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마가 덕심태클...OTL
*길
산은 금과정을 나와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두타산에서 이리 걸으면 막힌 속이 좀은 나아졌는데. 마음이 더 가라앉기만 하다. 다 잘 되었는데. 공자도 무사하고 단이 아가씨 일도 해결되고 하기 싫은 혼사도 깨지고.. 헌데 왜 이리 답답할까. 가슴께를 쓸어내리던 산은 문득 품에 것을 꺼내보았다.
가리개. 그 날 참 많이도 마셨다. 향부터 남다르기에 어찌 이런 귀한 것을 얻었냐니까 저하께서 감사의 표시로 내줬다 했지. 그땐 무슨 감산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마시기에 바빴는데. 눈 앞에 있는 자가 그 '저하'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수인이 그 놈이 취한 건 딱 한 번 봤는데, 열 셋이었나 넷이었나, 암튼 좀 속상한 일이 있었거든? 그게 맘이 쓰였는지 만날 집에 가라 매정하던 놈이 자고 가라며 술까지 내주는 거라. 한 반 시진 마셨나. 이놈이 갑자기 잔을 탁! 내려놓더니 막 째려봐요. 그러더니 일어나서 비틀비틀 나가. 나 참 황당해서. 따라나갔지. 나갔더니,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렇게 울더라고.'
'주사가 우는 거구나. 그거 골치 아픈데.'
'...그러게. 아프더라. 엄청.'
그리 말하는 낯이야말로 한참을 앓은 모양이라 그날도 잠시, 지금처럼 가슴이 따끔거렸었다. 이유도 모를 통증이었다.
막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산은 정처없이 걸음을 옮긴다. 뒤에서 검은 복면이 따르는 것도 모른 채.
**
가복인 듯한 사내가 구르듯 나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선다. 평복의 여인을 마치 윗사람 대하는 양. ..판부사 은영백의 집. 황급히 닫힌 대문을 다시 한 번 눈에 새긴 검은 복면이 지붕 위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알겠다.
검은 복면이 물러가고. 후라타이는 조용히 미간을 구긴다. 혹 다시 명하실까 신분만 확인해두려 한 것인데. ...판부사 은영백. 오래 전 부인을 잃고는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는다 들었다. 몸종인가 하기에는 부하가 보았다는 가복의 태도가 이상하고. ...좀 더 알아봐야 하나. 내전을 돌아보는 후라타이의 얼굴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
-비연아.
짐을 싸던 비연이 산을 돌아본다. 아버지께 한 보따리 걱정을 사서 그런가 맑은 낯이 유난히 어두웠다.
-나.. 좀 이상해.
-뭐가요. 누가 또 뭐라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께를 꾹 누르는 산에 비연이 아연실색 다가앉는다.
-아, 아프세요? 얼마나, 언제부터요.
은영백의 지병이 떠올라 입이 마르는 비연을 두고 산은 멍하니 술잔만 바라본다.
-누가 자꾸 생각이 나. 했던 말, 표정.. 그때마다 여기가 답답하고 아프고, 그만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안 멈춰져.. ..나 왜 이러지.
-어휴.. 놀랐잖아요, 아가씨. 큰일 난 줄 알았네.
-그치? 별 일 아니지?
비연은 작게 웃는다.
-우리 아가씨 이제 어른 되시려나보네. 연심을 다 품으시고.
-....뭐?
산은 벙 입을 벌리다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생각나고 아프시다면서요. 맘이 맘대로 안 되신다면서요.
-그렇다고 무슨... 말도 안 돼. 내내 봤는데. 잠깐 그런건데. 어떻게 갑자기..
-몇 날 며칠 때 맞춰야 연심인가요. 이유도 없이 불쑥. 그것도 연심이에요.
-하지만..
벗이었다. 도울 수 없어 안타깝고 대신해 화가 나고 밤잠 설치게 걱정되는. 신분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능글거림과 실없는 미소가 다 견디는 걸로 비쳤다. 공자 앞에 망부석처럼 앉은 등이 꼭 홀로 울던 밤 같았다. 온 맘을 내주고도 어쩜 그리 혼자인지...
'...어찌 견디려고.'
'지금까지처럼 잘. 내가 또 인내심이 발군이다.'
지끈. 묵직히 심장이 저려온다. 산은 꾹 입술을 물었다. 그런 산을 안타까이 살피던 비연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혹.. 그 분이세요? 수사공께서 오신 날 함께 계시던..
혼사가 깨진 밤, 산과 마주 서 있는 사내를 먼발치서 보았다. 우리 아가씨께 아주 정중하고 깍듯하여 누군지 궁금하던 분. 아무나 따라나설 리 없는 아가씨가 함께 대문을 나선 분. 나리께 말씀드리자 되려 걱정을 조금 더신 빛을 띠셨다. 믿을 수 있는 분이란 뜻이다.
비연은 대답없이 생각에 빠진 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대신 갇혀있다 미안해하지만 비연은 오히려 산이 애처로웠다. 몇 년에 한 번 집에 오셔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편히 부르지도 못하고, 당신의 처지를 알아 혹 해를 입을까 누구에게나 조금씩 거리를 두고.. 이 정 많은 분이 어찌 외롭지 않을까.
비연은 발개지는 눈가를 감추려 얼른 일어나 마저 짐을 꾸린다. 옷가지를 챙겨 넣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 길이길. 해서 우리 아가씨, 아가씨로 돌아와 연정 품은 그분과 다른 이들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실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비연의 뒤에서 산은 창 밖을 건너본다. 그날과 달리 이리도 달이 밝은데, 온통 어둠이었다.
**
오랜만에 단잠을 잔 린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실눈을 뜨다 화들짝 일어난다. 바로 앞에서 턱을 괴고 빤히 보는 누구 덕분이었다.
-뭐..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했는데.
적반하장 뻔뻔한 물음에 말문이 막힌다. 원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보는 것도 안 돼?
-..아침부터 심통이십니까.
-심통 아니고 아침도 아니고. 해가 중천이다.
-예?
놀라는 얼굴에 미려한 미간이 짙게 찌푸려진다.
-그간 잠도 안 잤지?
다급히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손이 멈칫 느려진다.
-...잘 만큼은 잤습니다.
-너 아주 거짓말이 늘었다?
하긴. 원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 린은 작게 헛기침하며 원을 마주본다. 빤한 눈이 삐딱했다.
-눈 밑은 거뭇하고 볼은 홀쭉하고 입술은 다 갈라지고. 볼 만하다, 볼 만해.
-...심통 아니라면서요.
-심통 아니고 짜증.
-뭐 다릅니까.
부루퉁하던 원이 피식 웃는다.
-못생겨져서 아닌 줄 알았는데 꼬박꼬박 따지는 거 보니 왕린 맞네.
참 나, 작게 따라 웃던 린의 시선이 원의 입술에 머문다. 원은 부러 말문을 돌렸다.
-근데 산이 얘는 어디서 술 먹고 뻗었나? 잔뜩 화내고 가선 안 보인다?
-또 다투...
소화가 아닌 '산'. 린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아가씨께 들으셨습니까.
-너도 안다며. 왜. '또' 모르는 척 할 걸 그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짐을 덜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안도하는 얼굴을 뜯어보던 원이 불퉁한 목소리를 뱉었다.
-아. 니 형한테 전해라.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내가 손댄 것도 화나 죽겠는데 어디 감히 손을 대?
-..별 말씀을 다 하셨나 봅니다.
-입 다물면 무슨 사단 나는지 딱 봤잖아.
잠시 사이를 둔 린이 침착한 눈을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원은 속으로 한숨을 물었다. 배알없는 놈.
-환궁하셔야죠.
-또 잔소리냐.
-김내관이 걱정할 겁니다.
-팔자지, 뭐.
-...마마께서도 그러실 거구요.
원의 눈이 설핏 굳어진다.
-...저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니가 할 말 아니야.
-저하. 그러지 마시고
원은 말을 끊으며 일어난다.
-배고프다.
-..저하.
-밥 먹고 단이한테 가자. 보고 싶을 거잖아. 누이라면 끔찍한 놈이.
-......
-아. 아니다. 그 얼굴 보면 나만 잡겠다. 난 암튼 단이 걔가 젤 무서워. 누이 없는 세자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꺾을 고집이 아니다. 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먼저 드시고 계십시요. 씻고 가겠습니다.
-씻을 기운은 있고? 도와줄까?
-됐습니다.
린이 나가고 원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딴사람처럼 가라앉은 낯이었다. 눈앞에 어마마마가 어른거렸다. 항시 당당하던 어깨가 그 날은 참으로 작으셨지...
그렇게 저린 속을 달래고 있길 얼마. 밖이 시끄러운가 싶더니 문 밖에서 장의가 고한다.
-저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문을 여니 장의의 뒤로 진관과 대치하고 있던 후라타이가 짧게 목례를 건넨다. 원은 저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원성전에 무슨 일 있나?
의외의 반응에 진관과 장의는 눈짓을 주고 받으며 한 발 물러난다. 후라타이는 무겁게 원을 직시했다.
-왕비마마께서 모셔오라 하십니다.
...쓰러지진 않으셨군. 원은 속으로 안도하며 제 모습을 찾는다.
-무슨 일로.
-모시라는 명만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오래 참으셨지. 원은 무심함을 가장하며 몸을 돌린다.
-기다리든가. 막 점심을 하려던 참이라.
-모시겠습니다.
정중한 어투와 달리 버티면 끌고라도 가겠단 눈이다. 장의와 진관은 후라타이를 가로막으며 검집을 쥐었다. 발검자세를 취하는 후라타이도 여느 때와 다른 기세다. 팽팽해진 공기가 막 찢어지려는 찰나, 곧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뭣들 하는 건가. 저하의 안전이다.
계단에서 내려온 린의 눈에 작은 질책이 서려있다. 장의와 진관, 후라타이는 상대를 살피며 검집에서 손을 뗐다. 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린을 돌아본다.
-물 떨어진다.
이 판국에 젖은 머리 타박이라니. 우리 저하께선 참 세심하시기도 하지. 작게 고갤 젓는 장의에 진관이 피싯 속웃음을 지었다.
-말은 더럽게 안 듣지. 말리고 나오면 밥 없을까봐?
-다녀 오십시요.
-이리 내.
린의 손에 들린 백포를 뺏으려던 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백포가 딸려오지 않았다.
-이리 내라니까.
-부르신다지 않습니까.
-누가 안 간대? 밥 먹고
-같이 갈까요.
두 눈이 고집스레 맞부딪친다.
-...채비하겠습니
-협박에 재미 붙였군.
딱딱한 목소리에 린의 눈이 떨어지다 다시 들린다.
-오실 때까지 있으라는 데 있겠습니다.
한참을 대치하던 끝에 원의 눈매가 신경질적으로 구겨진다.
-못된 것만 늘어서는.
-......
-..망할놈.
원은 거칠게 돌아섰다.
-장의는 날 따르고 진관은 저 망할놈이랑 밥 먹어. 집에 다녀온다면 같이 가고. 저놈 형이 얼쩡대면 쫓아내. 한 대 패주든가.
진관은 입 안으로 답을 굴리며 린의 눈치를 본다. 원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소화도 찾아봐. 저놈이랑 같이. 혼자 두지 말고 매달고 다녀. 괜히 단이한테 감기 옮기지 않게 저 망할 머리카락 싹 다 말리는 거 확인하고.
장의는 다시 절레 고갤 젓고 후라타이와 원을 따른다.
-시전 들러 유밀과 사가. 단이 화 푸는덴 그만한 거 없어.
나가기 직전 내놓은 말에 린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다가 고개를 숙인다. 입술 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i...n.....g
*길
산은 금과정을 나와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두타산에서 이리 걸으면 막힌 속이 좀은 나아졌는데. 마음이 더 가라앉기만 하다. 다 잘 되었는데. 공자도 무사하고 단이 아가씨 일도 해결되고 하기 싫은 혼사도 깨지고.. 헌데 왜 이리 답답할까. 가슴께를 쓸어내리던 산은 문득 품에 것을 꺼내보았다.
가리개. 그 날 참 많이도 마셨다. 향부터 남다르기에 어찌 이런 귀한 것을 얻었냐니까 저하께서 감사의 표시로 내줬다 했지. 그땐 무슨 감산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마시기에 바빴는데. 눈 앞에 있는 자가 그 '저하'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수인이 그 놈이 취한 건 딱 한 번 봤는데, 열 셋이었나 넷이었나, 암튼 좀 속상한 일이 있었거든? 그게 맘이 쓰였는지 만날 집에 가라 매정하던 놈이 자고 가라며 술까지 내주는 거라. 한 반 시진 마셨나. 이놈이 갑자기 잔을 탁! 내려놓더니 막 째려봐요. 그러더니 일어나서 비틀비틀 나가. 나 참 황당해서. 따라나갔지. 나갔더니,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렇게 울더라고.'
'주사가 우는 거구나. 그거 골치 아픈데.'
'...그러게. 아프더라. 엄청.'
그리 말하는 낯이야말로 한참을 앓은 모양이라 그날도 잠시, 지금처럼 가슴이 따끔거렸었다. 이유도 모를 통증이었다.
막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산은 정처없이 걸음을 옮긴다. 뒤에서 검은 복면이 따르는 것도 모른 채.
**
가복인 듯한 사내가 구르듯 나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선다. 평복의 여인을 마치 윗사람 대하는 양. ..판부사 은영백의 집. 황급히 닫힌 대문을 다시 한 번 눈에 새긴 검은 복면이 지붕 위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알겠다.
검은 복면이 물러가고. 후라타이는 조용히 미간을 구긴다. 혹 다시 명하실까 신분만 확인해두려 한 것인데. ...판부사 은영백. 오래 전 부인을 잃고는 아무나 집에 들이지 않는다 들었다. 몸종인가 하기에는 부하가 보았다는 가복의 태도가 이상하고. ...좀 더 알아봐야 하나. 내전을 돌아보는 후라타이의 얼굴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
-비연아.
짐을 싸던 비연이 산을 돌아본다. 아버지께 한 보따리 걱정을 사서 그런가 맑은 낯이 유난히 어두웠다.
-나.. 좀 이상해.
-뭐가요. 누가 또 뭐라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슴께를 꾹 누르는 산에 비연이 아연실색 다가앉는다.
-아, 아프세요? 얼마나, 언제부터요.
은영백의 지병이 떠올라 입이 마르는 비연을 두고 산은 멍하니 술잔만 바라본다.
-누가 자꾸 생각이 나. 했던 말, 표정.. 그때마다 여기가 답답하고 아프고, 그만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안 멈춰져.. ..나 왜 이러지.
-어휴.. 놀랐잖아요, 아가씨. 큰일 난 줄 알았네.
-그치? 별 일 아니지?
비연은 작게 웃는다.
-우리 아가씨 이제 어른 되시려나보네. 연심을 다 품으시고.
-....뭐?
산은 벙 입을 벌리다 손사래를 친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생각나고 아프시다면서요. 맘이 맘대로 안 되신다면서요.
-그렇다고 무슨... 말도 안 돼. 내내 봤는데. 잠깐 그런건데. 어떻게 갑자기..
-몇 날 며칠 때 맞춰야 연심인가요. 이유도 없이 불쑥. 그것도 연심이에요.
-하지만..
벗이었다. 도울 수 없어 안타깝고 대신해 화가 나고 밤잠 설치게 걱정되는. 신분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능글거림과 실없는 미소가 다 견디는 걸로 비쳤다. 공자 앞에 망부석처럼 앉은 등이 꼭 홀로 울던 밤 같았다. 온 맘을 내주고도 어쩜 그리 혼자인지...
'...어찌 견디려고.'
'지금까지처럼 잘. 내가 또 인내심이 발군이다.'
지끈. 묵직히 심장이 저려온다. 산은 꾹 입술을 물었다. 그런 산을 안타까이 살피던 비연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혹.. 그 분이세요? 수사공께서 오신 날 함께 계시던..
혼사가 깨진 밤, 산과 마주 서 있는 사내를 먼발치서 보았다. 우리 아가씨께 아주 정중하고 깍듯하여 누군지 궁금하던 분. 아무나 따라나설 리 없는 아가씨가 함께 대문을 나선 분. 나리께 말씀드리자 되려 걱정을 조금 더신 빛을 띠셨다. 믿을 수 있는 분이란 뜻이다.
비연은 대답없이 생각에 빠진 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대신 갇혀있다 미안해하지만 비연은 오히려 산이 애처로웠다. 몇 년에 한 번 집에 오셔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편히 부르지도 못하고, 당신의 처지를 알아 혹 해를 입을까 누구에게나 조금씩 거리를 두고.. 이 정 많은 분이 어찌 외롭지 않을까.
비연은 발개지는 눈가를 감추려 얼른 일어나 마저 짐을 꾸린다. 옷가지를 챙겨 넣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 길이길. 해서 우리 아가씨, 아가씨로 돌아와 연정 품은 그분과 다른 이들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사실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비연의 뒤에서 산은 창 밖을 건너본다. 그날과 달리 이리도 달이 밝은데, 온통 어둠이었다.
**
오랜만에 단잠을 잔 린은 얼굴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실눈을 뜨다 화들짝 일어난다. 바로 앞에서 턱을 괴고 빤히 보는 누구 덕분이었다.
-뭐..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뭘 했는데.
적반하장 뻔뻔한 물음에 말문이 막힌다. 원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보는 것도 안 돼?
-..아침부터 심통이십니까.
-심통 아니고 아침도 아니고. 해가 중천이다.
-예?
놀라는 얼굴에 미려한 미간이 짙게 찌푸려진다.
-그간 잠도 안 잤지?
다급히 옷 매무새를 정리하던 손이 멈칫 느려진다.
-...잘 만큼은 잤습니다.
-너 아주 거짓말이 늘었다?
하긴. 원보다 늦게 일어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 린은 작게 헛기침하며 원을 마주본다. 빤한 눈이 삐딱했다.
-눈 밑은 거뭇하고 볼은 홀쭉하고 입술은 다 갈라지고. 볼 만하다, 볼 만해.
-...심통 아니라면서요.
-심통 아니고 짜증.
-뭐 다릅니까.
부루퉁하던 원이 피식 웃는다.
-못생겨져서 아닌 줄 알았는데 꼬박꼬박 따지는 거 보니 왕린 맞네.
참 나, 작게 따라 웃던 린의 시선이 원의 입술에 머문다. 원은 부러 말문을 돌렸다.
-근데 산이 얘는 어디서 술 먹고 뻗었나? 잔뜩 화내고 가선 안 보인다?
-또 다투...
소화가 아닌 '산'. 린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아가씨께 들으셨습니까.
-너도 안다며. 왜. '또' 모르는 척 할 걸 그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짐을 덜었다.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안도하는 얼굴을 뜯어보던 원이 불퉁한 목소리를 뱉었다.
-아. 니 형한테 전해라.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내가 손댄 것도 화나 죽겠는데 어디 감히 손을 대?
-..별 말씀을 다 하셨나 봅니다.
-입 다물면 무슨 사단 나는지 딱 봤잖아.
잠시 사이를 둔 린이 침착한 눈을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원은 속으로 한숨을 물었다. 배알없는 놈.
-환궁하셔야죠.
-또 잔소리냐.
-김내관이 걱정할 겁니다.
-팔자지, 뭐.
-...마마께서도 그러실 거구요.
원의 눈이 설핏 굳어진다.
-...저하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니가 할 말 아니야.
-저하. 그러지 마시고
원은 말을 끊으며 일어난다.
-배고프다.
-..저하.
-밥 먹고 단이한테 가자. 보고 싶을 거잖아. 누이라면 끔찍한 놈이.
-......
-아. 아니다. 그 얼굴 보면 나만 잡겠다. 난 암튼 단이 걔가 젤 무서워. 누이 없는 세자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
꺾을 고집이 아니다. 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먼저 드시고 계십시요. 씻고 가겠습니다.
-씻을 기운은 있고? 도와줄까?
-됐습니다.
린이 나가고 원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딴사람처럼 가라앉은 낯이었다. 눈앞에 어마마마가 어른거렸다. 항시 당당하던 어깨가 그 날은 참으로 작으셨지...
그렇게 저린 속을 달래고 있길 얼마. 밖이 시끄러운가 싶더니 문 밖에서 장의가 고한다.
-저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문을 여니 장의의 뒤로 진관과 대치하고 있던 후라타이가 짧게 목례를 건넨다. 원은 저도 모르게 다급해졌다.
-원성전에 무슨 일 있나?
의외의 반응에 진관과 장의는 눈짓을 주고 받으며 한 발 물러난다. 후라타이는 무겁게 원을 직시했다.
-왕비마마께서 모셔오라 하십니다.
...쓰러지진 않으셨군. 원은 속으로 안도하며 제 모습을 찾는다.
-무슨 일로.
-모시라는 명만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오래 참으셨지. 원은 무심함을 가장하며 몸을 돌린다.
-기다리든가. 막 점심을 하려던 참이라.
-모시겠습니다.
정중한 어투와 달리 버티면 끌고라도 가겠단 눈이다. 장의와 진관은 후라타이를 가로막으며 검집을 쥐었다. 발검자세를 취하는 후라타이도 여느 때와 다른 기세다. 팽팽해진 공기가 막 찢어지려는 찰나, 곧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뭣들 하는 건가. 저하의 안전이다.
계단에서 내려온 린의 눈에 작은 질책이 서려있다. 장의와 진관, 후라타이는 상대를 살피며 검집에서 손을 뗐다. 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린을 돌아본다.
-물 떨어진다.
이 판국에 젖은 머리 타박이라니. 우리 저하께선 참 세심하시기도 하지. 작게 고갤 젓는 장의에 진관이 피싯 속웃음을 지었다.
-말은 더럽게 안 듣지. 말리고 나오면 밥 없을까봐?
-다녀 오십시요.
-이리 내.
린의 손에 들린 백포를 뺏으려던 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백포가 딸려오지 않았다.
-이리 내라니까.
-부르신다지 않습니까.
-누가 안 간대? 밥 먹고
-같이 갈까요.
두 눈이 고집스레 맞부딪친다.
-...채비하겠습니
-협박에 재미 붙였군.
딱딱한 목소리에 린의 눈이 떨어지다 다시 들린다.
-오실 때까지 있으라는 데 있겠습니다.
한참을 대치하던 끝에 원의 눈매가 신경질적으로 구겨진다.
-못된 것만 늘어서는.
-......
-..망할놈.
원은 거칠게 돌아섰다.
-장의는 날 따르고 진관은 저 망할놈이랑 밥 먹어. 집에 다녀온다면 같이 가고. 저놈 형이 얼쩡대면 쫓아내. 한 대 패주든가.
진관은 입 안으로 답을 굴리며 린의 눈치를 본다. 원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소화도 찾아봐. 저놈이랑 같이. 혼자 두지 말고 매달고 다녀. 괜히 단이한테 감기 옮기지 않게 저 망할 머리카락 싹 다 말리는 거 확인하고.
장의는 다시 절레 고갤 젓고 후라타이와 원을 따른다.
-시전 들러 유밀과 사가. 단이 화 푸는덴 그만한 거 없어.
나가기 직전 내놓은 말에 린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다가 고개를 숙인다. 입술 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