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신속히.
*금과정
린은 주변을 둘러본다. 분명 금과정에 있었고 밤이었는데 한낮의 거리다. 닿는대로 걷던 린은 주막 앞에서야 이게 꿈인 걸 알았다. 13살의 원과 린이 평상에 앉아있다. 이날. 기억한다. 린은 어두운 낯으로 원의 건너편을 쳐다봤다.
-대체 몇이 죽어나간 겐지.. 세 살 먹은 계집아이 하나 남았는데 딱해 못 보겠더라고.
-이게 다 그 원나라 여자 때문이라니까.
-쉿. 말 조심하게.
-조심할 게 뭐 있나. 국모라는 계집이 애들을 줄줄이 팔아넘기는 판에. 이 나란 망했어. 그 계집의 아들이 왕이 될 텐데 망했고 말고.
취한 일행을 말리려던 사내가 어린 린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 친구를 추스려 나간다. 저때 참 많이도 화가 났었다. 두 사내에게가 아니라 제 손을 잡아 말린 원에게. ..아니. 국밥을 먹어보고 싶단 원을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에게.
-...별로 맛이 없네.
빙긋이 웃는 원을 다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혼자 남겨진 어린 낯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체념이 자리한 얼굴.. 저런 표정을 하고 계셨던가.
린은 어린 원에게 다가간다. 세 숟갈도 못 먹은 국밥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작은 머리통. ..꿈이니까. 그러니까... 린은 천천히 어린 머리를 쓰다듬는다. 반사적으로 손을 쳐낸 원이 눈매가 사나워졌다.
-뭐냐, 넌?
꿈에서도 여전하시네. 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원을 올려다본다. 경계어린 눈이 참 맑다. 지금부터, 지금보다 더 많이 힘들어지실 텐데.. 린은 원의 손을 조심히 잡는다.
-뭐 하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때 했어야 하는 말.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다.
-마음에 두고.. 혼자 되새기며 아파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저하.
서서히 경계가 풀어지며 의문이 서리는 낯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프고 그리운 꿈이었다.
**
열이 떨어질 때까지 노심초사하게 만든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낯이다. 일어나기만 해봐, 어디.. 다짐과 달리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깨지기라도 할까 아끼며 살피던 눈이 입가에 멈췄다.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어찌 이렇게 만들어 놔..
누가 들으면 남이 그런 줄 알습니다. 금방이라도 웃을 것 같다. 원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주저앉은 어미에게 기어이 답을 듣고 나와 여기 이렇게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앉아 있었다. 괜찮으신지, 쓰러지신 것은 아닌지 궁에 기별 한 번 없이... 참으로 못되고 독한 아들이다.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눈 좀 붙이시라니까.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던 산이 쟁반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입안이 까끌거리실 거라고 죽 드시랍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놈이 뭘 먹어.
-말구요.
원의 앞에 숟가락을 놓은 산이 제 몫의 죽을 퍽퍽 퍼먹는다. 원은 피식 웃으며 숟가락을 들다 린을 돌아봤다. 그 눈길에 어쩐지 목이 막힌 산이 불퉁한 목소릴 낸다.
-공자 것도 있으니 염려마세요.
-..약 줬어?
-발라줄까 하다가
휙 쳐다보는 눈꼬리가 올라가있다. 산은 낮게 혀를 찼다.
-이럴까봐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저 모양이구요.
-이제 서로 다 아는데 계속 무례하다, 너?
-저하 싫으시다면서요.
-..뭘 또 그렇게 받아. 사람 할 말 없게.
-조용히 드시면 되겠네요.
어째 계속 화난 투다. 원은 턱을 괴고 산의 안색을 살폈다.
-뭔 일 있어?
탁. 숟가락 놓는 소리가 좀 크다. 원은 얼른 작게 손을 내저었다.
-야야. 조용히 좀
-새벽에 불쑥 와선 해결됐다 한 마디하고 여태 여기. 잠도 안 주무시고 밥도 안 드시고, 밖에 두 호위 분도 그러고 계신 건 압니까? 아주머니도 그렇고 다들 걱정이 태산인데 어찌된 건지 말은 해주셔야죠.
-너도 걱정했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좋네.
산은 순간 말을 잊는다. 눈 앞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얼굴이..
-무례한 거 좋다구. 계속 이렇게 하는 거다?
창으로 들어온 한낮의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 앉는다.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레 빛나고 매끄러운 콧날 아래 보기 좋은 모양의 입술에 상처...
산은 벌떡 일어나 쫓기듯 방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원이 어리둥절해 하든 말든, 장의와 진관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객잔을 가로질러 부엌간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
집무실에 앉은 송인은 생각에 빠져 있다. 공녀명단을 알고, 사신관, 금과정, 원성전, 그리고 다음날 다시 금과정..
단이 공녀명단에서 빠진 것은 사실로 확인됐으니 사신관에서 금과정까지는 말이 된다. 헌데 다시 원성전에 들어 긴 시간, 그것도 독대를 하였다. 허면 그때까지의 명단은 역시 거짓이었고 그 이후 빠졌다는 건데.. 어떻게. 세자에게 알리면서도 해결할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저 세자가 린을 위해 어디까지 하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헌데 진짜 공녀행이 취소됐단 말이지.. 송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진다.
수사공은 다시 우유부단한 왕족으로 돌아갈 테다. 은영백의 딸로 재산을 얻기도 힘들어졌다. 허나 그보다 편치 않은 것은 바로 그 독대다. 세자의 간청만으로 막아질 왕비가 아니다. 수사공의 기를 꺾고 세자와 린의 사이를 벌릴 기회라 여겼을 텐데 오히려 돈독하게 만들어 준 셈이니... 문득 쓴웃음이 번진다.
자존심이 태산같은 세자가 울었다 했던가. 뒤에 은영백의 딸까지 두고 한참을 소리없이. 가문을 등지려던 린도 울지는 않았는데.. ..하긴. 쉬이 눈물을 비칠 사내는 아니지. 혹 세자 앞이라면 모를까..
송인은 고개를 저어 린의 얼굴을 털어낸다. 한가로이 잡념할 때가 아니다. 운 정도로 세자의 약점이라 단정할 수 없으며, 약점이라 한들 왕비를 꺾을 만한 무기가 있다면 그도 소용이 없다.
..세자. 대체 무엇을 쥐고 있는가.
**
-마마..
보다 못한 후라타이가 한 발 다가서지만 왕비는 술잔만 기울인다. 빈 속에 저리 드시면 속이 상하시는데.. 후라타이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최내관에게 눈짓을 보낸다. 최내관은 마지못해 술병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두어라.
찔끔 최내관이 걸음을 물린다. 후라타이는 깊이 한숨을 삼켰다.
-...세자는. 오늘도 처소에 없으시더냐.
-모셔올까요.
-....
대답없이 술을 들이켜는 왕비의 안색이 더 어두워진다. 이름만 들어도 밝아지시던 분이.. 그날 분명 저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다. 독로화 명단. 필시 왕린. 저하께 심한 원망이라도 들으셨나. ...어찌 그리 어머님의 마음을 모르신단 말인가. 이 고려 땅에 기댈 곳이라곤 저하 밖에 없으신 것을.
-그 아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곧 찾아
-되었다. 그만 두거라. ..그 아이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경악과 충격이 조금 잦아드니 더더욱 진짜였다. 돌아볼수록 그랬다. 만사에 무심한 아이가 그놈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였고, 총명하기 그지없는 머리로 그놈 형의 과욕을 몇 번이나 눈 감았고.. 무엇보다 그 눈. 제 속으로 낳고 키운 세자가 사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왕비는 입 안을 씹으며 잔을 움켜쥔다.
안 되고 말고. 절대.. 안 되고 말고.
허공을 노려보는 눈이 차게 번뜩였다.
**
타는 듯한 목마름에 입술을 벙긋이자 미지근한 물수건이 닿는다. 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물 마시면 안 좋다니까 일단 입술부터 축이자.
익숙한 목소리. 반쯤 일어나던 린이 침상을 짚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호위는 개뿔. 집어쳐라.
린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찌.. 여기 계십니까.
-일어나면 다시 패주려고.
-어쩌셨는데요. 왕비마마께
-어제 일이야.
-...예?
-너 꼬박 하루, 아니 지금이 밤이니까 근 이틀을 누워 있었다고.
린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원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린을 벽에 기대게 했다.
-..망할놈. 일부러 쓰러졌지? 화도 못 내게 하려고.
투덜대는 얼굴이 꼭 꿈에서 만난 13살이다. ...그러지 마시라니까.. 린은 지그시 입술을 물다가 싸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가를 매만졌다.
-그건 안 미안하다.
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제가.. 가겠다 했습니다.
눈도 못 마주치며 저걸 거짓말이라고 한다. 원은 한숨을 삼키며 약통을 꺼냈다.
-못 가.
-..저하.
-어마마마께서 명단에서 빼셨다.
놀란 눈을 하는 린에 원이 쓰게 웃는다.
-왜. 못 믿겠어?
-어찌... 마마께 뭐라 하신 겁니까.
..너한테는 못할 말을 했지. 아주 아픈 말을.
린을 가만 보던 원은 연고를 손가락에 묻혀 입가로 가져댔다.
-뭐라 하셨든. 감히 나 몰래 나를 두고 가려 해?
-그럼 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에 제가 미안한 낯을 한다. 미련한 놈.. 원은 내려가려는 고개를 잡아 눈을 맞췄다.
-단이도 무사해. 다신 그런 일 없을 거고.
-....
꼼꼼히 약을 바른 손이 린의 이마를 툭 친다.
-너도 다신 이러지 마.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퍽이나. 갈 때쯤 서신이나 한 장 남겼겠지. 걱정 마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오지도 않을 놈이.
-.....
아니란 말은 못한다. 정말 안 올 생각이었던 거다. 안 보고도 살 수 있다니 ...좋겠구나. 원은 쓰게 치미는 것을 누르며 거칠게 약통을 내려놓았다.
-나 몰래, 너 혼자. 그게 니놈 특기라는 건 아는데 ...이번엔 나를 먼저 찾았어야 해. 니 형의 혼사, 니 누이의 처지 내게 말하고 도와달라 했어야 해. 떠날 생각 따윌 하기 전에. 내가 미안하단 말도 못하고 니놈 얼굴을 이리 만들기 전에.
-......
-...한 번만 참는 거다. 두 번은 안 돼.
린은 원을 바라본다. 왕비마마께 무슨 말씀을 하셨든 아픈 말이었을 거다. 당신이 더 아플 말을 기어이 하고 여기 앉아 홀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시기까지 13살 그 날처럼 홀로 무엇을... 린의 시선이 원의 입술에 닿는다. 자기 상처는 저리 모르고, 매번 이 못난 마음을 버리지도 못하게..
-송구합니다 할 생각이면 하지 마. 너 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린은 가만히 약통을 집어 원에게 내민다.
-뭐.
-..입술 상하셨습니다.
그제야 제 입술을 더듬다 아, 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린은 왠지 목이 메어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십니다.
..창백하게 질린 놈이 누구 걱정을. 누구 때문에 이리 됐는데.. 원은 부러 삐죽이며 쑥 얼굴을 들이민다. 말없이 멀뚱한 눈은 역시 눈치가 없어 속으로 때아닌 웃음이 났다.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이리 웃으니 참으로 염치가 없달 밖에.
-바르라고. 덧나신다며.
-......
-아 얼른. 덧나신다니까?
알고 있다. 주상께서 새 여인을 들이셨을 때, 왕비께서 술에 취해 잠드셨을 때, 잡종 혼혈이라 저자에서 수군대는 소릴 들으셨을 때... 그리 슬프고 아플 때마다 이리 웃으시는 걸 너무 오래 뵈어서.. 린도 원의 입술에 약을 바르며 겨우 웃고 만다.
-아! 좀 살살해라. 아프다.
-엄살이 심하십니다.
-어엄살?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가만 계세요. 바르기 힘듭니다.
-..엄살은.
조심조심 닿는 손끝이 따뜻하다. ..송인 그 자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군. 널 놓치진 않았으니...
-배 안 고파?
-...
-죽 먹자. 가져오라 할게.
-..가만 계시라니까요.
부러 더 움직이는 입술을 잘못 눌러 원이 진짜 아! 소리를 내고 린이 다급히 살피는 사이.
그릇을 들고 방 앞에 있던 산은 조용히 걸음을 돌린다. 뭘 잘못 먹은 건지 가슴이 이상히도 저려왔다.
-ing
*금과정
린은 주변을 둘러본다. 분명 금과정에 있었고 밤이었는데 한낮의 거리다. 닿는대로 걷던 린은 주막 앞에서야 이게 꿈인 걸 알았다. 13살의 원과 린이 평상에 앉아있다. 이날. 기억한다. 린은 어두운 낯으로 원의 건너편을 쳐다봤다.
-대체 몇이 죽어나간 겐지.. 세 살 먹은 계집아이 하나 남았는데 딱해 못 보겠더라고.
-이게 다 그 원나라 여자 때문이라니까.
-쉿. 말 조심하게.
-조심할 게 뭐 있나. 국모라는 계집이 애들을 줄줄이 팔아넘기는 판에. 이 나란 망했어. 그 계집의 아들이 왕이 될 텐데 망했고 말고.
취한 일행을 말리려던 사내가 어린 린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 친구를 추스려 나간다. 저때 참 많이도 화가 났었다. 두 사내에게가 아니라 제 손을 잡아 말린 원에게. ..아니. 국밥을 먹어보고 싶단 원을 끝까지 말리지 못한 자신에게.
-...별로 맛이 없네.
빙긋이 웃는 원을 다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했다. 혼자 남겨진 어린 낯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체념이 자리한 얼굴.. 저런 표정을 하고 계셨던가.
린은 어린 원에게 다가간다. 세 숟갈도 못 먹은 국밥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작은 머리통. ..꿈이니까. 그러니까... 린은 천천히 어린 머리를 쓰다듬는다. 반사적으로 손을 쳐낸 원이 눈매가 사나워졌다.
-뭐냐, 넌?
꿈에서도 여전하시네. 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원을 올려다본다. 경계어린 눈이 참 맑다. 지금부터, 지금보다 더 많이 힘들어지실 텐데.. 린은 원의 손을 조심히 잡는다.
-뭐 하는!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때 했어야 하는 말.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다.
-마음에 두고.. 혼자 되새기며 아파하지 마세요. ...그러지 마세요, 저하.
서서히 경계가 풀어지며 의문이 서리는 낯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프고 그리운 꿈이었다.
**
열이 떨어질 때까지 노심초사하게 만든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낯이다. 일어나기만 해봐, 어디.. 다짐과 달리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깨지기라도 할까 아끼며 살피던 눈이 입가에 멈췄다.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어찌 이렇게 만들어 놔..
누가 들으면 남이 그런 줄 알습니다. 금방이라도 웃을 것 같다. 원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주저앉은 어미에게 기어이 답을 듣고 나와 여기 이렇게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앉아 있었다. 괜찮으신지, 쓰러지신 것은 아닌지 궁에 기별 한 번 없이... 참으로 못되고 독한 아들이다.
-아직도 이러고 계세요? 눈 좀 붙이시라니까.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던 산이 쟁반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입안이 까끌거리실 거라고 죽 드시랍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놈이 뭘 먹어.
-말구요.
원의 앞에 숟가락을 놓은 산이 제 몫의 죽을 퍽퍽 퍼먹는다. 원은 피식 웃으며 숟가락을 들다 린을 돌아봤다. 그 눈길에 어쩐지 목이 막힌 산이 불퉁한 목소릴 낸다.
-공자 것도 있으니 염려마세요.
-..약 줬어?
-발라줄까 하다가
휙 쳐다보는 눈꼬리가 올라가있다. 산은 낮게 혀를 찼다.
-이럴까봐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저 모양이구요.
-이제 서로 다 아는데 계속 무례하다, 너?
-저하 싫으시다면서요.
-..뭘 또 그렇게 받아. 사람 할 말 없게.
-조용히 드시면 되겠네요.
어째 계속 화난 투다. 원은 턱을 괴고 산의 안색을 살폈다.
-뭔 일 있어?
탁. 숟가락 놓는 소리가 좀 크다. 원은 얼른 작게 손을 내저었다.
-야야. 조용히 좀
-새벽에 불쑥 와선 해결됐다 한 마디하고 여태 여기. 잠도 안 주무시고 밥도 안 드시고, 밖에 두 호위 분도 그러고 계신 건 압니까? 아주머니도 그렇고 다들 걱정이 태산인데 어찌된 건지 말은 해주셔야죠.
-너도 걱정했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좋네.
산은 순간 말을 잊는다. 눈 앞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얼굴이..
-무례한 거 좋다구. 계속 이렇게 하는 거다?
창으로 들어온 한낮의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 앉는다. 검은 눈동자가 장난스레 빛나고 매끄러운 콧날 아래 보기 좋은 모양의 입술에 상처...
산은 벌떡 일어나 쫓기듯 방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원이 어리둥절해 하든 말든, 장의와 진관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객잔을 가로질러 부엌간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
집무실에 앉은 송인은 생각에 빠져 있다. 공녀명단을 알고, 사신관, 금과정, 원성전, 그리고 다음날 다시 금과정..
단이 공녀명단에서 빠진 것은 사실로 확인됐으니 사신관에서 금과정까지는 말이 된다. 헌데 다시 원성전에 들어 긴 시간, 그것도 독대를 하였다. 허면 그때까지의 명단은 역시 거짓이었고 그 이후 빠졌다는 건데.. 어떻게. 세자에게 알리면서도 해결할 거라 여기진 않았다. 그저 세자가 린을 위해 어디까지 하는지 확인하려 했을 뿐이다. ..헌데 진짜 공녀행이 취소됐단 말이지.. 송인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진다.
수사공은 다시 우유부단한 왕족으로 돌아갈 테다. 은영백의 딸로 재산을 얻기도 힘들어졌다. 허나 그보다 편치 않은 것은 바로 그 독대다. 세자의 간청만으로 막아질 왕비가 아니다. 수사공의 기를 꺾고 세자와 린의 사이를 벌릴 기회라 여겼을 텐데 오히려 돈독하게 만들어 준 셈이니... 문득 쓴웃음이 번진다.
자존심이 태산같은 세자가 울었다 했던가. 뒤에 은영백의 딸까지 두고 한참을 소리없이. 가문을 등지려던 린도 울지는 않았는데.. ..하긴. 쉬이 눈물을 비칠 사내는 아니지. 혹 세자 앞이라면 모를까..
송인은 고개를 저어 린의 얼굴을 털어낸다. 한가로이 잡념할 때가 아니다. 운 정도로 세자의 약점이라 단정할 수 없으며, 약점이라 한들 왕비를 꺾을 만한 무기가 있다면 그도 소용이 없다.
..세자. 대체 무엇을 쥐고 있는가.
**
-마마..
보다 못한 후라타이가 한 발 다가서지만 왕비는 술잔만 기울인다. 빈 속에 저리 드시면 속이 상하시는데.. 후라타이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최내관에게 눈짓을 보낸다. 최내관은 마지못해 술병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두어라.
찔끔 최내관이 걸음을 물린다. 후라타이는 깊이 한숨을 삼켰다.
-...세자는. 오늘도 처소에 없으시더냐.
-모셔올까요.
-....
대답없이 술을 들이켜는 왕비의 안색이 더 어두워진다. 이름만 들어도 밝아지시던 분이.. 그날 분명 저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다. 독로화 명단. 필시 왕린. 저하께 심한 원망이라도 들으셨나. ...어찌 그리 어머님의 마음을 모르신단 말인가. 이 고려 땅에 기댈 곳이라곤 저하 밖에 없으신 것을.
-그 아이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곧 찾아
-되었다. 그만 두거라. ..그 아이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경악과 충격이 조금 잦아드니 더더욱 진짜였다. 돌아볼수록 그랬다. 만사에 무심한 아이가 그놈 일이라면 팔을 걷어붙였고, 총명하기 그지없는 머리로 그놈 형의 과욕을 몇 번이나 눈 감았고.. 무엇보다 그 눈. 제 속으로 낳고 키운 세자가 사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왕비는 입 안을 씹으며 잔을 움켜쥔다.
안 되고 말고. 절대.. 안 되고 말고.
허공을 노려보는 눈이 차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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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듯한 목마름에 입술을 벙긋이자 미지근한 물수건이 닿는다. 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물 마시면 안 좋다니까 일단 입술부터 축이자.
익숙한 목소리. 반쯤 일어나던 린이 침상을 짚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호위는 개뿔. 집어쳐라.
린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찌.. 여기 계십니까.
-일어나면 다시 패주려고.
-어쩌셨는데요. 왕비마마께
-어제 일이야.
-...예?
-너 꼬박 하루, 아니 지금이 밤이니까 근 이틀을 누워 있었다고.
린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원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린을 벽에 기대게 했다.
-..망할놈. 일부러 쓰러졌지? 화도 못 내게 하려고.
투덜대는 얼굴이 꼭 꿈에서 만난 13살이다. ...그러지 마시라니까.. 린은 지그시 입술을 물다가 싸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가를 매만졌다.
-그건 안 미안하다.
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제가.. 가겠다 했습니다.
눈도 못 마주치며 저걸 거짓말이라고 한다. 원은 한숨을 삼키며 약통을 꺼냈다.
-못 가.
-..저하.
-어마마마께서 명단에서 빼셨다.
놀란 눈을 하는 린에 원이 쓰게 웃는다.
-왜. 못 믿겠어?
-어찌... 마마께 뭐라 하신 겁니까.
..너한테는 못할 말을 했지. 아주 아픈 말을.
린을 가만 보던 원은 연고를 손가락에 묻혀 입가로 가져댔다.
-뭐라 하셨든. 감히 나 몰래 나를 두고 가려 해?
-그럼 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에 제가 미안한 낯을 한다. 미련한 놈.. 원은 내려가려는 고개를 잡아 눈을 맞췄다.
-단이도 무사해. 다신 그런 일 없을 거고.
-....
꼼꼼히 약을 바른 손이 린의 이마를 툭 친다.
-너도 다신 이러지 마.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퍽이나. 갈 때쯤 서신이나 한 장 남겼겠지. 걱정 마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오지도 않을 놈이.
-.....
아니란 말은 못한다. 정말 안 올 생각이었던 거다. 안 보고도 살 수 있다니 ...좋겠구나. 원은 쓰게 치미는 것을 누르며 거칠게 약통을 내려놓았다.
-나 몰래, 너 혼자. 그게 니놈 특기라는 건 아는데 ...이번엔 나를 먼저 찾았어야 해. 니 형의 혼사, 니 누이의 처지 내게 말하고 도와달라 했어야 해. 떠날 생각 따윌 하기 전에. 내가 미안하단 말도 못하고 니놈 얼굴을 이리 만들기 전에.
-......
-...한 번만 참는 거다. 두 번은 안 돼.
린은 원을 바라본다. 왕비마마께 무슨 말씀을 하셨든 아픈 말이었을 거다. 당신이 더 아플 말을 기어이 하고 여기 앉아 홀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시기까지 13살 그 날처럼 홀로 무엇을... 린의 시선이 원의 입술에 닿는다. 자기 상처는 저리 모르고, 매번 이 못난 마음을 버리지도 못하게..
-송구합니다 할 생각이면 하지 마. 너 때문이다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린은 가만히 약통을 집어 원에게 내민다.
-뭐.
-..입술 상하셨습니다.
그제야 제 입술을 더듬다 아, 하며 미간을 찌푸린다. 린은 왠지 목이 메어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십니다.
..창백하게 질린 놈이 누구 걱정을. 누구 때문에 이리 됐는데.. 원은 부러 삐죽이며 쑥 얼굴을 들이민다. 말없이 멀뚱한 눈은 역시 눈치가 없어 속으로 때아닌 웃음이 났다. 어미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이리 웃으니 참으로 염치가 없달 밖에.
-바르라고. 덧나신다며.
-......
-아 얼른. 덧나신다니까?
알고 있다. 주상께서 새 여인을 들이셨을 때, 왕비께서 술에 취해 잠드셨을 때, 잡종 혼혈이라 저자에서 수군대는 소릴 들으셨을 때... 그리 슬프고 아플 때마다 이리 웃으시는 걸 너무 오래 뵈어서.. 린도 원의 입술에 약을 바르며 겨우 웃고 만다.
-아! 좀 살살해라. 아프다.
-엄살이 심하십니다.
-어엄살?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냐?
-..가만 계세요. 바르기 힘듭니다.
-..엄살은.
조심조심 닿는 손끝이 따뜻하다. ..송인 그 자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 판이군. 널 놓치진 않았으니...
-배 안 고파?
-...
-죽 먹자. 가져오라 할게.
-..가만 계시라니까요.
부러 더 움직이는 입술을 잘못 눌러 원이 진짜 아! 소리를 내고 린이 다급히 살피는 사이.
그릇을 들고 방 앞에 있던 산은 조용히 걸음을 돌린다. 뭘 잘못 먹은 건지 가슴이 이상히도 저려왔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