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1부자들.

전편에 이어.

 

 

 

 

"니 진짜 오랜만이네. 어찌 지냈는데. 여긴 또 우찌 알고."

"나야 뭐... 너 뉴스 나왔던 거 기억나서 검찰청 찾아갔더니 방계장이란 분이 알려주더라."

"그래, 잘 왔다. 여 커피 마시라."

 

우장훈 변호사 사무실의 총무이자 경리이자 인사담당자이자 환경미화관리자인 미스 홍양은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친구 확실한 듯. OMG 친구가 있다니. 우변이 세상에 지손으로 커피 타 줌.]

 

빠르게 사라지는 1에 비해 답은 한참 뒤에나 올 것이므로 홍양은 빈 한글문서에 의미 없는 글자들을 나열해가며 탁자 쪽으로 고개를 뺐다. 물론 이건 홍양의 공식 업무가 아닐뿐더러, 사실 크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이 첩자 짓을 저 까칠한 양반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홍양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떤다.

우장훈 변호사는 첫인상과(어멋, 이렇게 생긴 남자가 변호사라닛. 멋져!) 200% 달리 말과 행동이 거침없었고 (=싸가지),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남녀차별 없이 싸가지) 이 사무실에 취직하고 나서 고등학교 때는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반어법의 참뜻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아무튼 그럼에도 홍양은 이 사무실이 싫지는 않았다. 일단 보수가 나쁘지 않고, 돈 떼먹여먹을 일도 없을 것 같고, 게다가 알고 보니 이 우장훈이란 남자가 참 대단한 사람이더란 말이다. 뉴스라곤 연예뉴스밖에 안 보는 홍양도 누드영상공개 파문은 알았다. 하지만 뉴스라곤 연예뉴스밖에 안 보는 홍양이 우장훈의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기억할 리는 없었다. 우장훈의 대단함을 알려준 건 홍양을 만나러 온 시골 아버지로, 정치타파, 뉴스24시 같은 시사프로를 끼고 사는 아버지는 장훈을 보자마자 아이고, 검사님! 을 외치며 장훈의 손을 잡고 늘어져 생면부지의 장훈과 딸내미 홍양 모두를 기함시켰다. 그래서, 세상에 내가 우장훈이랑 일하게 되다니! 어머멋! 했냐면 그건 아니고. 그냥 좀 신기했다. 연예인이랑 아는 사이 된 기분이랄까?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지그가는주]

 

우장훈을 뻔질나게 찾아오는 조폭 양아치...는 좀 심했나? 아무튼 카톡을 매우 늦게 보내는 이 남자, 안상구는 손목이 잘리고 20여년 함께 한 사람한테 배신당하고경악할 만한 진실을 세상에 폭로해 밑바닥에 꽂혔다가 극적으로 회생, 6개월 복역하고 출소한, 그야말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생 스토리의 소유자로, 첫 만남은 그지 같았지만 (여기 금연이거든요?!) 알고 보니 꽤 서글서글하고 정감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사교성도 엄청 흘러 넘쳐서 홍양은 어느 새 안상구와 카톡하는 사이까지 된 것이다. 주로 상사 뒷담화와 상사 사생활 털기와 상사 염탐하기로.

 

[일어남. 6고깃집 간다고 함.]

 

안상구는 우장훈에게 관심이 많았다. 얽히고설킨 사연을 대충 들어보니 (feat.방계장) 서로 그닥 친분이 깊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쿠사리를 먹으면서도 꼬박꼬박 찾아왔다. 우장훈도 적당히 싫어하다가 적당히 쌀밥이나 묵으러 가는 게 영 싫은 것 같지는 않고. 홍양은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빠삭했다. 이제껏 그걸로 먹고 살았대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홍양은 은밀히 입꼬리를 올린다.

 

[방계장니부러]

 

오랜만에 고기 좀 먹겠구만.

 

 

**

 

 

이게 염탐이면.

 

"우와.. 지인짜 서운할라 그르네. 오떠케 사람이 조로고 웃냐?"

"그니까요. 와안전 딴 사람. 나도 막 서운할라 그래."

"에이, 홍양은 아직 급이 아니쥐이!"

"우리 사이에 끕이 어뒤써 끕이이~"

"그른가아? 히히히. 마셔, 마셔어~"

 

파리가 새다. 염병하고.

6고깃집 맞은편 삼7고깃집에 들어온 지 두 시간. 염탐은, 다시 한 번 염병하고, 아주 둘이 부어라 마셔라 난리가 나셨다. 제 성처럼 얼굴이 홍~하게 달아오른 홍양하며 귀까지 벌게져 히히거리고 있는 방계장하며, 나가 미친놈이지 미친놈이여.. 상구는 쓴물을 삼키며 방계장을 노려본다. 아무 것도 모르는 홍양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방계장까지 이럴 수가 있냔 말이다.

지금의 이 염탐이 홍양의 추측대로 안상구의 눈물겨운 짝사랑숀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일반적이지 않은 관심이 있긴 하지만, 그게 이 경리 아가씨의 깜찍한 상상대로만은 아니란 소리다. 애초에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아무튼 희한한 아가씨다. 면접 때 언니는 홍일, 동생은 홍삼이에요?’ 라는 우장훈 식 농담에 난데없이 눈물 한 바가질 쏟아내며 전근대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딸의 설움을 토해 냈다더니 마이 페이스가 아주 독보적이다. 안상구를 별로 겁내하지도 않고, 희대의 사건에 얽힌 우장훈한테도 심드렁하고, 특이하다 못해 수상해서 처음엔 의심을 참 많이 했더랬다. 알고 보니 다행히 보이는 대로의 아가씨였지만, 아니었다면 글쎄.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홍양의 이 오른손은 지금쯤 뒷산 어딘가에서 비옥한 토양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으리라.

 

"근데에~ 아저씨는 우변이 웨 좋아요? 잘 생겨서 그르나? 아저씨가 더 잘 생겼는뒈?"

"에에히이! 그른 거 아뉘라니까아, 홍양은 솨람이 이쌍해~"

"아주 날을 잡았소, 둘이. 좀 조용히-"

"방괘장님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어?"

"모르긴 내가 뭐얼. 모르는 건 홍양이쥐~"

"에 돼꼬 돼꼬!! 말해봐여. 오디가 그르케 좋대요~?"

 

찌푸리거나 말거나 이제 아예 턱에 꽃받침을 하고 물어대는 홍양과 아니라니까, 아니라니까를 유아기적 발음으로 구사하고 있는 방계장을 번갈아 보던 상구는 푸우 길게 한숨을 뱉고 삼6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변호사 유니폼인 듯 상시 입어대는 검은 양복 마이도 한켠에 벗어두고, 두어 개 푸른 와이셔츠 단추처럼 우장훈은 아주 느슨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경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고 빈정대지 않고 조급하지 않은 우장훈. 콩밥이 몸에 좋은 갑다, 얼굴이 씨, 좆같네 할 때의 우장훈.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우장훈에게 일상적이지 않은, 일반적이지 않은 감정이 싹튼 것은.

남자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좋아했지만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연애와 더 많은 섹스 모두 진심이었지만, 주은혜가 그랬듯 지나가면 지나갈 뿐이었다. 처음에는 우장훈도 그럴 줄 알았다. 남자고, 게다가 우장훈이라니 좀 황당하긴 했지만 무엇에라도 정을 주고 싶어 하는 가난한 자신을 잘 알기에 그저 이 마음을 빨리 쏟아 부으려 했다. 매일 찾아갔고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고 실없는 농담과 뼈 없는 일상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줄어들지가 않았다. 담배를 매단 기다란 손가락이, 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면 뭐어, 하고 흐려지는 입매가, 푸스스 욕을 뱉을 때 옅게 출렁이는 눈 밑의 점이 점점 선명해졌다. 안지 않아 그런가 원초적인 고민도 해봤으나 딱히 욕구가 일지도 않아 그것 또한 수상했다. 안상구에게 애정은 성욕의 바로미터였고, 해서 애정의 시작은 섹스, 섹스의 끝은 헤어짐이었는데... 우장훈은 이상했다. 무얼 어떻게 하고 싶은지 선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홍양의 말대로 애정이라고도, 방계장의 말대로 전우애라고도 할 수 없는 화성의 외계인 같은 감정이 되어 버렸을 때.

 

이강희의 전언이 도착했다.

상구야로 시작해 우장훈으로 끝나는.

 

안상구는 입 안으로 어금니를 으득이며 삼6집을 건너본다.

우장훈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일면 평범한 인상이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듯 덥수룩한 머리칼과 검은 뿔테 안경 속 순하게 처진 눈꼬리, 검은 목폴라와 끝이 헤진 단색 바지, 앞코가 닳은 누런 운동화. 어쩌면 뉴스에 나온 동창에게 돈이나 꾸러 온 불쌍한 사내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강희는 늘 말했다. 나무는 숲에 숨기고 칼은 미소 속에 감추라고. 발톱은 드러내지 말고 아예 다 뽑아 버리라고. 물어뜯을 때 필요한 건 발톱이 아니라 이빨이라고.

 

알았니, 상구야?

 

다정한 말꼬리를 떠올리며 상구는 소주잔을 들었다.

무슨 얘길 하는지 파안대소하는 장훈의 맑은 낯이 목구멍에 쓰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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