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전
린은 왕비가 내민 명단 앞에 고개를 숙인다.
-아닙니다.
-왜. 직접 보지 않고.
-마마를 믿습니다.
저런 얼굴로 저리 말하니 나라도 믿고 싶어지는군. 왕비는 명단을 거두어 서탁에 올린다. 오늘 아침 후라타이가 혼담이 깨진 걸 확인한 후 이 명단에서 단이의 이름을 뺐다. 둘 다 보내버려 수사공과 그 아들놈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릴까도 하였으나 제 집 혼사까지 깨놓은 린의 성의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약조는 지키마. 니 누이가 다시 명단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야.
-감사드립니다, 마마.
제 이름이 적힌 독로화 명단이 사신단에 건네진 줄 알고도 저리 말하니 왕비도 입이 써진다. 참 오래도 미워하였다. 대놓고 세자위를 탐내는 제 형 대신 욕을 듣고 뺨을 맞고.. 해서 가끔, 아주 가끔은 그리도 생각했었다. 왕족이 아니면 좋았을 것이라고. 고만고만한 가문의 잘난 아들로 태어났으면 세자의 사람으로 두지 않을 이유가 없는 아이라고. ...허니 이 아이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왕비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밖이 소란하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린다. 왕비는 굳은 내색 하나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시고 별일입니다, 세자.
린은 흠칫 어깨를 굳히며 옆으로 비껴 선다. 거친 발소리가 린 앞에서 멈췄다.
-이놈이 왜 여기 있는 것입니까.
-아. 내 일을 좀 도우라 하던 참이에요. 사신단 일로 챙길 게 많아서요.
-그 많은 일 중 하나가
원이 린과 마주 선다.
-단이입니까.
몸을 바로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민가의 예로도 어긋난 일. 왕비의 미소가 서서히 걷힌다.
-단이가 공녀명단에 있습니까. 해서 린이 여기 있는 것입니까.
-...저하.
-간청을 했겠지요. 애원을 했겠지요. 밤새 엎드려 빌기라도 했겠지요.
상한 입술 끝이 눈에 맺힌다. 원은 입술을 비틀었다.
-참으로 우스운 놈이 아닙니까. 저 때문에 지 형 혼사 깨고 그 때문에 지 누이 끌려가게 생겼는데 이런 얼굴로 제 눈도 못 보고 죄인처럼 서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흘 만에. 이 꼴로. 어마마마께선 믿기십니까.
-저하. 이러지 마십...!!
원이 무릎을 꿇는다. 최내관과 조상궁이 다급히 걸음을 물리고, 왕비는 손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짓입니까. 당장 일어나세요.
-단이 공녀명단에서 빼주십시오. 제 벗의 누이이고 제게도 누이나 다름없는 아입니다.
-세자!
린이 원의 옆으로 다급히 꿇어 앉는다.
-일어나라시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형제를 잃었습니다. 저 때문에 명예를 잃었습니다. 저 때문에 집안도 등졌습니다. 저로 인해 누이까지 잃게 할 순 없습니다.
하, 짧은 숨을 토한 왕비가 서탁의 명단을 내민다.
-공녀명단입니다. 보세요.
원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일어나 명단을 편다.
-이제 되었습니까?
어린 나이에 먼 타국으로 시집와 차디찬 시선 속에서 한평생을 보낸 어머니. 화려한 궐에서 가진 거라고는 이 못난 자식 하나뿐이라 혹시라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 고려 산천초목 전부라도 태워버릴 분인 것을. 허니 명단쯤. 얼마든지. ..이리도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원은 붉어진 눈으로 왕비를 바라본다.
-...이놈. 데려가겠습니다.
왕비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뒤돌아선다.
-..린아. 다녀오거라. 네가 가야 믿으시겠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를 취한 원이 나가고. 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인사를 올리고 나가던 린의 발이 잠시 멈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왕비의 어깨가 이상히도 작게 비쳤다.
**
김내관과 진관, 장의는 긴장된 눈빛을 주고 받는다. 화가 나실 만한 일이기는 하나, 원성전을 벗어나기까지 린을 돌아보지도 않는 원이라니. 영 심상치가 않다. 린 공자라면 화를 낼 때조차 눈을 보지 않고는 못 견뎌하셨는데... ...단이 아가씨 일이 정말 잘못되었나. 셋의 안색이, 특히 진관의 낯빛이 초조하게 흐려질 쯤. 우뚝 멈춰선 원이 굳은 목소리를 낸다.
-장수와 진관은 나를 따르고, 장의.
-예.
-...금과정에 데려다 놔. 내가 갈 때까지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해.
끝까지 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원이 빠르게 멀어진다. 장의는 멀거니 원을 바라보는 린에게 조심히 다가섰다.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
-단이.. 아가씨는..
-단이 일. 저하께서 어찌 아신 건가.
-오는 길에 당후관을 만나셨습니다.
린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한참 멀어진 등을 바라본다.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저 등을 떠나지 않고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길. 저 분이 험한 세월을 기어이 이기고 왕이, 좋은 왕이 되실 때까지 곁을 지켜드릴 수 있는 그런 길.
..허나 왕비가 어쩌겠냐 물었을 때. 멀리서 가락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보였다. 다정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손이 스치고 마음이 스치고..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숨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히 자책하실 분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러니 이 길밖에 없었다 한들 ...저하를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단이 아가씨, 저하께서 꼭 구해내실 겁니다.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께 상처입히며. 그 상처를 본인이 배로 받으며. 이런 이기적이고 비겁한 놈 때문에. ...어찌 말해야 할까. 내가 이런 자라고, 해서 저하 곁을 떠나려 한다고 어찌 말씀드려야...
원이 가고 없는 자리를 바라보는 린의 눈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
-세자는.
궁처 일각. 하늘을 바라보고 선 송인의 뒤로 무석이 소리없이 나타난다.
-사신관으로 갔습니다.
명단에서 뺐는데도 말이지.. 제 어미를 꽤 잘 알고 있군. 이리 쉬이 넘어갈 분이 아니시지. 명단이 거짓이거나, 진짜라면 분명 댓가가 있었을 터.
-린 공자는 금과정 객잔으로 갔나.
-예.
-계속 살피거라.
더 말이 없음에도 기척이 사라지지 않는다. 송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나 보군.
-...단이 아가씨를 왜 도우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그 분을 도왔던가.
-공녀로 보내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헌데 지금은 막으시려는 듯 하여..
그랬다. 자식을 잃은 아비는 힘이 센 법이니 이참에 수사공까지 끌어들이면 은영백의 재산보다 더 큰 힘이 될 터.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헌데 그 밤 그 자리에서. 아비와 형과 집안을 버릴 각오로 선 그 사내. 인품과 학식이 왕전에 비할 바 아니나 너무 곧기만 하여 쓸 수 없는 칼로 여겼던 린이 처음으로 아쉬워졌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자였던가. 따르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었던가.
송인은 쓰게 웃는다. 놓친 것을 돌아보는 일은 다시 없을 줄 알았건만.
-...효 아가씨를 생각하십니까.
-...그리운.. 이름이구나.
효. 믿었던 정인에게 배신당하고 공녀로 보내진 누이. 2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와 정인이 주었던 팔찌를 같이 묻어달라 끝까지 어리석었던.. 죽은 누이를 부둥켜 안고 울기밖에 못했던 어린 날은 이미 지운지 오래건만. 어쩌면 린의 얼굴로 누이가 스쳤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주고도 버림받은 그 가여운 누이가.. 송인은 문득 허한 웃음을 짓는다. 기일이 가까워 그런가. 쓸데없는 상념이 많아졌다.
-걱정하지 마라. 확인하려는 것뿐이니.
-무엇을.. 말입니까.
그리 다 버릴 수 있는 자를 위해 세자가 어디까지 하는지. 만에 하나 세자도 그리 한다면. 린은 세자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이니... 송인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사신은 안절부절 원의 주변만 멤돈다. 아무리 세자라도 사신관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순 없으나 이 세자는 그냥 세자가 아니라 황제폐하의 고귀한 혈통이신지라. 게다가 할아버님의 선물에 모자람은 없는지 살피신다는데 그 장한 효심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그 효심이 너무 장해 공물을 건드는 손길이 다소 거칠다 해도 말이다. 사신은 인삼 하나를 집어드는 원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상품 중 상품입니다. 황제폐하께옵서 고려인삼을 즐기셔서 왕비마마께서 특별히
-그래. 할아버님께선 건강하시오?
뭐라 뭐라 열심히 답하나 원의 신경은 온통 명단을 찾고 있는 진관에게 가 있다. 확인해야 한다. 충분히 거짓명단을 보이실 분이며, 무엇보다 린, 그 놈. 그 놈의 눈빛. ..내가 너를 모를까.
-저하!!
명단을 빼앗듯 받아든 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공녀명단이 아니다. 진관은 다급히 명단 끝을 짚었다.
-여길 보십시오.
손끝을 따라가던 원이 숨을 멈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같다.
-...세자저하?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사신이 원을 살피려다 흠칫 물러선다. 누구라도 베어 죽일 눈이다. 수백 년 같은 수 초가 지나고. 원이 명단을 집어던지고 나가자 숨소리도 내지 못하던 사신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집어든다. 독로화 명단 끝에 있는 이름. 수사공의 삼 남, 왕린이었다.
**
-..잠깐 집에 다녀올 수 있을까.
장의가 곤란한 빛을 띤다. 침상에 앉은 린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댁에 약재를 보내셨으니..
제 말이 변명처럼 들려 장의도 더 말을 잇지 못한다. 린은 흐리게 미소했다.
-되었네. 마음 쓰지 말게.
죄송함을 짧은 목례로 대신하는 장의 뒤로 문이 빼꼼히 열린다.
-저..
산이 눈치를 살피며 베시시 웃자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산은 얼른 발을 들이며 밝게 웃었다.
-내가 만든 건데 이것 좀 맛보시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바라보던 린의 얼굴에 물음표가 달린다. 뒤에서 크게 엑스자를 그려보이는 장의 때문이었다.
-왜...그러나?
산까지 돌아보는 통에 얼른 팔을 내린 장의가 하하 웃으며 바람처럼 그릇을 채든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니 같이 먹으라,
-제가 배가 많이 고파서. 딴 걸 가져오겠으니 잠시만 계십시오.
붙들 새도 없이 나가는 장의에 산이 헛바람을 뱉는다.
-뭐 안 먹이고 일 시켜요?
린도 영문을 모르니 어색하게 웃을 밖에. 산은 아쉬움을 거두고 린의 앞에 앉는다.
-...아가씨는요?
-무사합니다.
-...진짜로?
-예.
-어떻게요? 공녀명단은 왕비마마밖에
-마마께서 빼주셨어요.
-한천, 아니. 저하께서 힘써주신 겁니까?
-...예.
-어후.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린의 눈이 제 일처럼 기뻐하는 산에게 길게 닿는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저하 대단하다 한참을 종알거리던 산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더듬었다.
-뭐 묻었습니까?
-...아가씨 참 좋은 분입니다.
-...뭐에요, 뜬금없이.
-저희 형님 때문에 많이 곤란하셨는데도 단이 일 마음 써주시고.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죠. 혼인, 사실 되게 싫었거든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뭘요. 공자가 형님도 아닌데.
린은 잠시 혼자 웃는다. 많이 들었던 말이다. 니가 니 형도 아닌데 뭘 만날 죄송해.
-...다 얘기 했어요? 화 많이 내죠?
-..아직 다는 모르십니다.
-그랬겠죠. 반만 듣고도 노발대발 했을.. 아니, 하셨을 테니. 성질..아니 성품이 되게 지라...아니, 과격... .....뭔 말을 못하겠네. 무튼 공자일이라 더 그랬을 거에요. 걱정 많이 한 거 같더라구.
-..만나셨습니까.
-잠깐요. 근데 나도 말씀 못 드렸어요. 공자 당부도 있고 실망할까 겁도 좀 나고, 공자 찾았단 소리 듣자마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나가셔서.
-......
린의 낯이 묘하게 어두워진다. 잘 풀린 거 같은데 뭐가 더 있나. 저하가 역정을 있는대로 내서 그런가.. 린을 살피던 산은 분위기를 바꾸려 목소리를 밝게 바꿨다.
-근데요.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공짜로 묻긴 좀 그렇고.
허리춤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낸 산이 씨익 웃는다.
-자.
-..술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비상용으로 하나씩? 자아. 한모금해요. 되게 좋은 거에요, 이거.
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산은 실망한 척 에이-하면서도 빠르게 입구를 열어 홀짝홀짝 술을 넘겼다.
-맛있는데.
-그냥 물으셔도 됩니다.
-그럼 사양않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요. 나 천한 몸종이었는데 말 놓지 않았잖아요. 그거 왜 그런 거에요?
린은 사이를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주군께서 마음에 품은 분이시니까요.
-푸흡!!!!
술을 뿜은 산이 아까워할 새도 없이 휘둥그레진다.
-누구. 설마 나요?!
-....모르셨습니까?
산은 어이없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 아니에요! 그 사람은 따로 좋..
...아하는 사람이 그쪽이라고 말할 생각 없다고 했는데. 산은 가까스로 입을 다문다. 하지만 린의 눈을 피하기는 늦은 듯했다.
-따로...요? 아가씨께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하하.. 취, 취했나. 하도 오랜만에 마셔
-누구신지.. 물으면 안 됩니까.
안된다고 하면 더 물을 사람은 아니다. 그냥 더럽게 눈치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부끄러워 거짓을 말한다고 여기거나.. ...근데 이 사람은 눈치라는 게 전혀 없나. 산은 얼마 보지 않고도 알았다. 엄청 남다르다는 거.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거. 그 긴 세월을 이 사람만 바라봤다는 거.
-...왜 나라고 생각했어요?
-...남다르셨습니다. 처음부터.
-공자께.. 더 남다른데.
-벗이라 여겨주십니다. ...외로운 분이라.
산이 본 원은 외롭다고 남다를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외로운 것은 오히려 이 사람 때문인 듯 보였다. 혹 떠나갈까 노심초사하며, 아까워하며... 너무 오래 함께 있어 보지 못하는 것도 있나 보다. 산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양 쪽에게 다 같은 말을 하는 듯하다.
-무튼 난 확실히 아닙니다.
-...혹 저하의 신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있던 마음이 사라지진 않아요. 없던 마음이 생기지도 않고.
-......
-아니라니까요, 진짜.
대답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영 믿는 눈치가 아니다. 산은 술을 넘기며 린을 살피다 눈을 찌푸렸다. 입술의 상처가 이제야 보인다.
-약 안 발랐어요?
-....예? 아.. 괜찮습니다.
겸연쩍은 미소 위로 원의 말이 겹친다. '아주 답답한 놈이야, 저거.'
-..이 얼굴을 하고 갔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이었겠네.
닳을까 아끼며 보는 사람인데. 산은 한숨을 삼키며 일어난다.
-있어봐요. 약 가져올게요.
-정말 괜찮습니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보는 사람 속 그만 상하게.
톡 쏘아붙인 산이 방을 나서 몇 걸음 가다 머리를 긁적인다. 괜히 심란해져 말투가 과했지 싶다. ..저하가 이래서 공자한테 틱틱댔나. 에효. 산이 짧게 숨을 끊고 다시 발을 떼는데.
쾅!!! 안산댁이 뛰어 나올 정도로 세게 문이 열린다. 산이 놀라 굳은 새, 원은 한 발 늦게 나온 장의를 스쳐 린의 방으로 향했다. 기세에 눌린 산이 얼른 뒤를 따랐으나 어느 새 방문 앞에 선 장의가 고개를 젓는다. 산은 불안한 눈으로 방을 건너봤다.
손을 모으고 선 린은 고개를 숙인 채다. 원은 충혈된 눈으로 린을 노려봤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엉망인 것은 제 마음이었다. 나 때문인 것을 아는데, 내몰린 선택이었을 것을 아는데 떠나려 한다는 사실만으로 피가 마르고 열이 치솟는 이 염치 모르는 마음이.. 떠나려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먼 곳으로. 여기 나를 혼자 두고..
-너..
목소리가 멋대로 떨려 나온다. 원은 꽉 입술을 물었다. 린은 마주잡은 두 손에 힘을 준다.
-..단이 일. ..먼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
짜악!! 말을 맺기도 전에 얼굴이 돌아간다. 다시 입가가 터질 만치 강한 타격이다. 린은 저도 모르게 원을 보다 그대로 굳었다. 악다문 원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좀 놔보라니까요!!! 이봐요!! 안에!! 뭐 하는 건데. 방금 그거 무슨 소린데!!
밖의 소란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린이 아직도 입술을 물고 있는 원을 마주본다.
-피가 나십니다. 그만하십,
-독로화?
난리법석에 삐긋한 장의를 뚫고 들어온 산과 다급히 잡으려던 장의가 멈춰선다. 독로화라니 이게 무슨.. 두 사람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새. 원은 입가를 닦으며 터질 듯 붉어진 눈으로 린을 쏘아봤다.
-장의.
-......
-장의!!!
-예, 예.
-내 명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들어오려는 자는 그게 누구든! 베어도 좋다.
거칠게 돌아서는 원에게 린이 다급히 다가선다.
-설명하겠습니다. 제 말을 먼저
-막아.
그대로 나가버리는 원을 따르려 하나 장의가 막아선다. 린은 멀어지는 원을 보며 초조하게 장의의 팔을 잡았다.
-따르게. 어서!
-...송구합니다.
장의가 침울한 낯으로 고갤 숙이자 린은 산을 돌아본다.
-잡아주십시오. 저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멍하니 있던 산은 간절한 음성에 홀린 듯 밖으로 뛰어나간다. 원은 멀리 가지 못했다. 객잔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둠이 내린 길에 홀로 서 있는 등. 산은 입술을 깨물며 조심히 다가서려 했다. 부지불식 따르긴 했는데 정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깨가 흔들리고,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작게 퍼진다. 산은 그 자리에 못박혀 섰다. 산도 저렇게 운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누가 볼까, 누가 들을까 한밤 중 들풀 사이에 앉아 소리죽여 입을 막았었다. 슬픔이 다가 아니었다. 그리움이 다도 아니었다. 스승께도 말하지 못하였으나 그때 산은 ...두려워 울었다. 자꾸 꿈을 꿨다. 꿈에서 어머니 죽인 자들을 갈기갈기 수 백, 수 천 갈래로 찢었다. 두 손에, 얼굴에, 온 몸에 피를 묻히고 소리높여 웃었다. 두려웠다. 그 꿈이 싫지 않은 자신이.. 그리도 두려웠었다.
...왜 그때 생각이 나는지. 산은 눈가를 훔치다 멈칫한다. 어느 새 돌아선 원이 얼룩진 얼굴로 산을 보고 있었다.
-in...g?
린은 왕비가 내민 명단 앞에 고개를 숙인다.
-아닙니다.
-왜. 직접 보지 않고.
-마마를 믿습니다.
저런 얼굴로 저리 말하니 나라도 믿고 싶어지는군. 왕비는 명단을 거두어 서탁에 올린다. 오늘 아침 후라타이가 혼담이 깨진 걸 확인한 후 이 명단에서 단이의 이름을 뺐다. 둘 다 보내버려 수사공과 그 아들놈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릴까도 하였으나 제 집 혼사까지 깨놓은 린의 성의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약조는 지키마. 니 누이가 다시 명단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이야.
-감사드립니다, 마마.
제 이름이 적힌 독로화 명단이 사신단에 건네진 줄 알고도 저리 말하니 왕비도 입이 써진다. 참 오래도 미워하였다. 대놓고 세자위를 탐내는 제 형 대신 욕을 듣고 뺨을 맞고.. 해서 가끔, 아주 가끔은 그리도 생각했었다. 왕족이 아니면 좋았을 것이라고. 고만고만한 가문의 잘난 아들로 태어났으면 세자의 사람으로 두지 않을 이유가 없는 아이라고. ...허니 이 아이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다. 왕비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밖이 소란하더니 이내 문이 벌컥 열린다. 왕비는 굳은 내색 하나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시고 별일입니다, 세자.
린은 흠칫 어깨를 굳히며 옆으로 비껴 선다. 거친 발소리가 린 앞에서 멈췄다.
-이놈이 왜 여기 있는 것입니까.
-아. 내 일을 좀 도우라 하던 참이에요. 사신단 일로 챙길 게 많아서요.
-그 많은 일 중 하나가
원이 린과 마주 선다.
-단이입니까.
몸을 바로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은 민가의 예로도 어긋난 일. 왕비의 미소가 서서히 걷힌다.
-단이가 공녀명단에 있습니까. 해서 린이 여기 있는 것입니까.
-...저하.
-간청을 했겠지요. 애원을 했겠지요. 밤새 엎드려 빌기라도 했겠지요.
상한 입술 끝이 눈에 맺힌다. 원은 입술을 비틀었다.
-참으로 우스운 놈이 아닙니까. 저 때문에 지 형 혼사 깨고 그 때문에 지 누이 끌려가게 생겼는데 이런 얼굴로 제 눈도 못 보고 죄인처럼 서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흘 만에. 이 꼴로. 어마마마께선 믿기십니까.
-저하. 이러지 마십...!!
원이 무릎을 꿇는다. 최내관과 조상궁이 다급히 걸음을 물리고, 왕비는 손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는 짓입니까. 당장 일어나세요.
-단이 공녀명단에서 빼주십시오. 제 벗의 누이이고 제게도 누이나 다름없는 아입니다.
-세자!
린이 원의 옆으로 다급히 꿇어 앉는다.
-일어나라시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형제를 잃었습니다. 저 때문에 명예를 잃었습니다. 저 때문에 집안도 등졌습니다. 저로 인해 누이까지 잃게 할 순 없습니다.
하, 짧은 숨을 토한 왕비가 서탁의 명단을 내민다.
-공녀명단입니다. 보세요.
원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일어나 명단을 편다.
-이제 되었습니까?
어린 나이에 먼 타국으로 시집와 차디찬 시선 속에서 한평생을 보낸 어머니. 화려한 궐에서 가진 거라고는 이 못난 자식 하나뿐이라 혹시라도 잃을까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이 고려 산천초목 전부라도 태워버릴 분인 것을. 허니 명단쯤. 얼마든지. ..이리도 믿음을 드리지 못하는 자식을 위해. 원은 붉어진 눈으로 왕비를 바라본다.
-...이놈. 데려가겠습니다.
왕비는 파르르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뒤돌아선다.
-..린아. 다녀오거라. 네가 가야 믿으시겠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를 취한 원이 나가고. 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인사를 올리고 나가던 린의 발이 잠시 멈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왕비의 어깨가 이상히도 작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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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과 진관, 장의는 긴장된 눈빛을 주고 받는다. 화가 나실 만한 일이기는 하나, 원성전을 벗어나기까지 린을 돌아보지도 않는 원이라니. 영 심상치가 않다. 린 공자라면 화를 낼 때조차 눈을 보지 않고는 못 견뎌하셨는데... ...단이 아가씨 일이 정말 잘못되었나. 셋의 안색이, 특히 진관의 낯빛이 초조하게 흐려질 쯤. 우뚝 멈춰선 원이 굳은 목소리를 낸다.
-장수와 진관은 나를 따르고, 장의.
-예.
-...금과정에 데려다 놔. 내가 갈 때까지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해.
끝까지 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원이 빠르게 멀어진다. 장의는 멀거니 원을 바라보는 린에게 조심히 다가섰다.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그래.
-단이.. 아가씨는..
-단이 일. 저하께서 어찌 아신 건가.
-오는 길에 당후관을 만나셨습니다.
린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한참 멀어진 등을 바라본다. ...어쩌면 다른 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저 등을 떠나지 않고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길. 저 분이 험한 세월을 기어이 이기고 왕이, 좋은 왕이 되실 때까지 곁을 지켜드릴 수 있는 그런 길.
..허나 왕비가 어쩌겠냐 물었을 때. 멀리서 가락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보였다. 다정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손이 스치고 마음이 스치고..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숨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심히 자책하실 분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러니 이 길밖에 없었다 한들 ...저하를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단이 아가씨, 저하께서 꼭 구해내실 겁니다.
그랬을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께 상처입히며. 그 상처를 본인이 배로 받으며. 이런 이기적이고 비겁한 놈 때문에. ...어찌 말해야 할까. 내가 이런 자라고, 해서 저하 곁을 떠나려 한다고 어찌 말씀드려야...
원이 가고 없는 자리를 바라보는 린의 눈이 정처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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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는.
궁처 일각. 하늘을 바라보고 선 송인의 뒤로 무석이 소리없이 나타난다.
-사신관으로 갔습니다.
명단에서 뺐는데도 말이지.. 제 어미를 꽤 잘 알고 있군. 이리 쉬이 넘어갈 분이 아니시지. 명단이 거짓이거나, 진짜라면 분명 댓가가 있었을 터.
-린 공자는 금과정 객잔으로 갔나.
-예.
-계속 살피거라.
더 말이 없음에도 기척이 사라지지 않는다. 송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묻고 싶은 것이 있나 보군.
-...단이 아가씨를 왜 도우려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그 분을 도왔던가.
-공녀로 보내는 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헌데 지금은 막으시려는 듯 하여..
그랬다. 자식을 잃은 아비는 힘이 센 법이니 이참에 수사공까지 끌어들이면 은영백의 재산보다 더 큰 힘이 될 터.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헌데 그 밤 그 자리에서. 아비와 형과 집안을 버릴 각오로 선 그 사내. 인품과 학식이 왕전에 비할 바 아니나 너무 곧기만 하여 쓸 수 없는 칼로 여겼던 린이 처음으로 아쉬워졌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자였던가. 따르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었던가.
송인은 쓰게 웃는다. 놓친 것을 돌아보는 일은 다시 없을 줄 알았건만.
-...효 아가씨를 생각하십니까.
-...그리운.. 이름이구나.
효. 믿었던 정인에게 배신당하고 공녀로 보내진 누이. 2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와 정인이 주었던 팔찌를 같이 묻어달라 끝까지 어리석었던.. 죽은 누이를 부둥켜 안고 울기밖에 못했던 어린 날은 이미 지운지 오래건만. 어쩌면 린의 얼굴로 누이가 스쳤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주고도 버림받은 그 가여운 누이가.. 송인은 문득 허한 웃음을 짓는다. 기일이 가까워 그런가. 쓸데없는 상념이 많아졌다.
-걱정하지 마라. 확인하려는 것뿐이니.
-무엇을.. 말입니까.
그리 다 버릴 수 있는 자를 위해 세자가 어디까지 하는지. 만에 하나 세자도 그리 한다면. 린은 세자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이니... 송인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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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안절부절 원의 주변만 멤돈다. 아무리 세자라도 사신관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순 없으나 이 세자는 그냥 세자가 아니라 황제폐하의 고귀한 혈통이신지라. 게다가 할아버님의 선물에 모자람은 없는지 살피신다는데 그 장한 효심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그 효심이 너무 장해 공물을 건드는 손길이 다소 거칠다 해도 말이다. 사신은 인삼 하나를 집어드는 원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상품 중 상품입니다. 황제폐하께옵서 고려인삼을 즐기셔서 왕비마마께서 특별히
-그래. 할아버님께선 건강하시오?
뭐라 뭐라 열심히 답하나 원의 신경은 온통 명단을 찾고 있는 진관에게 가 있다. 확인해야 한다. 충분히 거짓명단을 보이실 분이며, 무엇보다 린, 그 놈. 그 놈의 눈빛. ..내가 너를 모를까.
-저하!!
명단을 빼앗듯 받아든 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공녀명단이 아니다. 진관은 다급히 명단 끝을 짚었다.
-여길 보십시오.
손끝을 따라가던 원이 숨을 멈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같다.
-...세자저하?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사신이 원을 살피려다 흠칫 물러선다. 누구라도 베어 죽일 눈이다. 수백 년 같은 수 초가 지나고. 원이 명단을 집어던지고 나가자 숨소리도 내지 못하던 사신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집어든다. 독로화 명단 끝에 있는 이름. 수사공의 삼 남, 왕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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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집에 다녀올 수 있을까.
장의가 곤란한 빛을 띤다. 침상에 앉은 린은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댁에 약재를 보내셨으니..
제 말이 변명처럼 들려 장의도 더 말을 잇지 못한다. 린은 흐리게 미소했다.
-되었네. 마음 쓰지 말게.
죄송함을 짧은 목례로 대신하는 장의 뒤로 문이 빼꼼히 열린다.
-저..
산이 눈치를 살피며 베시시 웃자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산은 얼른 발을 들이며 밝게 웃었다.
-내가 만든 건데 이것 좀 맛보시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바라보던 린의 얼굴에 물음표가 달린다. 뒤에서 크게 엑스자를 그려보이는 장의 때문이었다.
-왜...그러나?
산까지 돌아보는 통에 얼른 팔을 내린 장의가 하하 웃으며 바람처럼 그릇을 채든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니 같이 먹으라,
-제가 배가 많이 고파서. 딴 걸 가져오겠으니 잠시만 계십시오.
붙들 새도 없이 나가는 장의에 산이 헛바람을 뱉는다.
-뭐 안 먹이고 일 시켜요?
린도 영문을 모르니 어색하게 웃을 밖에. 산은 아쉬움을 거두고 린의 앞에 앉는다.
-...아가씨는요?
-무사합니다.
-...진짜로?
-예.
-어떻게요? 공녀명단은 왕비마마밖에
-마마께서 빼주셨어요.
-한천, 아니. 저하께서 힘써주신 겁니까?
-...예.
-어후. 정말 다행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린의 눈이 제 일처럼 기뻐하는 산에게 길게 닿는다. 다행이다, 감사하다, 저하 대단하다 한참을 종알거리던 산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얼굴을 더듬었다.
-뭐 묻었습니까?
-...아가씨 참 좋은 분입니다.
-...뭐에요, 뜬금없이.
-저희 형님 때문에 많이 곤란하셨는데도 단이 일 마음 써주시고.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인사는 내가 해야죠. 혼인, 사실 되게 싫었거든요.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뭘요. 공자가 형님도 아닌데.
린은 잠시 혼자 웃는다. 많이 들었던 말이다. 니가 니 형도 아닌데 뭘 만날 죄송해.
-...다 얘기 했어요? 화 많이 내죠?
-..아직 다는 모르십니다.
-그랬겠죠. 반만 듣고도 노발대발 했을.. 아니, 하셨을 테니. 성질..아니 성품이 되게 지라...아니, 과격... .....뭔 말을 못하겠네. 무튼 공자일이라 더 그랬을 거에요. 걱정 많이 한 거 같더라구.
-..만나셨습니까.
-잠깐요. 근데 나도 말씀 못 드렸어요. 공자 당부도 있고 실망할까 겁도 좀 나고, 공자 찾았단 소리 듣자마자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나가셔서.
-......
린의 낯이 묘하게 어두워진다. 잘 풀린 거 같은데 뭐가 더 있나. 저하가 역정을 있는대로 내서 그런가.. 린을 살피던 산은 분위기를 바꾸려 목소리를 밝게 바꿨다.
-근데요.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공짜로 묻긴 좀 그렇고.
허리춤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낸 산이 씨익 웃는다.
-자.
-..술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비상용으로 하나씩? 자아. 한모금해요. 되게 좋은 거에요, 이거.
린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산은 실망한 척 에이-하면서도 빠르게 입구를 열어 홀짝홀짝 술을 넘겼다.
-맛있는데.
-그냥 물으셔도 됩니다.
-그럼 사양않고. 우리 처음 만났을 때요. 나 천한 몸종이었는데 말 놓지 않았잖아요. 그거 왜 그런 거에요?
린은 사이를 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주군께서 마음에 품은 분이시니까요.
-푸흡!!!!
술을 뿜은 산이 아까워할 새도 없이 휘둥그레진다.
-누구. 설마 나요?!
-....모르셨습니까?
산은 어이없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 아니에요! 그 사람은 따로 좋..
...아하는 사람이 그쪽이라고 말할 생각 없다고 했는데. 산은 가까스로 입을 다문다. 하지만 린의 눈을 피하기는 늦은 듯했다.
-따로...요? 아가씨께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하하.. 취, 취했나. 하도 오랜만에 마셔
-누구신지.. 물으면 안 됩니까.
안된다고 하면 더 물을 사람은 아니다. 그냥 더럽게 눈치없다고 여기거나 혹은 부끄러워 거짓을 말한다고 여기거나.. ...근데 이 사람은 눈치라는 게 전혀 없나. 산은 얼마 보지 않고도 알았다. 엄청 남다르다는 거.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거. 그 긴 세월을 이 사람만 바라봤다는 거.
-...왜 나라고 생각했어요?
-...남다르셨습니다. 처음부터.
-공자께.. 더 남다른데.
-벗이라 여겨주십니다. ...외로운 분이라.
산이 본 원은 외롭다고 남다를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외로운 것은 오히려 이 사람 때문인 듯 보였다. 혹 떠나갈까 노심초사하며, 아까워하며... 너무 오래 함께 있어 보지 못하는 것도 있나 보다. 산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양 쪽에게 다 같은 말을 하는 듯하다.
-무튼 난 확실히 아닙니다.
-...혹 저하의 신분 때문에
-신분 때문에 있던 마음이 사라지진 않아요. 없던 마음이 생기지도 않고.
-......
-아니라니까요, 진짜.
대답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영 믿는 눈치가 아니다. 산은 술을 넘기며 린을 살피다 눈을 찌푸렸다. 입술의 상처가 이제야 보인다.
-약 안 발랐어요?
-....예? 아.. 괜찮습니다.
겸연쩍은 미소 위로 원의 말이 겹친다. '아주 답답한 놈이야, 저거.'
-..이 얼굴을 하고 갔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이었겠네.
닳을까 아끼며 보는 사람인데. 산은 한숨을 삼키며 일어난다.
-있어봐요. 약 가져올게요.
-정말 괜찮습니
-아프면 아프다고 해요. 보는 사람 속 그만 상하게.
톡 쏘아붙인 산이 방을 나서 몇 걸음 가다 머리를 긁적인다. 괜히 심란해져 말투가 과했지 싶다. ..저하가 이래서 공자한테 틱틱댔나. 에효. 산이 짧게 숨을 끊고 다시 발을 떼는데.
쾅!!! 안산댁이 뛰어 나올 정도로 세게 문이 열린다. 산이 놀라 굳은 새, 원은 한 발 늦게 나온 장의를 스쳐 린의 방으로 향했다. 기세에 눌린 산이 얼른 뒤를 따랐으나 어느 새 방문 앞에 선 장의가 고개를 젓는다. 산은 불안한 눈으로 방을 건너봤다.
손을 모으고 선 린은 고개를 숙인 채다. 원은 충혈된 눈으로 린을 노려봤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엉망인 것은 제 마음이었다. 나 때문인 것을 아는데, 내몰린 선택이었을 것을 아는데 떠나려 한다는 사실만으로 피가 마르고 열이 치솟는 이 염치 모르는 마음이.. 떠나려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 먼 곳으로. 여기 나를 혼자 두고..
-너..
목소리가 멋대로 떨려 나온다. 원은 꽉 입술을 물었다. 린은 마주잡은 두 손에 힘을 준다.
-..단이 일. ..먼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
짜악!! 말을 맺기도 전에 얼굴이 돌아간다. 다시 입가가 터질 만치 강한 타격이다. 린은 저도 모르게 원을 보다 그대로 굳었다. 악다문 원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좀 놔보라니까요!!! 이봐요!! 안에!! 뭐 하는 건데. 방금 그거 무슨 소린데!!
밖의 소란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린이 아직도 입술을 물고 있는 원을 마주본다.
-피가 나십니다. 그만하십,
-독로화?
난리법석에 삐긋한 장의를 뚫고 들어온 산과 다급히 잡으려던 장의가 멈춰선다. 독로화라니 이게 무슨.. 두 사람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새. 원은 입가를 닦으며 터질 듯 붉어진 눈으로 린을 쏘아봤다.
-장의.
-......
-장의!!!
-예, 예.
-내 명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들어오려는 자는 그게 누구든! 베어도 좋다.
거칠게 돌아서는 원에게 린이 다급히 다가선다.
-설명하겠습니다. 제 말을 먼저
-막아.
그대로 나가버리는 원을 따르려 하나 장의가 막아선다. 린은 멀어지는 원을 보며 초조하게 장의의 팔을 잡았다.
-따르게. 어서!
-...송구합니다.
장의가 침울한 낯으로 고갤 숙이자 린은 산을 돌아본다.
-잡아주십시오. 저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멍하니 있던 산은 간절한 음성에 홀린 듯 밖으로 뛰어나간다. 원은 멀리 가지 못했다. 객잔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둠이 내린 길에 홀로 서 있는 등. 산은 입술을 깨물며 조심히 다가서려 했다. 부지불식 따르긴 했는데 정말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깨가 흔들리고,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억눌린 울음소리가 작게 퍼진다. 산은 그 자리에 못박혀 섰다. 산도 저렇게 운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누가 볼까, 누가 들을까 한밤 중 들풀 사이에 앉아 소리죽여 입을 막았었다. 슬픔이 다가 아니었다. 그리움이 다도 아니었다. 스승께도 말하지 못하였으나 그때 산은 ...두려워 울었다. 자꾸 꿈을 꿨다. 꿈에서 어머니 죽인 자들을 갈기갈기 수 백, 수 천 갈래로 찢었다. 두 손에, 얼굴에, 온 몸에 피를 묻히고 소리높여 웃었다. 두려웠다. 그 꿈이 싫지 않은 자신이.. 그리도 두려웠었다.
...왜 그때 생각이 나는지. 산은 눈가를 훔치다 멈칫한다. 어느 새 돌아선 원이 얼룩진 얼굴로 산을 보고 있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