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혜성병원


-진짜 공연만 보는 거라니까? 강선생 나 못 믿어?

모연은 테이블에 놓인 티켓을 힐끗 내려다본다. 무슨 클래식 연주회 블라블라.. ..아놔 여보세요. 난 뽕짝에 소주 취향이거든요? 그리고 당연히 못 믿지. 어디서 '손만 잡고 잘게'급 개드립을. 내가 너랑 거길 가느니 김은지랑 삼박 사일 무인도에 갇히겠다!!!  ...라고 말했냐면, ...아니.

-호의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 모자라 싱긋 웃기까지 했다.
모연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삶의 진실을 요새 들어 더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눈앞에 이 한석원 이사장님 덕분에. 이 인간이 다시 들이대기 시작했다. 명목은 동료의 슬픔을 나눠진다. (이 대목에서 지수는 커피를 뿜었다.) 그럼 대체 왜 슬프다고 생각하느냐. 병원에서는 모연의 애인을 시진으로 알고 있었다. 응급실에 실려왔을 때 그 난리를 피워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까 모연은 현재, 애인의 죽음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는 거다.

-..강선생 심정 모르는 건 아닌데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태연한 척 버티는 거, 보는 나는 얼마나 맘 아픈지 알아?

얼씨구. 눈가까지 벌게져선 아주 순정남 납셨다. 모연은 구겨지려는 미간을 애써 폈다. 물론 시진의 일이 모연을 뒤흔든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모연의 애인은 멀쩡히 살아 있고, 이 사태를 알면 당장 총 들고 뛰어올 만큼 건강하기도 했다. ..아, 명주 보고 싶다... 모연은 명주를 그리며 대충 내뺄 말을 찾았다. 그런데.

-...강선생. 아니, 모연아.

오늘은 아주 작정을 했는지 어느 새 다가와 손까지 덥석 잡는다. 모연은 뚝 끊기려는 인내심을 간신히 이어 붙였다.

-놓으시죠, 이거.
-나한테 와라. 나, 너 이렇게 힘든 거 더는 못 보겠다.

지딴에는 멋있자고 한 말인가 본데, 모연은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으론 한참 모자른 대출금이라든지 의사도 못 피해 갈 취업대란이라든지가 깜빡거렸지만, 이 개소리를 더 듣느니 얼마쯤 백수 되고 말겠다. 진정하려고 들이마신 숨은 아니란 얘기다. 그렇게 모연이 울분의 촌철살인을 날리려던 차였다.
밖이 요란스럽더니 (안됩니다, 안 된다니까요!) 이사장의 김비서가 누군가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온다. 그 누구는 비서를 한걸음에 떼내고 이사장과 모연 사이를 가로 막았다. 그 기세에 눌려 이사장이 뒤로 물러난 사이, 모연은 탄탄한 등에 소곤거렸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등은 똑같은 질문을 이사장에게 던졌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너..넌 또 뭐야? 여, 여기가 어디라고,
-난 서대영이고, 여기는 그쪽 사무실이고, 말 놓지 말고.

존댓말이지만 차라리 욕이 낫겠다. 모연은 사색이 된 이사장을 힐끔 보고 다시 등으로 붙었다.

-더 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만 가요. 김비서 확성기야. 내 애인할 거에요? 그거 명주 귀에 들어가면,
-앞으로 이 여자, 손톱 하나, 머리카락 한 올 건들지 마십시오. 건들면.. 씨발, 죽여버릴 테니까.

...정정한다. 욕하니까 완벽하게 무섭다. 모연은 뻐끔뻐끔 금붕어가 된 이사장에게 대충 미안합니다 호호호 하고 비상계단으로 나왔다.

-곤란하게 한 거라면 죄송합니다.

조금 전의 그 무시무시한 남자는 어디 가고 다시 모연이 아는 서대영이다. ..뭐, 얼마간 곤란해지긴 할 거다. 김비서는 짹짹거리며 말을 키울 테고 이사장은 쪽팔린 만큼 더 난리칠 거 뻔하고. 예전에도 그랬다. 시진이 대영처럼 이사장을 눌러버렸을 때... ...모연은 별안간 대영을 꽉 끌어안는다.

-뭐, 뭐하시는 겁니,
-감사요.
-이...이건 좀 놓고..
-잠깐만요. ...잠깐만이요.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대영의 팔이 천천히 내려갔다.

-고마워요.
-......
-...고맙습니다.

대영은 먼곳을 바라봤다. 창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가 없는 겨울이었다.

**

-표지수!!

그렇게 신신당부 했건만. 모연은 얼른 명주부터 돌아본다. 아니나 다를까 눈빛이 확 사나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부둥켜 안았다.
-어후야.. 너도 알잖아, 김비서 뻥튀기. 표닥이 그말만 듣고,
-소감이 어떻습니까?

명주에게 불꽃 노려봄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물론 모연, 이 아닌 맞은편의 서대영이다. 모연은 술잔을 든 채 망부석이 된 대영을 안쓰럽게 건너보다가 그 옆의 지수에게 눈을 흘겼다. 지수는 여유롭게 뻥튀기를 집으며 메롱 혀를 내민다. 저놈의 기지배.

-묻잖습니까.
-...그게 상황이,
-상황 작전 다 알겠으니까 어땠냔 말입니다. 나 지금 세 번째 묻고 있는데.
-......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되게 좋았나,
-그런 사실 없습니다. 전혀 아무 느낌도,
-내 강선배를 안아놓고 싫었다. 내 강선배가 매력이 없다.
-아.. 아닙니다. 매력적이십
-매력에 빠졌다.

그러니까 이건 니가 뭐라든 난 널 갈구겠단 거다. 패닉에 빠진 대영이 슬쩍 모연 쪽을 보자 모연은 얼른 명주의 팔에 기댔다.

-아.. 나 머리..
-안 통합니다.

역시 너무 많이 써먹었군. 모연은 삐죽이며 술잔을 들었다.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감사의 표시였어. 미국에선,
-여기가 미국입니까?

탁. 술잔 내려놓는 소리가 좀 크다.

-...내가 치사해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랑 서상사님은 연애까지 했잖아.
-푸웁!!

뻥튀기를 뿜은 지수가 대영과 명주를 번갈아 본다. 명주와 대영은 동시에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나중에 설명을.. 아니 잠깐. 근데 그 얘기가 왜 지금 나옵니까?
-넌 그래놓고 난 서상사님하고 우정의 허그 좀 했다고 잡아 먹을 듯 구는 게 웃기잖아.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그건!
-그래. 넌 사랑이고 난 불륜이지.
-표 선배 진짜 오해하겠습니다.
-그러게 착한 사람을 왜 물고 늘어져.
-누구요. 누가 착한대요. 이 남자 말입니까? 하!
-너 지금 나한테 코웃음 친 거야?
-그것도 선배 허락 받아야 됩니까?
-숨 쉬는 것도 내 허락 없인 안 하겠다며. 심장 뛰는 것도 나 없인 불가능하다며!
-꼬실 땐 뭔 말을 못합니까!
-이제 니 거다? 잡은 고기다?!
-고기치곤 너무 이쁘죠!
-자꾸 당연한 말 할래?!
-이쁜 걸 어떡합니까?!

지수는 대영의 팔을 툭 쳤다.

-저것들 지금 싸우는 거에요?
-맨날 저럽니다.
-..좀 놀려먹으려다 험한 꼴 보네요. 서상사님은 저런 걸 어떻게 매일 봐요?

대영은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이제 명주와 모연은 왜 이렇게까지 예쁘냐와 사돈남말 한다로 열을 올리고 있다. 지수의 투덜거림대로 팔불출에 닭살인데다 오늘처럼 위험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위로기도 했다.
우리는 괜찮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신의 슬픔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맘껏 아파해라...
대영은 남은 술을 들이켰다. 뒷맛이 아릿했다.

**

집에 오는 길 내내, 샤워하고 나와 봐도 여전히 퉁퉁 부어 있다. 모연은 웃음을 참으며 뒤에서 명주를 끌어안았다.

-...이래도 안 풀립니다.

벌써 반쯤 풀린 목소리로 하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모연은 따스한 등에 이마를 부볐다.

-안...크흠, 안 된다니까요.
-봐주라. 윤명주 아님 누가 날 봐줘.

한참 있다 돌아보는 눈에 빙긋, 최대한 이쁘게 웃어보이자 더는 못 버티겠는지 피식 웃고 마는 명주다.

-다신 그러지 마십시오. 아무리 서상사라도 두 번은 안 됩니다.
-네.
-또 그러면 나 진짜 화낼 겁니다?

거짓말. 윤명주가 강모연에게 진짜 화낼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연은 또 순순히 네, 한다. 명주는 모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 새끼 손 봐줘도 되죠?
-안 되거든요.
-왜요! 서상사는 했잖아요!
-니가 손 보면 그 인간 죽어.
-죽어도 쌉니다. 감히 누구한테 추파를 던져?
-대신 지수가 손 좀 봐줬지.
-어떻게요?
-표닥이 김비서한테 한석원 이혼사유 고자라고 했대.
-풉!
-내일이면 다들 거기만 힐끔거릴걸?

모연의 어깨에 기대 한참을 깔깔거리던 명주가 겨우 진정하고 눈물을 닦는다.

-아 지수선배.. 진짜 최곱니, 아!

별안간 어깨를 물리고 얼떨떨해진 눈동자에 모연이 짓궃게 웃는다.

-딴 여자 칭찬금지.
-헐. 뭡니까, 완전 귀엽게?

와락 다시 껴안는 머리 위로 달빛이 내려 앉았다. 가볍게, 그리고 깊게 키스한 두 사람은 마주 기대 하늘을 올려다본다. 유난히 밝은 밤이다.

-어후, 닭살들. 그랬겠지?
-그러고 서상사 얼굴을 확!
-서상사님 홍당무 됐겠네.
-암튼 정도를 모른다니까요, 그 인간.
-넌 알고?
-가만 보면 선배 은근히 그 인간 편입니다?
-은인이자 친구.
-난 애인이거든요.

모연은 가볍게 웃었다. 명주는 젖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하늘로 혀를 내밀었다. 하늘같은 선배라더니 꼴 좋습니다. 높은 달 사이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

대영은 긴 돌계단 끝에서 멈춰섰다.
이맘때의 동네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밤 늦도록 뛰어다니던 꼬마들도, 돗자리를 깔고 술로 더위를 이기려던 아저씨들도 추위를 피해 일찍 집으로 돌아간다. 주황색 불빛만이 길잃은 별처럼 드문드문 놓여있다. 대영은 이 풍경이 어릴 때부터 싫었다. 보고 있으면 웬지 초라한 기분이 들었고 평생 여길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예지력이었나. 대영은 쓰게 웃으며 계단에 걸터 앉는다.
여기였다. 시진은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거지같은 계단을 가볍게 바꿔 놓았다. 지날 때마다 괴롭던 곳을 생각만 하면 웃음 나는 곳으로. 정말 기적같은 사람이다.

[별 일 아닙니다. 당신하고 마주 보고 있는 한 전 다 괜찮습니다.]

대영은 숨을 깊게,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들이마신다.
괜찮아지진 않았다. 그런 날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가 구원해 준 서대영의 삶이 매일매일 지옥이면 그가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래서 웃기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살고 있다.
...하지만 숨쉬는 법을 잊고 싶은 날이 있다. 도무지, 도저히 싫은 날. 그가 없는 하루가 참아지지 않는 날. 명주와 모연의 위로조차 힘을 잃는 날. 그러면 여기 이렇게 몇 시간이고 앉아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것이다. 그에게 구원받은 날을 떠올리며, 되새기며...

[이렇게 싸웁시다, 우리. 시시하고 평범하게. 되도록 오래.]

대영은 그만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다. 눈가는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 날이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얼마가 더 지나야 너에게 갈 수 있는 걸까.

[살아 주십시오.]

나쁜 자식...

[미안합니다. 당신을 혼자 여기 남겨 둬서]

...나쁜 자식....
그리고 찬 공기에 발이 얼어붙을 쯤이었다.

-여기서 뭐합니까.

몇 번, 사실은 셀 수 없이. 대영은 목소리를 듣곤 했다. 자다가도, 사무실에서도, 특히 이곳에서. 밥 먹어야죠. 잠은 자야죠. 일 그만 좀 합니다. 타자깁니까? 아. 집에 가요. 이러고 있으면 삥 뜯는 줄 알잖아.
헛웃음을 뱉으며 다리 사이로 머릴 묻는다. 환청이라도 좋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냥 괴롭고 싶었다.

-...얼굴 좀 보여주지. 오랜만인데.

이젠 아주 구체적이기까지. 거칠게 귀를 틀어막으려던 대영이 우뚝 멈춘다. 손목에 온기가 닿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한텐 혼자 울지 말라더니...

그렇게 말하는 얼굴도 눈물범벅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꿈일까. 미친 걸까. ...뭐라도 좋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움직일 수가, 눈 한 번 깜빡일 수가 없었다. 날숨 하나로도 없어져 버릴 것 같아서 호흡조차 조심히 한참을 바라만 봤다.

-..못생겨졌네. 마른 애인 싫다니까...

볼을 쓸어내리는 손.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 눈가를 닦는 손. 그 손의 온기. 살아 있는.. 산 사람만의...

-...유시진?

엉망으로 울고 있는 얼굴이 서서히 다가온다. 젖은 입술이 닿았다. 저절로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숨, 향기.. 대영은 순간 눈앞의 어깨를 꽉 잡아 떼어낸다.

-너...
-..대위 유시진. 복귀했습니다.
-....

대영은 떨리는 손으로 시진의 얼굴을 더듬는다. 채 가시지 않은 멍자국, 터지고 찢어진 입술, 볼에 희미한 칼자국...

-그래도 잘생겼지?
-....정말 너라고..
-..미안.
-말해봐. 너 맞는 거야?
-...늦어서 정말 미안해, 형...
-...나쁜 자식..

대영은 아이처럼 소리내 울기 시작한다. 아이였을 때도 아이일 수 없던 사람.
죽음을 앞뒀을 때 이 남자만이 후회됐다. 이곳에, 이 추운 곳에 혼자 있을 서대영만이. ..그래서 살았다. 그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그래서 버틸 수 있었다. 서대영이 유시진을 살린 것이다.
들석이는 어깨를 그러안고 오열하는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점점 더 깊게 혀가 얽히며 대영이 급하게 시진을 끌어당긴다. 다신 놔줄 수 없다는 듯 파고드는 몸짓에 이제야 실감이 났다. 돌아온 것이다. 서대영에게로.
몸을 맡긴 채 시진은 눈을 감았다. 멀리서 반가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fin.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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