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끝을 내기는 글렀으니 썰로라도.


수사는 지지부진했음. 서신을 썼다는 산, 그러니까 비연은 당연히 집에 있던 게 확인됐고 서신을 전해줬다는 아이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고 유일한 증인인 단의 몸종은 기절해있던 탓에 본 것이 없다 하고.. 귀신의 소행입네 원나라 년이 한 짓이네 소문만 무성해질 무렵. 원에서 사신단이 온다고 했음. 명목은 위로였지만 실상은 원성의 입지를 흔들지 말라는 경고였지. 안 그래도 진척 없던 수사가 흐지부지 접히는 걸 보며, 원은 그 어느 때보다 무력감을 느꼈음. ..아니. 사실 무력감만은 아니었음. 사신단이 온다는 소식에 아주 깊은 속에선 찰나, 안도했거든. 어쩌면 수사하는 내내, 증거가 나오지 않을 때마다 그랬음. 연결고리는 없구나. 단이의 죽음과 어마마마는 무관하구나. 그럼 린과 나는.. 그래서 원은 더 악착같이 수사에 매달렸음. 다 끝난 마당에도 포기하질 않았지. 그거라도 안 하면 정말 다시는 린의 앞에 서지 못할 것 같아서. 통곡을 쏟아내다 끝내 기절해버린 그 녀석 앞에 최소한 이런 마음으로 설 수는 없어서. ..정말 바닥까지 이기적인 놈이지, 단아. 린의 집 앞에 선 원이 쓰게 웃을 때였음.

-저하.

장의의 다급한 음성이 마른 밤을 갈랐음.

**

은영백은 단단히 긴장하고 있음. 궁출입은 잦았으나 이렇게 한밤 중 느닷없이, 게다가 원성전이라니. 아무리 은영백이라도 태연을 가장하기 어려웠음. 절로 입이 말랐음. 제가 이 지경이니 하물며 이 아이는. 은영백은 힐끔 옆을 돌아봤음. 나란히 꿇어앉은 비연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음. 고운 가리개 사이로 드러난 두 눈도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 은영백은 안쓰러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여기 있는 게 산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음. 원성의 부름을 받았을 때 산은 집에 없었거든. 요새 단의 수사를 돕는다고 집에 붙어있질 않았음. 있었으면 그 고집에 제가 오겠다고 했을 것임. 비연에게 이런 위험까지 대신하게 할 순 없다고. 그랬음.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상황이었음. 불러놓고 차만 마시고 있는 원성의 침묵이 송인의 백 마디 협박보다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음. 그래서 더더욱 산이 없어 다행이었음. 딸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더 비정한 마음도 품을 수 있는 게 부모란 사람들이니까.
원성이 은영백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내 맴이 딱 그래! 근데 이놈의 자식들은 부모 맘을 몰라!! 하며 하소연을 했을 지도 모름. 요새 원 때문에 아주 골치가 아팠거든. 도무지 궐에 있지를 않음. 어쩌다 들려도 원성전에 들라는 명은 아주 대놓고 무시하고. 이유야 빤했음. 단의 죽음에 제가 관련있다는 그 어이없는 소문 때문이겠지. 아니. 그 조그만 계집애를 뭐하러 죽임? 죽이려면 차라리 린이나 그 형을 죽였겠지. 그것도 못해서 안 한 게 아님. 원 때문에 참은 거지. 헌데 이 어미를 그리 외면하다니.. 속상하고 화가 나 후라타이에게 빡시게 수사시켰음. 근데 어느 날 최내관이 말하길, 어째 이상하다는 거지. 예전 화살사건도, 왕전과의 혼인도, 단의 죽음까지도 판대부 집안이 걸려 있다고. 그래서 판대부 쪽을 더 파봤는데 예상치 못한 게 걸린 거임. 원이 마음을 준 듯해서 알아보라 했던 그 아이.
원성이 후라타이에게 눈짓을 보냄. 후라타이는 비연에게 서신 하나를 내밀고 읽어보라고 함. 비연은 어쩔 줄 모르고 은영백은 덜컥 낯빛이 굳지. 그리고 또 한 사람. 최내관이 눈알을 굴림. 은영백에 대한 의심을 흘리라는 건 송인의 밀명이었음. 원나라 사신이 오기 전에 원성에 대한 대신들의 반발심을 키워놓자는 거였지. 은영백은 이미 무혐의로 판명난 데다 고관대작들과 사이가 두루두루 돈독해서 (feat. 뇌물) 대신들이 엄청 예민할 거거든. 근데 보아하니 은영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비연을 의심하고 있잖아. 그럼 산과 비연이 바뀌었다는 걸 안다는 건데.. 주군께서 여기까지 염두하신 건가? 최내관의 궁금증을 풀어주자면, 아님. 송인도 원성이 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1도 몰랐음. 후라타이에게 뒷조사시킨 것도 몰랐음. 후라타이가 뒷조사하다가 산과 비연의 관계를 알게 된 건 더더욱 예상 밖임. 좀 심각한 돌발상황이긴 한데, 애초에 은영백을 불러들인 게 원성에 대한 대신들 의심 블라블라가 아니었음. 송인의 노림수는 다른 데 있었음. 최내관은 물론 부용도, 무석도 그 누구도 모르는 노림수.

**

원은 환복 중임. 심란하기 그지 없음. 이 밤에 은영백과 그 댁 아가씨, 그러니까 아가씨인 척 하고 있는 아이를 불러들인 원성의 속내를 알 수가 없음. 어쩜, 산과 바꾼 걸 아셨을 지도. ..그럼 어찌 협상을 해야 하나. 사방데 뛰다니고 있는 산이 그 녀석을 지켜주려면 어떤 것을 걸어야 할까.. 원은 이 와중에 참 골고루 일이 터진다 한숨을 삼키며 눈을 돌림.
이 소식을 알린 건 저기 서 있는 진관이었음. 보름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놈. 굳이 찾지 않았고 장의에게 소식을 묻지도 않았음. 떠났으면 어쩔 수 없다, 쓰게 각오만 했음. 진관이 단이에게 어떤 맘이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곁에 있을 수 없다 해도 이해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간 여기저기 다녔다고 함. 두타산도 다녀오고 주변도 탐문하고 판부사네도 감시하고. 그러다 원성전에 불려 가는 은영백을 보게 된 거라고 함. 미련한 놈.

-..꼴이 그게 뭐냐. 얼굴은 반쪽이 돼서.

평소라면 사돈남말은 이럴 때 쓰는 거라고 한 마디 했을 장의도 입을 다물고. 푹 고개를 숙인 진관은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누구 같은 말이나 하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원은 한숨을 내쉬며 김내관을 돌아봄.

-먹을 것 좀 내오라 해. 요기될 만한 걸로.
-저하. 괜찮
-먹어. 억지로라도. 내가 안 괜찮으니까.

단이가 그렁거리는 진관을 봤으면 놀렸을까. 사내대장부가 이런 일에 눈물을 보인다고. 아니. 같이 울먹거렸을지도 모름. 그 녀석 맘이 여리니까.. 원은 진관에게서 단이를 겹쳐보다 걸음을 옮김.
장의도, 내관들도 못 따르게 하고 김내관 한 사람만 대동한 채 원성전으로 향하는데 얼른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느려짐. 마음이 무거웠음. 제가 마음을 주면 다들 이렇게 위험해지니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나 될까. 그러면 아바마마가 참 좋아하실 텐데. 처음으로 장했다, 잘했다 칭찬하실 지도. 어마마마는 노발대발하시다 온 나라 절간을 다 태워버리실지도 몰라. ...그리고 그 녀석은..

-..같이 머리라도 깎아주려나.

김내관이 갸웃거리든 말든 원은 피싯 웃음. 린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았을 것임. 말리다 말리다 못해 같이 머리라도 밀겠다, 허언이 아니라 진짜 지가 먼저 그래버릴 지도. ..지금은 모르지만. 지금은... 어느새 웃음이 사그라든 원이 입술을 물 때였음. 
원성전으로 가는 중문을 넘는데 궁녀 하나가 황급히 걸어오다 원을 보고 화들짝 놀람.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리를 굽히는 궁녀는 원성전 소속이었음. 원은 눈살을 찌푸림. 이상했음. 이 밤에 원성전을 벗어날 일은 어마마마의 명 밖에 없는데 자길 보고 이렇게까지 긴장할 이유가 없거든. 궁녀를 훑어보던 원의 눈이 소매춤에 멈춤. 삐죽 튀어나온 검은 보자기. 평범한 보자기였는데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만듦.

-내보이거라.

아니나 다를까 흠칫하는 기색에 안 좋은 예감은 배가 됨. 원은 김내관이 말릴 틈도 없이 궁녀의 소매춤을 거칠게 잡아끌었음. 툭, 보자기가 떨어지며 끌러지고. 김내관은 궁녀에게, 그것도 원성전 소속 궁녀에게 이 무슨 행동이신가, 누가 보기라도 했으면 전하와 왕비마마 모두에게 불호령이, 피바다가!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김내관이 흠칫 함. 바닥에 꽂힌 원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굳어 있었음. 김내관은 영문도 모른 채 얼결에 시선을 내림. 검은 보자기 옆으로 얼룩덜룩한 주머니가 튀어나와 있음. 푸른 바탕에 보랏빛 나비가 창창한 주머니였음.

**

산은 터벅터벅 걷고 있음. 오늘도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음. 처음 시신을 발견했다는 사내는 이제까지 어찌나 시달렸던지 군졸도 뭣도 아닌 산에게 아예 문도 열어주지 않았음. 종일 애원해 밤이 돼서야 겨우 한 마디 들었는데 정말 아무 쓸데도 없는 얘기였음. 강가에 시신이 놓인 걸 발견했을 뿐이라고. 다 아는 얘기였음. 사실 매일 그랬음. 어디를 돌아다니든, 누굴 만나든 이미 다 아는 얘기뿐이었음. 그래도, 산은 도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었음.
린은 장례 당일 울지조차 않았음.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낯으로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음. 그리고 그건 원도 마찬가지였음. 원은 장례조차 가지 못했음. 그게 린을 더 힘들게 한다고 했음. 뭐 이런 게 다 있냐고. 연모고 뭐고를 떠나 둘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고 단이 아가씨는 원에게도 동생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데 원은 그 동생 같은 단의 마지막을 볼 수도 없고 린을 위로해주지도 못하고. 거지 같았음. 제가 다 숨이 막혔음. 둘의 신분이라는 게 진짜 뼈저리게 실감이 됐음. 제 마음 같은 건 다 잊을 만큼 아팠음. 뭐라도 해야 했음. 뭐라도 해야 견뎌졌음. 원처럼 말임.
그 바보 저하는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않고 사방을 돌아다녔음. 마주치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로 '살이 빠졌네. 못 생겨졌다.' 이런 농이나 해댔음. 린을 만나고 와서는 그것도 못했고. 차라리 울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울어버리기라도 하지. 매일 넋 빠진 얼굴로 린의 집 앞에 서 있기나 하고. 벌 받는 거처럼 그러고 있는 걸 한 두 번은 말리기도 했음. 하지만, 저하는 고집으로 되는 건가 씨알도 안 먹혔음. 그 꼴이 속 아프고 답답해서 외면하고 싶은데 산도 매일 그런 원을 멀리서 지켜봤음.
하루, 이틀, 사흘, 열흘.. 산은 자기 마음을 인정했음. 자신은 원을 좋아하고 있었음.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그랬음. 하지만 인정과 동시에 접었음. 이 와중에 제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저렇게 절절한 마음으로도 안 되는 게 연정이라면 저는 택도 없었음. 저런 힘든 걸 이제껏 하고 있는 원에게 더 짐을 얹기도 싫었고. 그냥 푸념 들어주고 어깨 토닥여주는 친구하자 했음. 원에게도 린에게도. ..그 전에 단이 아가씨 죽인 범인부터 잡고. 반드시 잡아 내야지. 다시 다짐하며 무의식적으로 린네 집 쪽으로 가는데.
저만치 길에 누가 보임. 걸음이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데다 신도 안 신... 근데 뒷모습이 익숙하네..하던 산은 순간 급히 발을 구름. 아니. 구르려 했음.

-공자님!

린을 부른 건 산이 아님. 달려온 송인이었음. 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김. 저 인간이 여긴 어떻게... 게다가 린 공자를 왜 따라왔지.

-놔!

린답지 않은 외침에 산은 단검을 뽑으며 고개를 뺐음. 그런데.

-안 됩니다. 그걸로 뭘 하시려구요.

송인을 오래 안 건 아니지만(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는 늘 패주고 싶게 여유로운 얼굴이었음. 저런, 저렇게 다급하고 흐트러진 표정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네 놈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 놔.
-..일단 진정하시고 댁으로

격한 뿌리침에 팔을 놓친 송인이 다시 앞길을 막아서자 린은 단검을 빼 송인의 목을 겨눴음.

-비켜서지 않으면 베겠다.

린을 오래 안 건 아니지만(오래 알 거지만) 산에게는 송인만큼 생소한 모습이었음. 화조차 잘 내지 않는 사람이잖아. 물론 송인 저 놈이 사람 염장 지르는 데 일가견이 있긴 하지만.. 일단 말려야 함. 오버하는 게 아니라 린은 정말 벨 기세였음. 산은 초조하게 살피며 끼어들 타이밍을 노림.

-원성전으로 가서 뭘 물으실 겁니까.

코앞에 칼을 둔 사람이 침착하게도 물음. 반면 린의 단검은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음.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음. 마주할 건덕지가 없는 둘이 이 밤에.. 근데 원성전? 산은 멈칫했음. 왕비마마의 처소가 여기서 왜..

-아니. 다시 묻지요. 진정 물으실 수 있으십니까. 아가씨 시신에서 원성전 문양이 박힌 천조각이 나왔다, 마마께서 그리하셨냐. 물으실 수 있겠습니까.

원성전 문양의 천. 산은 순간 입을 막음.

-진정 그리 하실 수 있으시면 댁으로 가 수사공께 먼저 고하십시오. 허면 저는 이 길로 입궐하여 전하께
-안 돼.
-......
-그건...

송인은 쓰게 웃음. 이럴 줄 알고 부러 한 말이지만 이 와중에도 진짜 안 된다는 저 마음이 누구로 인한 건지 너무 빤해서.

-..돌아가십시오. 공자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집안의 명운을 걸고도 꼿꼿하던 사내가 검을 떨어트리고 주저앉는 꼴을 비웃을 수도 없었음. 그보다 제 꼴이 더 우스웠음. 왕전을 만나러 왔다가 단의 몸종이자 부용의 심복인 인지가 린의 처소로 드는 걸 봤음. 송인이 내린 명이 아니었음. 송인은 린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음. 왕비의 짓으로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음. 그렇다는 걸 부지불식 린을 막아서며 깨달았음. 눈에 밟히고 마음에 채이는 이 사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음.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진짜였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시오.

그리고, 엉망으로 뒤흔들리는 목소리로, 이 와중에도 원을 생각하는 린에 뒤틀리는 속내도 진짜임. 저는 진짜, 이 사내가 갖고 싶은 것임.

-...부탁입니까.
-......

송인은 한쪽 무릎을 굽혀 린을 바라봄. 두 눈을 감고 입술을 베어 문, 흠뻑 젖은 얼굴. 수려하다고는 생각했었음. 누구라도 한 번쯤 돌아볼 용모라고.. 송인은 제 신을 벗어 린에게 신겼음.

-...제게 빚을 지셨습니다.

들을 정신도 없이 울고 있는 린을 부축해 집으로 가는 송인의 뒤에서 산은 그제야 막은 입을 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음. 제가 뭘 보고 뭘 들은 건지 정리가 안 됨. 원성전 문양, 단의 시신, 그런 린을 말리고 신까지 벗어준 송인, 린...
....저하. 저하...
주륵.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음.

**

엎드려 떨고 있는 비연 옆에서 은영백은 포기하듯 눈을 감음. 비연은 서신을 읽지 못했음.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음. 그걸 원성은 알고 있는 것임. 산과 비연의 신분을 바꿔 공녀 차출을 피한 일을, 다 알고 부른 것임. 은영백은 변명하지 않았음. 목숨을 구걸하는 게 부질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임. 그저 산만 피했으면. 무사히 도망쳤으면..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때였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누군가 들어옴. 원성은 처음 입을 열었음.

-늦으셨습니다, 세자. 더 일찍 오실 줄 알았는데.

은영백은 그제야 눈을 뜨고 허리를 굽힘. 하지만 옆에 서있는 원은 눈도 돌리지 않고 원성만 쳐다보고 있었음.

-오랜만에 보는 어미에게 인사도 없으십니까.
-.....
-...그새 얼굴이 많이
-판대부시사 돌려 보내십시요.

보름만에 보는 아들은 차갑기 그지없었음. 바싹 마른 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안색.. 원성은 당장 어의부터 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애써 태연히 대꾸함.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
-세자가 아는 것을 또 누가
-내 사람입니다!!

원성전이 쩡 얼어붙음. 은영백은 저도 모르게 조금 눈을 들어 원을 봤음. 꽉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음.

-허니 뭐가 됐든 다음에. ...다음에 하시란 말입니다, 제발..

원성도 예상보다 격한 반응에 입이 굳은 새. 원이 은영백에게 다가섬.

-일어나세요.

은영백은 고개를 듬. 헌데 아무래도 원의 낯빛이 심상치 않음. 이마에 땀이 한가득...

-세자!!
-저하!!

쓰러진 원을 엉겁결에 받아 든 은영백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림. 원의 몸이 불덩이였음.

**

원은 꿈을 꿈. 저를 차갑게 내려다보는 아바마마. 어머니의 울음소리. 경멸과 두려움 어린 궁처의 시선들... '잡종' 저 말을 언제 처음 들었더라. 대전 내관들이었나. 대신들이었나. 아님 왕족들? 거리의 백성들.. 다들 그랬음. 잡종. 황제의 꼭두각시. 살인자의 핏줄. 언제고 나라를 통째로 들어다 원에 바칠 거라고. 정비를 죽이고 그 아들을 귀양 보내고 온 나라 여인들을 공녀로 팔아넘긴 여자의 아들이니 그러고야 말 거라고.. '악한 어미에 독한 자식이로다!' ..아아. 저건 아바마마셨지. 꼭 당신의 핏줄이 아닌 양 노려보셨어.. 죽어야 했을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처음부터 이 목숨은 시작되지 않는 편이..

'어찌 이리 고집이십니까!'
'피 같은 건 상관없습니다. 그런 걸로 사람의 명운이 정해지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니까.'
'신분이 높다 해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저하를 오해하게 두지 마세요. 제가 싫습니다.'
'저하의 탓이 아닙니다.'
'저하의 탓이 아닙니다.'
'저하의 탓이....'

-린아...

쓰러진 지 삼일.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이름에 원성은 포기하듯 김내관을 부름.

-...린을 부르거라.

**

-다녀오겠습니다.

수사공은 조용히 린을 건너만 봄. 린도 더 말이 없음. 조용한 부자 사이에서 버럭 역정을 낸 건 역시 왕전.

-가긴 어딜 가!! 세자가 아픈 게 너와 무슨 상관이라고!! 감히 어떻게 너를, 우리 집안을 얼마나 업수이 여기면!

린이 못 들은 사람처럼 목례를 하고 돌아서자 왕전이 팔을 확 채 잡음.

-넌 벨도 없느냐? 여직도 충심을 바치고 싶어?! 그 자가 누구인데. 누구의 아들인데! 그 어미가 우리 단이를!
-그만하거라.
-아버지!
-그만!

왕전이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나가자 무거운 침묵이 흐름. 수사공은 모로 선 린을 바라보다 입을 염.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
-가고 싶으냐.

린은 그대로 서있기만 함.

-....가거라.

한참만에 떨어진 허락의 말은 차갑기 그지없었음.

**

한밤 중. 원은 눈을 뜸. 몽롱한 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됨. ...아니. 꿈인가 봄. 아니면 이 녀석이 지금 제 눈 앞에 있을 리가. 원은 마른 입술로 피식 웃음.

-..꿈에서까지 얼굴 꼴이 이게 뭐야..

가슴 아프게... 중얼거리며 볼을 건드리는 손을 린은 차마 마주 잡을 수도 없음.

-혼자.. 많이 아팠지, 너..

 아니라고 고개라도 저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음. 원성전 문양이 박힌 천을 끝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태워버렸음. 괜찮지 않았음. 정말 괜찮지가 않았음. 그럼에도, 제 잘못인 양 눈도 못 맞추고 장의가 전한 말에 오지 않을 수 없었음. 아니. 오고 싶었음. 보고 싶었음. 그저, 보고 싶었음. 십여 년 동안 이런 마음을 어떻게 눌러왔는지 모를 만큼 원에게 오고 싶었음. 이러면 안 되는데. 이제 정말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원성전의 일이라 단정하진 않음.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한,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한 이상, 아니라는 확증을 얻기 전까지 저는 때때로 원성을 원망하게 될 것임. 그걸 이 예민한 분이 못 알아챌 리 없음.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고 알아볼 거고 그래서 혹 이 일을 알기라도 하시면.. ..단이 죽었는데도 이런 걱정이 들었음. 이런 걱정을 하고, 더는 곁에 있지 못하겠구나 생각하고, 그 생각에 더 보고 싶고 오고 싶고, 그래서 결국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다시 원성을 원망하고.. 최악임. 이렇게 비천할 수가 없음. 린이 더는 못 견디고 일어나려 할 때였음. 원이 손목을 잡아챔.

-...가지 마.
-......
-...가지 마라, 린아..

열감이 남아 있는 손에 힘이라곤 느껴지지 않음.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음.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음. 왈칵 솟은 눈물에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음.
원은 그런 린을 멍하니 바라봄. 어렸을 때 술에 취해 한 번, 단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꿈에서는 우는 구나. 꿈이나 돼야 내 앞에서 편하게 울어..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소리라도 쳤으면, 욕이라도 했으면, 울기라도 했으면 그렇게 숱하게 생각했는데, 너무 아픔. 꿈인데도 너무나. ...놔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놔줘야 하는데. 어머니의 짓이라는 증거를 내 눈으로 봤는데. 그 증표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누구도 모르게 그 궁녀를 가둬놓고 김내관의 입을 막고.. 넌 꿈에서나 이리 우는데. 이렇게 아픈 얼굴로..
원은 린을 가까이 끌어당김. 뒷목을 감싸는 줄도 모르고 우는 얼굴이 꼭 진짜 같음. 잘게 떨리는 긴 속눈썹, 질끈 베어 문 입술.. 가볍게 마주 댐. 한 번, 두 번, 세 번..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고 입술을 가르고 들어갔음. 치열을 훑고 뻣뻣하게 굳은 혀를 건드리자 도망가려는 기척까지 어쩜 이렇게 왕린인지. 놔주고 싶지 않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지경이 되어서도 정말 놓을 수가 없음. 어떡할래, 너. 어쩌면 좋아, 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에 린은 그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맘. 칠흑 같은 밤이었음.


-썰인데도 끝이 안 난다. 끝은커녕 절반도 못썼다. 망했다. 모르겠다. ing

'dukud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원왕린  (2) 2018.06.29
왕원왕린  (2) 2018.06.21
왕원왕린  (6) 2017.10.13
왕원왕린  (6) 2017.10.10
왕원왕린  (12) 2017.09.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