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이어.





장훈은 작게 갈지자를 그리며 멀어지는 등을 잠시 바라본다.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반가움이 솟구쳤지만 사실 잊고 살았었다.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멀기만 한 고등학교 시절, 그래도 친구라곤 저 놈 하나뿐이었는데 연락 한 번 해 볼 생각을, 아니, 연락처조차 모르고 살았으니... 저 놈 말대로다.
'니는 오래 살끼다. 독해가..'
장훈은 그 말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 또 한 번은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장례식장에서. 두 번 다 담배를 피고 있었고 두 번 다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까지 허물 없이 소주잔이나 기울일 사인 아닌데. 시간이 약이랄지, 안상구가 대단하달지..
장훈은 작게 혀를 찬다. 요새 어째서인지 생각의 끝이 항상 안상구다. 안상구.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 잔 하자는 깡패. 남의 아버지 안부를 일주일에 두 번씩 챙기는 깡패. 깡패라는 호칭을 못마땅해하는 깡패. 절 버린 주인을 영 잊지 못해 상병신 인증한 깡패. 옥상에서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 꺼져 버리라고 사자후를 내질렀다. 이 정도면 국가에서 병신 인증마크라도 박아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열녀문...아니, 여자는 아니니까 열남문, 혹은 열견문을 세워주든지... ...를 근데 왜 자꾸 생각하고 지랄이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구부정한 등에서 안상구로 넘어올 건덕지가 대체 뭐란 말이냐. 장훈은 고개를 탈탈 턴다. 아무래도 술이 부족한 것 같았다.

** 

"으음..."

현재 위치는 서울 모처의 무인모텔. 거울 달린 천장 아래 놓인 빨간 물침대에 널브러져 발개진 눈꼬리를 세 겹으로 접으며 진땀 배인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는 우장훈. 맞은편 소파에 있는 남자는 그 우장훈에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는, 연애란 섹스다 주의자 안상구. 얼레리꼴레리 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장훈의 신음은 얼레리꼴레리가 아닌 숙취에 기인한다. 상구는 소파에 깊게 기대며 담배를 빨았다. 눈앞에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 우장훈 말이다. 어째 자꾸 모텔로 엮이는 게 떡을 치란 신의 계신가 싶지만 신의 계시라도 지금은 안 되겠다. 기분이 더러워서.
우장훈이 술주정을 거하게 해서 그러냐면 그건 아니다. 친구로 보이는 남자를 보내고 혼자 소주를 열병이나 깐 장훈은 그래도 술값을 제대로 계산하려 했고 (카드 대신 민증을 자꾸 내밀어서 상구가 대신 결제했지만) 오바이트도 안 했고 길거리에서 소리도 안 질렀으며 노래도 안 불렀고 춤도 안 췄고 울지도 않았고 옷을 벗으려 들지도 않았다. (이상의 모든 '안 했다'는 소주 일곱 병 나눠 마신 홍양과 방계장이 했다. 누구 말마따나 시발거(들))
상구가 홍양과 방계장을 택시에 구겨 넣고 고깃집으로 돌아왔을 때 맞은편 가게에 홀로 앉은 장훈은 소주 여섯 병째를 까고 있었는데 친구로 추정되는 남자와 함께 있을 때와는 영판 다른,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장훈이었다. 상구가 알고 있는 우장훈은, 와~ 이 빙다리핫바지 시키가! 하며 성질을 내거나 니 복사본 가지고 있지~ 의도가 명백한 눈웃음을 짓거나 그거밖에 방법이 없다, 미안하다, 돌직구로 솔직하거나 눈 앞에서 딱 꺼지라, 딱!! 하며 악을 쓰거나, 그 어느 때거나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렇게 낡어버린, 닳아버린 얼굴 따윈 없었다. 몰랐다. 모르는 남자였다. 해서 지금 무지막지하게 기분이 더러워진 것이다. 웃기지도 않게.
상구는 길게 연기를 뱉는다. 대체 세상에 존재하는 지조차 몰랐던 이따위 감정들. 무거웠다 가벼웠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그 무게를 달리하는 이따위 마음들. 일곱 살짜리 철없는 꼬마애처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어이 없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저 혼자 편하게 침대에 자빠져 있는 저 남자로 시작됐다. 한 눈에 뻑이 가게, 눈이 뒤집어지게 예쁘장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예쁘다는 곱상한 수식어가 어울릴 인간 자체가 아닌 것이다, 우장훈은. 꼴리는 대로 성질이나 피울 줄 아는, 담배며 술이며 거하게 할 줄 아는, 남자냄새가 풀풀 나는 사내놈. 근데 그 별볼일 없는 사내가 어떻게 될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꼽아보며 이런 한심한 꼴이 되어 있다. 한순간 모르는 얼굴이 됐다는 것에 분개하며.
...어느 쪽이 병신이냔 말이여, 니미...
상구는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장훈을 노려본다.
안아, 버릴까. 한 번 그래볼까. 그러면 뭔가가 달라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스쳐가는 바람이, 지나간 버스가 될까.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저 고집 센 눈동자를 공들여 핥고, 저 거친 입술을 물어 뜯고, 저 겁대가리 상실한 팔 다리를 옭죄어 품에 안으면, 죽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아래를 뚫고 들어가 이 들끓는 속이 가라앉을 때까지 해버리면, 그러면....
상상 끝에 상구는 벙하게 입을 벌리며 고갤 숙인다. 얌전히 제자리에 있던 물건이 어느 새 바지를 뚫을 듯 솟구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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