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워 이후
멤버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샘과 바튼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고 완다는 염력을 쓰기 직전까지 갔다. 그 스콧이 일주일 동안 30분을 떠들지 못했으니 말 다한 거였다.
문제는 돌아온 방패였다. 아니. 방패를 들고 온 캡틴이었다. 그의 방문은 일주일 째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에게 다녀 왔는지는 안다. 스타크 사의 공식보도 직후였다. 만났을 것이다. 지금 티비 속에서 침대에 누워 감자칩을 아그작거리다 브이나 그리고 있는 저 토니 스타크를 말이다. 저놈의 브이.. 바튼의 중얼거림에 바튼과 아직 다 안 풀린 샘이 무의식적으로 끄덕거렸다.
요양 중이라던 토니 스타크는 화가 날 정도로 멀쩡했다. (어제는 치즈버거, 그제는 피자. 그는 먹방을 찍고 있다.) 그리고 캡틴이 토니를 두들겨 패서 뺏은 게 아니라면 방패는 그날의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다. (캡틴이 스타크를 이제 와서 팼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동안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러냔 말이다. 이건 캡틴답지 않았다. 상황이 생겼다면 설명을 했을 거고 개인적인 일이라면 양해를 구했을 거다. 이렇게 방문 걸어 잠그고 사람 피 말리는 건,
-누구한테 옮아왔나..
바튼 말대로 '누구'였다. 토니는 정작 중요한 일엔 입을 다무는 타입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단 듯한 그 태도에 은근히 짜증이 났었는데.. ..못을 박아준 셈이다. 그런 말은 역시 하는 게 아니었어.. 우울하게 소파에 파묻힌 바튼의 맞은편에서 샘은 또 다른 굴을 파는 중이었다. 혹시 로디 일인가. 그가 언론에 노출된 적은 없었는데 혹시 다리가 영.. 아니야. 스타크가 어떻게든 했을 거야. ..그래도 만에 하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편 완다는 비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프리카나 슬프게 비치던 눈동자 같은 것들.. 감정적으로 어린 그에게 (2015년 생)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완다는 당장이라도 캡틴을 읽으려는 자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티찰라가 홀에 나타난 건 모두 그렇게 손에 손을 잡고 굴을 파서 지구 내핵에 닿기 직전이었다. 티찰라는 자신을 무슨 구세주처럼 바라보는 스콧에게서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찾아온 사람이 있어.
티찰라 뒤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냇!
-하이, 클린트. 좀 쪘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스파이답게. 헤이 완다. 아저씨들 틈에서 잘 있었어?
-...나타샤. 오랜만이에요. ...그때는..
-사과하지 마. 그럴 일이 아니었잖아.
-역시 로마노프답...
샘이 그 자리에 굳었다. 나타샤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다들 오랜만이야.
바튼과 완다, 특히 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바지와 슈즈 사이가 은빛이었다. 지난 전쟁은 나타샤 말대로 누구도 사과할 일이 아니었지만, 친구의 몸에 새겨진 참혹한 흔적은 그들을 다시 굴로 떠밀기 충분했다. 로디는 담담히 주위를 둘러봤다.
-본론부터 말할게. 본국에서 어벤져스 수배가 해제됐어. 내일 공식발표가 있을 거야.
-소코비아 수정안도 중단됐고. 그대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
-지저스, 정말 잘 됐네요!
나타샤의 첨언이 끝나자마자 번쩍 손을 들어 올린 스콧은 곧 뻘쭘해져야 했다. 혼자 좋아하고 있던 것이다. 스콧은 얼른 팔을 내리고 샘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소코비아를 찬성하는 쪽이었어요?
-..제발 가만히 있어.
-하나 더. 스타크 사의 전언이 있어.
한층 더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로디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벤져스 지원은 없어. A타워는 물론 훈련소도 비우라더군. 필요하다면 정부에서 지원할 테니까 그건 나중에 상의해서 알려,
-그럼 토니는.
로디는 바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이제 어벤져스가 아니야.
다들 완벽히 할 말을 잃었다. 토니 스타크에게 냉정한 면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끝은 전쟁보다 최악이었다. 로디의 태도로 보아 사과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바튼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샘과 완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타샤는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스콧에게 복잡한 미소를 짓고 로디를 돌아봤다. 멤버들은,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나타샤 눈엔 보였다. 로디는 담담하지 않았다. 평소같지도 않았다. 그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초조하고 날카롭고 지쳐 있었다. 로디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전하. 캡틴을 만나고 싶습니다.
**
로디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내키는 대로 하는 건 역시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캡틴. 나야, 제임스.
일주일 동안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스티브는 처음 보는 몰골이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항상 단정하던 브론드도 엉망이고 조금 마른 것도 같았다.
-얘기할 게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
스티브는 그제야 비켜섰다. 로디는 방에 들어오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스티브도 마찬가지였다. 희망이나 절망이나 이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수배가 해제됐어. 반즈는 몇 가지 제약이 따르겠지만 함께 귀환해도 좋다는 명령이야.
스티브는 힘없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좋은 소식이었지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로디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칩을 가져온 걸 알면 페퍼는 난리를 치겠지만 반즈를 그대로 두는 건 역시 너무 큰 위험이었다.
-받아. 반즈의 쇠놰를 깰 수 있는 프로그램이야.
스티브를 마주 보며 로디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자식 작품이지.
스티브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프로그램이 의심스러우면 티찰라한테 확인을,
-아니야.. 그런 게... 나는...
항상 확신에 차있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로디는 끝내 얼굴을 감싸쥐는 스티브를 잠시 내려다봤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토니가 의식을 뺏긴 상태에서 캡틴의 부모를 죽였는데 캡틴이 복수하려 했다면 자신이라도 막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그램 속 토니의 기억은 스티브가 알고 있다고 말한 장면부터 온통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지금 토니는... 로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티브가 얼마나 괴롭든 이해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로디가 나이트 테이블에 칩을 올려놓고 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스티브는 고개를 들었다. 나타샤가 칩을 보고 있었다.
-...최고의 야유네.
스티브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나타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스팁..
-.....
-고개 들어, 스팁.
스티브는 그대로 굳은 듯 했다. 나타샤는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올렸다.
절망이 뒤엉킨 블루아이는 미국의 영웅이자 어벤져스의 수장인 캡틴 아메리카의 것이 아니었다. 이 눈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망설이고 번민하다 후회하길 반복하는 평범한 청년. 나타샤는 그가 누구 앞에서 청년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스티브는 나타샤를 뿌리치고 다시 머리를 움켜쥐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캡틴이 옳았다고. 소코비아도 반즈도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래. 캡틴 아메리카는 옳은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니가 죽었다. 토니가...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옳은 선택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캡틴 아메리카 같은 게 되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그때 허약하게 죽고 말았다면 그가... 토니가 이렇게 허무하게.. 왜 그가.. 내가 아니라 왜..
-갓뎀 스티브, 제발!!
스티브는 잠에서 깬 것처럼 나타샤를 올려다봤다. 나타샤는 화분을 들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저스.. 손이나 떼.
스티브는 그제야 자기 목에 있는 손을 인식했다. 손을 떼자마자 기침이 터져나왔다. 나타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는 스티브라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하지만 진정하고 오른손을 내려다보는 스티브는 언제 그랬냐는 양 무표정했다. 일련의 행동으로 보아 무의식적이었던 게 분명한데 놀랄 정도로 놀라지 않는다라.. 나타샤는 허탈하게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토니도 모자라 당신까지. 이거 유행이야?
-...놀라게 해서 미.. .....알고 있었군.
-..스파이니까.
왜 바로 알려주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타샤는 스티브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사실 이 방에 오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말해야 할 지, 하지 말아야 할 지. 모두를 위해서 어떤 게 최선일지... 여전히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비전의 말처럼 지금은 1%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할 때였다. 나타샤는 스티브를 깊게 바라봤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
-...토니를 사랑해?
블루아이가 작게 흔들렸다. 나타샤는 눈을 떼지 않았다. 스티브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래.
나타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드디어 인정했군.
-....내 맘을 알고 있었..
-스파이라니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어..
나타샤가 스티브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스팁.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분명히 저기로 날아 갔다니까?
여자는 절레 고개를 저었다. 요 근래 아이의 거짓말이 늘어나고 있었다. 무인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봤다느니, 그 비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느니, 파란 막이 어쩌고 저쩌고, 빨간 사람이 블라블라.. 몇 번을 그냥 들어줬더니 이젠 아주 시도 때도 없었다. 여자는 엄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거짓말은 안 돼요.
-거짓말 아니야!!
온 몸으로 억울함을 표출하며 빽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에 여자는 근심스러워졌다. 이 나이대 이런 일은 흔한 건가.. 혹시 아빠가 없어서 마음에 구멍이 생긴 건.. 아무래도 다음 주에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아이를 보여 봐야겠어. 실력도 성품도 훌륭한 선생님이시니까, 별 일 아니라도 아이가 알아듣게 충고해주시겠지.. 정말 좋은 분이야. 돈도 안 되는 이런 곳까지 오시고.. 게다가 탄탄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그 수줍은 미소라니.... 아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발갛게 달아올라 손부채질을 하는 여자 옆에서 아이는 부하게 입술을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리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ing
멤버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샘과 바튼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고 완다는 염력을 쓰기 직전까지 갔다. 그 스콧이 일주일 동안 30분을 떠들지 못했으니 말 다한 거였다.
문제는 돌아온 방패였다. 아니. 방패를 들고 온 캡틴이었다. 그의 방문은 일주일 째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구에게 다녀 왔는지는 안다. 스타크 사의 공식보도 직후였다. 만났을 것이다. 지금 티비 속에서 침대에 누워 감자칩을 아그작거리다 브이나 그리고 있는 저 토니 스타크를 말이다. 저놈의 브이.. 바튼의 중얼거림에 바튼과 아직 다 안 풀린 샘이 무의식적으로 끄덕거렸다.
요양 중이라던 토니 스타크는 화가 날 정도로 멀쩡했다. (어제는 치즈버거, 그제는 피자. 그는 먹방을 찍고 있다.) 그리고 캡틴이 토니를 두들겨 패서 뺏은 게 아니라면 방패는 그날의 만남이 나쁘지 않았다는 증거다. (캡틴이 스타크를 이제 와서 팼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동안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데.)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러냔 말이다. 이건 캡틴답지 않았다. 상황이 생겼다면 설명을 했을 거고 개인적인 일이라면 양해를 구했을 거다. 이렇게 방문 걸어 잠그고 사람 피 말리는 건,
-누구한테 옮아왔나..
바튼 말대로 '누구'였다. 토니는 정작 중요한 일엔 입을 다무는 타입이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단 듯한 그 태도에 은근히 짜증이 났었는데.. ..못을 박아준 셈이다. 그런 말은 역시 하는 게 아니었어.. 우울하게 소파에 파묻힌 바튼의 맞은편에서 샘은 또 다른 굴을 파는 중이었다. 혹시 로디 일인가. 그가 언론에 노출된 적은 없었는데 혹시 다리가 영.. 아니야. 스타크가 어떻게든 했을 거야. ..그래도 만에 하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편 완다는 비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프리카나 슬프게 비치던 눈동자 같은 것들.. 감정적으로 어린 그에게 (2015년 생)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완다는 당장이라도 캡틴을 읽으려는 자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티찰라가 홀에 나타난 건 모두 그렇게 손에 손을 잡고 굴을 파서 지구 내핵에 닿기 직전이었다. 티찰라는 자신을 무슨 구세주처럼 바라보는 스콧에게서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찾아온 사람이 있어.
티찰라 뒤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냇!
-하이, 클린트. 좀 쪘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스파이답게. 헤이 완다. 아저씨들 틈에서 잘 있었어?
-...나타샤. 오랜만이에요. ...그때는..
-사과하지 마. 그럴 일이 아니었잖아.
-역시 로마노프답...
샘이 그 자리에 굳었다. 나타샤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다들 오랜만이야.
바튼과 완다, 특히 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검은 바지와 슈즈 사이가 은빛이었다. 지난 전쟁은 나타샤 말대로 누구도 사과할 일이 아니었지만, 친구의 몸에 새겨진 참혹한 흔적은 그들을 다시 굴로 떠밀기 충분했다. 로디는 담담히 주위를 둘러봤다.
-본론부터 말할게. 본국에서 어벤져스 수배가 해제됐어. 내일 공식발표가 있을 거야.
-소코비아 수정안도 중단됐고. 그대로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
-지저스, 정말 잘 됐네요!
나타샤의 첨언이 끝나자마자 번쩍 손을 들어 올린 스콧은 곧 뻘쭘해져야 했다. 혼자 좋아하고 있던 것이다. 스콧은 얼른 팔을 내리고 샘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소코비아를 찬성하는 쪽이었어요?
-..제발 가만히 있어.
-하나 더. 스타크 사의 전언이 있어.
한층 더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로디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벤져스 지원은 없어. A타워는 물론 훈련소도 비우라더군. 필요하다면 정부에서 지원할 테니까 그건 나중에 상의해서 알려,
-그럼 토니는.
로디는 바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는 이제 어벤져스가 아니야.
다들 완벽히 할 말을 잃었다. 토니 스타크에게 냉정한 면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끝은 전쟁보다 최악이었다. 로디의 태도로 보아 사과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바튼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샘과 완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타샤는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스콧에게 복잡한 미소를 짓고 로디를 돌아봤다. 멤버들은,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나타샤 눈엔 보였다. 로디는 담담하지 않았다. 평소같지도 않았다. 그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초조하고 날카롭고 지쳐 있었다. 로디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전하. 캡틴을 만나고 싶습니다.
**
로디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내키는 대로 하는 건 역시 한 사람으로 충분했다.
-..캡틴. 나야, 제임스.
일주일 동안 굳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스티브는 처음 보는 몰골이었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항상 단정하던 브론드도 엉망이고 조금 마른 것도 같았다.
-얘기할 게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
스티브는 그제야 비켜섰다. 로디는 방에 들어오고도 한참 말이 없었다. 스티브도 마찬가지였다. 희망이나 절망이나 이제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수배가 해제됐어. 반즈는 몇 가지 제약이 따르겠지만 함께 귀환해도 좋다는 명령이야.
스티브는 힘없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좋은 소식이었지만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로디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칩을 가져온 걸 알면 페퍼는 난리를 치겠지만 반즈를 그대로 두는 건 역시 너무 큰 위험이었다.
-받아. 반즈의 쇠놰를 깰 수 있는 프로그램이야.
스티브를 마주 보며 로디는 쓰게 웃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자식 작품이지.
스티브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프로그램이 의심스러우면 티찰라한테 확인을,
-아니야.. 그런 게... 나는...
항상 확신에 차있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로디는 끝내 얼굴을 감싸쥐는 스티브를 잠시 내려다봤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토니가 의식을 뺏긴 상태에서 캡틴의 부모를 죽였는데 캡틴이 복수하려 했다면 자신이라도 막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그램 속 토니의 기억은 스티브가 알고 있다고 말한 장면부터 온통 붉게 물들었다. 게다가 지금 토니는... 로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티브가 얼마나 괴롭든 이해한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로디가 나이트 테이블에 칩을 올려놓고 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스티브는 고개를 들었다. 나타샤가 칩을 보고 있었다.
-...최고의 야유네.
스티브는 다시 고개를 떨궜다. 나타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스팁..
-.....
-고개 들어, 스팁.
스티브는 그대로 굳은 듯 했다. 나타샤는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올렸다.
절망이 뒤엉킨 블루아이는 미국의 영웅이자 어벤져스의 수장인 캡틴 아메리카의 것이 아니었다. 이 눈은 스티브 로저스였다. 망설이고 번민하다 후회하길 반복하는 평범한 청년. 나타샤는 그가 누구 앞에서 청년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스티브는 나타샤를 뿌리치고 다시 머리를 움켜쥐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캡틴이 옳았다고. 소코비아도 반즈도 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그래. 캡틴 아메리카는 옳은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니가 죽었다. 토니가...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옳은 선택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캡틴 아메리카 같은 게 되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그때 허약하게 죽고 말았다면 그가... 토니가 이렇게 허무하게.. 왜 그가.. 내가 아니라 왜..
-갓뎀 스티브, 제발!!
스티브는 잠에서 깬 것처럼 나타샤를 올려다봤다. 나타샤는 화분을 들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저스.. 손이나 떼.
스티브는 그제야 자기 목에 있는 손을 인식했다. 손을 떼자마자 기침이 터져나왔다. 나타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는 스티브라니.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하지만 진정하고 오른손을 내려다보는 스티브는 언제 그랬냐는 양 무표정했다. 일련의 행동으로 보아 무의식적이었던 게 분명한데 놀랄 정도로 놀라지 않는다라.. 나타샤는 허탈하게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토니도 모자라 당신까지. 이거 유행이야?
-...놀라게 해서 미.. .....알고 있었군.
-..스파이니까.
왜 바로 알려주지 않았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타샤는 스티브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사실 이 방에 오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말해야 할 지, 하지 말아야 할 지. 모두를 위해서 어떤 게 최선일지... 여전히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하지만 비전의 말처럼 지금은 1%의 가능성이라도 잡아야 할 때였다. 나타샤는 스티브를 깊게 바라봤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
-...토니를 사랑해?
블루아이가 작게 흔들렸다. 나타샤는 눈을 떼지 않았다. 스티브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그래.
나타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드디어 인정했군.
-....내 맘을 알고 있었..
-스파이라니까.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겠어..
나타샤가 스티브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스팁.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
-분명히 저기로 날아 갔다니까?
여자는 절레 고개를 저었다. 요 근래 아이의 거짓말이 늘어나고 있었다. 무인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봤다느니, 그 비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느니, 파란 막이 어쩌고 저쩌고, 빨간 사람이 블라블라.. 몇 번을 그냥 들어줬더니 이젠 아주 시도 때도 없었다. 여자는 엄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거짓말은 안 돼요.
-거짓말 아니야!!
온 몸으로 억울함을 표출하며 빽 소리를 내지르는 아이에 여자는 근심스러워졌다. 이 나이대 이런 일은 흔한 건가.. 혹시 아빠가 없어서 마음에 구멍이 생긴 건.. 아무래도 다음 주에 의사 선생님이 오시면 아이를 보여 봐야겠어. 실력도 성품도 훌륭한 선생님이시니까, 별 일 아니라도 아이가 알아듣게 충고해주시겠지.. 정말 좋은 분이야. 돈도 안 되는 이런 곳까지 오시고.. 게다가 탄탄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그 수줍은 미소라니.... 아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발갛게 달아올라 손부채질을 하는 여자 옆에서 아이는 부하게 입술을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리 비행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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