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영은 어두운 방을 올려다본다. 사실 그의 인생에서 불 켜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아였고 혼자였고 그게 슬픈 줄도 몰랐던 삶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사는 건 아니란 걸 알았을 때도 그저 내 몫이 아니겠거니 운동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인생을 건 운동은 돈 많고 백 있는 자들의 편이었고 거듭된 오심은 결국 대영을 무너뜨렸다.
그 시절 대영은 악착같이 산 만큼 악착같이 못된 짓만 골라했다. 말리고 충고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 녀석만 제외하고.
그 녀석은 끈질기게 곁을 지켰다. 때리고 쫓아내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돌아와, 형은 돌아올거야. 지금은 좀 화가 나 있을 뿐이야. 내가 형을 모르냐? 개구지게 웃곤 했다.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부모형제에 여자친구까지 있는 놈이 삼 일 걸러 한 번 허름한 방에 불을 켜고 기다릴 때면 속이 다 뒤틀어졌다. 무슨 구경을 하겠다고 붙어있는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단한 인연이었던 것도 아니다. 운동하며 만난 선후배, 언제든지 남이 될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사이였다.
그 아무 것도 아닌 놈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생계가 어려운 것도, 용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는데 치킨배달 다니다가 그렇게 됐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어쩐지 기분이 더러워 밤새 술과 담배에 절어 있다 새벽녘 돌아왔다.
아마 여기쯤이었을 것이다. 녀석의 여자친구가 서 있던 곳이. 그녀는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얼굴로 종이조가리를 내던졌다. 검정고시 학원 등록증이었다. 그 손바닥 반만한 종이가 너무나도 무거워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 등신 머저리를 죽인 건 서대영이었다.
이 과거를 털어놨을 때 시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로도 비난도 없이 그저 어깨를 안아왔다. 그제야 시진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날 밤 서대영을 구원한 것은 다시 유시진이었다.
대영은 예전 그때처럼 계단에 걸터 앉는다. 그렇게 떠난 유시진을 이해한다. 블랙작전. 아구스.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있다. 혹시. 만에 하나. 떠올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도 그 단어가 아귀처럼 번쩍인다. 그리곤 진흙같은 과거가 발목을 잡아채며 속삭이는 것이다. 이 모든 건 너의 죄라고. 너의 불행은 절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대영은 두 눈을 감으며 시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이 자리에 다시 서서 서대영, 그렇게 불러준다면. 그래만 준다면... 명치가 짓눌린다. 대영은 신음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유시진이 없는 두 달째 밤이었다.


**


명주는 가디건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모연은 오늘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에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밤바람 아직 차요.

어깨에 가디건을 걸쳐주자 땡큐,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여상스럽다. 명주는 모연 옆에 앉아 시선을 나란히 했다. 달도 없는 밤이다.

-표 선배가 내일 술 한 잔 하자던데요.
-알아. 남편 출장갔대.
-기쁨조군요, 우리.
-아니, 너만. 난 내일 당직이야.
-...표 선배랑 둘이 만나라구요?
-선배 선배 잘만 하면서 뭘 새삼.
-그래도 아직은 좀.. 뭐랄까, 시댁어른 뵙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남편이구나.
-아니거든요.
-알았어, 알았어. 너 해. 발끈하기는.
-당직 바꾸면 안 됩니까?
-너 하는 거 봐서.
-저아 늘 잘 하죠.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잠시 침묵에 빠진다. 요새 종종 있는 일이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픈 사람은 넘쳐나고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의사와 군인은 서로 사랑하고. 일상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문득 깨달아질 때가 있었다. 이건 일상적이지 않다고.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원래 이렇게 길어?

더 길 때도 많았다. 1년, 2년.. 2개월이면 짧은 편이었다. 하지만 명주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모연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어리광은.

마주 안는 손길은 말과는 달리 따뜻하다. 따뜻하다는 것. 함께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군인의 딸로 자라 군인이 된 명주에게도 버거운 사실이었다. 모연은 처음일 것이다. 파병 때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일상이었다.
명주는 모연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유시진, 그래 봬도 유능한 군인이니까 별 일 없이 곧 돌아올 거라고. 그럼 그때 같이 패주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ing  

'dukud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영시진/ 명주모연  (24) 2016.06.15
대영시진/ 명주모연  (14) 2016.06.05
스팁토니  (6) 2016.05.22
대영시진/ 명주모연  (20) 2016.05.08
대영시진/ 명주모연  (22) 2016.05.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