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 산은 탁자에 놓인 술병을 가만히 쳐다봄.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 술병 안에 술은 하나도 안 줄었음. 가만 보면 진짜 나쁜 사람임. 이렇게 좋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게 하고. 암튼 두 사람 만난 이후로 맘 편할 날이 없음. 한 명이 좀 나았다 싶으니 다른 한 명이 이리 걸리고. ..나도 이런데 그 분은 오죽할까. 지척에 두고도 아까워하던 사람이. 산이 오랫동안 못 본 얼굴을 아프게 곱씹는데.
희게 질린 비연이 들어섬. 손을 벌벌 떨며 말도 제대로 못함. 얼른 부축하며 왜 그러냐 물으려던 산은 그대로 굳음. 활짝 열린 문 너머에 꼿꼿이 서있는 사람. 원성이었음.    

**

그 시각 원은 금과정 객잔에 멍하니 앉아 있음. 궐을 나온 지 나흘. 자꾸 이상한 꿈을 꿈. 린에게 입을 맞추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음. 궁녀의 자백 직후였음. 마마가 명하셨다고, 아무도 모르게 궐 밖에서 태워버리라, 특히 저하가 모르시게 하라.. ..사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 있었음.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어머니가 아니실 거라는 작은 희망. 그 날 원은 바로 궁을 나왔음. 도무지 궐에 있을 수가 없었음. 그런데, 그렇게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꿈이나 꾸고. 게다가 한 번으로 끝나지도 않았음. 점점 구체적이기까지 함. 세자궁이고, 둘 다 울고 있고, 자신을 밀어내던 린은 끝내 팔을 늘어뜨리고, 손에 감겨오는 젖은 뺨이며, 입술 새로 새는 뜨거운 숨이며... 진짜 같았음. 꿈이 아니라 기억인 것 같았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내가 미쳤구나. 원은 헛웃음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함. 어머니가 단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걸 이제 부정할 수도 없음. 린은 떠났음. 산의 일도 해결해야 함.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여기 이러고 앉아 망상이나 하고 있음.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단 말임. 린이 어떻게 떠났는데.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섰는데... 그렇게 원이 헤어날 수 없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입술만 물고 있을 때였음. 문 밖에서 장의가 다급히 고함.

-저하. 주무십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새에도 몇 번씩 저하, 저하, 부르는 걸 보면 또 무슨 일이 있나 봄. 원은 한숨을 쉼.

-왜. 무슨 일인데.
-...진관에게 연통이 왔는데 마마께서 판대부시사 집에 납시셨답니다.
-....산이를 찾으셨나.
-만나고 계신 듯합니다.
-......
-어찌.. 할까요.

정말 틈을 주지 않으시는군. 원은 자리에서 일어남. 메마른 눈에 검은 불이 일고 있었음.

**

송인은 조용히 맞은편을 건너봄. 생각에 잠긴 수척한 얼굴. 수사공 왕영임. 전을 통해 자리를 청해왔을 땐 좀 놀랐음. 늘 자신을 경계하던 사람이 집까지 부른 걸 보면 왠만한 용건은 아닐 텐데. 왕영은 계속 말이 없음. 내색하진 않았지만 송인은 못내 긴장하고 있었음. 그전에는 왕전의 아버지, 이용가치가 있는 왕족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왕영은 송인에게 린의 아버지였으니까.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것들의 이름이 바뀌고 있음. ..무사히 도착하셨으려나.

-둘째와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밑도 끝도 없는 직구지만 송인은 미소를 잃지 않음.

-무슨 말씀이시온지.
-은밀히 재물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지.
-허문일 뿐입니다. 심려하시는 일은
-전하를 노리는 게요.
-제가 어찌 감히
-아니면 원성전이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저를 역도로 보십니까.
-전하를 겨눈다면 그렇겠지.
-...원성전이라면 아니란 뜻으로 들립니다.

다시 침묵. 마주보던 끝 왕영이 일어섬.

-닷새 후 대답을 가져오시오.

왕영이 나가고 왕전이 들어옴. 켕기는 기색이 역력함. 아니나 다를까 송인이 일어나 목례를 하자마자 허겁지겁 변명부터 늘어놓음.

-술이 과해 몇 마디 한 걸 예민하게 받아들이셔서.. 내 다시 잘 말씀을 드릴 테니 걱정말게.
-수사공께선 신중하신 분입니다. 추측만으로 저를 부르진 않으셨을 겁니다.
-...허면 아버님께서 우리의 거사를..
-확신하고 계신 듯 합니다.
-....헌데도 자넬 불렀다면 혹시..

정말 수사공이 이쪽을 택한다면 그보다 더한 천군만마는 없을 것임. 순혈의 왕족인데다 뛰어난 인품과 학식으로 관리와 백성들에게도 신망이 높으니까. 하지만..

-..린 공자는 수사공의 심중을 알고 떠나셨습니까.
-그 놈 얘긴 하지도 말게. 아버님이 당분간 세자에게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하시자 돌아오지 않겠다며 짐을 싼 놈이야. 단이까지 이리된 마당에 괘씸한 놈.. ..헌데 린이는 왜.
-...수사공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린 공자의 선택은 무엇이겠습니까.
-...고변을 할까 그게 걱정인가.
-....능히 그럴 수 있는 분이시지요.
-...그래도 아버지를 팔아 넘길 놈은 아니네.

형제는 형제라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전을 두고 송인은 생각에 잠김. 정말 그렇게 된다면. 린은 수사공을 설득하려 할 거임. 어떻게든, 모든 걸 다 걸고 설득하다 끝내 실패하면... 그래. 고변하겠지. 그리고 그후엔 아마... 살아있지 않을 것임. 필시 스스로 목숨을 버릴 사람임. 송인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놓음. 전도 입을 다물고. 묘한 침묵이 흐르던 중 무석이 들어옴.

-무슨 일이냐.
-원성이 은영백을 찾아갔습니다.
-...이유는.
-혼담이 있을 거라 합니다.

전의 눈에 파문이 임.

-설마...
-.....원성이 직접 움직였으니 짐작하시는 바가 맞을 것입니다.

송인의 답에 전이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남.

-이.. 여자가 감히!!!

길길히 날뛰는 전의 옆에서 송인은 린의 수척한 얼굴을 떠올렸음.

**

산의 처소. 태연히 차를 마시는 원성 앞에 앉아있는 은영백과 산은 혼란한 기색이 역력함. 직접 찾아와 설마 이런 제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음. 은영백은 한참만에 겨우 입을 뗌.

-...제 여식은 일전에 수사공 댁과 혼담이 있었사온데..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마음 쓸 것 없다.

알아서 한다니 할 말이 있음? 저기, 좀 많이 찝찝하거든요. 안 하면 안 될까요, 했다간 그대로 황천길 갈 판인데. 은영백이 그새 열 살은 늙어 한숨을 무는 새, 원성은 멍하니 넋이 빠져 있는 산에게 시선을 둠. 어떤 아인가 궁금했는데 글쎄. 눈동자가 유난히 맑기는 함. 어미를 잃고 아비를 떠나 십 수년 비루한 신분으로 산 아이답지 않게.. 하기사. 이런 것들을 좋아하셨지. 수수하고 강하고 맑은.... 원성은 은영백에게 고개를 돌림.

-하겠느냐.
-....분에 넘치는 자리인지라..
-의사를 물은 줄 알았더냐.
-......
-내가 베푸는 자비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공기가 쩡 얼어붙음. 원성은 유유히 차를 넘기며 산을 길게 직시함. 처음의 당황 이후로 은영백은 걱정과 근심, 긴장으로 가득찼음. 하지만 산은 다름. 멍한 눈동자에 떠다니는 아주 작은 설레임. 그리고 곧따르는 죄책감.. 감추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원성에게까지 숨기기는 역부족임. ...괜한 겁박을 하였군. 이 아이 마음 속엔 이미 세자가 있는 것을.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비키거라.

벌컥 열린 문으로 원이 들어옴. 원성은 예상한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넋이 빠져 있던 산은 점차 눈물이 그렁해짐. 은영백만 일어나 예를 갖춤. 원은 길게 산과 눈을 맞추다 입을 뗌.

-판대부시사.
-..예, 저하.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습니까.

은영백은 어두운 얼굴로 원성을 봄. 원성이 허락의 눈짓을 보내자 은영백은 힘이 다 빠진 산을 부축해 일으킴. 그 와중에도 원성에게 예를 갖추고 빠져나가는 둘. 원은 스쳐가는 산의 손을 잡았다 놓음.
둘만 남은 방. 원은 그 자리에 선 채 원성을 보지 않고 말함.

-뭐라 하셨습니까.
-세자와 혼인하라 했습니다.

원은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음.

-다과회를 열 것입니다. 직접 나와 저 아이를 선택하세요.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제 헛웃음이 다 남. 단이에 산이까지 제가 아는 여자란 여자는 모두 끌어들일 모양이심. 산이가 거절하면 이번에는 산이를 죽이고. 다음은 안산댁인가.
마른 웃음소리에도 원성은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음. 지금 마주하면, 원대로 해주겠노라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릴 것 같음. 안 됨. 원의 원망에 가슴이 찢어져도, 하나뿐인 아들의 미움에 심장이 타들어도 이게 자식을 위한 길이라 원성은 끈질기게 붙잡고 있음.
웃음소리마저 잦아들고. 침묵 끝에 무거운 목소리가 울림.

-그리 하겠습니다.

설득이나 분노, 협박 등을 각오하고 있던 원성이 조금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굳음. 저를 노려보고 있는 붉은 눈은 아들의 것이 아니었음.

-허나 이건 아십시요. 어마마마께선 지금 저를 위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어마마마 자신을 위한 겁니다. 소자가 그 아일 품은 게 노여우시고, 산이 오랜 시간 공녀를 피한 게 노여우시고, 산과 혼담을 나눈 수사공이 노여워 그 분풀이를 하고 계신 겁니다.
-세자!
-허니 다시는!!!

원은 격한 숨을 겨우 다잡음.

-...다시는 제 앞에서 저를 위한다 하지 마십시요. 제 뒤에서 제 사람을 휘두르지도 마십시요. 이리 당해드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충격받은 원성을 두고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원이 몇 걸음 가다 비틀거림. 원성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지만 원은 장의의 부축도 뿌리치고 감. 원성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슴을 쥠. 놀라 다가서는 후라타이의 팔에 기대 통증이 가시길 기다렸다 고개를 드는 원성. 하지만 원은 이미 가고 없었음.

**

원은 산과 마주 앉아 있음. 산이 고개 숙인 원 쪽으로 찻잔을 밀어줌. 원은 피식 웃음. 산도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음. 그렇게 말없이 앉아 차만 다 식을 때쯤이었음.

-...괜히 알아봤다.
-.....
-두타산에서. 안 그랬으면 너 이리 골치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그치?

그제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는데 산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짐.

-...힘들 거야. 궐이.. 그 궐이라는 곳이 사람 살 데가 못 돼서 많이 힘이 들겠지만..
-.......
-....하자. 혼인.

연모하는 이에게 혼인하잔 말을 듣고도 이렇게 슬플 수가 있을까.

-...저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
-하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그 분이 아니면 누구도
-싫어한다니까. 그 말..

산은 그만 목이 메임. 원망스러워서가 아니라, 서운해서가 아니라 미안하고 가여워서. 이렇게 좋아하는데 좋아한단 말 한 번 해보지 못한 원의 사랑이 가엽고, 혼인하자는 말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두근거린 것이 미안함. 원에게도, 원을 연모해서 누이의 죽음마저 뒤로 하고 떠난 린에게도.

-말들이 많을 거다. 전에 있던 혼담과 연결지어 한동안은 시끄러울 거야. ..조금만 참아. ..참아줘, 산아.
-.....
-...미안하다. 이렇게 돼서..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는.. 저하를 연모하고 있는 걸요. 염치없이 그 말이 나올 것 같아 산은 고개를 숙임.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죄스러웠음.

**

다음 날. 원성은 왕영을 부름. 상심이 컸겠다 위로하다 본론. 다과회를 열 건데 판대부시사 여식을 부르려 한다. 산이를 맘에 두고 있었는데 혼담이 오간다기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에 부르면 맘이 상할까 하여 미리 말한다. 왕영은 담담히 괜찮다고, 전이 부족해 거둔 혼담이니 마음 쓰지 마시라고 함.
원성은 그 길로 충렬과 독대. 불쾌해하며 버럭하는 충렬에게 예전 말하셨던 충신의 딸, 공녀에서 거둬오겠다 함. 좀 누그러지면서도 은영백같은 거상과 원이 이어지는 게 탐탁치 않아 흠이 있는 아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고 하자 원성이 얼굴의 흉은 용한 의원을 만나 고쳤다고 함. 그리고 왕영에게 댔던 이유를 반복하려는데 밖에서 원의 입시를 고함. 물러가라 해도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버텨서 들어오라 하고 왜 귀찮게 구냐는 식으로 말하는 충렬. 원이 내려주신 탕약 감사했다고 인사부터 하자 준 지가 언젠데 이리 늦게, 고작 그 말 하려고 무례를 범했냐고 역정을 냄. 원은 제 혼사를 논하는 중인 걸 안다고, 부디 허락해달라고 함. 자기가 산이를 몹시 연모한다고. 원성은 입술을 깨뭄. 이러면 세자가 다른 왕족과 혼인할 여인을 빼앗은 꼴이 아님. 아니나 다를까 충렬이 넌 린과 그렇게 친하면서 어찌 그 형의 여인을 탐할 수 있냐며 손가락질을 함. 원성은 혼담은 수사공 쪽에서 거뒀고 세자는 이때껏 맘을 드러낸 적이 없노라 하지만 충렬은 그러시겠지 빈정빈정대며 내명부 일이니 알아서들 하는데 넌 좀 세자 자격이 없다 쏘아댐. 원성은 어찌 아비가 아들에게 그러냐 분에 차지만 원은 차분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 하고 돌아섬. 안쓰러운 원성의 시선과 못마땅해 하는 충렬의 시선을 받으며 나가는 원.
원은 하룻밤 지나 산의 집을 찾음. 판대부시사에게 상황을 설명, 말을 맞춤. 맘에 안 들고 불편하겠지만 산이를 지킬 방도가 지금은 이것 뿐이니 혼담을 받으라는 원에게 어찌 산이를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냐고 묻는 은영백. 원은 내가 산을 돕는 게 아니라 산이 나를 돕고 있다고. 만난 그날부터 미안하기만 하다고 답함. 은영백은 황송하고 감사하여 허리를 숙이고, 문 밖에 선 산은 지그시 입술을 물며 눈물을 참음.
삼 일이 더 지나고 왕영이 기한 두었던 닷새째. 충렬이 왕영을 부름. 미안하게 됐다는 충렬에게 역시 괜찮다고 하고 나오는데 송인이 뒤따름. 걸으며 나직히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함. 이유를 묻자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왕영은 침묵 끝에 그러라고 함.
그리고 그날 밤.

**

원은 금과정 앞에 서있음. 들어가려다 멈춰 선 원에게 장의는 왜 그러시냐 묻지도 못했음.(진관은 산이 경호중.) 이렇게 어두운 얼굴은 처음임. 그럴 만도 하지. 단이 죽고 린이 떠난 충격에서도 벗어나기 전인데 혼담이라니. ..이런 때 린 공자라도 계시면.. 생각하는데.

-말을 가져와라.

이 밤에 말은 어찌.. 물어도 답이 없음. 하는 수 없이 가져오는데 안 좋은 예감이 듬.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틀린 법이 없지. 혹시 싶어 두 마리 데려왔더니 검은 말에 올라탄 원이 늦어도 오 일 안에 오겠다며 다른 말을 쳐서 먼저 뛰어가게 하고 휙 가버림. 장의가 아무리 뛰어난 무사라도 달리는 말을 어떻게 따라잡음. 금세 사라진 원의 뒤에서 숨만 몰아쉴 밖에.

**

비월루. 전은 화가 덕지덕지 묻어었음. 아버님도, 송인도 참으라고만 하지 이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음. 원래 제 여인이었는데 제 여인을, 그것도 우리 단이를 죽인 여자의 아들에게!! 전이 벌컥 술을 병째 들이키려는데 지켜보던 송인이 술병을 잡음.

-술이 과하십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이 술 뿐이니 어쩌겠나.
-...마음이 번다하신 것을 모르지 않으나, 중요한 때입니다.
-..그 중한 때에 자넨 칭병까지 하며 어딜 가려는 겐가? 아버님께도 시간을 달라 했다며.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뭘.
-..다녀와 말씀 드리겠습니다.

늘 이런 식임. 중요한 일은 저들끼리만 속닥속닥. 전은 다시 술병을 듬. 송인은 다시 말림. 전이 왈칵 짜증을 냄.

-뭐하는 거야?
-주군께서 이러시면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주군소리에 멈칫.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임. 전은 좋기도 하고 뻘쭘하기도 해서 작게 헛기침을 함.

-주군은 무슨..
-이 나라의 왕이 되실 분 아닙니까.
-......
-작은 일에 마음두지 마십시요. 대업을 이루셔야지요.

왕. 고려의 왕. 방금 전까지 들끓었던 원과 산의 혼담이 시시하게 느껴짐. 전은 그간 일이 많아 자기가 좀 흔들렸다며 송인에게 잘 다녀오라고 함. 송인은 속으로 한숨을 쉼. 달래는 말 몇 마디에 넉넉한 척 구는 왕전은 역시 감이 아니다 싶음.
전에게 예를 갖추고 나온 송인은 말에 올라 잠시 그대로 있음. 확인하러 간다는 건 진짜임. 송인은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싶었음. 왕영과 이대로 손을 잡을 수 있는지. 만약 도저히 결심히 서지 않으면 비밀결사, 물러날 작정임. 해야할 결심마저 못할 정도면 분명 일을 완전 그르칠 것임. 그러니 가서 보고, 한 번만 보고... 생각 끝에 송인은 쓰게 웃고 맘. 이 와중에도 좀 두근대서 말임. 연정이란 놈이 힘이 세긴 세군.. 송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출발함.
보.현사. 린이 있는 곳으로.

**

린은 산사 돌계단에 앉아있음. 새소리가 들림. 파릇한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고. 흔들리는 잎 사이로 햇살도 비침. 가만히 눈을 감아봄.

-날이 좋지요?

절의 주지임. 주지는 린의 옆에 앉음.

-처음 여기 오셨을 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
-이제는 주변이 좀 보이십니까.
-.....봐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봐도 되는 게 어딨습니까. 뚫린 눈이니 그저 보이는 게지.

격한 단어선택에 린이 저도 모르게 웃음.

-작년 여름엔 비가 많이 왔습니다. 다시는 해가 들지 않을 것처럼 어찌나 퍼붓는지 이 땡중이 무슨 죄라도 지었나 했지요. 헌데 이리 맑아졌습니다.
-......
-다 지나갑니다.
-......그렇..습니까.

주지는 빙그레 웃으며 일어남.

-경치구경 많이 하십시요.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은 일이니.

주지가 가고 린은 새삼 하늘을 보다 눈을 감음. 햇살. 바람. 청량한 소리들. 오랜만에 그 사이에 파묻혀 있는데 투둑.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끼어듬. 산짐승이라면 저렇게 얌전히 부러뜨리진 않을 테지. 간만의 평온함이 순식간에 사라짐. 린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뜸. 그리고 몸을 긴장시키며 일어서는데.






-지지부진 끄느니 짧게 끊어 빨리 가기.
-일이 많으니 딴짓이 잘 된다. 와..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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