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콰는 해산물을 싫어한다는 설정.
*사자는 족자 아직 못 봄.
-야채죽이랑 전복...
만 원...
-아니, 소고기 야채...
팔 천 오백원...
은탁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난은 호의도 초라하게 만든다.
-....그냥 야채죽 두 개 포장
-취소해주시구요. 특전복죽 세 개요.
불쑥 내밀어지는 카드에 은탁의 얼굴이 환해진다.
-오빠!
-대박, 멋있어요, 고마워요는 생략해도 좋아.
얇은 지갑을 집어넣던 은탁이 핏,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는 아니죠. 오빠 삼촌인데.
-예정 촌수는 니가 더 가깝거든?
-네네. ..근데 왜 세 개에요? 오빠도 죽 먹으려구요?
-난 우주에서 해산물이 제일 싫은 사람이야.
-왜요?
-집안내력. 선조께서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다나 뭐라나.
-..아. 되게 아픈 얘기구나. ..그럼... 혹시 저... 주시려구...?
죽 한 그릇에 이토록 감격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조실부모에 신데렐라에 귀신보고 왕따 당하고 기타누락도 모자라 900년 먹은 도깨비 신부까지. 참 삐뚤어질 만도 한데 말이지. 덕화는 테이블에 앉아 서비스로 나온 매실차를 홀짝이며 은탁을 건너봤다.
-당장 도망갈 줄 알았더니.
-네? ...아.
도깨비 도깨비 말만 했지 사실 제대로 실감한 적은 없었다. 납치당했을 땐 무섭다기보다 고마웠고 불 끄면 나타나는 건 그냥 신기했으니까. 그런데 그 날은. 은탁은 찻잔을 꼭 쥐었다.
-..솔직히 좀.. 아니, 많이 무섭긴 했어요. 아저씨 평소에는 그냥 아저씨잖아요. 생긴 거랑 다르게 허술하기도 하고. ..근데 확실히 다른 존재더라구요. 사람하고도, 귀신하고도 다른, 그 너머의 존재. 그게 확 실감되니까 막 장난도 못 치겠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그런데 죽은 사다 주고?
-...거야 뭐..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프고 그러니까..
덕화는 작게 고갤 내저었다. 집에 있는 존재들의 증상이 '아프다'는 정의에 맞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다른 존재 실감했다더니 금세 '사람들'은. 에효..
-너도 참 세상살기 힘들겠다. 그렇게 물러 터져서 어쩌냐.
-사는 건 이미 충분히 힘들구요. 아무한테나 무르진 않구요. 그 둘은..
은탁은 잠시 머뭇거리다 피식 웃는다.
-말하다 말고 뭘 혼자 웃어.
-..그 둘. 정말 시작은 별로였거든요? 한 명은 만날 때마다 데려가겠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만나기도 전에 온갖 귀신 만나게 하고. ...근데 지금은 있죠. 가끔 가족 같아요. 아빠같고 오빠같고. 이모네 살 때는 내가 식모 같았는데 거기서는 식구 같고. ..그래선가봐요. 그런 무서운 걸 보고도 없는 지갑 터는 게. 저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플 때 걱정하면서 죽 사다주는 거. 따뜻하잖아요. 되게.
덕화는 가만히 은탁을 바라봤다. 아빠도 엄마도 없지만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넘치게 사랑 받은 덕화는 가족이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돈도 아니고 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주고 싶었다는 은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되게 강한 소녀였네, 이 소녀.
-돈은 내가 냈는데?
-누구 조카 아니랄까봐 치사하기는.
-철저한 거지.
-달아놔요. 알바해서 갚을 테니까.
-갚긴 뭘 갚아. 내 삼촌이거든?
-촌수 따진 게 누군데.
둘은 진짜 오누이처럼 투닥거리며 갓 포장된 따뜻한 죽을 들고 따뜻하게 문을 나섰..
우르르쾅쾅!!!
난데없는 천둥번개에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 본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마주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돼?
사자는 대답 대신 얼음을 퍼트렸다. 아니. 퍼트리려 했다. 하지만 얼음은 오늘도 다 얼지 못하고 엄한 소파만 차게 적실 뿐. 도깨비는 옷에 묻은 물을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 일째군.
-넌?
어깨를 으쓱인 도깨비 주위로 파란불이 피어오른다. 역시 평소보다 현저히 작은 크기다. 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하네. ..미안하게 됐다. 나 때문에.
마시던 차를 뱉을 뻔한 도깨비가 소름 돋는다는 듯 사자를 훑어본다.
-뭐야. 왜 이래. 부작용이야?
-어쨌든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니까.
-내가 누구한테 영향 받고 그럴 도깨비로 보여? 명색이 물이고 불이고 빛이고 어둠인데?
-괜히 괜찮은 척 할 거 없어. 별로잖아, 기분도.
-내 기분이? 왜?
-그만해. 아까부터 엄청 티나고 있으니까.
사자의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킨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번개까지 더해진 하늘을 어리둥절 쳐다보던 도깨비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이 사자, 정말 이상한 데서 순진하다.
-저건 나 아니거든?
-...정말?
-내 능력이 산 자와 죽은 자, 심지어 자연에까지 미칠 정도로 대단한 건 사실인데 모든 물과 바람이 내 손 안에 있진 않아. 그리고. 기분이 나쁘면 나쁘고 말지 뭐하러 괜찮은 척을 해. 너랑 내가 뭐 얼마나 배려깊은 사이라고.
-..맞는 말이네. 근데 난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질문이야, 혼잣말이야?
-안심이야. 기분은 괜찮다니.
-..너 왜 계속 친절하냐? 설마 진짜 미안한 거야?
-기억만 없지 염치는 있거든. ..고맙다. 미안하고.
치료의 부작용으로 도깨비는 불이, 저승사자는 얼음이 약해졌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데도 고맙고 미안하다니. 목숨을 빚지고도 염치와 멀어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자가 왜 저승사자가 된 거지. 나까지 쑥스럽게. 도깨비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딱히 널 위한 것도 아니었고.
-변덕이건 우연이건 도움은 도움이니까.
-아 좀. 닭살 돋는다.
-닭살.. 새로운 부작용인가.
-..드라마 그렇게 보면서 화면만 봐? 소리는 안 들어? 보는 김에 같이 좀 들어. 듣는 김에 말도 좀 배우고.
-내 말이 어디 또 이상했어?
도깨비는 혀를 차며 차를 마시다 힐끗 사자를 본다. 기억이 비운 자리를 승부욕이 차지했는지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말 끊기면 질색을 하던 자가 조용히 앉아만 있으니, 거 참 거슬리네.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아니었어. 너도 봤잖아. 누굴 위할 정신 같은 거 없었던 거.
-..아. 물바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런 거야. 기타누락자가 하루이틀 당돌했던 것도 아닌데.
-종일 기분이 안 좋았어. 은탁인 타이밍이 안 좋았고.
-옷차림이 경건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일은 900년 전에 있었지.
살아나 왕을 찾아간 날. 그의 시신 앞에 놓인 수 십의 족자 앞에서. 도깨비는 잠시 침묵하다 사자를 쳐다봤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혹시 사자끼리는 얼굴을 다 아나?
-불가능하지. 서울만 해도 몇인데.
-서울이라면?
-뭐, 그 정도는 대충. 근데 그건 왜.
-만에 하나. 사자가 됐을 만한 자가 있거든. 전생에 큰 죄라면 빠지지 않을 자라.
-누구. 천 년의 분노?
-...아니. 그 분노의 뿌리.
어린 왕을 현혹하여 나와 나의 부하와 나의 식솔과 ...나의 누이를 죽인 간신. 그도 모자라 제 손으로 세운 왕까지... 도깨비는 어두워진 눈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한 번 알아봐줄 수 있어?
-..찾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 신의 벌이 그 자에게도 공평하게 임했는지. ...그 자가 나만큼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는지.
사자는 잠시 침묵하다 소파에 기댔다.
-배가 고파.
-..넌 이 타이밍에,
-추위도 더위도 느끼고 피곤도 하지. 희노애락도 있고. 오감도 생생해. 살아있다고 착각할 만큼.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내가 혹시 환생한 건가. ..하지만 곧 알게 되지. 망자의 차를 달이고 그 차를 마시는 망자를 보고 찻잔을 닦고 거리에 나와 산 자들 사이에서. ..아. 나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구나. 인간도 귀신도 되지 못하는구나.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죄가 그토록 깊었겠구나.
-......
-...사자가 됐다면 충분히 괴로울 거야. 나 역시 그러니까.
도깨비는 할 말을 잃는다. 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도깨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름 위로였는데 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무슨 위로가 그러냐. 어디 무서워서 말 꺼내겠어?
-됐어. 너랑 내가 뭐 얼마나 조심스런 사이라고.
-나도 됐어. 부탁 취소야. 잊어. ...내 생각이 짧았다.
-아. 알겠다. 이런 걸 '닭살'이라고 하는군?
사자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감돈다. 도깨비는 왜 그것이 제 맘까지 평온케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웃음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닭살. 제대로 체험하게 해줄까?
저 반짝거리는 미소는 보통 황당한 장난으로 귀결된다, 는 그간의 경험으로 사자는 몸을 뒤로 빼며 도깨비를 노려봤다.
-싫어. 안돼. 꺼져.
-...너 덕화랑 또 무슨 얘기한 거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
-너한테 피와 살이 소용이 있냐?
-이 판국에 장난은 관둬. 넌 백수라 상관없겠지만 나에겐 하루속히 나아져 소임을 다할 책무가 있으니. 물론 넌 백수라 책무가 뭔지 모르겠
-이거다, 이거! 이게 장난축에나 끼냐? 암튼 쓸데없이 진지해서, 그리고. 하, 나 기가 막혀서. 뭔 수? 너 내가 이제까지 티를 안 내서 잘 모르나 본데 내가 900년을 한결같이 얼마나 큰 사람... ....?
원래도 닿길 꺼려하니 질색할 줄은 알았지만, 질색하며 몸서리치거나 질색하면서도 오기로 더 꼭 잡거나 질색하지만 작게 웃어버리거나, 가 예상범위였고 기왕이면 세 번째이길 바랐다. 하지만 눈 앞의 사자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있다. 도깨비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다.
-...사람 손 닿은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냐.
-......
-...아. 알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사자는 떨리는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도깨비는 슬쩍 눈치를 보며 거 참 닳는 것도 아니고, 니 책무에도 아무 영향 없어, 있으면 내가 니네 상관한테 직접 소명할 테니까..등 나름의 사과에 최선을 다했으나.
-!!!!! 왜, 왜 울어?!!
흰 얼굴이 금세 흠뻑 젖어들고 악물린 잇새로 통곡같은 울음이 쏟아진다. 도깨비는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있다 사자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질 듯 상체를 숙일 때쯤에야 얼른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 난 이렇게 싫은 건지 모르고, 그냥 너 한 번 웃으라고,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무릎을 적신다.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말하려던 도깨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알 수 없는, 스스로도 황당할 정도의 슬픔이 갑작스레 목을 메운다. 도깨비는 도드라진 목덜미에서 애써 눈을 떼 천장을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촌극의 기획자는 하나뿐이었다. ..망할. 어쩐지 부작용이 시시하다 했더니. 도깨비에게 그렇게 자비로울 분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개연성 제로, 신파, 이런 게 취향이면 그냥 아침드라마를 봐요. 왜 만날 나 갖다, 그것도 모자라 얘까지, 얘 꼴 좀 보라구.
그렇게 끝도 없는 원망을 듣기에 버거우셨는지 귀찮으셨는지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몸과 마음이 지친 두 인간이 등장한다. 도깨비는 나란히 나 놀랐소 달려와 사이에 끼어드는 둘을 보며 미리 피곤해졌다.
-왜! 또 뭔데 뭐!! 뭐 어쨌다고 고새 저승아저씨를 울려요!
-나도 되게 울고 싶은 얼굴로 안 보이니.
-왜요. 또 그거 할라구? 바람 풍, 불 화 다 태우고 날리고 그거? 해봐요, 해 봐. 밖은 이미 했드만. 한 번 겪어봐서 하나두 겁 안 나거든요? 내가 정말. 이런 도깨비 뭐 이쁘다고 이 바람 뚫고 죽을. 아저씨 거 내가 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쌀 한 톨까지 다 먹을 거니까 두고 봐요. 내가 다신 죽 사주나봐라!
입술을 떨면서도 도깨비를 팥죽도 아니고 특전복죽으로 협박하는 은탁과 한숨을 내쉬며 쭈글쭈글해진 쇼핑백을 내려놓는 덕화와 복잡한 표정으로 간간히 응수하는 도깨비 사이에서 사자는 입을 막으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 하지만.
사내의 갑옷은 피에 젖어 있었다. 높디 높은 곳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꽃같은 여인이 슬프게 미소했다. 칼날이 번뜩이고 발목이 베이고 더 높은 곳에...
...넓은 들에 소박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밤이었고 달이 밝았다. 사내는 누군가에게 작게 미소지었다.
그저 한 번 웃으셨으면 했습니다.
사자는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얼굴은 도깨비였다. 그의 전생이었다.
-어쩌면 ing
*사자는 족자 아직 못 봄.
-야채죽이랑 전복...
만 원...
-아니, 소고기 야채...
팔 천 오백원...
은탁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가난은 호의도 초라하게 만든다.
-....그냥 야채죽 두 개 포장
-취소해주시구요. 특전복죽 세 개요.
불쑥 내밀어지는 카드에 은탁의 얼굴이 환해진다.
-오빠!
-대박, 멋있어요, 고마워요는 생략해도 좋아.
얇은 지갑을 집어넣던 은탁이 핏,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는 아니죠. 오빠 삼촌인데.
-예정 촌수는 니가 더 가깝거든?
-네네. ..근데 왜 세 개에요? 오빠도 죽 먹으려구요?
-난 우주에서 해산물이 제일 싫은 사람이야.
-왜요?
-집안내력. 선조께서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다나 뭐라나.
-..아. 되게 아픈 얘기구나. ..그럼... 혹시 저... 주시려구...?
죽 한 그릇에 이토록 감격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조실부모에 신데렐라에 귀신보고 왕따 당하고 기타누락도 모자라 900년 먹은 도깨비 신부까지. 참 삐뚤어질 만도 한데 말이지. 덕화는 테이블에 앉아 서비스로 나온 매실차를 홀짝이며 은탁을 건너봤다.
-당장 도망갈 줄 알았더니.
-네? ...아.
도깨비 도깨비 말만 했지 사실 제대로 실감한 적은 없었다. 납치당했을 땐 무섭다기보다 고마웠고 불 끄면 나타나는 건 그냥 신기했으니까. 그런데 그 날은. 은탁은 찻잔을 꼭 쥐었다.
-..솔직히 좀.. 아니, 많이 무섭긴 했어요. 아저씨 평소에는 그냥 아저씨잖아요. 생긴 거랑 다르게 허술하기도 하고. ..근데 확실히 다른 존재더라구요. 사람하고도, 귀신하고도 다른, 그 너머의 존재. 그게 확 실감되니까 막 장난도 못 치겠고 눈도 잘 못 마주치겠고..
-그런데 죽은 사다 주고?
-...거야 뭐..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프고 그러니까..
덕화는 작게 고갤 내저었다. 집에 있는 존재들의 증상이 '아프다'는 정의에 맞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다른 존재 실감했다더니 금세 '사람들'은. 에효..
-너도 참 세상살기 힘들겠다. 그렇게 물러 터져서 어쩌냐.
-사는 건 이미 충분히 힘들구요. 아무한테나 무르진 않구요. 그 둘은..
은탁은 잠시 머뭇거리다 피식 웃는다.
-말하다 말고 뭘 혼자 웃어.
-..그 둘. 정말 시작은 별로였거든요? 한 명은 만날 때마다 데려가겠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만나기도 전에 온갖 귀신 만나게 하고. ...근데 지금은 있죠. 가끔 가족 같아요. 아빠같고 오빠같고. 이모네 살 때는 내가 식모 같았는데 거기서는 식구 같고. ..그래선가봐요. 그런 무서운 걸 보고도 없는 지갑 터는 게. 저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플 때 걱정하면서 죽 사다주는 거. 따뜻하잖아요. 되게.
덕화는 가만히 은탁을 바라봤다. 아빠도 엄마도 없지만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넘치게 사랑 받은 덕화는 가족이 없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돈도 아니고 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주고 싶었다는 은탁이 조금 달라 보인다. 되게 강한 소녀였네, 이 소녀.
-돈은 내가 냈는데?
-누구 조카 아니랄까봐 치사하기는.
-철저한 거지.
-달아놔요. 알바해서 갚을 테니까.
-갚긴 뭘 갚아. 내 삼촌이거든?
-촌수 따진 게 누군데.
둘은 진짜 오누이처럼 투닥거리며 갓 포장된 따뜻한 죽을 들고 따뜻하게 문을 나섰..
우르르쾅쾅!!!
난데없는 천둥번개에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 본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마주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
-돼?
사자는 대답 대신 얼음을 퍼트렸다. 아니. 퍼트리려 했다. 하지만 얼음은 오늘도 다 얼지 못하고 엄한 소파만 차게 적실 뿐. 도깨비는 옷에 묻은 물을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 일째군.
-넌?
어깨를 으쓱인 도깨비 주위로 파란불이 피어오른다. 역시 평소보다 현저히 작은 크기다. 사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하네. ..미안하게 됐다. 나 때문에.
마시던 차를 뱉을 뻔한 도깨비가 소름 돋는다는 듯 사자를 훑어본다.
-뭐야. 왜 이래. 부작용이야?
-어쨌든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니까.
-내가 누구한테 영향 받고 그럴 도깨비로 보여? 명색이 물이고 불이고 빛이고 어둠인데?
-괜히 괜찮은 척 할 거 없어. 별로잖아, 기분도.
-내 기분이? 왜?
-그만해. 아까부터 엄청 티나고 있으니까.
사자의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킨다. 요란한 천둥소리에 번개까지 더해진 하늘을 어리둥절 쳐다보던 도깨비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전부터 느낀 건데 이 사자, 정말 이상한 데서 순진하다.
-저건 나 아니거든?
-...정말?
-내 능력이 산 자와 죽은 자, 심지어 자연에까지 미칠 정도로 대단한 건 사실인데 모든 물과 바람이 내 손 안에 있진 않아. 그리고. 기분이 나쁘면 나쁘고 말지 뭐하러 괜찮은 척을 해. 너랑 내가 뭐 얼마나 배려깊은 사이라고.
-..맞는 말이네. 근데 난 왜 그렇게 생각한 거지.
-질문이야, 혼잣말이야?
-안심이야. 기분은 괜찮다니.
-..너 왜 계속 친절하냐? 설마 진짜 미안한 거야?
-기억만 없지 염치는 있거든. ..고맙다. 미안하고.
치료의 부작용으로 도깨비는 불이, 저승사자는 얼음이 약해졌다.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런데도 고맙고 미안하다니. 목숨을 빚지고도 염치와 멀어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자가 왜 저승사자가 된 거지. 나까지 쑥스럽게. 도깨비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어. 딱히 널 위한 것도 아니었고.
-변덕이건 우연이건 도움은 도움이니까.
-아 좀. 닭살 돋는다.
-닭살.. 새로운 부작용인가.
-..드라마 그렇게 보면서 화면만 봐? 소리는 안 들어? 보는 김에 같이 좀 들어. 듣는 김에 말도 좀 배우고.
-내 말이 어디 또 이상했어?
도깨비는 혀를 차며 차를 마시다 힐끗 사자를 본다. 기억이 비운 자리를 승부욕이 차지했는지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말 끊기면 질색을 하던 자가 조용히 앉아만 있으니, 거 참 거슬리네.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정말 아니었어. 너도 봤잖아. 누굴 위할 정신 같은 거 없었던 거.
-..아. 물바다. 그러고 보니 왜 그런 거야. 기타누락자가 하루이틀 당돌했던 것도 아닌데.
-종일 기분이 안 좋았어. 은탁인 타이밍이 안 좋았고.
-옷차림이 경건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
-일은 900년 전에 있었지.
살아나 왕을 찾아간 날. 그의 시신 앞에 놓인 수 십의 족자 앞에서. 도깨비는 잠시 침묵하다 사자를 쳐다봤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혹시 사자끼리는 얼굴을 다 아나?
-불가능하지. 서울만 해도 몇인데.
-서울이라면?
-뭐, 그 정도는 대충. 근데 그건 왜.
-만에 하나. 사자가 됐을 만한 자가 있거든. 전생에 큰 죄라면 빠지지 않을 자라.
-누구. 천 년의 분노?
-...아니. 그 분노의 뿌리.
어린 왕을 현혹하여 나와 나의 부하와 나의 식솔과 ...나의 누이를 죽인 간신. 그도 모자라 제 손으로 세운 왕까지... 도깨비는 어두워진 눈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한 번 알아봐줄 수 있어?
-..찾아서 뭐하게.
-그냥 궁금해서. 신의 벌이 그 자에게도 공평하게 임했는지. ...그 자가 나만큼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는지.
사자는 잠시 침묵하다 소파에 기댔다.
-배가 고파.
-..넌 이 타이밍에,
-추위도 더위도 느끼고 피곤도 하지. 희노애락도 있고. 오감도 생생해. 살아있다고 착각할 만큼.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내가 혹시 환생한 건가. ..하지만 곧 알게 되지. 망자의 차를 달이고 그 차를 마시는 망자를 보고 찻잔을 닦고 거리에 나와 산 자들 사이에서. ..아. 나는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구나. 인간도 귀신도 되지 못하는구나.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죄가 그토록 깊었겠구나.
-......
-...사자가 됐다면 충분히 괴로울 거야. 나 역시 그러니까.
도깨비는 할 말을 잃는다. 사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도깨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름 위로였는데 니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무슨 위로가 그러냐. 어디 무서워서 말 꺼내겠어?
-됐어. 너랑 내가 뭐 얼마나 조심스런 사이라고.
-나도 됐어. 부탁 취소야. 잊어. ...내 생각이 짧았다.
-아. 알겠다. 이런 걸 '닭살'이라고 하는군?
사자의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감돈다. 도깨비는 왜 그것이 제 맘까지 평온케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 웃음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닭살. 제대로 체험하게 해줄까?
저 반짝거리는 미소는 보통 황당한 장난으로 귀결된다, 는 그간의 경험으로 사자는 몸을 뒤로 빼며 도깨비를 노려봤다.
-싫어. 안돼. 꺼져.
-...너 덕화랑 또 무슨 얘기한 거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
-너한테 피와 살이 소용이 있냐?
-이 판국에 장난은 관둬. 넌 백수라 상관없겠지만 나에겐 하루속히 나아져 소임을 다할 책무가 있으니. 물론 넌 백수라 책무가 뭔지 모르겠
-이거다, 이거! 이게 장난축에나 끼냐? 암튼 쓸데없이 진지해서, 그리고. 하, 나 기가 막혀서. 뭔 수? 너 내가 이제까지 티를 안 내서 잘 모르나 본데 내가 900년을 한결같이 얼마나 큰 사람... ....?
원래도 닿길 꺼려하니 질색할 줄은 알았지만, 질색하며 몸서리치거나 질색하면서도 오기로 더 꼭 잡거나 질색하지만 작게 웃어버리거나, 가 예상범위였고 기왕이면 세 번째이길 바랐다. 하지만 눈 앞의 사자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고 있다. 도깨비는 잡은 손을 슬며시 놓았다.
-...사람 손 닿은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까지 정색을 하냐.
-......
-...아. 알았어. 미안하다, 미안해.
사자는 떨리는 손으로 소파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도깨비는 슬쩍 눈치를 보며 거 참 닳는 것도 아니고, 니 책무에도 아무 영향 없어, 있으면 내가 니네 상관한테 직접 소명할 테니까..등 나름의 사과에 최선을 다했으나.
-!!!!! 왜, 왜 울어?!!
흰 얼굴이 금세 흠뻑 젖어들고 악물린 잇새로 통곡같은 울음이 쏟아진다. 도깨비는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있다 사자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질 듯 상체를 숙일 때쯤에야 얼른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아? 난 이렇게 싫은 건지 모르고, 그냥 너 한 번 웃으라고,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무릎을 적신다.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말하려던 도깨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알 수 없는, 스스로도 황당할 정도의 슬픔이 갑작스레 목을 메운다. 도깨비는 도드라진 목덜미에서 애써 눈을 떼 천장을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촌극의 기획자는 하나뿐이었다. ..망할. 어쩐지 부작용이 시시하다 했더니. 도깨비에게 그렇게 자비로울 분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개연성 제로, 신파, 이런 게 취향이면 그냥 아침드라마를 봐요. 왜 만날 나 갖다, 그것도 모자라 얘까지, 얘 꼴 좀 보라구.
그렇게 끝도 없는 원망을 듣기에 버거우셨는지 귀찮으셨는지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몸과 마음이 지친 두 인간이 등장한다. 도깨비는 나란히 나 놀랐소 달려와 사이에 끼어드는 둘을 보며 미리 피곤해졌다.
-왜! 또 뭔데 뭐!! 뭐 어쨌다고 고새 저승아저씨를 울려요!
-나도 되게 울고 싶은 얼굴로 안 보이니.
-왜요. 또 그거 할라구? 바람 풍, 불 화 다 태우고 날리고 그거? 해봐요, 해 봐. 밖은 이미 했드만. 한 번 겪어봐서 하나두 겁 안 나거든요? 내가 정말. 이런 도깨비 뭐 이쁘다고 이 바람 뚫고 죽을. 아저씨 거 내가 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쌀 한 톨까지 다 먹을 거니까 두고 봐요. 내가 다신 죽 사주나봐라!
입술을 떨면서도 도깨비를 팥죽도 아니고 특전복죽으로 협박하는 은탁과 한숨을 내쉬며 쭈글쭈글해진 쇼핑백을 내려놓는 덕화와 복잡한 표정으로 간간히 응수하는 도깨비 사이에서 사자는 입을 막으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 하지만.
사내의 갑옷은 피에 젖어 있었다. 높디 높은 곳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꽃같은 여인이 슬프게 미소했다. 칼날이 번뜩이고 발목이 베이고 더 높은 곳에...
...넓은 들에 소박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밤이었고 달이 밝았다. 사내는 누군가에게 작게 미소지었다.
그저 한 번 웃으셨으면 했습니다.
사자는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사내의 얼굴은 도깨비였다. 그의 전생이었다.
-어쩌면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