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


하진의 걸음걸이에 힘이 없다. 황후께 약을 받아 가는 길이었다. 태의가 직접 지은 약이라니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그날 해씨부인은 거의 죽을 뻔했다. 침상에 누운 얼굴이 어찌나 희던지.. 다행히 고비는 넘겼지만 지금도 안심할 상탠 아니다.
욱은 며칠 째 부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하필 그때 그런 말은 해서.. 하진은 해씨부인의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타이밍이 그지 같았을 뿐이지만 사람 맘이 어디 그런가. 병상에 누워서도 너는 안색이 어찌 그러냐는 부인인데. ...그리고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연화공주.
분명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었다. 헌데 며칠이 지나도 잠잠하니 ..더 불안하다. 그 성질머리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설마 언니가 아프다고 참아주는 건가. 그런 배려가 있을 인간인가. 동복오라비 한정 배려와 인내의 아이콘인가. 아님 혹시 놀랐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이쁘게 생겨... ...음? 뭔가 이상한 게 하나 끼어든 거 같은데? 하는 찰나.

-아!

징검다리에 이른 줄도 모르고 발을 헛디딘 하진은 물에 빠질 것을 직감하며 필사적으로 약 꾸러미를 끌어 안았다. 그런데 뭔가가 휙 팔을 낚아채더니 이내 땅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하진은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머리하고는.

고마움이 싹 가신다. 하진은 끄응 허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다음번엔 착지에도 좀 신경 써주십시오.
-...이건 매번 당돌한 건지 뻔뻔한 건지.

울컥하지만 일단. 하진은 부루퉁 고개만 까닥인다.

-고맙습니다.
-안 고마운 거 티 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런지. ..이래요, 그럼?

평소라면 죽이네 살리네가 열 두 번은 더 나왔을 텐데 잠깐 낯빛을 굳힐 뿐 소는 별 말이 없다. 이렇게 나오니 민망한 쪽은 하진이었다. 과정이 험하긴 했어도 결과적으론 도와준 건데. 생각의 뿌리가 이 남자랑 얽혀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뾰족했다. 이 사람 탓도 아닌데. 하진은 빠르게 반성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약을... 어?

그제야 없어진 걸 알고 황급히 두리번거리자 불쑥 약 꾸러미를 내미는 소에 하진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고마운 것도 고마운 건데, 그러니까 이 남자. 그 짧은 새 저를 구하면서 약까지 챙겼다는...

-헐 대박.
-..뭐?

...암튼 이놈의 주둥이.

-어, 엄청 빠르시다구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소는 서둘러 약을 받아들고 허리를 굽히는 하진을 위 아래로 훑어보다 자리를 떠났다. ...가 돼야 하는데 비켜서질 않는다. 하진은 약간 긴장한 채 눈치를 살폈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많이 안 좋냐.

이건 뭔 선문답도 아니고. 밑도 끝도 없이 뭐라는 거야. 멀뚱멀뚱 보기만 하자 소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진다.

-부인의 병세가 위중하냐고.

절로 눈이 커진 게, 너무 예상 밖이었다. 생일연 이후에 욱과 사이도 더 별로고 (욱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구태여 이런 인사 챙길 사람은 더군다나.. ...잠깐. 굳이?

-설마.. 황자님 저 따라 오셨어요? 그거 물어 보려고? 

헛기침을 뱉는 폼이 진짜 진짠가 보다. 다른 황자들이 문병을 다녀가거나 약재를 보낼 때도 기별 한 번 없던 사람이.. 하진이 놀라든 말든 한참 허공만 노려보던 소는 별안간 무언가를 던지듯 떠안겼다. 흰 비단 주머니였다.

-이게.. 뭡니까?
-이름은 잘 모르겠다. 난 독초밖에 아는 게 없어서.
-독초요..
-..내 호의는 의심부터 받는구나.

씁쓸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하진이 급하게 손을 내젓는다.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지몽이 골라준 거니 독은 아닐 거다.
-....진짜 그런 거 아닙니다.
-차로 끓여 아침저녁 드려. 기침에 좋다더라.
-...언니 기침이 심한 건 어찌 아셨어요?
-...백아한테. 만날 가잖아, 그 녀석.
-그럼 다 알고 계시면서 좀 전에 병세는 왜
-뭔 말이 그리 많아. 정 의심스러우면,
-아닙니다!

도로 가져가려는 걸 와락 끌어안자 피식 웃는데, 하진은 거기서 2차 충격. 이 사람 이런 식으로 웃을 줄도 알았다.

-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봅니다.

마침표 찍기도 전에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봤자 다 들켰다. 정말 서툰 사람이네. 하진은 속으로 씩 웃었다.

-그냥 주시면 될 걸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언니가 한결 나아지실 거예요.
-의심해놓고 말은.
-진짜 아니거든요. ..뭐, 좀 놀라긴 했습니다. 저도 8황자님도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언니 일도,
-은이 탄일에 네가 정윤을 모셔왔다고.
-예?
-...오지랖은.

평소라면 이 개초딩, 하고 속으로 욕을 한 사발은 했겠지만, 오늘은 유난히 잘 보인다. 이 사람. 고맙단 말을 참 특이하게도 한다.

-뭐 큰일이라구요. 그리고 그거 사실 8황자님이...

저도 모르게 사실을 전해주려던 하진의 눈앞에 순간 부인의 얼굴이 스친다. 야위고 창백한...

-..왜 말을 하다 말아.

별 거 아니라면 아니었다. 그날 욱이 정윤을 불러오게 한 건, 형제 사이에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하진은 끝내 입을 다물고 만다. 사실을 전해 둘의 사이가 좋아지면, 부인의 얼굴을 정말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할 말을 까먹었습니다.
-......
-다치고 나서 깜빡깜빡 이러네요, 제가. 하하. 이거 참. 큰일이에요. 그쵸?

말도 안 되는 횡설수설을 가만 들여다보던 소가 피식 웃는데 아까 그 피식이 아니다. 자주 보던 웃음이었다. 포기해버린 듯 삐뚤어진.

-욱이 변명을 해 줄 생각이었나 본데, 그럴 필요 없다.

말과는 달리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눈동자가 아무리 안타까운들 하진은 전할 수 없었다. 욱이 얼마나 소를 염려하는지, 얼마나 애달아하는지, 하진도 다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깊은지.. ...그래도 안 돼. 지금은 절대. 하진은 약 꾸러미를 꽉 쥔다.

-..지몽이 줬다고 해. 괜한 인사 듣기 싫으니.

인사 없이 돌아서는 등이 유난히 작게 비친다. 하진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집에 돌아가 욱에게 주머니를 건네며 지몽이 준 것이라 했다. 안에는 기침에 좋다는 약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욱이 즐기는 백차였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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