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대숲 칼부림 뒤
**사건 시간순서 조금 다름
***뭘 쓴 건지 ;



-무슨 일이야.
 
문가에 기대 선 품새만큼 삐딱한 투에도 욱은 불쾌한 기색 없이 방으로 들어선다. 약을 가져 올 아이야 넘쳐났지만 안 그래도 드높은 4황자의 악명에 오늘은 피까지 묻히고 살기등등하니 다들 꺼리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 눈빛들이라니... 욱은 지그시 입술을 물며 약초를 짓이겼다.
소는 단정한 등을 노려봤다. 고맙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수라는 계집을 위해 칼을 빼든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고, 혹 그런 일이 없었다 한들 그의 삶에서 타인의 호의란 대개 위험한 것이었다. 그걸 두 번째로 가르쳐 준 게 바로 저 왕욱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친절한... 소는 준비를 마치고 돌아보는 욱에게 비스듬히 웃었다.

-형제'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상흔이 깊다. 치료부터,
-아님. 그 계집의 잘못을 덮어달란 건가.
-소야.
-말할 생각 없으니 수작 부릴 필요 없어. 몇 가지 확인만 하면 네가 그리 애지중지 하는 부인의 동생, 더는 볼 일 없으니까.
-..그만하고 이리,
-왜. 그래도 불안해? 이 개늑대가 너 몰래 그 계집을 물기라도 할까 봐?

안색이 변하는 꼴을 보니 정답이군. 소는 쓴물을 삼켰다. 애초에 여기 머무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길바닥에 누울걸 그랬어. 저 낯짝을 마주할 바에야 그 편이 나았을 것을. 부스러기라도 떨어질까 또 기어들어 온 꼴이라니.

-걱정 마. 나가 줄 테니까. 주인이 시종의 일까지 뺏을 만큼 불편해 하시는데 꺼져 드려야,

순식간에 다가와 다친 팔을 움켜쥐는 손에 반사적으로 신음이 샌다. 소는 간신히 눈앞의 욱을 노려봤다.

-죽고 싶어?

멱살을 쥐어 오는 손은 말과 달리 힘이 약하다. 다치고 한참을 움직였으니 안 그래도 고통이 자심할 테다. 욱은 손 안에서 요동치는 팔을 더 거세게 휘어잡았다. 

-아프냐.
-놓..지 못!
-아프긴 하냔 말이다!

겨우 억누르던 속내가 기어이 터져 나온다.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이 정윤이 아닌 소였을 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말릴 새도 없이 자객을 쫓은 소를 찾아 헤매며 피부처럼 얹고 다닌 침착함을 가장조차 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칼에 베였다. 보면서도 지키지 못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을 지키지 못했다.
뜰 안 나무가 바람에 수십 번 아우성을 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소는 고집스럽게 고통을 참고 있었다. 욱은 그만 손을 놓았다. 

-...미안하다. 마음이 번다하여...
-......
-...가자. 치료부터 하고 다시 얘기,
-부인의 동생이 아니라.. 정인이었어?

앞뒤 없는 오해에 입이 굳은 새 소는 제멋대로 확신한 듯 입술을 비틀었다.

-내게 너무 많이 들키지 마라. 네게 지켜줄 의리 따윈 없으니까.
-......

욱은 악의적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봤다. 이 사내는 진정 모르는 것이다. 어느 날부턴가 이유도 모르고 거절당한 우애를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던 것도, 애써 착각이라 치부하며 황자로서의 의무만을 다했던 지난 날, 어머니의 원대로 혼인하고 가족을 지키고 가문을 지키는 내내 수 백 수 천 신주로 향하는 마음을 얼마나 많은 밤 주저 앉혀야 했는지도. 2년 혹은 3년만에 소를 만나는 짧은 시간이 무거운 삶에 유일한 위안이라는 것도. 알아주길 바라지는 않았다. 알리려 애쓴 적도 없었다. 그저 혼자만의 마음이었다. 상처받을 만한 기대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욱은 탁자에서 약그릇을 들고 와 다시 소 앞에 섰다. 약초를 집어 상처에 가까이 대려 하니 닿기도 전에 손을 휘둘러 기어이 그릇을 엎어버린다. 빈정거릴 여유도 잃은 얼굴이었다.

-뭐하자는 거야, 너.
-..괜히 내가 왔구나. 다른 아이에게 들려 보내 마.
-이 새끼가 진짜!

칼까지 빼드는 게 놀린다고 여긴 모양이다. 피 얼룩 진 검신이 시퍼렇게 빛났다.

-형님이 이리 하라든? 불러 들여 조롱하고 멸시하라고? 해서 이 짐승을 다시 신주를 쫓아내면 네게 무얼 준다더냐. 어?!

선의를 곡해하거나 인격을 모독하거나 무심코 마음을 짓밟는 말들은 욱을 조금도 비참하게 하지 못했다. 그를 비참하게 하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진땀 배인 이마나 검붉은 피가 말라붙은 상흔, 혹은 개늑대 같은 호칭들. 특히나 소가 스스로를 그리 부를 때면 견딜 수 없이 처참해졌다. 그러니 소의 의도가 거기 있다면 그는 무심히 성공한 셈이다.

-...허면. 정윤께서 약조하신 건 뭐냐.

예상치 못한 반문에 칼날이 번뜩였으나 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다시 폭발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위험한 자리였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정윤께서도 잘 아셨을 터. 정윤의 자리를 거시더냐.
-...뭐?
-다친 널 두고도 정윤만이 애타시던 그 폐하께선. 황위라도 주겠다 하셨어?
-무슨 헛소리를!
-그만큼이다! 그 정도는 돼야 목숨을 거는 거라고. 헌데 넌!

말을 끊고 입술을 무는 욱에 소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마음을 가다듬듯 한참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모습이 마치... 소는 순간 쓰게 웃고 말았다. 이렇게 한심했다. 그 긴 세월을 애쓰고도 이렇게나...

-또 무슨 수작이야.

천천히 드러난 눈동자는 다시 평정을 찾은 듯하다. 말없이 시선만이 닿아왔다. 깊은 눈이었다.

-...오라버니.

조심스런 목소리에 소는 그제야 칼을 내린다. 욱은 연화의 손에 들린 약초그릇을 보다 몸을 돌렸다.

-별 일 아니다. 상한 지 오래 되었으니 잘 치료해줘.

그대로 나가는 듯 하던 걸음이 문가에 멈춰섰다.

-넌 황자다. ...허니 스스로를 욕보여 황가를 비천하게 만들지 마라.

소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멀리 사라지는 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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