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은 아직
***해씨부인 생존
-그럼.. 가면 벗은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개국공신의 외손으로 평생 사무친 것이 갖지 못한 놀잇감이었으니 그 철없음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연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형제라고 다 같은 형제가 아니다. 신라 왕실의 후손인 백아나 저희 남매나 충주를 등에 업은 요 앞에서는 한낱 파리 목숨일 뿐이었다. 허니 정윤마저 없는 지금. 부디 가만히 계셔야 할 텐데... 연화의 불안은 욱에게 있었다. 얼마 전 소의 처소에서. 꼭 지금 같은 눈이었다. 연화는 얼른 웃음을 꾸민다.
-농이 지나치다, 은아. 내 더 좋은 것을 내줄 테니 이제 그만,
-이미 약조를 했다. 괜히 나서서 넷째의 면을 깎지 마.
-하지만 형님. 이는,
-우리 백아가 이런 때 다 나서고. 요 사이 소랑 붙어 다니더니 배짱이 제법 사내다워졌구나?
평소와 달리 이를 악무는 백아를 보며 연화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리석은 의협심을 가여워하기에는 지난날이 너무 험했던 탓이다. 심기가 틀어진 요는 천천히 일어나 백아 앞에 섰다.
-눈빛이 왜 그리 험해. 한 대 치기라도 하게?
-...허락하시면 못 할 것도 없죠.
하! 짧은 웃음에 살기가 어린다.
-오냐 그래. 할 수 있음 해 봐.
-..에, 에이. 좋은 날 왜들 이러십,
-정이 넌 가만있어.
막아보려던 정과 이제야 괜한 말 꺼냈다 싶은 은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절부절 못하는 새, 수가 몰래 뒷걸음질을 친다. 요는 백아의 손목을 잡아 올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오만한 미소였다.
-풍류나 즐기는 한가한 손으로 내 털 끝 하나라도 건들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자.
-......
뒷일을 생각지 않는다면 벌써 수십은 날렸을 주먹이다. 남의 상처를, 그것도 동복아우의 아픔을 유희거리 삼는 이 왕요를 한 번은.. 백아가 반대편 주먹을 움켜쥐려던 차였다.
-한참 아우를 찍어 누르며 부끄럽지도 않나.
내내 말이 없던 소가 백아의 손목을 빼낸다. 좌중은 더욱 숨을 죽였다.
-사람 죽이는 재주만 뛰어난 줄 알았더니 의외로 꾀는 재주도 있었어. ..하긴. 뭐는 뭐끼리 논다지.
-해서 내가 형님과 동복인 거죠. 뭐는 뭐끼리라.
드높은 자존심에 이만 치욕도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성나 있던 요는 당장에 소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짐승새끼가 감히!
-뭐하시는 겁니까! 놓으십시!
달려들려는 백아를 한 팔로 막으며 소는 유유히 말을 잇는다.
-그 짐승새끼 하나 잡자고 아우의 탄일을 망쳤으니 형님이 증명한 셈 아닌가?
-니 놈이 아주 죽여 달라고 악을 쓰는구나.
핏발 선 눈동자가 어서 다 이성을 놓아버리기 바라며. 소는 떨리는 입가에 애써 힘을 줬다. 요가 벌인 판임은 처음부터 알았다. 처음 겪는 것는 일도 아니었다. 헌데 때마다 맨몸으로 얼음물에 빠진 듯 시리니 누굴 탓할까. 동복이란 말을 세상없을 모욕으로 받아드는 형제에게 더 받을 상처가 뭐라고. ...또, 한쪽에서 잠잠한 이에겐 대체 무슨 기대가 남아서.. ..소는 급격히 피곤해졌다. 뺨을 얻어맞든 배를 걷어차이든, 멍청하게 나선 백아를 지킬 거리나 하나 얻어 그만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소는 부들부들 떠는 요의 귓가로 얼굴을 기울였다.
-어머니가 애초에 나를 미워해서 이 흉을 만든 것 같아? 그 자리에 형님이 없었을 뿐이야. 허니 내게 감사해야지. 나 아니었음 이 가면은 형님 몫이었을 테니까.
-이.. 이...!!
순식간에 목을 틀어쥔 요가 가면으로 손을 뻗는다. 상처를 드러내 짓밟을 셈이었다. 백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서기 직전. 소의 눈앞에 익숙한 등이 선다.
-뭐하는 거냐.
-백아는 형님께 사과 드려라.
-지금 뭐,
-어서!
정과 은은 맹세코 욱이 저리 소리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한 장난을 쳐도, 실수를 해도 언제나 허허 웃기만 하던 형님이.. 깨갱하여 자라목이 된 둘의 곁에서 연화는 입술을 물었다. 요의 화를 더 돋울까 끼어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수수방관하는 원은 도움이 되질 않고.. 여차하면 아버님께 가야 하나. 허면 충주원 황후는 어찌.. 속이 타들어가는 연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욱은 전에 없이 날카로운 낯이다. 잠시 당황하던 백아가 이내 울컥하여 욱을 향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형님께 대서는 것은 아우의 예가 아니야.
-허면 아우를 욕보이는 것은 형님의 도리입니까?
-은이의 청이었다.
백아는 여유를 되찾은 요와 욱을 번갈아 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중립적인 욱이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리 보니 형님도 황족은 황족입니다.
-황가를 능멸하는 그 고약한 투는 네 외가의 가르침이고?
-내가 가르쳤어요. 형님한테 배운 대로.
가라앉던 요의 눈초리가 다시 치켜지다 이내 가늘어진다. 아직 욱의 뒤에 있다라. 저놈의 성미에 말이지.. 요는 비스듬히 웃었다.
-뒤에 숨어 지껄이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 당당히 해.
소도 그럴 작정이었다. 끊어진 가면 끈은 둘째 치고 이 억센 손이 팔만 놓는다면 말이다. 소는 욱에게 소릴 낮췄다.
-놔. 너 진짜 죽고,
-소와 아우를 잘 타이를 테니 저를 봐서라도 넘어가주십시오. 좋은 날이 아닙니까.
-내가 왜 저런 것들한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데.
-부탁드립니다 형님.
심한 고초를 겪을 때도 청 한 번 없던 욱의 말은 요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에 충분했으나. 욱의 어깨 너머 적의 가득한 눈동자는 언제나 요를 격동시켰다. 밟아도 밟히지 않는 저 건방진 눈.
-욱이 네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정작 빌어야 할 놈이 저러고 있으니 쉽지가 않다.
-..백아가 아직 어려,
-백아야 철이 없다 쳐도 너까지 나선 마당에 저리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소는 내 어찌 해야 할까.
어떻게든 꺾겠단 거군.. 욱은 천천히 소를 돌아봤다.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깊은 상흔이 비친다. 앙상한 자존심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독기 어린 눈동자와 바싹 마른 입술.. ..할 수만 있다면, 아니, 해도 된다면.. 아니, 내 원대로 하여 다칠 것이 너만 아니라면...
-사과해라.
-형님!!
대신 분을 터트린 백아와 달리 소는 말이 없었다. 허나 조금씩 치켜지는 입꼬리가 더는 감추지 못할 만큼 떨리고 있다.
-사과? 무슨 사과. 아. 별 것도 아닌 흉터 까짓 보여주고 말지 괜한 분란을 만들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결국 그거냐?
-......
-그래. 좋다. 이 흉측한 낯짝이 그리 원이라면 ...들어주지.
밀치고 나서려던 소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진다. 욱이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 밤, 그때처럼. 소는 이제 저 요보다 눈앞의 욱에게 더 화가 치밀었다. 항시 이놈이 문제였다. 네가,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소란들이야.
무의 등장에 그제야 안도하는 정, 은과 달리 요는 김빠진 기색이 역력하다. 허수아비라도 아직 정윤은 정윤. 게다가 소를 유난히 애달파 하는 무이니 원하는 바를 이루긴 그른 것이다. 요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히 웃었다.
-사내놈들 여럿이 시끌벅적한 거야 다반사 아닙니까. 안 그러냐, 백아야?
차마 무의 앞에서까지 요에게 대설 순 없는 백아가 들끓는 속내를 겨우 다스리고 있는 새, 소는 욱의 손을 뿌리치고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소가 어찌 저러는 것이야.
-....그것이
-넷째가 저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입니까.
요를 노려보는 백아 옆에서 무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욱은 무의 뒤에 서 있는 해수에게 눈으로 감사를 전하고 고개를 숙였다. 손에 남은 온기가 칼날 같았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