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짧아졌습니다..


*길


원과 나란히 앉은 산이 지난 밤과 저의 신분, 속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는 동안 원은 검은 하늘만 바라본다. 산은 말을 맺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진작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공자가 그랬을 줄은 몰랐습니다. 송구합니다...

듣고는 있는가 하였던 원이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낸다. 입고리는 올라가 있으나 웃었다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 말 싫어하는데.
-...저 때문입니다..
-그 말도 싫어하고.

다 갈라진 목소리가 허하게 울린다. 산은 붉은 눈을 길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혼인.. 하면 저하께서 많이 곤란해지십니까.
-......
-괜찮으시면 지금이라도 아버님께
-고변하겠다 했다며.
-그건
-하겠다 했으니 할 거야. ...그런 놈이니까.

나 때문에 집안과 제 자신을 송두리째 버릴 각오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놈. 내 옆에서 하루 하루 잃기만 하는 너를 절대 놓을 수 없는 나 때문에... 그러면 니놈은 또 그러겠지. 저하 때문이 아니라고. 나 때문이라고. 그러며 웃고 말겠지...

-곁에 있어줘. 내게 다 말했다 하진 말고.
-..어쩌시려구요.
-신분 속인 건 피차일반이니 비긴 걸로 치자.
-저하.
-...제일 싫어하는 말이네.

몸을 일으키는 원을 따라 산도 급히 일어선다.

-위험한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원은 대답 대신 손가락 두 마디만한 함을 건넨다.

-..뭡니까, 이건?
-간다.

더 잡을 새도 없이 돌아서는 등을 바라보다 함을 연다. 산도 아는 것이다. 넘어지고 엎어질 때마다 비연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발라주던 것. ..정신없이 달려왔을 건데 이건 어찌 챙겼을까. 제 입술 상한 건 신경도 못 쓰고, 제 속 찢긴 것은 아파할 틈도 없이..
산은 함을 꾹 쥐며 고개를 든다. 멀리 작게, 홀로 걸어가는 어깨에 달빛이라도 비치면 좋으련만. 달도 없는 밤이었다.

**

왕비는 붉어진 눈으로 술잔을 기울인다. ...가여운 아이. 못난 어미 탓에 아비 사랑 한 번 못 받고 성장하였다. 항시 어둡던 낯이 린을 만나고부턴 밝아져, 그 환한 얼굴이 좋아 더 일찍 떼어놓지 못하였으니.. 어리석었다. 제 목에 드리워진 칼을 눈감을 만치 깊게 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외로웠으면. 얼마나 사무쳤으면..

-후라타이.
-예, 마마.
-전날 세자가 구해준 아이가 있다 했지.

왕의 의심 때문에 숨 한 번 편히 쉬지 않는  세자가 린 외에 처음 관심을 보인 아이. 신분은 천하나 여인이라 했다.

-알아보겠습니다.

마음을 읽은 답에 왕비가 쓸쓸한 미소를 띄우는데.

-마마. 세자저하 드셨습니다.

사신관에 다녀갔다니 오히려 늦은 셈이다. 왕비는 한숨을 삼키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모시거라.

들어서는 발길은 아까와 같은 기세가 아니나 예를 갖추고 마주보는 눈은 한층 더 검푸르다. 그리고 입술께. 왕비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졌다.

-다치셨습니까.
-......
-약을 가져오거라.
-예, 마
-주위를 물리고 10보 밖에 있으라 명해주십시오.

뒷걸음하던 조상궁이 멈칫 왕비를 살핀다.

-상처가 덧나면 어찌하시려고
-어마마마를 위해 드리는 말입니다. 모두 물려주십시오.

화를 내리라 혹은 부복이라도 하며 몇 날 며칠을 간청하리라 예상했으나.. 꼿꼿이 선 원은 그 어느 때와도 다른 얼굴이다. 이 아이에게 이런 얼굴도 있었던가. 왕비는 낯선 자식을 오래 바라보다 입을 떼었다.

-세자의 말씀대로 하거라.

**

-왕비마마께 아가씨 대신 가겠다 하신 겁니까?
-저하께 정말 말 안 할 생각이었어요? 끝까지 숨기려고 한 거에요?

들리긴 하는지 린은 손에 쥔 함만 보고 있다. 장의와 산은 동시에 한숨을 뱉다가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문득, 장의의 눈이 크게 떠진다.

-저하신 걸 아셨습니까?
-이 판국에 그게 중요해요?

산의 눈짓에 장의가 다시 린을 향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낯이다. 두 개의 한숨이 다시 퍼지고, 산은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보라고 준 게 아니라 바르라고 준 거 같은데.

여전히 미동도 없다. 이러면 저하 외에는 도리없다는 걸 아는 장의는 절레 고개를 젓고 모르는 산은 한 발 다가서는데, 린이 급히 장의를 올려다본다.

-원성전으로 가주게.
-...공자님.
-가서 말을 전해줘. 내가 가겠다 했다고,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고.

장의의 눈빛이 써진다. 저도 못 믿을 말을 저하께서 믿으실리도 없거니와.

-독로화 가라고 등 떠밀라고. 여기 그거 해줄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장의의 맘이 산의 말이다.

-..일단 있어요. 저하께서도 생각이 있으
-저하껜 어머님이십니다. 저 때문에 괜한 오해를 하시게 둘 순 없어요.

그 말도 싫어하고.
..왜 싫어하는지 알 만하네. 산의 어투에 화가 서린다.

-그래요. 공자 때문이야. 그러니 약이나 바르라구, 좀.

너덜너덜해진 당신 저하가 기어이 건네준 마음이니. 산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킨다. 다시 고갤 숙이는 이 사내도 충분히 아파보여고 원 또한 바라지 않을 것이니... ..이래서 벗을 잘 사겨야 하는 게지. 속상함을 못 이기고 외로 몸을 트는 산의 옆에서 장의가 조심스레 린에게 다가섰다. 그런데.

-고, 공자님!!

옆으로 쓰러진 얼굴에 진땀이 배어있다. 산도 놀라 어깨를 흔들어보지만 눈두덩이만 파르르 떨린다. 이마를 짚어보고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장의의 뒤에서 산은 급한대로 품에서 아무거나 꺼내 땀을 닦다 멈칫, 손을 멈췄다.
가리개였다. 채련회 때 원이 준... ...어쩌면 평생 가리개를 쓰고 살아가는 분이 아닌가. 산은 꾹 입술을 물었다. 수놓아진 푸른 새가 구슬피 우는 듯했다.
 
**

왕비는 굳은 채 말이 없다.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저 귀한 아이가, 내 아이가 무릎을 꿇고 앉아 대체 지금 뭐라 한 것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의자를 짚고 선  왕비가 한 발, 한 발 쓰러질듯 휘청이며 원의 앞으로 선다. 한 번 피하지도 않는 자식의 눈이,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워 한없이 보고만 싶던 아이의 눈이, 이토록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뭐라..하셨습니까?

무릎 위에 올려진 원의 손등에 퍼런 힘줄이 돋는다. 못할 짓인 걸 안다. 이 못난 자식을 세상 전부로 아는 어머니께 이보다 더한 패륜이 없을 것도 안다. ..허나 언젠간 또 반복될 일임 역시 알고 있다. 공녀는 언제든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이번이 아니면 다음, 어쩌면 공녀보다 더한 것으로. 어쩌면 단이 뿐 아니라 린의 집안 모두를. 린이 내 곁에서 떠날 때까지.
..그렇게 정말 다 잃으면, 모두 잃은 린을, 그때도 지금처럼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던 양 꾸미며, 결코 놓을 수 없다고... 그럴 자신까진 없었다. 그렇게까지는, 아무리 원이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놓아주면 될 텐데. 그게 가능하면 이처럼 어머님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은 없었을 텐데... 원의 미소가 씁쓸히 떨어진다.

-..송구합니다.

이 또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고개 숙이지 마라, 사과하지 마라, 그 누구에게도, 그게 설령 낳아준 아비, 이 나라의 왕일지라도. ..그리 키웠다. 그리 귀하게 왕으로 키운 아이다. 왕비의 눈이 붉게 갈라진다.

-그 놈이 부탁했습니까? 어떻게든 빼내 달라고? 제가 제 발로 청한 자리를 세자의 입을 더럽히고서라도 빠져 나가보겠다고? 해서 어미에게 이런 거짓을
-거짓이 아닙니다.
-하. 내 그 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진작 알아봤어요. 그놈이 그리 순진한 얼굴로 세상 없을 신하인양 세자의 곁을 멤돌 때 진작
-틀리셨습니다.

원의 음성이 차갑게 굳어진다.

-린은 소자에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차라리 뭐라도 달라하면 편할 것인데 지 누이를 구해달란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 놈입니다. 그런 놈을 제게서 앗아가려 하신 겁니다.

왕비는 다급히 원의 앞에 앉는다.

-세자께서 잘못 아셨어요.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겝니다.

'뭐 어때. 잘못 아닌데.'
원은 충혈된 눈을 감았다 뜬다.

-린을 명단에서 빼주십시오. 단이도, 그 집안도 안 됩니다.
-세자.
-제게서 기어이 린을 뺏으신다면 말씀드린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세자!
-온 나라에 방을 붙일 것입니다. 아니. 아바마마 앞에서, 대신들 앞에서 지금 드린 말을 그대로 고할 것입니다.
-그만하지 못!!
-고려의 세자인 제가 사내인 왕린을

상처난 입술이 무겁게 움직인다.

-은애한다고.

끝내 주저앉는 어미를 차마 다 보지 못하는 눈망울이 소리없이 떨렸다.



-드문드문 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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