블을 향한 채다. 고영달은 미간을 찌그린다.

 

"그게 뭐."

"....사람이 말이야. 그러고 이성적인 동물이 사실 아니거든. 칼 같은 새끼들일수록 말도 안 될 때가 많아."

"그래서?"

 

강형철은 입을 다문다. 고영달의 짜증대로 너만 잘나서가 아니라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가 없었다. 못할 짓. 인간의 탈을 쓰고 해서는 안 되는 짓.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은 더더욱 그런 개 같은 짓거리가 될 것이므로.

  

 

89. 

"여어. 자식. 튼실하네."

 

소변기에 나란히 서서 감탄사를 뱉는 강형철. 그러고 보니 청과 닮은 구석이 있다. 이렇게 지랄 맞게 능글맞은 거 말이다. 자성은 입술을 깨물며 지퍼를 올렸다. 정안휴게소 화장실 11시. 아침 9시 문자였다. 저녁인 줄 알았다고 뻥칠까 하다 방을 나섰다. 상명하복. 깡패 이자성과 경찰 이자성의 유일한 접점이다.

 

"뭡니까, 갑자기."

"리튼호텔 알지. 로비에서 커피 좀 마셔라. 5시에서 6시. 차는 지하 3층에 대고. 찻값이다."

 

아닌 밤중 홍두깨도 유분수지만 하루 이틀이 아닌 지라. 한숨을 삼키며 봉투를 받았다.

 

"얼마 더 넣었다."

"기름 값입니까?"

"정청이가 월급 안 주냐?"

 

싸늘해지는 낯빛에 형철은 영 입이 쓰다. 지난겨울 정청 어디 있냐며 미친놈처럼 들이댈 때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이전부터 심상치 않았다. 인간적으로야 이해한다. 근 3년을 24시간 붙어 지내면서 계속 데면데면하기가 어디 쉽겠나. 하지만 어쩌나. 깡패는 깡패고 경찰은 경찰이고 일은 일인데. 특히 이 일은 '인간적인 '척'이면 몰라도 진짜 '인간적'인 순간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인마. 하는 대신 형철은 담배를 물었다. 

 

"정청은 상해 갔으니까 괜찮을 거고. 밑에 애들한테 대충 둘러대. 친구나 애인이나 뭐 많잖아. 자."

 

짜바리 짓하러 간다는 건 어때요 라는 말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형철이 화장실 마지막 칸에서 쇼핑백을 들고 나온다. ..까라면 까야지, 시발.

 

"...전해주면 되죠."

"뭔지나 보고 말해라."

 

쇼핑백을 여니 빨간색 스테인리스 보온병이 들어있다. 

 

"...폭탄입니까?"

"야. 이자성이. 너 영화 너무 쳐 본 거 아니냐?"

 

그래도 자성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눈치다. 형철은 고갤 저으며 벽에 기댔다.

 

"미역국이야. 뭐, 맛은 폭탄일지도 모르겠다만.“

“...네?”

"가면서 먹어. 넉넉히 넣었으니까 옷도 한 벌 사고. 꼴이 그게 뭐냐?"

".....그게 무슨..."

"너 오늘 생일이잖아. 10월 15일."

 

못돼 처먹었으면서 꼭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사골이 뼈 붙는데는 와따야 라든가, 할머니 제사는 지내야지 라든가, 양복보다 제복이 더 잘 어울린다 라든가. 형철은 축 처지는 눈 고리를 바라보다 휘휘 손을 젓는다.

 

"가라. 늦겠다."

"...미역국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사내자식이 가리긴. 가 인마."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건지, 좆같다는 건지 무뚝뚝하게 웅얼거리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형철은 필터를 잘근거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고마우면 잘 해. 미역국 값 잊지 말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등이 까슬하게 말라 있어, 형철은 그 자리에 선 채 담배 반 갑을 비웠다.

   

**

     

6시 땡 치자마자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죽는 줄 알았다. 차라리 정청 폭풍수다가 백배는 낫겠다. 경찰도, 정보원도 아닌 그냥 여자였다. 술집여자도, 몸 파는 여자도 아닌 정말 그냥 여자. '한주경이에요.' 커다란 눈동자도, 무릎 위에 놓인 손도, 어깨 근처에서 찰랑이는 생머리도 조신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여긴 왜.. 겨우 한 마디를 묻자, 어떤 분이 부탁하셔서요. 가느다랗게 답했다. ..어디 그런 여자한테.. 신고하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아무튼 그게 다였다. 정말 차만 마셨다. 대체 뭐지, 오늘. ...설마 생일 챙겨준 건가. 자성이 괜한 뒷머리만 만지작거릴 때였다.

주차장 입구에서 한 무더기의 양복 부대가 들이닥친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중년의 남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

골드문 석동출.

그 옆은 오른팔 이중구.

스카우트 건으로 몇 번 여수에 왔었다. ...우연일 리가 없다. 생각하자마자 답처럼 검은 승용차들이 몰려든다. 같은 양복 패거리지만 딱 봐도 같은 편이 아니다. 주차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이중구가 석동출 앞을 막아서지만 봐 줄만한 실력이 아깝게 너무 열세다. 점점 코너로 몰리는 사이, 석동출 뒤로 슬금슬금 다가서는 까까머리가 보였다. 손에 회칼을 들고 바들바들 떨며. ....하. 자성은 짧게 웃고 만다.

 미역국 값 한 번 더럽게 비싸다. 씨발.

 

**

 

청은 상해에서 석동출의 전화를 받자마자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탔다. 8차선 도로를 휘저으며 서울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친구 만난다던 놈이 왜 병원에 있는지, 그 소식을 왜 석동출이 전하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자성은 만신창이였다. 타박상, 찰과상은 애교로 자상만 수십 개, 가장 치명적이었던 건 복부라고 한다. 내장이 찢겨서 수술만 열 몇 시간이 걸렸다고... 오지랖 떨지 말라고 지랄 해싸던 놈이 왜 남의 집안일에 껴서 이 사단인지. 청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석동출 뒤로 팔과 목에 깁스를 한 이중구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여요?"

"나도 도움을 받은 처지라."

"그러니께 야가 우연~히 여그 와서 우연~히 영감님을 구하다가 우연~히 뒤질 뻔 혔다? 허. 거 참 존내게 재미지네요이."

"이 짱깨새끼가!!"

 

눈을 부라리는 이중구를 저지하며 석동출이 빙긋 웃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믿기 힘들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어쩌나. 그게 사실인 걸."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여.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청은 동전을 잘그락대기 시작한다.

 

"암튼 허벌 고맙소이. 우리 아를 이라고 비싼데 누봐주고. 아. 방값은 어디로 붙여주까요? 재헌아. 이런 덴 하루에 을매나 허냐?"

"좋은 수족을 뒀더군. 칼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이삐게 봐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겄네요. 깨나면 전해주께요."

"이름이.. 이자성이라고."

 

스치듯 굳는 낯에 석동출은 슬며시 속웃음을 문다. 확실하군. 여수 들개의 약점.

 

"이 참에 나한테 주는 건 어떤가. 한 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데."

"....영감님 뒤에 있는 아나 더 키우시지 그려요. 조또 질풍노도던디."

 

정청 말대로 폭발 직전입네 드러내고 있는 중구를 돌아본 석동출이 얕게 혀를 찬다. 이런 작은 도발에 넘어가서야 어디. 게다가 이런 정청을 앞에 두고 말이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사내. 적진 한 복판에서 저 정도 배짱이라면 둘 중 하나다. 포섭하지 못하며 죽여야 한다. 여수바닥에서 끝날 그릇이 아니다. 석동출은 짐짓 뒷짐을 졌다.

 

"우리 애가 실례 했다면 사과하지."

"회장님!"

"어허."

 "......"

"이자성이 안 되겠나. 내 값은 후하게 쳐줌세."

 

자성을 걸고넘어지는 속내야 빤하다. 대가리만큼 눈치도 조또 좋은 거다. 거 참 피곤하게. 청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인다.

 

"영감님 말씀 좀 가려 하셔야 쓰겄네요. 무신 도떼기시장서 약 파는 것도 아이고 멀쩡한 남의 동상 놓고 뭔 말을 그리 험하게 하신데요."

"얼마면 되겠나. 일 억? 이 억?"

 

금쪽같은 작은 형님 소식에 부랴부랴 달려온 북대문 어깨들도 점점 험악해진다. 저 노친네가 가을에 더위를 잡쉈나. 왜 작은형님 가지고 지랄이야. 씩씩대는 숨들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듯하다. 하지만 북대문은 정청이 뼛속까지 박힌 집단이었다. 청이 가만 있는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다. 느긋한 석동출을 한참 마주보던 청은 씨익 입고리를 올렸다. 석동출의 예상대로 이자성은 청의 유일한 약점이었지만 그래도 정청은 정청이었다.

 

"영감님 목숨 값은 을만디요."

 

재헌을 비롯한 북대문과 중구를 위시한 재범파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청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줄라믄 그만큼은 주셔야겄는디요. 아니. 배는 받아야겄제, 재헌아? 우리 부라더가 영감님보다야 팔팔하잖여."

"물론입니다, 형님."

"어째. 주판 한 번 굴려 보시겄어요?"

"......."

"아. 근디 요새 주머니 사정이 솔찬히 쪼들린담서. 괜찮겄소?"

"이 씨발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워따. 그 짝은 형님들 말씀 하시는디 막 껴들고 그려도 되는가 봐요. 쯧쯧. 영감님 걱정이 깊~겄소."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그라지 말고 자를 나한테 보내요오. 나가 홍어만치로다가 팍 삭혀서 보내줄라니께. 돈도 안 받으께요. 우리 부라더를 수술까정 시켜주셨는디 공짜, 프리로다가. 어야, 썩무? 프리 맞제?"

"맞습니다, 형님."

"아따 요새 잉글리시가 막 늘어버려야. 우리도 뭐시냐 북대문 말고 노쓰도어 이래 불까? 어떠냐 야그들아!"

"훌륭하십니다, 큰형님!"

 

일사불란한 박수소리에 이중구는 뒷목 잡고 쓰러질 판이다. 촌구석 짱깨새끼들이 이덧 겁대가리 없이 이빨을 까고 지랄인지. 무식하면 용감해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중구가 빠드득 이를 갈며 허리춤의 칼로 막 손을 뻗을 때였다. 

 

"하하하하!!!"

 

이 와중에 너털웃음이라니. 설마 노망? 이면 에브리바디 해피하겠지만, 청은 골이 아파왔다. 석동출의 눈이 번쩍이고 있다.

 

"정말 재미난 친구로군. 소문이 너무 작았어. 자네는."

"......."

"내 잘 알겠네. 환자도 계시니 그만 가지. 이따 저녁이나 같이 들면서 애기 더 나누자고."

"...말씀은 고마운디 나가 지금 목구멍으로 뭐슬 넘길 형편이 안 되나서요."

"그럼. 지금 하겠나?"

 

석동출이 자성을 내려다본다. 약한 짐승을 먼저 잡겠다는 거다. 청은 웃음을 거뒀다. 

 

"겁나 비싼 거 사주실라나 본디 나가 촌놈이라 잘 처 묵을라나 모르겄소."

"걱정 말게. 입맛에 딱 차려 줄 테니까."

  

**

  

자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천장. 샛노란 병... 어디지 여기가. 반쯤 일어나던 자성이 옅게 신음하며 다시 꼬꾸라진다. 배를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아프냐."

"...으으..." 

"그려. 아퍼야재. 배때지를 그라고 쑤셔박혔는디 안 아프면 인간도 아니재."

 

겨우 고갤 들자 파마머리가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근데 까까머리 아니었나...

 

"...여기 여수 아니에요?"

"...환장하겄네. 지옥 아가리다, 이 씨벌놈아."

 

눈을 까뒤집고 패더니 결국 그렇게 됐구나.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는데. 안 아픈 건 그래선가. 근데 왜 배는 아프지. ...뭐 아무렴 어때. 이제 그 끝 간 데 없는 줄타기는 안 해도 되는데. 믿어서 상처 받을 일도, 상처 줄 일도, 의지와 상관없는 마음에 괴로울 일도 없는데. 자성은 편안히 눈을 감고 바로 누웠다. 그 덕에 청만 죽을 맛이다. 보아하니 정말 죽은 줄 아는 모양인데. 귀 빠진 날 칼이나 맞는 병신을 팰 수도 없고. 색색 잦아드는 숨소리가 천불을 지펴 청은 그만 병실을 나섰다. 비상계단에 나가 담배를 무니 속이 좀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아까 레스토랑에선 그렇게 쓰더니. 담배도 낯을 가리나 보다.   

석동출의 제안은 명확했다. 자기 밑으로 들어올 것. 파격적으로 서열 3위 시켜 준단다. 그 미친 또라이 새끼보다 위다. 하지만 거절할 시 이유 불문하고 지금 바로 전쟁. 이자성이를 죽여 볼테면 죽여 봐라 그거겄재. 씨벌 새끼..  

자그마한 창 아래 펼쳐진 서울을 내려다보며 청은 동전을 쥐었다. 여수보다 퍼렇고 차가운 새벽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북대문은 골드문에 합류했다.

 

 

2008년 10월 17일

북대문은 골드문에 합류했다.

 

 

91.

병실에 누운 보름 동안 자성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이 서울행을 말한 뒤였다.

  

 

92.

“됐다, 이제.”

 

소파에 기대 후련해하는 고영달과 달리 강형철은 한숨을 물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장국철은 제대로 썰을 풀었고 이자성은 석동출을 구했으며 석동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북대문이 서울에 온다. ...그러나 정청. 정청... 이자성만을 위해 움직였을 리는 없지만 북대문 오야, 이번 골드문 합류결정. 이자성이 도화선인 것만은 확실하다. ...정청과 이자성. 강형철은 담배를 문다. 썼다. 오석무에게 이자성을 확실히 마킹하라고 다시 한 번 일러 둬야겠다는 생각만큼이나 씁쓸했다.

  

 

93.

북대문 대부분은 청의 결정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일부는 아내나 자식이나 노모나 하는 이유로 여수에 남아야 했다. 여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떠나야 하는 쪽도 남아야 하는 쪽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거한 술판이 벌어졌다. 취하기도, 웃기도, 떠들기도 심지어는 울기도 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자성은 여전히 말없이 잔을 비우고 채우고 품안을 뒤적거리다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잔을 비웠다. 새벽 두시가 넘어갈 쯤. 또 무심코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자성은 한숨을 내쉬며 소주잔을 쥐다가 청의 부재를 알았다. 슬그머니 중국집을 나서자 바람이 찼다. 얼마 걷지 않아 방파제에 퍼질러 앉아 있는 하와이안이 보였다. 담배연기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자성은 잠잠히 그 옆에 앉았다. 검푸른 바다를 향해 있는 청의 손에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웬 청승이요, 혼자.”

“겁나 더버서.”

“11월에 덥기는. 갱년기요?”

“이제 별 걸 다 지랄이여, 씨벌롬.”

 

보름만의 대화인데도 어색함이 없다. 자성은 그것이 슬펐다.

 

“가지갈 건 다 챙겼냐.”

“...뭐.”

 

옷 몇 벌. 책 몇 권. 삼 년을 살았는데도 처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추가된 거라곤 청의 하와이안, 청의 애장용 비디오, 청이 준 선물들.. 가방 지퍼를 닫으며 자성은 지금처럼 또 한 번 금연을 후회했다.

 

“개시키는 노친네가 키와 준다드라. 개고기 겁나 좋아하는 양반이라 쪼까 걱정은 되드마. ...뭐. 잡아 묵히믄 고거이 지 팔잔께.”

 

농치고는 먹먹한 투다. 자성도 퉁박이 없다. 둘은 다시 조용해진다. 처얼썩. 저들끼리 부딪치는 파도소리만 가득하다. 청은 서너 개의 담배를 더 태우고 자성을 돌아본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있는 홀쭉한 뺨이 아직도, 어쩌면 더 시리다.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서울 같이 갈 테냐. 싫으면 여 남아라 하고. 하지만 청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돌린다. 묻고 싶지 않았다. 퍼런 심해 아래 경구와 성철이 낄낄거리는 것 같다. 고소하다, 쌤통이다 혹은 이제야 제대로 고생하는구나. ..씨벌롬들. 청은 남은 소주를 병째 바다에 집어던진다. 꿀렁꿀렁 소주병이 손을 흔든다. 다녀오쇼, 잘 다녀오쇼.

  

 

94.

“...뭐가 있다고?”

 

다 큰 사내놈들이 엉엉 울기까지 술을 마셨으니 일찍 일어날 리 만무하다. 밤을 꼴딱 샌 청과 자성만이 밝아진 거리를 어슬렁거릴 때였다. 의원에 개를 두고 온 자성이 청다운 청으로 돌아온 청의 수다를 듣는 둥 마는 둥 넘기고 있는데, 청이 우뚝 멈춰 서 그러는 거다. '아. 나 집에 옷 안 챙겼는디. 잠깐 들려야 쓰겄다.' 내가 다 챙겼다니까. 부루퉁 중얼거리자 청이 씩 웃었다. '느 집 말고 나 집말이여.' 자성은 청을 뚫어져라 보며 벙 입을 벌렸다. 

 

“아따, 놀랄 일도 많고마. 언놈은 하루아침에 배때지도 뚫려 뿌는디 방 좀 있는 거시 뭐시 대단타고 그르냐.”

 

어깨를 통 치고 앞서가는 청에게 그러면 왜 삼 년이나 남의 방에서 뒹굴었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하지만 진짜 어이가 없어진 건 청의 방을 들여다보고 나서였다. 아니.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이그하고 퍼런 것이.. 이. 여 있, 아따 냄시, 씨벌.”

 

자성의 방만한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 이불이라든지 숟가락이라든지 젓가락이라든지 베개라든지 그 좋아하는 티비 그 무엇도. 누가 야반도주라도 한 것 마냥 형형색색의 하와이안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옷을 쑤셔 넣느라 정신없는 청을 멀거니 바라보던 자성은 소리 없이 등을 돌렸다.

좁은 골목에서도 이토록 맑은 하늘 아래. 자성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린 청이 비쳤다. 아니. 어린 청을 두고 얼음길을 내달린 청의 어미란 여자였다. 피와 살을 나눠준 자식을 버리고 도망친, 상처가 자글거리는 발목을 남기고 볼품없는 동전 몇 개만 쥐어주고 떠난 못나고 나약한 천하에 몹쓸 어미. ...아아. 자성은 낮게 신음한다. 처음으로 사람 피를 묻혔던 날보다, 대미산 기슭 모텔 문을 박차던 밤보다, 경구가 제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던 새벽보다 지금 이 순간. 자성은 두려웠다. 이 임무가 진정 두려워졌다.

  

 

95.

여수 터미널에 펼쳐진 진풍경은 말 그대로 진풍경이었다. 낯짝만으로도 이미 깡패인 사내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혹은 대놓고 훌쩍거리는 꼴들이 행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북대문 이산가족들은, 특히 남아야 하는 이들은 점점 더 엉엉 울어댔다. 청이 그 짧은 새 무슨 조치를 어떻게 취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살 길은 보장되어 있었기에 걱정을 떨치고 충분히 슬퍼하기만 하면 됐다.

 

“아따, 씨벌놈들 뒤지러 가냐! 대충 혀라, 대충!”

 

발치에 담배꽁초를 쌓던 청이 급기야 바락 짜증을 내며 그 많은 수하들의 뒤통수를 일일이 후려쳤다. 잘 있으라는, 잘 가자는 인사였다. 자성은 무리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다. 어찌 보면 우스운, 달리 보면 한없이 슬픈 이 광경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담배 살까. 자성은 마른 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저만치 떨어진 반대편 기둥에 누런 점퍼가 비친다. 백발의사였다. 눈인사를 건네자 팍 찌푸리며 뭐라 중얼거리는 모양이 '씨벌 들켰고마.' 대충 이런 뜻인 듯했다. 자성은 아직도 헤어지는 중인 무리를 힐끔이고 의사에게 다가간다. 캉캉! 개도 함께였다. 자성이 개를 안아 들자 찌그러진 담배를 물던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 퉁퉁거린다.   

 

“무신 깡패질을 서울까정 가서 헌다고 지랄인지, 쯧쯧.”

 

아주 뒤질라고 환장을 했고마! 청에게 왈칵 쏟아낸 이후 개를 맡길 때도 눈 한 번 안 맞추더니 맘이 쓰인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형,"

"돼았다. 뭐 좋은 낯짝이라고."

 

자성은 말없이 개를 쓰다듬는다. 까슬한 혓바닥이 좋다고 손등을 핥는다. 축축하고 따뜻하다. 

 

"다친 데는 괘안냐."

"예. 선생님도 봐주셨고.."

"선상은 무신. 저늠아한테는 나 여 왔다고 야그하지 마라. 치매 났다고 떠들어 쌀 게 뻔한께."

 

그러고도 또 한참을 연기만 뱉던 의사가 자성에게 담배를 건넨다. 자성은 잠시 청을 돌아보다 담배를 물었다. 그리웠던 맛이 입 안을 메운다.

 

"...느 자성이라고 혔제."

"...네."

"그려. 이자성이..."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담배를 비벼 끈 의사를 자성은 어쩐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의사는 천천히 자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댕겨와라. ..잘 댕겨와."

 

낑낑대는 개를 끌어안고 터벅터벅 멀어지는 발소리에 자성은 지그시 눈을 감는다. 안녕히 계세요. 잘 지내세요. 죄송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마지막이 더없이 무거웠다.

  

 

96.

"느 담배 폈어야?"

 

버스에 타자마자 킁킁거리는 청을 밀어내며 자성은 눈을 감는다.

 

"도착하면 깨우쇼."

"이 씨벌롬이 끊으라니께 형 말을 아주 홍어좆으로다가, 썩무!"

"예, 형님."

 

바로 앞자리에 앉은 석무가 벌떡 일어난다. 

 

"여 맡아봐라. 담배냄시 나냐, 안 나냐." 

 

0.1초로 반응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자성에게 킁킁대기도 뭣한 석무가 어정쩡 눈치만 살피자 곧바로 발바닥이 날아든다.

 

"이 씨베라메가 멀뚱멀뚱! 안 들려야?! 내 확 들리게 해주!"

"..미안해요."

 

또 시작이네 몸을 웅크리던 석무도, 허벅지를 퍽퍽 걷어차던 청도, 일일드라마 보듯 시큰둥하던 조직원들도 일제히 휘둥그레진다. 물론 제일 놀란 건 청이다. 

 

"...썩무. 느네 작은 형이 시방 뭐란 거냐. 나가 제대로 들은 거시 맞냐?"

"그렇...긴 한 것 같은데.."

 

석무는 말끝을 흐린다. 근 일 년 동안 이런 이자성은 처음 본다. 시끄러워요도 아니고 제발 쫌! 도 아니고 미치겠네도 아니고 미안해요 라니. 아예 옆으로 틀어 앉은 자성의 등이 조용히 오르내린다. 청은 마른 등을 물끄러미 보다 석무를 손짓으로 돌려 세운다. 석무는 자리에 앉아 촉을 세운다. 하지만 '어따, 씨벌, 나가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듣는 고마. 느 그 날이여?' 당연할 청의 너스레도, '미안한 거 취소요, 취소!' 당연히 이어질 자성의 쨍쨍거림도 없다. 묘한 침묵 속에서 간간히 청의 한숨소리만 나지막하다. 석무는 왠지 속이 울렁거렸다.     

  

 

97.

"골드문이 무슨 부랑자 쉼터도 아니고 씨발."

 

으리으리한 골드문 정문에서 맞닥뜨린 이중구의 열렬한 환영인사에도 청은 말이 없다. 북대문은 쏴죽일 듯 노려보는 이중구보다 그런 정청에 더욱 입을 다물었다. 이중구는 핏 입고리를 올린다.

 

"오늘은 왜들 이렇게 풀 죽은 개새끼들이야. 이제야 감들이 오시, 여어, 이자성이. 얼굴이 왜 그러냐? 차멀미 했냐?"

 

친근하게 다가서는 이중구에 자성이 짧게 목례를 건넨다. 중구는 번들거리는 청의 눈동자를 무시한 채 자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관리 잘 하셔야지. 존나게 비싼 몸이신데."

 

단번에 거칠어지는 북대문 사이에서 중구의 손을 거둔 건 또 청이다. 중구는 그제야 청과 눈을 맞춘다.

 

"왜. 또 걱정이 되시나?"

 

청은 비죽 웃어 보이며 중구 뒤에 있는 장국철에게 다가간다.

 

"자가 느 형님이제?"

"..그렇습니다마,"

 

답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돌아간다. 영문도 모른 채 뺨을 얻어 맞은 장국철에게 청의 미소는 다정하기도 했다. 

 

"억울해도 참아라. 원래 우가 잘못허믄 아래가 고생잉께. 그자, 부라더?"

 

자성을 돌아보며 낄낄거린 청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난 중구에게 눈을 돌린다.

 

"느도 영감님이 불러서 온 거 같은디 끝나믄 옷가게나 알려조라. 느 말대로 구색은 맞춰야 헌께. 인자 한 식구 아니냐."

 

씨발. 낮게 뇌까린 중구가 청을 스쳐 간다. 청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배를 물었다. 자성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든다. 높디높은 골드문 건물이 까마득했다.    

           

 

98.

한 시간 후 회의실을 나온 자성은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근래 가장 작은 형님 같긴 한데 북대문은 내심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증은 건물을 나오자마자 풀렸다. 자성은 느릿느릿 걸어오는 청을 노려보다 빽 소리를 질렀다.

 

"개성 있어 뵌다는 게 칭찬 아닌 거 빤히 알면서 옷가방은 풀어헤치고, 옷 팔러 왔소?! 내내 무시하는 치들한테 웃기는 또 왜 그렇게,"

"웃으면 복이 온다니께. 아 그 양반들도 은근 좋아하는 눈치드,"

"박재헌!"

"네, 형님."

"이거 갖다 버려. 그리고 앞으로 큰 형님 하와이안 입으시면 니가 죽어. 알았어?"

 

가방을 떠안은 재헌이 청의 눈치를 살피며 네, 작게 답한다. 씩씩거리며 앞서 가는 자성에 청은 슬쩍 웃음을 삼켰다. 시키. 오지게 썽나 부렀고마. ..이자야 이자성이 같네.

 

"아. 안 오고 뭐하오!"

"알긋어. 간다, 가."

 

성화를 부리는 자성에게 발을 떼며 청은 빠르게 재헌의 귀를 끌어당겼다. 한 두 어 벌은 남겨야.

  

 

99.

"천조가리가 뭐 이라고 비싸다요? 시방 나한티 사기 치는 것이여?"

 

가격표를 들이미는 청에 백화점 여직원만 죽을 맛이다. 하지만 자성의 매서운 눈초리 덕분에 툴툴거림은 짧았다. 청이 절대 취향에 맞을 리 없는 회색 양복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자 자성은 핸드폰을 연다. [6개월. 해외 주재관은 내가 책임지고 보내줄 테니까 잘 하고. 밤에 전화해라.] 반 년. 180일. 너무 길고 너무 짧다.

 

"이런 씨부럴, 죽을 날 받아 분 노친네 꼬라지잖여!"

 

자성은 청을 올려다본다. 양복을 갖춰 입은 청은 딴 사람 같다. 자성은 묵묵히 계산대 앞에 선다.

 

"진짜 살라고? 이거슬?"

"괜찮소."

"아 나가 안 괜찮다는디,"

"괜찮다니까."

 

지 몸뚱이 아니라고 아주 암 거나 입히고 지랄이라며 입이 댓발은 나오더니 옆에 있는 재헌에게 '어야. 근디 진짜 괜찮아 뵈냐?' 작게 속삭인다. 자성은 몰래 바짓단을 쥐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요. 다 괜찮을 거요..  

  

 

100.

청과 북대문이 양복을 갖춰 입은 후에도 이중구를 비롯한 이사진의 뜨악함은 여전했다. 석동출이 직접 뽑아 올렸으니 천하의 이중구도 대놓고 드러낼 순 없었으나 은근한 경계와 무시는 점점 더해만 갔다. 그걸 가장 예민하게 느낀 것은 자성이었다. 서울에서 겪었던 냉대가 새록새록 떠오르며 화교 출신이 새삼 뼈저렸다. 자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청의 옷을 실어 날랐다. 우습지만 무시하지 못할 것이 외향이라는 걸 자성은 지난 세월로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청의 양복이 비싸질수록 몇몇 이사진들은 확실히 부드러워졌다. 자성은 그런 이사들과 제 자신을 동시에 비웃었다.

하지만 청에 대한 내부 시선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청이었다. 청은 지지부진하던 건설사업 자금을 보름 만에 수급했다. 상해에서였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석동출을 보며 이사진들은 불안해졌다. 예감은 적중했다. 청은 두 달 새 두 건의 사업을 더 성사시켰다. 청의 비상한 사업수완에 주먹이 필요할 땐 휘하의 북대문이 칼같이 나섰고, 복잡한 서류나 골치 아픈 접대에는 이자성이 있었다. 해를 넘기고 청은 서열 3위를 확정 지었다. 반대하는 이사들은 거의 없었다. 반대는커녕 앞 다투어 청에게 화환을 보냈다. 이중구의 사무실에서 값비싼 양주병이 무더기로 깨져 나갈 시각, 청은 몇 백을 호가한다는 이파리를 뜯어내며 피식거렸다.

 

"노친네들이 줄 서느라 아주 좆이 빠지시는 고마."

 

자성은 말없이 달력을 들여다봤다. 네 달. 네 달이면 모든 게 끝난다. 자성은 청의 헐거운 타이를 고쳐 매줬다.

 

"배지는 또 어디다 뒀소. 제대로 좀 하고 다니라니까."

"으째 새살이가 갈수록 대박이시다. 느 때문에 사투리도 고쳐 불고 있고마. 마누라도 아이고 작작 좀 하셔요이?"

 

수순대로라면 네 달 후 이자성은 해외 주재관 신분으로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렇듯 사건은 예고 없이 일어났다.

네 달이 두 달로 바뀐 2월이었다.     

 

 

2009년 2월

모든 인생이 그렇듯 사건은 예고 없이 일어난다. 

   

 

101.

4개월의 2/3을 상해에서 보낸 청이 모르는 몇 가지는 이중구가 생각보다 더 꼬여 있다는 것과 이자성의 입이 생각보다 더 무겁다는 것이다.

  

 

102.

열일곱부터 석동출 아래 있었던 이중구에게 정청은 그 이름만으로도 뒷목 당기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국에 무슨 금광이라도 두셨나 가는 족족 자금을 끌어오기까지 하자 이중구의 기분은 날로 바닥을 쳤다. 석동출의 의중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이제껏 골드문의 후계는 당연히 이중구였다. 충성한 세월이 얼만데 같은 고리타분한 얘기를 빼고서라도 석동출과 이중구 사이에는 그런 게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같은 유대감. 웃기지만 사실이어서 중구는 더 속이 꼬였다. 그리고 그 꼬인 속내는 고스란히 북대문에게 돌아갔다.

 

 

103.

대부분이 여수 토박이인 북대문은 눈이 팽팽 돌았다. 서울은 너무 넓고 시끄럽고 살벌했다. 몇몇은 금세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고, 대충 주먹만 쓰면 됐던 여수 시절과 달리 머리와 몸을, 어쩌면 머리를 더 써야 하는 골드문 생활에 한 달 만에 진저리가 난 조직원들도 제법이었다. 하지만 돌아가겠다는 조직원들은 없었다. 간다면 상해에 있는 청도, 같이 있는 자성도 뭐라 하지 않겠지만 뭐 빠지게 고생하는 청과 자성을 두고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쓰리피스를 차려입은 이중구라는 작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자성에게 시비를 걸어올 때면 아주 여기다 뼈를 묻어주마 오기가 생겼다. 물론 그대로 들이박고 싶은 맘이 더 컸지만 자리 잡을 때까지는 문제 일으키지 말자는 자성의 당부가 생생하기도 했거니와, 누구보다 참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성이었다.

상해에 있는 청과의 통화, 그러니까 ‘아무거나 사오지 말라고 좀. 저번에 그것도 짝퉁이었잖아. ..됐소. 그 돈으로 형 안경이나 맞춰요.’ 하는 자성에게 지나가던 중구가 ‘대가리고 시다바리고 교육열이 존나게 대단하시길래 얼마나 딴딴하나 했더니만 개판 오 분 전이네.’ 비죽거린 걸 시작으로, '영업이 탁월하신데 남다른 비법이라도 있나?' '몸뚱이 날려 들어온 회산데 자리보전 잘 하셔야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는 것도 아닌데 옷 작작 사대. 아니다. 살 수 있을 때 사둬. 언제 다시 촌구석으로 굴러 들어갈 지 모르는데 밑천은 챙기셔야지. 거 팔면 꽤 남을 거다. 정청이가 옷 장사에 관심이 많더만.'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뭐라고 빈정거리든 묵묵하던 자성이 마지막 말만에는 표정이 변해 ‘말씀 가려하셔야겠습니다.’ 똑바로 쳐다보자 중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휘둘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에 길게 핏자국이 났다. 반지에 긁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성은 ‘큰 형님께 말하지 마라.’ 입단속만 시킬 뿐이었다. 그 후로도 자성의 뺨에는 종종 반창고가 달렸다. 오랜만에 귀국한 청이 ‘느는 뭔 서류에다가 만날 긁혀 쌌냐. 앞으로 종이고 나발이고 다 하지 말어.’ 급기야 화를 낼 때쯤에는 석무 뿐 아니라 다른 조직원들도 차라리 청에게 다 말해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자성이 다쳤을 때의 청을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청의 서열이 확정된 후에도 시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식이었다. 자성의 서열이 아직 미정이었기에 이중구에게 자성만 한 한강도 없었다고는 하나, 북대문 입장에서야 그야말로 속 터져 돌아가실 나날이었다. 그렇게 청이 모르는 자성의 반창고가 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104.

그 일은 강형철의 계획과도, 이중구의 꼬인 심사와도 상관이 없는 우연이었다.

  

 

105.

봄이라기에는 춥고 겨울이라기엔 따뜻한 2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구는 죽상이었다. 오늘은 정청 때문이 아니라 비 때문이었다. 중구는 정청만큼이나 비가 싫었다. 비는 그 여자를 떠오르게 했다. 서울 통합 당시 자기애를 낳다 죽은 여자. 저에게는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던 미련한 여자가 있는 대로 악을 쓰다 꼬꾸라져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자성 그 새끼랑 닮은 것도 같다. 희멀건하고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팔뚝 반 만했던 핏덩이가 지금 여덟 살이던가가, 아홉 살이던가.. 중구는 계집아이의 흐릿한 얼굴을 되짚어보다 양주병을 들었다. 이럴 때의 이중구는 건드는 법이 아니라 운전할 상훈만 남겨두고 장국철 등의 재범파는 일찍 물러났다. 중구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종일 독한 양주를 서너 병 비웠다.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탈 때쯤에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자성은 지그시 한숨을 물었다. 하필 자성도 혼자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 석무를 억지로 들여보내고 늦게까지 서류를 보다 나온 참이었다. 하나라도 더 해야 한다는 마음이 죄책감인지 부채감인지는 모를 일이나 해도 해도 할 일이 많았다. 차라리 다 보고 나올 걸. 자성은 B2를 눌렀다 B3을 눌렀다 3을 눌렀다 도로 B4를 누르는 중구에게서 조용히 시선을 거둔다. 중구는 웬일로 말이 없다. 술 냄새가 진득한데 취하면 조용해지는 타입인가 보다. 청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데다 어쩌다 취해도 말이 백배는 많아졌다. 그래도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 건 그 바닷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서울 올라온 게 고작 몇 달인데. 여수가 참 멀다.

 

“안 내리냐.”

 

자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B4. 중구의 시선이 삐딱하다. 그래도 딱히 시비 걸 생각은 없는지 먼저 등을 돌리는 중구를 따라 걸으며 자성은 상해에 있는 청이라든가 석무의 감기라든가 강형철에게 보고할 내용이라든가 두 달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어지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가 주차장을 메웠다.

 

“혀, 형님!!”

 

뒤에서 들리는 상훈의 외침에 울먹임이 섞여 있다. 자성은 고개를 들었다. 바닥을 뒹구는 중구의 옆구리에 옅게 피가 비쳤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다시 높게 칼을 들었다. 정확히 중구의 심장을 겨눈 채였다. 중구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성은 저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무슨 계산에서가 아니었다. 중구 위로 청이 스쳤다. 등으로 박혀드는 칼날에 신음을 토하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어깨를 흔드는 중구의 얼굴이 청으로 바뀌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분명 청이었다. 이 씨벌놈이 뭔 지랄이냐! 그러는 것 같았다. 자성은 슬몃 입꼬리를 올렸다. 말 안 되는 일이 어디 한둘이요. 내가 형을 속여 먹은 거나, 형이 내게 속고 있는 거나, 이런 마지막도 나쁘지는 않구나 싶은 거나.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일 투성이었다. 그러니 이쯤은 괜찮으리라. 자성은 눈을 감았다.

 

"구급차 부르라고, 이 개새끼야!!"

 

사투리 고친다더니 정말이네 싶었다.

  

 

106.

중구는 눈을 떴다. 검은 창 앞에 침통한 얼굴의 장국철이 서 있다. 지끈거리는 옆구리를 감싸쥐며 주위를 돌아봤다. 병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몇 바늘 꿰맸습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곁에 있어야 했는데.."

 

몇 달 전에 사채로 자살한 새끼 아들이랍니다, 하는 설명을 들으며 중구는 기억을 더듬거렸다. 주차장에서 칼날이 스쳤고 넘어졌고 독기어린 눈동자가 벌벌 떠는 게 웃겼고.. ..이자성. 중구는 몸을 일으킨다.

 

"이자성이는."

"예? 아. 옆 병실에 있습니다. 생명에는 지장 없답니다."

 

대체 그 대가리에 뭔 생각이 들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뒤지면 잘 된 거 아닌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얼른 부축하려 드는 장국철을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 벌건 눈동자가 무섭게도 노려본다. 박재헌이랬던가. 정청이 온 모양이다. 아무튼 유별난 새끼들. 중구는 장국철을 물리고 재헌에게 다가섰다. 정청의 지시가 있었는지 자성의 병실 앞도 재헌 뿐이다.

 

"커피 한 잔 뽑아와라."

 

뻔뻔한 요구에 지그시 입술을 물던 재헌이 느릿느릿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중구는 살짝 열린 문틈을 들여다봤다.  

 

"...일은요. 잘 됐소?"

 

다 갈라진 목소리다. 미친놈. 중구는 한숨을 삼킨다. 대신 하얀 양복을 입고 선 정청에게서 깊은 한숨이 토해진다. 하지만 자성은 아랑곳이 없다.

 

"어떻게 됐냐니까. 자금 너무 급하게 끌어 쓰면"

"여수 다시 갈라냐."

"......"

 

자성의 눈이 가라앉는다. 청은 모래처럼 웃으며 자성 앞에 앉았다.

 

"이 팔이나 다리나. 한 짝이나 두 짝 띠주믄 영감도 더 잡지는 않을 것인께."

"......"

"와. 빙신 된 시키는 싫으냐."

"...싫소."

 

이번에는 청이 말이 없다. 자성은 퍼런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중구가 본 그 미소였다. 

 

"그새 늙었소? 답지 않게 웬 약한 소리야. 이런 건 올라오며 작정했던 거 아니오."

"......"

"..조심할 테니까 너무 그러지,"

"그라믄 너라도 가라."

"......."

"...그렇게 혀. 너라도.." 

"좆같은 형님만 믿으라더니. 나 팽하는 거요?"

".....씨벌새끼..."

 

얄미운 목소리가 정처 없이 휘청이는데도 중구는 비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가라. 그르자. 그르자고, 이 씨벌롬아.. 침대로 무너지는 등보다 등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손가락이 더 시리게 비친다. 중구는 벽에 기댔다. 속이 썼다. 여자가, 여자를 닮은 아이가 번갈아 눈앞을 스쳤다.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107

"시키지 않아도 척척이라... 어째 느낌이 쌔하다."

 

용산 사건으로 정신이 없어 오랜만에 마주 앉은 고영달은 여전히 감이 좋았다. 강형철은 이마를 문지른다. 시나리오는 마무리 단계였다. 주연은 제일파 보스 장수기. 정청, 이중구. 요원 하나와 장수기 측 어깨 다섯이 차출됐다. 요원은 강형철의 직속 후배였고 어깨들은 오야의 얼토당토않은 눈물쇼에 감격할 만큼 어수룩한 신입들이었다. 일대일, 아니 오대 일로 붙어도 정청의 손끝 하나 못 건들일 풋내기들이지만, 자고 있으면 정청이라고 어쩔 것인가. 이자성 덕분에 정청이 혼자 있을 때를 노리는 건 일도 아니다. 

계획은 이렇다. 자는 새 정청을 습격한다. 목숨은 붙여둔다. 석무에게 일러 적당한 시각에 정청의 집을 찾게 한다. 미리 입을 맞춘 대로 기습을 이중구 지시로 돌린다. 요원은 석무와 합을 맞추다 빠져 나간다. 석동출이 직접 지목해 올린 정청을 습격한다는 건 석동출에 대한 반발, 석동출이 이중구를 그냥 둘 리 없다. 이중구는 물론 결사적으로 아니라 하겠지만, 증거와 증인, 또 장국철이 있는 이상 이중구는 분명 떨어져 나간다. 북대문과 재범파 사이에 일대 피바람이 불 거다. 석동출은 어떤 식으로든 균형을 맞추겠지만 북대문과 재범파는 둘 다 확실히 줄어든다. 이때 이자성을 빼내는 동시에 장수기를 석동출 밑으로 넣는다. 이중구가 없고 정청이 오늘 내일 하고 이자성마저 사라진다면 석동출에게 남은 패는 장수기 뿐이다. 그간의 자료에 더해 석무와 국철과 장수기를 통해 일 년 정도. 석동출을 기소할 증거를 모아 그 개새끼를 끌어내고 골드문을 장수기에게 넘긴다. 골드문이 장수기에게 넘어갔을 때 장수기의 신분을 골드문에 노출시킨다. 오야의 부재중에 일어나는 개싸움은 피라미들의 좋은 표적이다. 골드문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정청이 살아나거나 장수기 측 다섯이 이중구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죽는다면 요원이 끝까지 남아야 하고, 정청의 병원 신세가 짧다면 이중구에게 좀 더 힘을 실어 당장 개싸움을 벌려야 하는 등 자잘한 문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다듬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이자성이 이중구를 감싸다 입원을 했다라. 물론 판을 벌이기 전까지는 이중구와의 관계를 되도록 좋게 하는 편이 유리하지만, 지시도 하지 않은 돌발 행동은 역시 석연치가 않다. 도망가기 전에 선물 사 안기는 어미처럼 골드문 일하느라 정신 팔린 이자성이 안 그래도 불안한데... 형철은 담배를 문다.    

 

"...이자성이 정말 괜찮은 거냐."

"......."

"...어째. 날짜 좀 당길까?"

 

형철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예정대로 가자. 어수선할 때 해야지. 금배지 엉켜 들면 골치 아파."

 

고영달은 간단히 끄덕인다. 하지만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커다란 폭풍우를 일으키듯이, 이 작다면 작은 일이 어떤 파문을 일으키게 될지에 대해서는 고영달도, 강형철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만에 하나 짐작했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단 하나의 이름이 되는 그 길고 지난한 과정을, 알았다 한들 어쩔 수 있었겠는가.

  

 

108.

회사 내에서 취하도록 마시지 말 것. 혼자 다니지 말 것. 그 외에도 중구는 석동출이 보는 앞에서 정청과 이자성에게 직접 감사를 표해야 했고, 당분간 상해에 딴 사람을 보내겠다는 정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석동출을 코 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이상한 건 예전만큼 속이 꼬이지는 않았다는 거다. 아니, 꼬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아니. 사실 이유가 정확치 않았다. 저 씨발새끼가 그간 우리 금쪽같은 작은 형님한테 어떻게 했는지 봇물 터지듯 쏟아진 북대문의 고해성사를 고스란히 들었음에도 별 움직임이 없는 정청 때문인지, 일주일 만에 병실을 뛰쳐나온 희멀건한 낯짝 때문인지, 대놓고 정청 손을 들어주는 석동출 때문인지 아니면 셋 단지. 아무튼 좆 같았다. 알 수 없는 부채감이었다. 그래서 '이이사님 안에 계시냐이?' 끝을 길게 끄는 특유의 말투가 들려왔을 때 중구는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차라리 한 대 터지기라도 해서 이 구질구질한 찌꺼기를 걷어내고 싶었다. 중구는 주위를 물리고 정청과 마주 앉았다.

 

"아따 사무실 허벌 좋고마. 워메, 이 술도 겁나 비싼 거 아이," 

"할 말이나 하쇼."

 

두리번거리던 낯짝이 빙그레 웃는다.

 

"나가 한 석 달 있으믄 상해 다시 드가야 쓰거든. 조낸 웃긴 것이 이 짱깨 새끼들도 여그 만치로 핏줄을 존나게 따져 부러요. 지금도 어여 오라고 구찮,"

"피차 공무도 졸라게 바쁜 처지에 요점만 간단히 합시다. 이자성이 얘기하러 온 거 아니요?"

 

느물거리던 눈동자가 스치듯 굳는다. 중구는 글라스를 쥐며 핏 웃었다.

 

"그래, 어쩌고 싶으신데. 뭐, 저 골프채라도 빌려 드려?"

"중구야."

 

씨발. 반사적으로 욕이 튀는 중구에 청이 히죽 입고릴 올린다.

 

"한 두 해 볼 것도 아닌디 말 놓아불자. 이이사니 정이사니, 뭔 이삿짐 센터도 아이고 간지럽들 안 허냐."

 

...이 새끼한테 만날 쨍쩅거리던 이자성이 심정을 알 만하다. 중구는 소파에 기대 발목을 까닥거리는 청을 어이없이 훑어 본다.

 

"아무튼 중구,"

"됐고. 용건 없으면 그만 일어,"

"영감님이 며칠 전에 나를 부르드만 뭐라 혔는지 아냐."

 

독대를 알고는 있었다. 중구는 글라스를 빙빙 돌린다.

 

"알아야 하나?"

"궁금할 거 아니냐."

"그 얘길 꺼내는 목적이 뭔,"

"느가 자기 아들이나 마찬가지 라데."

 

글라스가 조용해진다. 청은 중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라믄서 자식놈 허물은 애비 탓인께 우리 부라더 일 문제 삼지 않았음 쓰겄다고. 거 부탁도 할 줄 알드마."

 

..노친네가 진짜 노망이 나려나. 중구는 입술을 비튼다. 골치 아프다는 듯이 건너보던 잿빛 눈동자가 어른거린다.

 

"중구야."

"..그놈의 이름 좀,"

"그려서 나도 부탁 좀 하러 왔다."

"하. 서열 3위씩이나 되는 양반이 나같은 새끼한테 뭐 한다고 굽히는 척,"

"나한티 이자성이가 뭔지 느 아냐."

 

청의 얼굴에서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다. 

 

"영감님 말씀도 있고 우리 부라더 병원까지 옮겨준 것도 그렇고 부라더가 헌 말도 있고 혀서 나가 한 번은 넘어 가는디. 다신 그라지 말어. 알긋제."

"......"

"은제 술이나 한 잔 허자."

 

구부정한 등짝에 중구가 툭 말을 던진다.

 

"멱이라도 딸 기세네."

 

막 문을 열려던 청이 비죽이 웃는다. 아니라는 말은 없다. ..아주 지랄들을 하시네. 중구는 담배를 문다.

 

"둘이 연애라도 하시나?"

"...아따 시키 말귀 조낸 어둡고마. 그라지 말라니께."

"아니야?"

 

다시 다가온 청이 발치에 선다. 그늘진 눈동자가 매섭게 빛난다.

 

"느 참말로 입 조심해야 쓰겄다. 부라더가 나랑 떡이나 칠 놈으로 뵈냐."

"누가 떡이랬나. 연애 말이야, 연,"

"그거이 그거제. 존말로 헐 때 고만혀라."

 

...농담은 아닌 거 같은데. 중구는 멀뚱히 청을 건너본다.

 

"...설마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수?"

 

서서히 힘이 풀어지며 의아함이 섞이는 황갈색 눈동자에 중구는 진심을 담아 비웃음을 토했다. 와 이 짱개새끼 정말. 정청을 만나고 처음으로 유쾌해진 순간이었다.

  

 

109.

그 날을 기점으로 북대문 일대일 면담이 시작됐다. 물론 자성 몰래. 청의 사무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작은 형님 일이구나, 우린 다 뒤졌구나 벌벌 떨던 조직원들은 멍 대신 물음표를 잔뜩 달고 나왔는데, 뭐라시냐. 어디 쥐어 박으시데, 애가 탄 질문에도 그거시.. 그라니께... 할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불려 들어간 석무는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수북한 담배꽁초도 그렇고, 답지 않게 머리를 감싸 쥔 정청도 그렇고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평소에도 손 닿는대로 패는데 이번에는 자성이 입원까지 하고 나왔으니.. 석무는 핏기없는 자성을 떠올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가슴 한 켠이 지끈거리는 게 대체 뭔지 모르겠다. 임무에 너무 몰두했나. 그렇겠지. 그런 거겠지.. 삼천포로 빠지는 석무에게 힘없는 목소리가 날아든다.

 

"썩무야. 느.... ...그 연애 혀 봤냐."

 

뜬금없기가 천하제일인 정청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정청 입버릇대로 대박이시다. 석무는 벙하게 껌뻑인다.

 

"...몇 번은 해봤습니다..만..."

"으땠냐."

"??? 뭐가 어땠냐는 건지 잘,"

"아, 그 가시네헌티 느 심사가 으땠냐고!"

 

발끈 신경질을 내는 폼이 좀 있음 때리겠다. 석무는 얼른 입을 움직인다.

 

"연락 안 되면 조바심 나고 잠 못 자고, 감기라도 걸리면 가슴 아프고 못 보면 보고 싶고 봐도 보고 싶고 딴 새끼랑 통화만 해도 열불이 터지고.."

 

앞뒤 없는 주절거림에 청의 표정이 점점 묘해진다. 더 할 말도 없어진 석무가 입을 다물고 조심히 청을 살폈다. 끙, 고개를 떨구는 게 아무래도 여자가 생긴 거 같은데. ....와. 석무는 뒷목이 딴딴해진다. 진짜 와다. 이자성 이자성 그렇게 물고 빨 땐 언제고 지금 이 상황에 여자문제로 불러 댄 거야? 이자성이 저 때문에 무슨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다 들어놓고 이거 진짜 개새끼네. 석무는 간만에 청이 깡패새끼로 보인다. 입술을 질근 거리며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딱딱히 물어도 귀찮다는 듯 손만 까닥거리는 청에 이자성이 이 불쌍한 사람아 가 절로 새어나왔다. 아무튼 아랫도리 달린 것들은. ...근데 잠깐. 나 이거.. 왜 화 난 거지. 정청이 이자성을 물고 빨든 팽하든 뭔 상관이라고. 석무는 문을 닫고 한참을 멍하게 있다 뒤늦게 어깨를 굳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재헌 옆에 자성이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전화도 꺼놓고, 바쁘다, 오석무?"

"죄송합니,"

"큰 형님이랑 뭔 얘기 했냐."

"...예? 아, 저 그게..."

 

슬금 재헌을 보자 아예 눈을 피한다. 저 도움 안 되는 인간. 자성은 길게 한숨을 뱉는다.

 

"형제랑 인호가 다 불었다. 너한테도 같은 거 물으시디."

 

김형제, 오인호. 이 죽으면 주둥이만 동동 뜰 것들. 어쩔 줄 몰라하는 재헌과 석무를 두고 자성이 사무실로 들어선다. 석무와 재헌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문에 매달렸다. 저들이 언제 죽을 지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았다.

  

 

110.

십 분이 지났는데도 쳐다볼 낌새조차 없다. 자성은 똑똑, 테이블을 쳤다.

 

"부를 때까정 드오지 말라니"

"그럼 나중에 오고."

 

청의 얼굴이 번쩍 들린다. 

 

"느 언제 왔, 이 씨벌롬들이 보초 단단히 서라니께!!"

 

살짝 열린 문이 빛의 속도로 닫힌다. 자성은 낮게 웃으며 턱을 괬다. 청은 머리를 긁적이며 담배를 문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 함께 할 시간이 적기도 했거니와 같이 있어도 거의 웃지 않는 자성이었기에 이 미소가 참 오랜만이다. 처음 봤을 때 같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을 거다. 웃으니까 사람 같네, 하는. 

 

"일찍 드가라니께 암튼 말 드릅게 안 듣는다."

"다 나았다니까."

"니미 퍽도,"

"그래, 어떤 여자요?"

"......?? 여...자?"

"이거 진짜 좀 서운하려고 하네. 애들한테는 다 말해놓고 나한테만 비밀이요?"

 

입 가벼운 잡놈의 시키들을 당장 먹어야 겠다는 다짐다 일단. 청은 슬쩍 눈을 피한다. 아, 사실 고거이 느 얘기거든? 중구 시키가 느랑 나랑 연애를 한다나 뭐라나 지랄을 떨어 쌌는디 아따 연애 한 번도 안 해봤냐고 꺽꺽거리며 비웃잖여. 그려서 연애가 당췌 무엇이냐 나가 좀 알아야 쓰겄다 싶어서... 라고 주절주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자성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꿰맨 데 다시 터진다. 청은 괜히 담배만 뻑뻑거린다.

 

"여자는 무신.. 암 것도 아니다."

"아니긴. 거 미간에 주름 오랜만에 보는구만."

"얼마 전에도 보셨자네요, 씨빠빠야."

"...진짠가보네, 고민을 다 하시고."

"말 돌리기는, 씨벌롬."

 

청은 여직 핏기없는 얼굴을 힐끗 쳐다본다. ...연애라. 종합해 보면 그 연애란 놈은 단순한 떡과는 솔찬히 거리가 있다. 아깝고 애타고 간절한 마음. 딴놈이랑 붙어 있다고 뒤꽁지가 화끈거리진 않으나 글쎄.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추워 뵈는 게 좆같고 다쳐 누울 때마다 수명이 갉히는 것 같고 웃는 낯짝을 보고 싶어 짝퉁을 사다 나르고... 처음에는 실수였다. 그런데 공항에서 꾸러미를 푸르다 피식 웃는 자성을 보고 나서는 매번 짝퉁에 손이 갔다. 웃으면 복이 온다니까. 복이 겁나 필요한 새끼니까, 이자성이가.. 아무튼 이 놈이 문제여. 청은 나지막이 한숨을 쏟는다.

 

"왜. 뭐가 잘 안 되오?"

"되는 일이 없다, 씨빠..."

"..까탈스러운 분인가 보네."

 

 조심스러워지는 자성을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좀 심술이 나기도 하고 슬쩍 재미도 있어 청은 에라 모르겠다 소파에 길게 눕는다.

 

"고거시, 일단 조낸 허예. 사시사철 조낸 허옇고 길고 말랐으. 뭘 처먹긴 허는디 당췌 살이 안 붙드라."

"여자한테 처먹다가 뭐요?"

"글고 뭘 사다줘도 웃덜도 안 허고 뭔 말만 하믄 퉁박만 놓고 찌푸려싸야. 다치기는 을매나 잘 다치는지 니미 씨부럴, 그라지 말라고 혀도 듣는 척도 안 허고. 아주 나가 볼 때마다 이 심장이 벌렁벌렁헌께."

"...형을 좋아하긴 한대요?"

"글....씨? 그란 건 안 물어 봤는디? ...뭐 좋아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으떤디? 묻고 싶은 걸 참으며 슬금 보자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뭐야. 짝사랑이요?"

 

청은 그대로 휘둥그레진다. ....사랑? 담배에서 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껌뻑이는 청을 보며 자성은 절레 고갤 젓는다. 

 

"뒤늦게 아주 가지가지 하시네. 들어보니 거 되게 까칠한 분 같은데 취향 ..."

"..저, 형님."

 

살짝 열린 문으로 석무 목소리가 들린다. 진양상사 조상무랑 미팅시간이.. 들어오지도 못하고 말꼬리만 흐리는 게 청이 무섭긴 되게 무섭나 보다. 이런 양반이 뭐가. 나이 마흔에 짝사랑이나 하고. 뭐가 모자란다고. 저 좋다는 여자가 한 다스는 됐겠구만. 물론 술집 여자긴 했지만 말이다. ...설마 중국술집에서 만난 건 아니겠지. 기왕이면 평범한 여자를 만나 가정만큼은 제대로 꾸렸으면 좋겠다.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는. 누가 도망가지도 않고 누굴 속일 필요도 없는. 한겨울에 얼음길을 달리지 않아도 되는. 신발 신고 가소, 신발 신고 가소 외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성은 벙한 청에게서 담배를 빼내 끄곤 일어난다.  

 

"이따 술이나 한잔 합시다. 거 양말 좀 신구요." 

 

자성이 나가고도 청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삐까뻔쩍한 천장에 난생처음 보는 말이 커다랗게 번쩍인다. 

연애. 이자성. 사랑. 

심장이 난데없이 쿵쿵 뛰었다.

    

 

2009년 3월

연애. 이자성. 사랑.

심장이 난데없이 쿵쿵 뛰었다.  

 

 

111.

"형님. 검토하실 서류가,"

"어어. 거 난중에 허자."

 

이사회가 끝나자마자 종종걸음 치는 청을 멀거니 보고 선 자성에게 중구가 후, 일부러가 분명한 담배연기를 뱉는다.

 

"어째 요새 입장이 존나게 달라 보인다?"

"......."

 

자성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익숙해진 비아냥거림 때문이 아니라 구부정한 등 때문이다. 근 한 달. 아무래도 이건 좀 이상하다. 여자가 생겼으면 생긴 거지 저를 피할 이유가 대체 뭔가. 밥도 따로 먹어, 술 먹잔 소리도 없어, 그 좋아하는 떡 타령도 잠잠해, 심지어는 집에도 잘 안 들어온다. 처지가 처지인 만큼 처음에는 혹시나 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알았다면. 자성이 아는 한 청은 저를 이대로 곱게 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청이 아닌 누구라도 당연한 일이다. 자성은 한숨을 삼킨다. 도둑질한 놈이 제 발 저리다고 이때까지는 그냥저냥 넘겼지만... 안 되겠다. 벌써 4월 초다. 내일이라도 철수명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당장 오늘 밤일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퍼뜩 마음이 급해진다. 자성은 중구에게 짧게 목례를 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쌍으로 모자란 새끼들.' 혀 차는 소리가 착각인지 환청인지 씁쓸하게 비쳤다.

  

 

112.

오긴 왔는데 기척도 모르고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청을 보니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손을 내미는 쪽은 늘 청이었다. 퍼런 하늘에 넋을 빼고 있거나 혼자 생각에 우울해져 있으면 어김없이 다가와 '그 날이여?' 개구지게 비죽댈 때는 언제고. 자성은 제 생각에 씁쓸히 웃고 만다. 버릇 한 번 고약히 들었지 싶다.

 

"...난중에 허자니까."

 

불퉁거리는 목소리가 낯설어 괜히 결재판만 내민다. 청은 한숨을 뱉고 바로 앉아 서류를 넘겼다. 건성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눈 한 번 맞추질 않아 결국 자성이 먼저 말문을 연다.

 

"..형님. 형수님이랑 뭐.. 안 좋소?"

 

일대일 면담 이후 북대문에게는 큰 형수님이 생겼다.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못 봤지만 조직원 대부분이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 혹은 잘 나가는 연예인 뺨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미인일 거라 확신했다. 아니면 청이 질색하는 형님 소리에 타박 한 번 안 할 리도, 팔다리처럼 달고 다니던 자성을 투명인간 취급할 리도 없질 않은가. 종종 넋을 잃고 있기도, 혼자 술을 마시기도, 꾸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기도 하는 꼴이 딱 ‘나 연애 중이요.’였다. 아니. 연애하려고 꼬시는 데 잘 안 되서 돌아버리겠소. 자성은 턱을 긁적거린다.

 

"...나라도 한 번 뵐까,"

"느 일이나 신경 써라."

 

날선 반응에 자성도 입을 다문다. 이쯤 되니 당황스럽고 민망하기보다 성질이 난다. 뭐 얼마나 대단한 여자라고 꽁꽁 숨기고 끙끙 앓고. ...좆같은 형님만 믿기는 개뿔. 자성은 청의 손에서 서류를 채든다.

 

"죄송하게 됐소. 좆도 아닌 게 깝쳐서. 그럼 그러고 앉아 계속 고민이나 하시오."

 

부셔져라 문이 닫히자마자 청은 다시 테이블로 꼬꾸라졌다. 대체 왜 이러는지 사실 누구보다 미칠 노릇인 건 청이었다. 그러니까 연애와 이자성과 사랑이 나란히 번쩍거린 그 날 밤. 마주 앉아 술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런데 간만에 얼큰히 취한 자성이 '..형은 좋은 아빠가 될 거요.' 눈꼬리를 휘며 그러는데, 그때부터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지겹도록 아는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유난히 도드라진 팔목이라든가, 흰 와이셔츠 위로 길게 뻗은 목선이라든가, 오물거리는 입술이라든가, 눈꼬리를 무너뜨리는 미소라든가, 쓸쓸하고 눅눅한 목소리라든가... 심장이 거슬릴 만큼 뛰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혼자 집을 나서며, 웃기지도 않았다. 함께 뒹군 세월이 얼만데. 허벅지 깊숙한 상처 같은 점이며 배꼽 밑에 맹장자국이며 그릴 수 있을 만치 익숙한 이자성에게 목이 타다니. 이렇게 들끓는데 눈조차 맞출 수 없다니. 이 한 달. 청은 감정을 동반한 욕망이 얼마나 골 때리는 건지 뼈저리게 알았다.

하고 싶지만 하고 싶지 않다. 닿고 싶지만 닿고 싶지 않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다..

청은 태어나 처음으로 열병을 앓는 중이었다.

   

 

113.

어둠이 깔린 지 한참인데 청은 일어날 줄을 모른다. 재헌은 조심스레 청 앞에 섰다.

 

"...형님. 벌써 열 한십니다. 식사라도,"

"먼저 가라니께."

 

휘휘 젓는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금테를 두른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받아주시지. 재헌은 이름 모를 형수님이 못내 원망스럽기도, 평소와 달리 속병만 앓고 있는 청이 답답하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냥 밀어 붙이시지..."

"뭐라고 씨부려 쌌냐."

"죄,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주제넘게.."

 

화들짝 허리를 굽히는 재헌에 청이 상체만 들고 턱을 괸다. 딱히 화난 기색은 없다.

 

"느는 그렸냐?"

"...예?"

"경험담이냐고."

"....네에.."

 

흐음. 잠깐 생각에 잠기던 청이 머리를 털어내며 의자에 기대 담배를 문다. 재헌은 의외로 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을 살피며 담뱃불을 붙였다.

 

"그... 형님. 까다로운 여자가 의외로 그런 거에 약합니다."

"그런 게 뭔디."

"저돌적인 거 말입니다. 워낙 도도하니까 주변에 머뭇거리는 치들 천지거든요."

"...그르냐?"

 

솔깃 하는 청에 재헌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진다. 

 

"그럼요. 형수님도 은근히 기다리실 겁니다. 너 내 여자해라! 아예 세게 나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면 꽃과 케이크를 어쩌고저쩌고, 고백이 블라 블라 연애강의를 시작한 재헌을 두고 청은 머리를 긁적인다. 자성 말대로 뒤늦게 아주 가지가지 하게 생겼다.

   

 

114.

열두시가 넘었는데 집이 텅 비어있다. 이 시키는 이 시간까정 뭘 허고 자빠진 거여. 청은 괜히 툴툴거리며 꽃과 케이크를 내려놓는다. 재헌이 억지로 사 들린 거다. 필수 아이템이라나 뭐라나. 하도 시끄러워서 어영부영 들고 오긴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거야 말로 진짜 민망해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이제까지 선물 사다 나른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 감정인지 강냉인지 허벌 귀찮고마. 청은 벌게져 생수를 병째 들이킨다. 입가로 흐른 물을 닦는데 피식 난데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 컵 관상용이 아니라고 내 몇 번을 말하오?!' 눈에 불을 켜고 삼일 밤낮은 쨍쨍댔을 자성이 떠올라서다. 하여간에 까슬한 시키. 여자도 그렇게 깔끔 떨진 않을 거다. 양말 뒤집어 놓지 마라, 이 닦아라, 머리 말리고 누워라, 물은 컵에다 마셔라,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서울에 얼마 있지도 않을 건데 뭐 하러 집을 구하냐 박박 우긴 죄로 그 잔소리를 고스란히 듣던 청이 어느 날 '아따 시끄러운 거. 가시네였으믄 기냥 자빠뜨렸을 것인디.' 히죽거리자 국자가 날아왔던가, 도마가 날아왔던가. ...그때는 진짜 농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이래서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다. 좆도 재미지게.

..근디 싫다고 하믄 으쩌지. 재헌이 놈한티 그걸 안 물어 봤고마. 청은 핸드폰을 열며 냉장고에 이마를 댄다. 싸울 때와는 또 다른 열이 온몸을 떠다닌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제야 뭔지 알겠다고. 이렇게 되고 보니 어쩌면 처음부터 너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니미 육실허고 자빠졌고마. ...이노므 심장은 또 뛰고 지랄이여, 씨부럴.. 청이 혼자 생각에 웃다 벌게지기를 반복하며 재헌의 번호를 누를 쯤이었다.

현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115.

"몸은 괜찮냐."

 

대답할 생각도 않고 꽁초며 쓰레기 따위가 즐비한 검은 물만 향해 있는 낯이 어딘지 멍하다.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오석무의 보고에 따르면 이자성과 정청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정청한테 여자가 생겼다나. ...잘 된 일이다. 형철은 담배를 물며 자성과 시선을 같이 한다. 이 폐수 아래 널린 게 쓰레기뿐인 걸 알면서도 형철은 굳이 낚싯대를 가져다 놨다. 영달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청승이냐며 혀를 찼지만 말 안 될 건 또 뭔가. 알토란같은 청춘들을 죽은 물보다 못한 구덩이에 밀어 넣는 저 같은 인간도 있는데. 썩은 내가 풀풀 나는 폐수에서 낚싯대 기울이고 있는 거나, 쓰레기 다 치우면 이상구 팀장이 부르짖던 신세계가 올 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희망이나 거기서 거기다. 형철은 목울대를 만지작거리는 자성을 힐끔 돌아본다.

 

"금연 오래 간다? 담배 끊는 놈하고는 상종을 하지 말라던데."

"제발 그래주셨으면 좋겠네요."

"새끼 말하는 거 하고는. 그런데 갑자기 담배는 왜 끊은 거냐?"

"왜 부르신 겁니까?"

 

눈빛에 날이 선다. 국가기밀이라도 되나. 형철은 피식 웃으며 시계를 본다. 한 시 반. 대충 정리 됐을 시간이다. 형철은 희뿌연 연기를 뱉으며 허공을 응시한다.

 

"어디로 갈래?"

"...네?"

"일단 프라하에 자리가 있긴 한데 딴 데 원하는 데 있으면 말해라. 그 정돈 해줘야지."

 

자성은 일순 숨을 멈춘다. 똑똑히 기억한다. 강형철이 이렇게 친절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6개월의 시한. '잘 부탁허요' 경구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스친 순간 그에 상응하듯 주머니 속 핸드폰이 찢어질 듯 울렸다.

   

 

116.

"이중구 이 개새끼.."

 

화기 섞인 재헌의 울먹임에도 자성은 유리 너머만 보고 있다. 석무와 재헌이 도착했을 때 넷은 죽고 한 놈만 살아 있었다고 한다. 산 놈은 이중구의 이름을 토해놓고 재헌의 손에 썰려 드럼통에 담겼다. 청은 혼자 다섯을, 그야말로 짓이겨 놨지만 입은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복부 자상이 심했다. 수술은 길었다. 이성을 잃고 이중구에게 달려가려는 재헌을 다른 북대문이 겨우 뜯어 말리고, 새하얗게 질린 석무가 기어이 쓰러지는 소동이 일어나는 사이 자성은 꼼짝 않고 수술실 앞을 지켰다. 수술이 끝날 쯤 석동출이 찾아왔다. 주위를 물리고 자성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사실 자성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사가 나와 '잘 끝났습니다.' 여섯 글자를 내놓기 전까지 자성은 눈 뜬 채 기절한 사람 같았다. 아니. 회복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재헌이 뭐라는 지 모르겠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 하나. 단 하나를 빼고는.

이자성은 정청을 죽이게 된다.

이 두 손으로 저 사람을, 결국 죽이고 말 것이다...

   

 

117.

정청 피습사건의 배후로 이중구가 지목됐을 때 재범파 뿐 아니라 골드문 모두가 피바람을 예상한 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하극상을 그저 넘길 석동출도, 만만히 죽어줄 이중구도, 없던 일로 넘어갈 북대문도 아니었다. 얼마 후 이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정청의 병실을 찾았다. 석동출이 이중구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아무리 무릎 아래 두고 키운 직속이라 하나 명분도, 더 이상은 이유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정청을 골드문에 들인 순간부터 석동출은 이중구를 팽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청이 깨어나고 석동출이 직접 병실을 찾자 이사들의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중구는 끝났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건 다음날이었다. 이중구가 혼자 정청의 병실을 찾은 것이다. 이를 박박 갈며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 험악한 북대문을 손수 물린 청은 자성마저 내보내고 이중구와 두 시간 가량 독대했다.

이틀 후. 골드문은 비공식적으로 제일파를 쳤다. 선두는 이중구였다.

 

  

118.

"...이게..."

 

말을 잇지 못하는 고영달을 두고 강형철은 창밖만 내다본다.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봄이네. 형철의 중얼거림에 영달은 낮은 탄식을 뱉는다. 저런 반응이면 더 물을 것도 없다. ..장국철 이 미친 새끼가.. 영달은 머리를 감싸 쥔다.

테이블에 놓인 두 개의 보고서는, 디테일은 다를 지언정 핵심은 같아야 했다. 그런데 왼쪽에는 없는 내용이 오른쪽에는 있다. 진위 여부에 따라 상황을 완전히 달리 볼 수 있는 포인트였다. 왼쪽에는 최초 석동출과 마지막 이중구의 방문 사이에 족제비 같은 이사들 이름만 가득하지만 오른쪽에는 하나의 이름이 더 있다. 이중구의 오른팔이자 언더커버인 장국철.

 

[장국철이 정청의 병실을 찾아 이자성을 위시한 북대문에게 사과했음. 장국철의 이름을 석동출 때도, 이중구 때도 얼핏 들었음.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장국철이 석동출을 은밀히 찾았다고 함.]

 

북대문과 재범파의 개싸움을 예상했건만 엄한 제일파만 골드문에 합류됐다. 말이 좋아 합류지 강제합병이나 다름없었다. 정청은 알던 것보다 더 침착했고 석동출은 생각보다 더 대가리가 좋았으며 이중구는 보기보다 제법 성격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형철과 고영달의 판단미스였다. 이중구가 숙이고 굽힐 줄도, 석동출과 이중구 사이가 정청과 이자성만치 끈끈할 줄도 몰랐다. 

그러니 판이 깨진 건 오롯이 둘에게 책임이 있다 쳐도 이 문제의 보고서. 병원 관계자의 증언도 일치했다. 장국철은 정청의 병실을 찾았다. 돌발 상황에 대비해 판이 끝날 때까지 이중구의 오른팔로 남아야 하는 장국철의 이러한 행보는 프로젝트와 무관함을 넘어 완전히 위배된다. 늘 이자성이 불안했는데. 병원에서 내내 혼이 나가 있던, 다시 만난 폐 낚시터에서 허옇게 질려 이 개새끼야 악을 써댄 이자성이 아니라 장국철이었다. 형철은 영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까지 변절의 시작이 언제였을지 수없이 되짚어봤다. '정청이 그 개새끼 설마 바지 세울 건 아니죠?' 했을 때. '아, 말 좀 해줘요. 이중구 꺾고 정청이 세울 거에요?' 안달 내며 묻기 시작했을 때. 그마저도 띄엄띄엄 보고를 늦췄을 때, 뒷거래 장부에 장국철의 이름이 듬성듬성 비쳤을 때... 소용없는 되짚음 끝에 ‘이중구가 오야 되면 내가 부회장인가? 이야. 그거 경찰로 따지면 국장인데. 졸라 땡기네?’ 씩 웃던 장국철이 떠올랐다. 그게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라이 새끼.

 

"...이자성은. 아닌 거 확실하냐."

 

넌 경찰이다. 마지막 한 마디에 퍼렇게 질리던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형철은 길게 연기를 뱉었다.

 

"...아니야."

 

영달은 두 번 묻지 않는다. 강형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영달은 왼쪽 보고서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씨발 새끼.. 뇌까리는 욕설이 어딘지 축축했다.

5월 중순 골드문 긴급 이사회에서 장수기는 허울뿐이지만 서열 2위를 보장받는다. 이자성은 서열 7위에 올랐다. 서열 6위는 공석으로 남았다.

장국철이 변사체로 발견된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119.

"집이 겁나 좋아 부러. 을메나 넓은지 우리 애들 다 데불고 떡 쳐도 되겄더라."

 

청은 기어이 집을 따로 구했다. '둘 다 뒤져 불면 우리 아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 아니겄냐.' 덧붙인 말에 자성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다 재헌이며 석무가 형님은 가만 계셔야 한다고 난리를 쳐 댄 통에 제 이삿날 청은 자성의 거실에 죽 치고 앉아 오징어나 뜯고 있다. 오징어만 달랑. 소주는 고사하고 맥주 한 잔도 안 내준다. 당분간 금주란다. 씨벌롬. 청은 속으로만 투덜댄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좆같은 낯짝이었다. 재수 없는 소리지만 꼭 시체 같아서, 설마 그 개새끼들이 우리 부라더도 담가 부렀나 이가 절로 물렸다. 저가 칼 맞고 누웠을 때보다 더 시퍼랬다. 밥 시계가 쌀 한 톨 안 삼키고 일주일을 버텼다는 재헌의 전언에 생난리를 피우다가 꿰맨 데가 도로 터져 할 말은 다 못했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아득바득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이 겉만 딴딴한 인사 간수도 해야겠고 옆구리에 칼이 박힌 순간 이자성이 다신 못 보는 게 무섭기도 했으니. 아무튼 덕분에 나이 마흔에 오만감정이 다 생긴다. 생소하고 간지럽고 어이없지만 사실 즐겁게도.

 

"뭐 좋다고 웃소."

 

그러게. 이렇게 사시사철 퉁박만 놓는 물건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청은 비죽 웃으며 자성의 무릎을 벤다. 저리 가란 소리가 없는 걸 보니 여직 걱정스러운 가보다. 청은 자성의 뺨을 쓰다듬듯 건드린다.

 

"느도 좀 웃어야. 이란 건 올라오며 작정한 거 아니냐."

"......"

 

저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데도 표정 변화가 없다. 청은 한 가닥 내려온 자성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감는다. 죽을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전처럼 전전긍긍 어쩔 줄 모르겠는 증상은 잠잠해졌다. 스스로 좀 소화가 된 모양이다. 하긴.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이 면상 못 볼까 무서울 정도였으니 좋아해야지 뭐 어째. 딱히 뭔가 변할 것도 없지 싶어졌다. 이름만 안 붙였다 뿐이지 사실 지금까지의 마음이 모두 그것이었으니. 문제라면,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괜찮다, 단지 나는 좋다는 거다. 어쩔 거냐 배 째라 식의 정청다운 배짱이 돌아오자, 닿고 싶다, 아니다가 확실히 전자로 기울었다는 정도지만. 일단 지금은 이 시든 풀 같은 낯짝이 더 문제다.

 

"멀쩡헌께 너무 그라지 말어."

"내일 출근은 너무 이른 거 아니요."

"딴 말은 시키. 밥은 잘 묵는 거냐. 썩무 이 씨불럼이 주둥이를 딱 다물어서 알 수가 있어야제."

"몇 명 더 데리고 다녀요."

 

자성은 고개를 외로 튼 채 계속 딴소리다. 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잡아당겼다. 재미없게 앗 소리도 없이 그제야 멀거니 눈을 맞추는 자성이 영 불안해 뵌다.

 

"부라더. 느 증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냐. 요새 낯짝이 아주 맛이 갈라 그른"

"애들 내가 알아서 채웁니다."

"아따 고 시키 증말. 사람이 말을 하믄 쫌 듣는 척이라도 혀라. 나가 걱정이 돼 안 그르"

 

갑자기 벌떡 일어난 자성에 뒷머리를 짓찧은 청이 아야야, 엄살 피울 준비를 하는 새 자성의 목소리가 성마르게 울린다.

 

"걱정 같은 거 하지 마요. 형님이 그런 거 해줄 필요 없으니까."

 

과하게 싸늘한 반응에 얼이 빠진 청을 두고 자성은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쟈가 진짜 무신 일이 있나. 얼른 자성을 따른 청은 지그시 한숨을 물었다. 자성이 부엌 어귀에 굳어 있다. 애들이 땀 흘려가며 핏자국을 싹 지운 바닥을 보고 선 등짝이, 어째 저렇게 미련한지 모르겠다. 청은 부러 장난스럽게 자성의 어깨에 턱을 걸친다.

 

"어야. 배고픈디 간만에 짱개답게 짱개나 먹으"

"절대 혼자 다니지 마요."

"워메. 칼 두 번 맞으면 아주 철장에 가둬 놓겄네. 나가 민간인도 아이고 고만 헌,"

"제발. ...부탁이요."

 

억눌린 목소리에 청은 그제야 자성을 돌려 세운다.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진득하다.

 

"느 진짜 왜 이러,"

"부탁하오. ...부탁해, 형."

 

마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린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금세라도 꺼질 것 같아, 청은 더 캐묻지 않고 천천히 자성을 끌어안는다.

 

"알긋다. 알겄으니께..."

 

아이 어르듯 토닥이는 손길에 자성의 입에서 신음처럼 가는 울음이 샌다. 자성을 만난 이후 두 번째로 보는 눈물이었다.

   

 

120.

[석동출 기소만 하자. 끝은 내야지 않겠냐.]

태연한 문자에 자성은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그 해 12월.

골드문에 프락치 사건이 터진다.

 

 

2009년 12월

골드문에 프락치 사건이 터진다.

 

 

121.

아찔한 봄과 뜨거운 여름과 쓸쓸한 가을이 지나가기까지.

청의 입지는 하루가 다르게 확고해졌다. 상해체류를 줄이고 국내성과를 늘린 것도 유효했거니와 석동출이 직접 주선한 술자리에서 ‘여러 선배님들께 나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술 한 잔씩 올릴라니까 받아주십쇼.’ 구성지게 노래 한 자락까지 뽑아낸 넉살도 단단히 한몫 했다.

이중구는 한바탕 칼춤을 추리라는 예상을 깨고 청에게 줄을 댄 이사들에게도, 청에게도 의외로 날을 세우지 않았다. 날을 세우기는커녕 지나가는 이자성을 불러 세워 ‘이제 너도 이이사고 나도 이이산데 동급 취급 좆같으니까 형이라고 불러.’ 라고 해서 북대문과 재범파를 대혼란에 빠뜨렸다. 청은 그런 중구를 친해지고는 싶은데 말은 못하고 주위만 빙빙 돌다 엄한 고무줄만 끊고 달아나는 초등학생에 비유했는데, 실제로도 중구는 그 이후로 종종 자성을 불러내 술을 마셔 이중구 초등학생 설에 스스로 힘을 실었다.

술자리에는 가끔 청도 끼었다. 걸쭉한 욕설과 유치찬란한 시비가 난무하다 못해 호칭, 그러니까 자성의 중구‘형’과 청이‘형님’으로 벌이는 두 오야의 설전은 문 밖에 선 조직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민망함을 양분 삼아 북대문과 재범파는 조금씩 섞여 들었다. 평온한 날들이었다. 겉보기에는 그랬다.

   

 

122.

중구는 한때 제 목숨까지 구해줬던 장국철의 배신이 내내 뼈아팠다. 아무리 석동출에게 후계를 다짐 받았다 한들 급부상하는 청을 지켜 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아니. 더 곤욕스러운 건 이자성이었다. 자성에게 겹쳐지는 두 여자의 잔상. 그래서 쉽게 지나칠 수도, 더는 모질 수 없는 스스로를 볼 때마다 쓴웃음이 절로 샜다.

청은 청대로 편치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백발성성한 금배지나 검사랍시고 깝치는 새파랗게 어린놈이야 제 식구 먹여 살리는 일에 성질대로 굴 수 없는 아비의 멍에로 감수한다 쳐도, 이자성은. 처음에는 일이 많아 그러겠거니, 또 얼마는 기십은 불어난 수하 탓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다는 그럴 듯한 핑계로 내둥 형님 형님 거리는 거나 그 형님을 이중구에게는 반토막 잘라 붙이는 거나. 미묘한, 하지만 확실한 거리였다. 그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설 판인데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기까지 하니 혹여 제 마음을 알아 그러나, 이자성 식의 거절인가, 아니면 영업이 좆같나, 안 보이는데서 압박이라도 들어오나, 돌려 돌려 물어도 봤으나 빤한 눈빛은 진짜 영문을 모르는 듯 했다. 제 꼴도 모른 채 말라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스스로도 인지 못할 거리를 저에게까지 두고 있는지. 밀랍같은 낯짝에 한숨을 뱉으며 청은 일단 제 마음을 한 발 물리기로 했다. 혼자로도 얼마든지 괜찮을 수 있다는 오만이야 애저녁에 꺾였지만, 늘 그랬듯,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그 무엇도 이자성보다 먼저일 수는 없었다.  

  

   

123.

어느 가을 자성은 뜬금없이 기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청은 자성이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것이 반가워 재헌과 석무를 물리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어깨까지 오는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선생에게서는 은은한 향이 풍겼다. 자그마한 체구며 단정한 눈매가 자성과 제법 잘 어울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아래서 청은 문득 생각했다. 지키고 싶은 마음과 닿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언제까지 평행을 유지할 수 있을까. 2층 격자창을 한참 올려다보다 피식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도 답답할 만큼 이자성이었다. 이자성이어야 했다. 그러나 청은 모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특히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열병은 필연적이라 할 만큼 이기를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기는 차라리 깊을 일이라는 것도.

   

 

124.

크리스마스를 이주 앞둔 늦은 밤. 석동출은 정청과 이중구, 장수기 셋만을 회장실로 불러들였다. 이유는 뻔했다. 최근 골드문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던 사업수주에 실패했다. 연줄이 부족한 것도, 자금이 딸리는 것도 아닌 이상 결론은 하나. 정보가 새고 있다. 쥐새끼가 있는 거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거기까진 예상했던 얘기였다. 배후를 검경으로 잡은 것도, 용의선상에 오른 두 명 중 한 명이 장수기의 오른팔이라는 것도 의외랄 건 없었다. 골드문에 프락치 박을 정신 나간 대가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장수기의 오른팔 또한 이제까지 멀쩡히 살려둔 게 오히려 이상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 밖이다. 시퍼렇게 질린 장수기에게도, 반쯤 지루해하던 이중구에게도, 그리고... 이중구는 떨떠름하게 맞은편을 건너본다. 항시 비위 좋게 히죽거리던 낯짝이 싸늘하게 굳어있다.

 

"회장님. 따로 시간 좀 내셔야 쓰겄는디요."

 

억눌린 목소리가 삭막하게 울린다.

석동출이 지목한 또 다른 한 명은, 이자성이었다.

   

 

125.

"나를 내치고 싶으믄 기냥 조자버리면 됩니다. 어려울 거 없는 거 아닌 가요."

"내가 이자성이를 의심한다고 보나."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인간이다, 석동출은. 청은 휘몰아치는 속내를 겨우 갈무리 한다.

 

"...나가 회장님께 뭐슬 잘못 혔으면,“

“숨 붙어 있던 것도 수상쩍고, 장수기. 확실하게 호흡기 떼놓는 게 좋아. 안 그런가.”

 

역시 서열 2위는 전국구 제일파를 완벽히 포섭하기 위한 당근이자 허울뿐인 관용과 매서운 경고를 드높이려는 광고판이었다. 명색이 오야였던 양반이 신세 한 번 처량 맞게 됐지만 어쨌든 그건 청이 알 바가 아니다.

 

“그란디. 이이사는 왜 끼어 넣는디요.”

“이자성. 서열 올려야지 않겠나. 자네가 아무리 3위라도 2인자가 7위면 밀려도 한참 밀려.”

 

꿈틀거리는 눈썹에 석동출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다.

 

“이 자리. 자넬 염두에 두고 있다는 뜻이야.”

 

청이 침묵한 사이 문 밖에 기척을 숨기고 있던 중구가 주먹을 움켜쥐며 돌아선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청은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영감님. 나 남으 떡에 침 흘릴 만큼 그라고 추잡한 놈 아니어라.”

 

석동출은 대답 대신 담배를 문다. 컴컴한 창밖만 건너보던 석동출은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서야 청을 마주 봤다.

 

"이자성한테 직접 처리하라고 해."

"나가 손가락이라도,"

"이건 부탁이 아닐세."

 

테이블에 놓인 자성의 사진을 가볍게 치는 손가락에 청은 지그시 이를 문다. 이 능구렁이가 뭔 계산을 굴리는진 몰라도 하나는 확실하다. 따르지 않으면 프락치로 몰려 죽게 되는 것은 이자성이다.

   

 

126.

"다른 언더커버가 그 사람이면 내가.. 내가 어떻게!!!"

[아니라니까. 진정해라. 한두 번 담가본 것도 아니잖,]

 

나동그라진 핸드폰이 강형철이라도 되는 양 노려보는 자성 뒤에서 신우는 조용히 바둑판만 들여다본다. 처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럴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127.

새해를 목전에 둔 12월 31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내부조사 끝에 장수기의 오른팔 이충수가 인천창고로 끌려온다. 오래된 철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창고는 비가 오는데도 텁텁한 열기로 가득했다. 팔다리가 기이한 모양으로 꺾인 이충수가 제 피로 흥건한 바닥에 뺨을 대고 금붕어마냥 헐떡댄다. 중구는 떨고 있는 장수기를 스쳐보며 철제의자에 기댄다. 차라리 대놓고 대가리 까는 게 낫지 이런 식은 영 비위에 맞질 않는다. 게다가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이 짱개새끼를 위한 거면 더더욱. 후계약속을 백 퍼센트 믿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렇게 뒤통수 칠 줄은 몰랐다. 이럴 거면 차라리 장국철 그 개새끼가 지랄할 때 장단 맞춰 목을 따 버리시든가. 멀쩡히 살려서 정청이 밑에 꼴아 박으시겠다. ..하 나 씨발.. 아들 좋아하네... 중구는 입술을 짓씹으며 옆에 앉은 청을 노려본다.

황갈색 눈동자는 오롯이 한 곳만을 향해 있었다. 앞날에 육차선 도로 깔 게 생겼는데도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유. 이자성이다. 북대문의 2인자로 중구 역시 그 실력을 목도한 바 있는 이자성은 창고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질려 있었다. 칼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처럼, 사람 피를 처음 본 것 마냥.

 

"살려...살려 주..."

 

자성은 가르랑거리는 이충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간신히 움직이는 눈동자에는 아직 어떤 희망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다. 아니. 이것은 본능이다. 살고자 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 하는, 이자성이 뼈저리게 잘 알고 있는 인간의 비천한 본능. 이..이사아.. 찢긴 눈꼬리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자성은 칼을 움켜쥐었다. 강형철은 이 사람이 경찰이라고 하지 않았다. 경찰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으윽!!! 단발마와 함께 실핏줄 터진 눈이 한순간 자성을 향해 부릅떠진다. 말하는 듯 했다.

너라고. 다음은 네가 될 것이라고.

너는 반드시 이처럼 죽게 될 거라고.

   

 

128.

재헌을 물리고 청이 운전 해 오는 길에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속을 게워낸 자성은 기어이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내미는 손은 또 한사코 뿌리치는 통에 집안에 들어서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청은 자성을 소파에 눕히고 타이를 풀어낸다. 진땀 밴 얼굴이 푸르스름하다. 한데 뭉쳐 칼을 휘두른 적은 수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 고문하듯 도륙내기는 처음인데다 프락치로 지목된 둘 중 하나는 살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 죽는 게 얼마든지 저일 수도 있었다는 걸 이 예민한 놈이 모를 리 없다. ..그래도 이 바닥 구른 지가 몇 년인데 씨벌롬.. 청은 무겁게 한숨을 토하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병원에 가잔다고 곱게 갈 놈도 아니니 물수건이라도 얹어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 새 어느 새 일어난 자성이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병째 들이켜고 있다. 서너 잔에도 어질거리는 독한 것을 숨도 안 쉬고, 아니, 숨이 막혔으면 좋겠다는 양 들이붓는 자성에 청은 이유모를 들끓음을 애써 잠재우며 병을 뺏는다. 돌아보는 눈이 멍하다.

 

“...힘들었을 건 안다. 그라도,”

“...알아?”

 

삐딱하게 날선 목소리는 곧 큭큭대는 웃음으로 바뀐다. 청은 잠시 아연해졌다. 몇 년을 함께 했지만 이런 이자성은 처음이다. 이자성에 대한 이해의 범주가 아예 틀린 것 같다는, 비단 오늘 뿐 아니라 몇 달을 지속돼 온 그 더러운 느낌이 실체를 가지고 눈앞에 나타난 듯했다. 자성은 다시 술병을 채갔다. 청은 술이 반 넘게 비워지고 나서야 얼른 병을 잡는다. 뺏고 채가고 뺏고 채가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참다못한 청이 번쩍 손을 든다. 하지만 끝내 내려치지는 못했다. 청은 씨벌 뇌까리며 남은 술을 제 입에 털어 넣는다.

그렇게 양주 두어 병을 비우고 자성과 청은 제각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그란 달이 창으로 몰아친다. 청은 널브러진 술병을 굴리며 고갤 돌렸다. 달빛마저 무거워 뵈는 등이 명치께를 짓누른다. 대체, 대체 무엇이 그토록 무거운지. 몰래 알아도 봤으나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힘들 일은 별로 없었다. 웬만한 영업은 석무에게 귀뜸 해 제게 돌렸고, 이중구가 전처럼 지랄을 떨어대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애들도 없다. 그런데도 자성은 종종 밥 때를 잊고 자주 예민했으며 전혀 웃질 않았다. 청이 수 십 번 시도하면 한 번 웃을까. 그것도 온전한 웃음은 아니었다.

 

"어이. 부라더. 나가 늙긴 늙었나 보다. 이자 기다리는 것도 쉽덜 안 혀.“

“......”

“..뭔 일이냐. 인자 말 좀 혀 봐라. 나가 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으,”

“그 여자분 하고는.. 잘 되가오.”

"씨빠 헛소리 고만 허고,"

"아무 얘기나 해봐요. 아무 거나.. 뭐라도 좋으니까..."

 

바스라질 것 같은 목소리다. 청은 그제야 자성에게 다가갔다. 자성은 떨고 있었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기라도 맞은 양 파르르 댄다. 청은 얼른 자성을 돌려 앉혔다. 눈을 감은 채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범벅돼 있는 얼굴이 목덜미를 움켜쥔다.

 

"안 되겄다. 병원 가,"

“형님..”

“이자!”

“형..”

 

청은 덜컥 굳는다. 그렇게 듣고 싶던 형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숨이, 턱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온 몸을 옭아맨다.

 

“...나... ...나 살아.. 있는 거요? ..살아 있는 거 맞소..?”

 

몸을 바싹 붙이고 허리를 붙드는 몸짓은 기실 어미에게 부벼 대는 새끼의 것에 가깝겠지만. 정청에게 어떤 의민지 이자성은 모르는 것이다. 알고도 이럴 리가 없다. 청은 이를 악물며 자성의 팔을 붙든다. 하지만 닿자마자 파드득 파고드는 어깨가 더럽게도 말라 있어서, 덜덜 떠는 팔다리가 낯설어서, 길게 늘어진 뒷목이 서글퍼서, 달빛이, 겨울이, 밤이, 술이.... 수 백, 수천 가지라도 변명할 수 있다. 이자성을 지금 안을 수만 있다면. 청은 자성의 뒷목을 그러잡는다. 뜨거운 숨이 얽혀들었다. 추웠다. 좆같이 추웠다.

 

 

130.

까무룩 잠든 자성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선 청은 빈 하늘을 올려보며 팔을 늘어뜨린다.

 

“..나가 미쳤어.. 미쳐 부린 것이여..”

 

푸르스름한 안개가 자욱한 2010년 첫 날이었다.

 

  

2010년 1월

푸르스름한 안개가 자욱했다.

 

 

131.

골드문 연초 이사회에서 이자성은 서열 6위에 올랐다. 어떤 이의제기도 불허하겠다는 석동출의 단언에 중구는 맞은편의 청을 새파랗게 노려봤다. 청은 묵묵히 옆을 돌아봤다. 세 자리 건너 자성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32.

"6위. 이야. 출세했네. 월급도 졸라게 많이 받겠다야."

 

요란스레 너스레를 떨어도 형철은 쓴웃음조차 없다. 영달은 한숨을 뱉으며 소주병을 쥐었다. 몇 천 원짜리 소주에도 물을 타는지 네 병째인데도 취하질 않는다.

 

"...표정 좀 풀어 인마. 이제 와서 왜 그래?"

 

빈 잔만 내려 보던 형철은 한참 만에 입을 연다.

 

"영달아."

"왜."

"...나 사표 좀 수리해줘라."

 

영달은 우뚝 굳는다. 형철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다. 허름한 잠바만치 허름한 얼굴에 고단함이 가득하다. 언제고 형철이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경찰 초입 때는 다 잡은 도둑놈이 어린 자식 운운하며 울부짖었다고 놔주기도 몇 번이었던 부실한 새끼가 아니었는가. '그럼 어쩝니까? 애새끼가 둘이라는데.' 젊은 형철이 뭘 잘했다고 툴툴대면 여지없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자선사업 하냐, 새끼야? 일할 땐 그냥 일만 하는 거야, 이 미련한 놈아!' 혀를 찬 게 이상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은 그냥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없다. 영달은 여상스럽게 웃는다.

 

"미친놈. 술이나 마셔."

 

형철은 콸콸 차오르는 소주를 멍하니 쳐다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악을 지른 이자성은 결국 제 손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이주 째. 아무런 연락도, 기원에도 나타나질 않는다. 석무 말로는 집에만 처박혀 있다고 한다. 이 와중에도 혹시 돌아선 건가, 준비를 해야 하나, 그 생각이 먼저니... 미친놈이라. 정말 맞는 말이었다.

   

 

133.

청은 의자에 기대 동전을 잘그락거린다. 창밖의 빌딩숲은 언제 봐도 무료하다. 똑같이 휘황찬란하고 똑같이 거들먹거리고 똑같이 좆같고. 여수가 훨씬 낫다. 시퍼런 바다, 비린내 나는 공기, 너저분한 거리, 그리고... 청은 눈을 감는다. 자성의 부재가 이주를 넘어가고 있다. 몸살, 휴가. 더 이상은 댈 핑계도 없다. 석무를 통한 재헌의 귀띔으로 들은 자성은 괜찮은 것도, 괜찮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밥은 그럭저럭 먹는데 말은 없고, 밤에 종종 앓지만 아침에는 멀쩡하고, 하루 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작은 형님 무슨.. 일이신 겁니까.’ 조심스런 재헌을 외면하며 청은 언젠가 중구에게 던졌던 질문을 되씹었다. '나한티 이자성이가 뭔지 느 아냐.' ...그래선 안 됐다. 그렇게, 그런 식은 아니어야 했다. 그 날의 정청이 과연 정청이 맞기는 한 건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성이 제게 영 멀어져 버리면 어쩌나 전화조차 걸지 못하는 이 좆같은 새끼가 진짜 나라는 건지, 어디에 이런 게 숨어 있었는지.. 청은 입술을 짓씹으면 품을 뒤진다. 딸려 나오는 담뱃갑이 텅 비어있다. 되는 일이 없고마, 씨빠.. 청은 낮게 뇌까리며 담뱃갑을 구긴다. 그런데 턱 밑으로 불쑥 담배가 들어온다. 재헌이겠거니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를 물려던 청은 순간 빳빳하게 굳었다. 이 손.

 

"안 필거요?"

"......."

"...그래. 그만 펴요. 너구리굴도 아니고 사무실이 이게 뭡니까."

 

여상스런 목소리다. 쉬어 있지도, 떨리지도 않는 여느 때의. 청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핼쑥한 낯이 빙그레 웃고 있다. 그 미소가 너무 낯설어 몸은 괜찮냐. 마음은 괜찮냐 한 마디도 나오질 않는다.

 

"뭘 그렇게 봐요. 봐야 잘 생겼지."

 

답지 않은 농담에 청은 혹시 그 날이 꿈이었나 싶어진다. 하지만 그럴 리가. 떨리는 손끝이 스치듯 눈에 박힌다.

 

"나 서열 올랐다면서요. 축하파티 뭐 이런 거 없소?"

"....."

"...점심이나 자십시다. 나오세요."

 

자성이 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청은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자성의 묘한 존댓말 말이다.

   

 

134.

체제가 안정된 골드문은 가파르게 상승세를 탔다. 건설, 유통, 대부업 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까지 손을 뻗치며 대중에게도 익숙한 '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연일 주가가 오르고 이사들마다 개인 변호사가 붙고, 대학을 나온, 주먹과는 상관없는 인재들이 늘어갔다. 반면 경찰 쪽은 그리 사정이 좋지 않았다. 청장과 국장이 굵직한 비리에 얽혀 나란히 날아갔다. 부패경찰 이미지를 씻기 위해서 경찰은 얼마 후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고영달은 경찰국장이 됐다.

   

 

135.

자성의 서열이 오르고 북대문과 재범파는 다시 원래의 험악한 사이로 돌아갔지만 중구와 자성은 여전히 가끔 술을 마셨다. 잊을 만하면 불러내는 중구 덕분이기도, 1월이 가기도 전에 상해로 날아가 꽃이 피도록 돌아오지 않는 청 덕분이기도 했다.

 

"정청이는 중국에다가 살림 차렸냐?"

"...왜. 보고 싶소?"

"이 개새끼가 취했나."

 

발끈 솟는 눈초리에 자성의 입고리가 힘없이 올라간다. 원래 한국보다 상해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한 번도 들어오지 않고 쭉 이긴 처음이다. 하지만 자성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형님이 그렇게 싫으면서 난 왜 부르는데요."

"넌 왜 따라오는데."

"까라면 까는 거지."

"허이구 씨발. 니가 퍽이나 그럴 새끼겠다."

"..너무 그러지 마요. 욕심 없는 양반이니까."

"그런 새끼가 줄줄이 사업을 따 오냐?"

"있는 능력을 어쩌나."

"아주 쌍으로 지랄을 떠시는 구만. ...그래. 그 잘난 형님이랑 연락은 하고?"

 

별 말 없이 술잔을 드는 자성에 중구는 낮게 혀를 찬다. 아무튼 이놈의 이자성이 문제다. 자다가도 이가 갈리는 정청이 종종 씁쓸하게 걸리는 것도, 잡아 족쳐도 모자를 판에 북대문 2인자한테 고이 술이나 먹이고 있는 것도. ..빌어먹을 짱깨새끼들. 중구는 벌컥 술을 들이켠다. 자성과 대작할 때마다 술이 참 더럽게 썼다.

  

 

136.

"..이야.. 보고서가 어째 점점 촘촘해진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영달 말대로 완벽에 가까운 보고서다. 청의 신변은, 청이 다시 상해에 체류하는 통에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골드문 내부보고는 석무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내심 안도하는 영달과 달리 형철은 이 보고서가 불안하고 불편하다. 구절구절 마디마디, 비명 같았다.

나는 경찰입니다, 경찰입니다, 경찰입니다...

   

 

137.

신우는 바둑판에 집중 중인 자성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처음부터 조폭 언더커버로는 미달인데 싶었던 몸이 더 부실해진 것 같다. 그게 말수가 늘어난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먼저 말을 거는 쪽은 신우가 됐다.

 

"많이 느셨어요."

 

바둑알을 놓자마자 어설픈 거짓말이다. 자성은 피식 신우를 건너봤다. 겸연쩍은 듯 작게 미소가 번진다.

 

"..사실 엉망이에요. 어쩜 하나도 안 느세요?"

"취미 없다니까 이런 복잡한 거."

 

자성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목울대를 만진다. 신우는 자성이 놓은 검은 알을 유리한 자리로 옮겼다.

 

"선배님은 담배 안 피시네요. 끊으셨어요?"

 

기다란 손가락이 멈칫하더니 아래로 길게 늘어진다.

 

"..깡패새끼가 폐암으로 뒤지면 웃기잖아."

 

신우는 조용히 하얀 알을 움직인다. 경찰이세요, 선배님. 해줄 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잘 하셨어요."

 

강형철과 달리 선을 움직이지도, 넘어오지도 않는 신우가 자성도 싫지는 않다.

 

"담배 싫어하나봐."

"좋아하는 사람이 골초거든요."

"애인?"

"아뇨. 그냥 저만요."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갑자기 밀려오는 흡연욕에 자성은 마른 입술을 쓸어내린다.

 

"...그런 거 뭐 하러 해."

"그러게요."

 

담담한 신우가 부럽기도, 누군가가 겹쳐지기도 한다. 자성은 도망치듯 말을 잇는다.

 

"어떤 사람인데."

"뭐.. 담배 많이 피는 사람이죠."

 

결국 쓴웃음이 번진다. 어쩔 수 없이 못 말리는 골초 한 명이 떠올랐다. 오래 살라며 억지로 금연 시켜놓고 저는 하루에 두 갑이나 피워대는 멍청한... 자성은 눈을 감는다. 바둑알 놓는 소리가 명쾌하게 울렸다.

   

 

138.

속이 울렁거린다.

 

"씨빠 부라더~"

 

벚꽃놀이로 꽉 막힌 도로에 한참을 묶여 있다 왔더니 자기 사무실인 양 의자에 앉아 손을 흔드는 청이 보인다. 자성은 할 말을 잃는다. 그대로다. 꾸불대는 머리카락도, 흰 양복도, 커프스 없는 소매도, 양말 없는 구두도, 세 달 만에 불쑥 자기 멋 대로인 것도.

 

"뭐시여. 조낸 간만인디 반갑지도 않으냐?"

"......"

"하여간에 까슬한 시키. 여전하고마."

 

툴툴대며 일어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청이 빙글빙글 웃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째 얼굴이 더 꺼슬허다. 중구시키가 지랄해쌌냐?"

"......"

"좆같은 주둥이가 또 딱 붙어 부렀고마. 어야, 썩무!"

 

바로 앞에 있었는지 득달같이 굴러 들어온 석무에게 ‘어째 느 형 얼굴이 요 따우여. 느가 형 거까지 다 빼사 먹었제!’ 허벅지를 걷어차는 청과, 뭐가 좋다고 맞으면서도 스물스물 히죽거리는 석무를 멀거니 바라보며 자성은 생각했다.

없던 일이 됐구나. 원하던 대로, 그토록 바라던 대로 다 없던 일이 돼버렸구나.

   

 

139.

화려한 사업성과를 브리핑하고 며칠 뒤 청은 다시 공항에 섰다. 오는 내내 짱깨새끼들이 나가 없으면 일을 못 한다는 둥, 중구새끼는 날이 갈수록 질풍노도가 완전하시다는 둥, 노친네 정력제나 겁나 사다줘야겠다는 둥 너스레를 떨어대는 청의 옆에서 자성은 내내 묵묵했다.

 

"보름에 한 번은 드 올 테니께 마중 나와야 쓴다?"

"형님이 애요. 얼른 들어가세요. 양 변호사 기다리네."

"그려, 애다, 이 씨불럼아! 거 좀 나오는 거시 뭐가 어렵다고."

 

청은 들어가기 직전까지 떠들어대고 자성은 무심히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하나 변한 게 없는데도 석무는 자성의 등이 그렇게 시려 보일 수가 없었다. 석무는 몇 달이 지나서야 그게 착각만은 아니었다고 확신하게 된다. 청은 자성의 생일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40.

생일기념으로 니가 술을 사라며 다짜고짜 끌고 온 중구를 룸에 두고 자성은 문 밖에서 피지 못할 담배를 문다. 상해에 있는 청의 전화다.

 

[나가 이번에는 꼭 갈라고 했는디, 씨빠 짱깨새끼들이 칼부림이 나가지고. 미안하게 됐다.]

"깊게 끼어들지는 말아요."

[...아따. 걱정해주는 거시여?]

"...언제 오는데요, 한국은."

[마무리 되믄 가야제. 영감님도 너무 길다 허고 썩무 뒤통수도 궁금허고. ..거긴 비온담서. 별 일 없제?]

"그저께도 없던 별 일이 갑자기 생기겠소."

[...그랄 수도 있으니께.]

 

입이 다물린다. 잠시의 침묵이 무색하게 시끌벅적 선물 운운하는 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을 닫으며 자성은 뒷머리를 짓찧는다. 새삼 숨이 막혔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어느 새 다가온 석무가 조심스레 기색을 살핀다. 자성은 말없이 룸으로 들어갔다. 비가 올 때마다 끝없이 부어대는 중구는 오늘따라 취하지도 않고 있다.

 

"뭐 하다 오냐?"

"거 작작 좀 마셔요."

 

평소 같으며 혀 좀 찼다고 욕을 만리장성으로 해댈 중구가 영 멀쩡한 건 아닌지 비싯 웃기만 한다. 자성은 고개를 털며 술잔을 들었다. 한 잔을 비울 동안 빤한 눈길이 검게 가라앉는다.

 

"이자성이.“

“웬일로 개새끼가 없,”

“너 내 밑으로 들어올래."

 

이 기묘한 술자리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적어도 둘이 마주할 때만큼은 이중구가 재범파의 실질적인 1인자도, 이자성이 북대문의 2인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성은 허공에 멈춰있던 술잔을 내려놓는다.

 

"...그만 일어납시,"

"정청이 그 개새끼 좆같잖아. 뭐든 지 멋대로 구는 거. 그럴 수 있는 거. ..씨발새끼.."

 

중구는 가끔 이렇게, 꼭 뭘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군다. 정신 못 차리게 취할 때마다 지켜주지 못한 여자와 어릴 적 한 번 본 어린 계집애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그렇게 좆같이 되고 싶지 않으면 정청이고 뭐고 다 관두라면서 기억도 못할 얘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자성이 중구를 다 이해할 수 없듯이, 중구가 설령 뭘 알고 있다 해도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정청과 이자성의 시간을, 그 복잡한 실타래를 누군들 알고 이해하겠는가. 이자성 본인조차 그러지 못하는 것을. 중구는 묵묵한 자성을 노려보다 씨발 낮게 뇌까리며 밖으로 소릴 지른다.

 

"계집애들 들어오라고 해!"

"..뜬금없이 무슨,"

"고자냐 새끼야? 빼고 지랄이야. 생일선물이니까 얌전히 받아 쳐 먹어."

 

목소리는 멀쩡한데 눈이 들어 엎을 듯 번뜩거린다. 일어났다간 술잔이라도 날아오겠다. 더 속 시끄러울 기력도 없어 자성은 그저 술잔을 채운다. 몇 명을 부른 건지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진한 향수냄새가 룸을 가득 메웠다. 자성은 미간을 구기며 눈을 내리깐다. 제니에요, 루나에요, 미니에요, 레베카에요. 청이 있었으면 분명 한 마디 했을 거다. 씨빠 뭔 양키촌이여? ...영어는 좀 늘었을 라나.. 상해 어디쯤을 더듬거리던 자성은 번쩍 고개를 든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기억이 맞다면. 몇 년 전 이 날 만났던 그 이름이다.

 

“새끼, 취향이 꼭 저 같네.”

 

중구의 비죽거림에 산발적으로 터진 가느다란 웃음 사이에서 홀로 무표정한, 한자경이었다.

 

 

2010년 10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기억이 맞다면.

몇 년 전 이 날 만났던 그 이름이다.

 

 

141.

따로 룸을 잡았다. 달릴 건 달린 모양이라는 중구의 비죽임에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짙은 화장과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빨간 치마. 낯설지만 확실히 그 여자였다. 리튼 호텔. 한주경. 우연이 두 번이나 반복될까. 자리에 앉자마자 날선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왜, 언제부터 같은 것들. 주경은 담담했다. 약쟁이 아버지와 감당할 수 없는 빚, 끝내 외면하지 못한 혈연, 알바를 세 개나 뛰면서 고시공부를 하던 여자가 술집까지 들어오게 된, 그러고도 죽지 못한 질긴 목숨에 대해서... 긴 얘기가 끝났을 때 자성은 사그라질 듯 웃는 여자가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독히도 살고 싶어 하는 이자성이었다.

그 후로 자성은 종종 혼자 술집을 찾았다. 주경은 말수가 적었다. 침묵을 메우기 위해 쓸데없이 떠들지도, 귀찮게 치대지도, 갑자기 사라지지도, 괴롭게 다정하지도 않았다. 늘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다. 주경은 술잔을 들이켜고 마이크를 잡았다.

 

"..고마워서요."

 

노래가 시작됐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자성은 그날 주경을 안았다.

   

 

142.

삼합회 새끼조직 간의 칼부림이 생각보다 크게 번지는 통에 거의 일 년만의 귀국이었다. 서프라이즈 제대로 해보겠다며 공항에 와서야 석무에게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끊은 청이 움직이질 않는다. 재헌은 양변호사의 초조한 눈짓에 조심스레 청에게 다가섰다.

 

"형님."

"......."

"...형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부르는 것도 모를 정도의 일이면.. 재헌은 다급해진다.

 

"왜 그러십니까. 작은 형님께 무슨 일이라도... 설마 이중구 그 새,"

"이 씨빠새끼가. 아무리 좆 같어도 형은 형이라고 혔제."

 

뒤통수가 번쩍한다. 청은 재헌의 죄송합니다가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 미뤄 봐라."

 

한 마디 툭 던지고 돌아 나갔다. 허둥지둥 청을 따라 도착한 곳은 생뚱맞게도 명품매장이었다. 짝퉁만 집어내던 사람이, 그것도 여성명품매장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거액의 백을 산다. 그 의문의 형수님인가? 안 만나시는 줄 알았는데.. 근데 뭐 하러 비행기까지 미루신 거지? 중국제가 더 낫나? 쇼핑백을 끌어안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재헌에게 청이 핏 입고리를 올린다.

 

“눈깔이 한 번 버라이어티하게 돌아가는 고마.”

“..죄송합니다. 근데 저.. 형수님.. 겁니까?”

“나 말고 느 작은 형.”

“....예?”

“느 작은 형수 생겼다."

 

맞지 않았는데도 뒤통수가 번쩍했다. 

  

 

143.

국내로 복귀한 청은 6개월 사이 세한빌딩과 천안 빌리지 수주를 따냈다. 이중구와도 나쁘지 않았다. 영진유통 건으로 마찰을 빚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정도였다. 누가 봐도 골드문의 실질적인 2인자는 정청이었다. 자성은 골드문 내 여러 사업에 관여했다. 석동출이 치하할 만큼 깔끔한 일처리에 가장 크게 덕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이중구였다. 청과는 달리 제 성질을 참지 못해 종종 판을 들어 엎는 중구의 뒤처리를 자성이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몇몇 이사들은 정청과 이중구 사이가 극으로 치닫지 않게 중간역할을 잘 해내는 자성을 청이나 중구보다 높게 평가했다. 중구는 골드문 외부로 사무실을 옮겼다. 사방이 뚫린 공사 중 건물이었다. 누굴 밀어버리기도, 여차하면 뛰어내리기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중구는 제가 좀 지쳐있다는 걸 알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팽해주면 칼춤이나 한 번 거하게 추고 이 더러운 바닥 종 쳐버릴 것을. 애매했다. 석동출도, 제 자리도, 두 짱깨새끼도.

청과 자성은 여전했다. 청은 치대고 자성은 질색하는 척 받아줬다. 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때가 있었다. 처음 만난 자경에게 명품백을 건넨 청에게 자성이 왈칵 짜증을 쏟았을 때가 그랬고 상해로 가는 공항에서, 시퍼런 인천 바다를 바라보며. 둘은 종종 전에 없는 침묵에 쌓였다. 하지만 석무는 정청과 이자성 사이는 이상 없음 이라고 보고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단지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말할 수가 없었다. 자성을 멀거니 바라보는 황갈색 눈동자를, 프락치 처리에 익숙해진 자성의 시푸른 등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사이사이 미묘하고 불안한, 그 서글픈 공기를.

 

   

144.

지리한 여름비를 무심히 바라보던 자성이 뜬금없이 여수로 가자했다. 말린다고 들을 고집이 아니라 석무는 하는 수 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가는 내내, 도착해서도 자성은 말이 없었다. 굳게 잠긴 사무실 앞에서도, 폐업딱지가 붙은 중국집에서도, 허물어진 단칸방을 보면서도. 하지만 눈에 설은 슈퍼에서.

 

“의원아재? 돌아 가셨는디.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인가. 발을 헛디뎌 길바닥에 구르드마 그대로 가뿌렸소. 노인양반들이 원체 그러니께. ...개? 아. 몽몽이 말하는 갑네. 것도 시름시름 하드마 얼마 못 가 혀 빼물었제. 즈 주인이 죽은 걸 알았는지 으쨌는지.. 근디 캔 커피 하나만 산다요?”

 

기어이 휘청이는 자성을 부축하며 석무는 이를 악 물었다. 방파제로 향하는 등이 바싹 말라 있었다. 의원을 뿌렸다는 바다를 한없이 보고 선 자성 뒤에서 석무는 제가 울어버릴 것 같았다. 깡패 뒤치다꺼리나 하던 별 볼일 없는 노인네의 허망한 죽음 때문인지 시원하게 울지조차 못하는 자성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단지. 알고 싶지 않았다. 목울음이나 겨우 삼키며 잘게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청이었다.

 

   

145.

"왔냐."

 

자성은 집 앞에 쭈그려 앉은 청을 멀거니 바라봤다. 비밀번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풀 방구리 쥐 드나들듯 할 때도 있었으면서 안 들어가고 여기 있겠다고 고집을 놓았단다. 우산은 또 어디다 팽개쳤는지... 그나마 맨발이 아니라 다행이다. 자성은 축축한 청 옆에 나란히 앉는다. 진득한 술 냄새가 풍겼다. 청 것인지 제 것인지 모르겠다.

 

"...여수 다녀왔소."

"그려."

"...없더라. 다.. 없어졌더라구.“

“.....”

“...선생님 돌아가신 거... 알았소?"

"...그르냐.."

 

덤덤한 청을 돌아볼 수가 없다. 경구를 보냈을 때처럼, 어미를 뿌렸을 때처럼 나직한 숨소리가 가슴을 짓눌러서... 청은 담배 두 개비를 태우고 일어난다.

 

"드가 쉬어라."

 

멀어지는 등이 구부정하다. 오는 내내 곱씹었던 한 마디가 손 쓸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나 자경이랑 살려고 하오."

 

돌아보지도, 멀어지지도 않는다. 자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청이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할 말 없소?"

"......"

"나한테 정말 할 말 없냔 말이오."

"...듣고 싶냐. 나가 뭐라 할 지."

 

무거운 목소리에, 마주치는 음울한 눈동자에 목이 막힌다.

 

"말해봐라. 참말로 들을 수 있겄냐, 느."

 

그 밤도, 거실바닥에 머리를 쳐 박으며 긴 울음을 쏟아낸 아침도 모두 지우고 싶었다. 청을 기다리며, 기다리지 않으며 몇 번인지 모를 낮과 밤을 보내며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기로 했다. 그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스터베이션 같은 거였다. 그저 그런 거였다. 청에게도 그래야 했다. 하지만 원하던 대로 됐을 때. 자성은 기쁘지 않았다. 그게 싫었다. 상해에 일 년을 머무르면서도 꼬박꼬박 제 안부를 챙기는 청에게 예전과는 다른 무게의 죄책감을 져야하는 것도, 어이없는 원망도 전부 다 싫었다. 무엇에서 도망친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알게 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 그 알맹이를 손에 쥐고 나면. 버티지 못할 제 자신을 진저리치게 잘 알았다. 지금도 간신히였다. 간신히, 정청의 부라더로 살고 있었다. 다 거짓인데, 처음부터 그랬는데, 조금만 가면 끝인데,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온전히 잊고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는데...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무너질 수 없었다. ...살고 싶었다.

 

"...축하헌다. 제수씨한티 잘해줘라."

 

가만히 미소하는 청에게 자성은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46.

"웬일이냐? 먼저 술 먹잔 소릴 다 하고."

"비 오는데 잠잠해서."

"허이고, 감격스러워라."

 

중구는 양주를 따르며 자성을 살핀다.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이닥쳐 술 한 잔 하자는데 그냥 일 리가 없다. 일이라면 이럴 놈이 아니고.. 정청이겠지. 중구는 한숨을 삼킨다. 한주경과 계속 만나기에 차라리 잘 됐다 했다. 사내새끼들끼리, 그것도 깡패새끼들끼리 장난질도 아니면 좋을 일보다 나쁠 일이 더 많거니와, 죽이든 죽든 언제고 끝을 볼 수밖에 없는 청이 자성과 대놓고 그렇고 그렇게 되면 제 꼴이 정말 우스워질 것 같았다. 자성이 한주경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빤했지만 그러니 더 잘 된 거였다. 깡패새끼들한테 마음 따위 짐밖에 더 되나. 잘 됐다, 잘 가고 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뭐?"

"식은 안 하고 혼인신고만 하려,"

"정청이는."

"...형님 뭐요."

"그 새끼는 뭐라냐고. 말했을 거 아니야."

"...뭐. 축하한다지."

 

축하고 나발이고, 잘 됐고 다행이고 뭐고 미친놈부터 치고 나온다. 도살장 끌려가는 소 새끼 낯짝을 하고. 보나마나 정청이도 똑같을 텐데... 축하? 아주 쌍으로 지랄을, 쌍지랄을 떨고 계시네들, 니미... 빌어먹을 짱깨새끼들. 중구는 허하게 웃는 자성을 노려보며 벌컥 술잔을 비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썼다.

   

 

147.

"결혼은 아니고 합쳤다나 봐요. 한주경이라고 술집 여잔데 자세한 건 보고서에 있어요. ...듣고 계세요?"

[......어.]

 

목소리가 잠겼다. 신우는 안경을 벗으며 눈살을 찌푸린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뭐. 만날 일이지.]

"..그런데 왜 그,"

[신우야.]

“네.”

[...천성임.]

“......”

[대충 해라. ..그냥 대충 해.]

 

철두철미한 강형철 답지 않은 소리다. 경찰학교 때도 제복 하나 흐트러졌다고 운동장 돌리던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권유받았을 때 신우는 두 번 망설이지 않았다. 커리어를 쌓을 기회기도 했고 존경하는 스승의 부탁이기도 했고 매캐한 담배연기에 눈이 따가워서기도 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몇 번이나 덧붙이는 형철은 그 날도 이렇게 지쳐 보였다. 그 때는 그저 쉴 새 없이 피워대는 담배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알겠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지시하는 사람도, 지시받는 사람도, 관련된 사람 모두에게 하루가 너무 길고 무겁다. 특히 강형철과 이자성은 더욱 그러리라는 걸 신우는 감히 이해한다. 눅눅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엽이 휘날린다. 가을이 끝나고 있었다.

   

 

148.

형철은 어두운 사무실에 홀로 앉아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한주경과 통화를 막 끝낸 참이다. '우리 아버지 잘 계시죠?' 자그마한 떨림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미안하겠지. 미안할 거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러다 어느 날에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멱살을 그러잡고 제가 배신할, 아니, 처음부터 같은 편도 아니었던 어느 이의 생사에 피울음을 물을 지도 모른다... 형철은 이마를 매만진다. 이자성. 착실히 보고도 하고 있고 경찰이다 발악하는 기색도 여전하지만, 믿을 수 없다. 발악이 흔들림의 증거다. 그래서 그랬다. 만에 하나 이자성이 배신한다면 그 손해는 장국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고, 그를 넘어 영영 골드문을 건들일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오석무가 감시할 수 없는 곳, 이자성의 사생활이 필요했다. 약쟁이 아비를 구하고자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한주경을 투입했다. 자성에게 경찰 이자성도 이사 이자성도 아닌 그냥 이자성으로 발 딛고 설 어딘가가 절실하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계획대로 자성은 주경을 받아들였다. 계획대로, 계획대로... 형철은 핸드폰을 닫는다. 무슨 말을 하랴. 계획했고 계획대로고 멈출 작정도 없는 것을. ..곧 끝난다. 정말이야, 인마. 곧 끝나... 형철은 담배를 문다. 자성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스쳐지나가는 듯 했다.

   

 

149.

"유상훈이. 너 죽고 싶냐 이 개새끼야? 지금이 어느 땐데 아무나 들여?!"

 

상훈은 죽상으로 고개를 숙인다. 중구가 이럴 걸 모른 건 아니지만.

 

"워메 바람이 아주 사방데서 시원한 거시 여름에 에어컨도 필요 없겠고마. 근디 지금은 너무 춥덜 안 허냐?"

 

요란스레 주변을 돌아보는 저 정청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서열도 까마득하거니와 재헌 하나 데리고 들어서는데 이미 기가 눌렸다. 청은 저가 뭐라거나 말거나 상훈만 쥐 잡듯 하는 중구를 돌아보며 피식 웃는다. 중구가 저러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다. 근래 골드문은 숨소리도 무거울 만큼 흉흉했다. 11월을 넘어서며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틀어 막혔고 지방 이사들 몇이 구속됐다. 본사에도 경찰이 들이닥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왕래하던 금배지 서넛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으니 헛소문은 아닌 듯 했다. 대대적인 프락치 소탕이 시작됐다. 한 달 새 수십이 죽어나갔다.

 

"고만허고 앉어. 어야, 재헌아. 그거 이리 놔라."

 

재헌은 한숨을 삼키며 청이 말한 그것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소주 서너 병과 오징어다. 나 죽었구나 수그리고 있던 상훈과 너 죽었다 길길이 날뛰던 중구의 어이없는 눈길이 딱 재헌의 심정이다. 자성에게 몰래 연락을 하긴 했지만.. 초조한 재헌을 알긴 아는지 청은 여상스레 소주병을 따며 재헌을 무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재헌은 중구가 상훈을 내보내고 나서야 사무실을 나갔다.

 

“서서 뭐허냐? 고개 아파야?”

"...지금 뭐하는 건데? 죽여 봐라 시위하는 거야?"

"꺼슬허기는. 술 한 잔 하자는 거이지 뭘 죽이고 말어, 시키야. 받어라."

 

잔을 내미는 청은 이제 보니 한참 취해 있다. 호랑이굴에 이자성도 아닌 박재헌만 달랑 데리고 취하기까지 하셨어? 중구는 이게 진짜 내가 얼마나 우스우면 이러나 싶다.

 

"이봐.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주정이셔? 미치려면 곱게 미쳐! 어디서 개수작!"

"우리 부라더하고는 종종 마신담서. 느 사람 차별하고 그라믄 못 써야."

 

이 짱깨새끼 뇌구조는 죽었다 깨나도 모르겠다. 얼척이 없어 아래위로 훑어보자 히죽 웃기까지 한다.

 

"팔 떨어지겄다."

"......."

"받으라니께? 독 안 들었어야."

"........."

"와. 못 믿겄냐? 나가 마시보까?"

"...이딴 거 안 마시거든?"

"으이. 존내 고급이시다 이거제? 씨벌롬. 요게 을매나 맛나는디."

 

잔을 쭉 들이켜고 캬하 탄성까지 내지르는 거 보니 취한 게 아니라 미친 것 같다.

 

"돌았수? 드디어 그 머리통이 아주 맛이 가 버리기라도 한 거,"

"느 회장 되고 나믄 나 죽여 불겄제?"

 

그러기 전에 죽이겠지. 뒤통수가 따가워서 어디 잠이나 제대로 자겠나. 하는 대신 중구는 자리에 앉는다. 불콰하니 벌게진 낯에 그딴 말은 해서 뭐하나 싶다. 하나 닮지 않은 허여멀건 한 인사가 두둥실 떠오르기도 하고. ..젠장. 중구는 담배를 물며 청을 노려본다.

 

"...그래서 뭐. 회장 되면 담가버릴 거니까 목간수 잘 해라 친절하게 충고하러 왔어?"

"큭큭.. 그랄 일은 없어야.. 그딴 기 뭐시가 좋으냐, 니미.."

 

...미친 게 확실하군. 중구는 혀를 차며 일어난다. 그런데.

 

"느가 나를 조자 부러도 ..우리 부라더, 이자성이 말이다. 그놈 시키허고는 술 계속 마셔줘라."

 

고거시 낯을 겁나게 가려 불거덩.. 킥킥 수그리는 청이, 구부러진 등이, 꾸부러진 머리카락이, 축 쳐진 어깨가 당장 골프채를 휘두룰꺼 싶을 만큼 거슬린다. 중구는 소주병을 움켜쥔다. 오랜만에 맛보는 소주다.

 

"..씨발, 존나 구리구만."

 

병을 내던지고 문을 열자 허겁지겁 들어서는 재헌 뒤로 시퍼렇게 땀 맺힌 자성이 보인다.

...존나 구렸다, 정말.

   

 

150.

2012년 1월 1일. 골드문 압박수사가 시작됐다. 주가조작, 횡령, 외환관리법 위반, 탈세, 조직폭력행위 및 협박, 불법대부 등등.. 몇 개월 만에 석동출이 구속되고 주가가 떨어지고 또 몇 개월 후 지방의 몇몇 이사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정청과 이중구는 잠시 암묵적인 동맹관계가 됐다. 이중구는 골드문을 원했고 정청은 북대문을 지켜야 했다. 인천창고에 연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자성은 차라리 편했다. 석동출이 구속된 이상 마지막이었다. 형이 확정되기만 하면 정말 모두 끝이었다. 살 수 있었다. 주경과, 주경이 그토록 바라는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며 사람처럼, 사람답게, 할머니의 유언대로 훌륭하게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청이 없어도, 정청 없이도... 그러고 싶었다. 이제는 정말 그러길 바랐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그 소원만이 간절했다. 그러나.

 

2012년 12월. 무혐의로 풀려난 석동출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신세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Part2.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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