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신주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강씨의 아우 강원복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소를 돌려보내 달라 청하였다. 강씨의 병증이 심하다고 했다. 허나 황명은 돌이킬 수 없는 법. 황제는 대신 보름의 시간을 허하였다.
천덕전에서 돌아온 소는 해가 지도록 첨성대에 누워 있었다. 지몽이 왔다갔다 말을 붙여 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지몽은 한숨을 삼켰다. 그저 다녀오는 거래도 신주 땅 자체가 고통일 소다. 허나 저도 정윤도 도울 명분이 없었다. 아픈 어미의 부름을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인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모를..!! 하릴없이 앉아 있던 지몽이 별안간 분주하게 움직여 긴 막대기를 찾아 들었다.
-황자님. 좀 아프시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침을 꿀떡 삼키자 그제야 소의 눈이 지몽을 향한다.
-뭐하는데.
-얼마 고생은 하시겠지만, 아무래도 이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리를 상했다는데 저들인들 어쩌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고통은 짧고 신주는 깁니다. 허니
-신주? 아 그거. 근데 그게 뭐,
반쯤 올라갔던 팔이 멍하게 떨궈진다.
-그것 때문에 여직 이러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내가 4살 코흘리갠 줄 알아.
-아홉 살 때도 그러셨고 열한 살 때도, 아, 열여덟 겨울에는
-그만.
지몽은 장난을 지우고 소 옆에 앉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원복 그 자, 폐하께서 보름을 허하시니 뭐 씹은 얼굴이 되더군. 억지로 온 거야. 이제 날 함부로 건들 수도 없으니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겠지. ...원래 이맘때는 심해져. 아들이 죽은 계절이라.
죽은 자식만 기억하는 양어머니와 산아들을 내다 버린 친어머니. 누구의 죄가 더 큰 지 가늠할 수가 없다. 지몽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번에 가면 내가 죽기라도 하나?
-무슨 그런 말씀을.
-정색하는 거 보니 진짠가 본데.
-황자님!
-왜 이리 까칠해. 농담한 거 가지고.
-농이라도 입에 담지 마십시오. 말이 씨가 되는 법입니다.
-...하긴. 짐승 짐승 하도 불렸더니 진짜 짐승새끼가 됐지.
-그 짐승이라는 말 좀 안 하실 수 없습니까?
역정을 내자 도리어 피식 웃는 얼굴에 불안감이 더해진다. 지몽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를 들여다봤다.
-진짜 괜찮은 거 맞으세요?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누가 그런 기특한 소릴 했답니까.
-...있어. 속 시끄럽게 하는 녀석. ...안 봐야 되는데 자꾸 보이..
무심코 중얼거리던 소가 반짝이는 눈을 뒤늦게 알아채고 얼른 입을 다문다. 하지만 지몽은 벌써 한참 들뜬 낯이었다.
-이거이거. 우리 황자님을 흔드는 분이 다 계셨습니다.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랍니까. 말씀해보세요.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어느 집 아가씹니까?
-아니라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소문낼 사람도 아니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십... ...서, 설마 혼인한 분은 아니죠?!
-...나 원 참 별. 쉰 소리 그만하고 가.
-황자님. 그,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멈출 기세가 아니다. 소는 말리길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넓게 펼쳐진 송악의 하늘은 신주와 같은 것인데도 다르다. 신주의 밤은 더 어둡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사방 산짐승 소리가 울리던 그 밤은 특히나 더...
'괜찮다... 괜찮아...'
돌탑 앞에서 낮게, 끝없이 되풀이되던 한 마디.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아홉 살 때였다. 그날은 강씨의 병증이 유난히 심했다. 유야. 내 아들. 한시도 놓지 않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에 소름이 돋았다. 이후 겪게 될 일이란 뻔했다. 맞고 갇히고 몇날 며칠을 굶주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강씨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아들에서 괴물로 전락하는 때. 차라리 강씨가 내내 미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소는 그런 제 자신이 정말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미를 봐야지. 응? 다정하게 미쳐버린 목소리에 더 고개를 숙이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씨는 손을 질질 끌고 가 방문을 열었다. 강원복이 누군가를 막고 있었다. 지몽이었다. 소는 강씨를 뿌리치고 지몽에게 내달렸다. 덥석 품에 안기자 따뜻한 손이 등을 쓸어내렸다. 작은 손이었다. 소는 그제야 고개를 내밀었다. 지몽 옆에 저만한 아이가 서 있었다. 따뜻한 얼굴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다, 소야...
..욱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기억한다 해도 모를 것이다. 그 별 거 아닌 친절이 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후 욱과 지몽이 올 때마다 더 많이 맞고 더 오래 굶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기다렸다는 것도, 열한 살 때 욱의 소식을 듣고 맨발로 도망치던 길이 얼마나 추웠는지도, 긴 시간 답장 없는 서신을 보낸 끝에 다시 달아났다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는 것 역시...
안 되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다. 아니. 시작한 적이 없으니 끝났다는 말도 우스웠다. ...정말 우습다. 단 하나의 마음이 저를 버린 어미로 인해 버려지고, 그럼에도 그 온기를 잊지 못해 개처럼 킁킁거리며 곁을 맴도는 꼴이란. 차라리 욱이 잔인했으면 좋겠다. 그리, 그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마치 제가 어미에게 버림받은 양 처연하게...
소는 허무하게 웃었다. 지몽의 말이 맞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
지몽은 오랜만에 첨성대를 찾은 욱을 반갑게 맞았다.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어머님을 뵈러 왔다가. 많이 바쁜가.
-아닙니다. 이리 오세요.
지몽은 어지러이 널려있는 도면을 치워 자리를 내주었다.
-그새 핼쑥해지셨습니다. 황자비께선 좀 어떠십니까.
-보내준 약 덕분에 많이 편안해지셨어. 고맙네.
잠시 벙쪄 있던 지몽이 얼른 낯빛을 수습한다. 이래저래 번다하여 소의 당부를 깜빡 잊고 있었다. '혹 말을 꺼내거든 티내지 마.'
-그.. 쾌차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유차도 일품이더군. 내가 즐기는 차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 제가 원래 세심하질 않습니까. 하하하하... 이 차 좀 드시지요. 향이 아주 좋습니다.
욱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넘겼으나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할 황궁에서, 그것도 황제와 정윤의 최측근인 최지몽이 황자도 아닌 해수에게 약을 전한 건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 욱은 튀어나가려는 말을 한 번 더 붙잡았다.
-백차로군. 지몽도 이 차를 즐기나.
-사실 차보다야 술이 더 좋습니다만. 핫핫핫핫.
-집에 좋은 것이 있으니 다음에 가져오지.
-역시 황자님 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건 일전에 보낸 것과 같은 잎인가. 맛이 좀 다른데.
-차 맛은 잘 몰라서요. 많이 다릅...
아차 했으나 이미 늦었다. 지몽은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수가 또 느셨습니다. ...그러게 금방 들킬 거라 하였는데.. 송구합니다.
-정말.. 소였군..
-...까칠한 척 구셔도 속은 여전하시죠.
욱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부인의 약재를 고르고, 그 안에 백차를 넣었다 뺐다 수없이 망설였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저는 상했을 마음을 차마 다독여주지도 못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전 두 분이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나지 못한 세월이 길고 황실 살이가 험하다고는 하나 어렸을 땐 그리 사이가 좋으셨는데요. ...4황자님의 언행이 다소 도를 넘는 건 사실이나, 조금만 더 넉넉해주십시오. 이 송악에 그리 해줄 분이 황자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소가 어디 있는지 아나. 할 말이 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13황자께서 매일 들르신다기에 아시는 줄
-무엇을.
-...신주에 가셨습니다.
욱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폐하께서 그걸.. 허락하셨다고?
-..강원복이 직접 올라와 청했습니다. 강씨 부인의 병증이 심하다구요. ..폐하께서도 별 수 없으셨습니다.
-.....
-모레면 돌아오실 테니 너무 심려마세요.
-......
말없는 욱의 시선에 지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탁자 위에 둔 욱의 손등에 퍼런 힘줄이 돋아 있다.
-...별 일 없으실 겁니다..
별 일이 없을 수 있을까. 몸이 멀쩡하다 한들 그 마음은.
먼 기억 속의 소는 저와 지몽이 갈 때면 오래도록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찢을 듯 부여잡은 손가락이며 고개 숙인 뒷덜미가 한참을 말라 있어, 가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 봤는지 모른다. 점이 되도록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작은 아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알고서도 가지 못했다. 핑계야 많았다. 욱에게도 모진 세월이었고, 지켜야 할 것은 너무 많았으며... ...아니. 아니다. 한 번 발을 떼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해서 비겁하게 그 아이가 그 지독한 시간을 혼자 겪도록... 피나게 입술을 물던 욱이 자리를 박찬다. 지몽은 다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시게요.
-비켜 서.
-안 됩니다. 모르십니까? 충주원 황후님의 심사가 편치 않으세요. 괜한 오해를 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모후님을 생각하셔야죠. 공주님은, 또 황자비님은 어쩌시려구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진정,
-지몽!
-4황자님까지 위험해지십니다!
욱이 우뚝 굳어 선다. 지몽은 한숨 돌리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틀이면 되니 기다려 보세요. 예전관 다르셨어요. 가실 때도 얼마나 덤덤하셨는데요. 무예실력이야 보셔서 아실 테고.. ...괜찮으실 겁니다. 곧 오실 거예요.
털썩 자리에 앉는 욱에게 지몽은 부러 목소릴 높였다.
-그나저나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이리 우애가 깊으신 걸. 하하. 4황자님 오시면 그 좋은 술 놓고 셋이 한 잔 어떻습니까.
지몽은 대답 없는 욱의 시선을 따라가다 한숨을 삼켰다. 그는 소가 차지하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몽은 하늘로 고갤 들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불길한 핏빛이었다.
-ing
신주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강씨의 아우 강원복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소를 돌려보내 달라 청하였다. 강씨의 병증이 심하다고 했다. 허나 황명은 돌이킬 수 없는 법. 황제는 대신 보름의 시간을 허하였다.
천덕전에서 돌아온 소는 해가 지도록 첨성대에 누워 있었다. 지몽이 왔다갔다 말을 붙여 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지몽은 한숨을 삼켰다. 그저 다녀오는 거래도 신주 땅 자체가 고통일 소다. 허나 저도 정윤도 도울 명분이 없었다. 아픈 어미의 부름을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인가. 다리라도 부러지면 모를..!! 하릴없이 앉아 있던 지몽이 별안간 분주하게 움직여 긴 막대기를 찾아 들었다.
-황자님. 좀 아프시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마른침을 꿀떡 삼키자 그제야 소의 눈이 지몽을 향한다.
-뭐하는데.
-얼마 고생은 하시겠지만, 아무래도 이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리를 상했다는데 저들인들 어쩌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고통은 짧고 신주는 깁니다. 허니
-신주? 아 그거. 근데 그게 뭐,
반쯤 올라갔던 팔이 멍하게 떨궈진다.
-그것 때문에 여직 이러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내가 4살 코흘리갠 줄 알아.
-아홉 살 때도 그러셨고 열한 살 때도, 아, 열여덟 겨울에는
-그만.
지몽은 장난을 지우고 소 옆에 앉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원복 그 자, 폐하께서 보름을 허하시니 뭐 씹은 얼굴이 되더군. 억지로 온 거야. 이제 날 함부로 건들 수도 없으니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겠지. ...원래 이맘때는 심해져. 아들이 죽은 계절이라.
죽은 자식만 기억하는 양어머니와 산아들을 내다 버린 친어머니. 누구의 죄가 더 큰 지 가늠할 수가 없다. 지몽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번에 가면 내가 죽기라도 하나?
-무슨 그런 말씀을.
-정색하는 거 보니 진짠가 본데.
-황자님!
-왜 이리 까칠해. 농담한 거 가지고.
-농이라도 입에 담지 마십시오. 말이 씨가 되는 법입니다.
-...하긴. 짐승 짐승 하도 불렸더니 진짜 짐승새끼가 됐지.
-그 짐승이라는 말 좀 안 하실 수 없습니까?
역정을 내자 도리어 피식 웃는 얼굴에 불안감이 더해진다. 지몽은 미간을 찌푸리며 소를 들여다봤다.
-진짜 괜찮은 거 맞으세요?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누가 그런 기특한 소릴 했답니까.
-...있어. 속 시끄럽게 하는 녀석. ...안 봐야 되는데 자꾸 보이..
무심코 중얼거리던 소가 반짝이는 눈을 뒤늦게 알아채고 얼른 입을 다문다. 하지만 지몽은 벌써 한참 들뜬 낯이었다.
-이거이거. 우리 황자님을 흔드는 분이 다 계셨습니다.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뭐랍니까. 말씀해보세요. 어떻게 만나셨는데요. 어느 집 아가씹니까?
-아니라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소문낼 사람도 아니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십... ...서, 설마 혼인한 분은 아니죠?!
-...나 원 참 별. 쉰 소리 그만하고 가.
-황자님. 그,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멈출 기세가 아니다. 소는 말리길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넓게 펼쳐진 송악의 하늘은 신주와 같은 것인데도 다르다. 신주의 밤은 더 어둡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다. 사방 산짐승 소리가 울리던 그 밤은 특히나 더...
'괜찮다... 괜찮아...'
돌탑 앞에서 낮게, 끝없이 되풀이되던 한 마디.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아홉 살 때였다. 그날은 강씨의 병증이 유난히 심했다. 유야. 내 아들. 한시도 놓지 않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에 소름이 돋았다. 이후 겪게 될 일이란 뻔했다. 맞고 갇히고 몇날 며칠을 굶주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강씨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아들에서 괴물로 전락하는 때. 차라리 강씨가 내내 미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소는 그런 제 자신이 정말 괴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미를 봐야지. 응? 다정하게 미쳐버린 목소리에 더 고개를 숙이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씨는 손을 질질 끌고 가 방문을 열었다. 강원복이 누군가를 막고 있었다. 지몽이었다. 소는 강씨를 뿌리치고 지몽에게 내달렸다. 덥석 품에 안기자 따뜻한 손이 등을 쓸어내렸다. 작은 손이었다. 소는 그제야 고개를 내밀었다. 지몽 옆에 저만한 아이가 서 있었다. 따뜻한 얼굴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다, 소야...
..욱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기억한다 해도 모를 것이다. 그 별 거 아닌 친절이 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후 욱과 지몽이 올 때마다 더 많이 맞고 더 오래 굶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기다렸다는 것도, 열한 살 때 욱의 소식을 듣고 맨발로 도망치던 길이 얼마나 추웠는지도, 긴 시간 답장 없는 서신을 보낸 끝에 다시 달아났다 돌아오며 한참을 울었다는 것 역시...
안 되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다. 아니. 시작한 적이 없으니 끝났다는 말도 우스웠다. ...정말 우습다. 단 하나의 마음이 저를 버린 어미로 인해 버려지고, 그럼에도 그 온기를 잊지 못해 개처럼 킁킁거리며 곁을 맴도는 꼴이란. 차라리 욱이 잔인했으면 좋겠다. 그리, 그런 목소리로 같은 말을, 마치 제가 어미에게 버림받은 양 처연하게...
소는 허무하게 웃었다. 지몽의 말이 맞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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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몽은 오랜만에 첨성대를 찾은 욱을 반갑게 맞았다.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어머님을 뵈러 왔다가. 많이 바쁜가.
-아닙니다. 이리 오세요.
지몽은 어지러이 널려있는 도면을 치워 자리를 내주었다.
-그새 핼쑥해지셨습니다. 황자비께선 좀 어떠십니까.
-보내준 약 덕분에 많이 편안해지셨어. 고맙네.
잠시 벙쪄 있던 지몽이 얼른 낯빛을 수습한다. 이래저래 번다하여 소의 당부를 깜빡 잊고 있었다. '혹 말을 꺼내거든 티내지 마.'
-그.. 쾌차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유차도 일품이더군. 내가 즐기는 차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 제가 원래 세심하질 않습니까. 하하하하... 이 차 좀 드시지요. 향이 아주 좋습니다.
욱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넘겼으나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할 황궁에서, 그것도 황제와 정윤의 최측근인 최지몽이 황자도 아닌 해수에게 약을 전한 건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 욱은 튀어나가려는 말을 한 번 더 붙잡았다.
-백차로군. 지몽도 이 차를 즐기나.
-사실 차보다야 술이 더 좋습니다만. 핫핫핫핫.
-집에 좋은 것이 있으니 다음에 가져오지.
-역시 황자님 밖에 없습니다.
-근데 이건 일전에 보낸 것과 같은 잎인가. 맛이 좀 다른데.
-차 맛은 잘 몰라서요. 많이 다릅...
아차 했으나 이미 늦었다. 지몽은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수가 또 느셨습니다. ...그러게 금방 들킬 거라 하였는데.. 송구합니다.
-정말.. 소였군..
-...까칠한 척 구셔도 속은 여전하시죠.
욱은 찻잔을 내려다봤다. 부인의 약재를 고르고, 그 안에 백차를 넣었다 뺐다 수없이 망설였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저는 상했을 마음을 차마 다독여주지도 못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전 두 분이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나지 못한 세월이 길고 황실 살이가 험하다고는 하나 어렸을 땐 그리 사이가 좋으셨는데요. ...4황자님의 언행이 다소 도를 넘는 건 사실이나, 조금만 더 넉넉해주십시오. 이 송악에 그리 해줄 분이 황자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소가 어디 있는지 아나. 할 말이 있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13황자께서 매일 들르신다기에 아시는 줄
-무엇을.
-...신주에 가셨습니다.
욱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폐하께서 그걸.. 허락하셨다고?
-..강원복이 직접 올라와 청했습니다. 강씨 부인의 병증이 심하다구요. ..폐하께서도 별 수 없으셨습니다.
-.....
-모레면 돌아오실 테니 너무 심려마세요.
-......
말없는 욱의 시선에 지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탁자 위에 둔 욱의 손등에 퍼런 힘줄이 돋아 있다.
-...별 일 없으실 겁니다..
별 일이 없을 수 있을까. 몸이 멀쩡하다 한들 그 마음은.
먼 기억 속의 소는 저와 지몽이 갈 때면 오래도록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찢을 듯 부여잡은 손가락이며 고개 숙인 뒷덜미가 한참을 말라 있어, 가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 봤는지 모른다. 점이 되도록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그 작은 아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알고서도 가지 못했다. 핑계야 많았다. 욱에게도 모진 세월이었고, 지켜야 할 것은 너무 많았으며... ...아니. 아니다. 한 번 발을 떼면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해서 비겁하게 그 아이가 그 지독한 시간을 혼자 겪도록... 피나게 입술을 물던 욱이 자리를 박찬다. 지몽은 다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시게요.
-비켜 서.
-안 됩니다. 모르십니까? 충주원 황후님의 심사가 편치 않으세요. 괜한 오해를 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모후님을 생각하셔야죠. 공주님은, 또 황자비님은 어쩌시려구요.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진정,
-지몽!
-4황자님까지 위험해지십니다!
욱이 우뚝 굳어 선다. 지몽은 한숨 돌리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틀이면 되니 기다려 보세요. 예전관 다르셨어요. 가실 때도 얼마나 덤덤하셨는데요. 무예실력이야 보셔서 아실 테고.. ...괜찮으실 겁니다. 곧 오실 거예요.
털썩 자리에 앉는 욱에게 지몽은 부러 목소릴 높였다.
-그나저나 제가 괜한 걱정을 했습니다. 이리 우애가 깊으신 걸. 하하. 4황자님 오시면 그 좋은 술 놓고 셋이 한 잔 어떻습니까.
지몽은 대답 없는 욱의 시선을 따라가다 한숨을 삼켰다. 그는 소가 차지하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몽은 하늘로 고갤 들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불길한 핏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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