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거리.


-언제 와. 팔 떨어지겠다.
[선배 가볍거든요. 엄살은.]
-나 손 깁스했거든?
[그러니까 비도 오는데 안에서 기다리지 왜 나와 있습니까.]
-이유를 들려줘?

시진은 핸드폰을 모연 쪽으로 뻗는다. 몸도 못 가누게 취한 모연은 현재,

-나안 여자가 있는데에~~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에~~~

열창 중이다. 술집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뭡니까. 이 불순한 가사는.]
-넌 지금 그게 할 말이냐? 한 시간째야. 가수가 꿈이었나봐.
[막 예쁘게 웃고 그러진 않습니까? 선배 술 들어가면 엄청 귀여워지는데.]
-내가 그렇게 귀여웠어?
[...방금 욕할 뻔한 거 압니까?]
-애인의 안녕은 중요하지 않나 보다?
[존경합니다, 선배님.]
-그렇지. 또.
[존경이면 됐지 뭘 더 합니까?]
-어허. 애인의 안녕.
[고등학교 1학년 때 여자친구랑 뭐했는지 서상사한테 말합니다, 나.]
-너 쫓아다니던 애가 희연이었나.
[선배 따라다니던 기집애죠. 걔는.]
-기집애가 뭐냐 기집애가.
[왜요. 따라다니던 남자얘기가 낫습니까?]
-그게 너한테 유리한 화젠지 모르겠다.
[…존경으로 합의 보죠.]

물어봤자 물리는 사이다. 시진은 피식 웃으며 가슴이 너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모연을 한 팔로 추슬렀다. 그런데. 누군가 어깨를 퍽 친다. 모연을 감싸며 간신히 균형을 잡은 시진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시발 존나 시끄럽네. 입 안 처다물리냐?

술냄새가 풀풀 나는 남자는 끽해봐야 이십대 중반. 암튼 혈기왕성과 과음은 사고를 친다. ..근데 요새 내 휴가는 시작이 왜 다 이 장르지. 시진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폰 줍고 그냥 가지.
-하! 이 병신새끼가 기집애 앞이라고 가오잡네.
-뭐?! 병신?! 이게 죽을라구!

주구장창 노래만 하던 모연이 발칵 끼어든다. 시진은 모연을 말리려 잠깐 고개를 돌렸는데, 그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강선...

철썩.
모여든 사람 몇이 헛숨을 삼킬 만큼 큰소리다. 취중에도 심히 놀라 돌처럼 굳었던 모연은 이내 사자후를 내질렀다.

-야!!!!
-이 시발년이 어디서!! 악!!
-숙녀분께는 말조심. 기본을 모르네.

시진은 터진 입가를 훔치며 쓰게 웃는다.

-팔 꺾이면 아프지.
-아, 이 시바, 안, 안 놔?!
-숙녀분께 사과 먼저.
-놓으라, 아아악!!

시진은 손에 힘을 달리하지 않았다. 다른 한 손엔 깁스를 했다. 고로 남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은.

-니가 뭔데 때려!!! 뭔데 때려!!! 사과해!!! 빌어!!!!

술기운인지 우렁차기도 한 모연의 기세에 핸드폰을 꺼내려던 사람들이 다 움찔한다.

-강선생. 이건 좀 놓고,
-맞았잖아요, 나땜에. 나땜에 피나잖아요.
-아니 이건 강선생 때문이, ..술 깼어요?
-미안하다고 해, 빨리!!
-아니네. 강선,
-아아아아악!!

두 옥타브 올라간 비명은 다른 손과 함께다. 번개처럼 나타나 일단 머리채부터 잡고 보는 이쁘장한 여자에 관객들은 아예 폰을 집어넣었다. 명주는 숨을 몰아쉬며 모연과 시진을 번갈아본다.

-뭡니까. 뭔데요.
-넌 다짜고짜. 놔, 인마.
-..얼굴 왜 그럽니까? 이 새낍니까?!
-아...놔... 놔주...
-이 새끼, 흑, 이 새끼가 막 나한테 소리지르고 던지고 때리고, 흑, 피나고, 내가 나오라고, 흐흑, 지수, 흐흑..

목적어가 많이 생략된 설명과 모연의 눈물에 명주는 핀트가 나가기 직전이다. 시진은 남자의 팔을 놓고 얼른 뒤에서 명주를 잡았다.

-사복이라 방심하나본데 너 군인인 거 티 엄청 난다.
-..놓으십시오. 죽여버리겠습니다.
-어허어엉..
-강선생 완전 귀여운 거 보이지? 취했어. 상황판단이, 야야! 나 환자, 강선생! 거긴 차면 안돼요!! 뭐해, 인마! 돌아!!

달려드려는 명주 말리랴, 주요부위에 조준사격 시도하는 모연을 피해 뱅글뱅글 돌고 있는 남자의 엉덩이를 차서 보호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시진의 앞에 구세주가 나타난다.

-뭐... 무슨 상황입니까?
-살았다. 설명은 나중에. 일단 강선생부터 말립시다.

대영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모연을 떼어놓는다. 해서 시진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안 놓습니까?! 야!! 너 이리 안 와?!
-어허엉. 나쁜 놈.. 허어어엉...

...비틀비틀 도망가는 남자의 뒤꽁무니에 대고 숫제 발버둥을 치는 명주와 대영 품에 늘어져 대성통곡 하는 모연 덕에 한참을 쉬지 못했다.


**


-비 오는데 운전 조심해라.

뜬금없이 다정한 인사에 단정한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까 머리 맞았습니까?
-민간인 보호차원이거든. 분노의 질주하다 사고내지 말라고.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명주의 눈길이 시진 뒤로 향한다. 차에 타서 동네에 내리기까지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는 서대영. 명주는 슬쩍 입고리를 올렸다.

-잘하면 오늘 계급장 떼겠습니다.
-아직도 화나 있어?
-계속 화날 걸요. 그러게 왜 여기저기서 터지고 다닙니까, 쪽팔리게.
-마, 터진 게 아니라,
-목소리 안 낮춥니까?

보조석을 돌아보는 얼굴이 다급하기도 하다. 시진은 울다 지쳐 잠든 모연을 건너보곤 빙그레 웃었다.

-강선생 무섭더라. 너 조심해야겠어.
-선배나 조심하십시오. 서상사 아까 선배 얼굴에 손자국 난 거 보고 8차선 도로에서 뛰어 내리려고 했지 말입니다.
-완전 멋있었지. 나 다시 반했잖아.
-오늘은 농담으로 못 넘길 걸요.
-..힘들겠지?
-가끔은 힘들기도 하고 그러십시오. 뭘 그렇게 만날 태연합니까?

농담 섞인 진심에 시진은 그저 웃기만 한다. 명주는 부러 한숨을 뱉으며 차키를 돌렸다.

-암튼 오늘 고마웠습니다, 여러모로.
-윤명주한테 인사도 듣고, 할 만 하네.
-건투를 빕니다.

놀리는 게 분명한 격려를 남기고 차가 떠나자 다시 침묵이 감돈다. 시진은 큼, 헛기침을 뱉으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어후. 춥다. 봄비도 꽤 차갑네요.
-......
-..화 많이 났습니까?
-......
-그래도 목소리는 들려줘요. 나 서대영 목소리 되게 듣고 싶은데.

그제야 돌아보는 얼굴을 마주 하며 시진은 작게 미소한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거 아는데 이 남자만 보면 이렇게 웃게 되니, 정말 대책없지 싶다.

-뭘 잘했다고 웃습니까.
-그러니까요. 서대영만 보면 이러네.
-왜 말렸습니까, 그 새끼 잡는 거.
-시간 아까워서요.
-..농담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아닌데.

시진은 우산을 놓고 대영의 손을 잡는다. 반사적으로 기울어지는 또 하나의 우산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너울지는 건, 아마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서대영하고 이럴 시간도 모자란데 그런 자식한테 어떻게 시간을 줍니까?
-..이런다고 안 넘어갑니다.
-넘어와줘요. 안 그래도 엄청 미안하니까.
-....

의외라는 듯 조금 커지는 눈동자는 역시 유시진이 서대영에게 나빴다는 증거다. 이 정도 말도 바라지 못하게 해왔다. 상황이 그랬고 처지가 그랬고 신념이 그랬다. 하지만 모연을 보며 시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모두 핑계는 아니었을까. 할 수 있는 말조차 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그래서 지금 이 남자를 더 외롭게 만들고 있진 않나.

-미안해요. 걱정시켜서.
-.....
-예상 외죠?
-...네.
-몇 번 시도는 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연애가 워낙 처음이라.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서대영하곤 처음이거든요. 연애.
-다른 놈들하고는 어땠는데.
-어라? 갑자기 말이 짧습니다?
-싫으면,
-그럴 리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한 발 다가선 시진은 천천히 어깨에 이마를 댔다. 훅 들이마시는 숨이 여실히 느껴져 낮게 웃음이 번진다. 나도 나지만 이 남자도 참.

-다행이네. 나만큼 서대영도 긴장해서.
-...전혀 아닌 거 같은데.
-긴장했어. 어색하고 낯도 간지럽고. 내가 웬만한 건 다 잘하는데 다른 사람한테 기대는 건 좀 못하거든. 진석선배한테 그렇게 욕을 먹고도 잘 안 고쳐지더라.

시진의 입에서 진석선배 얘기가 나오긴 처음이다. 대영은 시진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 그 욕 내가 해줘야겠네.
-계급장 떼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나봐.
-..중대.. ..그쪽이야말로.
-그쪼옥?

슬쩍 떨어진 시진의 불만스러운 시선에 대영은 작게 헛기침을 뱉었다.

-호칭이 좀..
-그래도 그렇지. 내가 표지판도 아니고 뭐야.
-그럼 뭐라고 해.
-까먹었나본데 내 이름은 유대위도 아니고 유팀장도 아니고 중대장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유시진이야.
-...유... 크흠, 유시..

질질 끌던 대영은 결국 유시진을 끝맺지 못하고 귓불만 붉혔다. 시진은 씨익 한 쪽 입고리를 올린다.

-왜 이름을 못 부른데. 그 유명한 홍길동이야?
-..지금은 잘 안 되네.
-내 이름이 좀 야하나?
-뭐, 뭐라는 겁니까?!
-계급장 짧게도 뗀다.
-..잠깐. 이거 흐름이 이상한데, 왜 내가 불리해졌습니까.
-서상사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나 보죠. 명예롭지 못하게.
-..먼저 해 보십시오.
-이상한 상상이요?
-아니, 호칭 말입니다!
-아 깜짝이야. 야밤에 소리는 지르고 그럽니까. 동네사람 다 깨겠습니다.
-말 돌리지 말고 해봅니다. 팀장님도 서상사 아닙니까.
-그럼 서대영?
-제가 나이 많습니다.
-음.. 아저씨?
-그 정도로 연상은 아닙니다.
-그럼 뭐,
-형.

말문이 막힌 유시진은 백 년이 가도 보기 힘들다. 전세역전. 대영은 시진의 등을 더 가까이 끌어 안으며 씨익 웃었다.

-형 맞지 않습니까.
-..존댓말 쓰는 형도 있습,
-놓을게. 됐지.
-....형...은 좀 안 그렇습니까?
-언니는 아니잖아.
-.....

호칭 그까이거, 라고 생각한 시진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중이다. 형 소리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아니. 형 소리가 어려운 게 아니라 코 앞에서 근사하게 웃고 있는 이 남자가 문제다. 서대영=형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자 트레이드 마크인 능청스러움도 안 나올 만큼 두근거리고 가슴이 근질근질한 게 목덜미까지 붉어진다.

-왜 이렇게 당황해. 아. 혹시 홍길동?
-..표절입니다, 그거.
-그래서. 고소라도 하려고.
-..지나치게 능글맞은데 서대영 맞습니까?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하물며 유시진 옆에서 그 긴 세월을 공으로 보냈겠어.
-말에 뼈가 많은데.
-잘 발라내고 하던 거 계속.
-...아까 내가 미안하다고 했습니까?
-형.
-다음에 할게요.
-요도 빼고.
-그거 빼면 큰일납니다. 사람이 신체가 건강해야,

허리를 바싹 끌어당겨 귓가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낮게 속삭인다.

-긴장, 진짠가 보네.
-...거짓말 안 하거든요.
-거짓말.

솜털이 곤두서는 목소리다. 시진은 저도 모르게 대영의 옷깃을 꽉 쥐었다.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이런 못된 거.
-유시진이.

잠시 전 버벅댔던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호칭이다. 시진은 순간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아까 홍길동은 어디 가고.
-긴장했었어. 니 이름, 긴장되거든.
-너무 빨리 풀리는데요, 그 긴장.
-누구 덕분이지.
-아 진짜. 나도 당황스럽네. 암튼 서대영이 문젭니다.
-유시진한테 문제거리라니 영광이네. 근데, 말은 언제까지 높일 거야.
-안 해. 안 높여.

어느 새 풀어진 긴장에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웃고 만다.

-윤명주가 봤으면 삼 백년은 놀렸겠다.
-연애초보 스티커 정말 만들어 왔을 거야.
-아... 진짜 실감나네, 이 연애.
-형 소리는 무리야?
-그거 의외로 좀 간질간질해서,
-알았어. 기다릴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간질간질해서 어렵긴 한데 서대영이 확 야해지는 건 맘에 드니까 어려워도 해낸다구. 어려운 걸 해내는 게 또 내 특기잖아.
-십 분을 못 이기네, 나는.
-늘 져주니까. ..형이.

형.
대영은 사실 이 말을 그 누구에게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한 마디가 너무 무거운 탓에 누군가 그렇게 부르려고 해도 거부했다. 그런데 다소 충동적이라 해도 시진에게는 저도 모르게 그게 됐다. 무겁지 않게, 편안하게, 놀라우리만치. ..절대 가벼워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은 이렇게 내 어깨를 다시 털어주는구나. 대영은 시진의 목덜미로 얼굴을 묻는다.

-감격할 정도면 진작 해줄걸.
-..빨개지면서.
-뭐, 어떻게든.
-유시진.
-...내 이름이 이렇게 괜찮았나.
-..유시진...

이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정말. 대영은 온몸으로 시진을 끌어안았다. 어느 새 떨어진 우산을 신경쓸 틈도 없이 가득.
그 품에 안겨, 그 어깨를 마주 안으며 시진은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 순간이 이 남자에게 상처로 남지 않기를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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