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진그룹은 전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갑자기 자금줄이 틀어 막혀 전력을 기울인 중국사업이 휘청이는 바람에 연일 주가가 폭락했고, 돈과 권력은 그 속성대로 바람보다 빠르게 돌아섰다. 조회장은 모든 연줄을 동원해 자금 확보에 나섰지만 누구도 신진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남은 건 골드문 뿐이었다. 자금동원력 하나는 어느 기업에도 뒤지지 않는 골드문. 위험한 선택지였지만 신진을 잃는 것보다 최악은 아니었다. 중국사업 지분을 크게 떼 주는 조건으로 골드문에 선을 댔다. 계약은 일주일 뒤 체결됐다.

합작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은행에선 전화가 빗발치고 연락불통이던 투자자들은 앞 다퉈 화환을 보내왔다. 양반족보 돈으로 산 상놈들이라고 속으로 골드문을 낮잡아봤던 조회장이 그들을 극빈 대우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회장은 정치비리에 얽혀 검찰에 소환되고, 골드문과의 사업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해외사업지부 사장 조태오가 이어 받게 된다.

 

신진그룹의 족보는 다른 재벌가들처럼 개판이었는데, 그나마 나은 게 조태오라는 후계자였다. 조태오는 신진가의 첫째로 조회장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들이었다. 서른 중반의 나이에 해외사업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사업수완도 그렇거니와, 어릴 적 어미를 잃은 자식에게 눈 한 번 더 가는 건 천하의 조회장이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둘째 아들이 그 모양인 바에야.

 

조태민은 재벌가 망나니의 표본 같은 인물로, 둘째부인의 자식이라는 딱지가 상처려니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폭행, 음주, 여자문제 기타 등등 하도 화려하게 사고를 쳐서 외국으로 내보냈더니 치던 사고 플러스 마약에 남자문제까지 벌이고 다녔다. 아버지의 한숨과 어머니의 눈물로 서른 줄 들어서는 좀 잠잠해졌으면 조태민이 아니다.(아버지의 한숨도 없었고) 실장 달고 겉으로는 말끔한 척 하는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또라이. 더러운 데다 무섭기까지 한 똥덩어리가 바로 지금의 조태민이다.

그런 조태민에게도 무서운 게 두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서슬 퍼런 아버지요 둘째는 그 아버지의 개자식 조태오였다. 그러니 눈이 돌아 배기사를 죽이고 조태오의 귀국소식을 들었을 때, 조태민이 얼마나 미치고 팔짝 뛰었겠는가. 최상무 말마따나 그런 거지새끼 하나 밟아버린 거, 회사에서 처리한 것도 아니고 차 하나 수배해서 강에 던져버렸으니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도 찜찜하고 기분 더러웠다. 되는 일이 없었다. 없다 없다 이제 별 시답잖은 형사 새끼까지 신경을 건드린다.

 

어이! 태민아! 나야, ! 인마! 조태민이!”

 

술 한 번 따라준 형사 놈이 감히 조태민의 이름을 옆집 개 부르듯 부르며 로비에서 개난리를 치고 있다. 조태민은 곤란한 듯 이쪽을 돌아보는 최상무를 갈아 마실 듯 노려보다 한 발 나서는 조태오를 얼른 막아섰다.

 

귀한 손님 모셔놓고 뭐하려구요. 내가 처리할 테니까 회장님 모시죠?

 

조태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제법 연기한다만 뻔할 뻔자다.

조태오라고 조태민이 좋을 리는 없었다. 어머니의 온기가 식기도 전에 안방을 차지한 여자의 아들. 게다가 그 아들은 커 갈수록 아버지를 빼다 박는다. 상처도, 원망도, 분노도 없지 않다. 하지만 가진 자의 여유인지, 원래 성격인지 조태오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결혼했고 의붓동생은 생긴 걸 어쩌리. 어머니를 살릴 수도, 결혼을 무를 수도, 동생을 없앨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을 돌려 지금 있는 것들을 봤다. 제 손에 쥐어진 것들. 날 때부터 가진 것들. 버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것들. 제대로 가지기로 했다. 재미있진 않았지만 딱히 다른 할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 태도가 조태민을 더 자극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배려까지 해줄 살가운 사인 아니다. 사고나 덜 치면 좋으련만. 조태오는 짧게 고갤 젓고 골드문 회장을 향한다.

 

골드문 회장은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일단 깡패집단 골드문과 영 어울리지 않는, 그러니까 날 때부터 재벌가에서 자란 듯한 외향이 그랬고, 그 외향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냉담한 기류가 그랬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비어 보이고, 하지만 절대 약하지 않은, 한 마디로 상극의 것들을 한 그릇에 담아 놓은 듯 묘했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고 판단했었다. 오늘 처음, 짧게 대면했지만 무엇으로도 흔들릴 남자는 아니라는 것. 그런데 그 사람이, 이런 표정을 하고 있다.

 

“....회장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온다의 실사판이 조심스런 부름도 들리지 않는 듯 한 곳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이상한 표정, 이상한 눈동자다. 반가운 것도, 소스라친 것도, 무서운 것도, 화난 것도 아닌, 굳이 말하자면 지쳐 버린, 늙어 버린, 낡아 버린... ...뒤에 있는 골드문 이사들 표정 봐선 아는 사이 확실한데. 조태민을 목 놓아 부른 저 남자와. 조태오는 남자와 골드문 회장을 번갈아 살핀다. 조태오 뿐 아니라 어느 새 조태민도, 최상무도, 로비 경비들도 둘러싼 모든 이들이 이상한 기류에 휩싸였다.

 

느물대는 서도철은 사실 머리끝까지, 가슴 깊숙이, 아주 뼛속까지 빡 쳐 있었다. 담당 형사는 기초수사도 제대로 안 하고, 오 팀장은 몸이나 조심하라고 한다. 선량한 배 기사는 알아볼 수 없이 뭉그러져, 그것도 물에 퉁퉁 불어 발견됐는데. 아내가 남편을 잃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잃었는데.

조태민. 그 새끼가 확실했다. 폭행이 있었다는 어린 아이의 진술도 있고, 하필 그 시간에 주차장 CCTV까지 점검한 것도 구린내가 났다. 무엇보다 술자리에서 한 번 본 조태민은 그러고도 남을 새끼였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모욕하고 죽일 수 있는 개새끼. 오 팀장은 구구절절 말렸지만 한 번 흔들어나 보잔 심산으로 신진에 달려왔다. 수확을 바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술자리에서 조태민은 분명 킁킁거렸다. 약하는 새끼들의 전형적인 습관. 약쟁이들은 기본적으로 스트레스에 약하다. 자꾸 건들면 어딘가는 엇나가게 돼 있다, 가 신진그룹 들어오기 직전에 생각한 거고, 실은 빡 쳐서가 80%였다. 무대포, 포크레인, 불도저, 또라이. 자신의 별명대로.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서도철이라도 이 상황은 좀 많이 황당하다. 조태민 개새끼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이 너무 빤히 본다. (봐야 잘생겼지.) 걔 중에서도 특히 저 남자. 사내새끼가 희멀건한 게 귀신도 아니고... 하는데 그 귀신도 아닌 게 한순간 거칠 것 없이 다가와 두 발 앞에서 빤히 본다. 무슨 신기한 구경거리 보듯 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 감정 없이, 마치 무생물 보듯 그렇게. 기분 존나 더럽게. 서도철은 입고리를 비튼다.

 

뭡니까, 너는?”

 

소스라치는 시다바리 최상무만큼 서도철도 내심 놀랐다. 비꼰 직후 남자의 얼굴이 너무 급작스럽게 변해서. 미스 봉이 막내 꼬시겠다고 틀어놓은 구닥다리 공포영화에서처럼 인형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새끼.

로비의 대부분이 품은 질문을 서도철 역시 공유하며 다시 남자를 본다. 가까이서도 희멀건한 낯빛.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뒤로 넘긴 검은 머리, 반듯한 이마, 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눈동자, 그리고 뭐라 말할 것처럼 스치듯 벙긋이는 입술. 그 입술 끝이 희미하게 뭉개지는 것 같았다. 마치 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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