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문: 골드문 입성기
"여어. 자식. 튼실하네."
소변기에 나란히 서서 감탄사를 뱉는 강형철. 그러고 보니 청과 닮은 구석이 있다. 이렇게 지랄 맞게 능글맞은 거 말이다. 자성은 입술을 깨물며 지퍼를 올렸다. 정안휴게소 화장실 11시. 아침 9시 문자였다. 저녁인 줄 알았다고 뻥칠까 하다 방을 나섰다. 상명하복. 깡패 이자성과 경찰 이자성의 유일한 접점이다.
"뭡니까, 갑자기."
"리튼호텔 알지. 로비에서 커피 좀 마셔라. 5시에서 6시. 차는 지하 3층에 대고. 찻값이다."
아닌 밤중 홍두깨도 유분수지만 하루 이틀이 아닌 지라. 한숨을 삼키며 봉투를 받았다.
"얼마 더 넣었다."
"기름 값입니까?"
"정청이가 월급 안 주냐?"
싸늘해지는 낯빛에 형철은 영 입이 쓰다. 지난겨울 정청 어디 있냐며 미친놈처럼 들이댈 때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이전부터 심상치 않았다. 인간적으로야 이해한다. 근 3년을 24시간 붙어 지내면서 계속 데면데면하기가 어디 쉽겠나. 하지만 어쩌나. 깡패는 깡패고 경찰은 경찰이고 일은 일인데. 특히 이 일은 '인간적인 '척'이면 몰라도 진짜 '인간적'인 순간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인마. 하는 대신 형철은 담배를 물었다.
"정청은 상해 갔으니까 괜찮을 거고. 밑에 애들한테 대충 둘러대. 친구나 애인이나 뭐 많잖아. 자."
짜바리 짓하러 간다는 건 어때요 라는 말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형철이 화장실 마지막 칸에서 쇼핑백을 들고 나온다. ..까라면 까야지, 시발.
"...전해주면 되죠."
"뭔지나 보고 말해라."
쇼핑백을 여니 빨간색 스테인리스 보온병이 들어있다.
"...폭탄입니까?"
"야. 이자성이. 너 영화 너무 쳐 본 거 아니냐?"
그래도 자성은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눈치다. 형철은 고갤 저으며 벽에 기댔다.
"미역국이야. 뭐, 맛은 폭탄일지도 모르겠다만.“
“...네?”
"가면서 먹어. 넉넉히 넣었으니까 옷도 한 벌 사고. 꼴이 그게 뭐냐?"
".....그게 무슨..."
"너 오늘 생일이잖아. 10월 15일."
못돼 처먹었으면서 꼭 이렇게 한 번씩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사골이 뼈 붙는데는 와따야 라든가, 할머니 제사는 지내야지 라든가, 양복보다 제복이 더 잘 어울린다 라든가. 형철은 축 처지는 눈 고리를 바라보다 휘휘 손을 젓는다.
"가라. 늦겠다."
"...미역국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사내자식이 가리긴. 가 인마."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건지, 좆같다는 건지 무뚝뚝하게 웅얼거리는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형철은 필터를 잘근거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고마우면 잘 해. 미역국 값 잊지 말고."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등이 까슬하게 말라 있어, 형철은 그 자리에 선 채 담배 반 갑을 비웠다.
**
[옴마. 우리 부라더가 친구도 있어야?]
"...아는 애에요."
[하여간에 까칠한 시키. 암튼 잘혔다. 나도 없는디 여수서 뭔 재미로다가 생일을 보내겄냐. 맛난 거 마이 묵고 재미지게 보내라이?]
진짜 반갑다는 목소리에 습관적으로 품을 뒤진던 자성은 순간 탁 맥이 풀린다. 담배 끊었지, 참.
[선물은 뭐 사다주까?]
"그냥 와요. 애들 고생시키지 말고."
[형님 뿌레젠또 사는디 어떤 씨벌롬이 고생이라냐?]
"거 쓸데없는 거 사오지 말"
[시계. 시계 으뜨냐. 시간은 금잉께. 좋지?]
"됐다니"
[그럼 금? 그건 돈이 쪼까 부족한디.]
"..........끊습니다."
[이 씨빠빠가 형님 말씀하시는!]
데 끊어버리고 지랄이라고 옆에 있는 재헌이만 죽어나겠다. 저도 모르게 피식거리던 자성은 옆자리에 놓인 쇼핑백에 금세 입고리가 가라앉는다. 금연, 정말 괜히 했다.
**
6시 땡 치자마자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죽는 줄 알았다. 차라리 정청 폭풍수다가 백배는 낫겠다. 경찰도, 정보원도 아닌 그냥 여자였다. 술집여자도, 몸 파는 여자도 아닌 정말 그냥 여자. '한주경이에요.' 커다란 눈동자도, 무릎 위에 놓인 손도, 어깨 근처에서 찰랑이는 생머리도 조신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여긴 왜.. 겨우 한 마디를 묻자, 어떤 분이 부탁하셔서요. 가느다랗게 답했다. ..어디 그런 여자한테.. 신고하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아무튼 그게 다였다. 정말 차만 마셨다. 대체 뭐지, 오늘. ...설마 생일 챙겨준 건가. 자성이 괜한 뒷머리만 만지작거릴 때였다.
주차장 입구에서 한 무더기의 양복 부대가 들이닥친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중년의 남자,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
!!!!!!
골드문 석동출.
그 옆은 오른팔 이중구.
스카우트 건으로 몇 번 여수에 왔었다. ...우연일 리가 없다. 생각하자마자 답처럼 검은 승용차들이 몰려든다. 같은 양복 패거리지만 딱 봐도 같은 편이 아니다. 주차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이중구가 석동출 앞을 막아서지만 봐 줄만한 실력이 아깝게 너무 열세다. 점점 코너로 몰리는 사이, 석동출 뒤로 슬금슬금 다가서는 까까머리가 보였다. 손에 회칼을 들고 바들바들 떨며. ....하. 자성은 짧게 웃고 만다.
미역국 값 한 번 더럽게 비싸다. 씨발.
**
청은 상해에서 석동출의 전화를 받자마자 제일 빠른 비행기를 탔다. 8차선 도로를 휘저으며 서울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친구 만난다던 놈이 왜 병원에 있는지, 그 소식을 왜 석동출이 전하는지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자성은 만신창이였다. 타박상, 찰과상은 애교로 자상만 수십 개, 가장 치명적이었던 건 복부라고 한다. 내장이 찢겨서 수술만 열 몇 시간이 걸렸다고... 오지랖 떨지 말라고 지랄 해싸던 놈이 왜 남의 집안일에 껴서 이 사단인지. 청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놓는다. 석동출 뒤로 팔과 목에 깁스를 한 이중구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게 다 뭐여요?"
"나도 도움을 받은 처지라."
"그러니께 야가 우연~히 여그 와서 우연~히 영감님을 구하다가 우연~히 뒤질 뻔 혔다? 허. 거 참 존내게 재미지네요이."
"이 짱깨새끼가!!"
눈을 부라리는 이중구를 저지하며 석동출이 빙긋 웃는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믿기 힘들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어쩌나. 그게 사실인 걸."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여.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청은 동전을 잘그락대기 시작한다.
"암튼 허벌 고맙소이. 우리 아를 이라고 비싼데 누봐주고. 아. 방값은 어디로 붙여주까요? 재헌아. 이런 덴 하루에 을매나 허냐?"
"좋은 수족을 뒀더군. 칼 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이삐게 봐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겄네요. 깨나면 전해주께요."
"이름이.. 이자성이라고."
스치듯 굳는 낯에 석동출은 슬며시 속웃음을 문다. 확실하군. 여수 들개의 약점.
"이 참에 나한테 주는 건 어떤가. 한 번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데."
"....영감님 뒤에 있는 아나 더 키우시지 그려요. 조또 질풍노도던디."
정청 말대로 폭발 직전입네 드러내고 있는 중구를 돌아본 석동출이 얕게 혀를 찬다. 이런 작은 도발에 넘어가서야 어디. 게다가 이런 정청을 앞에 두고 말이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는 사내. 적진 한 복판에서 저 정도 배짱이라면 둘 중 하나다. 포섭하지 못하며 죽여야 한다. 여수바닥에서 끝날 그릇이 아니다. 석동출은 짐짓 뒷짐을 졌다.
"우리 애가 실례 했다면 사과하지."
"회장님!"
"어허."
"......"
"이자성이 안 되겠나. 내 값은 후하게 쳐줌세."
자성을 걸고넘어지는 속내야 빤하다. 대가리만큼 눈치도 조또 좋은 거다. 거 참 피곤하게. 청은 이를 드러내며 히죽인다.
"영감님 말씀 좀 가려 하셔야 쓰겄네요. 무신 도떼기시장서 약 파는 것도 아이고 멀쩡한 남의 동상 놓고 뭔 말을 그리 험하게 하신데요."
"얼마면 되겠나. 일 억? 이 억?"
금쪽같은 작은 형님 소식에 부랴부랴 달려온 북대문 어깨들도 점점 험악해진다. 저 노친네가 가을에 더위를 잡쉈나. 왜 작은형님 가지고 지랄이야. 씩씩대는 숨들이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날 듯하다. 하지만 북대문은 정청이 뼛속까지 박힌 집단이었다. 청이 가만 있는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뜻이다. 느긋한 석동출을 한참 마주보던 청은 씨익 입고리를 올렸다. 석동출의 예상대로 이자성은 청의 유일한 약점이었지만 그래도 정청은 정청이었다.
"영감님 목숨 값은 을만디요."
재헌을 비롯한 북대문과 중구를 위시한 재범파 사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청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줄라믄 그만큼은 주셔야겄는디요. 아니. 배는 받아야겄제, 재헌아? 우리 부라더가 영감님보다야 팔팔하잖여."
"물론입니다, 형님."
"어째. 주판 한 번 굴려 보시겄어요?"
"......."
"아. 근디 요새 주머니 사정이 솔찬히 쪼들린담서. 괜찮겄소?"
"이 씨발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워따. 그 짝은 형님들 말씀 하시는디 막 껴들고 그려도 되는가 봐요. 쯧쯧. 영감님 걱정이 깊~겄소."
"이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그라지 말고 자를 나한테 보내요오. 나가 홍어만치로다가 팍 삭혀서 보내줄라니께. 돈도 안 받으께요. 우리 부라더를 수술까정 시켜주셨는디 공짜, 프리로다가. 어야, 썩무? 프리 맞제?"
"맞습니다, 형님."
"아따 요새 잉글리시가 막 늘어버려야. 우리도 뭐시냐 북대문 말고 노쓰도어 이래 불까? 어떠냐 야그들아!"
"훌륭하십니다, 큰형님!"
일사불란한 박수소리에 이중구는 뒷목 잡고 쓰러질 판이다. 촌구석 짱깨새끼들이 이덧 겁대가리 없이 이빨을 까고 지랄인지. 무식하면 용감해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중구가 빠드득 이를 갈며 허리춤의 칼로 막 손을 뻗을 때였다.
"하하하하!!!"
이 와중에 너털웃음이라니. 설마 노망? 이면 에브리바디 해피하겠지만, 청은 골이 아파왔다. 석동출의 눈이 번쩍이고 있다.
"정말 재미난 친구로군. 소문이 너무 작았어. 자네는."
"......."
"내 잘 알겠네. 환자도 계시니 그만 가지. 이따 저녁이나 같이 들면서 애기 더 나누자고."
"...말씀은 고마운디 나가 지금 목구멍으로 뭐슬 넘길 형편이 안 되나서요."
"그럼. 지금 하겠나?"
석동출이 자성을 내려다본다. 약한 짐승을 먼저 잡겠다는 거다. 청은 웃음을 거뒀다.
"겁나 비싼 거 사주실라나 본디 나가 촌놈이라 잘 처 묵을라나 모르겄소."
"걱정 말게. 입맛에 딱 차려 줄 테니까."
**
자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천장. 샛노란 병... 어디지 여기가. 반쯤 일어나던 자성이 옅게 신음하며 다시 꼬꾸라진다. 배를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아프냐."
"...으으..."
"그려. 아퍼야재. 배때지를 그라고 쑤셔박혔는디 안 아프면 인간도 아니재."
겨우 고갤 들자 파마머리가 잔뜩 찌푸리고 있다. 근데 까까머리 아니었나...
"...여기 여수 아니에요?"
"...환장하겄네. 지옥 아가리다, 이 씨벌놈아."
눈을 까뒤집고 패더니 결국 그렇게 됐구나.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는데. 안 아픈 건 그래선가. 근데 왜 배는 아프지. ...뭐 아무렴 어때. 이제 그 끝 간 데 없는 줄타기는 안 해도 되는데. 믿어서 상처 받을 일도, 상처 줄 일도, 의지와 상관없는 마음에 괴로울 일도 없는데. 자성은 편안히 눈을 감고 바로 누웠다. 그 덕에 청만 죽을 맛이다. 보아하니 정말 죽은 줄 아는 모양인데. 귀 빠진 날 칼이나 맞는 병신을 팰 수도 없고. 색색 잦아드는 숨소리가 천불을 지펴 청은 그만 병실을 나섰다. 비상계단에 나가 담배를 무니 속이 좀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아까 레스토랑에선 그렇게 쓰더니. 담배도 낯을 가리나 보다.
석동출의 제안은 명확했다. 자기 밑으로 들어올 것. 파격적으로 서열 3위 시켜 준단다. 그 미친 또라이 새끼보다 위다. 하지만 거절할 시 이유 불문하고 지금 바로 전쟁. 이자성이를 죽여 볼테면 죽여 봐라 그거겄재. 씨벌 새끼..
자그마한 창 아래 펼쳐진 서울을 내려다보며 청은 동전을 쥐었다. 여수보다 퍼렇고 차가운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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