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방한 지 -자성은 이 표현을 아주 질색하여 청을 즐겁게 했다- 삼일째 자정. 십년 된 선풍기가 아무리 노고에 수고가 많아도 혈기 넘치는 여름에는 쪽도 못쓰는 게 물지상정이라 매년 이맘쯤은 청도 잠을 설치곤 했다. ...면 뻥이고. 이번 8월만 그랬다. 청은 원래 뒤통수만 대면 전쟁터에서도 달게 잘 사람인데 손바닥만한 방에 새로 들인 인사가 수시로 왔다갔다 하니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는 거다.
첫날에는 처음이라 참았고 둘째날은 삼세번이라 참았고 드디어 오늘. 12시 넘었으니 다 참았다 하며 청은 벌컥 방을 나섰다. 뒤통수라도 후려칠 참이었다. 그런데 대문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고 있는 머리통을 보니 치기는커녕 요샌 선풍기값이 얼마나 하나 이딴 계산이나 서는 것이... ...저게 구미호여 구미호. 간이고 쓸개고 다 빼가는구마. 청은 벅벅 머리통을 긁으며 자성 옆에 앉았다.
"씨빠 시위도 가지가지다."
"...어? 자는 거 아니었소?"
"어이고~ 배우하셔도 되겄어요."
"뭐라는 거야."
"모른체는 씨발럼. 알았으니까는 고만 자자. 이따 사다 놀라니께."
청은 자성이 반쯤 태운 담배를 뺏어 물고 슬금슬금 벌게지는 귓바퀴를 구경했다. 암튼 이거 진짜 희한한 놈이다. 어디 초등학교 선생이나 하게 생긴 놈이 사시미만 들면 개백정 꼴로 날아다니질 않나, 초고속 승진에도 감사는커녕 이딴 걸 어따 써 이딴 표정이나 짓더니 이런 일엔 또 빨갛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고. 세상에 이자성만큼 재미진 게 없다. 천하의 정청이 집 열쇠를 다 공유할 만큼.
그러니까 정청과 이자성의 합방은 9시 뉴스에 나와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 해도 청은 절대 집만큼은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었다. 급할 때는 팬티도 벗어주는 사람이 이상한데서 철벽을 치니 뒷말도 수두룩했다. 눈알 튀어나오게 이쁜 년이 들어앉아 있는 거다, 아니다 수금한 돈을 한 장 한 장 이어붙여 이불 삼고 있다더라 블라 블라. 하지만 진실은 저 너머로 그 누구도 진짜 이유는 몰랐다. 평소에는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정청이 괜히 정청은 아닌지라 감히 물을 엄두도 못냈던 거다.
이쯤에서 북대문 겁대가리 상실 기자. 최근 청공불락이 뚫렸다는데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청공불락을 뚫은 이자성 씨를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이자성 씨. 비결이 뭡니까? 그러면 자성은 조른 사람한테 물어 보라며 마이크를 넘길 거고, 청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이 씨발럼이. 한가허냐? 바쁘게 만들어 주까? 해서 인터뷰 끝. 언론탄압은 아니고 사실 청도 잘 몰랐다. 그냥 어느 날, 사무실에서 졸지 말고 우리집 가서 자고 와라 한 마디 툭 던진 걸 미간 주름 오 천개로 강렬히 거부한 자성이 재미져서 자꾸 우리집 우리집 하다 보니 말하는 대로 됐을 뿐이다. 그러니 이게 요물이지. 청은 목덜미까지 붉어진 자성을 보며 피식 웃는다.
"누가 보면 땅이라도 사준다는 줄 알겄다."
"...뭐 난 괜찮은데."
"허이고. 거울이나 보고 씨부려셔요. 안 그래도 좆 같은 낯짝, 팬더가 동상하고 달려 들겄어."
"암튼 오바는. ...근데 그.. 돈 많이 들지 않소?"
오버는 지가 하고 있다. 선풍기가 비싸봤자 선풍기지. 청은 어깨에 바람 빵빵히 넣고 형이 가진 건 돈밖에 없다 하려다가 급 정지했다. 이거 이거.... 설마 상상의 전자제품 에어컨을 꿈꾸나?
"..사무실도 아직인데 우리만 그러는 것도 좀 그렇고.."
자성의 한 마디에 작은 불안은 무럭무럭 자라 훌륭한 확신이 됐다. 그래. 애초에 이자성이 선풍기 따위로 신체 붉힐 인간이냔 말이다. 청은 급하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에어컨. 에어컨이라... 아.. 이 스케일 광할한 요물 보소...
"...무리할 거 없어요. 좀 지나면 적응되겠지."
삼색 쓰레빠로 흙바닥을 툭툭 차며 그러는데, 이건 뭐 사달라는 말보다 더 무섭다. 청이 간당간당한 통장 잔고에도 불구하고 단칸방에 에어컨 님을 모시게 된 건 다 이런 슬픈 연유로... 끝나면 나름 훈훈하고 좋으련만 청이 부들부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반바지 주머니에서 88담배갑을 꺼내던 그때.
"됐으니까 설겆이나 바로 해요. 저번에도 라면 먹고 그대로 두더만. 그게 다 걔들 키우는 거야."
...라면 먹고 설겆이 안 하면 에어컨이 커진다고? 아무리 상상 속의 에어컨 님이라도 그건 좀 많이 이상하다. 청은 일단 담배를 물었다. 자성이 뭐라뭐라 잔소리를 이어가든 말든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설겆이를 안 해. 그러면 음식쓰레기. 더럽지. 더러우면 크는 거. 크는 거.... ....혹시? 청은 번쩍 스치는 글자를 감춘 채 자성을 돌아봤다.
"그게 그렇게 싫으냐?"
"형은 뭐 좋소?"
"아니 뭐어.. 그래도 못 잘 정도는 아니지 않어?"
"...미리 말하는데 애들한테 소문내면 가만 안 둘 거요."
1번. 몹시 빨개진다.
2번. 더러우면 큰다.
3번. 소문내면 아작낸다.
청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왜냐.
"크핳ㅎㅎㅎ핡, 니,이자, ㅋㅋㅋㅋㅋㅋ, 바큌ㅋㅋㅋㅋㅋ 바퀴벌레 무서버서 이러고 있던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는 느 더버서 못 잨ㅋㅋㅋㅋㅋㅋ 선풍ㅋㅋㅋㅋㅋㅋ아이고..아이고오 내 배때짘ㅋㅋㅋㅋ"
많은 "ㅋ"에는 깊은 숨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숨 넘어가게 웃다 못해 진짜 뒤로 넘어가는 청의 옆에서 뒤늦게 상황판단을 끝낸 이자성은 이 초딩을 땅에 묻을까, 바다에 던질까 고뇌하다 깊은 빡침에 휩싸여 북대문 수장의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었고, 다음날 여수의 한 달동네는 때 아닌 방역에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정든 바퀴벌레를 떠나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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