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ep 후
happily ever after
부제. 6년 후 여수
for. 쉴님
정청은 예측할 수 없다. 어떤 타이밍에 무슨 말을 할 지, 어떤 행동을 할 지 이십 년 가까이 함께 한 자성에게도 여전히 어렵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 자성은 평소처럼 평화로운...
"이라도 닦고 좀, 형. 아, 혀, 우웁!!!! 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거울 앞에서 벌겋게 부어오른 입술을 근심스레 쳐다보다 등 뒤로 각티슈를 집어던진 것도, 아이고 죽겄네, 아이구 나 죽네 침대를 구르며 요란을 떠는 저 화상을 밧줄로 매달아버릴까 한 것도, 그러다 팔목을 잡혀 출근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것도,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차에 오른 것까지도 모두 일상이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기 얼마 전, 그러니까 자성이 그렇게들 떡들 쳐대시다 복상사로 뒤지시겠다는 둥, 이번 정기검진 때는 거시기 검사 철저하게 받아보라는 둥 비아냥거릴 이중구와 육아 스트레스 운운하며 진우를 저한테 보내랄 청과 이후 지리하게 이어질 두 최고임원의 유치한 말싸움과 더 유치한 폭력사태와 깨져나갈 집기들과 비서 아가씨의 정신건강을 복합적으로 염려하고 있을 때였다. 코앞에 봉투 하나가 드밀어졌다. 새하얀 종이백합이 달린 청첩장이었다. 거래처라면 이렇게 건넬 리가 없고 동생들 중 하나라면 모를 리가 없는데. 설마 신랑 정청 신부 이자성은 아니겠지. 요새 청의 새로운 취미가 이자성 놀려먹기인지라 만에 하나 그렇다면 재헌 앞에서 큰형님의 체면이고 뭐고 정강이를 걷어차 주리라 다짐하며 반을 갈랐다.
자성은 잠시 숨을 멈췄다. 신랑도, 신부도 낯선 이름이었다. 다만 장소가 마리아웨딩홀이었다. 전남 여수시 학동. 신부일 리는 없고 다시 신랑 이름을 살폈다. 스무 번쯤 되뇐 후에야 어렴풋이 떠올랐다. 까까머리. 작은 키. 뱁새눈을 한 차지철. 유난히 청을 따르던 자였다. 언제고 결혼하게 되면 혼주 자리에는 꼭 형님을 앉힐 거라고, 여수를 떠나기 전날까지도 질질 짜며 그랬다고, 그 모지리 새끼랑 살아줄 여자가 있겠나 싶었는데 부처님 맘씨 가진 여자가 은희 말고 또 있는 모양이라고. 자못 퉁명스러운 투에 피식 웃으며 청첩장을 건넸다.
"다녀와요. 주말 김 회장 약속은 미루든가 내가 나가든가 할 테니까."
청은 답지 않게 별 대꾸가 없었다.
**
여수가기 껄끄러운 줄 알려나 생각하다 그냥 넘어간 게 첫 번째 잘못이었고, 워낙 중요한 약속이니 그러려니 하겠지 한 게 두 번째, 그날 저녁 인호를 통해 스케줄을 싹 비우게 하더니 대뜸 차를 영등포로 향하는 걸 구미 당기는 맛집이라도 찾았나 순순히 응해준 게 세 번째, 별 맛도 없는 고깃집에서 어영부영 세 시간을 보내고 다짜고짜 기차역으로 들어서는 걸 지금 바로 가는 거냐고 놀라기만 한 게 네 번째, 기차 한 번도 타 본 적 없다며 자리 찾아달라고 열 살 애 마냥 땡강 피우는 걸 인간 답도 없다 투덜거리며 별 생각 없이 같이 올라탄 게 다섯 번째.
청과 여수행 밤기차에 나란히 앉아 돌이켜보니 전부 잘못이었다. 꽉 잡고 놔주지 않는 통에 장난치지 말라고 실랑이를 하는 사이 기차가 출발했다.
결혼식은 삼일 후고 주말약속은 중요한 자리고 형은 회장이고 나는 명색이 영업이산데 쌍으로 지각도 모자라 무단결근이 어느 돼먹지 않은 회사 얘기냐, 중구형이랑 칼부림 제대로 나고 싶냐 쏘아대면서도 사실 청이 무작정 사고를 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일부터 삼일 간의 업무, 주말약속, 다 대비해놨을 거다. 얄밉게도. 빰빠라밤 서프라이를 외치는 청의 정강이를 힘차게 걷어차고 핸드폰을 들었다. 짐작대로 자성의 스케줄은 오늘 저녁이 아니라 삼일 통째로 비워져있었고, 미룰 수 없는 일은 재헌이나 중구에게 나눠져 있었다. 돌아오시면 엎드려뻗쳐 있겠다는 재헌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중구가 신혼여행 자알 다녀오시라며 신나하는지, 글썽이는 척하는 청을 조용히 노려보자 오래지 않아 답이 나왔다. 앞으로 진우 달라는 말 안하겠다는 조건이었단다. 그걸 조건이랍시고 내건 사람이나 진지하게 받은 사람이나. 회장 부회장이 사이좋게 덤앤더머라니 골드문의 미래가 참 밝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무는 자성 옆에서 청은 슬금슬금 오징어를 샀다. 물론 맥주도. 그것도 자성 돈으로. 지갑을 고깃집에 놓고 오셨단다. 오징어와 맥주를 꼭 끌어안는 청을 보며 자성은 오늘 아침 이 인간을 천장에 매달아버리지 않은 것을 깊이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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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기차가 정히 원이라면 KTX도 있는데 굳이 다섯 시간 넘게 걸리는 무궁화 호를 고집한 덕에 여수로 가는 길은 멀었다. 빠르게 스쳐가는 창밖이 깜깜하다. 자성은 듬성듬성한 가로등을 세어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서 위태롭게 떨어지려는 머리를 조심스럽게 안착시키자 얼굴이 편해지더니 곧 입까지 벌리고 쿨쿨 잘도 잔다. 좀 얄미워져서 살며시 코를 잡으니 푸드득 찡그리며 털어내는 꼴이 재밌다. 자성은 숨죽여 웃으며 구불구불한 머리칼에 볼을 비볐다.
자성도 기차는 오랜만이었다. 제대하고 한 번. 옷가지와 할머니 사진이 든, 짐이랄 것도 없는 가벼운 가방을 들고. 기억난다.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를 뿌린 퍼런 바다로부터. 돌아갈 수 없는 모든 과거로부터. 지긋지긋해하며 그토록 떠나기를 갈망했는데 이상하게도 몹시 슬펐다.
돌이켜보면 여수에서는 늘 그랬다. 떠나고 싶은 만큼 떠나기 싫었고, 머무는 동안은 후회만이 가득했다. 어쩌면 세 번째도 그랬을지 모른다. 낮게 코를 고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느 때보다 깊이, 벗어날 수 없는 절망에 휩쌓여 할머니를 뿌리고 수많은 목숨을 던진 그 바다에 이번에야말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자성은 슬며시 청의 이마에 턱을 기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이 괜찮아졌다.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며 청과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그때는 꿈조차 꾸지 못한 지금을 살고 있다. 하지만 자성도 알고 청도 알듯이 온전히 괜찮을 수는 없었다. 자성은 가끔 제가 밀어 넣은 지옥 속에서 홀로 죽어가는 청을 보며 소스라쳐 깨어났고 무심코 석무를 부르다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청 역시 새벽녘 일어나 옆에 누운 자성을 몇 번이고 확인했으며 자성 대신 누구도 때리지 못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청과 자성은 서로를 가여워하고 보듬었지만, 아무리 말하고 아무리 듣고 아무리 나눈다 해도 그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각자의 몫이었다. 그래서일까. 청은 여수만은 조른 적이 없었다.
여수. 생선 비린내와 짠 내 섞인 바람, 조경구와 오성철, 의원아저씨와 개새끼, 이질적인 동질감, 새벽녘의 통화와 보고서. 웃긴 하와이안 셔츠와 맨발로 사람 속을 뒤집던 정청. 그리고 고단했던 이자성. 지금보다 한참은 어렸던 그 녀석에게 하루하루의 삶은 빚 같았다. 얼른 갚아버리려고 아득바득 버틸수록 원금보다 이자가 많아졌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러지 않아도 좋았는데. 자성은 차창에 비친 제 얼굴로 쓸쓸하게 웃는다.
할 수만 있다면 비오기 직전 하늘같던 그 어린 남자에게 전해주고 싶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노라, 살아가고 있고 살고 싶어 하노라. 믿을 수 없겠지만 네 옆에 있는 그 남자로 인해 넌 살게 된다, 그를 죽이지 않는다, 죽일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안심하라고.
하지만, 안다. 그럴 수도 없을 뿐더러 만에 하나 전해준다 해도 그때의 이자성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강형철이 말하는 그 일을 절대 맡지 말라고, 북대문에 잠입하지 말라고, 경구를 만나지 말고 오성철을 만나지 말고, 누구보다 정청을 만나지 말라고. 이 사람이 좋고 고맙고 소중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어도, 모른 채 살았어도 좋은 삶이지 않았겠냐고. 청은, 형님은 욕심 없는 사람이니 평생을 여수에서 조경구와 오성철과 함께 늙어갔을 테고, 이자성 너는 변두리 경찰로 시시하게 저물지라도 적어도 한 사람의 인생에, 다른 누군가의 목숨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기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성은 가끔 그것이 사무친다. 이 머리카락이 주는 안도와 이 체온이 주는 평안과 이제는 당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당신이 나로 인해 그토록 아프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살며시 청을 끌어안자 묵직한 체온이 따스하게 스며든다.
여수는 아직 멀었다.
**
황당무쌍하게 여수로 끌고 온 정청의 여수 방문 첫 소감.
"아따. 춥다이."
자성은 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내던지듯 코트를 안겼다. 평소 같으면 은근히 청의 건강을 신경 쓰는 자성이 걱정할까 받자마자 호기롭게 내던졌을 사람이 춥긴 추웠는지 군말 않고 입는, 아니. 걸친다. 입기에는 많이 작다. 자성은 실실거리는 낯짝을 세차게 노려봤다. 정확히는 청이 입은 저놈의.
"진짜 그거 입을 거면 따로 다닙시다."
빌어먹을 하와이안 셔츠. 깜빡 잠들었다 깨보니 저런 게 눈앞에 있었다. 아련한 감정이고 추억이고 뭐고 한 방에 날아갔다.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얼척이 없다. 대체 저건 어디서 찾은 걸까. 아니면 설마 산건가. 하와이안 셔츠는 발전도 안 하나. 어쩌면 저렇게 변함없이 촌스럽고 휘황찬란하고 경악스러울 수가 있지. 말을 잃은 자성 앞에서 팽그르르 돌며 으뜨냐, 멋지제? 으쓱대는 청을 자성은 물론 내리기 직전까지 열과 성을 다해 말렸지만, 물론 별 소용은 없었다. 보다시피.
"하여간에 불철주야 까슬한 시키. 성실하기도 허다."
킬킬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담배를 무는 청에 없던 혈압이 다 오른다. 인간이 왜 날이 갈수록 답이 없어지지. 진지하게 고뇌하는 자성을 모른 척하며 청은 주변을 돌아봤다. 역 주변이 많이 변한 것도 같고 그대로인 것도 같다. 사실 이쯤은 오동도 가는 길에 스쳐보기만 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변했어도 그대로여도 여수는 여수다. 희미하게 바다냄새가 풍겼다. 인천에서 질리도록 맡았는데도 다른 것 같다. 더 짙고 퍼렇다. 같은 건 여기 있는 이자성뿐이다. 청은 반쯤 태운 담배를 비벼 끄고 자성의 손을 잡았다. 벗고 가라고, 벗고! 알차게 외치면서도 못 이기는 척 따라와 주는 자성과 함께.
여수였다.
**
아이고~ 이게 누구여. 느 진짜 청이 맞냐? 워메. 신수가 훤해졌고마. 길에서 보면 못 알아 보겄다야.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안했지만 적어도.
"씨불럼이 아침부터 처오구 지랄이여."
이렇게 화끈한 반응일 줄은 몰랐다. 그대로시네. 자성은 피식 웃으며 청을 건너본다. 아니나 다를까 첫 손님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 삐죽대면서도 입고리가 올라가 있다.
콜택시를 타고 시장 입구에 내렸을 때도 사실 자성은 여기를 떠올리지 못했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시멘트벽과 녹슨 철제 미닫이문, 한때는 꽃분홍이었을 꼬질꼬질한 방석, 끈적거리는 테이블. 그리고 다 풀린 파마머리 아줌마의 쩍 벌어진 하품. 그제야 기억이 쏟아졌다.
여기는 처음으로 청과 밥을 먹었던 곳이고 이후에도 하루에 한 번씩 속을 채웠던 곳이다. 아줌마와 청의 설전에 자성이 국밥을 반도 못 먹고 내려놓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경구가 자성의 것까지 싹 먹어 치웠고, 그때마다 아줌마는 청에게 던지려던 국자나 솥뚜껑 따위를 정확히 경구의 뒤통수에 집어던지고는 다시 자성의 그릇을 채워줬다. 저 아지매가 느 맘에 드나본디 다리 놔주까? 청이 능글거리다 기어이 얻어맞는 동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뚝배기를 내려다보며, 그때는 감사하다는 말도 못했다.
"잘 먹겠습니다."
국밥을 놔주며 나도 낼 모레면 환갑인디 은제까정 새벽 댓바람부터 깡패시키들 밥 해먹여야 쓰냐, 투덜거리던 아줌마가 일순 휘둥그레진다. 자성은 괜히 면구스러워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빨간 국물이 여전히 개운하고 뜨뜻하다.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이고 나는 고기가 이게 뭐여. 자는 수북하고마."
"이기 어디서 밥투정은 하고 지랄. 서울서 몬된 것만 배웠고마."
"우덜 서울 간 거 알긴 알았나보제?"
"귀찮은께 말 고만 시키고 처먹기나 혀."
그러면서도 턱하니 소주 한 병까지 놔주고 주방 옆의 쪽방으로 들어간다. 자성은 낮은 문지방을 넘으면서 어이구, 무릎을 짚는 등에서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다. 문을 닫으려다 멈칫 돌아보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너덜 돌팔이 영감 뒤진 건 아냐?"
"알어."
"바다에 뿌렸으니께 술이나 한 잔 쳐주든가. 고마 누울라니께 인사허지 말고 가라이."
문이 닫히고 청과 자성은 잠시 같은 사람을 떠올린다. 있었다면 그 역시 아줌마처럼 무심했을 것이다. 다친 것도 아니면서 왜 왔냐고, 혹은 다쳐도 오지 말라고. 그러다 돌아갈 때가 되면 이번에는 버스터미널이 아닌 기차역 기둥 뒤에서 번히 바라봤을까. 어제도 본 것처럼, 내일도 볼 것처럼, 또 만날 것처럼.
자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잔잔히 웃고 있는 청을 보며, 그제야 궁금해졌다. 여수만큼은 그토록 조심하던 청이 왜 이렇게 갑자기, 우격다짐으로 여수에 왔을까.
**
청과 자성은 나란히 방파제에 앉았다. 바다와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다.
종일 정신없이 쏘다녔다. 국밥집에서 사무실로, 사무실에서 창고로, 창고에서 시내로, 시내에서 오동도로, 다시 시장으로, 단칸방으로. 시간이 지난 만큼 낯익은 풍경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은 당구장이 됐고 창고는 길고양이들이 접수했고 시내는 너무 많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오동도는 장사꾼이 북적이고 시장에서는 아이고 청아! 아이고 이게 누구여! 반색하는 이도 많았지만 불안하게 쏘아보는 상인들도 꽤 됐고 단칸방은 폐허였다. 그런데도 청은 내내 싱글벙글 이었다. 평소보다 더 종잡을 수 없었다. 당구장을 휘 둘러보며 여 난방은 잘 되요이? 괜한 참견을 하기도 하고, 털을 세우는 고양이를 한 번 만져보려다 손등을 긁히고, 시내에서는 두꺼운 오리털파카를 사 입고 (자성 돈으로), 어떻게 지갑을 놓고 오냐고 잔소리 좀 했다고 오동도 음악분수 앞에서 돈 벌겠다며 동백아가씨를 불러 젖혀 자성의 혈압을 최고치로 올리고, 시장에서는 애처럼 떡볶이며 순대며 튀김을 한 아름 사들고(역시 자성 돈으로), 터만 남은 단칸방에서는 내가 여기 자주 누워 있었다며 흙바닥에 벌렁 누웠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데려와 놓고 걱정이 돼서 오버하나, 생각만큼 힘들지 않다고 말을 해줘야 하나 마음이 쓰여 째려보고 노려보기로 그쳤던 자성도 점차 차오르는 빡침에 소리치고 채잡으며 투닥거리다 하루가 다 갔다. 괜찮았다. 잊지 않으려 애라도 쓰고 있었던 것처럼 쏟아지는 기억이 정교하고 세세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구와 성철과 의사아재와 그때의 청과 그때의 이자성이 거리에, 사무실에, 오동도에, 단칸방에 보였음에도. 이렇게 나아졌나 새삼 놀랄 정도로. 자성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청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힘들제?"
한참 만에 나온 목소리가 언제 열 받게 했냐는 듯 다정도 하다.
"힘들겄제. 이해헌다. 나라도 그럴 것이여."
아니라고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너무 뻔뻔스러운 거 아닌가 싶어서다. 어쨌건 이곳에서 자성은 청을 속였다. 그러니 청의 입장에서는...
"방 잡으까?"
"네?"
생뚱맞은 말에 존댓말이 다 튀어나온다. 근래 보기 드물게 진지했던 청은 어느 새 히죽거리고 있다. 자성은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또 뭔 헛소리를 하려,"
"빤한 것이 허벌 급해 보이는디.“
“뭐라는 거,”
"부끄러워 허기는. 괜찮어야. 원래 추억이 서린 곳에 오믄 아랫도리가 불끈 달아 오르,"
"아 쫌!!!"
저도 모르게 청의 입을 틀어막고 주변을 살피던 자성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청 때문이다. 귓불이 후끈 달아오른다.
"소, 손바닥을 왜 핥아?!"
"닳는 것도 아닌디 뭐 으뜨냐."
능글거리는 것도 이 정도면 국보감이지. 자성은 청을 노려보며 보란 듯이 손바닥을 닦는다.
"야. 느는 사람 면구스럽게 으째 바로 그르냐."
"그게 뭔지는 아오? 어떻게 날이 갈수록 뻔뻔해져."
"좋아하믄 자연스러운 거 아니여?"
"때와 장소는 좀 가리라구. 중구형한테 그렇게 구박받고도 어째. 아, 저번에 사무실에서도,"
"아따 밤바람 차다."
휘휘 바다를 돌아보며 딴청인 청을 확 밀어버릴까 하다 오리털파카가 물에 젖으면 건지기 어려우니 참기로 한다. 대신 묻고 싶은 걸 꺼내 놓았다.
“그만하고 이제 말해 봐요. 여기 온 이유.”
푸스스 웃음소리가 부서지며 왼 볼에 시선이 닿는다. 보지 않아도 그려졌다. 황갈색 눈동자에 스며있을 미소가.
“느는 여가 싫으냐?”
애달지도 무겁지도 않은 목소리에 자성은 오래 침묵한 채 검퍼렇게 변하는 바다를 바라본다. 좋을 리가 없었다. 단 한 번도 편하지 못했던 곳이었다. 모든 잘못은 꼭 여기서 시작됐고 반드시 무언가를 잃었고 평생 후회했다. 떠나고 싶었고 떠나야 했고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런데도 종종 이곳이 떠올랐다. 강형철을 만나기 전에도, 청과 만난 중에도, 서울로 다시 올라온 후에도. 그게 가장 싫었다.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그리워한다는 게 마치 청을 대하는 저의 모습 같아서. 좋을 리가 없어야 해서. 그것까진 스스로가 너무 견딜 수 없이 끔찍해서. 바보같이. 자성은 괜히 발치에 있는 돌멩이를 툭 굴리며 중얼거린다.
“누가 싫댔나.”
“뭐?”
“이유나 말하라고. 왜 갑자기 끌고 와 정신없이 끌고 다녔냐고.”
“아따 느 으째 점점 이 형님에 대한 예우가 부실해진다?”
“형님은 무슨.”
“나가 형님 아니면 뭐 누님이여?”
“아부지라 그러지 왜.”
“건 너무 비도덕적이지 않으냐?”
“지금도 충분히 비상식적이고 비도덕적이신 분이 뭘 새삼.”
“한 마디도 안 지겄다 이거제?”
“내가 왜. 꿀릴 거 하나도 없구만.”
“그니까.”
급선회한 말꼬리에 그제야 청을 돌아본다. 방긋방긋 어째 저러고 웃고 있을까.
“느 꿀릴 거 읍다고.”
뜬금없기는 암튼. 자성은 붉어진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돌멩이를 굴린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끌고 왔소?”
“대가리에 총 맞었냐. 진우까정 포기하며 고작 그딴 말 하러 왔게.”
“진우는 중구 형 아들.. ...됐고. 그럼 뭔데.”
“나가 도저히 열이 뻗쳐서 못 살겄다.”
“왜 또 뭐. 이상한 소리 더 하기만 해봐. 확,”
“나가 허벌 좋아하는 놈이 있거든? 근디 그 놈이 자다가 막 딴 놈 이름을 불러야.”
“석무는 괜찮다며.”
“느라고 안 했는디?”
“그럼 나 말고 어떤 새끼랑 자다가 그랬는데.”
“그치? 느도 그렇지? 나가 딱 그 심정이여.”
“아, 석무는 괜찮다며!”
“그기 괜찮어서 괜찮았겄냐? 거까진 그러려니 해보자 넓은 아량으로다가 그런 것이제.”
“그럼 뭐. 입 틀어막고 자?”
“그거시 아이고. 썩무 고거 하나도 화딱지 나 죽겄는디 이맘때쯤 되면 아주 경구에 성철이에 개시키까지, 나가 한 놈도 아이고 몇 놈을 복장이 터지겄냐, 안 터지겄냐.”
자성은 멍하니 입을 벌린다. 종종 잠결에 석무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알았지만 이건 정말 몰랐다. 다만 하나는 안다. 그런 이자성을 우두커니 지켜봤을 밤이 얼마나 길었을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두워지는 자성을 나무라듯 청은 이마를 맞대었다 뗀다.
“삼천포로 빠지지 말어. 확실허게 못 박을라고 온 것인께.”
“...진작 말을 하지 그걸 혼...”
순간 자성은 또 말을 잃는다. 장난기 가신 얼굴을 오랜만에 대해서가 아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들어맞는, 얼마나 품고 다녔는지 온기가 스며있는 둥그런 금속. 권투시합 승리선수 가리듯 청이 번쩍 들어 올린 오른 손에서 반지가 빛난다.
“어야! 오성철이, 조경구! 이 씨불럼들아! 느덜이 못 믿는 것도 나가 이해는 하거든? 저 형인지 뭔지 허는 작자가 누구헌티 마음 줄 인사가 아니다, 특히, 그려, 성철이 느 이 호로놈의 새끼가 그럴 거 다 아는디! 잘 보이냐이! 이자성이가 참말로 느 형수 되었다! 그니께 고만 좀 집적대야! 저승허고 이승허고 엄연 경계가 다른디 뭐단다고 자꾸 찾아오고 지랄해쌌냐! 느들 아니라도 골 아프게 하는 것들 솔찬헌께 거서 욕이나 씨부리면서 잘 있어야! 때 되믄 다 알아서 갈 것인께! 그라고!”
누가 보면 야밤에 웬 미친놈인가 하고도 남을 행태다. 고작 이런 유치한 짓 하려고 일정 헝클이고 괜한 사람한테 부담주고 돈 날리고 시간 낭비했냐고 소리라도 질러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자성은, 스스로도 어이없지만 목울음이 차올랐다. 손을 부여잡고 먼 바다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청이, 이 나날이 말도 안 되게 유치해지는 남자가, 이 사람 또한 내내 괜찮지 못할 것을, 그래서 때때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여길 것을, 괴롭고 아플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아스러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어딘가로 윽박지를 만큼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정청이, 당신이 여기 있어 다행이라고. 당신과 같이 돌아올 수 있어서. 이곳, 한 번도 온전히 좋아하지 못했던, 그래서 괴로웠던 여수로.
여수로 돌아왔다.
“아무튼 이 개노므시키 나가 느를 을매나 이뻐했는디 느까정 지랄을, 아! 아재는 인사도 안 허고 갔으면 고것들 좀 말리고 있고 그라지, 거서 뭐다고 있소!”
자성이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청은 계속 고래고래 거리고 있었다. 쌓이긴 많이 쌓였나 보다.
“그만해요. 팔 빠지겠네.”
슬쩍 잡아끌자 외치던 기세와 달리 순순히 팔을 내린다. 마주치는 눈가가 불그레하다.
“잘 알아 들었겄냐.”
“....알아들었소.”
빤히 보던 청이 어깨로 머릴 기댄다.
“..씨불럼. 진작에 좀 그럴 것이제..”
힘 빠진 어깨를 그러안으며 자성은 생각했다. 청이 유달리 장난스러워진 근 삼 개월, 어쩌면 이래서였을까. 과한 유쾌함으로 자신을 감추는데 능숙한 사람이다. 자성이 과한 무심함으로 그러듯. 살을 맞대고 살아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자성이 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청도 자성에게 그러하고, 그것이 서로에게 불안이고 상처임을 알아도 또 정작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미친놈이 치맨가 혔제.”
“몇 번 바다로 밀어 버릴까는 했지.”
“나는 말이다. 아직 가끔 무섭다.”
“안 밀었잖수.”
“느가 모를까봐서. 여서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살린 거 다 느라는 거. 그러니께..”
“그 정도로 되겠어요?”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여수에서 이자성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이 얼굴을 이토록 당당히 부여잡고.
“반지보단 이게 낫지.”
키스할 줄이야.
이 자리에서 처음 나란히 바다를 마주봤던 때, 담배를 끊었을 때, 홀로 앉았을 때,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경멸하며 겨우 일어났을 때, 과거 어느 한 순간에도 이런 미래는 없었다. 우담바라보다 드문 자성의 키스에 잠깐 굳었던 청이, 잠깐이 찰나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급하게 자성의 허리를 부여잡고 아무리 인적 드문 방파제라고는 하나 노상에서는 도저히 더는 진행하지 못할 수준까지 치달으려는 하고, 그런 청을 겨우 뜯어말린 자성이 쌩쌩해진 청을 진짜로 바다에 집어 던지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한 채 사방이 벽이면 장땡일 어느 곳으로 끌려가는. 이런 웃기고도 어이없는 동화 같은 순간이.
모든 동화가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했습니다 로 끝나는 것은, 그 후로도 자주 행복하지 못한 순간이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시덤불과 화염과 용과 비열한 인간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승리의 순간들은 지나치게 빨리 사라지며 시간은 많은 걸 해결해줄지언정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기에. 또 다시 절망하고 실패하며 무너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동화의 끝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한 까닭은 고통보다는 행복을, 절망보다는 희망을 꿈꾸는 바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동화는 오늘도 그 후로도 오래 행복하다.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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