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소녀는 도깨비 신부지만 연인은 아님
*깨비 절에 다녀온 날.


22기 김차사는 문 앞에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격요건이라곤 '전생에 큰 죄'가 달랑인 저승사자에 떡하니 합격(?)했으니 그 죄, 기억나진 않아도 몹시 크겠다 예상은 했으나... 나란 놈은 대체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아님 수 천을 도륙내기라도 했나. 기억에도 없는 업보가 새삼 사무치는 22기다.
하지만 어쩌리. 오늘의 불행이 단순한 우연이든 죄값이든 저는 이미 길에서 선배님을 만났고, 선배님은 지금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있고, 그 선배님이 사는 집은 바로 여기인 것을.
..그래. 들어가자. 까짓 한 번 죽었는데 두 번 죽기야 하겠어!!!
22기는 용맹하게,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

-끝방 삼촌 언제부터 저랬냐구요. 사람, 아니, 사자가 저렇게 아프면 바로 집에 보내야지 왜 이 시간까지, 거긴 근로기준법도 없어요?!

사자로 살다보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간들이 세상 천지 널렸다는 걸 실감하게 되지만.

-오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저승 아저씨 어떡하면 되는 거에요. 약 먹여요? 아님 119?
-쓰러진 사람, 아니 사자 직장 데려가겠다는 거야?
-그럼 뭐 아파봤자 안 죽으니 내버려둬요?!
-이 소녀가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초짜 사자의 실감이란 사막의 모래같은 것이었나 보다. 사자를 사이에 두고 고성을 내지르는 청년과 소녀는 아무리 봐도 산 자가 분명한데... 그러니까 살아있는 인간이 도깨비 터에서 저승사자와 살고 있단..
22기는 후다닥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생의 업으로 도깨비 터에 발은 들였지만 천만다행 도깨비가 부재중이니 이는 분명 신의 가호. 하늘같은 선배님껜 죄송하지만 제가 있는다고 알 수 없는 통증이 가시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이 길로 다른 선배님을 찾아가 방도를 알아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터. 그래. 나가자. 바람보다 빠르게 나가서 선배님도 돕고 나도 돕..
   
-웬 소란들이야.

아저씨와 삼촌을 외치며 달려가는 두 인간 뒤에서 22기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 물러섰다. 하늘을 뒤엎고 바람을 멈춘다는 도깨비. 과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무심한 눈빛에도 어깨가 짓눌린다. 선배님은 대체 어떻게 저런 것과 한 집에 사시는 거지.
 
-불청객이 늘었군. 또 계약서는 아닐 테고. 내 집엔 어쩐 일로.
-겁주지마 삼촌. 끝방 삼촌 데려다 준 분이야. 직장후배시래. (그래도 조심은 했어.)
-데려다 줘?
-아파요. 아픈데 우린 어떻게 손도 못 대겠고 저 아저씨는 왜 그런지도 모른다고 하고. (일한 지 얼마 안 됐나봐. 좀 어리버리해요.)
-둘 다 조용.

조잘거리던 입 둘이 단번에 닫힌다. 도깨비는 천천히 22기 앞에 섰다.

-그대가 설명하지. 그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낮은 울림이 천둥보다 크다. 22기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무릎을 애써 세웠다. 아무리 무섭기로소니, 사자의 명예와 자존심이 있지 대놓고 덜덜 떨 수는 없다. 그래. 답하자.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게.. ...근데. 반말해야 되나? 아니. 900살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존대는 해야 되나.. ..아니지. 안 그래도 쫄리는데 말까지 높이면..
 
-..잘 모르나본데 나는 인내심이 적어. 특히, 오늘은 더.

코 앞에서 파랗게 일어나는 도깨비 불에 22기는 당당하고 카리스마 있게! ...극존칭을 쓰기로 했다.

**

도깨비는 서리 낀 방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방은 가관이었다. 가구는 물론이고 창문이며 커텐까지 다 얼어붙어 있다. 전세라고 막 하는군. 도깨비는 낮게 혀를 차며 침대로 다가섰다. 봉긋 솟은 이불산이 평소와 달리 잘게 요동치고 있다. 이 속에서 혼자 견디고 있는 모양이다.

'기, 길에서 우연히 선배님을 만났는데 잘 얘기하시다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시며 괴로워하셔서 안 되겠다 싶어 이 집, 아니, 이 댁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오늘은 어느 누구에게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상하지 선아. 이자에게 무심하기가 쉽지 않으니. 도깨비는 풍등에 실어 보낸 이름을 떠올리며 심장에 꽂힌 검을 비켜 이불산을 내려다봤다.

-정신을 잃었다면 움직이지 않을 테지. 들리면 들어. 해본 적은 없지만 사자라도 통증 정도는 가능할 거야. 다만 며칠, 혹은 더 오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어떤 종류일진 나도 모르고. 견디는 쪽을 택하겠다면 더 권하진 않을게. 죽는 몸은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고갤 돌리니 털모자에 털장갑에 목도리에 점퍼도 모자라 이불까지 싸맨 은탁이 말리는 덕화를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들어온다.

-어차피 안 죽으니까 아프려면 아파라. 그게 할 소리에요?!
-..야야. 삼촌이 어디 그런 뜻으로,
-아저씬 잘나신 도깨비라 잘 모르시나 본데요. 아픈 건요, 아픈데 이런 소리나 듣는 건요!! 죽기보다 비참한 거거든요?!
-아까부터 왜 소리는 지르고. 작게 말해도 다 들
-...아픔을 안다고.

적진에서 살아 돌아온 수하들을 아군의 활에 잃었다. 전장을 누비느라 제대로 살피지도 못한 식솔들이 눈앞에서 베어졌다. 등 뒤에서 죽어가는 어린 누이에게.. 미안하단 말 한 번 건네지 못했다.

-죽음보다 더한 비참함이 뭔지 네가...

심장을 찔린 채 들판에 버려졌다. 벌레가 얼굴을 기어다니고 지렁이가 갑옷을 파고 들어들었다. 찬란한 햇살 아래 일 초, 일 초 천천히 죽어가며 원망하고 분노하고 후회하고 슬퍼하고 끝내.. 그리워하였다. 그 그리움이 눈뜬 채 죽어가는 육신보다, 모두 잃은 혈육보다 고통스러웠으나 혀를 깨물 수조차..

-..김...신!!!

번쩍 정신이 들어 손에서 너울치는 불길을 급히 거둬들인다. 하지만 방은 이미 더 가관으로 제자리에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커튼은 반쯤 탄 데다 얼음은 모두 녹아 물투성이. 도깨비는 새파랗게 질린 두 아이를 씁쓸히 외면하며 그 앞에 선 자를 마주 봤다.

-괜찮아?
-그래.. 보..여?
-아니. 다시 죽는대도 믿겠어.

맘 같아선 한 대 치고 싶지만 통증이 가라앉질 않아 당장이라도 기절할 판이다. 사자는 가슴을 짚으며 가까스로 입을 뗐다.

-...나가..
-.....
-나가..라.....
-아, 아저씨!
-삼촌!!!

덜덜 떨고 있던 은탁의 손이 무너지는 사자에게 뻗어지고, 손톱을 잘근잘근 반토막 내고 있던 덕화가 대경실색하여 은탁을 말리려던 찰나.
시계초침이 멈춘다.
도깨비는 품안에서 혼절한 사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은탁에게 들었을 것이다. 눈만 마주쳐도 도망갈 기세더니 요새는 시시콜콜 저보다 더 붙어 지내니까. ..이상한 사자였다. 기타누락자가 경계를 허물 만큼, 계산이 빠른 덕화가 진심을 보일 만큼, 그리고 도깨비를 멈출 만큼.
대체 뭐란 말이냐, 너는..
들리기라도 한 듯 사자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흰 얼굴이 온통 식은땀투성이였다. 혼절 중에도 괴로우면서 오지랖은.. 도깨비는 짧게 한숨을 쉬며 사자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번져 나간 창가로 흰나비가 날아오른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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