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vvvv...앞에 v를 아무리 붙여도 모자를 최상위 vip를 위해 레스토랑 2층 홀은 통째로 비워져 있었다. 조용하고 향기로운 실내, 적당한 햇빛, 육즙이 배어 나오는 최고급 스테이크, 한 잔 곁들인 와인의 풍미도 일품이다. 해서 이 모든 최상의 것들이 합쳐진 결과, 조태오는 얼마 먹지도 않고 체할 것 같았다. 과연 골드문 회장이랄까. 아까 로비에선 수많은 입들을 단번에 닥치게 하더니 이번엔 여러 사람의 위장을 생으로 괴롭히고 있다. 조태오는 식사자리에 빠진 조태민의 선견지명을 감탄하며 맞은편의 이자성을 건너 봤다.
회사 로비부터 여기까지, 간간히 건네는 말에 대꾸는커녕 눈도 안 마주친다. 아무리 인사와 인수인계를 겸한 자리라고 해도(회장 대 회장이 회장 대 사장이 될 순 없으니까) 이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조태오는 그냥 사장이 아닌 자타공인 신진의 후계자다. 비지니스를 위한 가벼운 대화를 생략할 상대는 아니라는 거다. 조태오는 나이프를 내려 놓았다.
"아까 로비에서 본 그 분, 아시는,"
"신진과 어떻게 관련된 사람입니까."
오랜만의 첫 마디론 적절치 않지만 조태오는 불쾌하기에 앞서 궁금해졌다. 아까, 또 지금. 그 남자와 이 회장은 아는 사이다. 아니, 그 남자는 어떨지 몰라도 이 회장은 분명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오히려 이쪽에 묻고 있다. 조태오 역시 궁금한 그 남자를. 조태오는 잠시 침묵하다 최상무를 돌아본다.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 있던 최상무는 즉각 일어나 조태오 옆으로 섰다.
"신경쓰실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말하세요. 회장님 궁금해 하시는데."
"그게.."
잠시 뜸을 들이던 최상무가 품에서 명함 하나를 내민다. 소속을 확인한 조태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경찰?"
등 뒤로 최상무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골드문 이사가 헛숨을 들이켠다. 최상무는 곤란한 듯 미소하며, 하지만 정말 이쯤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영화 건으로 한 번 술자리 했는데 그때 조실장이랑 안면 튼 걸로 자꾸... 하하, 콩고물 떨어질 거 없나 들이대는 거죠. 그쪽 뻔하지 않습니까. 말끔하게 처리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십,"
"명함, 잠깐 보겠습니다."
불쑥 내밀어진 손에 조태오는 말을 보태지 않고 명함을 건넸다. 손바닥 반 만한 명함을 한참도 들여다 보며 이자성은 말이 없었다. 주의 깊게 살폈으나 무감한 눈동자도 그대로 새카말 뿐 동요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말 모를 사람이네... 조태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와인잔을 돌렸다. 조태민과 자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최상무 말을 백 퍼센트 신뢰할 순 없지만 아무리 광수대라도 형사 정도, 사안에 따라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수습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이쪽인데... 뿌리가 조폭이라 경찰이라면 피라미도 싫은 건가. 저게 싫어하는 눈인가. 아니, 이 남자,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런 감정 같은 게 있기는 한 건가. 저토록 비어 있는 눈을 하고 그게 가능한가... 조태오의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자성도 자성대로 계속 말이 없어 침묵은 초침이 세 바퀴나 돌 때까지 이어졌다.
"...회장님."
골드문 이사의 낮은 부름에 조태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이 회장은 그러고도 얼마 있다 고개를 들었다. 진흙 같은 눈동자였다.
**
"다녀왔...."
"...왔냐."
"...난 왔는데, 넌 아직 안 왔네."
"갔던 일은. 세금 새끼들 까칠하게 안 굴디."
"난 잘 됐는데 넌 아니고. 왜. 신진 사장놈이 상황파악 못하고 오만하게 나와?"
"....담배 한 대 피자."
"뭔데."
"와 봐."
등에도 표정이 있다면 사무실을 나가 복도 끝 하늘정원으로 이어진 문을 여는 재헌의 등은 초조해 보였다. 아니다 다를까 나무벤치 옆에 서서 담배부터 꺼내드는 손이 작게 떨리고 있다. 몇 번의 헛손질을 가만히 지켜보던 석무가 대신 불을 붙여주자 오아시스처럼 필터를 빨아대는 꼴 역시 심상치 않았다. 석무가 아는 재헌은 더럽게 침착한 놈이었다. 쉽게 동요하지 않았고 동요한다 해도 잘 들키지 않았다. 꼭, 누구처럼. 석무는 넥타이를 헐겁게 풀며 담배를 문다.
"신진에서 무슨 일 있었는데."
못 들은 사람처럼 담배만 빨아대는 재헌을, 석무는 채근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렇게 담배 두어 대가 재헌의 폐로 사라지고 나서야 재헌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어느 정도 침착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큰형님 봤다."
"뭐?"
"신진 로비에서. ....옷차림도, 머리모양도, 말투도 다 다른데, 큰형님 얼굴이었어. 분명.. 형님이셨어."
석무의 손에서 반쯤 태운 담배가 뚝 떨어진다. 다른 놈이 이런 말을 꺼냈다면, 그러니까 인호나 제형 같은 놈들이 만에 하나, 감히 이딴 소릴 입에 올렸다면 석무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꽂아 넣었을 거다. 하지만 눈 앞의 재헌은 농담할 놈이, 그것도 큰형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럴 놈은 절대 아니었다. 농담은커녕 큰형님 돌아가시고 지금까지 기일이 아니면 괴로운 티도 안 낸 놈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헛소리는 아니라는 건데..
"형사랜다."
"....."
"큰형님 빼다 박은 그 남자, 광수대래. 경찰. 짜바리... 하하...."
석무는 벤치에 주저 앉는 재헌을 멍하니 들여다 본다. 여수시절부터 큰형님과 함께 했던 재헌도 석무만큼 잘 알고 있을 테다. 큰형님이 경찰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서울 올라와서도 짜바리 솎아 내는 일만큼은 진심을 다했다는 것도. 그런데, 큰형님을 봤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데 그 큰형님이 뭐?
"이게 말이... 말이 되는 거냐? 이게 있을 수 있는, 있어도 되는 일인 거야? 왜 하필... 어째서 하필이면.. ....꿈이지, 이거. 이거, 꿈이지 오석무?"
석무는 괴롭게 머리를 감싸 쥐는 재헌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낸다. 듣기는 다 들었는데 대체 정리가 안 된다. 납득이, 이해가 도저히...
'씨빡새끼. 뒤질라고 허둥대냐?'
....니미. 석무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애써 갈무리 하며 담배를 문다. 정리해보자면, 오늘 신진에서 큰형님을 봤고 그 큰형님이 형사라는 건데...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직접 보지 않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그럴 리는 없다. 큰형님은, 정청은 4년 전에 죽었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져,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난자 당해 썩은내 나는 창고에 버려졌다. 그 시신을 직접 두 손으로 수습하고도 믿기지가 않아 몰래 유전자 검사까지 해봤다. 정청이었다. 큰형님이었다.... 석무는 새삼 지끈거리는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절망감,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잃은 상실감. 평생 갈 고통이다, 이것은. 석무에게도, 재헌에게도, 그리고.... 석무는 번뜩 재헌을 돌아 본다.
"어디 계셔."
"......"
"박재헌. 형님 어디 계시,"
"...큰형님 사무실."
4년 동안 한 번도, 문고리조차 안 잡으시던 곳이다. 명패도 바꾸지 않고, 잎이 긴 입구의 화분 하나 치우지 않고 그때 그대로, 시간을 그렇게라도 잡아 두려는 듯.... 석무의 눈엔 자학이었다. 잊지 않게, 잊을 수 없게, 절대로 나아질 수 없게 상처를 전시해 놓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그만하시라고, 잊으시라고, 보내시라고 그런 말 따위 입 밖에 꺼낼 생각조차 못했다. 저조차 그러지 못한 걸 어떻게..... 석무는 작게 입술을 깨물며 일어난다.
"삼십 분만 더 있다가 내려 와."
멍하니 따라 올라오는 눈이 붉게 충혈돼 있다. 석무는 쓰게 웃으며 재헌의 머리를 헤집었다.
"꼬라지 봐라 씨발놈. 애들 먼저 퇴근시킬 테니까 있다 가. 회장님께 들리지 말고."
"....뭘 어쩌려고."
"알아서 뭐하게. 상태 바닥인 놈이. 가. 가서 술을 쳐먹든 처울든 속 풀고 내일 말짱하게 와."
가볍게 뒤통수를 치고 걸어가는 석무의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꽂힌다.
"넌... ....넌 괜찮냐."
"......"
"....큰형님,"
"큰형님 돌아가셨다. 모르냐."
"......"
깊게 가라앉는 숨소리 뿐 더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석무는 주먹을 꾹 쥐며 하늘정원 문을 열었다. 등의 표정이 앞얼굴보다 태연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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