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때문에 우주에서 나 혼자 파죠... 능력자님 소환진 구합니다..


*원성전


깊은 밤. 주변을 물린 왕비가 린을 주시한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선 저 아이. 참으로 재밌는 아이다.

'이 아이를 보낸다 하면 혼사를 더 앞당길 테지. 혼례가 있는 집에서 그 누이를 빼가진 못한다 콧노래라도 부르며. 허나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니? 니놈 형이 혼례를 치르고 나면 남은 오라비라곤 니놈 하나 뿐이니. 그때는 니가 나를 막을 테냐? 니 누이를 끝까지 지킬 수 있다 보느냐?'
'그 혼사 막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어찌 믿고.'
'...어찌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무슨 명이든 따르겠느냐?'
'명하십시오.'
'독로화로 가거라.'
'......'
'네가 상국에 있으면 니 애비도 허튼 짓은 못할 테지. 대신 니 누이는 평안케 해주마.'
'......'
'어찌 하겠니?'

거절할 줄 알았다. 아니. 받아들이는 척 딴짓을 하리라 확신했다. 혼사만 치루면 저도, 지 누이도 당장은 무사한 바. 판부사의 재산을 얻어 세자의 목을 조일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저놈을 감싸고 도는 세자가 드디어 현실에 눈뜨게 되면 이 치욕이야 무슨 수로든 갚아주면 그만이었다. 헌데 정말 혼담을 깼단 말이지. 왕비는 차를 따르며 비소한다.

-세자라도 만났느냐?
-저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어째서. 니놈을 그리 아끼시니 한걸음에 나서주셨을 것을.

그러실까 말하지 못했습니다. 린은 속으로 답하며 고개를 숙인다. 왕비는 한 모금 차를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놈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확인할 때까지 넌 이곳을 나가지 못한다.

거짓을 고한 것이면 네놈의 그 세 치 혀. 이 자리에서 잘라낼 것이니. 린을 향한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

금과정에서 뜬눈으로 아침을 맞은 원이 찻잔을 들다 말고 장의를 올려본다.

-혼담이 깨져?
-진관에게 확인했습니다.

하룻밤 새 말이지.. 원은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형과 교대하고 진관은 그만 오라 해.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단정한 미간이 멈칫 구겨진다.

-단이가 아픈가?
-...예.
-얼마나.
-누워 계신 지 여러 날 되었다 합니다.

어릴 적부터 고뿔엔 심하게 앓던 아이다. 열이 높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그 작은 손을 꼭 붙들고 몇날 며칠 밤을 새던 린이었는데.. 못난놈. 지 누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딜 헤매고 다니는 거야. 원은 한숨을 토하며 일어난다.

-가자.

돌아오는 답이 없다.

-왜.
-지금 가시면 괜한 오핼 사십니다.
-환궁하는데 무슨 오해.
-아... 수사공 댁에 가신다는 줄 알고..
-린네 집에 불났는데 부채질 하랴?
-아, 아닙니다.
-어의한테 약이나 뺏어다 줘.
-예.
-린은 그만 찾고. ..볼 일 끝났으니 지가 지 발로 오겠지.

원은 어두운 낯으로 침소를 나선다. 판부사의 재산을 쉽게 포기할 리 없는 왕전이다. 갑자기 우애가 솟아 린의 말을 들었을 리도 없고.. 대체 내게 말도 없이 혼자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원이 지그시 입술을 물 때였다.

-에퉤퉤퉤!!!

요란한 소리에 걸음이 멈춘다. 염복과 개원이 객잔 구석에 앉아 호들갑을 떨고 있다.

-어후 짜, 어후.. 아니 이걸 사람 먹으라고 만든 거야?
-그러게 그 처자 요리라곤 해본 적이 없을 거라니까.

원이 장의를 돌아본다.

-누가 새로 왔나?
-알아보겠습니다.

둘에게 가는 장의를 무심히 향하던 눈이 순간 가늘어진다. 창 밖 너머 보이는 저 등. 저거... 원은 부엌간으로 잰걸음을 놓았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자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숯검댕이를 묻히고 콜록대는.. ..정말 소화잖아? 원은 황당함과 반가움이 뒤섞여 얼떨떨 발을 내딛는다.

-여기서 뭐하냐?
-불땝니다. 아주머니가 만두 찐다고 하셔서요.
-..왜 그래?
-눈이 너무 매워서요. 잠깐만요.
-말투가 왜 그러냐고.

눈가를 훔치던 산이 벌떡 일어난다.

-어, 어.. 너..어였어? 아주머닌 줄 알았..지.
-내 목소리가 아주머니.
-..얼핏 비슷..해.

원은 피식 웃으며 산에게 다가섰다.

-술을 동이째 마시고 인사도 없이 간 줄 알았더니.
-자는 거 깨우기 뭣해..서.
-아까부터 말끝은 또 뭐냐. 말하는 법 까먹었어?

산은 어설프게 입고리를 올리며 목을 더듬는다.

-연기가 하도 나서 목이 좀 아프네.
-산에는 안 간 거야, 드디어 쫓겨난 거야.

...이러니. 이러니 꿈에서라도 짐작이나 했겠냔 말이다. 산은 속으로 한숨을 삼킨다.

-막상 가려니 아쉬워져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돈을 다 써버렸어.
-얼마나 마셨길래.
-...취해서 이리 올 만큼.

웃음을 터트리는 원을 보며 산은 어젯밤 만났던 얼굴을 떠올린다.

'그쪽이 수사공 댁 셋째 공자시면 한천은.. 그 분이 맞습니까.'
'저하께선 당분간 모르셨으면 합니다.'
'...감사를 해야 할 지 화를 내야 할 지 헷갈리는데, 일단 좀 묻겠습니다. 이 혼담 깨지면 공자의 누이분, 단이 아가씨. 정말 공녀로 가게 됩니까?'
'...아가씨께서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니오. 내가 걱정할 일이죠. 나 때문에'
'금과정에 가 계십시오. 여기보단 안전할 겁니다.'
'가요. 저하께 가서'
'저하께서 곤란해지십니다.'
'공자 누이가 공녀로 가는 건 안 곤란할 거 같아요? 그 사람 이거 알면 눈 뒤집히고도 남는다고. 그 성질머리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 판국에 지금 웃어요?'
'저하랑 닮으셔서요. 저하도 화나시면 아가씨처럼 험한 말 하시거든요.'
'...이봐요.'
'아니.. 것도 맘대로 못하셨나.'
'이것 봐요.'
'보기보다 참는 게 많은 분이에요. 웃는 거, 우는 거 내키는 대로 못하고 사셨어요.'
'일어나요. 지금 나랑 저하께'
'곁에 있어주세요. 아가씨랑 있을 때.. 많이 웃으시니까. ...부탁합니다. 산이 아가씨.'

-아 진짜. 내가 너 때문에 웃는다.

그 얼굴에 가슴이 미어져 지붕 너머로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넋을 뺐으니... ...어쩐다.

-웃음값이니 있고 싶은 만큼 있어. 안 가면 더 좋고. 아. 요리는 절대 하지 마라. 

알면 왜 곤란해지는지, 어느 만큼 곤란해지는지 알지 못하니 말하기가 쉽지 않다. 혹 방도를 다 마련해두었는데 망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러게 정신차리고 잡아서 죄다 들어야 했는데..

-...소화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속여왔다 하면 나도 속였으니 퉁치고 넘어가자 웃을까. 실망하진 않을까. 상처받진 않을까. 이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내까지 내게 드러냈는데..

-소화야!
-네!!!

화들짝 뱉은 말에 원의 볼이 또 실룩인다. 산은 얼굴을 붉히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따, 딴생각 하느라..
-뭐. 술 생각?
-...그래. 간절하다.
-역시 청출어람.

장난스레 웃는 낯이 전보다 상해있다. 그 사람 때문일 거다. 그리 아까워하고 그리 애달파하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동이 하나 내주라 할 테니 마시
-나...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
-....
-뭔데 표정이 이래. 무슨 일 있어?

산이 더듬더듬 말문을 떼려는 찰나. 장의가 다급히 뛰어든다. 원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찾았어?

장의의 고갯짓에 원이 빠르게 산의 어깨를 짚는다.

-얘긴 나중에 해야겠다. 그놈 일이라.

바람처럼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산은 길게 한숨을 토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다.

**

궁처 일각. 밀서를 읽은 송인이 헛웃음을 짓는다.

-원성전이라..

어리석은 분. 그리 겪고도 왕비를 모른단 말인가. 품 안에 손수건이 무게를 더하는 듯했다.

**

김내관은 쩔쩔매며 의복을 챙기는 중이다. 세자전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내내 쩌렁쩌렁 화를 내고 있는 원 때문이었다.

-원성전에 드는 것을 어찌 한 놈도 못 봐!!
-저하.. 제발
-모자란 놈. 어마마마께서 상찬이라도 하실까봐?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내겐 사흘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말 한 마디 없이!!
-저하아.. 성음을 조금만

묶지 못한 허리띠를 낚아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원의 뒤를 김내관이 급히 따른다. 조금이라도 진정하셔야 하는데. 초조함에 헛발을 내딛을 정도였으나 초조함으로 치면 원이 더했다. 원성전 가는 길이 그렇게 멀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치없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

게다가 이런 말을 하는 이 자를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소처럼 아바마마 옆에나 붙어있을 것이지. 원은 어깨가 들썩이도록 한숨을 토하며 뒤돌아선다. 언제 보아도 꺼림칙한 아바마마의 책사. 왕전과 이 빌어먹을 혼담을 주도한, 밀직사 당후관 송인.

-그대와 내가 이런 인사를 주고 받을 사이었던가?
-신하된 자로서 어찌 저하의 평안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아. 신하. 미안하오. 그대가 나의 신하인 걸 오늘 처음 알아서.
-전하께서도 몹시 안타까워하십니다.
-나 역시 왕가의 경사가 깨져 심기가 몹시 편치 못하오. 나의 평안을 바라는 신하 앞에서 울음이라도 터트리기 전에 이만 가봐야겠지?
-아직 모르십니까.

돌아서던 원의 눈에 그제야 의아함이 깃든다. 김내관도, 저만치 몸을 숨기고 있는 장의도, 소식을 듣고 달려온 진관도 마찬가지다. 송인은 속웃음을 지으며 당황한 척 고개를 숙였다.

-제가 괜한 말을 하였습니다.

원은 그 척을 꿰뚫고도 비웃지 못한다. 이 자가 굳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수작을 떠는 이유. 원은 주먹을 쥐며 송인을 향한다.

-그 괜한 말이 무엇인가.
-....알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대가 말하면 알고 계시게 되겠지.

송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수사공 댁 아가씨께서..
-단이가 왜.
-......
-세자인 내가 묻고 있다!!

송인은 성마른 얼굴을 내심 조소하며 송구한 목소리를 내었다.

-공녀명단에 오르셨다 합니다.

기겁하는 김내관과 납덩이처럼 굳은 장의, 진관의 시선 속에서 호흡마저 잊고 있던 원이 맹수의 기세로 돌아선다.
고개 숙인 송인의 입가로 비틀린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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