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산
원은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더미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산을 번갈아보다 피식 웃는다.
-농담이지?
-뭐가?
신분을 숨겨야 하니 반말을 쓰라 하긴 했다. 그러긴 했는데.
-지금 아무도 없거든?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조심하라며.
어찌나 말을 잘 들으시는지. 충신 나셨다, 아주. 원은 입술을 삐죽이곤 빨래더미가 담긴 바구니를 툭 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이런 걸 어찌 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우리 스승님 철칙이셔서.
-니 스승은 놀면서?
-윗사람은 원래 그래. 잘 알잖아?
아주 작심한 얼굴이다. 어제부터 뭔 심통이 난 거야. ..아니. 뭔 심통이 났든간에. 원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삐딱히 선다.
-그래서. 나더러 이걸 정말 널라고.
-물기 탁탁 털어 반듯이. 주름 안 지게 쫙.
-싫다면?
-그럼 뭐. 내려가야지.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개경 있을 때 재워주고 먹여주고 누가 했는데.
-린 공, 아니, 수인이.
-금과정 내 소유거든?
-그럼 수인이더러 하라 할까?
-곤히 잠든 놈을 깨우겠다?
-깨워?
-...치사한 놈.
결국 오만상을 찌푸리며 젖은 저고리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드는 원에게 산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어허. 두 손으로.
-...아주 신이 나셨구만.
투덜대면서도 산의 말에 따르는 원이다. 근데, 따르긴 따르는데, 옷을 잡고 흔드는 꼴이 물기를 털자는 건지 그냥 흔들자는 건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왕세자는 왕세잔 거다. 어디 빨래 근처에나 가봤겠어. ..그런 사람이 왕린 부를까 한 마디에 입 꾹 다물고 고분고분. ..에효. 이게 무슨 심술이냐. 스스로가 한심해진 산은 옷 하나 들고 아주 씨름을 하는 원에게서 빨래를 채들었다.
-그렇게 하다간 내년에나 다 널겠네. 됐으니 가서 마당이나 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가져간다. 그새 고집이 꽉 들어찬 눈이다.
-내가 한다.
-하긴 뭘. 이리 줘.
-한다니까, 내가.
-아 됐다니까.
-하랄 땐 언제고 왜 뺏어가!
-이렇게까지 못할 줄 알았나!
-하면 해! 이까짓 게 뭐라고!
-아 진짜! 이리 내라니까!
쫘아아악!!!
어린애 저리 가랄 옥신각신의 끝은 결국 불길한 소리다. 원과 산은 이쁘게도 찢어진 저고리 팔을 한 쪽씩 쥐고 서로를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느질 할 줄 아니.
-....알 것 같아요?
엉겹결에 존댓말로 회귀한 산이 짝 잃은 저고리를 쥐고 울상을 한다.
-그러니까 놓으랄 때 놓지!
-니가 놨으면 되지 않느냐!
-하! 이게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그러게 첨부터 안 한다질 않았어!
-끝까지 안 했어야죠, 끝까지!
으르렁거리던 둘은 등 뒤로 다가온 인기척에 짜기라도 한 듯 후다닥 저고리를 품 안에 쑤셔넣었다.
-...뭐 하십니까?
원과 산이 동시에 긴 숨을 뱉으며 돌아선다.
-놀랐잖아요.
-일어났어?
-무슨 일인데요.
-뭐..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 이 보십시요. 이 세...이 양반이 이 저고릴 반으로 쫙 찢어놨지 뭡니까.
-와. 얘 진짜 웃기네. 같이 했잖아!
원이 그러거나 말거나 산은 조심히 린에게 다가선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느질 같은 건..
-그걸 얘한테 왜 시켜!
-그쵸? 못하죠? 나도 참 괜한 걸.
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두 사람에게서 저고리를 가져간다.
-반짇고리는 어딨습니까.
-우현 사형께.. ...근데 할 줄 안다구요?
-...어쩌다 보니.
슬쩍 원을 곁눈질한 린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후다닥 말을 잇는다.
-방 앞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럼.
달리나 싶게 멀어지는 린을 멍하니 보던 산이 원을 돌아본다.
-..싸웠을 리는 없고.
-그치. 쟤 이상하지.
-그러게요. 화났나?
-이런 걸로 화낼 놈이면.
-...그쵸. 근데 왜 저러지?
-......
-오해라고.. 아직 얘기 안 하셨어요?
산은 괜히 찔려 원을 살핀다. 잘생긴 눈동자가 미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몸이 편치 않다 전갈한 송인은 집에서도 가장 깊은 밀실에 종일 틀어박혀 있다. 부용은 차를 마시며 검은 천 너머 꼿꼿한 등을 끈기있게 바라봤다. 다과회 통보가 내일이니 오늘 중에는 어떤 결심이든 하실 것이나.. 이리 고민하실 일이었구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저를 충렬에게 보낼 때에는 한 시진, 아니 반 시진도 생각지 않으셨다. 그저 가겠느냐, 싫으면 싫다 해도 된다, 조금쯤 다정하셨지. ...그 조금이면 족했다. 이 몸뚱이쯤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었다. 그것을 후회치는 않는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용은 같은 결정을 할 터였다. 송인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무석아.
..결정을 하셨는가. 한숨을 삼키는 부용 옆으로 무석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또 한 번의 피를 각오한 눈이다.
-하명하십시요.
-그 댁에 세자의 호위가 있다고.
-예.
-빼낼 것이니 ...아가씨를 잠시 모시거라.
무석의 답이 한 박자 느려진다.
-..잠시라 하시면.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다.
무석이 좀 놀란 듯 부용을 돌아본다. 부용은 미동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 공자께 말씀하실 겁니까.
-..알아 좋을 거 없겠지.
역시. 알리길 꺼리신다. 혹여 그분의 귀에 들어갈까 그것이 염려이신가. ..이 분께도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다과회 후에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왕비의 자존심에 아가씨를 다시 간택하진 않을 것이다.
-원성전의 진노가 클 것입니다.
-대신들을 움직여 봐야지.
-..그 전에 세자가 나서겠지요.
긴 침묵 끝에 실소가 흐른다.
-..그러실 테지.
-좋은 일이겠습니까.
-......
-세자가 그리하면 세자에 대한 전하의 의심이 덜해집니다. 지금도 일말의 정을 품고 계심을 아시지 않습니까.
-......
-또한 원성전의 진노를 끝내 막지 못할 시 세자가 나서 아가씨와 혼인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제 어미의 손에 아가씨 집안이 풍비박산 나느니 그 편이 낫다 여기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로군.
부용은 한 모금 차를 넘기고 등을 세운다.
-죽이십시요.
송인의 등이 멈칫 굳는다. 부용은 낌새를 모르는 양 평온한 낯을 했다.
-죽이고 원성전의 일로 만드십시요. 아무리 원성이라도 흔들릴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을 얻을 길도 열리겠지요. 옥구슬 같은 음성에 단호함이 서린다.
-수사공 댁 왕린 아가씨. 죽이셔야 합니다.
..다 가지십시요, 나리. 모두 다 가지시게 이년이 돕겠습니다.
부용의 흐린 미소가 찰나 흩어졌다.
**
턱을 괸 산은 땡땡 불어있는 원을 복잡한 심경으로 건너본다. 웃기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꼬숩기도 하고 답답도 하고 속상도 하고 귀엽다.. 싶기도 하고. 개경에선 그리 세자다웠던 이가 지금은 어찌 이리 세 살짜리 같은지.
-저 놈. 지금 린한테 히죽 입고리 올린 저거. 저 자식 이름 뭐.. 어쭈? 감히 눈을 맞춰? 눈알을 확 파버릴까보다.
내 죄지 싶다. 괜한 심술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누굴 탓하랴. 그러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사단이 난다니까. 산은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 대청으로 고개를 돌린다.
린의 주변으로 두타산 제자란 제자는 죄다 모여있다. 왕족씩이나 되는 분 옷 꿰매는 솜씨가 저렇게까지 좋을 건 뭐며 그 야무진 솜씨를 하필 스승님이 보실 건 또 뭐란 말인가. 저고리는 내 탓이니 하나만 봐주겠단 듯 뚱하게 노려보는 원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승휴는 린이 꿰맨 저고리에 연신 감탄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바느질 하나에도 세상 이치가 담겨있다나 뭐라나. 암튼 다들 옷들고 린에게 와 배우라 한 거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원에게 너는 바느질로 이치를 깨칠 짬이 안 되니 멀찍이 있든가 집으로 돌아가란 말을 덧붙이며. ..와. 진짜 그때 저하가 스승님 때리는 줄. 아니. 눈빛으론 이미 백 대쯤 때린 거나 진배없었다. 스승님도 아셨을 거다. 그러니 싱긋 웃고 줄행랑인듯 줄행랑 아닌 줄행랑을 치셨지. ...머리야. 산은 이마를 짚으며 고갤 절레 젓는다.
두타산 제자들은 어쩜 이리 스승말을 잘 듣는지 중천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지금까지 열심이다. 그 말인즉슨 원의 이가는 소리를 한나절 듣고 있었단 소리다. 처음엔 좀 미안했는데 아이고 미안은 얼어죽을. 전에 채련회 때도 느꼈지만 원은 질투심이 아주 완전하셨다. 린이 조금만 웃어줘도 활활. 손끝만 살짝 닿아도 화르르륵. 사형들도 대단한 게 이 사나운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그러니 불난리가 나지 왜 안 나겠나.
마지막 제자가 달덩이처럼 환한 얼굴로 린의 손을 덥썩 잡아 흔들고 떠난 후. 셋만 남은 공간엔 침묵만 멤돈다. 당장 린을 끌고가 남이 닿은 곳을 죄다 씻기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옆으로 틀어앉은 린을 빤히 보기만 하는 원에 차츰 산까지 긴장이 더해진다. 이걸 말려야 하나. 아님 그냥 자리를 비켜주고 말까. ...근데, 참 나. 뭐 이런 한심한 고민을 하게 됐지. 이 사람이 뭐라고. 산은 한숨을 깨물며 원을 힐끔인다.
-소화야. 수인이 저 놈이 내 눈을 종일 한 번도 안 보는데 무슨 일일까?
당사자 앞에 두고 왜 나한테.. 하며 린을 돌아보던 산이 조금 휘둥그레진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저 사람...
-그런 것이..아닙니다.
-그거 알아? 저 놈의 저 '그런 것이 아닙니다.'가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말인 거. 특히 눈도 못 맞출 땐 더더욱.
여전히 이쪽은 보지도 않는 눈이 가늘게 떨린다. 단단히 굳은 어깨도 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 옅게 붉어진 뺨이며 무릎 위에 꽉 마주 얽힌 기다란 손가락.. 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뭔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내 눈 앞에서 난 보지도 않고 딴 놈들이랑 희희낙락 한 건데.
-..뭔가 오해를
-내 눈 보지도 않으면서 오해.
-......
-화난 거냐? 예까지 온 이유 말 안해서?
-..아니라지 않습니까.
-눈.
참을 만큼 참았는지 린에게 직접적으로 쏴대기 시작한 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린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 긴장하며 어쩔 줄 모르는 이유. 전에 같으면 산도 몰랐을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이 치사하고 아프고 쉴 새 없는 마음을 품어보지 못했다면.
-눈 보라고 했다.
-저, 저ㅎ
-한천!
급기야 벌떡 일어나 외로 튼 린의 얼굴을 제게 돌리고 몰아붙이고 있는 원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까. 산은 두 팔을 늘어뜨린다.
린은 화난 것이 아니었다.
왕린은 세자 원을 연모하고 있었다.
**
-..잘 계시는 건가.
-원성전은 별 움직임 없지?
-겉으론.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 수가 있어야지.
늦은 밤. 진관의 답에 길어지던 장의의 한숨이 미묘한 웃음으로 변한다. 진관 품에 곱게 들린 유밀과 때문이었다.
-지극정성도 어지간하네.
갸웃거리던 진관이 장의의 눈짓에 밤중에도 훤히 보일 만큼 두 뺨을 붉힌다. 금과정에서도 검이라면 손꼽히는 자가 암튼 단이 아가씨 앞에서는 숫기없는 허랭이가 되니. 장의는 얼른 앞서가는 진관의 등으로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저하께 청을 드리면 단이 아가씨와의 혼사, 길을 열어주실 거다. 왕족은 아니나 진관의 집안도 그리 기우는 편은 아니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허나.. 왕전. 그 자가 문제다. 대립하는 일이 끊이지 않을 터. 단이 아가씨께, 그리고 저하께 짐을 지울까, 저리 숨기지도 못할 맘으로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는 거겠지, 저 친구는. 곁에서 저하와 린공자가 겪은 일을 다 지켜봤으니 더더욱. ...참 힘든 인연이다. 저하와 공자도, 진관과 단이 아가씨도. 어쩐지 무거워진 맘을 털어내려 장의가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아가씨!
진관의 외침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단이 털썩 주저앉는다. 진관과 장의는 날듯이 달려 단이 앞에 무릎을 접었다. 땀범벅이 된 고운 이마며 눈물을 한 줌 매단 눈동자까지. 진관은 쓰러질 듯 휘청이는 단의 어깨를 얼른 잡는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두타산. 두타산으로 가야 한다. 얼른.
장의와 진관이 우뚝 굳는다. 이 밤 중에 홀로 길을 달린 단의 입에서 어찌 두타산이.. 장의는 애써 침착히 단과 눈을 맞췄다.
-두타산을 어찌 아셨습니까.
단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건넨다. 받아든 장의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어떤 아이가 전해주고 갔다는데.. 저하께서.. 오라버니가.. 흑.. 얼른 가라. 응? 얼른.
진관은 급히 장의를 돌아본다. 장의는 서찰을 장의 쪽으로 기울였다. 진관의 얼굴이 쩡 얼어붙는다.
[저하와 왕린 공자가 산 중 변을 당하여 상태가 위중하니 속히 사람을 보내주십시요.
-은산]
진관과 신속히 눈빛을 주고 받은 장의가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를 꾸민다.
-아가씨께선 댁으로 돌아가 계십시요. 진관이 모실 것
-아니다. 인지(단의 몸종)가 곧 올 것이니 둘 다 가거라.
-..그럼 인지가 오는 것을 보고
단이 진관의 말을 끊으며 손을 뿌리친다.
-한 시가 급하다질 않아! 두 분께서 변고를 당하셨다는데 어찌 이리 태평해!! 얼른.. 얼른 가서 모셔와라. 얼른!!
진관은 반쯤 하는 수없이 일어난다. 나머지 반은 피가 얼어붙도록 초조했다. 장의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겨우 가누며 단에게 묻는다.
-이 일을 또 누가 압니까.
-아직.. 아직 나밖에는..
-인지도 모르는 겁니까.
-그냥 갑자기 뛰어나온 줄만... 걸음이 느린 아이라 예까진 못 온 게고..
-...저희가 올 때까지 아가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다. 알겠으니 어서 두 분을..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단이를 착잡하게 바라본 장의가 짧게 목례하고 등을 돌려 뛰어간다. 따라 달리던 진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단을 돌아봤다. 눈물범벅으로 앉아있는 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작아 보인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하고 고운 분이거늘. 진관은 겉옷을 벗어 다시 단에게 달린다. 어깨에 옷을 걸쳐준 진관이 단단한 눈으로 단을 바라봤다.
-너무 심려 마십시요. ..곧 오겠습니다.
진관은 저 뒤로 숨이 턱까지 찬 인지를 보고 단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후 다시 내달린다. 단은 인지가 이게 다 무슨 일이냐며 부축할 때까지 진관을 보고 있었다. 늘 제 앞에서 어버버하던 사내가 지금은 태산보다 든든하여. 진관.. 널 믿는다.. 듣지 못한 말을 뒤로 한 채 진관은 점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다과회 하루 전날 아침.
구슬픈 오열이 수사공 집 담장을 넘으니..
단이 실종된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느린 ing
원은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더미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산을 번갈아보다 피식 웃는다.
-농담이지?
-뭐가?
신분을 숨겨야 하니 반말을 쓰라 하긴 했다. 그러긴 했는데.
-지금 아무도 없거든?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조심하라며.
어찌나 말을 잘 들으시는지. 충신 나셨다, 아주. 원은 입술을 삐죽이곤 빨래더미가 담긴 바구니를 툭 친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내가 이런 걸 어찌 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 우리 스승님 철칙이셔서.
-니 스승은 놀면서?
-윗사람은 원래 그래. 잘 알잖아?
아주 작심한 얼굴이다. 어제부터 뭔 심통이 난 거야. ..아니. 뭔 심통이 났든간에. 원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삐딱히 선다.
-그래서. 나더러 이걸 정말 널라고.
-물기 탁탁 털어 반듯이. 주름 안 지게 쫙.
-싫다면?
-그럼 뭐. 내려가야지.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개경 있을 때 재워주고 먹여주고 누가 했는데.
-린 공, 아니, 수인이.
-금과정 내 소유거든?
-그럼 수인이더러 하라 할까?
-곤히 잠든 놈을 깨우겠다?
-깨워?
-...치사한 놈.
결국 오만상을 찌푸리며 젖은 저고리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드는 원에게 산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낸다.
-어허. 두 손으로.
-...아주 신이 나셨구만.
투덜대면서도 산의 말에 따르는 원이다. 근데, 따르긴 따르는데, 옷을 잡고 흔드는 꼴이 물기를 털자는 건지 그냥 흔들자는 건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왕세자는 왕세잔 거다. 어디 빨래 근처에나 가봤겠어. ..그런 사람이 왕린 부를까 한 마디에 입 꾹 다물고 고분고분. ..에효. 이게 무슨 심술이냐. 스스로가 한심해진 산은 옷 하나 들고 아주 씨름을 하는 원에게서 빨래를 채들었다.
-그렇게 하다간 내년에나 다 널겠네. 됐으니 가서 마당이나 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가져간다. 그새 고집이 꽉 들어찬 눈이다.
-내가 한다.
-하긴 뭘. 이리 줘.
-한다니까, 내가.
-아 됐다니까.
-하랄 땐 언제고 왜 뺏어가!
-이렇게까지 못할 줄 알았나!
-하면 해! 이까짓 게 뭐라고!
-아 진짜! 이리 내라니까!
쫘아아악!!!
어린애 저리 가랄 옥신각신의 끝은 결국 불길한 소리다. 원과 산은 이쁘게도 찢어진 저고리 팔을 한 쪽씩 쥐고 서로를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느질 할 줄 아니.
-....알 것 같아요?
엉겹결에 존댓말로 회귀한 산이 짝 잃은 저고리를 쥐고 울상을 한다.
-그러니까 놓으랄 때 놓지!
-니가 놨으면 되지 않느냐!
-하! 이게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그러게 첨부터 안 한다질 않았어!
-끝까지 안 했어야죠, 끝까지!
으르렁거리던 둘은 등 뒤로 다가온 인기척에 짜기라도 한 듯 후다닥 저고리를 품 안에 쑤셔넣었다.
-...뭐 하십니까?
원과 산이 동시에 긴 숨을 뱉으며 돌아선다.
-놀랐잖아요.
-일어났어?
-무슨 일인데요.
-뭐.. 별 거 아니야.
-별 거 아니긴. 이 보십시요. 이 세...이 양반이 이 저고릴 반으로 쫙 찢어놨지 뭡니까.
-와. 얘 진짜 웃기네. 같이 했잖아!
원이 그러거나 말거나 산은 조심히 린에게 다가선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바느질 같은 건..
-그걸 얘한테 왜 시켜!
-그쵸? 못하죠? 나도 참 괜한 걸.
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두 사람에게서 저고리를 가져간다.
-반짇고리는 어딨습니까.
-우현 사형께.. ...근데 할 줄 안다구요?
-...어쩌다 보니.
슬쩍 원을 곁눈질한 린이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후다닥 말을 잇는다.
-방 앞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럼.
달리나 싶게 멀어지는 린을 멍하니 보던 산이 원을 돌아본다.
-..싸웠을 리는 없고.
-그치. 쟤 이상하지.
-그러게요. 화났나?
-이런 걸로 화낼 놈이면.
-...그쵸. 근데 왜 저러지?
-......
-오해라고.. 아직 얘기 안 하셨어요?
산은 괜히 찔려 원을 살핀다. 잘생긴 눈동자가 미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몸이 편치 않다 전갈한 송인은 집에서도 가장 깊은 밀실에 종일 틀어박혀 있다. 부용은 차를 마시며 검은 천 너머 꼿꼿한 등을 끈기있게 바라봤다. 다과회 통보가 내일이니 오늘 중에는 어떤 결심이든 하실 것이나.. 이리 고민하실 일이었구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저를 충렬에게 보낼 때에는 한 시진, 아니 반 시진도 생각지 않으셨다. 그저 가겠느냐, 싫으면 싫다 해도 된다, 조금쯤 다정하셨지. ...그 조금이면 족했다. 이 몸뚱이쯤 얼마든지 내어드릴 수 있었다. 그것을 후회치는 않는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용은 같은 결정을 할 터였다. 송인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무석아.
..결정을 하셨는가. 한숨을 삼키는 부용 옆으로 무석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다. 또 한 번의 피를 각오한 눈이다.
-하명하십시요.
-그 댁에 세자의 호위가 있다고.
-예.
-빼낼 것이니 ...아가씨를 잠시 모시거라.
무석의 답이 한 박자 느려진다.
-..잠시라 하시면.
-다과회가 끝날 때까지다.
무석이 좀 놀란 듯 부용을 돌아본다. 부용은 미동없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 공자께 말씀하실 겁니까.
-..알아 좋을 거 없겠지.
역시. 알리길 꺼리신다. 혹여 그분의 귀에 들어갈까 그것이 염려이신가. ..이 분께도 이런 마음이 있었구나.
-다과회 후에는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왕비의 자존심에 아가씨를 다시 간택하진 않을 것이다.
-원성전의 진노가 클 것입니다.
-대신들을 움직여 봐야지.
-..그 전에 세자가 나서겠지요.
긴 침묵 끝에 실소가 흐른다.
-..그러실 테지.
-좋은 일이겠습니까.
-......
-세자가 그리하면 세자에 대한 전하의 의심이 덜해집니다. 지금도 일말의 정을 품고 계심을 아시지 않습니까.
-......
-또한 원성전의 진노를 끝내 막지 못할 시 세자가 나서 아가씨와 혼인하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제 어미의 손에 아가씨 집안이 풍비박산 나느니 그 편이 낫다 여기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로군.
부용은 한 모금 차를 넘기고 등을 세운다.
-죽이십시요.
송인의 등이 멈칫 굳는다. 부용은 낌새를 모르는 양 평온한 낯을 했다.
-죽이고 원성전의 일로 만드십시요. 아무리 원성이라도 흔들릴 것입니다.
...또한 그 분을 얻을 길도 열리겠지요. 옥구슬 같은 음성에 단호함이 서린다.
-수사공 댁 왕린 아가씨. 죽이셔야 합니다.
..다 가지십시요, 나리. 모두 다 가지시게 이년이 돕겠습니다.
부용의 흐린 미소가 찰나 흩어졌다.
**
턱을 괸 산은 땡땡 불어있는 원을 복잡한 심경으로 건너본다. 웃기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꼬숩기도 하고 답답도 하고 속상도 하고 귀엽다.. 싶기도 하고. 개경에선 그리 세자다웠던 이가 지금은 어찌 이리 세 살짜리 같은지.
-저 놈. 지금 린한테 히죽 입고리 올린 저거. 저 자식 이름 뭐.. 어쭈? 감히 눈을 맞춰? 눈알을 확 파버릴까보다.
내 죄지 싶다. 괜한 심술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누굴 탓하랴. 그러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사단이 난다니까. 산은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 대청으로 고개를 돌린다.
린의 주변으로 두타산 제자란 제자는 죄다 모여있다. 왕족씩이나 되는 분 옷 꿰매는 솜씨가 저렇게까지 좋을 건 뭐며 그 야무진 솜씨를 하필 스승님이 보실 건 또 뭐란 말인가. 저고리는 내 탓이니 하나만 봐주겠단 듯 뚱하게 노려보는 원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승휴는 린이 꿰맨 저고리에 연신 감탄하며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바느질 하나에도 세상 이치가 담겨있다나 뭐라나. 암튼 다들 옷들고 린에게 와 배우라 한 거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원에게 너는 바느질로 이치를 깨칠 짬이 안 되니 멀찍이 있든가 집으로 돌아가란 말을 덧붙이며. ..와. 진짜 그때 저하가 스승님 때리는 줄. 아니. 눈빛으론 이미 백 대쯤 때린 거나 진배없었다. 스승님도 아셨을 거다. 그러니 싱긋 웃고 줄행랑인듯 줄행랑 아닌 줄행랑을 치셨지. ...머리야. 산은 이마를 짚으며 고갤 절레 젓는다.
두타산 제자들은 어쩜 이리 스승말을 잘 듣는지 중천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지금까지 열심이다. 그 말인즉슨 원의 이가는 소리를 한나절 듣고 있었단 소리다. 처음엔 좀 미안했는데 아이고 미안은 얼어죽을. 전에 채련회 때도 느꼈지만 원은 질투심이 아주 완전하셨다. 린이 조금만 웃어줘도 활활. 손끝만 살짝 닿아도 화르르륵. 사형들도 대단한 게 이 사나운 눈빛에도 개의치 않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그러니 불난리가 나지 왜 안 나겠나.
마지막 제자가 달덩이처럼 환한 얼굴로 린의 손을 덥썩 잡아 흔들고 떠난 후. 셋만 남은 공간엔 침묵만 멤돈다. 당장 린을 끌고가 남이 닿은 곳을 죄다 씻기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옆으로 틀어앉은 린을 빤히 보기만 하는 원에 차츰 산까지 긴장이 더해진다. 이걸 말려야 하나. 아님 그냥 자리를 비켜주고 말까. ...근데, 참 나. 뭐 이런 한심한 고민을 하게 됐지. 이 사람이 뭐라고. 산은 한숨을 깨물며 원을 힐끔인다.
-소화야. 수인이 저 놈이 내 눈을 종일 한 번도 안 보는데 무슨 일일까?
당사자 앞에 두고 왜 나한테.. 하며 린을 돌아보던 산이 조금 휘둥그레진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저 사람...
-그런 것이..아닙니다.
-그거 알아? 저 놈의 저 '그런 것이 아닙니다.'가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말인 거. 특히 눈도 못 맞출 땐 더더욱.
여전히 이쪽은 보지도 않는 눈이 가늘게 떨린다. 단단히 굳은 어깨도 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 옅게 붉어진 뺨이며 무릎 위에 꽉 마주 얽힌 기다란 손가락.. 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뭔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내 눈 앞에서 난 보지도 않고 딴 놈들이랑 희희낙락 한 건데.
-..뭔가 오해를
-내 눈 보지도 않으면서 오해.
-......
-화난 거냐? 예까지 온 이유 말 안해서?
-..아니라지 않습니까.
-눈.
참을 만큼 참았는지 린에게 직접적으로 쏴대기 시작한 원의 눈에는 보이지 않나 보다. 린이 머리카락 한 올까지 긴장하며 어쩔 줄 모르는 이유. 전에 같으면 산도 몰랐을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이 치사하고 아프고 쉴 새 없는 마음을 품어보지 못했다면.
-눈 보라고 했다.
-저, 저ㅎ
-한천!
급기야 벌떡 일어나 외로 튼 린의 얼굴을 제게 돌리고 몰아붙이고 있는 원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 하고 있는 것일까. 산은 두 팔을 늘어뜨린다.
린은 화난 것이 아니었다.
왕린은 세자 원을 연모하고 있었다.
**
-..잘 계시는 건가.
-원성전은 별 움직임 없지?
-겉으론.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 수가 있어야지.
늦은 밤. 진관의 답에 길어지던 장의의 한숨이 미묘한 웃음으로 변한다. 진관 품에 곱게 들린 유밀과 때문이었다.
-지극정성도 어지간하네.
갸웃거리던 진관이 장의의 눈짓에 밤중에도 훤히 보일 만큼 두 뺨을 붉힌다. 금과정에서도 검이라면 손꼽히는 자가 암튼 단이 아가씨 앞에서는 숫기없는 허랭이가 되니. 장의는 얼른 앞서가는 진관의 등으로 한숨섞인 웃음을 지었다.
저하께 청을 드리면 단이 아가씨와의 혼사, 길을 열어주실 거다. 왕족은 아니나 진관의 집안도 그리 기우는 편은 아니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허나.. 왕전. 그 자가 문제다. 대립하는 일이 끊이지 않을 터. 단이 아가씨께, 그리고 저하께 짐을 지울까, 저리 숨기지도 못할 맘으로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는 거겠지, 저 친구는. 곁에서 저하와 린공자가 겪은 일을 다 지켜봤으니 더더욱. ...참 힘든 인연이다. 저하와 공자도, 진관과 단이 아가씨도. 어쩐지 무거워진 맘을 털어내려 장의가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아가씨!
진관의 외침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단이 털썩 주저앉는다. 진관과 장의는 날듯이 달려 단이 앞에 무릎을 접었다. 땀범벅이 된 고운 이마며 눈물을 한 줌 매단 눈동자까지. 진관은 쓰러질 듯 휘청이는 단의 어깨를 얼른 잡는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두타산. 두타산으로 가야 한다. 얼른.
장의와 진관이 우뚝 굳는다. 이 밤 중에 홀로 길을 달린 단의 입에서 어찌 두타산이.. 장의는 애써 침착히 단과 눈을 맞췄다.
-두타산을 어찌 아셨습니까.
단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건넨다. 받아든 장의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어떤 아이가 전해주고 갔다는데.. 저하께서.. 오라버니가.. 흑.. 얼른 가라. 응? 얼른.
진관은 급히 장의를 돌아본다. 장의는 서찰을 장의 쪽으로 기울였다. 진관의 얼굴이 쩡 얼어붙는다.
[저하와 왕린 공자가 산 중 변을 당하여 상태가 위중하니 속히 사람을 보내주십시요.
-은산]
진관과 신속히 눈빛을 주고 받은 장의가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를 꾸민다.
-아가씨께선 댁으로 돌아가 계십시요. 진관이 모실 것
-아니다. 인지(단의 몸종)가 곧 올 것이니 둘 다 가거라.
-..그럼 인지가 오는 것을 보고
단이 진관의 말을 끊으며 손을 뿌리친다.
-한 시가 급하다질 않아! 두 분께서 변고를 당하셨다는데 어찌 이리 태평해!! 얼른.. 얼른 가서 모셔와라. 얼른!!
진관은 반쯤 하는 수없이 일어난다. 나머지 반은 피가 얼어붙도록 초조했다. 장의는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겨우 가누며 단에게 묻는다.
-이 일을 또 누가 압니까.
-아직.. 아직 나밖에는..
-인지도 모르는 겁니까.
-그냥 갑자기 뛰어나온 줄만... 걸음이 느린 아이라 예까진 못 온 게고..
-...저희가 올 때까지 아가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다. 알겠으니 어서 두 분을..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단이를 착잡하게 바라본 장의가 짧게 목례하고 등을 돌려 뛰어간다. 따라 달리던 진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단을 돌아봤다. 눈물범벅으로 앉아있는 단이 그 어느 때보다 작아 보인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귀하고 고운 분이거늘. 진관은 겉옷을 벗어 다시 단에게 달린다. 어깨에 옷을 걸쳐준 진관이 단단한 눈으로 단을 바라봤다.
-너무 심려 마십시요. ..곧 오겠습니다.
진관은 저 뒤로 숨이 턱까지 찬 인지를 보고 단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후 다시 내달린다. 단은 인지가 이게 다 무슨 일이냐며 부축할 때까지 진관을 보고 있었다. 늘 제 앞에서 어버버하던 사내가 지금은 태산보다 든든하여. 진관.. 널 믿는다.. 듣지 못한 말을 뒤로 한 채 진관은 점으로 멀어졌다.
그리고 다과회 하루 전날 아침.
구슬픈 오열이 수사공 집 담장을 넘으니..
단이 실종된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느린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