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영집


시진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한낮의 동네는 활기차다. 우루루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의 재잘거림과 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봄나물을 다듬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가 골목마다 가득하다. 이 평화롭고 평범한 일상의 소리들. 나무창틀에 앉은 시진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번졌다.
조국을 위해, 국민을 위해. 이런 거창한 타이틀보단 역시 이쪽이 유시진의 신념이다. 누군가의 이런 작고 사소한 매일매일이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이어지는 게 명예고 훈장이라고, 지난 6일 동안 이 자리에 앉아 시시각각 다시 느끼고 알았다.
6일. 먼지 풀풀 나는 방을 청소하고 보고하듯 시간 맞춰 날아오는 소소한 문자에 웃음 짓고 긴 계단에 앉아 퇴근하는 서대영을 기다려도 보고 TV에 나오는 빨간벨벳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 술 한 잔 나눠마시고 나란히 누워 잠들고 일어나고... 참 빨랐다. 서대영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믿을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그래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서대영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장난기가 넘쳤고 능글맞았고 질투도 잘했고 빛났고 ..외로웠다. 가족도, 친구도, 그리워 할 곳도, 돌아갈 곳도 없다고 했다. 후회뿐인 지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동네를 떠나지 않는 미련한 남자. ..잠들 수가 없었다.
혼자 남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 무언지도 안다. 그 끔찍함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순간이 빛나는 세상도 알게 됐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그 세상 속에 서대영을 홀로 남게 할까봐. 미련이 긴 그 남자가 너무 오래 추워질까봐. 다시 헤매게 될까봐. 처음으로 망설여졌다.
하지만 군인이라는 직을 역시 후회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킬 어딘가가 누군가의 서대영이 살고 있을 곳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당신도 부디 후회는 하지 않기를.
시진은 따스하게 내려 앉는 햇빛에 눈을 감았다.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나뭇잎의 파도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


윤길준 대령은 맞은편에 서 있는 시진을 무겁게 바라봤다. 윤대령은 사실 미군 측의 요청을 거부하고 싶었다. 애초 죽게 내버려뒀어야 할 놈을 살리고 놓치기까지 한 미군의 책임이었고, 게다가 상황이 너무 위험했다. 유사시 미군의 작전을 끝내 수락하지 않은 중국이 도움을 줄 리 만무했고 미국 역시 여차하면 발을 뺄 게 뻔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이탈한 고위층이 연루된 무기밀매인 이상 우리 측이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우리 군의 희생이 있다 해도 말이다.
이럴 때마다 윤대령은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그만 모두 내려놓고 물러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식같은 아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잔인한 명령을 반드시 내려야 한다. 그 무거운 멍에를 누구에게 넘긴단 말인가. 윤대령은 애써 한숨을 삼켰다.

-이준영 대위가 잠입에 성공했지만 현재 정확한 내부사정은 파악이 어렵다. 열 다섯 내지 스무명, 전원 무기소지했고 타겟은 부상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게 마지막 정보다. ..알고 있겠지만 실패해도 구출은 없다. 우리도 미국도 중국도 이 작전은 모르는 일이다.
-예. 알겠습니다.

담담한 얼굴이 평온하게 비친다. 윤대령은 잠시 침묵하다 시진 앞에 섰다. 오랜 세월 시진을 봐왔다. 유치원생이었고 국민학생이었고 중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고 육사에 들어와 결국 군인이 된 시진. 아빠랑 아저씨 같은 군인이 될 거에요. 또랑또랑하던 꼬마녀석이 눈앞을 스친다. 윤대령은 많은 말을 삼키며 언제나 그랬듯 손을 내밀었다.

-잘 다녀와라.
-대위 유시진.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시진과 눈을 맞췄다. 반은 아들이나 다름없는 녀석을 수많은 작전에 내보내며 한 번도 마음 편한 적은 없었지만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는데.. 지금은 조금 덜 뛰어났으면 싶다. 그랬다면 미군 측이 시진을 지목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 놈을 이렇게 또 다시 만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구스. 지독하게 운 좋은 놈. 


**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습니다.]
-야근입니까?
[예. 박중령님께 올릴 보고서... 근데 밖입니까.]
-집에 가는 길입니다.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오는 게 아니라 간다니까요. 휴가 마지막 날인데 하루는 집에서 자야죠. 내내 서상사 집에 있지 않았습니까.
[...아버님 댁 가십니까.]
-목소리 심하게 서운합니다?
[아닙니다.]
-에이. 서운한데 뭐.
[제가 앱니까.]
-애는 아니지. 다 컸드만.

은근한 투에 핸드폰 너머로 요란한 헛기침이 터진다. 시진은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런 농담은 좀 자제하면 안 됩니까.]
-왜. 생각나서 일이 안 돼?
[이거 성희롱이다.]
-억울하면 고소하든가.
[참 나.]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고리가 진짜 섹시하다. 하긴. 앞치마를 입어도 섹시하고 노르스름한 가로등 밑에서도 섹시하고 잡아먹을듯 내려다보는 눈도 섹시하고. 평생 그렇게 긴장해보긴 맹세코 처음이었다. 돌부처 같던 양반이 어찌나 저돌적인지. 중간쯤부터는 기억이 다 안 난다. 단단히 얽힌 몸이 몹시 뜨거웠다는 것밖에는.

[저녁은.]

할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그 체온 속에 머물고 싶었다. 당신에게 파묻혀 한 번쯤 비겁해져볼까 얼마나 흔들렸던지.

[? 뭐해.]

하지만 그 작은 방에서, 그 작은 동네에서 수많은 작은 소리들을 들으며 고작 그 작은 것들을 위해 당신의 손을 잠깐 놓을 수 있는 내가 싫지 않았어. 그러니..

[여보세요. 유시진.]
-목소리 좋다.
[..놀랐잖아.]
-목소리 내는 남자는 더 좋고.
[...뜬금없긴.]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새삼 수줍어.
[..끊어. 보고서 한참 남았어.]
-예예. 열심히 일하십쇼.
[전화할게. 조심히 가고.]
-내가 앱니까.
[애면 안 되지.]
-날이 갈수록 야해지네, 이 양반.
[도착하면 문자줘.]
-사랑한다고?
[..크허엄! 들어가십시오.]

벌게진 얼굴이 안 봐도 비디오, 라기보다.. 보고 있다. 지금. 시진은 작게 웃었다. 저만치 창문 안에서 입을 가리고 비슬비슬 웃다가 고개를 내젓고 타자를 치다가 자기 뺨을 툭툭 때리는 서대영. 누가 보면 미쳤다 할 생쇼에 시진의 미소가 차츰 가라앉는다. 그리고 천천히 목에 걸린 인식표를 빼낼 때였다.

-뭐합니까 여기서? 복귀는 내일...

어리둥절 다가서던 명주가 우뚝 멈춘다. 시진은 짧게 한숨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넌 왜 이렇게 퇴근이 늦어.
-...뭔데요. 그거.. 왜요.

알파팀에서도 유시진과 서대영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서대영은 저 안에, 시진은 여기 서서 전투복을 갖춰입고 인식표를 쥐고 있다. 그 의미를 명주는 진저리나게 잘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아빠의 인식표를 품에 안고 눈이 붓도록 울어 봤으니까.

-...블랙작전.. 입니까.
-..윤중위.
-휴가.. 그래서였어요? 그래서,
-윤명주 중위.

전에 없이 단호한 부름에 명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다.

-지금 본 건 잊는다. 알겠나.
-......
-알겠냐고 물었다.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는 끝내 답이 없다. 시진은 피식 웃으며 명주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암튼 빠져가지구. 그럼 대신 부탁 하나만,
-싫습니다.
-아직 말도 안 꺼냈거든?
-유서 그딴 거 안 전할 겁니다.

멈칫 입을 다문 시진이 이내 콩 작게 이마를 때린다. 평소 같음 선배고 나발이고 지금 나 때렸습니까?! 하며 팔부터 꺾을 명주는 가만 노려보기만 했다.

-그게 더 무서운 거 알지.
-......
-..별 건 아니고 돌아올 때까지 서상사 술친구 좀 해달라고. 하는 김에 감시도 하고. 저 양반 요새 잘생김이 지나쳐.
-......
-아 자식. 와서 술값 줄게. 나 못 믿냐?
-못 믿습니다.
-야. 진짜 너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식표를 채간 명주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맺힌다.

-담봅니다. 안 갚으면 서상사한테 열 배로 뜯어낼 거니까 각오하십시오.

명주의 앞머리를 가볍게 헤집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 시진은 잠시 뒤돌아 어느 새 업무에 집중한 옆얼굴을 눈에 새겼다. 눈, 코, 귀, 입술, 어깨.. 느껴질 듯한 감촉에 일순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깐만 있어. 돌아올테니까 거기 잠시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올거니까 아주 잠시만.
시진은 발을 뗐다. 돌아보지 않는 등으로 바람이 불었다. 긴 통곡같은 바람이.

ing


'dukud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영시진/ 명주모연  (12) 2016.05.26
스팁토니  (6) 2016.05.22
대영시진/ 명주모연  (22) 2016.05.01
대영시진/ 명주모연  (14) 2016.04.22
대영시진/ 명주모연  (12) 2016.04.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