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고 지고 또 피듯이
for. 솨님
1.
이상한 남자였다. vip로 들어온 양반이 특실이고 나발이고 심심해 뒤지겄다면서 6인실로 옮기질 않나-다른 환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얼마 못 갔다- 그렇게 무료하다면서 부하직원들은 발도 못 들이게 내치고, 치료도 제대로 안 받는 주제에 퇴원도 안 하고. 제일 이상한 건 나를 주치의로 지목했다는 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정교수 임용에서 백날 미끄러지는 만년 부교수로, vip 지명률 최하위 되시겠다. 오해는 마라. 암 전문의로서의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다만 여타의 조직들처럼 병원도, 그것도 대학병원이라면 더더욱 지랄 같을 뿐이다. 한 마디로 백도 줄도 없다. 아부 못 하는 성격 탓일 수도 있고.
어쨌든 사정이 이러하니 남자가 나를 지목했을 때 제일 놀란 건 vip광 지교수도, 갑자기 나긋나긋해진 원장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던 부원장도 아닌 바로 나였다. 남자와 나는 당연 일면식도 없었다. 하다못해 술집도 동네 포차나 다니는 내가 회장씩이나 되는 남자를 어디서 만났겠는가. 티비에서나 몇 번 봤지. 골드문 회장 정청.
처음에는 당황했고 당황이 지나자 기쁘기는커녕 좆 됐다 싶었다. vip도 vip나름이지 골드문은 깡패소굴 아닌가. 주사만 잘못 놔도 사시미 날아들 판에 게다가 정청은 말기 암이었다. 6개월 시한부. 그거 진단한 의사가 팔이 부러졌다나 다리가 빠개졌다나. 진단의가 그 정도면 주치의는 순장 확정이다. 우리 이 선생이 알아서 잘 하겠지 속 편하게 허허거리는 원장 면상에 살려주세요, 이 개새끼야! 할 뻔 했다. 참은 건 내가 아직 살아있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0%가 아닌 이상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게 이렇게 더럽고 치사하다.
처음 정청을 대면한 날. 떡대들이 즐비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병실 앞을 지키고 선 이는 고작 하나였는데 그마저도 떡대는 아니었다. 모르고 봤으면 잘 생긴 회사원이네 했을 만큼 호리호리하고 멀쑥하고 멀쩡한 남자였다. 아니. 후자는 빼자. 사람 얼굴 보자마자 돌덩이처럼 굳어서 허예지다 벌게지다 급기야 울먹거리는 게 정신과 콜 할 뻔했다.
"주치읩니다만.."
남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나치게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여러모로 떨떠름했지만 안 들어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발을 뗐다.
그땐 몰랐다.
그 한 걸음이 내 인생에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될지.
2.
나는 이성적인 편이다.
"아, 진짜 쫌!!"
정정한다. 이성적인 편'이었다.' 이 인간이 내 앞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누군들 버티랴. 보라. 이 망할 인간의 실체를.
"아따. 그라고 노려 보니까 더 이쁘고마?"
이 정도 능글거리는 거야 뭐 싶나? 그래. 나도 나이 마흔 넘어 이딴 빌어먹을 농담에 흔들리고 그러는 사람 아니다. 문제는, 병원장에 이사장까지 굽실대는 골드문 회장님의 고귀하신 손모가지가 지금 내 엉덩이를 문질대고 있다는 거다. 시발!
분명 첫 만남은 이렇지 않았다. 애써 긴장을 감추며 '이정잽니다.' 인사를 건네자 번히 바라보다 쓱 짓는 미소가 퍽 다정하기까지 해서 소문은 소문일 뿐 오해하지 말자 순간 반성까지 했다. 얼마는 정말 그랬다. 수틀리면 귀 물어뜯고 사시미로 고기 썰어먹고 사람 죽이기가 취미라는 무시무시한 정청은 병실 옮기기에 실패하고도 꾸준히 다른 병실을 드나들며 아주머니들의 귀염둥이로 등극했고, 명품백이라도 돌렸나 까마득한 간호사들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거머쥐었으며, 특실에 인턴 해우소를 개설해 인턴들의 형님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다. 한 달 새 골드문 깡패회장에 대한 평은 좋은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 좋은 사람은 니미 시발.
처음에는 실수겠거니 했고 두 번째는 아파서 그런 가보다 넘어갔다. 세 번째부터는 좀 빡쳤지만 막상 뭐라고 하자니 애매해서 참았다. 말만한 사내놈이 엉덩이 좀 만져졌다고 정색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게다가 암환자한테. 그런데 가만있으니 가마니로 보이나 정도가 점점 심해지는 거다. 슬쩍이 끈적으로, 끈적이 주물주물로, 주물주물이 쪼물딱쪼물딱으로. 진짜 근 한 달을 참다가 정색하고 말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그러자 화들짝 손을 떼며 아니, 그게 아니고요오.. 벌건 얼굴이 더 벌게져 어쩔 줄 몰라 했으면 내가 안 이런다. '흐응. 불감은 아니고마.' 요새 애들 말로 대박이셨다.
이후 정청은 더 노골적으로 들이대기 시작했는데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낯 두꺼운 인간은 듣도 보도 못했다. 열 발자국 떨어져 눈도 안 맞추고 팩 나와 버리자 아예 병원 복도에 터 잡고 앉아 이 선생 밥은 먹었는가? 이 선생 은제 홍어 묵으러 가야 쓸것인디? 아따 오늘도 이쁘네, 뒤태가 기이냥 죽이는 고마 기타 등등. 이젠 일반병실 환자들도 어디 아파요 하는 대신 차 한 잔 마셔주지 뭘 그렇게 튕겨요? 하고, 스탭회의도 이 교수, 아직도 회장님하고 식사 안 했나? 로 마무리 되고, 간호사들 퇴근 인사는 내일 뵙겠습니다가 아닌 내일은 받아 주세요로 변하고.
결국 술 진탕 마시고 정청을 찾아갔다. 어버버 막아서는 멀쑥하지만 멀쩡하진 않은 남자를 대차게 밀치고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니가 죽든 내가 죽든 단판을 지을 참이었다. 혹자는 뭐 그런 일로 죽어가는 사람한테, 그것도 의사가 죽네 마네 하냐 하겠지만, 정청의 수작은 나에게 곤란한 정도의 일이 아니다.
나는 대학병원 만년 부교수인 동시에 이성적인, 게이였으므로.
"옴마. 이게 누구여? 우리 이 선생 아니시,"
"주치의 바꿔 주십시오."
"아이고오. 우리 선생님이 진짜 삐쳐 부렀나 보"
"바꾸라고. 이 개새끼야!"
...'이성적'은 이제 빼도 좋다.
3.
침묵은 길었다. 더 불행한 건 그 사이에 술기운이 날아갔다는 거다. 미친놈. 어쩌자고. 정청이 팔랑팔랑 굴어도 본질은 조폭이다. 저 손에 사람피를 수 없이 묻혔을. 간덩이가 부어도 유분수지 개새끼라니... 어머니 말씀이 딱 맞다. 성질머리에 명줄 말아먹을 놈. 또 있다.
"할 말 다 혔소?"
"네."
똥고집에 코 빠뜨릴 놈. 미안합니다도 있고 병실 잘못 찾았네요도 있고 정히 뭣하면 계속 취한 척 해도 되는 걸 굳이 네, 란다. 인생 종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정청은 천천히 일어났다. 나보다 살짝 작아 뵀는데 구부정한 자세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게 자세가 중요하다. 등만 곧게 펴도 키가 몇 센티는..
"어야. 담배 하나 줘라."
어느 새 들어온 말쑥한 남자가 담배를 건네는 동안 나는 헛생각 대신 후회를 곱씹었다. 지금이라도 싹싹 빌까, 가 아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놈이나 붙잡고 실컷 자보기나 할 걸. 성욕도 확실히 본능인 게 이 와중에도 진심으로 안타깝고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하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웠던 십 대 때는 혼란스러워하느라 겨를이 없었고, 이십 대는 의사공부라는 좋은 핑계 잡아 도망치느라 바빴고, 삼십 줄 넘어서야 겨우 인정하고 만난 놈은, 개새끼. 그 세 마디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 풍전등화 된 판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놈을 추억할 단어는 그것뿐이다. 삼 년을 만났고 이년 전에 결혼했다. 네 살 차이나는 변호사랑. 사방이 콱 막힌 일식집 개인룸에서 정체 알고 있는 어머니 등살 더는 못 견디겠다 까지만 했어도 개새끼까지는 안 만들었을 텐데. 여자사진 들고 와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직업 변호사 줄줄이 꿰는데 아침 밤낮으로 마주한 얼굴이 그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 ....든다 고거제?"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동자가 네 개가 빤히 쳐다본다. 절 죽이실 지도 모르는 분 앞에서 몇 년 전에 헤어진 개새끼 추억하느라 뭐라고 하셨는지 못 들었으니 리바이벌 해달라고는 차마 못 하겠어서 몰래 마른침만 삼켰다. 침묵을 깬 건 말쑥한 남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남자의 핸드폰. 그냥 받지 슬그머니 나간다. 있었으면 좋겠는데. 되는 일이 없다. 시발...
"사는 게 다 좆같은 거 아니겄소."
...을 입 밖으로 말했나 보다. 어디서부터 한 거지. 시발만 했으면 진짜 좆 된 건데. 희뿌연 연기가 가까워진다. 뒷걸음은 안 쳤다. 정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항시 장난스럽게 빛나던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러니께 선생은 나가 영 싫다고?"
이번에는 멍청하게 네, 하지 않고 가만있었다.
"..씨빠. 얼굴 풀어요이. 누가 잡아 묵소."
그럴 것 같은데요, 라고도 안 했다. 진실은 때로 침묵해야 하는 법이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간당간당 물고 킬킬거리는 조폭 두목 앞에서는 더더욱. ...진작 알았으면 좀 좋아.
"잘 됐고마."
뭐가. 병원이라 급사로 꾸미기 쉬운 거? 불안하게 쳐다보는데 뭔 생각을 하는지 허공만 향해있다. 더 불안하다.
"그럼 이렇게 헙시다. 인자 장난질 그만 칠 테니께 나한테 하루에 한 시간만 주소."
“....네?”
"어차피 뒤질 놈이니께 반 년, 아니제. 이제 한 넉 달 남았나? 아무튼 고것만 고생하믄 되는 거 아니겄소. 고거야 무어 껌이제."
껌... 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러다 커밍아웃 당하면 니가 내 인생 책임질 거냐?!! 라고 외치기엔 술이 너무 다 깼다. 대신 좀 살 것 같다고 이놈의 호기심이 또 발동 걸렸다.
"...근데 그건 왜..."
황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맞춰진다.
"..보고 잡아서요."
“......."
"나가.. 허벌나게 보고 잡소, 그 짝 얼굴을."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쓸쓸하게 비친다. 아무래도 오늘 마신 소주에 뭔가 탔나보다.
4.
"무슨 말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니미. 진짜 입을 아주 꿰매 버리고 싶다니까? 내가 저 입 예쁘게 잘 꿰매려고 의사 됐나 미치고 팔짝 뛰어. 말이 그냥 말이면 내가 이러지도 않지, 농담이라고 하는데, 진짜 반은 욕이고 반은 어디 기집애가 이뻤다느니 걔는 빨통이 어땠다느니, 씨발 대체 어느 대목에서 웃으라는 거야? 어이없어 쳐다보면 자꾸 그렇게 노려보지 말래. 참기가 힘들다나? 아픈 사람 더 아프게 만들지 말라고... 하 나 참. 치료나 제대로 받으면서 씨부리든지. 담배 피지 말라는데 더럽게 말 안 들어. 술도, 야, 그 박재헌인가 뭔가 하는 사람도 웃긴 게 사다 달랜다고 또 사다줘요. 병원이 지들 놀이터야? 씨발. 그럴 거면 편하게 퇴원해서 술 쳐 마시고 떡이나 치든가! 전국 지점 낼 만큼 돈도 많은 양반이 왜 버티고 앉아 힘없는 의사는 괴롭히는데!!"
[......]
"뭐야. 듣고 있어?"
[이 선생.]
"끊은 줄 알았잖아. 왜 말을 안,"
[그 조폭 회장한테 넘어갔냐?]
바로 답하지 못한 건 기가 막혀서다. 내 상황과 성향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 놈이 이 무슨 수혈팩 터지는 소린가.
"귓구멍에 메스 박았냐? 이제까지 말한 거 다 어디로 들었,"
[너 요새 대화의 2/3가 정청인가 뭔가야.]
"그거야 내가 말할 사람이 없으,"
[그 반이 또 욕이고. 바른말 운동본부 이정재 코마냐?]
"....내가?"
[녹음한 거 들려주리?]
"야!! 그걸 왜 녹음!!"
[증거 없으면 버티잖아, 고등학교 때부터.]
..이래서 사람이 서로 너무 잘 알면 안 된다.
[이 선생.]
"왜. 뭐. 안 넘어갔어. 안 넘어갔다구. 뭔 오버를. 야, 나는 지적외모에 꽂히는 놈이야. 내가 미쳤다고 그런 깡패 새,"
[괜한 동정심 갖지 마.]
"하! 동정심 지난겨울에 다 얼어 죽었냐? 동정심은 니ㅁ..."
음. 확실히 입이 걸어지긴 했군. 머쓱해 입을 다물자 핸드폰 너머로 낮은 한숨이 건너온다.
[조심해라.]
"....."
[어? 조심하라고. 또 천치처럼 굴면 그땐 아주]
"아니라는데 난리야. 아, 됐어. 끊어."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했다. 내가 정말 그랬나. 그 사람 얘기만 했나. 근데 그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직장에 꼴통상사 있으면 그 새끼만 주구장창 씹게 되는 맥락으로. ..물론 정청은 꼴통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말 안 듣는 막내 동생? 볼수록 속 터진다. 살 떨리던 그날 밤, 목숨과 맞바꾼 하루 한 시간도 벌써 40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이제 3개월이다. 눈에 띄게 살이 빠지고 통증간격도 짧아졌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지 목숨 강 건너 불구경, 시시 껄렁 농담이나 뱉고 술이나 마시고 담배나 피고... 속상한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소건 말이건 내 환잔데. ...내, 환자. 괜히 가라앉는다. 새끼. 이상한 말은 해서.
다 식은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일어났다. 그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5.
오늘은 말이 아니다.
"헤~이일 수 어없는~ 수많으은 바아암을~~"
노래다. 쌍팔년도 트로트. 빤히 쳐다보는데도 손으로 박자까지 맞춰가며 신이 나셨다. 조폭 두목 되려면 뻔뻔함이 필순가. 뭐, 그래. 그건 직업성 특수성이라 치고.
"도~옹배액 아가아아아씨이~"
"그 노래에 원수 졌어요?"
다른 노래도 부르라는 뜻이 아니다. 부르는 데 십 분도 안 걸리는 노래를 사십 분 되풀이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금세 멈추고 쳐다보는 누구는 전혀 모르는 눈치지만.
"왜요? 뭐 딴 거 듣고 싶은 거라도 있소이?"
"4분 33초요."
"?? 그게 뭐단가? 나가 최신 가요는 잘 모르는디."
"들려 드려요?"
언젠가 한 번은 써먹으리라 벼르며 핸드폰에 담아 다녔다. 존 케이지 4분 33초. 아무 연주도 하지 않는 음악이다. 틀어놓고 돌아앉았다. 4분 33초 꽉 채워 조용하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33초, 아니, 3초만이라도 제발 입 좀 다물고 있으라는 내 비원이 현실이 될 거라는 깜찍한 기대까진 없었다. 그냥 뻘쭘해서건 당황해서건 반격을 준비해서건 적어도 1, 2초는 조용하겠지 했다. 그런데 1분이 지나도록 말이 없다. 창밖을 보고 있었다. 놀리려고 수 쓰는 건가 의심하기에는 황갈색 눈동자가 스산하다. 내가 민망해져 음악을 껐다. 정청은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여기 없는 것 같다. 아니. 곧 사라져버릴 사람 같다. 나도 모르게 동백아가씨를 찾아 틀었다. 그제야 피식 웃는데 평소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아니다. 같이 보이지가 않는다.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동백꽃 좋아하세요?"
“본 적 읍소?”
“여기저기 다니는 편이 아니라. 꽃도 별로고요. 지고 피고 또 질 거.”
무심코 중얼거리다 멈칫했다. 만난 지 고작 몇 개월이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다. 내가 뭐 실수했나.
“저기..”
“선생 혹시 형제 있소?”
“...아니요. 외동인데.. 새삼 그건 왜..”
입매가 푸스스 흐트러진다.
“...그러게 말이여. 새삼 뭘..”
그러고서 또 한참 말이 없다. 진짜 뭘 잘못 말했나 되짚어 봐도 도무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십 수 년 늙은 얼굴인지.
“한 시간 넘었는디.”
평소에 달리 칼 같이 시간을 챙기고 드는 게 왜 기분 나쁜지.
“....예에. 그럼 내일..”
“올라고? 낼 토요일인디?”
“...네. 그러니까요. 토요일. 잘 보내시라구요.”
“보고 잡으면 와도 되는디?”
언제 그랬냐는 양 빙글대는 정청을 뒤로 한 채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재헌도 보는 둥 마는 둥 병원을 완전히 벗어나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에 이렇게 허둥지둥 인지. 기분은 왜 아직도 나쁜지.
‘조심해라.’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지.
6.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밤을
“...선생.”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이정재!”
“아, 깜짝이야.”
“뭘 듣고 있기에 부르는 것도 몰라. 학회?”
말릴 틈도 없이 한쪽 이어폰을 가져간다. 아니나 다를까 볼때기가 점점 씰룩거린다.
“뭐냐, 나이 든 거 티 내냐?”
“띠 동갑 두 번 도는 걸 그룹 좋아하는 너보단 낫거든?”
“가요는 귀 아파서 못 들으신다면서요, 이 선생님. 이건 뭐 클래식인가?”
“..부탁하는 놈이 까대긴.”
세미나 자료를 던져주자 그제야 실실대며 이어폰을 빼놓는다. 야비한 놈. 저런 걸 친구라고.
“진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트로트야.”
“퀵으로 보내준다는 거 부득불 만나서 해야 된다는 말이나 해.”
“잠 설쳤냐? 왜 이렇게 저조해?”
“주말엔 좀 쉬자.”
“코앞에 있는 커피숍 기어 나오느라 큰~ 일했다, 그래.”
한 마디를 안 진다, 상노므시키. 또 조폭회장 운운할까봐 속으로만 욕하며 미간을 구겼다.
“용건 뭐냐고.”
7.
직장인의 적인 월요일이 오늘따라 더 개떡 같다. 출근하자마자 만난 환자가 아주 중증이라.
"오랜만."
나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 나름의 각오는 역시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뻔뻔하게 손 흔드는 걸 간신히 비상계단으로 잡아끌었다.
"뭐야, 너."
"안 본 새 더 까칠해졌다?"
"뭐냐고 지금."
"전달 안 하디?"
했다. 그 개새끼가 너 찾더라고. 전화번호 알려달라는 거 무시했다고. 그래도 설마 병원까지야 가겠냐고.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못 한 건 고작 이런 놈한테 정신 뺏겼던 내 얼굴에 더 뱉을 침도 없어서다.
"뭘 굳어서 그래. 지나치게 민감하지 않으면 그렇게 볼 사람 없다니까?"
그래, 이 놈이다. 이 년 전에 결혼한 개새끼.
"잘 지냈냐? 애인은 있고?"
"짧게 해."
"너무하네. 간만인데."
"짧게 하라,"
"나 이혼했다."
...긴 게 나을 뻔했다. 결혼하겠다는 말보다 더 기가 막힌다. 그걸 여기까지 찾아와 씨부리는 저의를 모를 만큼 덜떨어진 것도 아니고. 뭐라 대꾸하기도 싫어 돌아서자 팔을 잡아챈다. 여전히 사시사철 운동만 하는지 뿌리쳐지지도 않는다. 사람이 이래서 살인을 하는구나 싶다.
"...놔."
"어차피 너도 새로 시작하긴 힘들잖아."
"놓고 꺼지,"
"왜. 딴 놈 생겼냐?"
대로변에서 똥물을 뒤집어써도 이거보단 나을 거다. 이런 놈을 선택했던 내 자신이 새삼 쪽팔리고 한심하다. 병원만 아니라면 2년 전에 제대로 못 한 거 넘치게 퍼부어줄 텐데. 왜 이 새끼는 이렇게까지 바닥일까. 개새끼로 온점 찍었지만 좋았던 기억도 있는데.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했던, 그 생생히 살아있던 황홀함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거라면 나는 이제 정말 다시는 누구와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였다.
"못 본 걸로 해주까요, 치와 주까요? 보고 있기 영 깝깝스러운디."
위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뒷목이 뻣뻣해진다. 안 봐도 안다. 그 사람이다. 정청.
"거 손은 좀 놓지요?"
"...야아. 이정재.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지 않냐?"
"계속 그라고 있을 거요?"
"어디서 저딴 걸, 너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계속 빈정거리게 놔둔 건 그러다 칼이나 맞아라 하는 심보가 아니라 고개조차 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어쩌니 저쩌니 해도 막상 현실로 부딪치면 거부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침을 뱉고 혐오하고 소문을 퍼트리고... 그런 사람은 아니지 할 수가 없다. 삼 년을 만난 놈도 이런 줄 몰랐는데 기껏 네 달 만난 사람 속을 내가 어떻게 아나.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겨우 악다물었다. 대체 이게 뭐야. 내가 왜 이런 꼴이 돼야 해. 당장 달려 나가 아무 여자한테나 매달려 결혼이라도 해버리고 싶다. 창문 열고 뛰어내려 다 끝내고 싶다. 비관하지는 말자 버텨온 게 이토록 한 순간... ...퍽 소리와 함께 팔이 허전해진다. 바닥에 나뒹구는 개새끼를 보면서도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다. 멍하게 팔만 늘어뜨리는 사이 커다란 몸이 놈에게 웅크린다. 뭐라고 하는지는 제대로 못 들었다. 다만, 사람 얼굴에서 그렇게 빨리 핏기가 가실 수 있다는 게 나중에서야 신기했다.
8.
그나마 수술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종일 어떻게 환자를 봤는지도 모르겠다. 밤이 내린 후에야 정신이 다 돌아왔다. 병실 앞에는 웬일로 재헌이 없었다. 잠시 생각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야 할 지, 고맙다고 해야 할 지. 숨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알았다.
"늦었네요이."
비밀로 해달라는 말은 필요 없다는 거. ...저런 사람이 어떻게 깡패가 됐지.
그때부터 긴장이 풀려선지, 정신이 반만 돌아온 건지 한 시간을 훌쩍 넘겨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술이라도 마신 사람처럼 두서없는 이야기가 지루할 만도 한데 그 말 많은 정청은 중간에 한 번 끼어들지도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가 진심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해받았다. 깊은 황갈색 눈동자로 인해 충분히, 넘치게.
9.
일주일 내내 밤을 새다 시피하고 이번에는 그의 말을 들었다. 질펀한 농담이 아닌, 그의 얘기였다. 그가 회상하는 건 주로 여수였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물리도록 먹은 컵라면, 몸도 누이기 힘들 만큼 작은 방, 미로처럼 얽힌 가파른 골목. 가난한 시절인데도 그 애기를 할 때면 생기가 돌았다. 손짓 발짓 섞어가며 늘어놓는 무용담이 솔직히 좀 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의 얘기를 계속 듣고 싶었다.
10.
얼마가 지나서는 둘 다 말이 없었다. 따뜻한 물에 잠겨 있는 양 편안한 침묵이었다. 두세 시간쯤은 우습게 넘기면서 그의 곁에 머물렀다.
어느 때부턴가는 퇴근 후 거의 전부를 그와 함께 했다.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대체 뭐하고 다니는 거냐며 집까지 찾아와 닦달인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들키는 게 두려웠고 그가 두려웠는데 지금은 시간이 가장 두렵다. 달력을 치우고 되도록 시계를 보지 않았다. 남은 시간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11.
“전업했냐? 의사 때려 치고 간병인 취직했어?”
작정하고 찾아온 통에 피할 수가 없었다. 니 인생은 니 거, 내 인생은 내 거 확실한 놈이 왜 이렇게 안달복달인지 모르겠다. 묵묵히 고개를 돌렸다. 창으로 부는 바람이 제법 따뜻하다. 그의 말처럼, 어느 새 봄이 오고 계시다.
“넌 데이트도 안 하냐.”
어이없단 표정이 그릴 듯 보인다. 사실 며칠 전 그에게 들은 말이었다. 좀 욱했지만 화내지는 못했다. 요사이 그는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거 보고도 넋 빼놓고 있을 거면 연락이나 줘라. 시간낭비 안 하게.”
식지도 않은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서류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간다. 사람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다. 과학으로도 증명하지 못할. 어떤 말로도 설명하지 못할. 한참 뒤에야 봉투를 열었다. A4종이에는 기사 몇 개와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었다. 참으로 무표정한 영정이었다. 커피숍이 닫을 때까지 앉아 있다가 길을 걸었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고 봉투를 버렸다. 정청의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다정한. 가끔은 아득했던. 좆같은 얼굴 더 좆 같아졌고마. 깨어날 때마다 흐릿한 눈으로 되풀이하던 그 얄미운 말까지. 이 선생하면서 누구를 떠올렸을까. 전혀 다른 길에 서 있는, 살아있는 나를 통해 무엇을 봤을까. 그가 가지 못한 길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그는 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도. 단 한 번도.
12.
며칠 만에 일어난 그는 맑은 얼굴이었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또 그 노래였다. 동백 아가씨. 옆에 앉는 줄도 모르고 흥얼거리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여수에서도 입에 달고 다녔다고 했다. 듣기 싫다고 어찌나 타박이던지 일부러 더 했다고.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여수에서의 모든 기억이.
“어라? 은제 왔소?”
“..방금요.”
“왔으믄 왔다고 말이라도 허지.”
“곰 아니면 알겠지 했죠.”
“곰이 노래는 으째 한단가?”
“그렇게 부르면 곰도 외워요.”
“그려서. 또 그 4분 뭐시긴가로 나 골탕 먹일라고?”
골탕은 무슨. 뜬금없이 호구조사나 했으면서. 모를 말이나 중얼거리고. 혼자 쓸쓸해하고. 혼자 그리워하고. 혼자 남겨지고. 바보 같다, 정말. 하지만 나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 꽃이 피고 지고 또 지듯이.
“노래나 해요. 듣다 보니 좋네..”
박수와 환호를 강요한 후에야 그는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헤일 수 없는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끝없이 이어지는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13.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여수였다. 젊은 그가 부둣가에 서 있었다. 누구랑 싸웠는지 멍투성이였다. 씨빠, 일진 사납고마. 어야. 담배 하나 줘라. 퉤 가래침을 뱉는 그에게 옆에 선 이가 담뱃불을 건넸다. 재헌이었다. 둘의 곁으로 한 남자가 지나갔다. 배낭을 메고 커다란 캐리어까지 끌고 있었다. 합격했다니까! 그래, 나 이제 의대생이라고. 서울 간다, 서울! 그는 환하게 웃어젖히는 남자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재헌에게 팔을 둘렀다. 어디 가서 술이나 존내 빨자. 그와 남자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주저앉았다.
꿈이었다. 그의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14.
완연한 봄을 지척에 두고 그는 평온히 떠났다. 여러 날이 지나고 재헌이 한 번 다녀갔다. 그간 감사했다는 인사차였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봤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노랫가락에 다 큰 남자가 부모 잃은 아이처럼 섦게도 울었다. 노래가 세 번 반복되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한 재헌은 눈이 퉁퉁 붓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놓았다. 편지봉투였다. 며칠이 지나고 봉투를 열었다. 수표 이딴 거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았는데, 볼품없는 종이에 삐뚤빼뚤 글씨가 쓰여 있었다.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정말 깡패두목이랑 안 어울리는 아저씨잖아. 그 덩치로 이게 무슨. 차라리 돈을 넣지. 끅끅 허리를 굽혔다. 그날 참 많이도 울었고, 그로부터 내 안의 무언가가 단단해졌다.
지금 난 잘 지내고 있다. 밥도 잘 먹고 일도 잘하고 지난달에는 정교수도 됐다. 얼마 전에는 애인도 생겼다. 예상했는지도 모르지만 그 친구다. 자식이 꽤 오래 속을 끓였더라. 말을 하지. 친구는, 아니, 이제 애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 녀석은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물었다. 그 사람을 좋아했냐고.
나는 아직도 가끔 회상한다. 꿈처럼 짧았던 몇 개월을. 갑자기 찾아왔던 한 남자를. 그가 그리던 어느 이를. 그리고 바라는 것이다. 그의 이룰 수 없는 꿈이 영영 이뤄지지 않아, 그들이 다시 만나고 사랑하기를.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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