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굳게 닫힌 대문을 봄.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음. 아니. 이유가 있긴 있었음. 있어도 너무 많이 있었지. 비연과 아버지가 원성전에 불려간 게 5일 전임. 그 말은 원이 5일이나 몸져 누워 있었다는 뜻임. 눕지도 자지도 못하고 깨났다는 소식만 기다리던 산은 결국 한밤중 집을 뛰쳐나왔음. 대체 어디가 얼마나 상했기에 일어나질 못하는 건지, 그 넓은 궁에 그 분 깨울 약재 하나 없다는 건지. 제 처지고 뭐고 초조함이 극에 달해 달려오긴 왔는데. 린네 집 앞에 서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거임. 공자께 그 분의 안부를 묻겠다고? 아가씨의 죽음에 원성전이 얽혀 있을 지도 모르는데? ...그만 돌아가려 했음. 근데 원의 얼굴이 떠오르며 목이 턱 막히는 거야. 당최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근처 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새 희끄무레 동이 터왔음. 산은 그제야 그만 가야지 발을 떼려 했음.
그런데 문이 열리더니 린이 나오는 것임. 산은 그새 더 반쪽이 된 얼굴을 아프게 바라보다 순간 휘둥그레짐. 집을 향해 멀거니 서있던 린이 큰절을 하는 게 아님? 어디 멀리 떠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봇짐도 멨고. ...설마.. 산은 저도 모르게 린을 뒤따름.
그렇게 시작된 미행은 싱겁게도 끝이 났는데, 린이 금과정에 들어가고 얼마 있다 안산댁이 나오더니 산이 숨어있는 골목 귀퉁이에 술 두 병을 놓고 간 것임. 산은 머뭇거리며 술병을 열었음. 한 병에는 향긋한 술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다른 병에는 돌돌 말린 서신이 들어 있었음.
[따르는 발이 있을지 몰라 서신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아가씨의 일을 듣고도 도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염려 마십시요. 저하께서 도우실 겁니다. 저하는 괜찮으십니다. 어젯밤 열이 내리셨으니 곧 일어나실 거에요. ..산이 아가씨.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부디 평안하십시요.]
이렇게 불쑥, 그것도 원이 아픈데 떠날 사람이 아님.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그 밤의 대화가...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떠나고 마는구나. 이렇게 쓸데없이 내 걱정까지 하며 바보같이... 산은 그만 털썩 주저앉음. 향긋한 술내음이 산의 주위를 아프게 멤돌았음.
**
원은 눈을 뜸. 익숙한 천장이 보임. 머리가 좀 멍함.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을 되짚어 봄. 원성전, 은영백, 어마마마.. ..주머니. 그, 주머니. 지그시 입술을 무는데 물자마자 미지근한 물수건이 닿음.
-됐다. 치우거라.
그래도 그대로 임. 장수 이 놈은 왜 뜬금없이 고집인가 짜증스레 고개를 돌리던 원은 그대로 굳고 맘.
-..귀찮아도 그저 계십시요.
반쪽이 된 얼굴이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음.
-오래도 주무십니다.
-......
-시장하시죠. 잠시 계십시요.
린은 손목을 잡아채는 원에 멈춰 섬. 원은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림.
-....진짜네.
린은 잠시 있다 슬그머니 손을 빼내며 일어남. 원은 힘겹게 침상에 기대 앉아 린을 올려다봤음. 시선을 조금 비끼고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게 정말 린이 맞음.
-....앉아.
-..요기부터
-힘들다.
린은 그제야 의자에 앉음. 원은 가만히 린을 보다 입을 뗌.
-많이 야웠네.
-.......
-밥은. 먹었어?
-...저하.
-...먹자. 같이 먹어.
린은 원과 눈을 다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임. 겨우 짓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음. 원은 천천히 다가가 손을 감쌈. 괜찮냐고도, 미안하다고도 할 수 없음. 이 와중에 여기 앉아 제 병간호나 하고 있던 린을 평소처럼 타박할 수도 없음. 할 수만 있다면 이 손을 잡고 궁이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음. 가서 영영 돌아오고 싶지 않음. 그런 원의 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건지 때마침 밖에서 장수가 고해 옴.
-저, 저하. 당후관 들었사옵니다.
송인이? 미간을 찌푸리는 원에게 흠칫 굳는 기색이 전해짐. 원은 천천히 손을 놓고 허리를 폈음.
-들라 하라.
궁녀 하나를 대동하고 들어선 송인의 시선이 린에게 닿음. 원은 묘한 불쾌함을 숨긴 채 얼굴을 꾸몄음.
-당후관이 예까진 무슨 일로.
-전하께서 탕약을 내리셨습니다.
일어나 옆으로 비껴서는 린을 힐끔인 원이 궁녀 손에 들린 탕약쟁반으로 시선을 돌림.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탕약이라. 세자궁에 심어진 눈이 역시 원성전의 것만은 아니었구나 싶어 내심 쓴웃음이 남. 하지만 뭐 엎어버릴 수도 없는 거 아님? 원은 한숨을 누르며 꿇어 앉으려 함. 아들이라고 왕이 내린 탕약을 앉아서 받을 수는 없는 거니까. 린과 장수가 먼저 꿇어 앉고 원이 막 무릎을 굽히려는데
-저하. 왕비마마 드셨사옵
궁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성이 들어옴. 원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고. 린과 장수는 얼른 일어나 예를 갖춤. 원성은 허리를 숙이는 송인을 외면하고 탕약을 노려보다 장수를 직시함.
-기미는 하였느냐.
-예? 그, 그것은...
장수는 어쩔 줄 몰라함. 고려 때도 기미를 했나 헷갈려서는 아님. 헷갈려서 어쩔 줄 모르겠는 건 나임; 무튼. 아니 왕이 내린 탕약에 뭔 기미. 그건 왕이 아들을 죽일까 대놓고 의심한다는 거잖아. 혹시 미치셨어요? 라곤 목이 찢어져도 못하겠는 장수가 눈알만 굴리며 마른침을 삼키는데 송인이 차분하게 나섬.
-마마. 전하께서 내리신 탕약이옵니다.
-감히 뉘라서 전하의 성심을 의심할까. 다만 전하 주변에 세자와 전하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불온한 무리가 있으니 내 그를 염려하는 게야.
-하오나 마마.
-김내관은 뭘 하고 있느냐. 어서 기미를 하지 않고.
송인은 더 말을 보태지 않고 물러섬. 원은 굳은 낯으로 원성을 봄.
-그만 하십시요. 아바마마께 괜한 오핼 사십니다.
-어미는 그 오해보다 세자가 중합니다.
-어마마마.
-김내관.
장수는 거의 울 지경이 되어 린을 돌아봄. 송인의 얼굴이 순간 흐려짐. 린은 무겁게 입을 열었음.
-..마마. 명을 거두어 주십시요.
원은 다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음. 린이 원성과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정이었음.
-린아.
-세자가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냐. 너 역시 그런 게야?
-어마마마!
-..전하께선 저하의 아버님 되십니다. ...부디 저하의 심사를 헤아려 주십시요.
린의 말에 잠시 침묵이 멤돔. 원성의 차디찬 낯에 금이 가고 송인은 몰래 입술을 깨물고, 원은. 원은 숨쉬는 것도 잊은 채 린을 바라봤음.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마움, 애틋함이 뒤섞여 주체하기가 힘듦. 원은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단호하게 무릎을 꿇었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탕약 원샷. 놀라 무릎을 꿇는 장수 옆에서 린은 아픈 속을 겨우 견딤. 이 분을 두고 정말 갈 수 있을까. 이렇게 외롭고 힘든 분을 이 궁에 홀로 두고 내가..
-세자!
찢길 듯 울리는 원성의 외침이 린을 꾸짖는 것 같음. 그래서. 여기 머물러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열에 들떠 입 한 번 맞춘 것으로 네가 세자의 마음이라도 얻은 줄 아냐고. 그리고 혹 그렇다 한들 더욱이 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세자와 단이 사이에서 흔들리며, 세자를 볼 때마다 원성을 떠올리며 차마 다 사랑하지도, 다 미워하지도 못할 나약한 너는 결코 세자의 곁에 머물 수 없다고.
-린아!
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림. 다 저를 보고 있음. 원성은 싸늘하고 송인은 씁쓸하고 원은 얼마나 다급히 불렀는지 잔뜩 놀란 눈임.
-왜 그러느냐. 어디 안 좋은 거냐?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송구합니다.
송인에 원성까지 있는 데서 딴 생각을 할 린이 아니라 더 속이 타지만, 일단 이쪽부터.
-..아바마마께서 너를 찾으신다. 다녀 와.
-저를.. 말입니까.
린이 송인을 봄.
-잠시 보고자 하십니다.
원성이 왜 저토록 싸늘한지 알만 함. 하지만 벗어나게 되어 다행임. 견디기가 힘들었음. 린은 원성과 원에게 인사함. 송인도 인사. 원은 송인을 불편하게 쳐다 봄.
-여기서 있었던 일 아바마마께서는 모르셨으면 하는데.
-한결 편해지셨다 고하겠습니다.
-..후에 문후 올리겠소.
송인은 다시 예를 갖추고 돌아섬. 린과 나서는 송인. 원은 문이 닫히기까지 둘의 뒷모습을 바라봄. 이 불안함이 대체 뭔지 모르겠음.
-..세자.
원은 시선을 바로 함. 하지만 원성을 마주보기는 힘듦. 일단 주위를 물림. 원성은 파리한 원의 안색에 자리에 앉으라 함. 원은 침상에 걸터 앉음. 원성도 근처 의자에 앉음. 원은 저를 향한 원성을 보지도 않고 앞만 봄. 침묵 끝에 원성이 먼저 입을 염. 아까와 달리 걱정 가득한 목소리임.
-좀 어떠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당후관 앞에서 과하셨습니다.
-자식이 사경을 헤메다 깨났는데 과하지 않을 어미가 있겠습니까. 지난 오 일간 어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압니까.
원은 사이를 두고 말을 이음.
-판대부시사와 그 여식. 건들지 마십시요.
-....세자.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알고 숨겼습니다. 허니 죄를 물으시려거든 제게 물으십시요.
원성은 원망과 애정이 뒤섞인 눈으로 원을 바라봄.
-...어미가 그들을 죽이기라도 한답니까.
원은 그제야 눈을 맞춤. 여전히 의심이 서려있음.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냉랭하기만 한 아들이 못내 서운하지만 식은땀이 배어나는 이마에 이리 가슴이 아프니 어쩌겠음. 원성은 달래듯 속을 터놓음.
-전날 추국장에서 감싼 아이. 그 아이가 진짜 판대부시사의 여식이지요.
-..어마마마께서 그를 어찌...
-확인하려 부른 것뿐입니다. 세자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심려 마세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세자와 그 아이를 지키려 한다면 믿겠습니까.
-산이를.. 어마마께서 어째서요.
역시 믿지 못하는 원을 아프게 건너보던 원성이 말을 돌림.
-후에 얘기하지요. 그만 누우세요. 일어나자마자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그래도 꿈쩍 않는 원에 원성은 한숨처럼 힘없이 웃고 맘.
-어미가 가야 쉬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만 갈 테니 쉬세요. ...이리 일어나 정말 다행입니다.
원은 계속 말이 없음. 원성이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후라타이가 원망섞인 얼굴로 원에게 예를 갖추고 원성을 따름. 문이 닫히고. 한동안 앉아있던 원이 벌떡 일어나 문쪽으로 감. 하지만 열지는 못함. 애정과 원망으로 치자면 원성이 원만 하겠음? 확연히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에 가슴 한 켠이 저리다가도 린. 린을 생각하면 눈조차 맞추기 힘듦. 대체 왜 그러신 거냐고,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실 수가 있냐고 악을 쓰고 싶다가도 이대로 아무 것도 안 묻고 싶음. 최종확인까지 받으면, 정말 내가 그리 했다 하시면.. 원은 입술을 깨물며 의자에 앉음. 이마를 짚고 있자 슬그머니 들어온 장수가 조심히 다가섬.
-저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어의를 부를까요.
잠시 침묵하던 원이 진관, 장의를 불러 린이 불려간 이유를 알아보라 함. 둘이 나가고 원은 무거운 목소리를 냄.
-...그 궁녀는.
-...명하신 대로 하고 있습니다.
원은 생각에 잠김. 장수는 기색을 살피다 조용히 죽그릇을 가져옴. 근데 실수로 다른 의자에 놓여있던 봇짐을 건들임. 하도 조용해 봇짐 떨어지는 소리가 세게 비침. 저하 심기 불편하신데 안 될 거야 난.. 안절부절 못하며 봇짐 챙기는 장수에게 원이 핏 웃고 맘.
-눈알 좀 그만 굴려라. 정신 사납다.
-송, 송구합니다..
-근데 그건 뭐냐?
-왕린 공자께서 메고 오셨습니다.
-린이?
장수에게 받아보니 린의 것이 맞음. 저랑, 정확히 말하면 저 때문에 멀리 갈 때마다 메고 간 것임. 근데 이걸 왜.. 하던 원의 안색이 순간 굳음. 장수가 확연히 다른 기색에 긴장하는 새 원은 급히 짐을 품. 검은 평복. 신 두 켤레. 물이 담겼을 가죽통... ...어색하게 눈도 다 못 맞추고 서 있던 린이 스쳐감. 원은 의자에 털썩 기댐. 떠나려는 거구나. 날.. 그만 떠나려는 거야. 짧은 문구가 머리를 내려쳤음.
**
-허면 이 약재는 따로 보내야겠구나.
-송구합니다.
충렬은 조용히 서 있는 린을 안쓰럽게 봄. 원과 붙여 다녀 탐탁치않아 했으나 원래는 수사공네 형제 중 린을 가장 예뻐하던 충렬이었음. 잊고 있던 애정이 새삼 솟아나 충렬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짐.
-그래. 어디로 간다고.
-보현.사로 가려 합니다.
-경흥.도호부에 있는? ..아. 유골을 거기 두었다 했지.
-..예.
-..범자를 잡아야 하는 것을.. 내 너에게도, 수사공에게도 면목이 없구나.
옆에 서 있던 송인은 린에게 눈을 돌림. 잠시 사이를 두고 황송하다 고하는 린. 정말 대단한 사내임. 동생을 죽였다 알고 있는 여인의 아들에게 어찌 저런 충심을 바치는지.
..정말 그때만 생각하면 송인은 아직도 입이 마름. 부용이 멋대로 린에게 거짓 단서를 흘렸다는 걸 무석에게 전해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던 밤. 린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울고 있었음. 그런 린을 보며 송인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또 다시 알았음.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연심. 다른 하나는 무릎을 치고 가슴을 짓이기는 죄책감.
..사실 죄책감은 그전부터였음. 그래서 그런 거거든. 원성이 은영백을 부르도록 유도하여 원을 끌어들이고 그 앞에 거짓증거를 내놓은 거. 무슨 개소리냐 하겠지만 나름 각오하고 한 일이었음. 원이 그 길로 원성에게 따져묻고 일을 가시화한다면. 린에 대한 원의 마음 역시 혈육의 정을 넘어설 만큼 확고하고 큰 것이라면. 린의 이 지독한, 연심이라 오해할 만큼 절절한 충심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면. 송인은 제가 단을 납거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거짓자백(?)하고 자결할 생각이었음. 고려의 명운이 걸린 비밀조직을 드러낼 수는 없고 사실대로 부용의 짓이라 할 수도 없으니 린에게 사죄할 길은 그뿐인 듯 했음. 그럼 그냥 죽지 원은 왜 끌어들이느냐. 확인하고 싶었음. 원이 린을 지킬 수 있는지, 그 충심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어딘지 말이 안 된다고? 맞음. 말이 좀 안 됨. 천하의 송인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말이 되는 것처럼 하고 있었음. 린에 대한 연심과 소유욕, 죄책감과 두려움, 원에 대한 질투심과 의심으로 냉정한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지. 어리석게도 혼자만의 연심으로 죽어간 누이처럼. ...그래. 한없이 한심해지는 와중에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음. 린을 절대 누이처럼 만들 수는 없다는 거. 그러니 더더욱 원은 아닌 것임. 송인은 원이 그 궁녀를 몰래 감금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 해서 확신했지. 쓰러져 틈이 없었다곤 하나 이후에도 원은 그 궁녀를 결코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그는 역시 자격이 없다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린이 인사를 올리고 나가자 송인도 수사공 댁에 약재를 전하고 오겠다며 나감. 앞서 가던 린이 멈춰선 건 왕의 처소를 벗어나 인적 드문 정원에 다다를 때였음. 린이 허공을 보며 말함.
-산이 아가씨. 그대 짓인가.
송인은 린을 향함.
-이미 오래 전에 관여 않겠다 약조를 드렸습니다.
-아가씨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면 저번처럼 넘어가진 않아.
-..저는 제 말 정도는 지키는 잡니다.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 ..다른 일도 약조를 지킬 거라 믿겠다.
원성전의 일을 발설치 마라- 직접 말하는 것보다 무서움. 세자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린이 알면 이번에야말로 목이 날아가겠군. 송인은 쓰게 미소함.
-...저하가 그리 걱정되어 어찌 떠나십니까.
-.....
-저하께서... 허락하셨습니까.
-저하의 일에 상관치 말라 했을 텐데.
날카로운 반응에 공기가 얼어붙음. 린은 잠시 있다 발을 뗌.
-먼 길. 무탈.. 하십시요.
송인은 대꾸도 없이 걸어가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봄. 그리고 얼마 떨어진 기둥 뒤. 진관과 장의가 혼란을 가득 담고 서 있음. 전에 한 약조는 뭐며 믿을 수밖에 없다는 건 또 뭐며 다른 약조는 또.... 대체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니. 둘 '사이'라니. 공자가 송인과 관련될 일이 뭐야.. 진관, 장의는 각자 이상한 기분을 추스르며 돌아섰음. 말하지 않아도 알았음. 진관도 장의도 이 일을 저하께 발설치 않으리라는 걸.
**
린은 나무 아래 앉아있는 등을 바라봄. 봇짐을 보셨다고 김내관에게 들었음. 린은 천천히 원에게 다가섬. 원은 린을 보지 않은 채 말함.
-앉아.
잠자코 옆에 앉아도 말이 없음. 린도 마찬가지임. 작정하고 왔는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음.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음. 하지만 가능한 일이 아님. 시간을 멈추는 것도,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함. 없던 것처럼 지울 수는 없음. 단의 죽음도, 원성전의 일을 알아버린 것도, 저하를 연모하는 것도.
-이 나무 기억하느냐?
원은 해가 기울 때쯤에야 입을 염.
-어릴 때 늑대를 피해 올라갔었잖아. 그 놈들 어찌나 끈질기던지. 해가 지도록 가질 않았어. 나무를 긁어대고 으르렁거리고.
-...기억합니다.
-...사실 그때 나 되게 무서웠다. 이대로 죽나 싶었어. 근데 네가 있으니 어디 티를 낼 수가 있느냐. 호위도 따돌리고 잘난 척은 있는대로 다 해놨는데. 그래서 내 속으로 그랬다. 이놈은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해. 그러며 널 보는데... ...너, 단검을 쥐고 늑대만 노려보고 있더라. 겁먹은 낯빛이 아니었어. 여차하면 뛰어내릴 작정이었지. 순간 무섭고 뭐고, 니놈이 정말 그러면 어쩌나 그 생각밖에 안 들어서 너 못 뛰어내리게 하느라 손만 꽉 잡고 있었지 않느냐.
린은 옛생각이 나 저도 모르게 약간 미소를 지음. 그때 어찌나 손을 꽉 잡고 있었는지 내려와서도 한참을 얼얼했음.
-...근데 지금은 모르겠다. 놓지 않는 게 맞는 건지.
...아니. 사실 알고 있음. 지금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잠깐이라도 보내는 게 나음. 그런데, 떠나려 한다는 걸 알자마자 움직일 수조차 없었음. 발밑에 굶주린 늑대가 있는 것보다 천 배는 무서웠지. 린이 이대로 떠나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생각만 하는구나. 원은 빈주먹을 말아쥠.
-...내게.. 할 말이 있지.
린은 한참만에 겨우 입을 뗌.
-...저하. 떠나고.. 싶습니다.
원은 그제야 린을 봄. 다 죽어가는 얼굴로 고개도 들지 못하는 린을 보면서도 가지 말라는 말이, 내 옆에 있어달라는 말이 찰랑거림. 원은 애써 속을 다스림.
-...얼마나.
-.......
-...잠시라는 거짓말은 역시 못하는구나.
-......
원은 다시 고개를 돌림.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음.
-...어디로 가는데.
-....보현..사로...
단의 유골이 있는 절. 원은 이번만큼은 린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절감함. 붉은 하늘이 검어질 동안 원은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음. 정말 무리한 탓에 식은땀이 배어남.
-저하. 들어가시는 것이
-멀리 가는데 짐이 왜 달랑 그거야. 말도 없고. 그 먼 델 걸어서 갈 생각이냐.
-....저하.
-옷이며 요깃거리며 챙겨 넣으라 할 테니 가져 가. 말도 타고 가고.
-.....
-사양하지 마라. 먼 길 고생하는 것도 하지 말고. ....그것까지 보게 하진 마.
-.....
날이 저물었으니 오늘 밤만. 네 몸이 많이 상했을 테니 내일까지만. ...지금 잡으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 결국 보내지 못할 것을 앎. 원은 옷자락을 쥐며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만을 바람.
-..어둡다고 말 못 탈 놈 아니니 ...가.
린은 붉어진 눈으로 원을 봄. 하늘만 보고 있는 원도 눈시울이 붉음. 죄송합니다, 저하. 정말... 죄송합니다. 린은 끝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일어나 깊게 허리를 숙임. 그리고 무겁게, 정말 제 몸이 이렇게나 무거웠나 싶게 한 발, 한 발 떼는데.
-린아. ...아프지 마라.
기어이 울리는 원임. 린은 젖은 눈으로 오늘따라 왜소해 보이는 등을 하염없이 바라봄. 그리고 돌아서 천천히 멀어짐. 온통 검은 하늘 아래 홀로 앉은 원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끝내 멀리. 그렇게 둘은 서로를 안 이후 처음 헤어졌음.
+아직 반의 반도 못 온 거 실화냐...
+이럴 거 썰말고 글로 쓸 걸 그랬나ㅎㅎㅎ
+근데 얘네, 넘나 좋아 놓을 수가 읍따..
+이 비루한 썰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아직 계실 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부터. 진짜 미친년 널뛰는 연재(?)텀 죄송합니다... 그래도 완결은 낼 거에요. 이어 쓰고 싶은 게 있어서☞☜ 다만 이 미친 주기는 여전할....(말못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