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슨 의식의 흐름.. ㅎㅎ
*두타산
산은 거뭇한 눈가를 비비며 크게 하품을 한다. 어젯밤 잠자리가 편치 못했다. 집보다 더 집같은 곳인데 이불보 밑에 돌멩이라도 깔아둔 양 밤새 뒤척인 것이다.
-...암튼 괜한 소린 해가지고..
두타산에 오는 내내 비연의 말이 멤돌았다. 연정이니 연심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됐다. 다른 이를 연모하는데, 게다가 그 연심을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는데. 그런데. 말이 안 되니 그냥 치워버리면 될 텐데 머리 한 켠에서, 마음 한 켠에서 치워지지가 않았다. 장난스레 웃는 낯이나 딴사람처럼 사납던 눈이나 실없는 농담 같은 것들이 스치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 사이로, 달과 별 사이로 불쑥 불쑥 튀어올랐다. 지금처럼.
-미치겠네, 정말!
산은 머리를 헤집고 허리춤을 뒤진다. 잘록한 호리병이 늘씬하게 손에 잡혔다. 스승의 말대로 술만한 약이 없으니 얼른 마시고 이 어이없는 병을 고쳐버려야지. 단숨에 반을 비운 산은 캬하- 부러 길게 탄성을 토하며 입가를 훔쳤다. 그런데. 눈에 이상한 것이 비친다. 절대 여기서 보일 리 없는 자들.
-..취했나?
동이째 마셔도 안 취하는데 설마하니 이것 좀 마셨다고 헛게...하던 산은 순간 벌떡 일어난다. 말에서 뛰어내려 가까이 오는 얼굴로 절로 손가락이 들렸다.
-어...어떻..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린과 달리 원은 어이없단 듯 산을 훑어본다.
-환영인사가 뭐 이러냐. 이틀 꼬박 달려온 사람한테.
벙쪄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산에게 원이 부러 험악히 인상을 구긴다.
-달랑 한 줄 남기고 도망을 쳐? 내가 그 '도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눈앞에서 빤히 보고도?
-저도 아가씨도 도망은 아닙니다. 저는 못 갔고 아가씨는 원래 두타산이 집이시니.
뒤에서 태연히 받아치는 린에게 원이 눈을 부라린다.
-어쭈.
-틀린 말입니까?
-넌 늘 맞는 말이지. 열받게.
뚱하게 마주보던 두 사람이 웃어버릴 때까지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던 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둘을 본다. 다시 봐도 원이 맞고 린이 맞았다. 아니 여길 어떻게. 왜. 좀 과하게 짧은 인사긴 했으나 이리 득달같이 달려올 이유가.. 산은 버뜩 다급해진다.
-무슨 일 있습니까?! 린 공자, 아님 저하께서 곤란해지신 거에요? 해서 예까지 도망오신 겁니까?
이번엔 두 사람이 벙찐다. 원은 진지하게 산의 이마를 짚었다.
-흠.. 열은 없는데.
귓가가 옅게 달아오른 산이 얼른 원의 손을 치운다. 원은 빙그레 웃으며 산의 이마를 툭 쳤다.
-일은 니가 일이지. 얼굴도 안 보고 가고 무슨 벗이 이래.
-...서신 남겼잖아요..
귓가를 만지작거리는 산과 그런 산에게 환히 웃는 원. 린은 조용히 돌아섰다.
-어디 가?
의아한 시선을 비껴 고삐를 쥔 린이 말을 묶어놓겠단 핑계로 멀어진다. 린의 등을 한참 바라보고 선 원은 또 다른 얼굴이었다. 린의 뒤에서만, 린에게만 짓는 표정이다. 산은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술이 이제야 정말 취하는 듯 했다.
**
몰래 원성전을 빠져나온 최내관은 휘갈기듯 밀서를 써내렸다. 쓰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공녀로 보내겠다 서슬 퍼런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런 황당한.. 오랜 세월 지켜봤으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원성은. 어쨌든 빨리 송인에게 알려야 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하루 자리를 비운다는 전언이 있었으나 한시가 급했다. 최내관은 대전 나인에게 은밀히 밀서를 건넸다. 옥부용. 그녀라면 송인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
-궐에 널린 게 약초 아니냐.
-소인만 아는 곳에서 나는 것이온데 아침 이슬을 머금을 때 거두어야 효험을 보옵니다. 전하의 불면증을 덜어낼 귀한 것이오니 허락해주소서.
-그래.. 네 말대로 요새 부쩍 잠이 오지 않아. 자고 일어나도 찌뿌둥한 게 잔 거 같지도 않고. ...헌데 꼭 네가 가야 하느냐? 다른 놈을 보내면 되지 않아.
부용은 쉬이 출궁을 허하지 않는 충렬에게 살풋이 슬픈 미소를 지어보인다.
-약은 정성이 반이옵니다. 아무리 귀하다 한들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소인 비록 미천하나 전하를 위해 성심을 다할 수 있게 부디 하루 보내주소서. 힘들어하시는 전하를 뵈옵기 죄스럽고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옥구슬 같은 눈에 물기가 어린다. 충렬은 깊이 한숨을 지으며 부용의 손을 쓸어 잡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눈물을 거두거라.
-송구하옵니다..
-이 넓은 궁에 진정 나를 위하는 것은 부용이 너 하나뿐이구나.
-전하..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듯 내리깐 눈이 일순 차게 가라앉았다.
**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돌아보긴 뭘 돌아봐. 봐야 다 산인데.
-말씀 나누세요.
말을 돌본다, 인사를 드린다, 요깃거릴 얻어 온다, 한시도 가만 있질 않는다. 원은 잡을 새도 없이 멀어지는 등에 한숨을 토하며 산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또 저런다, 또. 암튼 지가 무슨 진짜 호위무사라도 되는 줄 알아.
말과는 달리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산은 한숨을 삼키며 풀을 잡아 뜯었다.
-아무래도 계속 오해 중인가 본데요.
-오해? 무슨 오해?
연심이든 뭐든 이 정체불명의 감정이 꽤 치사스러운 놈인 것만은 확실하다. 산은 괜히 딴 데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린 공자가 저하께서 저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
침묵이 길다. 산은 슬쩍 원을 돌아봤다. 온통 나 놀랐소 써놓은 얼굴이다.
-...내가 널? 린이, 내가 널 좋아하는 줄 안다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데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그냥, 정말 의외라는 듯 동그란 눈동자가 엄청 얄밉다. 산은 제 짜증에 제가 지쳐 호리병을 꺼내 홀짝였다. 세자의 앞에서 꽤나 무례한 태도였으나, 될 대로 되라지.
-술을 왜 니가 마셔. 내가 마셔야겠구만.
허탈히 웃는 게 정말 꼴보기 싫어 산은 떠안기듯 술병을 건네며 충동적으로 말을 던졌다.
-여러 사람 피곤한데 그냥 고백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잠시 멈칫하던 원이 술을 넘기고 쓰게 웃는다.
-말 참 쉽다.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지금도 좋아하는 거 넘치게 보이는구만.
-내가?
-와서 지금까지 나랑 말하면서도 눈은 내내 공자한테 가 있습니다. 아까 화전 먹을 땐, 아주 뚫어지겠더만요.
-..무례가 체질이구만.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투로 타박한 원이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그랬던 것도 같다. 평상시보다 더 린에게 집중하고 참견하고 화가 나고 안타깝고...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리라 포기했던 마음을 산에게, 어머니에게 말했기 때문일까. 한 번 말로 뱉고 나니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걸까. 숨기지 못할 만큼, 숨겨지지 않을 만큼... 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술을 넘긴다.
산은 산대로 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허탈하고 복잡해졌다. 암튼 이 사람은, 안 보면 낫겠지 했는데 불쑥 나타나 사람 속은 다 뒤집고.. ...이런 식으로 남에게 탓을 돌리는 자신이 낯설고 이상하고 싫은데, 그런데도 깊은 구석 어젯밤처럼 돌멩이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아무데로나 굴러서 괜히 심통이나 내고 짜증이나 내고, 안 그래도 힘들 사람 이런 얼굴이나 하게 하고... 제 머릿속이나 마음이나 빡빡 씻어버리고 싶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던 그날 이전으로. 해서 이 사람 옆에 있어도 이렇게 아프지 않고, 이렇게 화나지 않고, 미안하지 않고, 속상하지 않았으면..
-넌 정말 별 일 없는 거냐.
-....
-갑자기 두타산 온 거. 원래 오기로 한 거 온 게 맞냐고.
-..말 돌리는 건 정말 일품이십니다.
-말 돌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는 거지.
..두근. 심장이 또 말썽이다.
-신분 바꾼 거. 판부사와 얘기해서 제자리로 돌려놓을 길 찾을 거다. 그때까지만 여기 있어. 불안해 하지 말고.
산은 무릎을 모아 가슴께로 당기며 중얼거리듯 답한다.
-...사방 걱정할 거 투성인 분이 뭔 제 걱정까지 하세요.
-하지, 그럼. 내 벗인데.
..벗. 그 말을 하던 원이 왜 그리 아파보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아픈 말이었구나.. 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뭐야. 그새 술이 이리 약해진 거야?
장난스레 어깨를 치는 원에게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부용이 개경 인근 폐가로 들어선다. 거미줄이 즐비한 입구를 지나 나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방에 다다라, 붉은 입술이 흐린 호선을 그렸다.
-..이곳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단단한 등은 놀라지도 않는다. 마치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태연히 돌아보는 얼굴에 미소마저 띠워져 있어 부용은 지그시 입술을 물며 몽수를 거뒀다.
-어찌 왔느냐.
당신께서 계시니 왔지요. 부용은 진심을 삼키며 송인에게 다가간다. 어깨 너머로 노란 소국 몇 송이가 보였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꽃입니다.
송인은 무심히 소국을 돌아봤다. 누이는 이 꽃을 유난히 아꼈다. 필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지켜보다 떨어진 꽃을 서책 사이에 끼워놓고 오래도록 간직하였다. ..배신한 정인이 처음 준 꽃이라 했다. 송인은 소국 하나를 움켜쥔다. 푸스스 떨어지는 꽃잎을 차게 내려다보는 송인을, 부용은 타박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그리 죽은 누이를 미워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아픔을 감히 이해한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같이 아파하고 싶었다. 부용은 허리를 숙여 꽃잎을 줍는다. 송인은 그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래 전 오늘. 이 집에서 누이가 죽었다. 아니. 죽은 누이와 함께 이 집이 죽었다. 어린 시절의 송인도 이 집과 함께 묻고 버렸다. 모두 폐허 속에 던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 서 있는 자신이 이 폐허와 다를 게 무언가. 벗어나고자 버렸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듯 허망하고 허탈하여 이 작은 꽃에 화풀이나 하고 말았으니. 송인은 쓰게 웃어버린다.
부용은 꽃잎을 줍다 말고 송인을 올려다봤다. 저 얼굴. 요새 종종 뵈었다. 충렬의 앞에서, 대전에서 답지 않게 딴 생각에 빠지시다 꼭 끝에 저리 웃으셨지.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 애써 보지 않으시려는 듯. ...왕전과 은산의 혼사가 깨진 밤부터였다. 품에 넣은 손수건을 때때로 꺼내보며 아주 낯설어진 것이. 부용은 꽃잎을 마저 주어 품에 넣고 서신을 꺼낸다.
-최내관의 밀서입니다.
-무슨 일로.
-보시지요.
밀서를 읽은 송인의 낯이 설핏 굳는다.
-...세자빈을?
-전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내명부의 일이니 아셔도 하는 수 없겠지. 게다가 원성이 그리 마음 먹었다면 누구도 바꿀 수 없을 터. ...재미나신 분이로군.
밀서를 구겨 잡은 손에 힘줄이 돋는다. 부용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틀 남았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 혼사는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지나치게 총명한 왕세자가 세자빈이라는 날개를 얻으면 후일을 도모하기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그러니 답은 정해진 셈인데. 누구보다 빨리 판단하고 결정해온 사람이 드물게 답을 하지 못한다. 부용은 쓸쓸히 미소하며 송인을 바라봤다.
-그 분이.. 걸리십니까.
송인의 눈이 스치듯 굳는 것을 부용은 차라리 보지 못하였으면 했다. 허나 이 분만을 바라보고, 이 분이 바라는 일이 이뤄지기만을 기원하며 산 세월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감히 내 사람이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끝까지 가길 원했다. 해서 이 분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 그것만이 부용의 소원이었다.
-가지셔야겠거든 가지십시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어찌 망설이십니까.
다시 입을 다무는 송인의 앞에서 부용은 보이지 않게 손을 쥐었다. 품에 넣은 꽃잎이 심장에 비수처럼 박히는 듯했다.
**
-어찌 개경에 있을 때보다 얼굴 보기가 더 힘들다.
아예 문을 막고 서는 통에 나가지도 못하게 됐다. 린은 괜히 이부자리를 살피다 문에 기대 빤히 보는 원을 슬쩍 돌아봤다.
-..뭐 할 말 있으십니까.
-뭐 할 말은 내가 아니라 니가 있어야지. 여기 일하러 왔냐? 왕족 때려치고 두타산 제자로 들게?
-저하께서 데려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데려왔으면 나랑 있어야지. 왜 혼자 빨빨거리며 바쁘냐고. 술 한 잔 안 하고 말 몇 마디 안 하고, 아니 산이는 그렇다 치고 나는 종일 왜 피하는데?
-제가 저하를 피하긴 왜 피합
-내가 은산을 좋아한다, 그리 알았다며, 너. 그래서 둘이 있으라고 자리 피해준 거 아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꼴이 웃기기도 하고 속이 터지기도 하여 원은 반쯤 찡그리고 린의 이마를 탁 쳤다. 아 소리도 안 내고 동그래지는 눈이 참, 누굴 닮아 이리 답답한지 모를 일이다.
-허튼 생각 혼자 하는 취미. 좀 버리면 안될까? 그리 생각했으면 그리 생각했다 나한테 말을 하든가. 이 입은 나한테 따질 때만 쓰는 거냐?
-....그런 걸 제가 어찌 묻습니까.
-왜 못 물어. 평소에는 따박따박 잘만 하는 놈이.
-...제가 또 뭘 그렇게 따졌다고.
-이봐. 지금도 봐. 이러면서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도 않고. 내가 니 덕에 아주 명이 준다, 줄어.
린은 괜히 이마를 문지르다 조심히 원을 살핀다.
-...그럼 정말 다른 분을.. 마음에 두신 겁니까.
아래 위로 한참을 훑어보던 원이 설레 고갤 젓곤 침상에 대자로 누워버린다. 린은 그 앞에 서서 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앉으란 소리 없이는 앉지도 않으니. 이놈을 누가 말릴까. 원은 반쯤 일어나 린의 손목을 잡아 옆에 앉힌다.
-이제 그냥 좀 앉기도 해라. 누가 본다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저하는 저하십니다.
딱 왕린다운 대답이다. 원은 피식 웃고는 린을 올려다봤다.
이리 보고 있으면 문득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어질 때도 있었다. 아니. 너무 바라다 보니, 바라지도 못할 만큼 원하다 보니 차라리 그렇게 믿어버릴까 한 적도 많았다. 허나 잃을까봐, 내가 너를 잃을까봐, 혹은 이미 나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네가 네 자신마저 잃게 될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만큼 다 내던지고 차라리 안아버리고 싶었다.
어릴 때는 그저 벗으로 아꼈으나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린이 온전히 벗이었던 적은, 원에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눈이 마주칠 때, 손이 스칠 때, 환히 웃을 때, 지독히도 고집스런 눈을 할 때, 어머니께 상처 입고도 미련스레 미소지을 때.. 어느 날은 날이 꼬박 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린 대신 안을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린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만약 지금 말한다면. 수 백, 수 천 번 삼켰던 그 말을, 산의 말처럼 그냥 해버리고 만다면... ...원은 린의 손목을 힘주어 잡는다.
-..린아.
-듣고 있습니다.
-...돌아가지 말까.
-어디를 말입니까.
-궐.
-...역시 원성전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만약 세자가 아니면. ..그래도 너 내 옆에 있을 거냐.
린의 눈이 덜컥 굳는다.
-세자위가.. 걸렸단 말씀입니까.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난 낯이 신하의 것인지, 벗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원은 알지 못한다. 다만. ...다만. 원은 한숨을 삼키며 린의 볼을 잡았다.
-저하. 장난 치시지 마시고,
-내가 연모하는 다른 사람.
-......
-....찾아내봐라. ..멍청아.
꽉 쥐었다 놓는 손이 제법 매섭다. 이내 돌아눕는 원의 뒤에서, 린은 뭐라 말이 나오지도,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이때껏 이런 장난은 수도 없이 많았다. 머리를 흐트러트리거나 혹은 정리해주거나 뒤에서 와락 안거나 밀거나,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하던 일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원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도 원과 어떻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품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 이 마음이 더 커지지 않게, 언제라도 놓을 수 있게, 해서 되도록 평생 이 분을 섬길 수 있게, 그렇게만 애썼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뭐라고.
두근두근.
린은 제 심장소리에 놀라 쫓기듯 방을 나선다. 찬바람이 볼을 스칠 즘에야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알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ing
*두타산
산은 거뭇한 눈가를 비비며 크게 하품을 한다. 어젯밤 잠자리가 편치 못했다. 집보다 더 집같은 곳인데 이불보 밑에 돌멩이라도 깔아둔 양 밤새 뒤척인 것이다.
-...암튼 괜한 소린 해가지고..
두타산에 오는 내내 비연의 말이 멤돌았다. 연정이니 연심이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됐다. 다른 이를 연모하는데, 게다가 그 연심을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하는데. 그런데. 말이 안 되니 그냥 치워버리면 될 텐데 머리 한 켠에서, 마음 한 켠에서 치워지지가 않았다. 장난스레 웃는 낯이나 딴사람처럼 사납던 눈이나 실없는 농담 같은 것들이 스치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 사이로, 달과 별 사이로 불쑥 불쑥 튀어올랐다. 지금처럼.
-미치겠네, 정말!
산은 머리를 헤집고 허리춤을 뒤진다. 잘록한 호리병이 늘씬하게 손에 잡혔다. 스승의 말대로 술만한 약이 없으니 얼른 마시고 이 어이없는 병을 고쳐버려야지. 단숨에 반을 비운 산은 캬하- 부러 길게 탄성을 토하며 입가를 훔쳤다. 그런데. 눈에 이상한 것이 비친다. 절대 여기서 보일 리 없는 자들.
-..취했나?
동이째 마셔도 안 취하는데 설마하니 이것 좀 마셨다고 헛게...하던 산은 순간 벌떡 일어난다. 말에서 뛰어내려 가까이 오는 얼굴로 절로 손가락이 들렸다.
-어...어떻..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예상보다 과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린과 달리 원은 어이없단 듯 산을 훑어본다.
-환영인사가 뭐 이러냐. 이틀 꼬박 달려온 사람한테.
벙쪄서 입만 벌리고 있는 산에게 원이 부러 험악히 인상을 구긴다.
-달랑 한 줄 남기고 도망을 쳐? 내가 그 '도망'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눈앞에서 빤히 보고도?
-저도 아가씨도 도망은 아닙니다. 저는 못 갔고 아가씨는 원래 두타산이 집이시니.
뒤에서 태연히 받아치는 린에게 원이 눈을 부라린다.
-어쭈.
-틀린 말입니까?
-넌 늘 맞는 말이지. 열받게.
뚱하게 마주보던 두 사람이 웃어버릴 때까지 이게 꿈인가 생신가 하던 산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둘을 본다. 다시 봐도 원이 맞고 린이 맞았다. 아니 여길 어떻게. 왜. 좀 과하게 짧은 인사긴 했으나 이리 득달같이 달려올 이유가.. 산은 버뜩 다급해진다.
-무슨 일 있습니까?! 린 공자, 아님 저하께서 곤란해지신 거에요? 해서 예까지 도망오신 겁니까?
이번엔 두 사람이 벙찐다. 원은 진지하게 산의 이마를 짚었다.
-흠.. 열은 없는데.
귓가가 옅게 달아오른 산이 얼른 원의 손을 치운다. 원은 빙그레 웃으며 산의 이마를 툭 쳤다.
-일은 니가 일이지. 얼굴도 안 보고 가고 무슨 벗이 이래.
-...서신 남겼잖아요..
귓가를 만지작거리는 산과 그런 산에게 환히 웃는 원. 린은 조용히 돌아섰다.
-어디 가?
의아한 시선을 비껴 고삐를 쥔 린이 말을 묶어놓겠단 핑계로 멀어진다. 린의 등을 한참 바라보고 선 원은 또 다른 얼굴이었다. 린의 뒤에서만, 린에게만 짓는 표정이다. 산은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술이 이제야 정말 취하는 듯 했다.
**
몰래 원성전을 빠져나온 최내관은 휘갈기듯 밀서를 써내렸다. 쓰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공녀로 보내겠다 서슬 퍼런 지가 얼마나 됐다고 이런 황당한.. 오랜 세월 지켜봤으나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원성은. 어쨌든 빨리 송인에게 알려야 했다. 개인적인 용무로 하루 자리를 비운다는 전언이 있었으나 한시가 급했다. 최내관은 대전 나인에게 은밀히 밀서를 건넸다. 옥부용. 그녀라면 송인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
-궐에 널린 게 약초 아니냐.
-소인만 아는 곳에서 나는 것이온데 아침 이슬을 머금을 때 거두어야 효험을 보옵니다. 전하의 불면증을 덜어낼 귀한 것이오니 허락해주소서.
-그래.. 네 말대로 요새 부쩍 잠이 오지 않아. 자고 일어나도 찌뿌둥한 게 잔 거 같지도 않고. ...헌데 꼭 네가 가야 하느냐? 다른 놈을 보내면 되지 않아.
부용은 쉬이 출궁을 허하지 않는 충렬에게 살풋이 슬픈 미소를 지어보인다.
-약은 정성이 반이옵니다. 아무리 귀하다 한들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소인 비록 미천하나 전하를 위해 성심을 다할 수 있게 부디 하루 보내주소서. 힘들어하시는 전하를 뵈옵기 죄스럽고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옥구슬 같은 눈에 물기가 어린다. 충렬은 깊이 한숨을 지으며 부용의 손을 쓸어 잡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그만 눈물을 거두거라.
-송구하옵니다..
-이 넓은 궁에 진정 나를 위하는 것은 부용이 너 하나뿐이구나.
-전하..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듯 내리깐 눈이 일순 차게 가라앉았다.
**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돌아보긴 뭘 돌아봐. 봐야 다 산인데.
-말씀 나누세요.
말을 돌본다, 인사를 드린다, 요깃거릴 얻어 온다, 한시도 가만 있질 않는다. 원은 잡을 새도 없이 멀어지는 등에 한숨을 토하며 산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또 저런다, 또. 암튼 지가 무슨 진짜 호위무사라도 되는 줄 알아.
말과는 달리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산은 한숨을 삼키며 풀을 잡아 뜯었다.
-아무래도 계속 오해 중인가 본데요.
-오해? 무슨 오해?
연심이든 뭐든 이 정체불명의 감정이 꽤 치사스러운 놈인 것만은 확실하다. 산은 괜히 딴 데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린 공자가 저하께서 저를 좋아하는 줄 압니다.
침묵이 길다. 산은 슬쩍 원을 돌아봤다. 온통 나 놀랐소 써놓은 얼굴이다.
-...내가 널? 린이, 내가 널 좋아하는 줄 안다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는데 은근히 기분이 나쁘다.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그냥, 정말 의외라는 듯 동그란 눈동자가 엄청 얄밉다. 산은 제 짜증에 제가 지쳐 호리병을 꺼내 홀짝였다. 세자의 앞에서 꽤나 무례한 태도였으나, 될 대로 되라지.
-술을 왜 니가 마셔. 내가 마셔야겠구만.
허탈히 웃는 게 정말 꼴보기 싫어 산은 떠안기듯 술병을 건네며 충동적으로 말을 던졌다.
-여러 사람 피곤한데 그냥 고백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잠시 멈칫하던 원이 술을 넘기고 쓰게 웃는다.
-말 참 쉽다.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지금도 좋아하는 거 넘치게 보이는구만.
-내가?
-와서 지금까지 나랑 말하면서도 눈은 내내 공자한테 가 있습니다. 아까 화전 먹을 땐, 아주 뚫어지겠더만요.
-..무례가 체질이구만.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투로 타박한 원이 잠시 생각에 빠진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그랬던 것도 같다. 평상시보다 더 린에게 집중하고 참견하고 화가 나고 안타깝고...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리라 포기했던 마음을 산에게, 어머니에게 말했기 때문일까. 한 번 말로 뱉고 나니 겉잡을 수 없이 커진 걸까. 숨기지 못할 만큼, 숨겨지지 않을 만큼... 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술을 넘긴다.
산은 산대로 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허탈하고 복잡해졌다. 암튼 이 사람은, 안 보면 낫겠지 했는데 불쑥 나타나 사람 속은 다 뒤집고.. ...이런 식으로 남에게 탓을 돌리는 자신이 낯설고 이상하고 싫은데, 그런데도 깊은 구석 어젯밤처럼 돌멩이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아무데로나 굴러서 괜히 심통이나 내고 짜증이나 내고, 안 그래도 힘들 사람 이런 얼굴이나 하게 하고... 제 머릿속이나 마음이나 빡빡 씻어버리고 싶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던 그날 이전으로. 해서 이 사람 옆에 있어도 이렇게 아프지 않고, 이렇게 화나지 않고, 미안하지 않고, 속상하지 않았으면..
-넌 정말 별 일 없는 거냐.
-....
-갑자기 두타산 온 거. 원래 오기로 한 거 온 게 맞냐고.
-..말 돌리는 건 정말 일품이십니다.
-말 돌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는 거지.
..두근. 심장이 또 말썽이다.
-신분 바꾼 거. 판부사와 얘기해서 제자리로 돌려놓을 길 찾을 거다. 그때까지만 여기 있어. 불안해 하지 말고.
산은 무릎을 모아 가슴께로 당기며 중얼거리듯 답한다.
-...사방 걱정할 거 투성인 분이 뭔 제 걱정까지 하세요.
-하지, 그럼. 내 벗인데.
..벗. 그 말을 하던 원이 왜 그리 아파보였는지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아픈 말이었구나.. 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뭐야. 그새 술이 이리 약해진 거야?
장난스레 어깨를 치는 원에게 정말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검은 비단으로 얼굴을 가린 부용이 개경 인근 폐가로 들어선다. 거미줄이 즐비한 입구를 지나 나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방에 다다라, 붉은 입술이 흐린 호선을 그렸다.
-..이곳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단단한 등은 놀라지도 않는다. 마치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태연히 돌아보는 얼굴에 미소마저 띠워져 있어 부용은 지그시 입술을 물며 몽수를 거뒀다.
-어찌 왔느냐.
당신께서 계시니 왔지요. 부용은 진심을 삼키며 송인에게 다가간다. 어깨 너머로 노란 소국 몇 송이가 보였다.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는 꽃입니다.
송인은 무심히 소국을 돌아봤다. 누이는 이 꽃을 유난히 아꼈다. 필 때를 기다리며 기쁘게 지켜보다 떨어진 꽃을 서책 사이에 끼워놓고 오래도록 간직하였다. ..배신한 정인이 처음 준 꽃이라 했다. 송인은 소국 하나를 움켜쥔다. 푸스스 떨어지는 꽃잎을 차게 내려다보는 송인을, 부용은 타박하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그리 죽은 누이를 미워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아픔을 감히 이해한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같이 아파하고 싶었다. 부용은 허리를 숙여 꽃잎을 줍는다. 송인은 그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오래 전 오늘. 이 집에서 누이가 죽었다. 아니. 죽은 누이와 함께 이 집이 죽었다. 어린 시절의 송인도 이 집과 함께 묻고 버렸다. 모두 폐허 속에 던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여기 서 있는 자신이 이 폐허와 다를 게 무언가. 벗어나고자 버렸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듯 허망하고 허탈하여 이 작은 꽃에 화풀이나 하고 말았으니. 송인은 쓰게 웃어버린다.
부용은 꽃잎을 줍다 말고 송인을 올려다봤다. 저 얼굴. 요새 종종 뵈었다. 충렬의 앞에서, 대전에서 답지 않게 딴 생각에 빠지시다 꼭 끝에 저리 웃으셨지. 무언가를 떨쳐내려는 듯, 애써 보지 않으시려는 듯. ...왕전과 은산의 혼사가 깨진 밤부터였다. 품에 넣은 손수건을 때때로 꺼내보며 아주 낯설어진 것이. 부용은 꽃잎을 마저 주어 품에 넣고 서신을 꺼낸다.
-최내관의 밀서입니다.
-무슨 일로.
-보시지요.
밀서를 읽은 송인의 낯이 설핏 굳는다.
-...세자빈을?
-전하께선 아직 모르십니다.
-...내명부의 일이니 아셔도 하는 수 없겠지. 게다가 원성이 그리 마음 먹었다면 누구도 바꿀 수 없을 터. ...재미나신 분이로군.
밀서를 구겨 잡은 손에 힘줄이 돋는다. 부용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이틀 남았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이 혼사는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지나치게 총명한 왕세자가 세자빈이라는 날개를 얻으면 후일을 도모하기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그러니 답은 정해진 셈인데. 누구보다 빨리 판단하고 결정해온 사람이 드물게 답을 하지 못한다. 부용은 쓸쓸히 미소하며 송인을 바라봤다.
-그 분이.. 걸리십니까.
송인의 눈이 스치듯 굳는 것을 부용은 차라리 보지 못하였으면 했다. 허나 이 분만을 바라보고, 이 분이 바라는 일이 이뤄지기만을 기원하며 산 세월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감히 내 사람이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가고자 하는 길을 끝까지 가길 원했다. 해서 이 분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 그것만이 부용의 소원이었다.
-가지셔야겠거든 가지십시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면 어찌 망설이십니까.
다시 입을 다무는 송인의 앞에서 부용은 보이지 않게 손을 쥐었다. 품에 넣은 꽃잎이 심장에 비수처럼 박히는 듯했다.
**
-어찌 개경에 있을 때보다 얼굴 보기가 더 힘들다.
아예 문을 막고 서는 통에 나가지도 못하게 됐다. 린은 괜히 이부자리를 살피다 문에 기대 빤히 보는 원을 슬쩍 돌아봤다.
-..뭐 할 말 있으십니까.
-뭐 할 말은 내가 아니라 니가 있어야지. 여기 일하러 왔냐? 왕족 때려치고 두타산 제자로 들게?
-저하께서 데려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데려왔으면 나랑 있어야지. 왜 혼자 빨빨거리며 바쁘냐고. 술 한 잔 안 하고 말 몇 마디 안 하고, 아니 산이는 그렇다 치고 나는 종일 왜 피하는데?
-제가 저하를 피하긴 왜 피합
-내가 은산을 좋아한다, 그리 알았다며, 너. 그래서 둘이 있으라고 자리 피해준 거 아냐.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무는 꼴이 웃기기도 하고 속이 터지기도 하여 원은 반쯤 찡그리고 린의 이마를 탁 쳤다. 아 소리도 안 내고 동그래지는 눈이 참, 누굴 닮아 이리 답답한지 모를 일이다.
-허튼 생각 혼자 하는 취미. 좀 버리면 안될까? 그리 생각했으면 그리 생각했다 나한테 말을 하든가. 이 입은 나한테 따질 때만 쓰는 거냐?
-....그런 걸 제가 어찌 묻습니까.
-왜 못 물어. 평소에는 따박따박 잘만 하는 놈이.
-...제가 또 뭘 그렇게 따졌다고.
-이봐. 지금도 봐. 이러면서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도 않고. 내가 니 덕에 아주 명이 준다, 줄어.
린은 괜히 이마를 문지르다 조심히 원을 살핀다.
-...그럼 정말 다른 분을.. 마음에 두신 겁니까.
아래 위로 한참을 훑어보던 원이 설레 고갤 젓곤 침상에 대자로 누워버린다. 린은 그 앞에 서서 원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앉으란 소리 없이는 앉지도 않으니. 이놈을 누가 말릴까. 원은 반쯤 일어나 린의 손목을 잡아 옆에 앉힌다.
-이제 그냥 좀 앉기도 해라. 누가 본다고.
-누가 보든 안 보든 저하는 저하십니다.
딱 왕린다운 대답이다. 원은 피식 웃고는 린을 올려다봤다.
이리 보고 있으면 문득 같은 마음이 아닐까 싶어질 때도 있었다. 아니. 너무 바라다 보니, 바라지도 못할 만큼 원하다 보니 차라리 그렇게 믿어버릴까 한 적도 많았다. 허나 잃을까봐, 내가 너를 잃을까봐, 혹은 이미 나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네가 네 자신마저 잃게 될까봐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만큼 다 내던지고 차라리 안아버리고 싶었다.
어릴 때는 그저 벗으로 아꼈으나 자신의 마음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린이 온전히 벗이었던 적은, 원에게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눈이 마주칠 때, 손이 스칠 때, 환히 웃을 때, 지독히도 고집스런 눈을 할 때, 어머니께 상처 입고도 미련스레 미소지을 때.. 어느 날은 날이 꼬박 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원한다면 누구라도 린 대신 안을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린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만약 지금 말한다면. 수 백, 수 천 번 삼켰던 그 말을, 산의 말처럼 그냥 해버리고 만다면... ...원은 린의 손목을 힘주어 잡는다.
-..린아.
-듣고 있습니다.
-...돌아가지 말까.
-어디를 말입니까.
-궐.
-...역시 원성전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다.
-..내가 만약 세자가 아니면. ..그래도 너 내 옆에 있을 거냐.
린의 눈이 덜컥 굳는다.
-세자위가.. 걸렸단 말씀입니까.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난 낯이 신하의 것인지, 벗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원은 알지 못한다. 다만. ...다만. 원은 한숨을 삼키며 린의 볼을 잡았다.
-저하. 장난 치시지 마시고,
-내가 연모하는 다른 사람.
-......
-....찾아내봐라. ..멍청아.
꽉 쥐었다 놓는 손이 제법 매섭다. 이내 돌아눕는 원의 뒤에서, 린은 뭐라 말이 나오지도,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이때껏 이런 장난은 수도 없이 많았다. 머리를 흐트러트리거나 혹은 정리해주거나 뒤에서 와락 안거나 밀거나,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하던 일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원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도 원과 어떻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품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하루 하루 이 마음이 더 커지지 않게, 언제라도 놓을 수 있게, 해서 되도록 평생 이 분을 섬길 수 있게, 그렇게만 애썼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뭐라고.
두근두근.
린은 제 심장소리에 놀라 쫓기듯 방을 나선다. 찬바람이 볼을 스칠 즘에야 온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알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렸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