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정.


-오늘도?
-예.
-집에는.
-안 계십니다.

새삼 7년 전 사건을 캐고 다니질 않나, 화살사건 증인을 데려가지 않나, 이틀을 혼자 분주하더니 또 이틀은 홀연히 사라져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소화 쪽일 리는 없고 (만에 하나 린을 아주 뻥 차주기로 정강이를 내주며 기어이 약조받았다.) 남은 건 하나. 원은 짜증스레 한숨을 삼킨다.

-왕전과 판부사네 혼담이 어찌 되어 간다고?
-곧 납채일을 잡는다 들었습니다.

판부사의 재산과 수사공이라는 순혈의 왕족, 거기다 호시탐탐 세자위를 노리는 왕전이라. 정신이 빠질 만도 하다. 그놈의 왕전이야 그렇다 쳐도 수사공까지 이리 나올 줄은 원도 몰랐으니. 린과 꼭 닮은 그 온화한 얼굴로 다른 생각을 품었던가. 입이 쓰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마마마께서 린을 부르지 않은 게 확실해?
-원성전에 드시진 않았답니다.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야?! 혼자 뭘 하겠다고!!

기어이 터진 고성에 장의가 빠르게 대응한다.

-더 찾아보겠습니다.
-찾는 즉시 데려와.
-예.

장의가 나가고 원은 크게 숨을 토한다. 알 수 없는 불안이 심장을 짓눌러 왔다.

**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장인어른.

은영백은 억지미소를 그리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수사공께서 직접 걸음하셨는데 아이가 편칠 않아 나오질 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제 곧 사돈될 사이에 경어가 넘치십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버지.

왕전의 너스레에도 왕영은 어두운 빛을 감추지 못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염치보다 더한 것도 버릴 수 있는 게 아비라지만 기뻐할 수는 없는 혼사였다. 왕비의 원대로 그 발 아래 엎드려 끝날 일이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리 할 것이다. 허나 그러실 분이 아니셨다. 단이를,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여식을 공녀로 보내겠다 언제고 다시 겁박하겠지. ..그런 일을 두 번 겪게 할 순 없다. 왕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 등청하기 전 한 번은 뵈어야 할 것 같아 늦은 밤 결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먼저 찾아 뵈야 하는 것을.. 송구합니다.
-..피차간 불편한 자리인 것을 압니다.
-아버지.
-넌 가만 있거라.

전이 불만 가득 입을 다문다. 왕영은 자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따님의 혼사를 이렇게 치루게 되어 섭섭하실 겁니다. 아비에게 딸자식은 아들과는 또 다르니까요.
-댁에도 영애가 있으시지요.
-예. 아직 어린 아이나 따님께 좋은 말벗이 되어 줄 겁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귀하게 대하며 아낄 터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왕전과 송인의 협박으로 여기까지 왔으나 지금이라도 산이를 도망시켜야지 않나 하루하루 피가 마르던 은영백이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숙이는 찰나.

-들으실 말이 더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내에 세 사람이 각기 굳어진다. 나흘 새 입술이 허옇게 일어난 린이었다. 벌떡 일어난 전이 격하게 소리를 높인다.

-이 무슨 무례냐!

린은 전과 눈도 맞추지 않고 은영백에게 걸어간다. 왕영은 다급히 린을 막아섰다.

-린아.
-일전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왕린이라 합니다. 결례인 줄 알지만 오늘 꼭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린아!
-이놈이!!

성질을 이기지 못한 전이 린의 멱살을 틀어쥔다. 린은 그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여기 제 부친께서 내일 혼사의 청을 올리면
-린아 제발!!
-판부사께서는 역도가 되십니다.
-나와. 당장 나오지 못!!!

끌어내려는 전을 거칠게 뿌리친 린이 성큼 은영백에게 다가선다. 두 눈을 질끈 감는 왕영 옆에서 은영백이 퍼렇게 질려 더듬거렸다.

-역...도. 역도라니요.
-이 댁 아가씨께서 몸종과 신분을 바꿔 공녀차출을 피하셨지요. 그 일로 제 형님께 협박을 당하셨구요. 허나 이 혼인으로 아가씨를 지킬 순 없습니다.
-네 이!

린에게 날라가던 전의 손이 허공에서 붙들린다. 전은 험악히 옆를 돌아보다 화색을 띠었다. 송인이었다.

-밤중에 소란이 크십니다.
-마침 잘 왔네. 이놈이
-일단 진정하십시오.
-몰래 엿듣기라도 한 게요?

송인은 왕영에게 공손히 손을 모은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주제 넘게 끼어들었습니다.
-나가주시오. 집안일이오.
-제 책임도 있는 집안일이지요.

노려보는 왕영에게 부드럽게 미소한 송인이 린을 향해 선다.

-저하께 가신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습니다.

린은 그대로 은영백을 응시했다.

-전하를 뵐 것입니다.
-7년 전 일은 크게 개의치 않으실 테고 사냥터 일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하께서 곤란해지실 텐데요.
-이들은 저하의 화살을 훔쳐 전하를 시해하려 했습니다.
-그 자리에 공자가 계셨지요. 저하께선 공자가 한 모든 일은 나의 명이다, 하셨구요.
-제게 명을 내린 것은 이 자입니다.

여유롭던 송인이 멈칫 전을 돌아본다. 벌겋게 달아올라 눈을 피하는 꼴이 이미 아는 얘기인 듯했다. 쯧, 속으로 혀를 찬 송인이 다시 미소를 그린다.

-믿으실 전하가 아니십니다.
-전하께선 그 누구도 온전히 믿지 않으십니다.
-저하와 린 공자 사이를 모르는 이도 있습니까.
-처음부터 이 자의 명으로 저하 곁을 지켰습니다.
-왕족인 공자께 제가 말입니까.
-이 자가 다음 왕으로 세울 사람이 제 형님이랍니다. 왕의 아우가 된다는데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이놈이 정말!!!

다시금 뻗어오는 손을 막으며 송인이 갸웃 고개를 기울인다.

-이제와 그런 말, 저하의 명이라는 편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린은 잠시 말을 멈춘다. 때 아닌 웃음이 났다. 왕비께선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한 번도 믿지 않으셨는데 이 자는 어떻게든 믿으려 하니... ...참 우스운 일입니다. 저하.

-전하가 계신 추국장에서 아가씨를 내 여인이라 했습니다. 내 여인을 뺏기게 생겼는데 어느 사내인들 이성을 잃지 않겠습니까. 역모를 고변하여 내 여인과 나의 목숨을 구걸할 참이라, 그리 고할 겁니다.

린은 그제야 송인과 눈을 맞춘다.

-이쯤이면 믿으시겠습니까.

신음을 흘리는 왕영과 납덩이처럼 굳어진 은영백, 제 호흡을 감당치 못하고 씨근덕대는 전 사이에서 송인의 웃음이 차츰 잦아든다. 긴 침묵이 흐르고. 송인이 입을 떼었다.

-이 혼사가 깨지면 이 댁 아가씨는 물론 아가씨를 비호했던 저하께서도 무사치 못하십니다.
-그 일을 발설해도 나는 전하를 뵐 겁니다.
-...집안의 몰락은 상관치 않으십니까.
-진짜 역모를 일으키는 것보다야 지금 사라지는 편이 낫겠지.
-단이 아가씨는요. 그 역시 상관, 없으십니까.

그 날. 품에 안은 단이는 여전히 작았다. 하도 작아 저 작은 것이 저리 울다 어머니처럼 눈뜨지 못할까 방 앞을 지키던 어린 날처럼. 그래서 그런가. 철나기 전에는 유독 저를 따라다녔다. 나가려 하면 옷자락을 붙잡고 어찌나 울어대던지 난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달래는 재주없는 저 대신 눈이 퉁퉁 부은 누이를 안아든 사람이 있었다. 누굴 안아본 적이 없어 두른 팔에 힘을 줘야 하는지 빼야 하는지 눈으로 묻다가 어느 새 울음을 그친 단이가 빤히 보면 이 귀여운 것이 왜 네 집에만 있냐며 성을 내셨지...
린은 그만 생각을 접는다. 눈 앞에 있는 자는 한가로이 추억을 떠올리며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왕비마마는 아가씨를 반드시 공녀로 보낼 분입니다.

이 아이를 보낸다 하면 혼사를 더 앞당길 테지. 혼례가 있는 집에서 그 누이를 빼가진 못한다 콧노래라도 부르며. 허나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니? 니놈 형이 혼례를 치르고 나면 남은 오라비라곤 니놈 하나 뿐이니. 그때는 니가 나를 막을 테냐? 니 누이를 끝까지 지킬 수 있다 보느냐?
린은 차분히 송인을 직시한다.

-내 결정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개자식!!!

전이 린을 후려치고 벽으로 밀어붙이는데,

-나리!!

은영백이 정신을 놓은 왕영을 부축하며 소리를 높인다.

-아버지!!

전은 황급히 왕영을 살폈다. 그새 마른 얼굴에 식은땀이 한가득이다. 은영백은 가복 구형에게 왕영을 업혀 침대가 있는 뒷방으로 향했다. 전은 악에 받친 눈으로 린을 쏘아본다.

-그 잡종을 지키고자 누이를 팔아먹고 아버지를 쓰러트려? 니놈이 사람이냐?!!
-...아버지께 가보십시오.
-어디서 역겹게 아들노릇, 사람노릇을 하려는 게야!!! 꺼져. 가서!! 원하는 대로 니 그 잘난 세자의 개노릇이나 해!!!

씩씩거리며 전이 나가고. 한참 린을 물끄러미 보던 송인이 손수건을 건넨다.

-입가에 피가 나십니다.
-...혼담은.
-피부터 닦으시지요.
-대답부터 들어야겠는데.

맑은 눈이 고집스럽기도 하다. 이분을 주군으로 모셨으면 속 꽤나 끓였겠군. 송인은 두 손을 들어보이며 빙긋 웃었다.

-졌습니다.
-물리겠다고.
-이리 사생결단하시니 어쩌겠습니까.

굳은 어깨에서 조금 힘이 빠진다. 린은 별다른 말없이 몸을 돌렸다.

-저하께 가십시오. 단이 아가씨 일, 방도가 있을 겁니다.

송인은 다시 마주한 눈에 선선히 웃어 보인다.

-저하께선 벗의 곤란을 외면할 분이 아니시지요.
-저하께 허튼 수작
-누구라도 다칠까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 세월. 모르지 않습니다. 공자만큼 오래 저하를 지켜봤으니까요. ...아까운 분입니다.
-피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 말을 하려는 게군.
-......
-그러니 그대는 저하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거다.

송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힌다.

-아버지와 형제를 두 번 외면하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무슨 뜻
-세 번은 하실 수 있습니까. 서른 번, 삼백 번,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어떻습니까. 그래도 지금처럼 하실 수 있겠습니까.
-......
-피란 그런 것입니다.

린은 원을 떠올린다. 부왕과 왕비 사이, 원과 고려 사이 그 틈바구니에 선 원이 처음 내린 명. 백성이 있는 곳에 데려가 다오. 린은 그 명으로 원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

-하실 수 있다면. 저하를 따를 것이오?
-저하께 너무 고통스러운 일일 터. 끝까지 견뎌주길 바라는 것은 불충이겠지요.

그래. 그럴 것이다. 한 번도 이리 심장이 찢기니 두 나라의 혈통인 저하께 너무 가혹한 일일 것이다. 허나 그 고통을 아주 오래 전부터 스스로 짊어지려 하신 분이다. 해서 부왕께 부러 엎드리고 궐 밖에 금과정을 만들며 준비하고 계신 거다. 누구는 고려의 핏줄이라, 누구는 원의 핏줄이라 안 된다는 그 분이 누구보다 열심히, 그걸 알아주지도 않는 자들을 위해... 그 모습을 더 오래 지켜 보고 싶었는데. 린은 희미하게 미소한다.

-나는 저하께 불충한 자군.
-.....그렇습니까.
-단이 일은 신경쓰지 마시오. 그대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린이 나가고, 주지 못한 손수건을 쥔 송인은 린이 서 있던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린은 은영백의 집을 벗어나기 전 발이 묶였다. 작은 화원을 중간쯤 지날 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날 다 들었던 거네.

마주치지 않길 바랐지만 각오한 일이기도 하다. 린은 천천히 돌아섰다.

-나도 다 들었는데.
-......
-우리 할 얘기가 좀 많을 거 같네요. ...왕린 공자님.

항시 밝던 얼굴에 어둠이 내려앉은,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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