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혜성병원


명주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군복깃을 매만졌다. 오기 전 잠깐 사복으로 갈아 입을까 했지만 그건 좀 비겁한 것 같았다. 강모연과 관련된 일엔 되도록 비겁하고 싶지 않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명주는 눈앞의 문을 똑바로 쳐다봤다. 병리과 교수 표지수.

-네.
-윤명줍니다.

가타부타 말이 없는 문을 열고 청하지도 않는 자리에 앉기까지. 직선적인 시선은 여전했다. 엘레베이터에서 재회했을 때나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이나.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진 알지.
-예.
-강선생이랑 뭐하고 있어?

교육생 시절. 모연에게 반한 명주를 먼저 눈치챈 건 지수였다. 강모연한테 뭐하고 있어? 그때도 답은 지금과 같았다.

-아시는 걸로 압니다.
-예전에 한 번 말했는데. 너무 오래 돼서 기억할 진 모르겠지만.

꿋꿋하게 강해지려는 애야. 왠만하면 보태지 마. 지금도 충분히 아득바득 살고 있으니까.

-기억합니다.
-교수 됐다고 달라질 건 없어. 아니. 더 하지, 지금이. 잃을 게 늘어났으니까. 그런데도 하고 있는 거, 계속 할 생각이야?

예상했던 비난이고 명주 역시 한때나마 모연을 놓으려 했던 이유다. 하지만 죽음의 숨결이 코끝에 닿았을 때. 강모연만이 후회됐다. 더 볼 걸. 더 말할 걸.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아니, 일 분 일 초라도 더 그 사람 옆에 있을걸. 명주는 보이지 않게 두 손을 움켜 쥐며 수 백 수 천번 준비했던 말을 시작한다.

-선배의 가장 친한, 가족같은 친구시라는 거 압니다. 그래서 상관 마시라, 우리 일이다, 저 그거 못합니다. 대신 선배랑 있는 힘껏, 유치해지겠습니다.
-...뭐?
-다른 사람한테 그 환상적인 미소를 왜 3초나 보여줬냐, 잘 자라는 인사도 안 하고 어떻게 잘 수가 있냐, 잘 잤다는 문자도 없이 아침이 맞아지냐, 손을 잡아주는 강도가 어제에 비해 10이나 떨어졌다.

지수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진다.

-매일, 매시간 그럴 겁니다. 그래서 표선생님이 걱정하시는 일 같은 건 끼어들 틈도 없이, 하루하루 평범하고 유치하게, 오랫동안 사랑하겠습니다. 선생님이 허락해주실 때까지. ..이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명주는 얼마를 기다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겠,
-왜 그렇게 좋은데.
-......
-왜 강모연이냐고.

스스로 수도 없이 했던 질문이다. 명주는 잠시 가만히 미소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왜 이렇게까지 선배여야 하는지.
-......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목례를 하고 뒤돌아 짧은 거리의 문에 닿기까지. 모연의 미소가 떠올랐다. 한 줄기 빛처럼.


**


심통에서 걱정으로 바뀌어있는 톡에 답을 하려던 명주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있는 익숙한 등을 발견했다. 어째 자주 발견된다, 저 남자.

-오늘 컨셉이 청승입니까?
-이 시간에 어떻게.. 강선생님 아까 퇴근하셨는데 길 엇갈리셨습니까.
-안 엇갈리게 노력중입니다.

옆자리로 털썩 앉는 얼굴이 많이 지쳐 보인다. 대영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서상사만큼은 아닙니다. 얼굴이 그게 뭡니까? 누가 보면 선배 위독한 줄 알겠습니다.
-..진통제가 잘 안 듣는 거 같습니다.
-그럼 간호사를 불러야지 여기 이러고 있습니까.
-통증이 가라 앉으면... 보고 싶지 않은 게 보이나 봅니다.
-저 말입니까?
-..잠꼬대가 영어였습니다.

아구스.
...진석선배.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름에 명주도 잠시 입을 다문다. 시진은 그때 일주일이나 웃지 않았다.

-..애인도 아닌 사람을 너무 오매불망 합니다. 악당까지 얹어서.
-..그러게나 말입니다.
-확 깨우지 뭐 예쁜 꿈이라고 나와서까지 지켜줍니까.
-제가 알면 더 아픕니다.
-...그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는 눈을 마주하며 명주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터져서 피가 나는 상처가 덜 위험합니다. ..그 날 이후로 선배, 진석선배 이름 한 번도 말한 적 없습니다. 아구스를 만나고, 자기 손으로 죽이고도 말입니다. ..전 선배가 차라리 더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울 줄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

대영은 어두운 하늘로 고개를 든다. 그때 같은 밤이다. 유시진이 혼자 울던 밤. 그 눈을 가리고 어깨를 감싸안는 꿈을 꿨다.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지금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 말이 소용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위로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내 잘못이 아닌 불행도 있다. 혼자 견뎌야만 지날 수 있는 시간도 있는 것이다.

-처음 중대장님 만났을 땐 정말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모든 게 너무 가볍고 쉬워 보여서 뭐 저런 사람이 군인이 됐나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일 있고 일주일만에 웃었을 때. 그때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견디는 방법은 이거구나. 이렇게 견딜 수도 있는 거구나. 자책하며 엉망진창이 되지 않고도 방법이 있었구나. ...아마 그때 반했을 겁니다.
-......
-저도 중대장님이 혼자 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아프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혼자를 택하면, 존중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한테 반한 거니까.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개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각각 생김새가 다른 그만큼의 사랑이.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명주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그러신 분이 해저구만립니까.
-제 걱정은 또 제 몫이라서 말입니다.
-뭔 연애를 각개전투로. 연합작전이 서투른 거 아닙니까?
-뭐.. 아니라곤 못하겠습니다.
-하긴. 연애초보죠, 서상사.
-..초보까진 아닙니다.
-왕초본 거 다 압니다. 안전운행 하십시오. 스티커도 하나 불이고. 초보는 직진중.
-..저 놀리는 건 두 분 취미생활입니까.
-절 뭘로 보는 겁니까? 전 특기사항입니다.
-누워있는 분은 특채급입니다.
-어후. 금세 자랑질.

명주와 대영은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무장 행군같은 연애. 그래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몇 번이고 괜찮을 수 있다. 언제까지 걸을 수 있었다.


**


-단결. 대위 유시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예. 혼자 있습니다. ....예?

대영을 찾으러 나가려던 발이 우뚝 멈춘다. 핸드폰을 쥔 손에 파랗게 힘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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