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잘 보고 있어.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 38도 넘으면 돌팔이네 말고 사거리 병원 데려가라. 안 간다고 꼴값 떨면, 저 새끼 저거 고집 지랄 맞은 거 알지? 내가 책임질 테니까 팔다리 뽀개서라도 끌고 가. ...그리고 담배는, 씨발 저 새낀 면상하고 안 어울리게 뭔 놈의 폐가 재떨이야. 아예 입에도 못 대게 해. 니들도 나가 피고. 방에서 냄새 풍기면 관 뚜껑 닫는 수가 있다. ...아차. 죽은, 이양 불러 끓여. 괜히 니들이 한다고 좆뱅이 치다가 좆 끊기지 말고 ..., ...

이중구는 의외로 잔정이 많다칼부림이라도 나면 니 편이고 내 편이고 없이 다 썰어버릴 듯 날뛰지만, 난장 후 깨지고 상한 동생들을 돌팔이네로 몰고 가 기어이 치료를 받게 하는 것 또한 그다. 붕대에 둘둘 말린 덩치들 사이를 오가며 끝도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중구를 보고 있노라면, 미간에 닿을 듯 쭉 찢어진 눈매와 시발을 주어 삼는 말버릇 덕에 그나마 북대문 이인자지, 영락없는 아줌마다 싶어진다. 어쩌면 그 편이 더 적성에 맞았을 텐데. 여자로 태어나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일 말이다. 쩍쩍 달라붙는 장판에 누워 자성은 잠시 혀를 찬다.

긴 머리 이중구는 왠지 좀 호러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엄마였을 거다. 긴 머리는, 역시 좀 호러니까 귀 밑쯤 잘라 뽀글뽀글 볶고 손에는 된장찌개 냄새 배인 국자를 들고 노란색, 아니, 노란색은 싫어하니까 빨간색... 도 싫어하는데, 아무튼 뭔 색이든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다 헤진 파란 슬리퍼를 신고 대문 앞에서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를 치는 거다. 이놈의 새끼!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이놈의 새끼! 늦었는데 어딜 나가! 이놈의 새끼! 어딜 맞고 다녀! 니가 한 대라도 더 패야지! 그럼 동네 사람들은 아, 저 집 애는 이름이 참 특이하구나 할 테고, 졸지에 동네방네 성은 이요, 이름은 놈의새끼가 된 아이는 이럴 거면 이름은 뭐 하러 지었냐 엄마에게 엉겼다가 곧 들이대는 것도 가려서 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얼른 해가 지고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테지. 실없는 상상 끝에 자성은 문득 그 아이가 부러워진다. 있지도 않은 아이를, 그것도 엄마를 이중구로 두고 부러워하다니. 누구라도, 특히 이중구 본인이 알면 이빨을 드러내며 이게 미쳤나 하겠지만 다행히 자성은 미친 게 아니다. 바람 한 점도 두 손 들고 나자빠진 8월에 감기에 걸렸을 뿐이다.

중구 말대로 못 먹고 산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자성은 일 년에 두어 번을 심하게 앓았다. 그것도 목 좀 따끔하고 열 좀 나는 게 아니라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손가락 하나 건사 못할 지독한 놈으로. 그럴 때마다 죽일 듯 노려보면서도 밤새 곁을 지키는 게 이중구라면, 정청은 약을 사다 나르는 것을 끝으로 보이지 않다가 몸을 가눌 때쯤에야 방문을 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후끈하게 달궈진 시멘트 마당 어딘가에서, 아마 페인트칠이 반쯤 벗겨진 초록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조용히 담배만 피고 있을 정청, 두 달 넘게 이어진 중구의 서울타령에 그러마 하고 만 다음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든 그 구부정한 등을 떠올리다가 앞뒤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 사람이겠구나 싶어지는 것은. 자성은 흐려지다 밝아지길 반복하는 천정으로 더운 숨을 뱉는다. ...그저 아파 그럴 것이다. 아프면 출처모를 서러움이 밀려든다. 이중구 엄마도, 소리 없는 정청도 다 그 서러움의 발로다.

무엇이 그렇게 서럽냐 하면... 하던 중 벌컥 문이 열린다. 걔 중 덜 우락부락한 석무가 누가 쥐어줬을지 뻔한 약봉지를 들고 있다. 물끄럼 쳐다보자 입고리를 당겨 웃는 게 영 어색하다.

-암튼 유별나세요. 그죠?

가고 없는 이중구가 도로 들이 닥칠까 걱정인지 한껏 소리를 낮추고 가까이 앉더니 날이 푹푹 찌네, 이양이 냉커피를 잘 타네, 누구누구가 떡을 쳤네, 맥락 없이 주절거리며 약을 꺼내고 반투명한 봉지를 찢고 노란 주전자에서 유리컵으로 물을 따른다. 먹여라, 고 했나 보다. 먹여라. 칼에 몸뚱이를 상하고 죽기 직전으로 혼절했을 때도 눙치고 실실대기 바쁘던 사람이 이런 하잘 것 없는 것 앞에서만 음색이 변한다. 자성은 왠지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 옛날 다녀오겠다던 골목길에서처럼.

중구가 욕이 태반인 걱정을 삼십 분 가까이 늘어놓는 동안 자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독한 새끼. 말끝에 벽을 차며 중구가 돌아서고 내내 묵묵하던 청과 눈이 마주쳤다. 댕겨 올게. 옅은 황갈색 눈동자로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자성은 그 땅거미가 계절을 지나 두 번, 세 번 돌아올 때까지 그들이 가고 없는 골목에서, 어느 날은 모서리가 닳은 계단에 앉아, 또 다른 날은 골목 끝 대성상회 앞에서 비가 휘몰고 바람이 쌀쌀해지고 소담하게 눈이 쌓이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아니다. 그런 과분한 소망과는 연이 없으리라는 것을 자성은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알았다. 다만 바랄 뿐이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게 되기를. 해서 누구와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다녀온다는 한 마디가 그토록 서럽지는 않을 터였다.

약을 들고 안절부절 못하는 석무에게서 돌아눕는다. 곰팡이가 꽃처럼 핀 벽에 돌아오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하릴없는 물음이 떠올랐다. 아니. 중구의 목소리였다. 약해빠진 새끼 하는. 혹은 그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먹여라. 중구도 청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런 서러울 말도 없을 텐데...

자성은 눈을 감았다. 형님, 형님. 석무의 초조한 부름이 조금씩 멀어지다 깊게 가라앉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