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모연집

 
비는 데도 연륜이 중요한 게 모연에게 첫 눈에 반한 이후로 비는 데만 연애의 반을 쏟아 부은 명주는 시진과 대영이 나가고 두 시간 만에 모연을 다시 웃게 하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먹혔던 건 지나치게 상세하고 구차한 설명으로, 저를 놀리고자 상시 대기 중인 유시진에게 선배마저 타겟이 돼버리면 군 생활을 영창으로 끝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눈물을 머금고 블라블라...에서 모연이 피식, 그만해 한 것이다. 아아. 평화로운 밤이에요. 명주는 만족스런 미소를 띠며 모연의 어깨에 기댔다.

-선배 집 오랜만이네요. 예전엔 가끔 왔었는데.
-그랬지. 우르르 스터디 하러 와서 민윤기랑 너랑 저기 저 식탁에 앉아 나란히 정다웠잖아.
-그래서. 그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해, 했습니까?
-가끔 밥 먹다가 열 받긴 하더라.
-그놈의 민윤기. 가까이서 보면 복어 닮았습니다.
-그랬나? 생각도 안 난다.
-생각도 안 나는데 열 받습니까?
-응. 강모연 등신. 그 여자가 너한테 어떤 사람이 될 줄 알고 윤기 오빠랑 붙어 있게 장소까지 제공했어, 아아악!
-윤기 '오빠'만 빼면 기절하게 훌륭하네요.
-꼼꼼하시기는.
-아아... 지금 같으면 유 선배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 서상사님한테 사과해. 술 너무 먹였어.
-벌써 다 깼을 겁니다. 나 아니면 어디 가서 술로 질 사람 아니거든요.
-오. 역시 전애인.
-...전부터 궁금했는데 전애인 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자비롭게 나옵니까?
-니가 그랬잖아. 나한테 한 번도 마음 돌린 적 없다고. 윤명주 진심은 강모연 거라고.
-되게 인상적인 고백이었나 봅니다. 온점 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거 보면.
-폭탄조끼 입고 있는 내내 그 말이 내 기도문이었거든. 돌아오면서 서상사님한테 계약연애라는 것도 들었고.
-...그래서 별로 안 놀랐군요.
-서상사님이 나 같아서 도와주고 지켜보고 싶었다며. 유대위님한테 힘껏 도망쳐서 행복해 질 수 있을지. 그럴 수 있다면 너도 평생 파병지를 떠돌다 죽어도 해낼 작정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본 너는 낯선 땅에서, 낯선 바이러스로 정말 죽어가고 있었어. 무섭더라. 너한테서 도망쳤던 시간이 후회되고 서러워서.

마주한 눈동자에 어느새 물기가 차있다. 명주는 가만히 미소하며 모연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 안 죽었습니다.
-감사하고 있어. 서상사님한테, 유대위님한테, 특히 끝까지 포기 안 해 준 윤명주에게. 전해줘. 내가 많이, 아주 많이 고마워한다고.
-..그런 사람이 만날 구박입니까.
-하다 보니 재밌어서. 서상사님 놀려 먹는 유대위님 기분이 이렇겠구나 싶어.
-암튼 도움 안 되는 인간. 유시진 번호 당장 지우십시오.
-바로 계급장 떼는 거 봐. 유대위님한테 이른다?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겁니까?
-나 구하러 와서 대신 총 맞은 은인 편?
-...뭐...
-그니까 적당히 해. 오늘처럼 그러다 유대위님 진짜 화낼라.
-워낙 화 안 내는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유나리자겠습니까. 지금도 서상사 꼬투리 잡았다고 신나 있을 걸요?


**


-이제 똑바로 좀 걸으십쇼. 무거워 죽겠습니다. 아니. 집이나 알려주고 이러든가요!

술 깰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거 빤히 아는데 다리에 힘을 주긴 커녕 더 기대 오는 서대영이다. 시진은 빠드득 이를 물었다.

-끝까지 해보겠다. 좋습니다. 어디 두고 봅시다, 진짜.
 
이놈의 동네는 서대영을 닮아 쉬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 특히 길게 늘어진 이 중앙 계단. 네 시간을 헤매다 보니 익숙하다 못해 친숙해진 다른 길과 달리 보자마자 한숨이 절로 샌다. 휴가 첫 날 밤에 이 무슨 체력단련이란 말인가. 누가 교관 출신 아니랄까봐 암튼 일관성 있는 사람. 시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대영을 고쳐 멘다. 근데,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댁들이 밟고 오신 계단 하나~ 하나~ 다 내 구역이라니까? 그래서! 하나 당 만 원, 둘이니까 따블, 총합 백 이 십 만원 결제 도와 드리겠습니다 호갱님~

마지막 계단 하나를 막아선 양아치들이 옹기종기 다정도 하다. 시진은 힘줄이 불거진 대영의 팔을 추스르는 척 잡으며 목소릴 낮췄다.

-가만있어요. 서상사 끼면 일 커집니다.
-취한 놈한테 돈이 좀 있나 보지? 그래~ 어여 내놔 봐~
-셋에 뛰는 겁니다.
-뭔 상의가 이렇게 길어~ 왜. 없어? 오빠가 꿔줄까?

셋 전에 터진 개소리에 벌컥 솟으려는 머리통을 옆구리에 끼랴, 난데없는 헤드락에 잠시 벙 찐 양아치 일동에게 씩 웃어주랴 오늘 계속 바쁜 시진이다. 시진은 버둥거리는 대영을 팀장답게, 간신히 제압하며 이 사단을 낸 양아치1에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취한 오빠가 주사가 좀 심한, 쫌 가만 쫌!, 양아치 여러분은 그만 가는 게 어떨까?
-...어, 어쭈? 이쁜이가 배짱 터는데?

옆구리의 버둥거림이, 이러다 한 대 치겠다시피 격렬해져 시진은 포기하듯 힘을 풀고 만다. 허리를 곧추세운 취객의 위용에 양아치들이 움찔 물러나는 새, 시진은 슬그머니 대영에게 속삭였다.

-민간입니다, 민간인. 산처럼 쌓일 보고서가 진정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너.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

도망가라고 외치는 본능을 애써 무시한 양아치1이, 하! 허세가 분명한 코웃음을 친다. 싸움은 쪽수라고 믿는 모양인데... 에효. 멍청이들. 

-뭐, 뭐 눈에 힘만 주면 만사오케이냐? 이 씹새끼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깝쳐?!
-알면 후회할 텐데.

시진의 중얼거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양아치1의 멱살을 잡아챈 대영의 낯빛이 단단히 굳어 있다. 그때 그 얼굴이었다. 우르크 지진현장에서 진소장을 후려치기 직전의 얼굴. 

-이 사람한테 한 말 다시 해보라고. 두 번 말 안한다.
-....이, 이 씨발새끼가! 야! 뭐해! 쳐!

패거리를 돌아보는 양아치1이 너무 애처롭다. 광포한 기류에 다가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패거리는 또 어떻고. 하지만 제일 어쩌지 싶은 건 역시 사고치기 일보 직전의 서대영이다. 쯧쯧. 시진은 어깰 으쓱이며 대영의 어깨를 짚었다.

-됐습니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사과해라. 정중히.
-사과아? 지금 내가 안 이쁘다는 겁니까? 아니 어디가 얼마나 더 이뻐야 이쁜 겁니까 그럼! 이 정도면 너무 차고 넘치지. 안 그러냐?
-...뭐, 뭐?

잔뜩 긴장한 양아치1에게 다가선 시진이 웃는 그대로 귓가에 속삭인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말하고 꺼져. 이 남자 더 열 받게 하면 평생 잊지 못할 밤, 반드시 만들어 줄 테니까.

달콤한 협박에 전의를 상실한 양아치1이 아홉 글자를 더듬더듬 외치자 만족스럽게 끄덕인 시진이 대영의 손을 떼어낸다.

-자자. 달밤의 만남은 없던 걸로 치고, 니들은 여기서 다신 경제활동 하지 말고. 나 없을 때 이 사람한테 걸리면 몸 안의 뼈가 몇 갠지 아주 정확히 알게 될 테니까? 가, 얼른.

말 끝나기 무섭게 줄행랑치는 양아치들을, 저것들 군대는 다녀왔나, 한 번 걸려라, 진짜 등등의 감회를 섞어 감상하던 시진의 몸이 홱 돌려진다. 

-왜 봐줍니까, 저런 새끼들. 그런 말 들으며 왜 참고 있습니까.
-별 일도 아닌데 열을 내고 그럽니까.
-별 일 아닙니까, 이게? 

잔뜩 열 받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시진이 빙그레 웃는다. 대영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웃습니까, 지금?
-좋네요. 이런 일로 화내는 서대영.
-말 돌리지 마십,
-땅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생사를 보장할 수 없는 작전지도 아니고. 서대영이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
-별 일 아닙니다. 당신하고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한, 전 다 괜찮습니다.

대영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이 계단은 대영에게 늘 거지같은 장소였다. 여기서 캄캄한 세계로 들어갔고,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잃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이런 곳마저 벅차게 바꿔 버린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었을까. 대영은 시진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배알도 없습니까.
-없이 지낸 지 한참 됐습니다.
-....다리는. 괜찮습니까.
-속풀이 한 번 제대로 하십니다. 내일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지 말입니다.
-전설의 훈련생이 엄살이 심합니다.
-근데,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뒷감당 어떻게 하시려고 이런 일을 벌였습니까? 윤명주, 술독, 취한 척 뺑이 돌리기. 한 백 년은 놀려도 될 것 같은데?
-...백 년은 너무하지,
-그럼 이백 년?
-백 년이 확실합니다.

언제나처럼 바짝 엎드려주는 대영이지만, 안다. 서대영이 항상 져준다는 거. 미안해 한다는 거. 유시진을 망칠까봐, 만에 하나 걸림돌이 될까봐 늘 조금씩 망설이고 있다는 거. 하지만 모르겠지, 이 남자는. 이쪽도 망설이긴 마찬가지라는 거. 시진은 대영의 눈동자를 깊게 바라본다.

-벌충 확 줄일 수 있는 제안이 있는데. 듣겠습니까.
-..예감이 안 좋은데요.
-싫으면 말구요.
-듣겠습니다. 저 진짜 아까부터 듣고 싶었지 말입니다.
-그럼... ...유시진, 해보십시오.
-.......예?
-까짓 백 년 다 까겠습니다.
-......
-중대장님. 팀장님. 서대영한테 내 이름 내내 그거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구요. 하지만 지금은, ...한 번쯤은 괜찮지 않습니까, 유시진이어도.

슬쩍 내리까는 눈동자는 시진이 드물게 긴장하고 있다는, 아니,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언제 어느 때나 유쾌하고 여유로운 유시진. 대영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연을 구해온 날. 시진은 어두운 회랑에 홀로 앉아 옛 전우의 사진을 태우며 울고 있었다. 아마 늘 그렇게 울었으리라. 기댈 어깨도 없이 숨어서. 언제나 혼자. ...견딜 수 없이 슬픈 밤이었다. 
 
-...아무튼 서상사는 계산이 안 서는 사람입니다. 백 년 한 방인데 그게 뭐 어렵다고. 됐습니다, 됐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주십시오.
-그러지 마십시오.
-아니 이 양반이 진짜. 내가 엄살이 없어서 잘 모르시나본데 지금 다리 무지 아픕니다. 팔도 저리구요. 근데 꼴랑 라면 한 그릇에 이렇게 치사하게,
-유시진.
-!!!
-...내가 정말 나쁜 놈이긴 한 가보다. 천하의 유시진이 이름 하나에 놀라는 거 보면. ...조건 같은 거 걸지 마. 백 년 동안 그냥 나 놀려. 놀리면서 바라는 거, 원하는 거 다 말해. 대신 ...앞으로 혼자 울지 마라. 그거 너무 아프더라.

시진은 한참 만에 천천히 대영을 끌어안았다. 단단히, 든든히 마주 안는 팔에 어쩐지 목이 멘다.
바람이 불었다. 봄내음이 나는 바람이었다.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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